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09/01 (08:54) from 129.206.196.200' of 129.206.196.200' Article Number : 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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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물의 가면


이름 모를 벗들에게 보내는 편지

흔들림 없는 신뢰와 지지를 대통령에게..



하얀 이슬 내리는 절기가 멀지 않습니다. 불볕 더위와 잠 들기 힘든 열대야의 계절은 이제 한 발짝씩 멀어져 갑니다. 도시 생활은 인간을 약하게 만들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의 본래 모습이나 계절의 오래 된 걸음걸이마저 잊게 만듭니다. 아직 뜨거운 볕 아래 벼를 세우는 농부나 그들의 주름진 목덜미 위로 익어 가는 곡식과 열매를 너무 쉽게 잊고 살아 갑니다. 툭하면 에어컨을 틀어대면서, 어디 그늘 좋은 계곡에 발이라도 담글 여유가 만만치 않다고 짜증내는 것이 우리들입니다. 지금은 아파트 단지로 변해 버린 논과 밭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과거에 우리 부모들이 흘렸던 눈물과 땀을 늘 기억하며 살기는 힘든 모양입니다.



8월이 가고 9월이 온 첫 새벽입니다. 지나간 더위이든 다가 올 서늘함이든 우리의 바람이나 걱정과는 무관하게 오고 갑니다. 자연의 일부인 우리가 그 다른 일부를 부정하거나 영원히 증오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이제 찬 서리가 내리기 전에 찾아 올 한 두 개의 태풍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때로는 빗겨가고 때로는 깊은 상흔을 남기는 태풍 역시 우리가 함께 살아 온 존재입니다. 증오의 대상이 아니라 존재를 인정하고 받아 들여야 할 자연의 모습일 따름입니다. 늘 만나고 겪어 온 대상인 만큼 이제는 익숙하고 편할 만도 한데, 그것들은 아직도 늘 부족하고 서툰 인간의 힘과 지혜를 일깨우고 지나갑니다.





정부가 어제 부동산 정책을 발표했다고 합니다. 전문가라는 사람들이 저마다 쏟아 내는 분석과 평가를 지켜 보다 TV를 끄고 이 글을 씁니다. 우리 사회에 일어나는 모든 문제에 대해 그토록 유능한 전문가들이 넘치는데, 정작 왜 그런 문제들이 깔끔하게 해소되거나 사라지지 않는 것인지 오늘도 궁금하기 때문입니다. 비판하는 많은 논지들은 저마다 명쾌하고 이해할 수도 있는데, 왜 그들이 제시하는 대안은 또 저렇게 다르고 엇갈려 헤아리기 힘든 것인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자신의 땅과 집을 소유하고 나름의 성을 구축하고자 하는 욕망은 비단 인간만의 속성도 아니고, 반드시 탓할 탐욕도 아닐 것입니다. 그것은 생존의 조건이며, 자신의 조건이 남보다 우월하길 원하는 것은 이해할 수 있는 생명체의 본능입니다. 문제의 본질이 모두 만족스럽게 나누어 가질 충분한 땅이 없음에 있는 것인지, 저마다 더 큰 조각을 원하는 욕심에 있는 것인지, 그 둘 모두인지 모르겠습니다. 덩치가 큰 나라들을 여행할 때, 나는 우리 민족이 좁은 땅에서 비비고 복닥댈 것이 아니라, 능력껏 세계로 퍼져 나가 활달하고 씩씩하게 살았으면 좋겠다는 바램 같은 생각을 여러 차례 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런 소망도 힘들어졌습니다. 저 자신 돌아 와 복작대고 있으니까요^^



이왕지사 좁은 땅에서 더불어 살아야 한다면, 되도록 꼭 필요한 공간만을 점유하고 사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탈속한 어느 수녀의 기도처럼, 우리 모두가 우리에게 꼭 필요한 만큼만 먹고, 필요한 만큼만 둥지를 틀고 살다 간다면, 세상은 그 수녀의 청징(淸澄)한 시만큼이나 아름다울 곳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현실과 기도는 얼마나 동떨어진 것인지요. 그래서 기도가 필요한 것인지도 모르지만, 저마다 꼭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둥지들 사이즈는 왜 그리 다양한지 모르겠습니다^^  그 뿐이 아닙니다. 새처럼 자유롭게 살기를 원한다고 노래하는 사람도 있지만, 우리 대부분은 새보다는 벌떼처럼 모여 사는 것을 더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아름답든 추하든 서울은 거대한 벌통입니다. 거의 움직일 때마다 부딪치는 비좁음과 불편에 짜증내면서도 계속 몰려들기만 하는 것을 보면, 때로 도시의 중력(重力)이 무슨 블랙홀처럼 느껴져 가까이 하고 싶지 않아집니다.





