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01/30 (21:45) from 129.206.197.98' of 129.206.197.98' Article Number : 3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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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남준


[백남준 타계] 어록으로 살펴본 예술철학





“당신이 내일 죽는다면 무엇이 제일 아쉬운가요”라는 질문을 받은 존 케이지가 “백남준의 재담을 듣지 못하는 것이 제일 서글플 것”이라고 대답했을 만큼 백남준의 입담은 유명하다. 그가 남긴 재치있으면서도 의미심장한 말들은 방대한 어록을 만들고도 남는다. 특히 미디어와 문화의 미래에 대한 그의 통찰은 후세에도 아포리즘으로 기억될 것이다.

고국을 떠난 지 35년만인 1984년 한국에 처음 도착한 그는 “예술은 사기”라고 외쳤다. 당시 그는 “원래 예술이란 반이 사기입니다. 속이고 속는 거지요. 사기 중에 고등사기입니다. 대중을 얼떨떨하게 만드는 것이 예술입니다. 엉터리와 진짜는 누구에 의해서도 구별되지요. 내가 30년 가까이 해외에서 갖가지 해프닝을 벌였을 때,대중은 미친 짓이라고 웃거나,난해하다는 표정을 지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것의 진실을 꿰뚫어 보는 눈이 있었습니다”라고 해 사람들을 아연실색케 했다. 이에 대해 그는 나중에 “예술이 무엇인가를 관념적으로 정의하려는 인문주의자들에게는 예술이 흡사 사기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예술을 이해하고 함께 하려는 대중에게는 예술은 재미있고 유익한 것”이라고 진의를 설명했다.

그가 남긴 말들은 손으로 꼽을 수 없을 만큼 많다. “왜 섹스는 미술과 문학의 지배적인 테마이면서 오직 음악에서만 금지되어 있는가” “미술과 테크놀로지에 함축된 진짜 문제는 또다른 과학적 장난감을 만들자는 것이 아니라 급격하게 진보하는 테크놀로지와 전자 매체를 어떻게 인간화하는가다” 등 예술세계에 대한 철학을 표명했다.

“플라톤은 단어,혹은 개념을 통해 가장 심오한 것을 표현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소리,즉 청각적인 것이 가장 심오한 것을 표현한다고 생각했다. 스피노자는 시각,즉 가시적인 것을 통해 가장 심오한 것을 표현했다. 이러한 논의는 완결된 것이다. TV광고는 이 세 가지를 모두 가졌다”고 비디오 아트를 설명했다.

비디오 아트에 대한 경의는 이어진다. “콜라주가 오일 페인팅을 대치했듯이 브라운관이 캔버스를 대치할 것이다.(중략)1915년 에디슨이 축음기를 발명한 이래 음악사가 바뀌었듯이 미술도 같은 역사적 단계에 와 있다. 축음기의 발명 때문에 비틀스가 슈톡하우젠보다 더 존경받게 되었다. 이제 비디오 시대에 비틀스 타입의 화가가 필요하게 된 것이다.”

천재 예술가는 평범한 인간으로서 갖는 감회를 드러내기도 했다. “예술가에게 실수는 오히려 천재성을 증명하는 계기가 된다” “일 안하면 욕 안먹고 편하게 살 수 있다. 일하면 욕 먹지만 그만큼 발전이 있다. 그런데 욕하는 부류의 상당 부분은 일 안하면서 시기하는 자들이기 때문에 결국 일은 해야 한다.”

장지영 기자

http://www.kmib.co.kr/html/kmview/2006/0130/092007585213110000.html





[백남준의 예술과 삶]예술의 인간화를 외치던 거장…권위주의와 한평생 투쟁






[쿠키 문화]○…백남준이라는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드물다. 반면 백남준의 예술이 무엇인가를 아는 사람도 드물다. 백남준을 능가하는 예술적 부피와 경력을 가진 한국 예술가는 당분간 나오기 어렵다는 얘기도 있지만 국내에서는 그의 명성이 충분히 알려지지 않은 셈이다.

백남준이 한국에 본격적으로 소개된 것은 1980년대. 1960년대 독일에서 ‘동양에서 온 문화 테러리스트’라는 별명을 얻었고,이후 미국을 중심으로 ‘비디오 예술의 창시자’로 활동해온 것을 고려하면 한참 늦은 편이다.

