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07/30 (00:14) from 84.173.109.70' of 84.173.109.70' Article Number : 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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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의학


한의학이 비과학적이라는 주장이 있다. 거기에 대해 한의학계에서는 한의학이 매우 과학적이라고 반박한다. 어느 주장이 옳을까? 내 생각에는 한의학이 '과학적'이라고 할 때의 '과학적'이란 단어는 '과학에 의한', '과학적 방법에 의한'이라는, 엄밀한 의미에서의 '과학적'이 아니라 '이치에 맞는', '사리에 맞는', '짜임새가 교묘하여 허술한 구석이 없는' 정도의 뜻으로 확장된 의미인 것 같다. 다만 현대에서는, 과학이 과거 서양 중세에서의 신학이나 조선시대 유학과도 같은 지위를 누리기에 - 근래 이공계 기피 현상이 사회적 이슈가 되고 있긴 하지만 - '비과학적'이란 표현은 마치 '비합리적', '비윤리적', '야만적' 등의 표현과도 거의 마찬가지인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바, '비과학적'이란 비난에 노이로제를 보이는 한의학계에서는 한의학이 '과학적'이라고 주장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사실 한의학은 과학이 아니다. 엄밀한 의미에서의 그 과학말이다.


'기(氣)'는 실재하는가? 이 질문에 당신은 뭐라고 답하겠는가? 나는 이 질문에 답할 수 있으려면 먼저 '기'라는 것이 무엇인지부터 정의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기'란 무엇일까? 만물에 깃들어 있어 그것을 움직이고 살아있게 하는 그 무엇? 기공술사로 하여금 손을 대지 않고도 사람을 쓰러뜨릴 수 있게 하는 힘? 어두컴컴한 밤길을 걸을 때 누군가가 뒤에 있는 듯한 느낌에 뒷덜미가 쭈뼛해지게 하는 힘? 손가락 주위에 빛이 나는 듯한 사진이 찍혀 나오도록 하는 힘? 아니면 열? 또는 전기? 아마도 기에 대한 정의는 불가능할 것이다. 앞서 열거한 것들 중 일부를 포함한, 기의 존재를 증명하는 것으로 여겨지는 사례들에 대해 그 원인을 기가 아닌 다른 것으로 설명하는 사람들(과학자들)도 있다. 기는 보이지도 들리지도 만져지지도 않으며 기기(機器)를 사용해 측정할 수도 없다. 기의 존재를 믿는 사람들은 체험되는 많은 현상들의 원인을 기라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다른 것으로 생각한다. 신의 존재를 믿는 사람들은 모든 현상에는 신의 뜻이 담겨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다른 원인을 찾는다. 이런 점에서 기와 신은 유사하다. 신학은 학문이기는 하지만 신학이 과학은 아니다. 신이 과학의 대상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신의 존재의 증명이랄 수 있는, 기적을 반복해서 재현할 수 있다면 신과 기적의 관계에 대한 법칙이 도출되고 신학이 과학이 되겠지만 실제는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법률에 'emmision'의 금지에 대한 조항이 있다. 'Emmision'이란 '안온방해', '생활방해'라 옮겨지는 것인데 민법 제217조 1항에서는 "토지소유자는 매연, 열기체, 액체, 음향, 진동 기타 이와 유사한 것으로 이웃 토지의 사용을 방해하거나 이웃 주거자의 생활에 고통을 주지 아니하도록 적당한 조처를 할 의무가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만약 누군가가, 이웃 사람이 자신의 집에 악마의 형상을 한 조각품을 들여놓았는데 그것에서 강한 살기(殺氣), 음기(淫氣)가 방출된다는 것을 이유로 위 법 조항에 근거, 그 조각품의 철거 및 정신적 손해 배상을 청구하는 소송을 제기하였다고 할 때 당신은 이 사건에 대해 무어라 말하겠는가? 한의학도의 입장에서는 이러한 원고(이웃 주민) 주장의 타당성에 대해 조사해 보아야 할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만약 자신이 피고가 되었다고 한다면 그 때에도 (가슴에 손을 얹고) 그렇게 말할 수 있을까? 아마 "미친 X!"라는 소리가 절로 입 밖에 나올 것이다. 내가 사건 담당 판사라면 이렇게 판결할 것이다. "원고는 피고가 피고 소유의 주택에 설치한 조각품을 설치, 사용한 행위로 인해 유해한 자극이 발생, 주거 및 생활에 방해와 고통을 가하므로 민법 제217조 1항을 위반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으나 동법 조항은 상린관계(相隣關係)를 규정한 것으로서 그 위반에 관한 소(訴)에 있어서 비록 그 유해성 여부를 판단에 있어서는 객관적 요건이 아닌 주관적 요건만을 갖추어도 유해성을 인정할 수 있는 바, 반드시 법률 규정상 또는 사회 통념상 유해성이 인정되어야 할 필요는 없으며 원고가 소를 제기하였다는 사실 그 자체만으로도 그 주관적 요건을 갖추었다고 볼 수 있으므로 유해성이 인정된다 할지라도 그에 앞서 원고가 동법 규정 또는 사회 통념상 유해한 자극의 발생 자체를 객관적으로 입증하지 못하였으며 설령 그를 인정한다 할지라도 그 유해한 자극이 원고 및 원고의 소유물에 도달하여 원고의 주거, 생활 및 원고의 소유물에 대한 재산권을 침해하였음도 입증하지 못하였으므로 본 사건에서의 원고의 청구를 기각한다(한 문장을 이렇게 길게 쓰기도 쉽지는 않군요)." 만일 패소한 우리의 불쌍한 이웃이 행패라도 부린다면 경찰에 체포되어 재판을 받기에 앞서 정신감정부터 받도록 의뢰될 것이다.