부동산 투기는 보호되어야 경제 활동인가 추방되어야 할 범죄인가



자본으로 자본의 증식을 꾀하는 것, 속된 말로 돈 놓고 돈 먹기가 자본주의의 보편적 동태라면, 투기 역시 그 보편성에서 벗어 난 것은 아닙니다. 투기적 요소는 부동산이나 주식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확대 재생산을 추구하는 자본의 일반 속성일 것입니다. 긍정적 뉘앙스의 투자(investment)나 도박처럼 느껴지는 투기(speculation)나, 그 경계는 모호하고 그것이 있는지조차 확신할 수 없습니다. 전자는 창의와 노력 그리고 노동을 통해 창출되는 부의 점진적 증식을 기대하는 것이고, 후자는 소유 자본과 차별적 정보를 이용하여 보다 손쉽고 빠르게 부를 증식시키려는 시도라고 억지로 정의해 본들, 정작 무엇이 전자이고 무엇이 후자인지 구분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투자는 도덕적이고 투기는 부도덕한 것으로 보는 것도 마냥 옳은 시각은 아닐 것입니다. 국제적 헷지 펀드들이 먹음직한 국내기업을 사냥하여 삼키고 찢어 뱉는 것도 투자라면 투자이고, 첨단 산업에 들어 간 마피아 마약 자금이나 재개발 딱지를 매입하는 복부인의 수표도 투자라고 우기면 투자인 것입니다. 퇴직금을 몽땅 유망 기업의 주식에 올인 하는 것이나, 석유값이 오를 것을 예측해 선물 시장에서 물량을 확보하는 것이나, 성공보다 실패의 확률이 높은 벤처에 투자하는 것이나 모두 투기라면 투기입니다. 자본의 동선에 명확한 도덕의 경계를 긋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에 가까운 일입니다. 그런 자본이 지배하는 사회에 살고 있다는 의미와 도덕성이 모호하거나 존재하지 않는 사회에 살고 있다는 뜻이 크게 다른 것인지도 해석하기 나름일 것입니다.



어떤 측면에서, 우리 사회는 도덕성을 신성시하는 사회가 아니라, 사유재산권과 자유 시장 경쟁 체제를 신성시하는 사회입니다. 얼마나 도덕적으로 벌었는가는 큰 관심의 대상이 못 되고, 얼마나 많이 또는 빨리 벌었는가가 벤치마킹 대상인 사회입니다. ‘어떤 측면에서’ 라는 단서를 달았지만, 실은 그것이 우리 사회 기득권 주류의 일반적 모습인지도 모릅니다. 흔히 뭐처럼 벌어 정승처럼 쓴다는 말을 합니다. 이 말이, 뭐처럼 벌어 뭐처럼 쓰며 행세만 사람(정승, 귀족) 흉내를 낸다는 의미에 가까운지, 뭐처럼 벌었더라도 모범이 될만하게 도덕적으로 쓴다는 뜻에 더 가까운지도 사람 나름이겠지만, 혹시 우리 자신은 어떤 모습인지 한 번쯤 조용히 돌아 볼 필요가 있습니다.



