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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이트헤드


Alfred North Whitehead

1861. 2. 15 잉글랜드 켄트 새넛 램즈게이트~1947. 12. 30 미국 매사추세츠 케임브리지.

영국의 수학자·철학자.

B.러셀과 공동으로 〈수학원리 Principia Mathematica〉(1910~13)를 집필했고, 1920년대 중반부터 하버드대학교에서 가르치며 광범위한 형이상학 이론을 발전시켰다.

성장배경과 학교교육

할아버지인 토머스 화이트헤드는 지금의 채텀 하우스 아카데미로 알려진 남학교를 설립하고 자수성가한 사람이었다. 아버지인 앨프레드 화이트헤드는 영국국교회 목사로서 할아버지와 교대로 이 학교를 이끌어 나갔고 뒤에 새넛의 성베드로 대성당 신부가 되었다. 결혼 전 이름이 마리아 세어러 버크매스터인 어머니는 부유한 군대 재봉사의 딸이었다. 그들은 화이트헤드가 학교생활이나 활발한 운동을 하기에 너무 약하다고 생각해서 14세까지 집에서 가르쳤다. 14세가 되자 영국에서 가장 좋은 학교 중의 하나였던 도싯의 셔본 학교에 들어갔다. 그는 고전적인 교육을 받았는데 수학에 특별한 재능을 보였다. 과잉보호를 받으며 어린시절을 보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지도자의 자질을 타고났다. 학교생활의 마지막 해에 그는 반장으로서 과외의 모든 훈련을 책임졌고 여러 경기에서 훌륭한 주장이었다.

1880년에 화이트헤드는 케임브리지대학교의 트리니티 칼리지에 장학생으로 들어갔다. 그는 수학강의에만 참석했고, 문학·종교·철학·정치학에 대한 흥미는 대화를 통해서 충족시켰다. 1884년 5월에 그는 사도(Apostles)라는 지성인 토론모임에 가입하게 되었다. 화이트헤드는 1883~84년 수학우등졸업시험을 우수하게 치러 트리니티 장학금을 받았고, 트리니티 칼리지의 수학 교수가 되었다. 그는 J. C. 맥스웰의 전자기론(그의 동료의 학위논문 주제)에 대한 관심을 수학적 기호체계와 개념에 대한 정밀조사 쪽으로 확장시켜나갔다.

현대 대수학의 개척적인 연구에 힘입어 그는 일반 대수학과 관련된 기호논리체계들을 자세히 비교·연구하려고 했다. 그러나 1891년 1월이 되어서야 〈종합적 대수학에 관한 논문 Treatise on Universal Algebra〉(1898)을 집필하기 시작했다. 이 논문 집필 1개월 전 에블린 W.웨이드와 결혼했는데, 그녀는 몰락한 아일핸드 지주 출신 젠트리의 딸로 프랑스에서 태어나 수녀원에서 교육받았다. 그녀는 희곡에 뛰어난 감각을 가졌고, 남다른 심미적 감수성을 지녀 화이트헤드의 생활을 매우 풍요롭게 했다.

결혼 직전, 오랫동안 간직했던 종교에 대한 관심이 새로운 전환을 맞았다. 그의 종교적 배경은 영국국교회와 단단히 묶여 있었다. 아버지와 삼촌은 사제였고 형 헨리도 사제로서 마드라스의 주교가 되었다. 그러나 화이트헤드는 추기경 뉴먼의 영향을 받아 로마 가톨릭 교회의 교리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약 8년 동안 많은 신학서적을 읽고 나서 그는 신학장서를 처분하고 종교를 포기했다. 이러한 회의는 제1차 세계대전 뒤에는 사라졌지만 그는 어느 교회에도 나가지 않았다.

