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03/04 (06:47) from 129.206.196.199' of 129.206.196.199' Article Number : 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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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포스피어
Info Sphere

기존 구축함의 8배에 달하는 전투력을 발휘하며, 최첨단 전자 시스템을 바탕으로 작전 범위가 5천 마일이 넘고, 정보수집능력도 탁월한 함정. 바로 이지스함이다. (다기능 방공함으로 번역하기도 한다.) 이지스함은 이지스(AEGIS) 시스템을 갖춘 함정을 뜻하는데, 목표 탐색부터 파괴에 이르는 과정을 통괄하는 전자 시스템이 이지스 시스템이다. 참고로 이지스는 희랍 신화에서 제우스가 딸 아테나에게 준 방패를 뜻한다.  

이지스 시스템의 핵심은 컴퓨터로 통제되는 3차원 위상배열 레이더(phased-array radar)인 '스파이1'이다. 스파이1 레이더는 사방으로 동시에 전자기장 빔을 내보내기 때문에 한꺼번에 최고 200개의 목표를 탐지하고, 24개의 목표를 동시에 공격할 수 있다. 이지스함과 기존 구축함의 결정적인 차이는 결국 인포스피어(Info-Sphere)의 차이라고 할 수 있다.

인포스피어의 번역어로는 정보 권역, 정보 범위, 정보 공간, 정보권 등이 얼른 생각나지만, 풀어서 번역한다면 '정보 인지 및 처리 가능 공간 범위' 정도가 적합하지 않을까 한다. 예컨대 미국의 대표적인 전략정찰기인 U-2나 SR-71의 인포스피어, 그리고 첩보위성 혹은 정찰위성의 인포스피어는 엄청나게 넓다. 이에 비해 레이더 같은 장비를 탑재하지 않은 민간 경비행기의 인포스피어는 조종사의 육안 가시 거리와 무선 통신, 계기판을 통해 접하게 되는 정보 등으로 제한된다.

일상 생활로 본다면 승용차의 인포스피어를 예로 들 수 있다. 운전자의 육안 가시 거리와 백미러 및 계기판 등이 승용차의 인포스피어를 이룬다고 할 수 있는데, 최근에는 GSP(지구위치정보 시스템)을 통해 운전에 필요한 지리 정보를 제공받기도 한다. 그만큼 인포스피어가 확장된 것이다.  인포스피어는 커뮤니케이션 가능 범위로 바꾸어 말할 수도 있다. 네트워크와 연결되어 있는 PC와 그렇지 못한 PC의 차이를 예로 들면 이해가 쉽다. 네크워크와 연결되어 있지 않은 일종의 '로빈슨 크루소 PC'는 커뮤니케이션 가능 범위가 제로인 셈이다. 이에 비해 인터넷 접속이 가능한 PC의 커뮤니케이션 가능 범위는 가히 전 지구적이다.

한 사람의 개인이 정보와 지식을 인지하고 처리할 수 있는 공간적 범위가 확장되어 온 과정, 즉 인포스피어가 확장되어 온 과정. 인간의 역사를 이렇게 간단하게 말해도 큰 무리는 없다. 바야흐로 개인은 네트워크와 연결되어 있는 개인, 즉 wired individual로서의 개인으로 바뀌고 있다. 개인의 경쟁력, 기업의 경쟁력, 국가의 경쟁력이라는 것도 그 각각의 인포스피어에 따라 명암이 엇갈리는 것은 물론이다.

여기에서 한 가지 흥미로운 질문을 던져보자. 책이라는 매체의 인포스피어는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네트워크와 연결되어 있는 전자책 단말기, 그래서 책을 읽다가 궁금한 사항이 생기면 곧바로 접속하여 관련 정보를 검색해볼 수 있는 전자책 단말기(PDA, 데스크탑, 노트북, 혹은 전자책 전용 단말기 그 어떤 것도 좋다.)는 일단 논외로 치자. 그리고 (종이)책을 펼쳐 한 손에 들고 다른 한 손으로는 책장을 넘기며 읽고 있는 사람을 생각해 보자. 장소는 상관없다. 화장실이어도 좋고 지하철 안이어도 좋다.

