사물의 질서

25. 몇 년 동안은 그런 식으로 보냈다. 돈을 별로 쓰지 않고 살면서 쉬지 않고 책을 읽었다. 수학이나 화학, 물리학, 지리학 등의 대학교재로 독학을 시작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기억을 돕기 위해 노트를 하는 습관이 생겼다. 나는 그림을 그리듯 글을 쓰는 일에 열중했고, 제대로 된 형용사를 찾는 데 시간을 아끼지 않았다.

27. Hope : Despair and misery are static factors. The dynamism of an uprising flows from hope and pride. Not actual suffering but the hope of better things incites people to revolt.

절망과 고통은 정태적인 요소이다. 상승의 동력은 희망과 긍지에서 나온다. 인간들로 하여금 반항하게 하는 것은 현실의 고통이 아니라 보다 나은 것들에 대한 희구이다.

30. 점심을 먹으려고 앉아서 돈을 셀 때 나는 깊은 회의를 느꼈다. 그것은 내가 결코 느껴본 적이 없던 수치심이었다. 내가 스스럼없이 거짓말을 할 수 있고, 물건을 팔기 위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다는 것에 놀랐다. 내 경우에 장사는 타락의 근원임이 분명했다. 장사를 위해서는 거리에서 사람을 죽일 수도 있을 터였다. 나는 타락의 소지가 다분했고, 따라서 유혹에 넘어가지 않는 방법을 배워야 했다.

33. 샤피로는 나에게 르낭(Renan)의 󰡔이스라엘 민족사󰡕를 읽어보라고 권했다. 5권으로 된 그 책은 구하기 어려웠는데, 마침 샤피로의 서고에 그 책이 있었다. 요즈음에는 르낭의 󰡔이스라엘 민족사󰡕를 읽는 사람이 거의 없다. 역사가로서의 르낭은 그리 높은 평가를 받지는 못한다. 그는 지나치게 심리학적으로 해석한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사실 르낭의 󰡔이스라엘 민족사󰡕는 인간의 조건에 빛나는 주석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의 영혼에 대한 그의 열정적인 몰두는 그로 하여금 좋은 예언가가 될 수 있게 해 주었다. 그의 성찰은 시대를 뛰어넘어 우리 시대의 상황을 현대의 최고 사상가보다 더 정확하게 조명해 준다.