히로나카 헤이스케라는 일본 수학자가 쓴 '학문의 즐거움'이라는 책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 사람의 두뇌는 컴퓨터나 로봇과 달리 관용성을 갖고 있다. 이 특징 때문에 '지혜'라는 것이 생기지만, 거꾸로 이 관용성 때문에 생각지도 않았던 과오를 범하고 사실을 잘못 인식할 때가 있다. 예컨대, 어느 젊은이가 사랑에 빠졌다고 하자. 당연히 그의 마음 속에는 상대방도 자기를 좋아해주면 좋겠다는 소망이 생긴다. 그러다가 소망은 어느새 '혹시 상대방도 나를 좋아할는지 모른다.'라는 기대로 변하고 그 기대가 자꾸만 커져 결국에는 '상대방도 나를 좋아한다.'라는 확신에까지 도달하게 된다. 이처럼 사람은 관용성이 있기 때문에 어떤 현상을 보고 사실과 다르게 사고할 수 있으며, 연상이나 추측에 의해서 상상을 자꾸 키워나가다가 마침내는 상상을 마치 사실인 것 같이 생각해 버리는 수도 있다."


기의 존재에 대한 우리의 인식도 그런 착각에서 비롯되었을 수 있지 않을까? '기'는 정의되어 있지 않고 어떤 범위로 한정되지도 않기 때문에 통계로써 접근할 수도 없어 과학의 대상이 아니다. '사랑'으로 인한 신체적 변화는 과학의 대상이 될 수 있지만 '사랑' 그 자체가 과학의 대상이 될 수는 없듯이 말이다. 이것은 기에만 적용되는 얘기는 아니다. 혈(血)이나 정(精), 신(神) 내지는 오장육부를 비롯한 대부분의 한의학적 개념들에 적용될 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 잠깐, 누군가는 이렇게 물을지 모른다. "설령 한의학이 현대적 과학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그것이 왜 문제인가?" ... 문제가 된다. 정신기혈과 오장육부는 실체적 개념이어야 한다. 인간의 육체와 생리, 병리 현상이 형이상학적인 것이라고 전제하지 않는 한, 마땅히 그래야 하고 그럴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실제로는 어떤가? '간(肝)'이 'liver'를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은 모두가 인정할 것이다. 한의학에서 말하는 간을 대충 '간장(liver)+간장의 기능들'로 볼 수 있다고 할 때(반드시 일치하지는 않지만) 간은 실체적 개념인가 관념적 개념인가? 실체적 개념과 관념적 개념이 모호한 비율로 뒤섞인 개념 아닌가? 간의 개념에 포함되는 간장의 기능들은 무엇 무엇인가? 의서에 나와있는대로라고? 만약 누군가가 종래의 개념에 포함되지 않는 색다른 것을 간의 개념에 포함시킬 것을 주장했다고 가정하자. 이를테면 "무좀은 간기가 울체되어서 생겨나는 병이다."라고 누군가가 주장했을 때 우리는 어떻게 무좀과 간의 관련성을 긍정 또는 부정할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답하는 것이 어렵다면 그것은 무좀의 한의학적 기전이 밝혀지지 않았기 때문만일까? '명문', '단전', '삼초', '심포'는 무엇인가? 해부학적으로는 존재하지 않지만 의서에서는 그 위치들을 분명히 언급하고 있다. 그러면 우리는 이것들을 무엇이라고 이해해야 할까? 분명히 의서에서 말한 곳 어디엔가 존재하지만 우리가 아직 찾아내지 못했을 뿐일까 아니면 기의 덩어리라든지 해서, 애초에 눈에 보이거나 손으로 만질 수 없는 성질의 것인 것일까? 만약 삼초가 후자에 해당된다면 왜 보이고 만져지는 소장, 대장 따위와 함께 육부라 불리는 것일까?그리고 그 기능을 우리는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내 생각이긴 하지만 한의학에서의 많은 어휘들을 한의학자들 각각이 나름대로 이해하고 있는 것 같다. 해서, 한의학자들이 서로 논쟁을 할 때 같은 단어를 쓰고는 있지만 그 뜻하는 바는 제각각이 되고 말기에 논의는 한 치도 앞으로 나갈 수가 없게 된다. 마치 자본주의자의 '자유'와 공산주의자의 '자유'가 딴판이듯이 말이다. 이렇듯 핵심적인 개념들이 제대로 정의되지 않기에, 한의학은 그 대상을 특정할 수 없고 그 언어는 다의적(多義的)이 되며 따라서 과학이 아닐 뿐더러 서로의 말을 알아들을 수도 없는 바벨탑 공사장 인부들의 언어가 되고 만다.