화이트헤드는 1898~1903년 〈종합대수 Universal Algebra〉 제2권을 집필하던 중 러셀과 공동으로 방대한 연구를 하게 되면서 〈종합대수〉 제2권의 집필을 중단했다. 그는 러셀이 트리니티 칼리지의 입학 장학금 시험을 볼 때 이미 젊은 러셀의 탁월함을 간파했는데, 1890년 러셀은 수학을 공부하는 신입생이었고 화이트헤드는 그의 교수였다. 이 둘은 점점 친한 친구 사이가 되었다. 1900년 7월 그들은 파리에서 열린 제1회 국제철학회의에 참가했는데, 수학자인 G. 페아노가 산술기초를 명확히 하기 위해 기호논리를 사용하는 엄밀성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러셀은 즉시 페아노의 표기법을 완전히 익히고 그의 방법을 확장해나갔다. 1900년말 러셀은 훌륭한 〈수학의 원리 Principles of Mathematics〉(1903)의 초안을 썼다. 화이트헤드는 이 논문의 주논점(모든 순수수학은 재구성된 형식논리를 따르므로 논리와 수학 중 논리학이 더 기초학문이라는)에 동의했다. 1901년까지 러셀은 〈수학의 원리〉 제2권의 협력자를 찾고 있었는데, 논제는 엄격한 기호논법에 의해 확립될 예정이었다. 이 작업은 방대해져 결국 그들의 연구는 러셀의 책 〈수학의 원리〉와 무관하게 이루어져야만 했다. 그들은 그것을 〈수학원리〉라 불렀다. 1910년 〈수학원리〉 3권 중 첫번째 책이 출판될 때까지 이 일에 몰두했다. 본문의 '공식적'인 표현은 대부분 페아노나 화이트헤드가 창안한 표기를 썼다. 넓게 이야기하면, 화이트헤드는 철학문제(특히 논리형의 이론을 고안하는 문제)를 러셀에게 맡기고, 가르치는 의무가 없는 러셀이 실제로 책의 대부분을 썼다. 그러나 협력은 시종일관했고 러셀은 화이트헤드에게 같은 몫의 명예를 주었다. 〈수학원리〉의 기호체계를 이용해 화이트헤드가 쓴 규모가 큰 출판물로는 훌륭한 사색적 논문인 〈물질세계의 수학적 개념들〉(1905)이 유일하게 있다.

런던에서의 경력

1903년 트리니티 칼리지는 화이트헤드를 10년간 수석강사로 임명했고, 수학과 교수진의 수석교수로 선출했으며, 학교 규칙이 정한 최고 25년을 넘어 강의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그러나 화이트헤드의 미래는 아직 불확실했는데 뛰어난 수학자 대열에 들게 할 종류의 업적이 없었기 때문이다(그의 관심은 늘 철학적이어서 새로운 정리를 발견하기 보다는 보다 넓은 측면에서 수학의 성질을 이해하고 개념을 체계화하는 쪽으로 향했음). 그래서 트리니티 강의시절 말기에 그에게 케임브리지대학교 수학과 교수직에 오를 전망은 거의 없었다. 그는 비록 런던에 그를 위한 직위가 없었으나 만기까지 기다리지 않고 1910년 런던으로 갔다. 그러나 트리니티 칼리지에서 보낸 몇 년 간의 종사로 그는 케임브리지대학교의 평생 동안 펠로가 되었고, 펠로에게 정규적으로 연 4회에 걸쳐 나누어 주는 배당금의 2배를 받을 수 있는 자격을 얻었다. 이것은 가족을 돌보기에는 충분하지 않았으나 아내 에블린에게 용기를 주었다. 런던에서의 첫해에 화이트헤드는 대중을 위한 그의 첫번째 책인 〈수학의 소개 An Introduction to Mathematics〉(1911)를 썼는데, 이 책은 현재까지도 같은 그런 종류의 책들 중에서 가장 훌륭한 책의 하나로 꼽힌다. 1911년 런던에 있는 유니버시티 칼리지의 교수가 되었고 1914년 과학기술 임피리얼 칼리지의 응용수학교수가 되었다.

