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물의 질서

집단성에 의해 그어진 상처가 쉽게 아물지 않고
여전히 진물의 흔적이 가시지 않은 가을밤,
이 글을 보고, 많은 위로를 얻다.

강금실(康錦實·47) 법무장관을 처음 본 것이 대략 10년 전이다. 문화판 사람들의 모임이었는데, 처음 보는 사람이어서 그 자리의 좌장격인 분에게 누구시냐고 물었더니, “살풀이춤 추는 사람”이라고 했다. 나는 그 자리가 끝날 때까지 그냥 국악 계통에서 일하는 사람이거니 생각했다.

그는 말이 거의 없었고, 남들의 얘기를 열심히 듣는 편이었다. 간혹 말을 할 때도 분위기가 정말 살풀이춤 추는 사람 같은 느낌을 주었다. 그 자리가 파할 때까지 그가 변호사라는 사실을 나는 몰랐다.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변호사라는 직업은 내게 구체적인 것에 대한 관심과 약간은 논쟁적인 어투를 연상시켰다.

그는 목소리부터 ‘논’(論)을 펼치기에는 가늘고 뜨겁고 습했다. 처연하게 깊은 사연을 읊조리면 어울릴 것처럼 보였다. 대화의 주제도 대개는 가까이 있는 사물보다 멀리 있는 이미지나 관념에 조준돼 있었다. 그런데, 변호사? 변호사라니!

이런 불균형 때문에 그는 질문하고 싶게 만든다. 저 사람은 무슨 생각을 하고 살까. 이런 경우 저 사람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이런 저런 자리에서 얘기를 많이 나누게 되면서, 나는 그가 사람을 참 심심하지 않게 만드는 재주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별로 수다를 떨지 않아도 그는 사람을 대화에 집중시키는 묘한 능력이 있다. 그것은 그가 빈말을 거의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두 가지 유형의 얘기는 절대 안 한다. 첫째는, 자기 일 얘기를 먼저 꺼내는 법이 없다. 물으면 마지못해 “오늘 저녁에 민변 모임이 있다”고 말하지, “민변에서 국가보안법 폐지 관련 모임이 있는데 발제해야 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또 하나, 그가 꺼리는 것은 자리에 없는 사람 얘기를 하는 것이다. 그는 비난이든 칭찬이든 남의 말을 꺼내면 무심하게 듣고 있다 길어지면 “인생 짧은데 남 말 하고 살 필요 있느냐”며 핀잔을 주기도 한다. 나는 나중에야 남달라 보이던 그의 대화 습관이 하나의 지향을 갖고 있음을 알게 됐다. 그가 자주 쓰는 표현을 빌리자면 “밀도”에 대한 집착이다.

창가의 겨울 햇빛 같은 女子

‘밀도’를 중시한다는 것은 결국 사람 자체에 대한 관심이 많다는 얘기다. 사람 사이를 매개하는 격(格)과 식(式)에 도착돼 있는 저밀도의 상태를 심심해하는 체질. 예술 작품을 감상할 때도 그의 상상력은 문체와 미장센(연출) 너머의 인물에 대한 호기심으로 곧잘 발전한다.

‘이런 문체를 가진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저 영화감독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할까.’

이런 식으로 그는 상상 속에서 한동안 르 끌레지오를 만나고, 기형도를 떠나보내고, 혼자 연애하기를 수십 회. 급기야 요즘은 오래 전 고인이 된 예수님과 문무왕까지 호명하기 시작했다.

누군가는 이것을 “소녀 취향”이라고 표현했다. 확실히 그가 사람을 대하는 태도에는 소녀적인 순정이 있다. 그런데, 문제는 그가 소녀들이 좋아하는 인물에는 별로 관심이 없다는 것이다.

언젠가 철학을 하는 지인 한 분이 “온화한 열정”이라는 표현으로 그를 요약했다. 한 소설가는 ‘햇볕에 데워진 냇가의 조약돌 같다’고 했다. 또 다른 누군가는 ‘창가의 겨울 햇빛’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 어떤 말이든 그가 동파된 수도꼭지처럼 사방으로 침을 튀기거나 기차 화통처럼 요란하게 열을 뿜어내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내가 보기에도 그는 선천적으로 에너지가 넘치는 사람이라기보다 평범한 에너지를 돋보기처럼 하나의 초점에 집중시키는 쪽이다.

그 초점은 언제나 미세한 경계에 맞춰져 있다. 그는 격식을 싫어하지만 격식 자체를 싫어하는 아나키즘적 캐릭터는 아니다. 그는 격식이 위계를 구분짓는 권력의 확인 과정으로 동원되는 그 사용 맥락을 싫어할 뿐, 인간관계에서 격식이 갖는 효용을 무시하지 않는다.

말하자면, 그는 위장과 화장을 구분하는 데 초점을 맞춘다. 화장을 빙자한 위장이 만연한 위선적 문화에서 이런 구분에 대한 열정은 언제나 저주받은 회색이 되기 쉽다. 그래도 그는 개의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장관에 취임하기 1년 전쯤, 평소 친한 소설가가 신촌에 카페를 개업해 인사차 함께 간 적이 있었다. 대개 이런 경우 적당히 술을 팔아 주고 덕담을 하는 것이 보통이지만, 그는 신촌 로터리에서 차를 세워 꽃집에 들렀다. 나는 그냥 가도 된다고 우겼지만, 그는 기어코 노란 장미 한 다발을 사 갖고 왔다.

그리고 1년 뒤에 TV에서 법무장관에 임명됐다는 뉴스를 통해 소식을 접할 수 있었다. 주변 사람들은 대개 놀라워했고, 조금은 걱정도 한 듯하다. 전혀 정치적이지 않은데 어떻게 그 자리를 견딜까 하고…. 나는 한편으로는 호기심도 조금은 있었던 것 같다. 저런 캐릭터의 사람은 그 자리에 가면 어떻게 행동하고 어떻게 변할까 하고 말이다. 그런 호기심 때문에 이 인터뷰를 하게 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10개월 사이 그는 대중적 인기인이 됐고, 뉴스메이커가 됐다. 파격적이라고 말하는 행동양식들이 그래도 대중들에게는 호의적으로 보이는 모양이었다. 강효리, 강효리라고 하지 않는가. 그는 참 이상한 스타이고, 그를 지켜보는 대중들도 특이한 관중이다.
스타가 한 시대의 대중적 욕망을 대변하는 기호라면, 아마도 우리 사회에서 미처 수면으로 떠오르지 않았던 어떤 힘들이 그를 통해 분출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강효리라는 별명 전혀 불쾌하지 않아요”

인터뷰는 지난해 12월3일 저녁 6시부터 10시까지 강장관의 서울 삼성동 자택에서 진행됐다. 실내는 단순하게 필요한 가구만 제 자리에 놓여 있었다. 벽 여기저기에 걸린 초현실주의 풍의 그림들이 눈에 확 들어왔다. 서가에 빼곡히 꽂힌 책들이 주로 무거운 사상서적들이라는 것도 인상적이었다.

그는 업무에 시달린 탓인지 다소 피곤해 보였지만, 장시간의 인터뷰에도 지치지 않고 대답해 주었다. 그리고 다소 껄끄러운 질문도 별 주저 없이 유머를 섞어 가면서 되도록이면 직설적으로 말했다.

― 요즘 팬클럽도 생기고 지난번 서울대 강의에서는 사인 공세를 받는 등 인기가 절정입니다. 공직에 나가기 전에도 주변 사람들에게 인기가 많았다고 들었습니다. 인기 비결이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글쎄요. 인기의 비결이 뭘까요? 저도 왜 그런지 잘 모르겠어요. 긴장 안 해서? 무장해제하고 있어서? 그것은 사실 제가 물어봐야 하는 질문 아닌가요?”

― 최근 언론에서 강효리라는 별명을 사용해 불쾌한 감정을 표시했다고 신문에서 봤습니다. 아마도, 이효리의 인기를 빗대어 그런 것 같은데, 굳이 불쾌해할 이유가 있습니까. 연예인에 비유한 것 자체가 혹시 마음에 안 드셨는가요?

“그 이야기는 상당히 와전됐어요. 저는 전혀 불쾌하지 않아요. 이름 자체도 강금실보다 강효리가 더 마음에 들고…. 젊고 아름다운 스타에 비유되는 것이 불쾌할 이유가 없지요. 오히려 영광 아닌가요? 공보관이 종합 일간지에서 법무부 장관의 이름을 제목에서 강효리라는 별명으로 표현하는 것이 부적절한 것이 아니냐는 공식 입장을 밝힌 것이 그런 식으로 전달된 것이죠.

검사장 간담회 같은 공식 일정을 강효리가 했다고 표현하는 것은 온당치 않죠. 그것도 본문 정도면 이해되는데, 제목에서 그렇게 표현한 것은 적절하지 못했다고 봐요. 제 개인적으로는 뭐라고 불리든 별로 신경을 안 써요. 인기가 있는지 없는지도 피부로 체감이 잘 안 되고, 멀리서 일어나는 어떤 일을 구경하는 느낌이 들어요.

‘굳세어라, 금순아’라고 불러도 마찬가지일 것 같고. 원래 그런 데 대해서는 상당히 무감각해요. …그런데, 연예계에는 관심이 좀 있었죠. 장관 하기 전에는 스포츠 신문 보는 것을 좋아했는데, 요즘은 바빠서 신문도 스크랩해 주는 것만 봐요. 그러니 신곡을 개발하지 못해 회식 자리에서 맨날 김광석 아니면 김추자만 부르죠.”

― 강장관 님의 인기에는 여성적 외모나 행동양식도 한몫 한다고 생각합니다. 요즘은 영상시대여서 외모도 상당히 중요하다고들 합니다. 사람을 볼 때 외모를 많이 보시는 편인가요?

“외모를 보는 편은 아니고요. 주로 느낌을 읽는 편이죠. 잘 생긴 이목구비에는 별로 관심이 없어요. 그냥 사람이 풍기는 전체적 느낌을 읽어요. 책에서 문체를 느끼거나 그림에서 어떤 화풍을 느끼듯 사람도 그런 것이 있어요. 지금 나이가 되니 사람이 살아온 과거의 경험이 외모를 통해 드러난다는 것을 알게 되더라고요.

“나는 무대 체질은 아니다”

저는 눈빛하고 목소리를 주로 많이 봐요. 말버릇 같은 것도 무의식적으로 인격을 드러내는 부분이고요. 맑은 사람은 눈빛이 곧아서 사물을 쳐다볼 때 똑바로 쳐다봐요. 목소리는 한 마디로 표현하기 어려운데, 말투나 말꼬리 흐리는 대목, 그런 것을 보면 그 사람을 짐작할 수 있어요.

사람들은 대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이 원하는 얘기를, 자신이 살아온 방식대로 하는 것 같아요. 정치에 관심이 있는 사람은 술자리에서도 어느 한순간 정치 얘기를 꺼내요. 얘기가 무르익으면 자신의 말버릇이 나오죠. 제가 좋아하는 사람은 맑은 사람들이에요. 영혼이 맑은 느낌을 주는 사람들….”

― 사인 공세를 받으면 기분이 어떤가요? 스스로 스타 기질이 있다고 보십니까.

“왜 해 달라고 하는지 잘 모르겠는데…. 열심히 해 줘요. 사람들이 즐거워하면 못 해 줄 것이 뭐 있겠어요? 저는 별로 잃어버리는 것이 없는데 남이 즐거워하면 좋잖아요? 스타 기질이 뭔지는 모르겠고, 그냥 선천적으로 무대 체질은 아닌 것 같아요. 초등학교 때 무대에서 떨어진 경험이 있어서 약간은 무대 공포증도 있는 것 같고….

6학년 때 상 받으러 단상에 올라갔다가 내려올 때 굴러 떨어졌는데, 전교생이 다 박장대소하던 기억이 아직도 선명해요. 그 이후로는 무대에 올라갈 때마다 그 생각이 났는데…. 왜 지금 이렇게 인생이 반전됐는지 나도 이해가 안 돼요. 사람하고 폭넓게 교제하고 그런 것은 로펌 대표할 때밖에 없어요. 그때는 하기 싫어도 업무상 해야 하니까 한 것이죠. 솔직히, 제가 공식적인 세계에 관심이 별로 없었어요.

신문을 읽어도 문화면과 만화만 열심히 보고, 정치면은 대충 이슈가 있을 때 훑어보는 정도였어요. 장관에 임용됐을 때도 노대통령의 측근이 누구인지도 자세히 모르는 상태였거든요. 문재인 수석만 변호사였으니 아는 정도였고, …그래요.”

― 지난번 국회에서 차도까지 걸어가시는 것을 봤다고 누가 그러던데요. 차편을 이용하지 않는 특별한 이유라도 있습니까.

“운동 삼아 가능하면 많이 걸어 다니려고 해요. 하루에 20분씩 걷거나, 훌라후프라도 하려고 하죠. 요즘 회식 약속이 많아 많이 먹고, 신경은 늘 곤두서 있고, 운동은 안 하고… 그런 상태죠. 체중도 늘고 피로감도 심하고 해서 체력 관리를 위해 운동을 하려고 해요.

오늘도 총리공관에서 경복궁역까지 20분 걸었어요. 걷고 있는 시간만은 구경에 정신을 빼앗기니 휴식이 되거든요. 저는 원래 걷는 속도로 사물을 구경하는 것을 좋아해요. 천천히 걷는 속도에서 보는 사물이 가장 아름답거든요. 오늘도 삼청동길을 걸어 나오는데 눈길 끄는 가게도 많고 갤러리도 아름답고 그렇더군요. 가방 파는 가게에서 낙엽을 수북이 쌓아 가방을 전시해 놓은 곳이 있어 한참이나 쳐다보고 있었어요.”

― 직무 이외의 시간은 어떻게 보내십니까. 문화생활에 관심이 많으셨는데, 요즘은 바쁜 와중에 어떻게 문화생활을 하시는지요? 그리고, 평소 어떤 장르에 특별히 관심이 많으셨는지….”