앞서 등장한, 우리에게 친숙한 여러 단어를 비롯해 한의학의 근간을 이루는 내용을 담고 있는 책이 있다. 바로 한의학의 바이블이라 일컬어지는 황제내경이 그것인데 이후의 모든 의서는 그 주석서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내경에 '肝主目'이라 되어 있으면 그 해석과 적용에 대해 수많은 의가(醫家)가 연구를 하고 책을 써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간주목'임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간주목'의 세 글자 하나하나의 의미를 확정하는 작업부터 선행되어야 하긴 하겠지만, 어쨌든 우리는 이것이 간과 눈 사이에 무언가 관련이 있음을 말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그 관련성을 어떻게 입증할 수 있을까? 만약 그 입증이 어렵다면 우리는 무엇으로 '간주목'을 믿어야 할까? 내경은 신이 번개로 글귀를 새긴 십계명인가? 누가 무엇을 보고 이렇게 썼던 것일까? 그리고 세상의 모든 황제내경 책이 어느 순간 사라져버려 한의학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게 되었다면 지금의 우리는 '간주목'임을 다시 발견하게 될 것인가?


내경의 문장 하나하나를 명제라 할 때 - 한의학의 바이블에 서양학문인 논리학의 '명제'란 단어를 갖다 붙이는 것에 대해 거부감을 가질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참, 거짓을 구분할 수 있다면' 정도의 뜻을 나타내고자 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명제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참, 거짓을 가름할 수 있어야 하는데 한의학의 많은 어휘들이 제대로 정의되어 있지 않아 명제의 성립부터가 되기 어렵다는 제 생각을 앞에서 밝혔습니다. '이 세상은 아름답다'라든지 '철수는 키가 크다' 등의 문장이 명제가 될 수 없듯이 말입니다. 여기에서는 일단 명제가 성립한다는 전제하에 논의를 진행하겠습니다 - 그 참, 거짓은 어떻게 판별할 수 있을까? 인간의 신체를 포함한 자연물(무기물 및 유기물)을 연구 대상으로 하는 자연과학의 명제들은 대부분 귀납적 추리에 의해 도출된다. 보다 선행하는, 상위 범주에 대한 명제로부터 연역적으로 도출되는 것들을 제외하고는 말이다. 귀납적 추론의 타당성은 거의 전적으로 논거의 정확성에 의존한다. 즉, 가장 훌륭한 귀납 추론의 명제란 최선의 증거들로 뒷받침되는 명제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간주목'은 무엇에 근거하고 있는 것일까? 내경에 그 근거가 나와 있는가? 아니면 다른 어느 곳에 나와 있는가? 그 근거를 찾기 힘든 것은 비단 '간주목'뿐만일까? 여기에서 '내경은 한의학의 바이블'이라는 표현은 비유적인 표현으로서만이 아니라 축자적인 의미를 갖는 것으로도 해석이 가능해진다. 성경의 '말씀'과 마찬가지로 증명을 필요로 하지 않으며 그 자체가 진리이고 그 권위는 절대적이다. 동의보감의 개정판이 나오지 않는 것도 허준이 죽었기 때문이 아니라 이러한 이유에서이다. 명백한 오류가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 아직은 오류임이 발견되지 않은, 혹은 애당초 오류인지 아닌지 구분하는 것이 불가능한 성질의 - 다른 부분들과 함께 섞여 있는 채로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다. 누가 감히 동의보감의 개정판을 낼 수 있을까?


이런 식의 경전 그 자체에 대한 믿음은 흔히 원리주의로 편향됨을 우리는 역사를 통해 목격할 수 있다. 종교적 원리주의의 결과는 종종 이교(異敎)와 타종파에 대한 배척, 불관용, 종교적 확신을 업은 광기와 무자비한 탄압이었다. 여기서 잠깐 버트란드 러셀의 이야기를 하자면, 그는 소년 시절부터 확실한 것, 증명될 수 있는 것을 추구했다. 그래서 그는 수학에 매료되었지만 공리(公理)는 증명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고는 크게 낙담했다고 한다. '간주목'이 공리일까? 증거없이 그것을 파악할 수 있는 날카로운 직관을 가진 사람은 매우 희귀할 것 같다.


보지 않고도 믿는 것은 보고도 믿지 않는 것보다 인류의 정신과 문명의 발전에 백 배는 더 해롭다.




서양문물이 들어온 이후 동양의 자연과학은 차츰 멸종되어 갔다. 오늘날까지 생명력을 유지하고 있는 것은 풍수지리학, 명리학 - 자연과학으로 분류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 과 한의학 정도일 것이다. 인문학에서는 유학(儒學) 정도가 거의 유일하게, 현대의 살아있는 인류학적 화석이랄 수 있는 갓 쓰고 도포 입은 할아버지들과 함께 남아있다고 할 수 있겠지만 - 지금의 국문학은 동양전통학문이라고 보기 어렵다. 국어를 소재로 하고 있을 뿐 방법론이라는 틀은 서양어문학의 그것이기 때문이다 - 유학 역시 단지 숨이 붙어 있을 뿐이다. 과거 통치이념으로서, 생활 규율로서, 윤리도덕으로서 한국 사회 구석구석 스며들어 있던 유학이 어쩌다가 이렇게 됐을까? 서구와 일본의 자극적이고 전염력 강한 물질문화의 홍수에 휩쓸려버렸기 때문일까? 아니다. 유학은 용도폐기됐을 뿐이다. 현대사회, 국가와 맞지 않기 때문이다. 삼강오륜과 인의예지는 민주주의적 가치에 대한 신봉과 시민적 덕목들로 대체되었으며 청빈과 안빈낙도는 사익(私益)의 추구라는 자본주의 체제의 전제에 배치되기 때문이다. 어찌하여 명리학 - 거창하게 말하자면 이런 이름이지만 기실 사주팔자와 궁합, 택일, 작명 따위의 장사가 이 나라에서 되는 현상 말입니다 - 과 한의학이 유학처럼 'obsolete'해지지 않고 'present'한 것인지 궁금함이 생겨난다. 어째서일까?