런던에서 화이트헤드는 그당시 영국의 일반대중이 받는 교육을 관찰했다. 그의 교수법은 항상 학생들의 잠재력을 이끌어내기에 능했는데, 수학에서 이해할 수 없는 문제들이 일관성 없이 가르쳐지고 있음을 느낀 화이트헤드는 가끔 수학교수법에 대해 강연을 했다. 그는 몇 개의 연관된 추상개념들의 기능에 대한 직접적인 감각을 개발시키기 위해 그것들을 여러 가지 방법으로 이용해 생생하게 이해하도록 한다고 강조했다. 또한 문학에서 교과과정은 여러갈래로 나누어져 있고 교수들은 외부 시험관이 만든 획일적인 시험체계에 묶여 있어 교수법이 문학의 즐거움을 가로막는다고 느꼈다. 1916년 그는 수학협회 회장으로서 〈교육의 목표:개혁을 위한 탄원〉이라는 제목으로 주목할만한 연설을 했다. 화이트헤드는 젊은이의 보호자들에게 교육의 목적은 지식을 학생들에게 주입시키는 것이 아니라 자기개발을 고무하고 인도하는 것임을 상기시켰다. 그는 "문화란 사고의 활동이고 아름다움과 인간의 감정에 대한 이해력이다. 단편적인 지식은 이것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라고 말했다. 화이트헤드의 연설은 비할 데 없이 명쾌했고 정열적이었고 현실적이었을 뿐 아니라 특수교육과 일반교육을 조화시킨 권위 있는 것이었다. 그뒤 자유와 규율의 조화라는 주제의 통찰력있는 논평을 썼다. 화이트헤드의 교육 논평이 영국 현실에 거의 영향을 미치지 못했지만 영국·미국 및 기타 여러 나라의 많은 교사들을 고무시켰다. 1919~24년 화이트헤드는 영국의 주요한 교사훈련 전문기관의 하나인 런던의 골든스미스 칼리지의 관리단체장을 지냈다. 또한 런던의 몇몇 과학기술전문학교 학장으로도 일했으며, 런던대학교에서는 이사회 이사, 학술자문위원회 회장, 이학부장으로 있었는데, 그의 통찰력·친절·상식 때문에 위원회에서 그는 매우 필요한 인물이었다.

화이트헤드는 평화적인 사람이었으나 평화주의자는 아니었다. 그는 전쟁을 몹시 싫어했지만 영국이 전쟁에 참여할 필요성을 느꼈다. 그의 맏아들 노스는 전쟁에 나가 싸웠고 그의 딸 제시는 외무부에서 일했다. 1918년 그의 어린 아들 에릭이 사고로 죽었고 그뒤 화이트헤드가 일을 계속해 나가는 데는 많은 노력이 들었다. 화이트헤드가 보기에 러셀의 평화주의는 단순했지만 그는 감옥으로 러셀을 방문해 계속 친구로 남았다. 러셀은 나중에 자신이 보여준 인내보다 더 큰 인내를 그가 보여주었다고 말했다.

그 기간 동안 화이트헤드는 또한 물리학의 철학적 기초를 세우고 있었다. 이 작업은 그가 기하학을 표현하는 데 있어 감지할 수 없는 실체(예를 들면 점들)에 관한 가정된 전제로부터 추론하는 것이 아니라, 연장(延長)을 갖는 사물들 사이의 복잡한 관계인 실제 공간의 과학으로 표현하는 데서 시작되었다. 지각할 수 있는 요소와 관계로부터 그는 기하학에 있어서 점들처럼 서로 관련된 실체들을 논리적으로 구성했다.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이 공간·시간·운동의 개념을 수정했기 때문에 이 물리학의 철학적 기초는 그의 연구의 시작에 불과했다. 화이트헤드는 이 3가지 개념(공간·시간·운동)이 외부세계에 대한 인간지각의 일반적인 특징에 기반을 두어야 한다고 확신했다. 1919년 그는 〈자연과학지식 원리에 관한 조사 Enquiry Concerning the Principles of Natural Knowledge〉를 출판했다. 이것은 탐구적이고 발전적이었으나 너무 철학적이고 복잡해서 물리학자들에게 영향을 주지 못했다. 화이트헤드는 1915년 철학자들과 함께 과학지식에 관한 인식의 토대에 대해 토론을 시작했고, 비수학적 저서인 〈자연의 개념 The Concept of Nature〉(1920)을 출판했다. 그는 지각할 수 있는 인간정신과 자연과의 관계에 대한 관념론적 견해를 거부했지만 러셀과 G.`E. 무어가 이끄는 물리적 실재론 학파에 속하지도 않았다. 사건이 자연의 기본요소이고 사건의 진행, 즉 창조적 진보가 자연의 가장 근본적 특징(나중에 그의 형이상학을 예시하는 원칙)이라고 주장하는 데 있어서 화이트헤드는 앙리 베르그송의 반기계철학에 다소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플라톤주의자적인 면을 지니고 있었는데, 사건들이 가지는 명백한 특징을 시간을 초월해 있는 실체의 '개입'으로 보았다.