“요즘은 일정이 불규칙해서 문화생활을 거의 못 하죠. 맥주나 와인 한잔 마시고 쉬는 것이 전부죠. 체력이 달려 술도 못 마시겠어요. 문화예술은 특별히 장르를 가리지는 않아요. 대신 취향이 좀 강한 편이죠. 음악도 그렇고 글도 그렇고 맞는 것만 편식하는 편이죠. 어떤 장르든 예술 작품을 대할 때 작품에 있는 어떤 것을 내 안으로 끌어오기보다 내 안에 있는 것을 작품에서 찾아가는 방식으로 대해요. 다른 사람들도 그렇겠죠? 그러니 취향이라는 것이 생기는 것 아니겠어요?”

“극한체험에 대한 유혹 때문에 법무장관 맡았다”

― 구체적으로 그 취향이 어떠신지 궁금한데요. 최근에 인상적인 작품으로는 어떤 것이 있었는지요?

“빽빽하게 밀도가 높은 것이 좋죠. 최근 김기덕 감독의 ‘섬’이라는 영화가 참 좋았어요. 뭔가 치열하고 진실에 접근하는 것 같은 인상을 받았어요. 그런 치열함은 관객에게 불편함을 줄 수도 있겠죠. 사회적 권력관계로 엉킨 공간에서 그런 것을 걷어내 버리면 각질을 벗겨낼 때처럼 아프지 않겠어요?”

― 사람들이 승무 실력에 대해 관심이 많습니다. 요즘도 춤을 추시는지요? 그리고, 전통춤의 어떤 면이 좋아서 배우셨는지, 그것도 어떤 행위의 밀도하고 관계가 있습니까.

“춤은 그냥 추고 싶어서 배웠죠. 승무문화재이던 한영숙 선생 제자한테 배웠어요. 1985년부터 88년까지 부산에서 근무할 때 김수악 선생에게 살풀이하고 궂거리 춤도 배웠고요. 원래 춤 추는 것을 좋아해서 막춤도 추고 그래요. 전통춤을 좋아하게 된 것은 정신이 깊이 몰입되지 않으면 안 되는 춤이어서 거기에 끌렸어요. 오래 추면 호흡도 깊어지고 명상하는 것과 비슷한 상태가 돼요. 몰입이라기보다 정확하게 모든 것을 잊고 빠져야 하는 춤이죠. ”

― 법무장관에 임용됐을 때 다들 의외의 인사라고 놀라는 분위기였습니다. 젊은 여성이 권력관계가 복잡하게 얽힌 법무장관이라는 자리에 간다는 사실 자체가 낯설었던 모양입니다. 장관직을 맡은 지 10개월 정도 지났는데, 장관직에 대한 소감이 어떠신지요?

“법무장관직은 제가 살아오면서 한 일 중 가장 격무였어요. 신경 써야 할 것이 너무 많아 새벽부터 밤까지 머리에서 일을 놓아버릴 수 없어요. 특히, 한 번에 여러 가지 생각을 동시에 해야 하는 것이 가장 힘들어요. 원래 게으른 사람인데, 갑자기 나의 한계 이상을 요구하는 자리죠. 그런데, 이 자리가 저랑 딱 맞는 것도 있어요. 장관은 글을 안 쓰고 말만 하면 되잖아요? 판결문이나 변론 안 써도 되잖아요?”

― 법무장관 자리가 원래 권력관계가 복잡하고, 특히 이번 정권은 개혁이라는 과제를 안고 출범해 어려운 자리라는 것은 예측됐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평소 본인이 원하던 삶의 방향도 아닌데, 굳이 법무장관 제의를 받았을 때 응한 이유랄까, 개인적 동기는 어떤 것이었는지 궁금한데요. 사회에 대한 개혁의지 때문인가요?

“원론적 이유는 법 전공자이니 법무부 장관 자리도 전문가 영역 안에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어요. 그런데 그때 상황은 주변에서 다 반대하고 대통령만 지원하는 상태여서 그만큼 힘들 수밖에 없는 자리였죠. 그런데 왜 갔느냐? 이런 것이 기사화되면 좋을지 모르겠는데, 나 자신을 던지고 싶은 심리, 어떤 극한체험의 유혹 같은 것이 있었어요.

고민이 많이 됐는데, 어떤 직관적 느낌이 등 뒤에서 가라고 떼밀었어요. 왜 이런 거 있죠? 미지의 땅을 밟을 때 원시인들이 가장 공포를 느끼는데, 그 공포에도 불구하고 등을 떼미는 유혹 때문에 발걸음을 옮겨 버리는 것, 그런 것이랑 비슷해요.

처음에는 엄두가 안 나고 자신없고, 마음 밑바닥에 있는 모든 것들이 고민과 근심으로 한꺼번에 올라왔어요. 어떻게 낙마할지 모르기 때문에 죽으러 가는 심정이었는데 어떤 직관이 가라고 등을 밀었어요. 자기를 다 던지고 가는 어떤 체험에 대한 열망 같은 것이 있지 않았나 싶은데…. 그런데 막상 와 보니, 처음에만 일기도 못 쓸 정도의 긴장의 연속이었지, 좀 지나 익숙해지니 그 이전의 나로 다시 돌아와 있어요.

다시 같은 문제로 고민하고, 같은 기억과 관계 속에 있고…. 인생의 바닥부터 완전히 뭔가 새롭게 뒤집어 보고 싶은 마음이 있었는데, 그것은 아닌 것 같아요. 그래도 이전보다 마음이 오히려 훨씬 편해졌어요. 간혹 무모해지는 것은 나쁜 것만은 아닌 것 같아요.”

‘도취’와 ‘도착’ 만연한 한국사회

― 법무부 장관으로서 일에 대한 자세나 고위 공작자로서 자기 관리의 비결이 있다면 어떤 것입니까.

“법부장관 자리를 저는 전문가 영역으로 생각하고 갔어요. 그런데, 그 자리는 현실적으로 민감한 정치적 자리라는 사실을 새삼 실감했어요. 말하자면 권력이 집중된 자리인데, 저는 권력이 집중돼 있는 것을 역할이 집중돼 있다고 봐요.

정치권력이라는 것이 원래 대리자 역할을 하는 것이고, 그 사실에 충실할 때 정치가 투명해질 수 있다는 생각이죠. 자리를 역할이 아니고 권력이라고 생각하면 그것은 도취이자 도착입니다.

한국의 정치상황은 그런 도취와 도착이 아직도 만연해 있죠. 어느 조직이나 사회가 위임해준 권력을 자기 권력으로 전유해 영속화하려는 속성이 있는데, 가장 적나라하게 나타나는 곳이 정치의 장이죠. 그 사실을 뒤집어보면 정치가 그만큼 사회적 소통에서 의미가 집중된다는 뜻이기도 하고, 그런 이유 때문에 사회 운용을 위해 가장 잘 돌아가야 하는 장이죠.

그런데, 사실은 진실이 가장 막혀 있는 곳이 정치라는 생각을 해요. 사람들의 진의가 서로 통하는 것이 진실된 상황이라면, 예술이나 학문이 거기에 좀 가깝게 가려고 하는 것 같은데, 그 안에서도 그런 도취와 도착은 어느 정도 있죠. 저는 요즘 가장 지혜로운 그룹이 그냥 일상적인 국민들 같아요. 어떤 이해관계로 묶이지 않고, 집단으로 조직화되지 않은 평범한 사람들 사이에서 가장 진실된 의사소통이 이루어지는 것 같아요.

아마 생활에서 우러나오기 때문에 그렇지 않나 싶은데, 이런 의견들을 체계적으로 수렴하는 작업이 정치의 선진화 작업이라고 생각해요. 고위공직자로서 자기 관리 비결도 그냥 이런 원칙 하나 지키는 것이죠. 이 자리가 내 것이 아니고 남의 것, 잠시 빌려온 것이라는 말짱한 정신을 유지하는 것이죠.”

“사법 개혁, 조급증으로는 풀 수 없다”

― 검사들에게 보낸 이메일이 한때 화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거기에 보면 검사들에 대한 애정이 많은 것처럼 보였는데, 장관직을 맡기 전과 후의 검찰을 보는 시각이 어떻게 달라졌습니까.

“시각의 변화라기보다 정서의 변화가 있었죠. 검찰 조직 전체를 보는 시각은 변화가 없어요. 여전히 개혁의 과제들이 많고, 그것을 추진해야 한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는데, 검사 개개인을 보는 정서는 애틋해졌어요. 검사들은 정치권력이 검찰을 왜곡시켰다는 깊은 피해의식 같은 것이 있었어요. 밖에 있을 때는 그것을 이해하지 못했는데, 지금은 왜 그런지 사정이 이해가 돼요.

제가 온 이후 수사검사들이 정치권력에 대해 제대로 수사하려고 안간힘을 쓰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어요. 그 이유가 뭐겠어요? 정치권력에 휘둘리면서 강력한 권력기관 역할을 하던 과거에서 벗어나, 자기 본래의 모습을 회복하려는 것 아니겠어요?”

― 야당 총재도 칭찬한 바 있지만, 대체로 직무수행 능력에서 후한 점수를 받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한 주간지에서는 참여정부 장관들의 성적표를 매기면서 장관께 A학점을 주었더군요. 검찰 개혁의 총대를 멘 사령탑으로서 개혁의 성과에 대해 스스로를 어떻게 평가하고 있습니까.

“아직 한 번도 스스로 평가한 적은 없어요. 아직 평가할 시점이 아니라는 생각 때문이죠. 개혁에 대해 한국사회는 아주 심한 조급증에 걸려 있어요. 일본만 해도 사법 개혁 하면 2~3년에 걸쳐 준비하고 그 후로 추진하는 데 적어도 5년은 잡는데, 한국은  아무 준비 없이 장관 한 명이 들어와 밀어붙이면 되는 것처럼 생각해요.

검찰 개혁은 기본적으로 몇 년이 걸리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검찰 스스로 개혁해 나갈 수 있도록 정서를 이해하고 분위기를 맞춰주면서 해 나갈 때 내실 있는 개혁이 된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취임 석 달 지나서 ‘검찰 개혁 물 건너 갔다’ 이런 기사를 보면 한심해요. 우선 보기 좋게 강압적으로 밀어붙여 외과적으로 뭔가 하는 시늉을 개혁과 동일시하는 그런 발상 자체를 바꿔야 해요. 저는 기본적으로 개혁이 실효가 있으려면 문화가 바뀌어야 한다는 생각이기 때문에 그런 외과적인 것보다 내부의 변화를 중요하게 고려해요.

어쨌거나, 내년 3월까지 검찰 내에서 개혁 과제들이 결정되면 개혁이 가시적으로 속도를 더할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어요. 다행히 검찰 내부에서 기대 이상으로 개혁 방향에 대한 합의가 모아지고, 문제의식도 있는 것 같아 낙관적으로 보고 있어요.”

― 개혁하면서 검찰의 저항도 만만찮았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개혁하면서 검찰 조직과의 관계에서 가장 힘들었던 점은 어떤 부분입니까?

“처음에는 나이가 젊은 여성이고 검찰 경험도 없고 해서 조직 전체가 거부하는 듯한 분위기였어요. 그런데, 지금은 준사법 기관으로의 지위 회복을 목표로 한 개혁 방향에 대해서는 일단 과반수 이상의 지지를 받고 있다고 생각해요. 평검사부터 검사장까지 두루 모임을 가졌는데, 의견이 잘 모아지고 있다고 봐요. 내년 상반기중에는 상당한 성과가 있을 것이고요. 그런데 처음에는 왜 그렇게 뭔가 안 풀렸을까.

저 스스로 이런 생각을 해봤어요. 나중에 알게 된 것인데, 나의 등장을 상당히 오해한 것 같아요. 다시 정치권력이 검찰을 흔들려고 하는 것 아니냐는 의심과 불신으로 관계를 시작한 것이죠. 나중에 진의가 전달되면서 점차 신뢰가 쌓여가는 느낌을 받아요.”

― 검찰이 달라졌다는 평가가 나오고 있습니다. 스스로 변화를 가장 실감나게 느끼는 것은 어떤 부분입니까.

“수사를 자율적으로 열심히 하니 밖에서 보기에는 달라진 것처럼 보이는데, 사실 수사검사는 원래 그랬어요. 그게 겉으로 나타나지 않고 수뇌부의 정치적 모습만 드러나서 그렇죠. 이런 분위기 때문에 일선 수사검사들이 정치권에 대해 피해의식과 반발심이 있었어요.

검찰이 밑에서부터 왜곡돼 있었다면 이렇게 빠른 시간에 신뢰 회복이 불가능했겠죠. 일반적으로 검사들이 애국심도 강하고 열정적이고 헌신적으로 일하는 문화가 검찰문화 속에 있어요. 문제는 조직 전체의 권력구조가 그것을 보장해줄 수 있는 구조가 아니었다는 것이죠.

토론회 때 보여준 장관 인사에 대한 불신의 표현도 정치권의 개입에 대한 피해의식 때문이었죠. 과거에는 소신수사했다 좌천당한 사례가 비일비재했거든요. 수사를 열심히 하는 검사들이 성공을 못하고 상처받고 떠나거나 좌천당하는 구조였다고 할 수 있죠. 심재륜 전 고검장도 그런 사례로 볼 수 있고요. 인사권자라면 최소한 소신 있는 수사검사를 보호하는 것 정도는 해야 하지 않나 싶어요.”

― 변호사 시절 국가보안법 폐지 운동에도 참여하신 것으로 알고 있는데, 우리 사회에서 폐지돼야 할 악법이 있다면 어떤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현재 가장 관심 있는 분야는 형사 시스템입니다. 특별법이 양산돼 있어 형법이 사문화되는 경향이 있죠. 기본법에 의해 대부분의 통치가 이루어져야 정상적이고 안정된 사회죠. 특별법이 많다는 것은 사회가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않으니 그런 것인데, 그래도 기본법 중심으로 나갈 때 안정적인 법치가 이루어진다고 봐요. 그리고, 지금 당장 가장 중요한 것은 정치가 투명해져서 국민들의 목소리가 잘 반영되도록 정치 관련 법안들을 고치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 좀 다른 얘기입니다만, 얼마 전에 ‘한겨레신문’에 부산 성인오락실 기사가 났습니다. 조직폭력배들이 불법임이 분명한데도 버젓이 영업을 해서 막대한 폭리를 취하는 것은 관련 사법기관의 묵인이 없으면 불가능하다고 봅니다. 서울의 경우도 부산과 그리 다르지 않을 것 같습니다. 검찰의 정치적 독립도 중요하지만, 일선 수사기관으로서 부패에서 독립하는 도덕적 독립도 중요할 것 같습니다.