파리와 뉴욕을 연결한 인공위성 프로젝트 ‘굿모닝 미스터 오웰’(1984년)은 백남준의 출세작으로 꼽힌다. 인류가 매스미디어에 종속되어 1984년에 멸망할 것이라는 조지 오웰의 예언에 대해 바로 1984년 첫 아침에,아직도 우리는 건재하며 매스미디어는 우리에게 엄청난 정보와 연대의식을 선사하고 있다는 조롱이 섞인 문안인사를 올린 것이다.

‘굿모닝 미스터 오웰’의 성공과 함께 1984년 고국 땅을 밟은 백남준은 “예술은 사기다”라고 외쳤다. 예술사기론은 백남준의 삶과 예술을 관통하는 말이다. 그의 생존전략은 기성화되고 고착된,그리고 우월주의적인 서구예술을 공격하고 파헤침으로써 그들에게 진정한 예술의 의미를 다시 한 번 생각케 하는 것이었다.

백남준은 1932년 7월 20일 서울 종로구 서린동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친 백낙승은 해방 후 최대 섬유업체인 태창방직을 경영하던 섬유업계의 대부였으며,집안은 당시 종로5가와 동대문 일대 포목상의 절반을 소유할 정도로 부자였다. 3남2녀 가운데 막내인 백남준은 경기공립중학교(경기고의 전신)에 진학,피아노와 작곡,성악에 이르는 광범위한 음악수업을 받는다.

사업가가 되기를 바라는 부친과의 갈등 속에서도 백남준은 예술의 길을 택해 도쿄대 미학과에 진학한다. 일본인들은 백남준이 도쿄대학이 길러낸 인재라는 사실을 언제나 자랑하며,부인인 쿠보타 시게코 여사도 일본인이다. 또 백남준은 일본 소니가 처음 생산한 비디오카메라를 이용해 비디오예술을 창조했다.

1956년 대학을 졸업한 그는 독일 뮌헨대학의 음악사 석사과정에 입학한다. 그러다 플럭서스 운동에 동참하며 피아노와 바이올린을 단숨에 파괴하는 행위,관객의 넥타이를 자르고 머리를 샴푸시키는 행위,객석에 소변을 보는 행위,소머리를 전시장에 걸어놓은 행위 등 충격적이고 자극적인 퍼포먼스를 잇달아 선보인다.

플럭서스는 백남준의 예술을 가꾸어 준 정신적 지주이면서 예술사기론으로 대표되는 그의 저항적 예술행위의 바탕이다. 예술의 권위주의를 넘어서는 한편 관객이 함께 참여함으로써 완성되는 예술이 플럭서스 운동의 목적이었다. 이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백남준의 비디오예술이나 행위예술은 유희나 충격,또는 쇼맨십 정도로 보일 수밖에 없다.

비디오예술은 백남준을 설명하는 키워드다. 이를 통해 그는 한 장르의 창시자로 자리매김했다. 1963년 3월 독일의 소도시 부퍼탈에서 텔레비전 13대를 이용해 비디오예술의 첫 전시회 ‘음악의 전시-전자텔레비전’을 열었다. 이 전시회의 개념은 1960년대 대중문화의 성상이며 우상이던 텔레비전을 공격하고 해체시키는 데 있었다.

백남준은 ‘텔레비전 달’ ‘TV 브라’ ‘TV 첼로’ ‘텔레비전 정원’ 등 텔레비전을 주제로 한 수많은 작품들을 발표했다. 그는 텔레비전을 지독히 학대한 예술가이지만 텔레비전의 최고가치를 가장 널리 알린 작가이기도 하다.

그의 비디오예술을 논할 때 빠지지 않고 거론되는 것이 ‘인간화된 예술’이다. 백남준은 20세기 예술이 가지는 삶과 예술의 괴리,또는 예술과 관객의 비소통 체제를 해소하기 위해 예술적 투쟁을 지속해 왔다.