36. 그 즈음에 내 마음을 사로잡고 있던 책이 있었는데, 그것은 󰡔구약성서󰡕였다. 󰡔구약성서󰡕를 알고는 있었다. 그러나 주요 인물들의 이름과 몇몇 이야기들에만 익숙했을 뿐 한 문장도 읽은 적이 없었다. 아마도 선천적으로 종교적 감성이 결여되어 있었기 때문인 것 같은데, 한편으로 모든 종교의 원천으로 알고 있었던 그 책을 손에 잡을 만한 호기심이 없던 탓도 한몫을 했다. 그런데 이제 새로운 종류의 호기심이 구약을 읽어보라고 나를 유혹했다. 청년들이 자신들의 근육을 의식하면서 역도나 레슬링으로 자신의 힘을 시험해 보고 싶듯이, 정신이 성숙했다는 의식이 전에는 시도해 보지 않았던 과제 속으로 나를 몰고가게 했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끈기로 무장을 하고 지루하고 가혹할 수밖에 없는 황야를 기꺼이 통과해 보기로 했다. 그러나 첫 구절을 읽는 순간부터 급습해 오는 감동의 격류에 무방비 상태로 휘말려들었다. 장엄하고, 생생하고, 신선한 그 지각! 소박하고 옹색하지만, 대담하게 모든 것을 감싸안으며 진지한 호기심으로 고동치는 그 원초적 정신성은 거대한 과학적 개념의 직접성과 정확성 그리고 투과성을 지닌 나의 상상력에 불을 지폈다. 균형과 질서를 향한 그 열정! 그 대담한 정신은 지식도 도구도 없이 무수한 자연 현상들의 카오스를 장악하고, 그것들을 하나의 패턴으로 서로 연관시키고, 조직하고, 배열하기 시작한다. 과학적 정신이 별들의 움직임과 눈먼 지렁이의 동작 하나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듯이, 원초적 정신은 하늘과 바다, 해, 달, 별, 사랑, 죽음, 해산의 고통, 뱀의 포복, 인간과 뱀의 적대, 노동의 필요성, 잡초와 가시의 존재, 유목민과 농경민의 적대, 무지개, 언어들의 무수함 등의 원인과 이유를 찾아 나선다. 언어들이 무수히 많은 것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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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들지 않는 상상력은 거칠 것 없는 경이로운 도구로서 인간 경험의 방대한 정수에 자양분을 제공한다. 󰡔구약성서󰡕의 모든 구절에서는 생명의 힘이 요동친다. 어느 누구도 따라갈 수 없는 이야기꾼들의 상상력이 갖는 진지한 창조성은 그들의 관찰력을 자극한다. 그들의 주의력 앞에서는 어떤 것도 사소하게 그냥 지나쳐 갈 수가 없다. 동기와 행위, 의상, 관습 등 수많은 세세한 것들이 대단히 생생하게 묘사된다. 어디에나 일상적 현실에 대한 애정이 배어 있다. 선은 악과 함께 받아들여진다. 완벽함이라는 가식적인 모습을 빌려주며 마무리를 짓는 법이 없다. 위대한 인물들도 과오를 저지르는데, 그런 것도 성취나 미덕과 마찬가지로 생생하고 자세하게 기록된다. 그들 이야기꾼의 상상에서 나온 진실은 진실 자체보다 더 생생하게 살아있고, 더 진실하다.
인간의 생명을 있는 대로 모두 받아들이고 생명의 강인한 본질에 몰두하는 사회는 감상으로 흐르지 않는다. 과부와 고아를 괴롭히지 말고, 낯선 이를 구박하지 말고, 가난한 자와 도움이 필요한 자에게 박정하게 대하지 말라는 훈계에는 싸움이 나면 가난한 자를 편들지 말라는 냉정한 충고가 곁들여진다.
눈앞의 현세에 골몰했기 때문에 고대 유대인들은 내세에 대한 생각이 없었다. 어떤 은총도 지상의 생을 능가하지 못했다. 최고의 보상은 수명의 연장이었다. 미래의 생에 관한 이야기는 한 마디도 나오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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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성서󰡕에 등장하는 인물들 중에서 생명의 숨결을 지니지 않은 이는 하나도 없다. 왕과 성직자, 재판관, 조언자, 병사, 농부, 노동자, 상인, 수행자, 예언가, 마녀, 점술가, 광인, 나병환자 등으로 넘쳐나는 이 생생한 주인공들의 수를 어느 누가 셀 수 있을까? 일찍이 이처럼 방대한 삶의 파노라마를 엮어낸 문학이 있었던가? 여기저기서 잠깐씩 거론되는 인물들도 모두 살아 움직이고, 우리는 그들에게서 친근감을 느낄 수 있다.
유태인이 어느 누구도 따를 수 없는 세계 최초의 이야기군이라는 사실에서, 탁월한 선구자로서 그리고 과학과 사회 문제의 이론가로서 그들의 현재 역할이 설명될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진실을 상상해 내고 미지의 세상을 눈앞에 보여주는 능력은 미지의 것을 탐험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52. 그것들은 부부 싸움을 하는 날을 골라 잘못 찾아온 친구와 같았다.

55. happiness : To believe that if we could but have this or that we would be happy is to suppress the realization that the cause of our unhappiness is in our inadequate and blemished selves. Excessive desire is thus a means of suppressing our sense of worthlessness.

이런저런 것만 있으면 행복해질 것이라고 믿는 것은 불행의 원인이 불완전하고 오염된 자아에 있다는 인식을 억누르는 것이 된다. 따라서 과도한 욕망은 자신이 무가치하다는 느낌을 억누르는 수단이 된다.