사실 일반 서민들 삶에는 정치적 독립보다 이런 문제들이 더 절실하지 않나 싶습니다. 그런데 이런 문제들이 워낙 만연해서 그런지, 폼이 안 나는 문제여서 그런지 아무도 문제제기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이 문제에 대해 개혁할 방안은 없다고 보십니까.

“나는 흘러가는 대로 살았다”

“그런 사회구조적 부패는 검찰의 개혁만으로 해결될 문제는 아니라고 봐요. 다른 그룹도 개혁돼야 해결될 문제가 아닌가 싶어요. 검찰과 관련해서만 얘기하면, 검찰이 그런 비리에 노출되는 것도 지나치게 일차 수사기관으로서의 역할이 강하기 때문이라는 지적도 있어요.

준사법기관으로 거듭나 그런 비리의 사슬에서 독립된 위치에 있어야 1차 수사기관의 비리 연루에 대해서도 소신을 갖고 수사할 수 있지 않을까 싶네요. 비단 오락실 사건뿐만 아니라 사회 전체의 비리를 근절하는 방법은 기본적으로 권력을 분산해 상호 견제하는 장치를 정교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어떤 명분으로도 권력이 집중되면 비리의 온상이 된다고 봐요. 누가 그랬죠? 권력은 본질적으로 남용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라고요.”

― 장관께서는 현 국무위원 중 가장 재산이 적은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내막을 모르는 사람들은 상식적으로 잘 이해하지 못합니다. 이 참에 간단하게 그 얘기를 좀 해 주시죠. 그리고, 평소 돈에 대해서는 어떤 철학을 갖고 계시는지요?

“재산이 없고 빚이 많은 것은 집안사정이고요. 이미 알려진 대로 남편의 사업 실패로 인한 빚이죠. 돈에 대해서는 평소에 철학이라고 할 만한 것이 없어요. 일단 돈에 깊은 관심이 없었어요.

특별히 어려웠던 적도 없었고 해서 그냥 판사 월급 받으면 그 안에서 쓰는 정도였어요. 재테크는 전혀 할 줄 모르고, 관심도 없었어요. 친한 사람과 금전거래를 하지 말라는 말은 이해는 되지만 전적으로 동의는 안 해요. 정말 친하면 돈을 빌려주는 것이 아니라 줄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돈 쓰는 재미보다 돈 버는 재미가 좋다는 것은 경험하지 못했지만, 빚이 생기고부터 빚 갚는 재미가 돈 버는 재미의 10배라는 것은 알겠더군요. 빚 없이 적당히 생활할 수 있는 상태가 사람에게 좋은 것이라고 봐요. 너무 넘쳐도… 글쎄요, 독이 될 수 있겠죠.”

― 법조인의 길을 선택한 것은 어릴 때부터의 꿈이었습니까.

“어릴 때 꿈이 없었어요. 딱히 꿈이라고 할 만한 것이…. 커서도 뭐가 돼야지 하는 꿈은 없었던 것 같아요. 흘러가는 대로 살았다는 것이 맞는 것 같아요. 그런데, 어떻게 살아야지 이런 것은 있었어요. 세상을 많이 이해하려고 노력했어요. 학교 가면 학교가 뭐하는 곳이지, 법원에 가면 법원은 왜 이렇게 돌아가나 이런 생각을 많이 했어요. 그것도 사실 어떻게 해야지 이런 생각에서보다 그냥 체질적인 반응이었던 것 같아요. 제가 생각하고 느끼고 이런 것을 좋아하거든요. 세상이 내게 가깝게 있다는, 그런 느낌이 참 소중했어요.”

― 대통령 하겠다는 꿈보다 그냥 세상이 가깝게 있다는 느낌을 갖겠다는 것이 어찌 보면 더 어려운 것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변호사 시절에도 남다른 점이 있을 것 같은데…. 가장 인상적인 수임 사건은 어떤 것입니까.

“형사단독 판사 할 때 사기죄로 실형선고받았다는 사람이 변호사 할 때 연락했어요. 필로폰 투약으로 구속됐는데, 변론을 맡아달라고. 그래서 변론을 맡았고…. 재판받고 석방된 뒤 몇 번 전화 오다 시간이 지난 뒤에 여동생이 찾아와 죽었다고 하더군요. 한여름 밀실에서 필로폰 투약하다 죽었어요. 실연의 상처도 있고, 삶에 대해 좌절해 번민이 깊었다고 그랬어요.

그 소식을 듣고 순간적으로 그 사람이 죽음의 순간에 겪었던 번뇌 같은 것이 연상됐어요. 그 사람이 사기도 치고, 깡패짓 하면서 평생 범죄와 가까이 산 사람 인데, 그런 사람도 죽는 순간에는 어떤 순정성이 올라오는구나 하는 인상을 받았거든요.

범죄자들의 평소 행동양식은 비열하기 이를 데 없는데, 그런 사람도 마음 한구석에는 순정성이 있어서 자신이 그것을 발견해도 이미 그 때는 이런 저런 현실적 상황 때문에 돌아가지는 못하죠. 그 돌파구로 죽음을 찾아간 사람이었는데, 말하자면 부조리를 깨닫게 해준 사람이죠. 다 알면서 안 되는 상황, 그게 부조리잖아요?”

― 살면서 어떤 순간에 그런 부조리를 느끼셨는지 궁금하군요. 좀 다른 얘기입니다만, 얼마 전 신촌의 ‘섬’언니(1980년대 운동권과 문화판 사람들이 자주 찾았던 신촌의 카페 ‘섬’의 주인)가 돌아가셨습니다. 두 분이 각별히 친한 사이였고, ‘섬’을 자주 찾으셨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 얘기 좀 해 주시죠.

“향숙이가 매우 위중하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는 이미 사망하고 난 다음이었어요. 상가에 가서 한참 울다 왔는데…. 향숙이는 영혼이 맑고 자존심이 곧아서 남한테 신세 안 지고 자신의 삶의 조건을 혼자 감당하려고 했던 사람이죠.

최근 몇 년은 자주 보지도 못했어요. 해마다, 12월31일날 가서 보고 그랬어요. 그 사람은 그 사람대로 인생이 힘들고, 나는 빚 때문에 고생하고 서로 여유 없이 지내다 보니, 그냥 매년 마지막 날 약속한 듯 찾게 된 것이죠. 마음으로 가장 가까운 친구였는데, 그 친구는 자신이 세상을 혼자 감당하려다 외형적 삶에서 행복을 누리지 못하고 꺾였고, 나는 타고나기를 공부 잘하게 타고나서, 어떤 흐름 때문에 이 자리까지 왔고, 마음은 같은데 결과가 너무 대조적이잖아요?

허무하죠. 도대체 뭐가 진실이냐, 마음의 순정성이 지켜낸 삶이 뭐냐,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마음이 복잡해져 사진 두 장 얻어 갖고 왔어요. 지금도 향숙이 생각하면 가슴이 답답해요.”

“나는 ‘사랑주의자’로 살았다”

― 장관께서는 사람 사귀는 폭이라고 할까요, 그게 참 넓은 분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많이 사귄다는 의미가 아니고요. 사귀는 사람들의 사회적 지위나 성향이 참 다양하다는 의미에서 그렇다는 겁니다. 사람 사귀는 원칙이라고 할까, 스타일은 어떤 것입니까. 혹자는 가까운 듯 멀고, 먼 듯 가까운 사람이라고 하던데….

“일로 만나는 경우 외에는 마음으로 묶어 주는 사람하고만 친해요. 일할 때도 되도록이면 마음으로 호흡이 맞는 사람과 일하기를 희망하죠. 이성은 세상을 움직이는 데 필요하지만 사람을 움직이는 것은 정서인 것 같아요. 마음이 맑은 사람, 자기를 지켜내는 사람을 좋아하죠. 자기를 지키려는 사람은 어느 측면에선가 좌절하게 돼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욕심부릴 이유가 없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뭔가 대단히 많이 가진 사람이 아닌데, 나도 대단히 많이 가질 필요가 없잖아요? 요즘은 어디에 올라간다, 이런 말 자체가 낯설게 받아들여져요. 사람이 올라갈 때가 어디 있어요. 그냥 그 자리에서 내 자신을 잘 지키면서 살고, 그런 사람들 만나는 것이 행복이죠.”

― 그런 관점에서 보면 남녀 간의 사랑에 대한 시각도 재미있을 것 같습니다. 장관께서 생각하는 남녀  간의 사랑의 조건은 무엇입니까.

“저는 스스로 ‘사랑주의자’라고 생각하면서 살았어요. 사랑에 대해서는 절망감을 많이 느꼈는데, 그럴수록 사랑을 갈망했어요. 연애하고 싶다 이런 것은 아니고, 사랑으로 살아야 한다는 근원적인 질문 같은 것이었어요. 젊을 때는 남녀 간의 사랑을 통해 그런 것을 상상하게 되죠. 그런데, 사랑이라는 가치에 나머지 가치를 다 던지는 사람은 별로 없어 보였어요.

사람이라는 존재가 돈 버는 데 몰입하면 가치에는 관심이 없어지고, 운동가는 운동가대로 이념에 몰입하고, 출세하는 사람은 성취에 취하고 그런 것 같아요. 자기들이 갖고 있는 가치를 어떤 형태로든 사랑을 위해 양보할 수 있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아 보여요. 개인이 가진 순정성을 지킬 수 있는 유일한 방식이 사랑 아닌가 싶은데…. 요즘은 인간은 기본적으로 고독한 존재이고 최선의 사랑을 만났을 때도 각자의 고독을 유지해야 그 사랑을 지킬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돼요.”

img4R“사랑이 찾아오면 그것은 축복”

― 요즘도 사랑에 대해 생각을 많이 하십니까. 좀 어려운 질문입니다만, 결혼은 다시 안 하실 것입니까.

“사랑에 대해서는 전에 오래 생각해서 언제 시간 있으면 나중에 글을 쓰고 싶은 생각이 있어요. …생각을 너무 많이 해서 내가 사랑에 실패한 것인가. 적당히 사랑하고, 사랑은 기본적으로 지나가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해야 이루어지는 것인데. …요즘은 일 외에 생각할 틈이 없어요. 어느 신부님이 강연하시는데 그런 말씀을 하셨대요. 어제는 히스토리이고, 오늘은 축복이고, 미래는 미스터리라고요.

미래에 내가 결혼할지 안 할지는 미스터리죠. 지금 생각으로는 결혼은 별로 내키지 않아요. 간혹 사랑을 대하는 자세에 대해서는 생각했어요. 사람이 마음에 있는 것을 다 비워버리면 무엇이 남나? 고독한 공간이 남지. 그것을 채워 줄 수 있는 것이 뭐가 있을까.

사랑밖에 없는데, 그게 없으면 불안한 상태가 되니 인간으로 실존한다는 것은 무엇을 채워도 늘 불안하지 않을까…. 그래서, 사랑이 지나가는 것이라면 찾아오는 순간에 충실해야 하지 않을까, 축복으로 받아들여야 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죠. 사람들이 다들 그렇게 자문해 보면 좋겠어요.”

― 사랑에 대한 생각이 종교적인 어떤 생각과 맞닿아 있는 것 같습니다. 사랑한다는 것이 사람 사이에 뭐가 통하는 것이라는 말씀인지 좀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저는 남녀 간의 사랑과 다른 사랑이 본질적으로 다르다고 보지 않아요. 사랑은 사회적 관계 속에서 벗어나 개인이 가진 고유하고 고독한 영혼들이 부딪치는 것이라고 봐요. 사랑하면 가장 좋은 것이 영혼이 드러나는 느낌을 갖잖아요? 이것은, 사회적 지위와 학벌, 남녀 이런 조건들이랑 관계 없는 것이죠. 그냥 진심이 받아들여지는 상태가 아닌가 싶어요.”

― 장관께서는 예술 작품 속의 인물이나 역사 속의 인물을 마치 연애하듯 상상하는 데 대가로 알고 있습니다. 제가 들은 계보는 르 클레지오·기형도·김기덕까지입니다. 그 다음이 누구인지 궁금합니다.

“문무왕이 궁금했어요. 대왕암에 여행갔다 죽어 바다에 묻히고 싶다는 남자가 도대체 어떤 인물인지 만나고 싶었지만, 시간이 우리를 갈라놓았잖아요? 지난해에는 ‘불안의 개념’을 읽다 키에르케고르에게 반했는데 요즘은 예수님 생애에 관심이 많아요. 얼마 전에 모스크바에 갔을 때 갤러리에서 컴컴한 곳에 엎드려 기도하는 남자 그림을 봤는데, 누구냐고 물어보니 예수님이라고 그러더군요. 아주 인상적이었어요. 그리고 이것은 말해도 되는 것인지 모르겠는데, 얼마 전에 머리가 복잡해서 뚱딴지 명탐정 만화책 빌려 읽고 있는데, 만화의 수준이 우리 어릴 때하고는 차원이 다르더군요.”

― 앞으로의 행보에 대해 사람들의 관심사 중 하나가 정치 할 의사가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열린우리 당에서 열심히 ‘러브 콜’을 보낸다는 소문도 있습니다. 정치 하실 생각은 없으신지요?

“한 마디로 없어요. 몇 번이나 의사를 밝혔는데 자꾸 이런 질문을 받는 이유를 모르겠어요. 기자들에게 물어보니, 좀 이름이 난다 싶으면 다들 정치 하는 것이 일반적인 경향이어서 그런다고들 하대요. 한국 사회가 어떤 조급증이 있지 않나 싶어요. 사회 각계의 층이 얇아 자체적인 볼륨이 없으니 권력이 몰린 곳으로 다들 쏠리기 때문에 그런 현상이 벌어지는 것 같은데, 저는 개인적으로 정치도 정치적 역량을 쌓으면서 전문가 정치를 해야 한다고 봐요. 그리고, 개인적으로 저는 그만 나가고 싶어요. 장관까지 갔는데 그만 나가고 싶어요. 한참 뒤로 후진하고 싶어요. 살고 싶은 방향과 정치는 잘 안 맞아요.”