미국에서의 경력

1920년대초 화이트헤드는 영어로 과학저서를 쓰는 가장 뛰어난 철학자였다. 1924년 초 하버드대학교에 재직하고 있던 그의 친구인 역사학자 H.O.테일러가 화이트헤드의 보증인이 되어 하버드대학교에 5년간 철학교수 임용을 제안받았다. 당시 그의 63세였고 임피리얼 칼리지에서는 길어야 2년 더 일할 수 있었다. 철학을 가르친다는 생각이 그의 마음에 들었고 그의 아내 또한 하버드대학교로 옮기는 데 진심으로 동의했다. 하버드대학교에서는 단순한 과학철학자가 아닌 대석학을 얻었음이 곧 드러났는데, 그는 G. 라이프니츠와 G. 헤겔에 비교할 수 있는 형이상학자였던 것이다. 1925년초에 보스턴에서 8개의 강좌를 열었고, 같은 해에 그의 신에 대한 초기 저작물을 덧붙여서 〈과학과 근대세계 Science and the Modern World〉를 출판했다. 이 책에서 그는 오랫동안 심사숙고해온 '과학적 유물론'(예를 들면 자연은 움직이는 물체, 즉 순전히 물질적인 에너지의 흐름으로만 이루? 沮낫募? 견해)의 대두·승리·영향을 극적으로 묘사했다. 그는 이 유물론이 수리물리의 추상체계를 자연의 구체적 실재로 잘못 판단하게 한다고 비평했다. 화이트헤드는 그런 추상관념에 정통해 있었고 그것들을 지적인 발명이 아닌 실제의 발견으로 보았다. 존재의 완전함에 대한 생각으로 그는 철학이 추상관념의 결점을 다양한 구체적 경험을 바탕으로 개선한 뒤 더 일반적인 개념으로 만들어서 보완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이 책의 중요성은 곧 인정되었다. 읽는 사람들에게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아마도 자연에게서 가치를 배제하는 것에 반대하며 그가 좋아하는 시인인 윌리엄 워즈워스와 P.B. 셸리에게 호소한 점이었던 것 같다.

1926년 그의 〈발달중인 종교 Religion in the Making〉가 출판되었다. 이 책에서 화이트헤드는 종교를 인간의 고독에서 가장 깊은 단계에 이르는 것으로 설명했다. 즉 사회 현상으로서가 아닌 우주를 향한 개인의 마음가짐으로서 종교를 설명했다. 1927년 1월 에든버러대학교에서는 새 학기에 10개의 기퍼드 강좌를 맡아달라고 요청했다. 이 강좌를 위해 화이트헤드는 '유기체 철학'(그는 이것을 형이상학이라 불렀음)이라는 복잡하고 전문적인 체계를 세웠는데, 유럽의 위대한 몇몇 철학자들 견해와의 '일치와 차이'를 고려했다. 특히 화이트헤드는 데이비드 흄에 반대하여 적절한 철학이론은 '실천'(practice) 위에 세워져야 하는 것이지 그것에 의해 보충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이 기퍼드 강의는 화이트헤드의 변색적인 가설, 즉 우주는 생성되어가는 것들로 이루어져 있고 그것들은 이전에 존재했던 우주와 신(새로운 가능성에 대한 영구적 공급원)이 제공하는 것(실재)의 무한성을 통합하고 조정하는 과정이라는 가설을 반영했다. 화이트헤드가 새롭고 어려운 전문용어를 쓰면서 이 가설을 1928년 6월 강의에서 소개했을 때 청중들은 전혀 호응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 강의 내용은 총 25장에 달하는〈과정과 실재 Process and Reality〉(1929)라는 책으로 출판되어 서구 형이상학의 가장 훌륭한 저서의 하나가 되었다.

