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12/10 (08:24) from 129.206.196.134' of 129.206.196.134' Article Number : 3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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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금실의 칼의노래
“칼의 노래” 를 읽고서

변호사로 자리매김한지 만 5년이 지났다. 꽤 길다고도 할 수 있는 그 세월은 내 나이 40의 고비를 넘어 세상 속으로 한참 걸어들어간 시절이기도 하다. 가끔씩 왜 개업을 하였느냐는 질문을 받는다. 그 질문을 하는 사람들은 삶이 어떤 포부(抱負)로부터 시작된다는 믿음을 갖고 있는 듯하다. 그 질문에 적절한 답은 세상에 보다 적극적인 뜻을 품게 된 동기와 그 내용이 무엇이냐는 것으로 미리 마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나에게는 답이 없다. 내가 무엇으로 사는가에 앞서, 내가 어떻게 살아있어야 하는가에 대한 결심조차 서있지 아니하며, 그 추상의 의문으로부터 단 하루도 자유롭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다만 막연히, 마치 “정복자 펠레”라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어린 펠레가 망망대해를 향하여 기약없는 인생의 길을 떠나듯이, 그냥 세상끝까지 걸어가보고 싶다는 그런 희망이 있었다. 그 희망은 세상을 낯설어하면서도 사실은 세상이 어떠한 것인지 잘 모르기에 막연한, 천진함 같은 것이었던 듯하다.

희망은 혼자 사는 것이 아니라, 사람에게 깊이 각인되는 고통과 절망이 키워내는 세속 한가운데의 신기루이기 때문이다. 아마 미리 그 사실을 알고서 살아가지는 못하였으리라. 내가 세상 끝까지 걸어왔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바닥의 촉감이 만져지는 듯한 시간들이 있다. 그 바닥에는 아무 것도 없다. 내가 살아있기 전 삶의 기억을 담은 맨몸이 내가 죽어 사라지기 전의 시간 속에 살아있을 뿐. 그리하여 삶은 살아 있기 전 죽음과 다음 죽음 사이에 놓인 짧은 간격일 뿐. 이 간격은 생명의 개화이자 죽음으로 가는 과정으로서, 모든 의미가 문득 끊어지는 죽음과 같이 그곳에서 삶은 순연하다. 그곳에서 살아있음은 죽음과 죽음에게 몸을 내걸고 아무 두려움이 없다. 두려움이 없는 삶, 순간순간에 그 바닥의 체험으로 긴장하는 삶이야말로 세상 끝에 놓인 지점이 아닐까.

나는 세상을 걸어가는 길에 지칠 때마다 길목에 기대어 서서 두려움 없는 기세로 세상을 베어내어 진면목이 드러나는 살아있음을 그린다. 그와 같이 길목에서 서성이다가 만난 책이 김훈의 “칼의 노래”였다. 충무공 이순신의 난중일기를 바탕으로 한 1인칭의 전기적 소설이다. 김훈은 이순신을 “한없는 단순성과 순결한 칼”로 묘사한다. 이순신은 조국의 남쪽바다에 눈보라처럼 몰려드는 적을 맞아서 그의 목숨을 내놓아 적을 베는 칼로 존재하였다. 그에게 삶은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오로지 죽음에 대면하여 수식이라고는 전혀 없는 삼엄한 자세로 죽음을 통과하는 방식만이 실재하였다. 300척의 배에 가득한 적 앞에서 12척의 초라한 함대를 이끌면서 그는 뒷걸음질치는 부하에게 이야기한다. 네가 죽음을 피할 곳은 없다. 오직 죽음으로 죽음을 뚫고나가라고. 그리하여 그는 역사에 기적으로 남는 승리를 이끌었다.
 
그에게 현실은 정치가 아니라 오직 바다였다. 그의 칼은 정치의 향방에 따라서 이동하는 세태가 아니라, 순전히 바다를 적의 피로 ‘물들이기’ 위한 것이었다. 그의 칼은 정치적 대안을 설정하지 않았으므로, 그는 정치를 두려워하지 않았지만, 그가 정치에 대한 두려움이 없었기 때문에 정치는 그를 두려워했다. 그의 칼은 온전히 칼로서 순결하고, 이 한없는 단순성이야말로 그의 칼의 무서움이고 그의 생애의 비극이었다는 것이다. 이순신의 바다는 칼날을 겨루어 살아있음과 죽음이 교차하는 세상 끝 지점이었던 듯 하다. 이순신의 바다는 돌아갈 곳이 없었다. 죽음을 베어 살아있음이 한 자루 칼 끝에 놓여 있었으니, 그 살아있음은 기꺼이 삶을 버림으로써 죽음과 삶이 서로 다르지 않은 경계에 이르러 가능하였다.
 
김훈이 전하고자 한 이순신의 삶은 두려움이 없는 순결성으로 인하여 무서움에 전율케 하였다. 생을 넘어 바닥에 이른 삶을 산다면, 그를 영웅이라 부르겠다. 비속한 사람은 그 긴장을 이겨낼 힘이 도저히 없다. 비속한 나는 다만 김훈과 함께 잠시 그 살아있음을 만나서 마음 속에 눈물겹다. 세상을 베어 삶의 순결성에 이르고자 하는 사람에게, 스스로 베이는 칼이 되고자 하는 사람에게 이 책을 드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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