“내 삶의 방향과 정치는 다르다”

― 대중적인 인기가 급부상해서 그런 얘기들이 많이 나오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리고, 여성의 진출이 두드러진 사회 분위기가 여성 정치인이나 지도자에 대한 요구로 이어지는 것도 한몫 하는 것 같습니다. 여성 정치지도자상에 대한 생각은 어떠신지요? 또 혹시 주변에서 대권 이야기 나오면 어떤 생각을 하시는지요?

“여성들의 사회 진출은 시대의 대세이니 당연히 앞으로 여성 정치인들이 많이 나와야겠죠. 정치인뿐만 아니라 사회 각계에서 여성들의 자리가 마련돼야 하겠지요. 여성 정치인은 많이 나올수록 좋다고 봐요. 지금 제가 법무부 장관 하는 것이 사회적 화제가 되는 것은 변화의 과도기여서 희소성 때문에 그런 것이고, 앞으로는 여성 법무부 장관도 평범한 일상이 돼야겠지요.

그런데, 노랫말에도 나오듯 사랑은 아무나 할 수 있고, 장관도 노력하면 업무를 잘 해나갈 수 있는 자리이지만, 대통령은 아무나 하는 자리는 아니라고 봐요. 제가 확신하는 것은 저는 아니라는 것이지요. 신기한 것은 그렇게 짧은 시간 안에 어떻게 그런 상상의 비약이 가능한가 하는 점이에요.

사회가 풍요로워지려면 상상력이 다양해야 하는데 그렇게 과민하게 정치적으로만 상상하는 것을 보면 확실히 한국사회는 상상력 자체가 정치밖에 없는 나라처럼 보여요. 사람들이 법무부 장관 오니 정계로 갈 생각을 하고 온 것 아닌가 하고 생각하는데, 전혀 아니에요.

아까도 말했듯 나는 장관 할 때 나를 툭 던지는 심정으로 했기 때문에, 전혀 그런 세상의 말들이 내 마음의 반응을 일으키지 않아요. 지금 별 반응이 없는데 앞으로라고 달라지겠어요? 나이도 들었는데 내 살고 싶은 대로 살아봐야 하지 않겠어요?”

― 장관께서 대중적 인기를 얻게 된 비결 중에는 파격적인 행동양식도 한몫 한 것 같습니다. 대체로 엄격한 관습이 적용되는 곳에서 파격은 마이너스로 작용할 공산이 큰데, 장관의 경우는 결과적으로 플러스로 작용한 것 같습니다. 어떤 기자들은 그것이 고도로 계산된 정치적 행동이라고 말하기도 하던데요?

“제가 들은 말 중 한편으로 가장 희망적이고 즐거운 말이 그 말이었어요. 저는 체질적으로 어떤 사안이든 고도의 계산을 못 하는 지진아 기질이 있어서, 오히려 그 말이 위안이 됐어요. 그냥, 제 생각에는 과도기에 젊은 여자가 장관을 하니 그 덕을 본 것이라고 생각해요. 좀 관대하게 봐주려는 그런 기운이 있었던 것 같거든요.

제가 일부러 파격을 구사한 것은 전혀 아니고요, 아주 평범하지 않은 동네에서 평범한 행동을 하니 그것이 파격이 된 것 같아요. 첫날 귀걸이 한 것 사람들 눈에 이상하게 보일지 몰랐어요. 저로서는 정성 들여 귀걸이를 했거든요.

검사장회의 할 때 현악 4중주 들었는데,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인데, 신문에 난 것을 보고 놀랐어요. 검사와의 대화 때 대통령 앞에서 다리 꼰 것도 이상하다고 그러는데, 여자들이 치마 입고 취할 수 있는 자세가 그것밖에 없지 않나요? 경험이 있었다면 바지를 입고 갔겠죠.

파격적인 행동양식이 인기의 비결?

img5L국회 출석 때 웃은 것은 그 광경이 우스워 저도 모르게 실소한 것이고, 국회 답변 때 ‘이런 얘기 들었느냐’고 물어봐서 ‘지금 들었다’고 대답한 것도 그냥 솔직하게 답한 것인데 이상하게 보인 것 같았어요. 법무장관이 세상 얘기 미리 다 들어야 하는 자리는 아니잖아요?

그리고 옷소매 긴 것 입으면 그것도 왜 그런지 의미부여하려고 해요. 아무 의미 없어요. 체구가 작고 옷이 커서 그렇죠. 마음에 드는데 딱 맞는 사이즈가 없으면 그 중 가장 맞는 사이즈 택해서 옷을 사잖아요? 그러면 소매가 좀 길 수 있지 않나요? 정치권 안이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너무 평범한 행동을 하니까 그게 튀어 보이는가 봐요.”

― 지금 말씀하신 오해들이 다 주목받는 자리에 있어서 그런 것 아닌가 싶습니다. 과거에도 살아온 삶이 주목받는 자리의 연속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경기여고 수석, 서울대법대 입학, 사법고시 패스, 여성 로펌 대표, 법무장관… 이런 과정이 화려한 만큼 피곤할 것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살면서 다른 인생에 대한 가능성을 생각해본 적은 없으신지요?”

― 두 번 정도 진지하게 인생을 바꿔볼까 생각해 봤어요. 언제 어떤 방식인지는 말하기 그렇고요. 판사 할 때 다시 무용과 갈까, 불교철학과 갈까 하고 한때 고민했던 적이 있어요. 그런 고민들이 갖고 있는 공통점은 생각하고 느끼고 조용히 살 수 있는 삶을 막연히 꿈꾸었다는 거예요. 그런데 앞은 언제나 캄캄해서 안 보이고, 늘 방황으로 끝났죠. 그런데, 지금 이 자리에 와서 이런저런 일을 겪다 보니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그런 것이 오히려 선명하게 다가와요. 뭔가 구체적인 감이 잡히고, 미래도 비교적 선명하게 상상이 돼요.”

― 그러면 장관 그만두고 어떤 일을 하실 계획인지요?

“장관 그만두면 일단 좀 휴식을 취하고 싶어요. 그리고 자유롭게 개인생활하면서 살고 싶어요. 빚을 갚아야 하니 열심히 벌어 갚아야 할 것이고…. 그것이 어느 정도 정리되면 소소한 개인생활하면서 제가 감당할 수 있는 소소한 봉사활동을 하고 싶어요.

출퇴근하는 직업 안 하고 집에서 놀면서 글쓰기할 생각도 좀 있고, 여기에 와서 장관 일 하면서 내가 진짜 하고 싶은 것이 이런 것이라는 생각이 선명해졌어요. 지금까지는 끌어오면서 살았는데, 앞으로는 그렇게 안 살려고…. 직업은 정말 갖고 싶지 않아요. 원래 제가 건달 끼가 좀 있어요.

저혈압이라서 늦잠 자고 운동 조금만 하고 많이 안 먹고 이래야 하는데, 지금은 그 반대로 새벽부터 움직이고 많이 먹고 운동은 여전히 안 하고 그러잖아요? 솔직히 말하면 사회생활을 안 하고 싶어요. 너무 안 하면 안 되니 봉사활동을 좀 하고…. 다른 사람도 그렇게 살고 싶어하지 않나요?”

“건달 끼 있어 장관 끝내고는 놀고 싶다”

나는 이 질문에 대답하지 못했다.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살고 싶은 꿈은 꾸지만 아마도 대부분은 실천하지 않을 것 같았다. 그가 법무장관직을 그만둘 때 어디로 튈지는 아무도 모를 일이다. 내일은 미스터리이기 때문이다.

강장관의 파격을 고도로 계산된 정치적 행보로 보는 사람들의 예측대로 정치를 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그렇다고 해도 지금 이 말들이 미리 계산된 정치적 행보는 아닐 것 같았다. 사람은 바뀐다. 강장관도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안다. 그래도, 그냥 정치 안 한다고 명확한 태도를 보이는 것은 현재 그가 그렇고 앞으로도 별로 달라질 것이 없다는 어떤 확신 때문 아닐까.

현재 그가 관심 있는 것은 총선이 아니라 건강관리, 검찰 개혁, 춤, 연말에 열리는 전인권과 한영애의 콘서트 같은 것이다. 그리고 법무장관을 그만두게 되면 여행부터 실컷 하고 싶다고 했다. 그는 나이 마흔이 될 때까지 그 흔한 해외여행을 한 번도 안 했던 사람이다. 내가 들은 것은, 몇 년 전에 네팔에 다녀온 것이 첫 해외 나들이였다. 왜 하필 첫 여행지가 히말라야였을까. 그것이 궁금했다.

그의 말을 듣고 있다 보면 뭔가 비우기 위해 채워 넣는 사람 같았다. 말하자면, 집을 짓는 것이 아니라 길을 찾는 것…. 그는 그런 태도를 종교적이라고 표현했다. 그렇게 보면 사위를 더할수록 마음이 비워진다는 승무는 그의 삶을 압축하는 퍼포먼스처럼 보인다. 그는 앞으로 어느 길 위에서 춤을 출까.

in http://monthly2.joins.com/monthly/article/mj_article_view/0,5401,aid%252D212570%252Dservcode%252D9400401,00.html

세계인권선언 50주년 기념 '한국인권의 현황과 과제' 학술행사에 참가하고 나서

민변회원 조용환이 전화를 걸어온 날은 지난 가을 조금 더울 무렵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이 특유의 무색무취한 목소리로 세계인권선언 50주년 기념 학술행사로서 올봄 초인 1999년 2월 26일부터 3월 1일까지3박 4일에 걸쳐서 인권운동 관련자들이 모여 밀도 높은 세미나를 하려고 하는데, 공정한 재판을 받을 권리에 대한 발제를 맡아 달라고 이야기하였다. 무엇이든 전화기를 붙든 채로 바로 승낙하는 일은 꺼려왔지만 몇 가지가 조금 솔깃하게 마을을 끌어서 하도록 노력해 보겠다는 어정쩡한 답을 하였고, 그것이 바로 승낙이 되어버렸다. 행사기간에 일요일과 공휴일이 겹쳐 있어서 재판관련 일에 지장을 받지 않고 참가할 수 있을 듯하였고, 그와 같이 상당한 시간 동안 집중하여 인권문제를 토론하다 보면 개안(開眼)을 할 수 있는 좋은 지회가 될 듯하다는 순간적인 판단을 하였다. 또한 무엇보다도 어느 단체가 주최하는지도 잘 모르는 채로 조용환에 대한 존경어린 신뢰, 그러니까 그이 부탁은 무조건 들어야 할것 같은 마음상태가 작용하였다.

그후 분주하게 날들은 마른 잎 떨어지는 사이로 지나갔다. 어느날 '세계인권선언 50주년 기념사업위원회'라는 곳에서 편지가 왔다. 세미나 일정과 주제들, 그피고 발표논문에 대한 기본자료 안내, 희망하는 글의 방향, 즉 세미나의 근본 취지가 실려 있었다. 국제인권법의 보편적 관점에서 한국 인권의 실상을 비교하고 평가해달라는 내용이었다. 인터넷 국제연합 사이트에 들어가서 자료를 찾으라고 설명하고 있었다. 이때부터 글도 쓰기 전에 마음의 짐을 짊어져야 했다. 왜냐하면 그 당시 영어라고는 손을 놓은 지 20년이 되었고, 어쩌다 가끔 에드거 앨런 포의 단편소솔을 영문대역본으로 본 정도이며, 국제인권법에 대해서는 전혀 지식이 없는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더욱이 검퓨터에 천리안을 깔아놓고 아이디도 있었으나 통신을 해본 적도 없는 상태였다. 조용환에게 전화를 하였더니 참조하라고 영문자료를 보내왔는데, 쳐다보니 더욱 한숨만 나올 뿐이었다.

그렇다고 하여 갑자기 영어공부와 국제인권법 공부에 매달릴 여유도 없었다. 겨울이 깊어지면서 얼어붙은 대지 위를 미끄러져가듯 생활은 몇 가지 일들이 얽히어 떠돌면서 벅찬 속도로 움직여가고 있었고, 하루하루 조각난 시간들을 추려 책을 일고 생각을 모으기에는 만성화된 삶의 체증(滯症)이 가만히 놓아주지를 않았다. 2월 초쯤에 이르러서야 자료들을 모으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결국은 원고마감일인 2월 20일을 앞두고서 설날 연휴에 작성하리라는 작정을 하였다.

그런데 막상 설날 연휴에 집에 들어앉아 자료들을 정리하고 쓰다보니 심한 우울증이 찾아와서 마감일을 지켜 원고를 넘긴 후 깊은 몸살을 앓아야 했다. 살이 모두 곤두서서 소나기를 맞듯이 아팠다. 며칠을 쉬고 몸의 상태는 나아졌으나 마음은 무거운 채고 행사장을 향하여 떠나는 아침을 맞았다. 우울증이 찾아온 것은 무엇보다도 충분한 자료조사, 연구가 안 된 채로 글을 얼기설기 엮어 놓아 언짢았기 때문이었다. 다행히도 행사가 끝난 후 여유있게 고칠 시간을 주어서 그러한 언짢음은 어는 정도 해소할 수 있었다.