화이트헤드는 존재의 이해 가능성에 확고한 신념과 과거 이원론을 극복할 만큼 폭넓게 전반적인 생각의 틀을 구성할 수 있는 우수한 능력을 가졌다. 그러나 그는 존재의 무한성을 이해하는 데는 그 이전의 접근법을 취하는 것보다 더 좋은 체계가 없음을 알았다. 그는 오랫동안 확고했던 뉴턴 물리학체계의 붕괴를 보아왔고 그 교훈을 결코 잊지 않았다. 그때부터 철학·과학·신학에서 독단적 신념은 그의 적이었다. 〈관념의 모험 Adventures of Ideas〉(1933)은 화이트헤드의 마지막 대철학저서이며 일반독자에게 가장 가치 있는 책이다. 이 책은 서구문명화 과정을 형성하는 데 있어서 인간성과 신, 그리고 우주에 관한 일반적인 생각과 야만적인 힘이 한 역할을 통찰력 있고 조화롭게 반영했다. 화이트헤드는 새로움으로 향하는 삶의 충동과, 무질서한 것이 아니라 유익한 모험을 만들기에 충분히 안정된 사회가 절대로 필요함을 강조했다. 또한 이 책에서 자신의 형이상학을 요약했고, 이것을 이용해 아름다움·진실·예술·모험·평화의 본질을 설명했다. '평화'에 대해서는 '근본적으로는 아름다움의 유효성에 대한 믿음'이라는 종교적 입장을 취했다.

그는 카를 마르크스와 지크문트 프로이트에 정통하지 못한 것을 제외하고는 그당시 과학과 문학 모두에 정통했다. 젊은이들은 화이트헤드의 아내가 마련한 '일요일 저녁'에 모였다. 그곳에서 야위고 몸이 굽지만 않았다면 보통 키는 되는 장밋빛 뺨을 가진 사람이 온화하면서 높은 목소리로 그들과 이야기했는데 자신의 학설이 아니라 그들의 사상에 대해 폭넓고도 역사적인 전망으로 날카롭게 조명했다. 책에서와 마찬가지로 하버드대학교에서의 강의에서도 화이트헤드는 개념의 적용범위를 탐구하고 전통적으로 반대되는 직관들이 어떻게 서로 보완되는지를 자신의 개념에 의해 보여주는 것을 가장 좋아했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그의 강의에 참석해 큰 경험을 얻게 되었다. 하버드대학교는 1937년까지 그를 은퇴시키지 않았다. 미국에서 처음 몇 년 동안 화이트헤드는 강사로서 동부와 중서부의 많은 대학들을 방문했다. 그는 미국인들을 좋아했지만 항상 전형적인 영국인이었다. 1903년 이래로 왕립학회 회원인 그는 1931년 영국학술원에 선출되었고 1945년 메리트 훈장을 받았다. 죽은 뒤 그의 몸은 화장되었고 장례식은 없었다. 출판되지 않았던 원고와 편지들은 그가 원하던 대로 아내가 없앴다.

평가

모든 사상계의 지도자들이 그의 숭배자였지만 화이트헤드에게는 제자가 없었다. 그의 교육 및 철학 저서들은 여러 나라 언어로 번역되었다. 그의 형이상학은 특히 미국에서 활발히 연구되었다. 현재 화이트헤드의 '과정신학'으로 불리는 그의 가장 영향력 있는 이론은 미국의 철학자 찰스 하트숀에게서 어느 정도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남을 돕는 습관 때문에 화이트헤드는 전세계에서 사랑받았다. 그는 공손한 태도를 잃은 적이 없지만 부드럽지는 않았으며, 결코 논쟁을 하지 않았고, 통찰력이 있었으며, 자비롭고, 매우 고집이 세었다. 현실적이며 균형 잡힌 정신을 가졌고, 악의 없이 세련되게 비꼬기를 잘 했다. 화이트헤드는 직관력, 지적인 능력, 확고부동하고 지혜로운 장점들이 훌륭히 조화된 사람이었다.


브리태니커 (http://www.britannic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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