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09/14 (22:37) from 129.206.196.171' of 129.206.196.171' Article Number : 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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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 그어진 밑줄


“회초리 꺾어와!”

아직도 아버지의 호통소리가 귓가에 쟁쟁하다. 어린 시절 아버지는 나에게 매를 들어 책을 읽게 했다. 그리고 이따금 검사해서 책에 밑줄이 그어져 있지 않으면 회초리를 꺾어오게 해서 종아리를 때렸다.

초·중학교 때 고문받듯 읽은 두 책이 있다. 함석헌의 ‘뜻으로 본 한국역사’와 아널드 토인비의 ‘역사의 연구’다. 당시엔 무슨 뜻인지도 모르면서 매를 맞지 않으려고 도나캐나 밑줄을 그어 흔적을 남겨 가며 읽었다. 그러나 이 두 책은 내 인생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책이 되었다. 나이가 들어 읽는 횟수가 반복될수록 새로운 의미들을 발견하게 되었다. 지금도 그 두 책은 항상 나를 따라다니며 내 사무실 서재의 한편을 차지하고 앉아 내 인생의 스승이 되어주고 있다.

아버지는 시골 교회 목사였다. 교회에서 사례비로 받는 것이 고작 보리쌀 한 가마니에 쌀 몇 말 수준이었다. 그래서 3남4녀인 우리 7형제는 늘 배가 고팠다. 밥 때가 되면 서로 한 숟갈이라도 더 먹으려고 다투다 싸움으로 번졌고, 항상 누군가 울음을 터트리는 것으로 끝이 나곤 했다. 이런 경제적 어려움 때문에 어머니가 고생을 많이 하셨다.

아직도 내 기억 속에 가장 선명한 어머니의 모습은 빈 고구마밭에 동그랗게 앉아 고구마 이삭을 캐는 모습이다. 고구마 이삭 캐기란 이미 추수가 끝난 고구마밭을 호미로 다시 파헤쳐서 주인이 미처 거둬가지 못한 고구마를 챙겨오는 것이다. 마치 보물찾기라도 하듯 한 나절 반 나절 그렇게 맨땅을 다시 파헤치다 보면 깨진 고구마도 나오고, 재수가 좋은 날엔 덩굴째 나오기도 한다. 이렇게 캐 온 고구마를 잘게 썰어 보리밥에 잔뜩 섞으면 두세 그릇 나올 밥이 거짓말같이 열 그릇으로 늘어난다. 밥이라 하기엔 너무한 고구마밥을 먹고 자라났다.

이따금 아버지 어머니가 부부싸움을 하곤 했다(목사도 부부 싸움을 한다? 물론이다). 어떤 고생에도 꿋꿋하셨던 어머니가 유일하게 큰 목소리를 내는 순간은 바로 아버지가 책을 사오는 날이다. “또 책을 사셨어요?” 하며 어머니가 큰 소리를 지르면 아버지의 표정이 금세 달라졌다. 겸연쩍음과 비굴함이 뒤섞인 표정으로, 그 어려운 국면을 모면하기 위해서 애를 무척 쓰셨다. “목사가 책 없이 어떻게 설교를 하느냐”는 말로 어머니를 달래보지만 소용이 없었다. 오히려 어머니의 목소리만 더 높여놓을 뿐이었다. “한 달 동안 죽도록 고구마 이삭을 주워봐야 당신 오늘 사들고 온 책 한 권 값이 안 돼요!”

10여년 전 아버지는 72세의 일기로 별세하셨다. 그러면서 그렇게 어렵게 어렵게 모으신 어마어마한 분량의 책을 내게 물려주고 가셨다. 그러므로 아버지가 물려주고 가신 책은 나에게 있어 그냥 책이 아니다. 그분의 눈물이고, 비굴함이고, 영혼이고, 삶 전체다. 돈으로 환산할 수도, 그 어떤 것과도 견줄 수 없는 아버지의 영적·정신적 유산인 것이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얼마 뒤의 일이었다. 어느 날 아버지가 물려주신 책을 읽어내려가다 그 책에서 아버지가 그어놓은 밑줄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 순간 나는 전류에 감전된 듯한 뜨거운 느낌을 받았다. 돌아가신 아버지가 그어 놓은 밑줄에서 살아 있는 아버지의 숨결을 느낀 것이다.

‘희망이란 본래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다. 그것은 마치 땅 위의 길과 같은 것이다. 본래 땅 위에는 길이 없었다. 걸어가는 사람이 많아지면 그것이 곧 길이 되는 것이다.’(노신의 ‘고향’ 중)

요즘에도 나는 아버지의 책이, 아버지의 밑줄이 내 마음 한편을 따뜻하게 채우고 있음을 느낀다. 내 가슴에 영원히 식지 않는 영혼의 난로를 선물하고 가신 것이다.



(고도원 아침편지 문화재단 이사장)


조선일보, [아버지의 추억] <32>고도원 아침편지 문화재단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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