명리학이 살아남은 것은 우리가 미래를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서양)학문의 힘으로 미래를 예측하는 데 한계가 있지만 여전히 사람들은 미래를 궁금해 하기 때문에 명리학 - 사실 '학'자는 붙이는 것이 마땅하지 않지만 - 이 살아남아 있는 것이다. 여기서 누군가가 손을 들고 이렇게 말한다. "서양에도 점성술이 있지 않느냐?" 그래, 맞다. 그러나 점성술은 적어도 양심상 '학'자는 쓰지 않는다. '학'자를 붙이고는 있으나 명리학이 충족시켜 주는 것은 지적 호기심이 아니라 미래에 대한 불안의 경감일 뿐이다. 애당초 진리 따위에는 관심이 없다. 모름지기 학문이라 하면 이론이 현실과 부합하는지 끊임없이 의심하고 그 둘을 접근시키려 노력해야 한다. 그러나 명리학은 자신과는 전혀 닮지 않은, 출중한 외모의 다른 누군가를 그려 놓고는 자화상이라고 하며 스스로 만족해할 뿐이다. 이렇게 비난할 수 있는 이유는 충분히 많다. 명리학의 주요 분야 중 하나인 사주에 대해서는 이런 물음들을 던질 수 있다. 한날 한시에 태어난 일란성 쌍동이의 살아가는 모습이 딴판인 경우는 어떻게 된 것인가? 자시(子時) 정각에 태어난 A, 자시에서 축시(丑時)가 되기 1분전에 태어난 B, 축시 정각에 태어난 C가 있다고 할 때 A와 B의 사주, B와 C의 사주 중 어느 쌍이 서로 더 유사한가? 제왕절개로 생일이 하루 앞당겨진 아이는 운명이 달라지는가? 수술이 잘못돼 엄마가 죽는다면 확실히 달라지겠지만. 몇 달 동안이고 해가 지지 않는 백야의 자시나 축시에 태어난 북극 지방의 아이의 사주는 같은 자시, 축시의 깜깜한 밤에 태어난 온대 지방의 아이의 사주와 비교해 어떤가? 소띠인 아이는 소의 특성을 닮는다고 하는데 갑자기 온 국민이 소고기광이 되어 나라안의 소를 모두 잡아 먹어버리게 되면 어떻게 되나? 그 빈자리가 전부 수입 물소로 채워지면 어떻게 되는가? 아니면 수백만년이 흘러 한우가 모두 미노타우로스로 진화하면 또 어떻게 되는가? 무엇보다도 사주는 왜 태어나는 시점과 관련이 있는 것인가? (운명에 예정된) 죽을 시점이나 태어난지 3년 3월하고 3일 3시간 33분 33초가 됐을 때하고는 관련이 없는가? 아니, 태어나는 시점이 아닌 잉태되는 순간이 좀 더 그럴싸하지 않는가? 그건 확인할 수가 없으니까 안 된다구? 인간 복제가 실현되었을 때, 복제품인 아이의 사주는 그 자신의 출생 시점을 따르는가 아니면 오리지널의 출생 시점을 따르는가?


 