부동산 투기는, 최소한 지상에서는 생산이 불가능한 토지와 그 위에 구축된 재화의 선점과 유통을 통해 빠른 폭리를 추구하는 행위입니다. 주식 투자가 농부에게 농사 자금을 빌려 주어 증진된 생산성이 가져 올 기대이익을 추구하는 것이라면, 부동산 투기는 기대 수익이 큰 농토를 모든 수단과 방법으로 선점하여 그것이 농부이든 상인이든 또는 또 다른 투기꾼이든, 가장 높은 이익을 제시하는 자에게 팔아 넘기기만 하면 된다는 생각을 기초로 한 행동입니다. 토지든 건물이든, 합법적으로 사고 팔 수 있는 재화의 하나인 이상, 재벌이나 복부인 또는 정부의 관료가 그것들을 이용하여 돈을 따든 잃든 법은 그 자체를 시비할 수 없습니다. 다만 합법적 행위인지 세금은 제대로 납부했는지 정도를 따질 수 있을 뿐입니다. 설사 개발 계획을 훔쳐 내어 기회를 선점했든, 독재자가 은닉한 검은 돈을 끌어다 썼든, 주민등록을 몇 십 번 옮겼든 말았든, 현존하는 법망에 걸리지만 않으면 된다는 것이 게임의 덕성이고 법칙인 것입니다.



모르긴 몰라도, 이번에 제시된 정부 대책들이 이런 파렴치한 게임의 법칙을 본질적으로 뒤바꿀 수는 없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다면 경제 부총리의 호언과 달리, 대한민국 최대 고질의 하나인 부동산 투기 게임은 새로운 룰과 환경에 적응하며 진화할 것이 분명해 보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스스로 공언한 바에 의해, 참여 정부의 총체적 실패를 상징하는 뼈아픈 상징으로 기록될지도 모릅니다.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요?



대통령의 명확한 철학이나 의지대로 전개된 정책도 분명 많겠지만, 그렇지 못한 정책들도 하나 둘이 아닌 것 같습니다. 대통령은 보안법이 박물관으로 가야 한다는 소신을 명백하게 밝혔지만, 유명무실하든 위풍당당하든 보안법은 여전히 존재하고 있습니다. 과거사 진상 규명이나 국가 권력에 의해 저질러진 범죄에 대한 조사에 대해 그 동안 여러 기회를 통해 그 당위성과 원칙이 설명되었지만, 어느 것 하나 시원하게 국민적 공감을 등에 없고 제대로 완주한 것은 보이지 않습니다. 교육 정상화와 사교육 부담 해소 등은 교육 주체들의 전반적 저항과 반발에 시달리며 어느 방향으로 갈 것인지 정확하게 단정하기 힘듭니다. 사회를 내부로부터 붕괴시키고 있는 부동산 투기와 가격 상승을 저지할 근본 대책 역시 모든 계층의 불만이나 비난은 볼 수 있어도, 어떤 한 계층 전폭적으로 지지하는 것은 보기 힘든 것이 현실입니다.



이 모든 문제들의 공통점은 하나 같이 원칙은 옳으나, 그 정책적 실천 과정에 나타나는 충돌하는 이해집단간의 합의는 없고 저항은 강력하고 드세다는 것, 그리고 그러한 저항을 감안하여 제시되는 대부분의 타협안이 모두를 어느 정도 만족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모두의 불만을 증폭시키는 경우가 많다는 것은 아닌지요? 그런 불만의 누적이 결국은 기대만큼 큰 실망과 민심의 이반으로 이어진 것은 아닌가 생각합니다. 원칙이 독선이거나 저열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 원칙을 밀고 나가는 힘이 약했기 때문이며, 그 힘이 약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또 다른 원칙, 즉 대화와 타협의 정치에 대한 희망을 포기할 수 없는 대통령의 신념 때문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탄핵을 불러 온 정치개혁이든 총선 이후 추진했던 4대 개혁입법안이든, 그 시대적 당위나 필요성이 직접적으로 도전 받았던 것은 아닙니다. 그런 직접적 도전이나 저항으로 개혁을 좌초시킬 힘도 논리도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개혁의 부진한 진도나 좌절은 늘 간접적이고 우회적인 공격에 상처받고 약화된 추진력에서 그 근본적이고 일차적인 이유를 찾아야 할 것입니다. 개혁을 통해 기득권을 일정부분 잃을 수밖에 없는 정치적 반대 세력은 늘 경제의 어려움을 빌미로 국정 목표의 우선 순위를 문제 삼았습니다.