1969년 ‘창조적 매체로서의 텔레비전’ 전시회에서 “모든 기술도 인간화되지 못하면 기술종속에서 벗어나지 못하듯이 예술도 인간화되지 못하면 예술을 위한 예술로 전락한다”고 설파한 거장은 이제 기술과 인간과 예술의 만남을 저 세상에서 꿈꾸게 됐다. 국민일보 쿠키뉴스 김남중 기자 njkim@kmib.co.kr  

http://kuki1.stoo.com/news/html/000/461/684.html


20세기 최고 예술가를 기리며
- 장르 넘나든 실험정신 삶의 예술 경계에 핀 꽃

  

  

▲ 김홍희/ 미술평론가

 

1984년 <굿모닝 미스터 오웰>로 한국에 공식 상륙한 이래 백남준의 이름은 우리 뇌리에 각인돼 있다. 한국이 낳은 20세기의 대가, 비디오 예술의 대부로서 그는 서양 미술사에 당당히 한 자리를 차지하며, 이러한 그의 존재는 미술인뿐 아니라 한국인 전체의 자부심으로 여겨진다. 그러한 한편, 한국인의 그에 대한 평가는 양면적이다. 그를 열광적으로 숭배하거나 냉소적으로 외면한다. 전자는 그의 예술보다는 천재성이나 업적을 무조건 찬양하는 경우며, 후자는 그의 공을 인정하더라도 정서상 그를 받아들이기 꺼려하는 경우다. 둘 다 왜곡된 평가라는 점에서는 마찬가지다. 백남준에 대한 왜곡된 평가는 그의 예술의 복합성에 대한 이해 부족에서 비롯된다.
백남준의 작품세계는 포스트모더니즘의 특징이기도 한 복합성에 의거한다. 그가 선택한 해프닝, 그가 창안한 비디오 예술 모두가 대표적인 복합예술 장르다. 해프닝은 인터미디어의 예술, 즉 장르의 경계를 초월한 복합예술이자, 삶과 예술의 구분마저 해소하려는 삶의 예술이다. 비디오 예술 역시 장르적 인터미디어일 뿐 아니라 예술과 대중매체, 예술과 기술을 통합하려는 가장 포스트모던한 복합예술이다. 백남준 작품세계의 복합성은 한가지 매체나 장르에 정착하지 않는 그의 방랑적 습성에 의해 더욱 고조된다. 그는 행위음악에서 해프닝으로, 해프닝에서 비디오로 옮아갔으며, 비디오 분야에서도 조각, 설치, 퍼포먼스, 위성중계 등 비디오로 가능한 모든 지대를 섭렵하고 있다. 60년대 초 수상기를 오브제로 활용하는 비디오 조각으로 비디오 예술의 문을 연 이래 70년대는 테이프 제작과 비디오 퍼포먼스의 주역으로 활동했고, 80년대에는 위성중계 방송예술로 비디오의 영역을 확장시켰다.

내용과 형식에서 모두 복합성을 표출하는 그의 작품세계는 끊임없이 새로움을 추구하는 실험정신의 산물이기도 하다. 그는 건반과 건반 사이의, 존재하지 않는 음을 찾다보니 쉔베르크에 이르렀고, 전통 악기로부터 탈출하려 스톡하우젠의 전자음악 스튜디오를 찾았다. 듣는 음악을 보는 음악으로 확장시키기 위하여 행위음악을 고안하였고, 인터미디어 감수성으로 행위음악을 해프닝에 접목시켰다. 전자음을 전자비전으로 전환시키려는 노력이 비디오 미술을 창안하게 만들었다. 이와 함께 그는 “콜라주 기술이 오일 페인팅을 대치했듯이, 브라운관이 캔버스를 대신할 것”이라고 단언하였다. 매체와 테크놀로지에 대한 집요한 탐구로 그는 비디오뿐 아니라 레이저 광선으로도 실험을 확대해 왔으며, 근자에는 홈페이지를 개설하거나 기존의 아날로그 비디오를 디지털로 전환시키면서 디지털 비디오의 새 장을 여는 중이다.

그는 언젠가 “나는 미국에서 2.5류의 작가”라고 말했다. 잭슨 폴록이나 앤디 워홀이 1류, 브루스 노만이 2류, 에드워드 키엔홀츠가 3류인데, 자신은 노만과 키엔홀츠의 중간쯤이라는 것이다. 자신을 2.5로 놓는 점에서 경계에 기거하는 특유의 감수성을 발견하게 된다. 어쨌든 그는 한국에서는 분명히 1류이고 최근에는 미술평론가들에 의해 한국이 낳은 20세기 최상의 예술가로 추대되었다. 한국 태생이면서 미국 시민인 그의 이중적 입장, 최상인 동시에 2.5류인 그의 이중적 위치가 그로 하여금 이중의 미학 또는 포스트모던적 복합성의 예술을 창조하도록 종용하였는지 모르겠다. 김홍희/ 미술평론가

http://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98716.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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