한의학에 대해 말하자면, 한의학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우리가 아직 인체의 생리와 병리를 완전히 알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근대 서양의학, 의술이 전래된 이후 공중위생 및 보건 체제가 정비되고, 예전 같으면 죽었을 환자들을 많이 살려놓음으로써 평균 수명이 크게 연장되었으나 여전히 세상에는 괴이하고 희귀한 질병이 많고 인체의 생리 또한 많은 부분이 베일에 가려 있다. 서양의학이 제거하거나 답을 줄 수 없는 문제들이 아직 많기 때문에 한의학과 한방 - 한의학의 임상 부분을 뜻함. 이후 동일 - 이 시장에서 살아 남을 수 있었던 것이다. 한방이 양방에 대항해 경쟁력을 갖는 분야는 암이나 중풍 등의 불치/난치병, 만성질환이 대표적이다. 의도된 바는 아니겠지만 한방은 양방의 틈새 시장 상품인 셈이다. 그런데 이런 질병들은 양방으로든 한방으로든 잘 낫지 않는 것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평균 수명이 증가하고 보건 및 생활 수준이 개선되면서 의료 수요의 발생은 급성/유행성 질환에서 만성/퇴행성 질환 쪽으로 무게 중심을 옮기고 있고 이런 상황 변화 아래 구미(歐美)에서도 대체/보완의학의 주가가 상승하고 있지만, 소위 대체/보완의학이 기존 서양의학(conventional medicine)에 대한 말 그대로의 대체의학(alternative medicine)이 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 아마도 영원히 보완의학(complementary medicine)으로 남게 될 것이다. 그 이유는 서양의학이 빠른 속도로 자신의 약점을 보완해 나가고 있는데 반해, 대체/보완의학은 - 특히 한의학처럼 오래된 것일수록 - 변화/발전이 더디거나 한정된 방법론과 소재로 인해 재생산력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10년 전하고만 비교해 봐도 지금의 병원은 크게 시설과 서비스가 개선되었고 보다 친환자적인 곳이 되었고 또 되어가고 있다. 수술 방법도 환자의 고통을 경감시키는 방향으로 많이 개선되었다. 아무래도 환자를 '손님'으로 보는 자본의 논리가 개입되었기 때문이겠지만 그 때문만이라고 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서양의학은 때론 일부 대체/보완의학의 영역을 편입시켜가면서 분자생물학, 유전공학, 물리학, 화학, 의료공학 등 인접/관련학문의 성과들을 흡수해, 줄기세포나 레이저를 이용한 치료/수술법의 개발 등 개가를 올리고 있다. 한방에서는 레토르트 파우치 탕약 포장법의 개발 이후 무슨 이렇다 할 큰 발전이 있었는지 나는 잘 모르겠다. 누군가는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연구 개발에 들이는 비용과 인력의 차이, 그리고 오랜 기간 한의학이 받아온 차별과 홀대를 고려할 때, 이런 단순한 비교는 온당치 못하다."라고. 그러나 그런 책임을 외부로만 돌릴 수는 없을 것 같다. 인삼에서 사포닌을 추출해 약을 만들었을 때, 그 약은 한약일까 양약일까? 유효 성분을 추출해 사용하는 방식으로, 서양의학(약학)의 방법론에 의해 만들어졌다면 그것은 양약이라 할 것이다. 그러면 플라스틱, PVC, 탄소섬유나 무색무취무미의 돌가루 따위를 '한약'으로 쓸 수 있을까? 기미론적 접근을 할 수 있는가? 해괴한 것들만 가지고 예를 들고 있다고? 그럼 아스피린이 한약으로 쓰일 수 있을까? 인삼, 당귀, 오미자는 그 성분들을 추출해 약(양약)을 만들 수 있지만 아스피린이나 비아그라를 한의학적/기미론적 효능에 근거해 한약으로 쓴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다. 그 약리작용을 한의학적 언어로 표현하는 것이 가능하다 해도 그것으로써 한약으로 간주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한의원에서 체열진단기, 초음파영상장비를 쓴다고 해서 그것들이 한의학적 도구가 되는 것은 아니다. 양도락이니 체질감별기니 하는 것들이 있지만 아직까지 그런 기기들을 이용한 진단의 효율성과 정확성, 신뢰성에는 의문의 여지가 많아 보인다. 서양의학은 그 자신의 방법론을 유지한 채 대체/보완의학(한의학)의 영역에 속하던 것들을 흡수, 확장되어 나갈 수 있지만 한의학은 그러지 못하거나, 적어도 그런 면에서 많이 뒤처진다. 서양의학은 (육체 및 정신의) 인간의 영역에서의 생물학, 화학, 물리학 등 여러 학문의 교집합이다. 관련학문이 변화하고 발전하면 서양의학도 그에 따라 변화, 발전한다. 분자생물학이나 방사선학에서의 성과들은 의학에서 가져다 또한 자신의 성과로 삼는 것이 가능하다. 그리고 그 학문들에서의  쓰이는 용어들은 상호호환성을 갖는다. 학문마다 나름대로 의미의 한정, 추가를 하기는 하지만 같은 글자로 표현되는 하나의 용어가 서로 딴판인 뜻을 갖는 경우는 그렇게 많지 않다. 자본주의와 민주주의가 그 발전의 궤(軌)를 같이 하듯이 서양의학과 그 인접/관련학문들도 그러하다. 하나 현대에서의 한의학은 상당히 유별난 존재가 되어버렸다. 과거에는 어떠했는지 모르겠지만 오늘날 그 우군은 동양철학 정도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그러나 동양철학은 서양의학의 해부학과 마찬가지로 죽은 학문이다. 단지 오래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해부학은 오늘날 거의 그 궁극에 다다랐기 때문이고 동양철학은 새로운 관념과 사상을 만들어 낼 힘을 잃었기 때문에 살아있는, 싱싱한 학문이 아니다. 한의학의 땅에서 자라는 작물들은 이제, 지금까지 물을 대 오던 저수지의 물이 얼마 남지 않아 하늘에서 비가 오기를 바라고 있어야만 하며 새로 나오는 숱하게 많은 비료들은 모두 맞지가 않아 하루가 다르게 키가 자라는 옆 옥수수밭을 보고 있어야 할 뿐이다. 이것이 단지 학문적 헤게모니의 문제일까?


한의학의 언어는 다른 학문들의 그것과 서로 소통되지 않는다. 한의학은 고립된 소수 민족의 언어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 결과 한의학 용어는 번역이 불가능하다. '기'는 'Qi'로, '삼초'는 'San Jiao'로 옮겨질 수 있을 뿐이다. 'Triple Energizer' 또는 'Triple Burner'도 있지 않느냐고? 'privacy'를 '사생활'로, 'virtual reality'를 '가상현실'로 옮기는 것 이상으로 등가관계가 성립하지 않는, 헛웃음이 나오는 번역이다. 이것은 영어에 대해서만이 아니다. '창만'과 '복창'의 차이점을 한의학의 한자어를 쓰지 않고 설명할 수 있는가? '元氣'와 '宗氣', '衛氣'를  설명할 수 있는가? 법률용어보다도 더 우리말로 옮기는 것이 어렵고 - 내가 보기에는 -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이러한 소통 불가능성은 결국 학제적(學際的) 연구를 불가능하게 하고 다른 학문들로부터 스스로를 고립되게 만든다. 한의학의 권위는 그 언어의 난해함과 불가역성(不可易性)에 상당 부분 의지하고 있는 듯 하다.


