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물의 질서

비트겐슈타인이 러셀에게

친애하는 러셀 선생님 3월 2일과 3일자 우편 엽서들,정말 고마웠습니다.저는 그 동안 아주 힘든 시간을 보냈습니다.선생님의 생사조차 알지 못할 정도로! 여기서는 일주일에 엽서 두 장밖에 쓸 수 없기 때문에 논리학에 대해 쓸 수가 없습니다.지금 이 편지는 예외에 속하지요.내일 집으로 돌아가는 한 오스트리아 의학도가 부쳐주기로 했습니다.저는 지난 6년간 저의 모든 작업이 담긴 <논리철학논고>를 썼습니다.제가 마침내 우리의 문제들을 해결했다고 믿습니다.건방진 소리로 들릴지 모르겠으나 저로서는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책을 다 쓴 것은 1918년 8월인데,그로부터 두 달 뒤에 포로의 몸이 되었습니다.원고는 지금 제가 가지고 있습니다.선생님 몫으로 한 부 베끼고 싶지만 양이 많기도 하고 안전하게 보내드릴 방법도 없습니다.그리고 아주 짧은 말들로 기록되어 사전 설명 없이는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그러니 다른 사람들도 물론 아무도 이해하지 못할 테지요.제가 볼 때는 수정처럼 맑아 보이지만 말입니다.어쨌거나 이 책은 진리와 집합과 수,기타 모든 것에 관한 우리의 이론을 완전히 뒤엎고 있습니다.) 집에 돌아가는 대로 출판할 생각입니다.지금으로선 빠른 시일 내로 돌아가기 힘들다는 것이 걱정입니다.그렇게 되면 선생님도 한참 후에나 만날 수밖에 없겠지요.선생님을 다시 본다니,상상조차 하기 어렵습니다.얼마나 좋을까요! 선생님이 여기로 찾아오시는 것은 아마 힘들겠지요? 감히 그런 생각까지 하다니 뻔뻔하기 그지 없다고 생각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하지만 만일 선생님이 세상 반대쪽 끝에 게시고 제가 갈 수 있는 상황이라면,저는 분명 선생님께 갔을 것입니다. 부디 편지로 근황을 알려 주시고 화이트헤드 선생님께도 안부 전해주세요.고령의 존슨씨는 아직 살아 계신가요? 이따금 절 생각해 주세요!

1919년 3월 13일.

(비트겐슈타인은 제 1 차 세계대전 중에는 오스트리아군에 종군하다가 이탈리아에서 포로가 되었는데, 이 즈음에 《논리철학논고》를 완성하였다

칼 융이 프로이트에게

본심을 두세 가지 말씀드려도 좋을지요? 저는 선생님에 대해 상반된 감정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그러나 이번 상황에 관해서는 솔직하고 정직한 견해를 표할 작정입니다.제 말씀을 의심하게 되신다면 사태는 선생님에게 그만큼 나빠질 뿐입니다.선생님이 제자를 환자처럼 취급하는 처사는 큰 실수입니다.이 처사로 인해 선생님은 노예근성을 가진 제자와 주제넘은 풋내기를 만들어내고 있는 것입니다.저는 선생님의 그런 희롱을 충분히 객관적으로 보고 있습니다.선생님은 일상사에서 무엇인가 인지되는 증상적 행동은 없는지 모두 눈치채고, 그 결과 자신에게 잘못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모든 사람들을 아들과 딸의 위치로 깎아내리고 있는 것입니다.그리하여 선생님은 아버지로서 높은 위치에 서서 혼자 안락을 즐기고 있습니다.순진하고 고분고분한 어느 누구도 예언자의 턱수염을 억지로 잡아당기려고 하지 못합니다. 저는 절대적으로 겸허한 마음으로 분석을 받아왔습니다.그 쪽이 훨씬 저 자신을 위하는 것이었습니다.환자가 얼마만큼 자기 분석에 몰두해도 신경증으로부터 빠져나올 수 없다는 것은 물론 알고 계실 것입니다.마치 선생님처럼 말입니다.선생님이 콤플렉스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지고,제자에 대해 아버지 역할을 하는 것을 중단하고,제자의 결점에 항상 눈을 번뜩이는 대신 자신을 잘 관찰한다면,저는 자신의 행동을 고쳐 선생님에 관해 딴 마음을 갖는 나쁜 생각을 즉시 버릴 것입니다.저는 자신의 견해를 소중히 하면서 표면상으로는 선생님을 편들어왔습니다만,선생님에 관해 진정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은 개인적인 편지로 전하려 합니다.선생님은 이 독특한 우정의 표시에 대해 분개하실 것이 틀림없을 것입니다.하지만 그럼에도 결국 이것은 선생님을 위한 것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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