경제 살리기에 몰두하고 개혁에는 신경 끄라는 의미와 경제가 급한데 급하지도 않은 딴 짓만 하고 있다는 선동이 담긴 공격일 것입니다. 또한 그들은 개혁에 저항하고 반대하는 자신들의 몸집을 여론이란 갑옷으로 과대 포장하는 교묘한 기만술을 구사하며 반격했습니다. 뾰족한 묘수가 없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만만치 않은 효과적 공격이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 물론 그 전략의 중심엔 뼈 속까지 반개혁적이고 자신들의 기득권 수호에 목숨을 걸어야 하는 족벌 언론들이 서 있었음은 어제나 오늘이나 변함없는 사실입니다.



이들의 반대는 결코 반대를 위한 반대만은 아니었습니다. 자신들 역시 기획했었던 그리고 국회에서 동의까지 했던 행정수도 건설법안을 끝내 헌재에까지 끌고 가 무산 시켰고, 대화를 하지 않는다고 비난하는 동시에 대화 하자는 제안도 비난하고 거부하는 집단이지만, 그 모두는 반대를 위한 반대가 아니라 처음부터 끝까지 철저하게 자신들의 기득권 방어를 위한 공격적 전술로 구사된 것입니다.



이들의 이런 전술이 먹힐 수 있었던 3가지 주요 원인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실제로 어려운 상황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는 내수와 서민경제의 고통, 그리고 그것을 증폭시키고 악용한 야당과 언론입니다. 둘째는 집권 여당의 때이른 적당주의와 급속한 기득권화, 그리고 경험, 공부, 노력의 부족에 있습니다. 끝으로, 대통령 자신의 정치적 이상이자 신념인 대화와 타협의 정치 문화 추구가 아직까지는 최소한 개혁의 긍정적 요인으로 작용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신념을 고수하자니 효율이 말이 아니고, 효율을 추구하자니 신념이 죽어 넘어지는 딜레마인 것입니다.



대화와 타협의 정치란 기본적으로 상대의 주장이 자신의 신념과 다를지라도 인정하고 존중할 것을 요구합니다. 신념의 관철과 실현의 전제 조건으로 생각이 다른 자들을 설득하고 포용할 것을 요구합니다. 이것은 정치 현실상, 이론에 가깝고 무시와 독주의 효율을 따를 수 없습니다. 더구나 상대가 전혀 호응하고 협력할 의사가 없는 상황에서는 이런 신념의 정치 효율을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은 명약관화한 일입니다. 그러나 국가와 민족을 생각하고, 장래를 생각한다면, 대통령의 입장에서 신념을 포기하고 편법과 책략의 유혹에 넘어가는 것은 자신을 부정하는 그릇된 판단일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정부 관료들이나 여당 또는 일반 국민들이라도 대통령의 뜻을 잘 이해하고 힘을 모아 지지하면, 반개혁적 기득권 세력에게 무시할 수 없는 압박으로 작용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못했던 것입니다. 지지세력은 때이른 관용과 포용에 회의하고 실망하는가 하면, 급속하게 기득권과 구분 안 되는 행동과 분열상을 노출하는 여당에 거듭 실망감을 느껴야 했습니다. 무엇보다 원칙과 상식이 포용과 타협을 위해 훼손된다는 가치의 충돌을 이해하기 힘들었을 수 있습니다. 뜻은 이해하겠지만, 도무지 대화가 안 되는 상대에게 과연 유효한 접근방법인지 회의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대통령의 연정 제안 즉 권력의 공유 혹은 포괄적 양도 가능성 제시는 이런 꽉 막힌 정치 구도를 깨고, 국정 운영의 새로운 돌파구와 추진력을 찾으려는 정치인 노무현의 호소이자 저항이며 결단일 것입니다.



인간 생존의 필수 조건을 수단으로 삼는 부동산 투기가 공동체의 안전과 생존을 위협하는 반인간적 범죄 행위와 같음을 어찌 모르겠습니까? 그것을 어려운 문제로 만들고 갈등의 중심이 되게 하는 모든 난삽한 주장과 집단, 법 제도와 정책이 위선이며 악을 의도적으로 조장, 방조하는 것임을 어찌 모르겠습니까? 그러나 그런 정치적 신념을 과거 독재자들처럼 일방적으로 밀어 부칠 수도 없고, 그럴 방도 또한 없는 것 아닙니까? 그런 지도자를 이해하고 돕는 것이 아니라, 힘 없다 비웃는 반대자의 선동과 주장에 더 큰 무게를 실어 주는 국민에게 그가 할 수 궁극적 봉사와 희생이 무엇이겠습니까?