보다 깊은 내면의 이유는 자신의 과거, 현재 체험에 있었다. 글의 주제가 형사재판에서 피고인의 공정한 재판을 받을 권리였기에, 인권론에 바탕을 두고 논리적으로 접근하는 그 글쓰기의 과정 자체가 법원에서 10여년 몸을 담고 실제로 재판을 하였던 사람의 미세한 일상의 기억까지 들추어내고, 변호사로 일하고 있는 현재의 생활을 어김없이 적나라하게 드러내어 응시하기를 요구하였다. 어쩔 수 없는 고통스러운 자기성찰의 시간이 되어버렸다. 글의 주제는 자연스럽게 가장 근본적인 문제가 무엇인가에 모여졌고, 그것은 불구속재판의 원칙을 구속재파느이 원칙으로 관행화하여 운영해온 데 있다고 판단하였다. 그렇게 글을 쓰면서 정작 일차적으로 책임져야 할 위치에 있는 법률가로서의 자신의 삶은 그 글이 비판하는 관행의 자리에서 별로 비켜서 있지 못하였다. 너무 괴롭다 보면 괴로움을 넘어 그저 익숙한 상태가 되는데, 글을 쓰고 나서 한참 후에 그 지점에는 이르렀으나 괴로워하는 문제는 전혀 해결되지 않은 채로 살아 있다.

제주도로

그와 같이 행사에 참가하기 전에 미리 부담과 괴로움을 겪으면서도, 바람으로 가슴에 세례를 받는 듯한 즐거움을 주는 일이 있었다. 제주도 서귀포 칼 호텔에서 행사가 열린다는 소식이었다. 장소를 그곳으로 정한 이유는 3박 4일의 일정이 진행되는 동안에 행사 참가자들이 쉽게 이탈하지 아니하도록 하려는 배려였다고 들었다. 바다를 본다는 그 사실만으로 기쁨에 설레었다. 떠나는 날 아참 공항에서 점퍼를 입고서 왔다갔다하고 있는 조용환과 인사를 나누고 주최하는 단체의 간사들로부터 비행기표를 받아들었다. 그때까지 행사의 큰 줄거리와 발제 예정자들의 이름 정도만 알 뿐, 누구누구가 참여하는지도 정확하게 모르는 상태였고 주최측 간사들과 전화와 메일을 몇 차례 주고받았을 뿐이었는데, 비행기를 타고서야 민변 회원 박원순, 민가협 총무 남규선 등 반가운 얼굴들을 더러 볼 수 있었다. 하늘이 조금 흐려서 바다를 건널 때에는 허공 전테가 잿빛 하늘과 바다의 경계를 가려낼 수 없게 가득 차 있어 멀리 작은 섬들이 마치 하늘에 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주었다. 제주공항에 내렸을 때는 머리카락을 촉촉히 적시는 비가 뿌렸다. 공항 주변 농토가 새파란 빛깔을 띠고 납작납작하게 누워 있었다. 짐을 찾느라고 늦게 공항 밖으로 나가보니 일행인 듯한 사람들도 없고 호텔로 가는 전용버스를 찾기 어려웠다. 내 곁에서 두리번거리던 한 여인이 말을 건네왔다. 학술행사에 왔노라고 서로 주고받다 보니 20년 가까운 세월을 넘어 서로 언뜻 얼굴을 몰라본 박인혜였다. 그이는 남편과 함께 형성사 출판사를 하였고, 지금은 한국 여성의 전화 부회장으로 있노라고 하였다.

버스를 찾아서 오르니 처음이라 다소 긴장되고 낯선 분위기였다. 한 시간쯤 달리어 서귀포에 도착하였다. 방 배정표에 따라 506호 열쇠를 받고 올라가 방문을 열었다. 창가에 짙은 녹색의 두터운 커튼이 드리워져 있었다. 신부의 첫날을 거두어들이듯 조심스레 커튼을 열어 젖혔다. 다시 바다와 하늘의 경계없는 짙은 잿빛 허공이 나타났다. 바다는 낮게 흔들리며 끝간 데 없이 퍼져 있었다. 멀리 전면에 구름에 둘러싸인 나지막한 작은 섬이 서 있었다. 바다의 물결이 서로 부딪치며 웅얼거리는 소리, 어디선가 새소리가 들려왔다. 배 한 척이 하늘로 향하듯 떠 있었다. 벅찬 심정으로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그보다 한 해 전인 1997년을 넘어 1998년 연초에는 서울 도시의 삶에 바닥 모르게 지쳐서 하룻밤 동해바다를 향하여 달려갔다. 언제 보아도 바다는 거대한 낯선 두려움을 준다. 그때 주문진 항구에서 바닷속을 숨이 차게 휘젓는 사람을 상상하다 보니 새삼 사람의 사회가 만들어 놓은 피라미드 형태의 층계들이 이상하리만큼 거꾸로 선 물체처럼 여겨졌다. 왜 저 바다에서 목숨을 걸고 온뭄으로 고기를 낚는 사람들보다, 먼 도시에서 아스팔트 길 위에 늘어선 빌딩을 오가면 변호사 하는 사람이 훨씬 두꺼운 노동의 대가를 받고 대우를 받는 것인가, 이상하지 아니한가. 곁에 선 남편이 그 의문은 '자본'의 시작과 닿아 있다며 그 책을 읽으라고 권하였다.

다시 제주의 바다를 바라보면서 사람, 인권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인권의 바탕개념인 인간의 존엄이라는 것, 그것이 무엇인가. 저렇게 바다는 침묵 속에 있고, 그 안에 온갖 생명들이 아무런 인위적 다툼 없이 제자리를 지키며 물 흐르듯 살고 있을 터인데, 사람은 왜 존엄을 부르짖어야 하는가. 허무하기 이를 데 없는 개념이었다.

인간의 존엄은 명백히 자연적 삶을 벗어나와 억압을 빚어놓은 권력의 역사 속 항변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애초에 필요없는 것을 이렇게 절실하게 필요로 하는 사람 또한 역사가 만든 이중의 함정이 아니겠는가. 잠시 후에 송파 아동학대센터 이혜선 지부장이 옅은 갈빛 개량한복 차림으로 방에 들어와서 인사를 나누었다. 한 방에 두 사람씩 배정되어 같이 지내게 되었다.

첫째 날

시간이 오후 두시쯤 되었을 때 1층 대회의실(크리스털 룸)에 모여 회의가 시작되었다. 그제야 주최단체에 관한 자료, 발제자와 일반참가자 명단 등을 받고서 주최단체는 위원장 신용석과 열일곱 명의 위원이 주도하는 한시적 단체라는 것, 그이는 정당에 몸을 담고 있지만 이 행사를 위하여 정당의 당직자직도 사양하였다는 것, 그리고 한국마사회의 협찬을 받았는데 정부의 지원제의를 거절하고 개인적으로 아는 간부를 통하여 마사회의 도움을 받게 되었다는 것, 그런 배경설명들을 들었다. 전체 진행은 조용환이 맡고 있었다. 발제자를 비롯한 전체 참가자 수는 아흔여섯 명 정도에 이르렀고, 민변 회원들, 한국 법철학회를 통하여 낯익은 선생들 몇몇도 눈에 띄었다.

바다를 보고 숨 한 번 쉬자마자 시작된 첫날 일정은 오후 두시 반부터 리영희 선생의 기조강연에 이어 오후 세시 반부터 여섯시 반까지 세 시간 동안 전체회의로서 카톨릭대 교수 이삼성의 「국제질서의 변동과 비인도적 범죄」, 부산대학교 교수 김창록의 「일제잔재와 국가권력, 그리고 인권」, 박원순의 「김대중정부하 과거청산의 현실과 과제」가 마련되어 있었다.

첫날부터 나흘간의 회의일정은 전체회의 네 번과 분야별 인권문제를 다루는 열두 가지 주제별 소회의로 나누어 주제별 소회의는 각자 선택하여 참가하도록 짜여져 있었다. 전체회의와 주제별 회의는 모두 2～3개의 주제발표가 마련되어 있어서 총 주제발표는 서면발제까지 합아여 마흔네 개에 이르렀다. 서면에 의한 발제는 김민웅 목사의 「세계경제체제와 인권문제」, 한국형사정책연구원 선임연구원 박미숙의 「인권과 형사법의 역할」, 부산대 교수 허일태의 「사형제도의 폐지를 위한 변론」, 국제사면위원회 한국지부 사무국장 오환호의 「한국민간단체의 인권교육활동」, 경기대 교수 이윤호의 「소년사법과 인권」이 있었다. 둘째 날은 주제별 회의 아홉 가지, 총 스물한 개의 주제발표와 토론을 3부에 걸쳐 진행하게 되어 있었고, 셋째 날은 전체회의 두 번과 주제별 회의 세 가지 총 아홉 개의 주제발표와 토론을 3부에 걸쳐 진행하게 되어 있었고, 셋째 날은 전체회의 두 번과 주제별 회의 세 가지 총 아홉 개의 주제발표와 토론을, 마지막날에는 전체회의 한 번을 하고 점심때 끝나도록 되어 있었다. 점심시간 외에는 아침 아홉시부터 저년식사 시간까지 계속되는 강행군 일정이었다.

첫날 전체회의는 서로 아는 사이인 사람들도 많았지만 참가자들끼리 인사를 나눌 여유도 없이 낯선 곳에서 지적 집중을 요구하는 회의를 바로 시작하다 보니 무척 딱딱하고 긴장된 분위기였다. 리영희의 기조강연은 한국의 민주주의와 인권을 주제로 하여 한국의 불행한 역사적․경험적 배경의 특수성의 문제들을 이야기한 것으로 기억한다. 대학시절『8억 인과의 대화』를 읽은 세대들이 모였기에 관심은 각별하였다. 질문시간에 금강산여행을 다녀온 이야기도 들었다. 다만 북한의 인권문제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대하여 북한의 특수성―그 체제에서는 공동체윤리․질서가 바탕이며, 체제위기상황이다 보니 인권의 일반적 잣대로 평가하기는 어렵다는 듯이―을 강조한 것은 의아하고 받아들이기 어려운 생각이었다.

이삼성․김창록의 주제발표는 국제사회에서의 정치역학관계의 변화와 인권의 관계, 한국 인권문제의 역사적 연원 추구를 다루어 인권현황의 시공간적 좌표를 확인하고 사고를 확대하도록 촉구하는 의미에서 적절하게 어울리는 내용이었고 논리의 수준이 높아서 매우 유익하였다. 특히 탈냉전시대에 이데올로기적 갈등이 무너지면서 종족․종교와 같은 비이데올로기적 요소들에 의한 정치적 갈등이 폭발하게 된 것은 사실이나, 그로부터 비롯된 인종청소, 제노사이드의 반인도적 범죄는 단순한 갈등과 증오의 문제가 아니라 정치세력과 그 지도자들에 의하여 치밀하게 기획된 의도적인 정치행위라는 점, 20세기 후반 경쟁세력이 없는 미국의 패권주의는 오히려 더 우선적이고 단호한 군사개입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한 것은 그 분야의 지식이 별로 없던 상태였기 때문에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그후 제주도에서 돌아와 얼마 안 있어 코소보사태가 일어났고, 인간의 존엄, 왜곡된 기억과 증오의 정치, 미국의 군사개입 등 여러 가지 측면과 다양한 시각들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그러나 아는 만큼 관심을 기울이면 일상 속으로 그 문제가 걸어들어와서 삶이 그만큼 힘들어질 뿐이다. 학살을 안 당하고 사는 것만으로도 축복받은 인생이라는 너그러운 태도를 체득하기도 하는 것이지만, 아마도 인권에 관심을 갖고 지식과 경험을 쌓으며 실청하는 일은 세상을 힘들고 심란하게 살겠다고 자처하는 어리석은 일인지도 모른다.

한편 인권의 문제는 이 땅에서 근대의 시점인 일본제국주의 식민적 통치로부터 그 기점을 찾아야 한다는 것, 일본제국주의의 식민적 통치가 치안유지법과 같은 악법을 도구로 하였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인식되어온 일이지만, 당시 일본국 헌법, 이 땅에 적용한 법령들을 정밀하게 대조․분석하여 법령에 의한 식민적 통치를 가능하게 하는 헌법적․법적 근거 자체가 전혀 없다는 것을 밝혀내고 법리상 원천 무효의 것이라고 지적한 점은 한발 앞서나간 학계의 수준을 짐작하게 해주었다.

박원순은 현재 간첩조작사건, 의문사사건과 같은 과거 인권침해에 대한 진상규명과 피해보상의 문제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정치적․법제도적 원인들을 지적하였는데, 막힘없는 언변, 솔직담백하고 친근감 있는 태도로 분위기를 누그러뜨리고 신선한 활기를 불러일으켰던 것으로 기억한다. 전체회의실은 참가자들이 앉아 있는 뒷면 전체가 유리창이어서 바다로 가득 차 있었다. 박원순은 “저기 저 바다 좀 보십시오. 얼마나 좋습니까” 하면서 화기애애하게 이야기를 이끌어나갔다.

전체회의를 마치고 저녁식사 후 여덟시쯤에 참가자 몇몇의 제의로 일정에는 없었지만 다시 모여서 서로 인사하는 자리를 가졌다. 1백여명에 가까운 사람이라 시간은 꽤 걸렸다. 뽀족한 방법이 없어서 참가자들을 직군별로 분류하여 여럿이 같이 나와서 돌아가면서 간단한 자기소개를 하였다.

참가자 중 학자(교수, 연구소 근무)는 서른네명으로, 법학 전공자와 국제학관련 전공자들이 많은 편이었다. 민변 변호사로는 최영도 회장, 김기중, 이석태, 차병직, 최일숙, 박승옥, 박원순이 참가하여 조용환과 나를 포함하여 총 아홉 명으로 비교적 많은 수였고, 박원순은 참여연대 사무처장 자격으로 참가하고 있었다. 현장운동관련 실무자들도 서른네명이 넘었고, 노동․시민․여성․장애인․환경 등 각 분야를 아우르는 단체별 실무자들이 고루 참가하고 있었다. 그 외 주최단체의 위원들과 간사들, 정당 관련자, 외교통상부 인권사회과장, 여성특별위원회 위원, 유학생들과 『한겨레』, 『시사저널』, 『말』, 『뉴스플러스』 기자들이 참석하였다. 또한 행사를 위하여 해외에서 들어온 사람들도 있었다. 영국에 유학을 가 있던 참여연대 협동처장 이대훈, 제네바에 있던 국제가톨릭학생운동 소속 이성훈, 보스턴대학 교수 김주환 등이 그들이었다.