책 읽는 사람의 인포스피어는 공간적이기보다 시간적이라는 특성을 지닌다. 에드워드 기번의 {로마제국쇠망사}를 읽는 사람의 인포스피어는 고대 로마 제국에 미치고 있다. 타임머신이 나오지 않는 한, 고대 로마 제국으로까지 인포스피어를 확장할 수 있는 가장 효율적이고 저렴한 수단은 책이다. 역사 인물들의 자서전이나 전기를 읽는 사람의 인포스피어 역시 마찬가지라고 볼 수 있다. 책이 아니면 해당 인물을 탐지할 길은 없다. 또한 {다음 50년} 같은 일종의 미래 예측 도서를 읽는 사람의 인포스피어는 문자 그대로 다음 50년에 미치고 있다.

책의 인포스피어가 지닌 또 하나의 중요한 특성은 정보 주체, 즉 책을 읽는 사람에 따라서 그 범위가 천차만별이라는 점이다. 같은 책을 읽은 100만 명의 사람이 있다면, 그 가운데 그 책을 통한 인포스피어의 범위가 같은 사람은 없다. 요컨대 책의 인포스피어는 고도로 상대적, 가변적, 유동적이다. 한편 책 읽는 사람의 인포스피어는 이지스함의 스파이1 레이더 대신에 상상력이라는 레이더를 바탕으로 한다. 상상력에는 기본적으로 한계가 없다. 다만 상상력의 기반이 될 수 있는 지식정보의 양과 깊이가 문제다. 다양한 분야의 양서를 두루 갖춘 도서관 (혹은 개인 서재)에 앉아 책상 위에 책을 가득 쌓아놓고 열심히 읽고 있는 사람. 그 사람은 다수의 목표를 한꺼번에 탐지, 공격할 수 있는 이지스함의 주조정실에 앉아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와 비슷한 맥락에서, 작업실 바닥에 커다란 캔버스를 놓고 부지런히 붓을 놀리고 있는 화가, 책상 위 노트북의 키보드를 빠르게 두드리며 소설의 한 장면을 집필 중인 작가, 분필 한 자루 들고 흑판을 마주하고 서서 지금껏 증명된 적이 없는 수학 정리를 증명하는데 여념이 없는 수학자, 이들은 미술, 문학, 수학이라 불리는 각자의 영역에서 고유한 레이더에 의지해 인포스피어를 탐색, 확장 중인 사람들이다.  

인포스피어의 발전은 인간 신체의 연장(Extension of the body)으로서의 기술 도구의 발전과 궤를 같이 한다. 평원 저 너머 수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있는 사냥감을 탐지하는 고대 사냥꾼의 두 눈에서 전략정찰기의 카메라 렌즈로 발전해 온 것이다. 이렇게 도구는 인간의 육체적 기능, 특히 신체의 어느 특정 부분의 기능을 보완 또는 확장시켜주는 고안물이다. 그런데 책이라는 물건은 인간 신체의 연장 그 이상이다. 책은 사람의 기억을 기록하여 전달하고 사람의 생각과 판단에 중요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지적인 도구, 영리한(smart) 도구이기 때문이다.

책이라는 물건의 사용자 인터페이스(User Interface)는 단순하기 짝이 없다. 종이에 문자와 그림 등이 찍혀있고 독자가 그것을 육안으로(점자 도서의 경우에는 촉각.) 감지한다. 소리도 없고 동영상도 없으며 네트워크와 연결되어 있지도 않다. 사용자의 신체적 활동 수준도 그저 손과 손가락, 안구 등을 좁은 범위 안에서 움직이는 정도에 머무른다. 인터페이스는 사물의 접점(the contact surface of a thing)을 뜻한다. 예컨대 승용차 변속기는 운전자와 자동차 사이의 인터페이스, 즉 사람과 승용차 사이의 접점 역할을 한다. 책은 가장 단순한 인터페이스를 통해 시간적, 공간적 한계를 뛰어넘는 인포스피어를 확보할 수 있는 유일무이한 매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여기에서 인포스피어 개념을 자신들의 정치학 이론에서 새롭게 원용하고 있는 존 아키야(John Arquilla)와 데이빗 론펠트(David Ronfeldt)의 경우를 살펴보자. (The Emergence of Noopolitik, by John Arquilla & David Ronfeldt, Santa Monica, California: Rand, 1999.) 이들은 정보 영역을 사이버공간(cyberspace), 인포스피어(infosphere), 누스피어(noosphere) 등으로 분류한다. 사이버 공간은 우리가 보통 말하는 네트워크, 온라인 공간, 인터넷 공간과 비슷하다. 사이버공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접속된다는 사실, 개별적인 노드(node)가 네트워크로 연결된다는 사실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그들이 말하는 인포스피어는 사이버공간에 언론, 방송, 출판 등 다양한 미디어 영역을 추가시킨 것이다. 인포스피어는 네트워크에 연결되지 않은 매체 및 그 지식정보까지 포함하기 때문에 정보통신기술에 대한 의존도가 사이버공간에 비해 작다. 마지막으로 누스피어는 희랍어로 사고 혹은 정신(mind)을 뜻하는 noos에서 따온 말로, 지식정보를 전체적으로 규율하는 규범이나 제도, 윤리, 가치, 사고방식이 바로 누스피어에 해당한다. 누스피어는 사이버공간이나 인포스피어에 비해 상대적으로 (정보통신)기술 측면의 영향을 덜 받는다.