한의학에 대해 의심하게 되는 또다른 이유는 지금은 폐기된, 과거의 서양의학 이론들과의 유사성이다. 거의 1천년간 서양의학에서 절대적 권위를 누렸던 갈레노스의 4체액설은 인간의 성격(기질)을 결정하는 요인을 검은 담즙, 노란 담즙, 점액과 혈액의 4가지 체액의 양과 그 체내 비율이라 하고, 체액이 무질서해지면 병이 생긴다고 했다. '4'라는 숫자에서 사상체질이 연상되기도 하지만, 그보다 주목해야 할 것은 병의 (근본적인) 원인을 음양의 부조화로 보고 있는 한의학의 기본이론과의 유사성이다. 방혈(放血)요법이라는 것이 있었다. 병독(病毒)이 들어있는 나쁜 피를 빼내 환자를 치료한다는 방법으로서, 혈액의 기능이 밝혀지고 수혈요법이 개발되기 전까지 서양 근대에서까지도 널리 사용되었는데, 일단 피를 뽑아내고 (혈액 부족으로 인해) 환자의 상태가 악화되면 아직 병독이 다 빠져나가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해 오히려 계속해서 피를 뽑아내 많은 사람들의 명을 재촉한 치료법이었다. 이것은 그 바탕이 되는 생각과 방법에 있어 사혈(瀉血)과 너무도 비슷하다.


서양에서는 19세기까지도 자위행위는 두통, 치통, 관절통, 근육통, 복통, 맹장염, 치질, 조로(早老), 우둔, 허약, 불임, 우울, 자살충동, 범죄성향, 정신박약 기타 많은 질병/이상상태의 원인으로 여겨졌었다. 오늘날은 오히려 건전한 성행활이 권장되고 있지만 말이다. 한의학 의서에서는 자위행위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이 있는지 모르겠으나 성교에 대해서는, 잦은 성교는 신정(腎精)을 소모시킨다며 경계하고 있다. 내 주관적 견해로는 윤리적 가치 판단을 의학의 영역에 개입시킨 것 같은 인상을 받지만 - 아무튼 그렇다.


한의학 내지는 한의학계의, 정확성과 현실부합성 추구에 대한 불철저함 또한 문제의식을 불러 일으킨다. 한의학 저술에는 '정미롭다', '대저', '무릇', '반드시', '~할 따름이다', '마땅히'와 같은, 가치중립적이지 못하거나 단정적, 독단적인 표현이 많이 등장하는데 이런 것은 지금의 과학 저술에서는 거의 절대적으로 금기시되는 표현들이다. 이런 잘못은 표현만 현대적으로 바꾼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마땅히' 그 내용에 대한 검토도 수반되어야 하는 것이기에 바로잡는 것이 간단하지 않다. 내경이나 동의보감에 나오는 모든 '마땅히'와 '반드시'를 삭제하는 순간, '진리'가 '학설'로 격하되고 불쌍한 우리의 한의학도들은 대혼란에 빠져들고 말 것이다.


한의학의 곳곳에서 발견되는 유교적, 도교적 요소들도 현대에 맞지 않는 학문이라는 생각에 근거를 보태준다. 유의(儒醫)라는 것이 있었다. 유생 출신으로서, 대개 과거에 낙방하고 의업으로 업종 전환한 사람을 일컫는데 말하자면 '편입생'인 셈이다. 원래부터의 전공자들과 구체적으로 어떻게 달랐는지는 모르겠으나 그 명칭을 보아서는 두 개의 전공이 단절되지 않고 유기적으로 연결되었으리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또한 방제학의 군/신/좌/사약이나, 군사가 적을 공격하는 것으로 약이 병을 낫게 하는 작용을 표현하는 것 따위도 그 증거이다. 도교의 영향은 우리가 예방의학 시간에 배웠던 '연년익수(延年益壽)', '경신(輕身)', '흰 머리가 검어지는 효능' 따위의 표현에서 발견할 수 있다. 그런데 무엇이 문제냐고? 군신좌사의 방해(方解)는 유교의 국가체제관을 방제학에 대입한 것인데, 인간 사회의 논리를 자연(의학)에 들이대는 것은 온당치 못하지 않을까? 마치 다른 동물을 잡아먹고 사는 맹수를 도덕적으로 비난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어불성설이다. 현대의 정치학자들이라면 입(법), 행(정), 사(법)의 세 가지로 방해를 할 수도 있지 않을까? 연년익수니 경신이니 하는 것들은 모두 신선(神仙)을 형용하는 것이다. 그런데 신선이 과연 존재하는 것일까? 서양에서는 유니콘이니 불을 뿜는 용이니 하는 것들이 모두 멸종되었지만 - 신화나 동화 속에서만 살고 있게 되었지만 - 동양에서는 청룡, 백호, - 이것은 예외이긴 하지만 -  현무, 주작과 함께 신선이 지금도 화석이나 미이라로서가 아니라 살아있는 사람과 마찬가지로 존재하고 있다. 풍수지리에서, 한의학과 기공술에서 말이다. 또한 호랑이의 앞다리뼈를 먹으면 호랑이의 힘과 용맹을 자기 것으로 할  수 있다거나 웅담을 먹음으로써 곰처럼 강해질 수 있다는 생각은, 사로잡은 적을 잡아먹음으로써 그 힘과 용기를 자기 것으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한 식인종의 그것과 다를 바가 없다. 과연 그러하다면 영화 '스타쉽 트루퍼스'에 나오는 괴물처럼, 다른 사람의 뇌를 먹어서 자신의 지식을 늘리려는 사람들과 그들을 피해 도망다니는 사람들로 세상은 아수라장이 될 것이다. 호랑이뼈나 웅담이 전혀 효능이 없다는 얘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라 유비추리(類比推理)의 오류를 지적하려는 것이다.