57. ‘나는 도시에서 도시로 이어지는 길로 나서야만 한다. 도시마다 낯설고 새로운 것이다. 도시마다 자기 도시가 최고라며 나에게 기회를 잡으라고 할 것이다. 나는 그 기회들을 하나도 놓치지 않은 것이며, 결코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62. 자기 기만이 없다면 희망은 존재할 수 없지만, 용기는 이성적이고 사물을 있는 그대로를 본다. 희망은 소멸할 수 있지만 용기는 호흡이 길다. 희망이 분출될 때는 어려운 일을 시작하는 것이 쉽지만 그것을 마무리하는 데에는 용기가 필요하다. 전쟁을 이기고, 대륙을 제압하고, 나라를 세우는 데에는 용기가 필요하다. 희망 없는 상황에서 용기가 힘을 발휘할 수 있게 해 줄 때 인간은 최고조에 달할 수 있다.

69. Children : One might equate growing up with a mistrust of words. A mature person trusts his eyes more than his ears. Irrationality often manifests itself in upholding the word against the evidence of the eyes. Children, savages, and true believers remember far less what they have seen than what they have heard.

성장 과정을 말에 대해 불신하게 되는 과정과 동일시하는 이도 있을 것이다. 성숙한 이는 자신의 귀보다는 눈을 더 신뢰한다. 눈의 명료함보다 말을 더 믿는 데에서 비합리성이 나타난다. 어린아이와 미개인 그리고 맹신자들은 그들이 보아온 것보다는 들어왔던 것들을 더 잘 기억한다.

77. 떠돌이와 개척자 사이에 그런 친족적인 유사성이 있다는 사실은 내 마음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그 후 몇 년 동안 떠돌이나 개척자를 서로 연관짓지 않고 표면적으로 관찰해 왔던 내용과 그런 사실이 내 머리 속에 뒤엉켜 있었다. 그로 인해 나는 그 때까지는 아무 관심도 갖지 않았던 주제들에 대해 깊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나는 인간이 유례 없는 존재라는 근본적인 문제에 부딪쳤다. 다른 형태의 생명들을 지배하는 패턴과는 대조적으로 인간이라는 종의 경우 약자가 살아남을 뿐 아니라 강자를 이길 때도 있다. “주님은 힘센 자를 멸하기 위해 세상의 약한 것들을 선택했다”는 바울로의 과장된 말에는 냉정한 현실주의가 존재한다.

41. freedom : To some, freedom means the opportunity to do what they want to do; to most it means not to do what they do not want to do. It is perhaps true that those who can grow will feel free under any condition.

자유란 일부에게는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의미하지만, 대부분에게는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성장할 수 있는 사람은 어떠한 조건에서도 자유를 느낀다는 것은 아마 진실일 것이다.
57. 여성은 남성에게 부족한 속성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심혼의 주된 샘으로서 여성의 예감능력과 개인적인 감정이다. 남성의 감정은 대개 개인적으로 덜 연계된 객관적 감정에 속한다. 30)

59. 여성의 심리학은 맺는 자이자 푸는 자인 위대한 애로스의 원리에 근거하고 있다. 이에 반해서 남성에게는 로고스가 가장 높은 원리라고 생각되어왔다. 우리는 현대적 언어로 에로스의 개념을 심적(心的) 관계, 로고스를 사실에 대한 관심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34)

61. 남성 속의 여성성과 여성 속의 남성성은 의식화되기 전에는 열등한 상태에 있게 마련이다. 근대에 이르러 남성과 여성이 상대방의 장점보다 열등한 부분을 발견하게 된 것은 유감이지만, 열등한 것도 인격의 전체상에 포함되는 것이다.
인격의 전체상에는 그림자가 속하게 마련이다. 강한 것에는 약한 것이 있을 수 있고, 영리함에는 어딘가 어리석은 것이 있다.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믿을 만한 것이 못 되고 가면이나 허세에 불과하다. 40)

오늘날 여성은 오직 사랑만이 그녀에게 더 완전한 모습을 부여한다는 것을 더 절실히 알게 되었다. 그와 마찬가지로 남성은 정신(Geist)만이 그의 삶에 최고의 의미를 부여함을 어렴풋이 짐작하기 시작했다. 둘은 근본적으로 서로의 심적 관계를 추구하고 있다. 왜냐하면 정신의 사랑과 사랑의 정신은 완성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