아키야와 론펠트의 정보 영역 구분론에 따르면 출판 부문은 인포스피어에 속하며, 특히 네트워크에 연결되지 않은 매체의 대표적인 경우다. 이에 비해 방송 매체는 출판 부문과 함께 인포스피어에 속하면서도 고도로 네트워크 친화적이다. 방송 매체 자체가 그 출발부터 네트워크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최근에는 출판 부문 역시 그 유통, 홍보 및 마케팅, 기획 등 제반 측면에서 네트워크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지고 있다.

이지스함의 예를 들면서 언급했던 책의 (본래적인) 인포스피어, 그리고 아키야와 론펠트의 논의에 등장하는 (정보 영역 분류 개념으로서의) 인포스피어 영역에 속하는 출판 부문. 이것들은 이른바 네트워크 시대, 디지털 시대, 정보기술(IT) 시대에 책과 출판이 처한 위상 혹은 현실을 말해준다. 책과 출판이 그 자체의 내적 논리와 자율성, 고유성을 상대적으로 크게 보여주던 시대는 지나간 지 오래다. '책은 여러 매체들 가운데 하나'라는 말로는 불충분하다. 어떤 의미에서 책은 별도의 고유한 스피어를 점점 더 빠르게 상실해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인포스피어, 누스피어, 이러한 일련의 표현은 연구 목적으로 다분히 임의로 만들어 낸 단어, 즉 분석적 개념(analytical term)에 가깝다.)

책의 본래적인 인포스피어의 특성과 상대적 장점을 유지, 강화시켜나가면서, 이와 동시에 인포스피어 영역에서 출판 부문이 네트워크를 최대한 효율적으로 활용하는 것. 요컨대 책이라는 매체의 전통적이고 자율적이며 고유한 특성이 새로운 정보기술환경에 성공적으로 적응하는 것. 출판 부문이 지금까지 한 번도 맞닥뜨린 적이 없는 새로운 과제라고 할 수 있다.

온라인 서점 (할인) 문제, 전자책을 둘러 싼 논의, 출판사 홈페이지, 온라인 마케팅, 인터넷을 통한 출판기획 자료 수집, 일종의 단행본 예비 필자군으로서의 온라인 필자들의 등장, 책과 독서를 주제로 하는 방송 콘텐츠, 그밖에 최근 들어와 등장하고 있는 일련의 흐름들은 바로 그런 새로운 과제의 다른 얼굴들이라고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스스로에게 물어본다. 나의 인포스피어는 어느 정도의 범위일까? 시간적으로는 근시안적인 사고에, 공간적으로는 우물 안 개구리가 하늘 쳐다보는 식의 관견(管見)에 머무르고 있지는 않을까? 나는 인포스피어의 확장에 얼마나 많은 노력을 기울여 왔을까? 무조건 그 범위만 넓히려는 욕심에 탐지의 정확도는 떨어지고 있는 건 아닐까? 아니면 하나의 목표물에 집착한 나머지 이지스함을 나룻배처럼 사용하고 있는 건 아닐까? 혹은 나룻배의 한가로움에 익숙해진 나머지 주변 풍경에만 눈길이 붙들려 있는 건 아닐까?

(사족: 미국 랜드 코퍼레이션에서 나오는 논문집이나 단행본 연구 성과를 자주 참고해 보실 것을 권하고 싶다. 랜드(RAND) 코퍼레이션은 기본적으로 미국의 국익을 지향하는 대표적인 싱크탱크라고 할 수 있지만, 사회, 정치, 경제 분야에서 보여주는 통찰력만은 높이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요컨대 미국의 제국적 속성에서 비롯되는 모종의 편향적인 시각을 염두에 두면서 랜드 코퍼레이션의 성과물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http://www.kungree.com/kreye/kreye208.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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