3박4일 동안의 학술행사 소식이 알려지자, 참가를 자원하거나 주제 발표를 자원하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에 인원조정이 힘들었다고 들었다. 기자들의 경우에도 많은 이들이 참가를 바랐으나 행사기간 내내 떠나면 안 된다는 조건이었기 때문에 포기한 사람들이 많았다고 한다. 참가한 사람들은 인사말을 통하여 대부분 조용환의 권유로 참가하게 되었다는 것, 그리고 3박4일이라는 처음 시도되는 장기간의 인권학술행사에서 많이 배우고 교류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을 기대하고 있다는 것을 이야기하였다. 사람들이 행사에 관심을 기울였던 이유는 바로 이 점에서 공통된 것이었다. 참가한 사람들의 열의는 행사기간 내내 유지되어 예정된 일정을 높은 밀도로 채웠고, 부득이한 사정으로 먼저 떠난 사람도 몇몇에 불과하였다.

서로 인사하는 시간에 효성가톨릭대 교수 이정옥은 아시아지역 인권단체의 활동체험을 달변으로 전달하면서 모처럼의 뜻깊은 자리이니 행사가 끝날 때 무언가 선언을 하자고 제의하였고, 부산에서 진행되고 있던 영남위원회 사건에 대한 서명을 예로 들었다. 그이의 말은 상당한 공감을 얻는 분위기였으나 시간도 늦어 더 이상 논의되지 아니한 채 지나갔다.

그 자리에서 가장 말도 잘하고 활기에 넘친 사람들은 여성운동 관계자들이었다. 이들의 제의로 둘째 날부터는 원래 한 시간 남짓하게 짜여져 있었던 점심시간을 한 시간 더 늘려서 참가자들이 짬을 내어 섬의 풍경을 즐길 수 있도록 배려되었다. 밤 10시 넘어 회의실을 나오자 하루종일 쌓인 피로가 맥주 한잔 마시고 싶은 간절한 목마름으로 몰려왔다. 두리번거려 보았으나 맘 편하게 붙잡고 술 마시러 가자고 할 만한 사람이 눈에 띄지 않았다. 멀리 민변 회원 차병직이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는 것이 보였다. 첫날은 모두들 서둘러 방으로 흩어졌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일단 방으로 갔다가 다시 나가서 마신 사람들이 몇몇 있었다. 방으로 돌아가서 이혜선과 냉장고에 있는 깡통맥주를 한 개씩 꺼내어 조용조용히 이야기를 나누며 마시다가 잠이 들었다.

둘째 날

둘째 날 새벽에는 시간이 되면 한라산 관음사에 가려는 계획을 갖고 있었다. 부모 모두 제주도가 고향인지라, 집안에서 대대로 다니던 절이었다. 프런트에 물어보니 왕복 두 시간을 잡아야 하는 먼 거리라서 포기하였다. 집을 떠나 어디를 가든 이곳저곳 돌아다니기를 귀찮아하여 방 안에서 쳐다보는 바다로 만족하였다. 산책할 생각도 없었다.

많은 이들이 점심시간을 이용하여 서귀포 인근은 물론 중문 바다까지 산책을 다녀왔다. 눈을 뜨고 고개를 돌리면 어디에나 바다가 푸근히 감싸고 있었고, 첫날과는 달리 화사한 햇빛이 내리쬐었다. 행사장 전체에 가끔씩 파헬벨의 카논 음악이 울려퍼져서 가슴을 따뜻하게 적셔주었다. 사람들이 흩어진 빈 회의실에서는 아름다운 피아노 소리가 들렸다. 노동과 연구회 김은희 대표였다. 창가에 햇빛을 받으며 쪼그리고 앉아서 바다를 바라보며 음악을 들으니 그것만으로 풍요로웠다. 지금 돌이켜보면, 낯선 곳에서 낯선 사람들과 긴장된 지적 활동을 공유하면서 가슴 밑바닥까지 무애로운 바다가 스며들어 감성을 열어놓았으니 절묘한 극치의 체험을 하였던 듯하다.

둘째 날 아홉시부터 열두시까지 국가권력과 인권, 문화적 권리, 여성인권 등 세 가지 주제별 회의가 마련되어 있었다. 문화적 권리에 관하여는 중앙대 교수 강내희의 「‘문화적 권리’의 이해와 신장을 위한 예비적 검토」, 수원대 교수 이주향의 「현재 진행중인 제국주의 문화와 반인권적 생활양식」, 이정옥의 「다국적기업 감시와 인권」의 주제 발표가, 여성인권에 관하여는 한국여성개발원 박사 김엘림의 「여성인권과 여성차별」, 한국 여성의 전화연합 회장 신혜수의 「여성에 대한 폭력」, 여성특위 조성은의 「정책결정과정에서 여성참여 확대」의 주제발표가 있었다.

세 가지 모두 듣고 싶었다. 망설이던 끝에 아무래도 민변에서 국가보안법을 연구하고 있으니 하는 실리적 선택으로 국가권력과 인권파트에 들어갔다. 순천향대 교수 장호순의 「국제인권규약 기준에서 본 국가보안법 제7조의 문제점」, 성신여대 교수 조시현의 「국가비상사태와 인권」, 연세대 법학연구소 장복희 박사의 「생명권 보호와 사형 폐지에 관한 국제조약과 그 실천」을 들었다.

주제별 회의는 주제가 세 개일 때는 세 시간, 두 개일 때는 두 시간이 배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발제시간과 토론시간을 엄정히 지키며 진행되어야 하였다. 이러한 진행원칙은 모든 회의에서 대체로 지켜졌고, 또한 토론이 무척 열기에 넘치고 수준이 높았던 것도 특징이었다. 학자들은 물론 현장운동가들이 각자의 입장에서 이론의 문제, 체험상의 사례들을 들어가며 토론을 이끌어나갔다. 솔직히 토론에 뛰어들어 발언을 하기에는 논리도 빈약하고 경험도 빈약하여 이날 회의는 물론 회의일정 내내 경청만 하였다.

장호순은 대법원 판례분석을 중심으로 하여 밖으로부터의 국가보안법 비판을 지양하고 법원판례를 바꾸려는 구체적인 노력이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조시현은 국제인권법상 국가비상사태라도 생명권, 고문 도는 비인간적이거나 굴욕적인 취급이나 형벌을 받지 않을 권리, 죄형법정주의에 위배된 조치를 취할 수 없게 되어있고 권력만능신화에 바탕을 둔 국가안보 독트린은 더 이상 유지될 수 없다고 강조하였다.

다른 두 가지 주제는 계속 관심을 기울이는 영역인 데 비하여 사형폐지문제는 새로이 접하는 주제라서 신선하였다. 인간의 존엄과 생명권 보호의 측면에서 국가권력에 의한 생명박탈은 금지되어야 한다는 것이 논리적 당위성을 갖는다. 특기할 만한 점은 1996년 전세계적으로 사형집행사례 중 92%가 중국․우크라이나․러시아․이란에서 이루어졌다는 것이고, 다른 나라들이 100여 건인데 중국은 3,500건에 이르렀다는 사실이었다. 또한 우리나라는 사형제도를 유지하고 있는 90여 개국 중 하나로서 다른 나라들의 사형규정 범죄가 다섯 개 정도인 데 비하여 여든아홉 가지 범죄에서 사형을 규정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1984년 국제연합 경제사회이사회결의의 부속서로 채택된 ‘사형수 권리보호를 위한 세이프가드’9가지는 우리도 적용 여부를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되었다.

점심시간 후에 2부에서는 노숙자․주거권문제, 산업안전보건․한국의 이주근로자문제, 어린이․청소년 인권문제 등 세 가지 주제별 회의가 마련되어 있었다. 첫 번째 주제별 회의를 택하였다. 두 번째 주제에 관하여는 김은희의 「산업안전보건과 노동자의 권리」, 한국법제연구원 박사 최홍규의 「유엔이주근로자 권리조약과 한국의 이주근로자」의 주제발표가, 세 번째 주제에 관하여는 서울교육대 교수 허종렬의 「학교교육에서의 어린이․청소년 인권보장실태와 개선방안」, 동국대 교수 심희기의 「한국의 교육체벌의 실태와 한국인의 체벌담론의 현 위치」의 주제발표가 있었다.

노숙자․주거권 문제에 관하여는 한국도시연구소 연구부장 김수현의 「우리나라의 노숙자대책과 인권」, 중앙대학교 교수 하성규의 「주거권 보장과 인간다운 삶」을 들었는데, 노숙자에 대한 사회적 처우나 태도는 주거권의 문제로 보통 접근되지만 실업과 빈곤, 사회적 차별, 정신적․육체적 질환 등과 관련되어 있고, 노숙자의 권리 자체가 보호되는 명시적 조항의 사례는 없기 때문에 일부에서는 가족단위 노숙자를 제외하고는 보호할 가치가 있는가 하는 문제가 오랜 논란거리가 되어왔다고 한다. 주거권과 관련하여 강제철거의 문제가 국제사회에서 논란이 되고 있고, 우리나라는 강제철거에 의한 주거권 침해 정도가 가장 심각한 나라로 지적되었다. 유엔인권위원회는 강제철거를 명백한 인권침해로 규정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시간에 인상깊었던 점은 참가자들 사이에 ‘인권’의 정의에 대한 합의가 이루어지지 아니한 상태라는 확인이었다 이와 같은 노숙자보호, 주거권보장 문제는 국가의 경제력을 바탕으로 하므로 주거권이 국가에 대하여 직접보호를 청구할 수 있는 의미의 권리인가, 프로그램 규정 아닌가, 권리는 아니지 않은가 하는 논쟁들이 있었다.

인권이 무엇인가 하고 막상 정의하자면 이 또한 막연하게 쉬우면서도 막연히 어렵다. 인간의 권리이며, 권리는 1차적으로 국가권력에 대하여 보장을 요구하는 무엇이라고 할 수 있고, 20세기 후반에 와서 국제인권법 차원에서 보편성을 획득하면서 국가 내 헌법질서에서 보호되는 기본권보다 넓은 의미로 정착되었다고 생각한다. 기본권을 국제적 보편성을 갖는 인권의 개념에 비추어 반성할 필요가 생긴 것이다. 주거권문제는 국제인권법 차원에서 규정되는 인권이지만, 헌법질서 내에서 실체적 보장을 획득하고 있지는 못하기 때문에 체험과 입법의 부재로 그와 같은 논란이 비롯되었다고 생각한다. 더욱이 우리는 헌법질서 내의 기본권 규정에도 못 미치는 인권침해, 그중에서도 가장 기본적 권리인 자유권의 침해상황을 오래 겪어왔고, 그 문제 또한 해결되지 아니한 미완의 과제로 남아 있다. 이러한 역사적 체험의 중층구조가 문화경제적 권리를 포함하는 것으로서의 인권의 합의를 어렵게 하는 또 한 가지 이유가 된다고 생각한다.

이 행사에서도 우리 사회의 국가권력에 의한 생명과 자유의 핵심적인 인권 침해와 과거청산문제를 주축으로 하여 현재 우리 사회와 국제사회에서 논의되는 인권의 스펙트럼을 총망라하는 기획의도가 뚜렷이 드러나 있었다. 그러니 어쩌면 이 행사 자체가 인권이 무엇인가 하는 근본적 정의부터 현시점에서 재검토하며 논의를 축적해나가고자 하는 과정으로서 의미를 지녔다고 볼 수 있다.

둘째날 3부에서는 국가권력과 인권 2, 난민문제, 국제인권활동문제 등 세 가지 주제별 회의가 마련되었는데, 난민문제에 관하여는 법제연구원 박사 문준조의 「난민의 인권」, 경북대학 교수 김태천의 「대량 난민사태에 대한 국제법적 대응」의 주제발표가, 국제인권활동문제에 관하여는 외교통상부 인권사회과장 김종훈의 「한국의 국제인권활동 고찰-유엔활동 중심으로」, 이성훈의 「한국 국제연대 인권운동의 현실과 과제」의 주제발표가 있었다.

국가권력과 인권 2 파트에서 형사피고인의 인권문제를 발표하게 되었고, 박승옥이 「수사절차에서의 변호인의 조력을 받을 권리」를 발표하였다. 원래 이 부분은 행형문제, 피의자의 인권문제가 발표될 예정으로 있었는데 준비하는 과정에서 주제가 다소 변경되었고, 피의자의 인권문제를 발표하기로 한 울산대 교수 조국이 참가를 못하였다. 그이는 나중에 서면으로 주제발표에 참가한 것으로 알고 있다. 민변회원 이석태가 사회를 맡았는데 너무나 매끄럽고 유머러스한 솜씨를 발휘하였다.

어찌 보면 진부한 주제라서 참가자들이 적을 것으로 예상하였으나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보였다. 법학교수들은 물론, 일반 현장운동가들도 형사재판의 과정을 알 필요성을 느껴서였던 것으로 들었다.

토론의 쟁점은 왜 아직까지도 50년씩이나 구속재판제도가 청산되지 못하느냐에 모아졌다. 이 부분에 대하여는 박승옥이 현실적인 문제로서 권력기관에 대한 냉정한 비판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부산대교수 허일태는 독일의 예를 들어 오판에 대한 응징이 필요하다는 주장을 하였고, 발표가 끝난 후에도 형사피고인의 인권의 근거로 든 인간의 존엄론에 대하여 많은 조언을 해주고 관련 서적을 보내주어 무척 고마웠다.

맡았던 부분이 끝나고 나니 일단 홀가분하였다. 이날 저녁은 밖에 나가 식사를 하기로 예정되어 있었다. 가까운 횟집 2층으로 올라가니 2층 전체에 한상 가득 해물반찬과 제주도의 한일소주가 차려져 있었다. 마치 감옥에서 풀려 나와 어머니가 차려주는 밥상을 맞으면 이렇겠구나 하는 해방감에 들떴다. 다른 이들 모두 갑자기 생기가 돌면서 와글와글 시끄러운 식사시간이 되었다. 아마도 일곱 시간 내리 앉아서 집중하여 듣고 공부하는 것이 피곤하였던 듯하다. 과장된 표현일 수 있지만 고된 노동 뒤에야 맛있는 밥을 느끼며 놀이다운 놀이와 휴식을 취할 수 있다는 새삼스러운 확인을 하게 되었다. 더 비약을 하자면 고된 노동과 고통스러운 삶에 깊이 직면할수록 해방되고자 하는 절절한 꿈을 담은 놀이의 경지도 깊어진다. 삶이 예술이 되는 순간이나, 문득 고된 노동 속에 태어난 진도아리랑이 생각난다. 이러한 확인은 거꾸로 말하면 평소에 얼마나 부질없이 치열함에 닿지 못하소 살고 있는가 하는 자기반성을 불러일으킨다. 제주도에서 돌아와서 하루하루를 치열하게 살아보려고 노력하지만, 오랜 습성이 붙들어맨다.