한의학은 '뇌'라는 매우 중요한 장기에 대해 거의 주목하지 않았다. 인간의 모든 생명유지/생리활동과 정신활동의 사령탑인 이 기관의 기능과 중요성에 대해서 한의학 의서들에는 거의 아무런 언급도 없다. "오늘날 뇌의 기능이라고 알려진 대부분의 생리작용을 한의학에서는 오장육부의 기능으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을 뿐 아닌가?"라고 누군가 반문한다면 나는 이렇게 말하겠다. "그 나누는 기준은 무엇인가? 왜 어떤 것은 간의 기능이고, 어떤 것은 신의 기능인가? 오장육부 각각에 뇌의 기능을 결합시켰다면, 오장육부는 그렇다면 오장육부인가 뇌인가? 뇌의 기능 대부분이 오장육부에 할당되었다면 뇌가 제거되더라도 그 기능들은 제대로 기능해야 할 것 아닌가?" 오장육부의 개념을 '오장육부+그 무슨 기능'으로 받아들이면, 우리는 다시 앞서의 용어 정의 및 명제 성립 여부의 문제로 복귀하게 된다. 무엇이 무엇인가 말이다.


한의학은 서양의학과는 달리, 국소가 아닌 인체 전부를 보기 때문에 보다 근원적인 치료가 가능하다는 말들을 많이 한다. 국소가 아닌 인체 전체를 보려 한다는 말에는 나도 동의한다. 그러나 나무는 중요하지 않고 숲만이 중요할까? 이 논제에 대해 길게는 쓰지 못하겠지만 이런 질문을 던지는 것으로 대략의 의미는 전달될 수 있으리라 본다. 감기만큼이나 흔한 것이 창상(創傷)이나 절상(切傷) 등의 외상, 골절인데 한방은 왜 이런 것도 치료하지 않는가? 아니면 못하는 것인가? 피부가 찢어지거나 칼에 베여서 몇 바늘 꿰매거나 팔다리가 부러져 접골, 깁스를 하러 한의원에 간다는 사람은 없다. 삼국지에, 화타가 조조의 뇌수술을 하려 하다가 의심을 사 결국 죽임을 당한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화타가 처형되기 전 옥리(獄吏)에게 건네주며 후세에 전하라 부탁한, 청낭서를 아궁이에 넣고 태워버린 그 옥리의 아내에게 뇌와 수술, 이 두 가지에 대한 책임을 한꺼번에 돌려버리면 마음이 좀 편해질까?


경락은 신비스럽다. 좀처럼 풀리지 않는 몇 가지 질문을 던져 보면 그 신비로움은 한층 더해진다. 내경 시대의 경혈 개수, 위치와 지금의 그것이 다르다고 하는데 누구에 의해 어떻게 변화된 것인가? 지금 우리가 보는 책 중에는 현대적인 해부도에 혈위를 나타낸 것들이 많은데 그렇게 정확한 위치는 언제부터 정해진 것인가? 경혈의 크기는 직경 0.5cm인가 1cm인가? 그 직경 0.5cm 또는 1cm 안에만 침을 놓으면 그게 어디이든 효과는 똑같은가? 모양은 원형, 타원형 또는 불규칙형 가운데 어떤 것인가? 경혈의 깊이는 어떤가? 깊이가 이르는 곳이 체표인가 피부층인가 근육 속인가 그도 아니면 뼈의 표면인가? 스테인리스 침이 아닌 나무침이나 알미늄침을 쓰면 어떻게 되는가? 침의 단면이 원, 타원, 사각형, 육각형일 때는 각각 어떻게 다른가? 경락의 순행방향에 평행하거나 거스르도록 침을 뉘어서 꽂으면 보사(補瀉)가 되는데 가령 순행방향과의 교각이 45도나 90도가 되도록 꽂으면 어떻게 되는가? 경혈점에 침이 꽂혀 있으면 기의 흐름이 그 자리에서 멈추게 되거나 흩어질 수도 있지 않을까? 기가 침을 타고 올라가 방전(放電)되듯이 공중으로 흩어져 버릴 수도 있지 않을까? 현재 여러 연구진들이 이와 같은, 혹은 이와 유사한 의문들에 답하기 위해 연구를 하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길게는 수천 년 짧게는 수백 년 된 침술의 역사에서 나와 같은 의문을 가졌던 사람이 없지는 않았을 텐데 이미 나름의 대답들이 존재하고 있었어야 하지 않느냐고 따진다면 지나친 처사일까? 그 대답들의 존재에 대한 소식을 단지 내가 듣지 못했을 수도 있긴 하지만.