부동산 투기로 인한 폐해, 즉 부동산 가격의 폭등과 그것을 따라 갈 수 없는 서민의 괴로움은 다시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대로 간다면 있는 자나 없는 자나 모두 공멸할 가능성을 결코 배제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유재산권이나 자유시장경제 원칙만을 뇌까리며 투기를 실질적으로 비호하는 자들은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며 조롱하는 자들과 같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기득권이 보호되고 증진되는 시스템을 지키기 위해, 그들을 위협하는 서민들과 기층민들의 불만과 반발을 억누르고 압살할 수밖에 없습니다. 언제까지 그럴 수 있을 것입니까?



집 한 칸 마련하기 위해 청약 통장을 희망 삼아 살아 온 서민이나 그도 저도 없는 젊은 사람들과 기층 서민들은 고통과 허탈감에 치어 사회를 밝은 시각으로 바라 볼 것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결국 그들은 사회가 뒤집히는 혁명을 원하는 잠재적 반사회적 존재로 내 몰릴 수밖에 없습니다.



얼핏 본 것이지만, 족벌 언론의 하나가 ‘부자들을 인민 재판하지 말라’고 말한 것 같습니다.부자들 입장에서 깨달아야 하는 것은 그들을 잠재적 인민 재판에 회부하는 것은 개혁을 원하고 주창하는 세력이 아니라, 그들과 대화도 타협도 할 수 없다고 버티며 평화적 개혁을 저지하는 조선일보라는 사실입니다. 케네디가 말한 것으로 기억합니다. 평화적 개혁이 불가능한 상황은 폭력적 혁명을 부를 수밖에 없다고. 확신하건대, 우리 대통령은 그런 것을 너무나 명확하게 인식하고 있기에, 그런 자들에게 지금도 대화와 타협의 필요성을 그렇게 절절하게 설득하고 있는 것입니다. 설사 우리 내부의 갈등과 분열이 혁명적 상황까지 치닫지 않는다 해도, 그 대가로 치러야 하는 사회적 비용은 밑 빠진 독에 물처럼 낭비될 수 밖에 없고, 우리 내부의 차이보다 더 큰 북한 사회와의 통합은 공염불에 불과한 것 아니겠습니까?



대통령과 정부는 사유재산권이나 자유시장경제 체계를 보호 유지하고 감독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이것은 원칙적으로 정부의 공권력만으로도 가능해야 합니다. 그러나 가진 자와 갖지 못한 자의 입장은 항상 다르고 충돌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들 모두가 승복할 수 있는 사회적 타협과 화합은 결코 몇 개의 정책이나 공권력으로 달성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회적 타협과 평화적 협력은 사유재산권이나 자유시장 경쟁 체제보다 한 단계 높은 상위 가치입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화합과 승복이 없는 사회의 사유재산권이나 시스템은 본질적으로 사상누각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타협과 협력은 오직 바른 정치 철학과 공동체적 가치의 공유를 통해 보장될 수 있는 것이며, 그 첫걸음은 분열과 대결의 정치를 대화와 타협의 정치로 성숙시켜야 할 책무가 있는 정치인들이 걸어 보이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 아니겠습니까? 대통령은 우리 정치가 바로 그 첫걸음을 내딛도록 종용하는 것이며, 그것을 통해 사회 내부의 다원화되고 다극화된 요소들의 갈등과 대립을 대화와 협력의 장에서 해소할 수 있는 사회적 성숙을 인도하고자 하는 것이다. 새로운 정치 문화의 기틀을 놓는 것, 대화와 협력의 성숙한 사회로 들어 가는 문을 여는 것, 그리고 그것으로 정치 인생을 정리하는 마지막 봉사, 그것이 우리 대통령의 참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모두가 귀를 막고 등을 돌려도, 우리만큼은 흔들리지 않는 신뢰를 모아 힘을 보태야 할 때가 아닌지 묻습니다. (2005-09-01)

- 먹물의 가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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