이날 또한 목마름을 맥주를 시켜서 두어 잔을 마시니 얼이 붉어지면서 취기가 올랐다. 주최단체 위원인 국회의원 이미경이 곁에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첫날 교수 이정옥이 제의한 선언에 관하여 서로 필요하다는 공감을 하였다. 다른 이들과도 술잔을 기울이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저녁식사가 끝난 후에 계속 앉아서 술을 마시는 사람들도 있었다

계단을 내려오니 날씨가 쌀쌀하여 피워놓은 난롯가에 사람들이 불을 쬐고 있었다. 추위를 어지간히 타는지라 끼여들었는데 그 자리에 있던 교수 이삼성이 2차를 가자고 제의하여 한사람 두 사람씩 모여들었다. 민란이 이렇게 해서 시작되는구나 하며 농담을 나누었다. 결국은 호텔로 돌아가는 버스를 타고 서귀포시에 들르면서 20명이 넘는 사람들이 내려서 합류하였다. 최영도 회장도 인권운동사랑방 배경내가 코트를 빌려 입고서 내려버리자 코트를 따라간다면 합류하였다. 2층 단란주점 대부분의 의자를 차지하고 앉았는데, 『시사저널』기자 박성준, 성공회대 교수 김동춘, 여성의 전화 박인혜, 한국형사정책연구원 박미숙 등과 한자리에 앉아서 주거니받거니 하였다. 참가자들의 행복추구권이 비로소 보장되는 순간이었다. 『말』지 기자 노정환의 리드로 모두 노래 한 곡씩을 불렀다. 그 날 밤 열두시가 넘고 한시가 넘어가니 같은 방을 쓰는 이혜선을 깨우기가 미안하여 결국 새벽까지 마시자고 하는 사람들을 따라가서 다섯시에야 들어가게 되었다. 이혜선은 새벽에 깬다고 하였기 때문이었다. 그 날 인상적이었던 사람은 박인혜였다. 박인혜는 나와 나이가 같은데 너무 생생하고 활기 넘치게 노닐었다. 박인혜가 부회장으로 있는 한국 여성의 전화는 밤새 춤추고 논다고 한다. 그러고는 다음날 아침 아홉시에 다시 회의를 한다는 것이다. 그 열정에 깊은 감명을 받아서 돌아와서는 2주 뒤에 열린 민변 신입회원 연수원 때 우리도 밤새 놀고서 다시 다음날 아침 일찍 회의를 해보자고 하였으나 역시 안 되었다.

새벽 두 세시쯤에 이삼성의 방에 대여섯 명이 모였다. 『뉴스플러스』 기자 서영아가 우연히 국가보안법 이야기를 꺼내면서 그때부터 두시간 넘게 인권, 국가보안법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그 시간에 주한미군범죄근절운동본부 사무국장 정유진이 눈이 부시다며 불을 끄자고 하였다. 정유진은 나중에 그 시간을 가장 아름답게 추억한다고 이야기하였다. 불을 끈 방에 달빛이 스며들어와서 어두운 바다를 느끼며 앉아 있자니, 그 기억이 깊은 푸른 빛으로남아 있다고 이야기 하였다. 이야기 끝무렵 서양아의 무언가 날카로운 질문에 글쓰기의 허무함을 고백한 기억이 난다. 법률을 한다는 것, 글을 쓴다는 것, 현실은 힘의 싸움이며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데 글쓰기가 무엇인가. 그침없이 진실을 찾아서, 힘의 저 문 밖에서 힘에 대항하며 가고자 하는 것, 그런 내용이었던 듯하다.

셋째 날

셋째 날은 짧은 잠을 청하고 일어났으나 서울에서와 같이 피곤하지는 않았다. 아침아홉시에 과거청산의 인권문제를 주제로 전체회의가 마련되었다. 민족민주열사추모기념단체 집행위원장 김학철의 「중대한 인권침해사례인 의문사 해결을 위해」, 안산전문대교수 최미경의 「조작간첩사건과 인권문제」, 조용환의 「성문화된 관습형법? - 국방경비법의 인권문제」발표를 들었다.

정치적 의문사의 본질은 국가테러리즘에 있다는 명쾌한 정의가 인상깊었다. 국가권력의 살인․학살․고문은 반인도적 범죄에 해당하며 이는 어떠한 이유로도 절대로 용인되거나 타협될 수 없는 인권의 마지노선에 위치한다. 뉘른베르크 나치전범재판이나 프랑스 드 골 정권의 나치협력자에 대한 철저한 대숙청은 바로 그러한 정신의 표현이며 숙청과정의 고통을 수반하더라도 다시는 그와 같은 일을 되풀이해서는 안 된다는 역사적 전형을 세워 반독재 ․민주․정의의 초석을 마련하고자 하는 데 있다.

국제연합의 ‘전쟁범죄 및 반인도적 범죄에 대한 법적용 제한의 비적용에 관한 다자간 협정’ 은 반인도적 범죄에 대하여 공소시효의 적용을 배제하였다. 권력에 의한 학살의 실체를 밝히기 위해서는 의문사에 대한 진실규명이 앞서야 한다. 우리나라에서 이 문제는 번번이 정치권력의 야합 앞에서 좌절되어왔으며, 가까이는 5공화국 당시의 의문사에 대해서도 그 무엇 하나 진실이 규명된 바 없다. 국가보안법에 의한 침해사례는 물론 의문사에 대한 진실추구는 우리 인권문제의 출발점이라고 생각한다. 우리 사회는 전체적으로 이러한 인권의 근본에 대한 각성이 마비된 상태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정치권력의 행태를 비난하면서 우리 스스로 그 논리에 휩싸여 있는 것이다. 적절한 재판과 사면절차를 거쳐서 5공의 주범들이 버젓이 돌아다니고, 정치세력화의 움직임마저 보이면서 집권을 위한 정치협상 대상이 되고 있다.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들에게 인권의 마지노선이 무너져 있다는 현실의 체감능력은 마비되어 있는 듯하다. 우리 현대사가 청산되지 못하고 남아 있는 과거의 시체들로 가득 차서 정신마저 도착된 세사에 살고 있음이 서글플 뿐이다.

조작간첩사건에 과한 논의는 마침 민가협 남규선으로부터 간첩이라는 이유로 장기복역을 마친 황주명 사건기록을 검토하려고 받아놓은 상태였기 때문에 관심이 갔다. 조작간첩사건이라고 이야기하는 범위에는 이데올로기와 전혀 무관한 사람들이 희생자가 되었다는 점, 엄청난 고문과 불법구금이 수반되었다는 점이 지적되었다. 조작간첩 사건으로 추정되는 경우에는 법적인 접근법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과연 형사재판절차의 원칙들이 지켜졌는가, 실체판단을 위한 증거이정에 법리오해는 없는가 하는 문제들이다. 국가보안법에 관한 주제발표시간에 누군가 지적을 하였는데, 재판 자체에서 사실인정이 다른 일반사건들과는 달리 증거에 의하지 아니한 허구설을 바탕으로 한다고 토론하였다.

한편 조용환은 제주도 4․3사건 등의 좌익사범 처단은 물론 6․25전쟁 중에 군형법 이전 처벌법규로서 위력을 떨쳤다고 하는 국방경비법과 해안경비법이 사실은 공포된 적도 없는 유령의 법률이며, 그것이 국가보안법은 물론 사회안전법을 거쳐 보안관찰법에 이르기까지 대한민국 법률로 인용․계승되는 형태로 살아남아 있다고 밝혀서 소름이 끼치게 하였다. 도대체 일체치하의 통치법령은 물론 국방경비법도 아무런 법적 근거 없는 유령들이라고 하니, 사람들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이날 전체회의는 행사기간 중 가장 심각하고 경건한 분위기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토론도 그만큼 진지하고 치열하였다. 다만 법학교수들을 중심으로 토론에 몰입하다 보니 반인도적 범죄의 공소시효문제며 너무 지엽적인 법률론으로 치우치는 감이 없지 않았다. 사회를 맡았던 성폭력상담소장 최영애는 이 점을 지적하면서 현장에서 살아 숨쉬는 인권운동은 없는 법도 만들고 있는 법도 없앤다며 그 역동성을 이야기하였다.

이날 전체회의는 처음 김학철이 의문사를 주제로 한 시를 읊으며 시작하였고, 마지막으로사회자가 매듭을 지으면서 그 시를 다시 차분한 어조로 낭독하여 사람들의 가슴에 숙연한 슬픔이 자리잡게 하였다. “․․․그대여, 내죽음을 기억해다오, 내 원한을 풀어줄 사람은 그대뿐일세․․․.” 전체회의 석상에서 이미경 의원이 행사를 마칠 때 인권에 관한 공동선언을 할 것을 제안하였고, 잠깐의 논의 끝에 이미경, 박인혜, 이성훈 등 대표를 구성하여 그날 오후까지 서면으로 참가자들의 의견을 수렴하여 정리하기로 결정하였다.

이날 점심식사 후에는 여성운동 관계자들의 제안으로 지하 룸에 50명 정도가 모여서 즉흥 오락시간을 가졌다. 박인혜가 나서서 주도하였는데 사람들을 둥글게 두 줄을 만들고서 바깥 원에 있는 사람들이 돌면서 서로 손을 붙잡고 눈을 마주보며 가장 아름답게 들어오는 부분들 칭찬하여 주라는 것이었다. 어색하기 짝이 없었으나 재미가 있었고, 그때 손잡고 인사한 사람들은 오래 기억에 남았다.

그 다음에는 20대, 30대, 40대, 50대로 모여 앉아 그 날 밤 놀이계획을 세우는 게임을 하였는데, 20대인 여성 서 너 명은 40대에 합류하여 광란의 밤을 보내고 싶다고 하였다. 그래서 40대는 무조건 춤추러 가는 것으로 계획을 세웠고, 50대는 차를 마시며 노후걱정을 하는 계획을 세운 것으로 기억하는데 그 50대 계획에 웃음이 쏟아졌다. 역시 30대는 시간별로 구체적이고 짜임새 있게 한라산 등정과 밤새 술 마시는놀이계획을 세웠다. 이날 밤 전체 참가자들이 한라산 등정 - 차로 일정한 고지에까지 올라가서 구경하는 - 을 하려고 하였으나 구름이 짙게 끼여 무산되었다. 이러한 즉석에서 마련된 오락시간은 서로 허물없이 친숙해지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점심시간 후 2부에서는 국가권력과 인권 3, 장애인의 인권, 사회경제적 권리 등 세 가지 주제별 회의가 마련되어 있었다. 장애인의 인권에 관해서는 한신대 교수 김성재의 「장애인 인권과 사회통합」, 국립특수교육원 원장 윤점룡의 「장애인의 교육권」,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 국장 이예자의 「여성장애인의 차별과 희망」의 주제발표가, 사회경제적 권리에 관하여는 서울대 교수 조흥식의 「경제위기하의 생존의 권리와 복지권」, 김동춘의 「신자유주의와 한국 노동자의 인권」, 이대훈의 「발전의 권리와 개발」의 주제발표가 있었다. 사회경제적 권리에 관하여 가장 듣고 싶었지만 다시 국가권력문제를 못 떠나고 첫 번째 주제를 택하였다.

국가권력과 인권 3에서는 김주한의 「국가정보의 전자화와 민주주의와 인권」, 부산대 교수 고영삼의 「국가기관의 정보수집 활동과 시민의 인권문제 」를 들었다. 김주한은 프라이버스 권리를 사민권(私民權)으로 개념정립을 하고 국가의 활동을 국민이 감시할 수 있는 적극적 권리로 이해하며, 국가의 데이터베이스를 이용한 감시체제의 위험성을 지적하고 그 작동과정을 감시할 수 있는 장치마련을 강조하였다. 고영삼도 정보화단계에서 정보권력화된 국가의 정보수집활동은 정확한 정보에 기한 예측 가능성을 토대로 복지사회의 이상을 실현하는 긍정적 기능을 갖고 있는 반면, 인권침해소지가 높아지는 위험성의 양면을 지적하였다.

김기중은 우리의 호적제도가 현실의 생활관계를 전혀 반영하고 있지 못한 문제점, 주민등록제도는 선진국이 사건별 편제방식을 취하고 각각의 제도는 서로 연계되어 있지 아니하며 번호부여가 없어 순수한 의미의 신원확인에 그치고 있는 데 반하여 우리나라의 주민등록증제도는 개인별 주민등록번호를 부여하고 신분․주거․사건등록이 모두 연결되어 있어 사회를 단일한 유기적 조직으로 묶어내는 기능을 함으로써 전체주의적 질서에 기반하고 있는 점을 지적하였다.

이 시간에는 개인정보 노출에 의한 권력의 통제와 인권침해문제가 집중적으로 논의되었는데, 여성운동 관계자들은 현재 전개되고 있는 호주제 폐지운동과 관련한 질문을 던지기도 하였다. 정보화사회에서 국가권력의 물리적 통제방식은 정보수집 이용을 통한 보다 정교하고 기술적 통제방식으로 변화되고 있는데, 우리 사회는 전시대적 전체주의적 질서를 바탕으로 비롯된 문제들이 해결되지 아니한 채 이러한 정보화사회의 위험부담을 고민해야 하는 중첩구도에 놓여 있는 것이다. 세계사적으로 전개된 인권의 모든 쟁점들이 이 좁은 사회 안에 얽혀 있으니 그 두꺼운 업(業)을 어찌 풀어나가야 할 것인지, 이렇게 서로 모여 의논하고 실천방법을 점검해가면서 한가닥 한가닥씩 긴호흡으로 걸어갈 수밖에 없다.

오후 다섯시 반쯤 잠시 단체사진을 찍고서 시작된 전체회의는 뒤늦게 내려온 정신문화연구원 원장 한상진(발제예정 후 그때까지 사이에 취임함)의 「유교의 국가, 사회윤리와 인권, 민주주의 」, 서울대 교수 정진성의 「인권의 보편성과 특수성」주제발표로 시작되었다.

전자의 요지는 한마디로 문화적 ․감성적 접근방법을 통하여 우리의 전통문화인 유교에서 살려낼 수 잇는 규범적 가치들을 재창조 ․재해석하여 통치질서의 기반은 물론 우리 사회에 적합한 인권내용으로 발전시키자는 것이었다. 후자는 참다운 인권의 보편성은 여러 문화들의 특수한 입장을 이해하는 다문화주의 시각에서 탐색해나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인권의 보편성을 서구적인 것으로 단정지을 것이 아니라 우리 문화와 전통에서 인권의 진정한 보편적 가치를 끌어내자는 취지이다.

이러한 논의들은 전체적으로 한국 사회의 문화적 특수성, 특히 전통으로부터 인권의 내용을 찾아보자는 점을 강조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한국 사회의 특수성이라는 것이 인권침해의 부정적 형태로 나타나고 특수한 권력억압형태로부터 시달림을 받아온 구체적 역사현실을 떠나서는 매우 위험한 발상이 될 우려가 있다. 이점은 토론에서 상당히 심각하게 지적되었다. 정진성은 특수서의 장고는 문화적 의미에 불과할 뿐, 결코 국가안보를 내세운 약용을 인정할 수는 없는 것이며, 개인적으로 정신대문제로 강국의 영향력이 지배하는 국제연합에서 겪은 좌절감에서 이러한 관심이 비롯된 것이라고 못을 박았다.

이날 토론장은 가장 열기가 넘쳐 질문자가 쇄도하면서 순서를 기다릴 정도였다. 특히 한상진 원장의 지위와 관련하여 이러한 유교적전통의 강조는 그에 부합하는 정책을 만들어내는 작업을 하려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불러일으켰다. 그 후 「신동아」6월호에 실린 김대중 대통령의 특별기고문인 「충효사상과 21세기 한국」은 그러한 우려를 확인시켜주었다. 규범이나 가치개념은 현실의 정치 문화 속에서 태어나며 그 역사 속에서 체계화되고 규정된다고 본다. 역사적 몸체를 떠나 원래의 정신이 따로 존재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정치는 물론 우리의 일상문화 속에 남은 유교적 전통도 부정적 폐단으로 작용하는 부분이 크다. 정치를 주도하는 세력이 그러한 전통가치의 복원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국가사회, 정치적 질서와의 관계에서 비롯되는 인권문제를 호도할 우려가 있을 뿐 아니라 권력이 사상을 만들어내려는 시도 자체가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생각한다. 사상은 권력이 만들어낼 수 있는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한나 아렌트는 『인간의 조건』에서 이데올로기를 만들어내는 것이 가능하다는 믿음이 전체주의라고 지적한 바 있다. 지나친 비약 같지만. 그러한 관점에서 날카로운 거부감이 들었다.

또한 사회 정치적 현실로서 구체화 되었던 유교에 대한 비판과 성찰을 떠나 문화적 접근방법만을 강조하는 것 자체가 문화적 상대주의에 빠질 위험이 있다. 이석태, 조용환, 이삼성, 배경내 등이 같은 의미에서 그러한 문제점들을 지적하였고, 특히 교수 김성재의 「심청전」이야기는 현장에서 ‘김성재 이론’으로 회자될 만큼 재미있게 받아들여졌다. 심청은 유교의 효의 측면에서 칭송되나, 현재에 와서 보면 인신매매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이날 저녁식사 후 오락시간에는 이대훈이 뒤를 이어받아 「별주부전」은 장기(腸器)매매에 해당한독 유머를 던져 웃기도 하였다. 물론 이와 같은 시도들이 결코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고, 인권론의 바탕에 깔린 서구문화의 이질성, 서구강대국들의 편의에 따른 이해관계를 지양하고 문화의 구체적 특수성을 반영하여 보다 현실 적합성을 갖는 인권의 개념을 모색해 보자는 진지한 논의인 점에는 틀림이 없다. 박승옥은 유학에 대해 공부하고 있어서 그러한 긍정적 측면을 옹호하였다.

저녁식사는 낮에 오락시간을 가졌던 지하 룸에서 하였고, 곧이어 다시 박인혜의 사회로 조별 노래 대항전을 가졌다. 각 조별로 이름과 주제가를 정하여 춤을 곁들여 발표하였는데 갖가지 기묘하고 재치 넘치는 아이디어들이 쏟아져 나와서 분위기가 고조되었다. 밤 아홉시가 되어갈 무렵 낮의 오락시간에 그 날 밤놀이 계획을 세운 세대별로 로비에 모여 서귀포시로 나갔다. 길거리에서 결국은 모두 합류하여 50명이 넘는 인원이 단란주점을 차지하고 놀이시간을 즐겼다. 참여연대 정책실장 김기식, 장소영, 노정환, 박승옥 등과 어울렸는데 여기에서도 테이블별로 대항전처럼 노래가 이어졌다. 노래를 잘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았다. 리영희 선생의 열창은 많은 박수세례를 받았다.

한시가 되어갈 무렵 나와서 다시 절반 정도의 사람들이 골목에서 마주보는 소주를 파는 실비집과 단란주점으로 나뉘어 3차를 즐겼다. 실비집에서 이대훈과 한 자리에 앉았는데, 이대훈은 특히 이 행사에서도 서로의 호칭문제가 권위적이라는 점을 지적하였다. 누구누구 교수님, 누구누구 변호사님 하다가 현장운동가들은 누구누구 씨 한다는 것이다. 이 점을 전혀 의식하지 못하였는데, 호칭은 바로 우리 의식의 겉옷이며, 호칭에서 통일되고 자유로워짐은 참된 수평적 민주주의 사고를 자리잡게 하는 데 중요하다고 보여진다. 그럼에도 너무 오랜 계층적 권위주의 사회에 익숙하여 있고 마땅한 통일방법도 없어서 고민을 해볼 만한 문제이다. 다음날 전체회의에서 한번 문제제기를 해보자고 약속하였다. 마지막 밤이고 바다에 취해서인지, 다시 만나기 어려운 자리라는 생각에 취해선지 끝까지 어울리고 마시다 보니 진짜 취하였다. 태어나서 이틀째 밤샘 술을 마시기는 처음이었고 앞으로도 있기 어려운 체험이었다.

넷째 날

다음날 아침 일어나서는 드디어 여덟시 반부터 예정되어 있던 전체회의를 빠지고 회의가 끝날 무렵 들어갔다. 나중에 들어보니 그날 제시간에 나온 사람은 20여명 정도에 불과하였다고 한다. 회의에 들어가기 전에 한 시간쯤 혼자서 호텔 뒷마당에 나가 거닐고 바다를 바라보며 커피를 즐겼다.

이날 전체회의는 현안인 국가인권기구 문제를 다루어 한국여성단체연합 공동대표 지은희의 ‘국가인권기구의 기능, 역할, 활동방향’과 남규선의 ‘국가인권기구와 인권운동’의 주제발표가 있었다.

열한시쯤까지 마지막 마무리를 하며 행사를 마치게 되었다. 마무리하는 자리에서 공동선언문을 채택하기로 한 문제를 의논하였다. 대표로 뽑힌 사람들이 의논 끝에 참가자들 내부적으로 서로의 결의를 다지는 형식의 선언문을 작성해왔다. 여러 사람들이 그러한 형식은 의미가 없고, 대외적 선언문이 되어야 한다는 의견을 내었고, 가장 중요한 이슈, 국가보안법 철폐와 국가인권기구 문제를 선언내용에 포함시키기로 합의가 되었다. 그날 점심시간에 김성재 교수가 나서서 인터넷을 통하여 선언문 초고를 보내고 서명을 받기로 하였다.

막 마치는 자리에서 이대훈과의 약속을 기억하고 얼른 호칭문제에 대하여 토론할 시간은 없지만 생각해보자고 이야기를 꺼냈다. 짐들을 정리하고 나오다가 음식점에 들러 갈치회를 곁들여 점심식사를 하였다. 잠시 길가에 서서 자동판매기의 커피를 마시면서 이석태, 조시현등과 그 호칭문제를 계속 이야기하였다. 우리끼리는 앞으로 서로 시현 씨, 금실 씨, 석태 씨로 부르자고 약속하였으나 실천할 자신은 서지 않는다. 이선배라고 부르면 안 되느냐고 하자, 이석태는 그 선배소리도 서로의 대화에서 위계질서를 세우는 경우가 많아서 달갑지 않다고 하였다. 나중에 돌아와서 민변 여성위원회 준비모임에서 같은 문제를 내놓고 우리끼리는 이름을 부르자, 아니면 꽃이름을 하나씩 달아서 불러주자고 이야기하기도 하였다.

서울로

버스를 두 대로 나누어 오후 두시 반, 세시 비행기로 서울로 출발하도록 예정되어 있었다. 세시 비행기로 출발하게 되어 먼저 떠나는 버스에 가서 사람들에세 인사를 하였다. 뒤에 남은 사람들은 주최단체 위원인 국회의원 유인태의 동생 유인택이 제작하는 영화촬영현장에 들르게 되었다. 작가 현기영의 ‘변방에 우짖는 새’를 각색한 ‘이재수의 난’으로 제주도 최대 민란을 다루는 내용이고 박광수 감독, 이정재․심은하 주연이었다. 한참을 달리다가 목장 초원으로 접어들었다. 따가운 햇빛아래 마른 쇠똥과 말똥이 편안하게 여기저기 누워 있고, 구릉 위에 교수형에 처해지는 사람 모습의 인형들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구릉을 넘어 크고 움푹 패어진 분지에 촬영현장이 세워져 있었다. 부지런한 사람들은 멀리 보이는 현장까지 내려가서 구경을 하고 올라왔다. 버스를 타고 나오는 길에 박광수 감독과 분장을 마친 이정재를 만났다. 역시 멋있는 스타를 보는 일은 왠지 기쁘다.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주는 무엇이 객관화되어 나타난 직업이 연예인이 아닌가 한다. 심은하를 못 봐서 아쉬워하며 공항으로 향하였다. 제주의 투명한 하늘, 공기, 온유하게 낮은 자연, 버스에 타고서나마 거기에 동화감을 느껴보았다.

술자리에서는 믈론 행사기간 중 시간이 날 때마다 사람들과 둘이서, 삼삼오오 짝을 지어서 대화는 그침이 없었다. 서로 자료를 주고 받기로 약속을 한다든가 정보를 교환하고 일과 관련된 도움을 약속하기도 하였다. 서울 여성의 전화 사무국장 정춘숙과도 서울에 가서 만나자고 약속을 하였다. 성남 외국인노동자의 집 김해성 목사는 구체적으로 변호사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하였다. 성남에 있는 민변 회원이 혼자서 열심히 도와주고 있으나 일이 너무 많아 부탁하기가 미안할 지경이라고 하였다. 한국여성단체연합 대표 지은희도 변호사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하였다. 민족민주열사추모기념단체 집행위원장 김학철은 민변의 도움에 고마움을 표시하기도 하였다.

어느 분야에서든 ‘인권’과 관련되는 한 변호사의 조력자로서의 역할은 필연적이라는 우리의 위치지움에 대한 새삼스런 인식을 하는 자리이기도 하였다. 온갖 층위에서 온갖 방면에서 너무 많은 할 일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인권운동의 실무와 이론을 매개하고, 지원자로서의, 각 분야별 운동의 연결자로서의 민변의 역할에 대해서도 깊이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었다.

이번 행사는 ‘인권’을 주제로 한 최대규모의 학술행사였고, 한국의 인권상황을 세계적 차원에서 국제인권법에 비추어 반성하고 전망하고자 하는 노력이 돋보였다. 또한 한편으로는 학계의 논의수준이 구체적 각론에까지 섬세하게 진전되고 있다고 느껴졌다. 국가권력과 인권을 축으로 하여 한국 인권사의 과거로부터 미래지향적 쟁점까지, 기본적 인권인 시민적 자유권으로부터 문화적․경제적 권리의, 소수자인권의 다양한 부분까지 점검해보는 소중한 자리였고, 참가자들은 이구동성으로 많은 공부가 되었다고 흡족해하였다.

다만 학술행사이다 보니 학계의 이론에 치우쳐 교수들이 주도하게 되고 현장에서의 문제와 균형적 접점을 찾는 데 일부 미흡한 부분이 있었다고 지적하는 의견도 있었다. 이 점은 이와 같은 행사를 출발점으로 하여 한 가지의 쟁점을 놓고서 이론, 실무 양 측면에서 접근해 보는 방식의 토론회를 만들어보면 해결될 수 있을 문제이다.

행사를 일회적으로 그치고 말기에는 아쉽다는 의견들이 많았다. 이 기회에 어떠한 정기모임으로 발전시키면 좋겠다는 의견들을 피력하였으나 더 이상 진전되지는 못하였다. 누군가 선뜻 나서지를 못하였고, 주최단체의 중립성을 지키기 위하여 조용환은 끝까지 침묵만 유지하였다. 행사에서 발표된 글들은 묶어서 출판하기로 한 것으로 들었다.

돌아오는 길에 남규선과 나란히 앉아서 모처럼 제주도에서의 일이며 즐거운 대화를 하였다. 서울에 와서는 공항에서 그동안 고생하였던 조용환, 실무자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며칠만에 보는 서울은 차갑고 거대한 빌딩들이 황량하고 사나운 인상을 주었다. 간소한 뒤풀이로 남규선, 박성준, 노정환과 영등포구청까지 지하철을 타고 나가서 차를 마셨다. 집에 돌아오니 밤이 되었고, 그때쯤 서서히 취기로부터 깨어나면서 깊은 잠에 빠졌다. 강금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