학교에서 동의보감 특강을 들은 적이 있다. 신형(身形)문에 '검은 사람이 어떻고 흰 사람이 어떻고...' 하는 구절이 나오는데 내가 강사에게 '검은 사람', '흰 사람'이 무슨 말인지를 물었더니, 그가 강의실에 앉아 있던 학생들 중 각기 살색이 검은 사람과 흰 사람을 한 명씩 일으켜 세우더니 보는 바와 같은 의미라고 말했다. 내가 이어서 "흑인과 백인은 어떻습니까?"라고 물었더니 그는 그런 얘기는 일단 넘어가자고 했다. 강사 자신도 어떻게 생각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는 뜻이리라. 당신은 알겠는가? 한 가지 더. (적어도 동양권에서는) 보통 살색이 흰 것은 그 사람이 부귀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으로 여겨져왔는데, 어떤 살이 흰 사람이 잘 먹고 잘 살다 갑자기 형편이 곤궁해져 밖에 나가 뙤약볕 아래서 오랜 시간 일해야만 먹고 살 수 있게 되어서 살빛이 검게 되었다면 이 사람은 흰 사람일까 검은 사람일까? 그리고 동의보감에서 말한 (검은, 혹은 흰) 그 사람의 체질 - 사상체질이 아닌 - 은 그대로 유지될까 바뀌게 될까? 물론 그 반대의 경우도 가정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또 사람의 몸 안에서 기가 올라가고 내려가고 한다는 표현이 많이 쓰이는데, 위아래가 없는 무중력의 우주 공간에서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 '위아래'라는 표현이 중력과는 무관하게 쓰인 것이니 아무 상관 없는 것인가? 평생 물구나무선 채로 사는 어떤 수행자가 있다면 그 사람에게 있어서는 어떨까? 춘하추동 사계절이 인간의 건강상태, 질병발생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는데 계절 구분이 없는 열대 지방이나 극지방에서는 어떻게 되는가? 중국은 온대지방이고 온대기후에 맞춰진 기술(記述)이니까 다른 기후를 갖는 지역에서의 적용이 곤란하다는 점을 가지고 걸고 넘어지면 안되는 것일까? 한여름에 냉동창고에 갇혀있다 구조된 사람이, 열이 펄펄 나고 몸살을 하는 등 한사(寒邪)에 감촉되어 나타나는 병의 증상을 보였다고 할 때, 이때의 그 한사를 그 사람의 몸에 봄이 지나고 한여름이 되도록 숨어 있던, 지난 겨울의 것이라고는 보기 힘들 것이다. 그렇다면 한사와 겨울이라는 계절은 서로 별 관련이 없는 것 아닐까? 그러나 분명히, 한의학에서는 '한사로 인한 병은 겨울에 호발(好發)한다'고 하는 정도 이상으로 그 둘의 관계를 밀접한 것으로 보고 있는 것 같다.


한의학적 진술/기술은 그 정오(正誤)에 대한 판단이 쉽지 않다. 그러니까 '氣之萬物之生而動原也'라고 누군가 - 내가 방금 지어낸 말이지만 - 말했다고 할 때 이것이 맞느냐 틀리느냐를 갈라 말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맞다고 하는 사람과 틀리다고 하는 사람 - 이 경우에는 아마도 거의 없겠지만 - 이 끝없이 자기 주장을 할 것이고 모두가 승복하는 판단은 아마도 - 절대적 권위자의 한 마디가 있기 전에는 -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한의계에는 'OO선생' 등으로 불리는 이들이 꽤 있다. 각기 제나름의 학파를 이끌고들 있는 모양인데, 누가 정통이고 누가 사이비일까? 누가 학자고 누가 장사꾼일까?  누구의 학설이 참신한 것이고 누구의 학설이 생뚱맞은 것일까? 그런 것들을 누가 가려줄 수 있을까? 회교를 믿든, 힌두교를 믿든, 마음대로 하면 될까?


세상의 모든 학설이라는 것이 다 그런 것 아니냐고? 글쎄, 그렇지 않은 것들도 있을 것이다. 아무튼, 그러한 특성 - 장점일 수도 단점일 수도 있는, 그러나 대체로 장사꾼들에게는 장점인 - 때문인지 한의학은 최소한 그 배타성과 독점성, 권위에 있어서는 서양의학에 뒤지는 것 같다. 그 증거로는 길을 가다 어디서든 볼 수 있는 '경락 마사지' 광고를 비롯해 수지침, 침구사, 한약재를 넣어 만든 건강식품, 옥매트, 한방 사우나, (인삼과 대추가 들어간) 삼계탕 등 수도 없이 많은 것들이 있다. "이런 것들은 한약이 식품으로 사용되어도 좋을 만큼 안전하고 국민들이 한방을 선호하고 그 효능을 신뢰하며, 한의학이 대중에게 친근하게 와 닿고 있으며 보편적, 일반적인 것이기에 때문에 다양하게 널리 활용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오히려 한의학의 우수성을 보여주는 사례들이 아닌가?"라고 누군가 말할 것 같지만, 글쎄... 너무 친근하다 보면 만만해 보일 수도 있지 않을까? 농약 수치만 기준치 이하로 나오면, 기의 흐름이 원활해지는 것은 증명해야 할 필요가  없으니 그렇게 광고해도 의료법, 식품위생법, 공정거래법 위반으로 걸릴 것이 없으니 말이다. 옥돌로 매트를 만들어서 수맥을 차단하고 막힌 기의 흐름을 소통시켜준다는데, 한약이 아니라 '옥돌'이니 한의사협회에서 걸고 넘어질 것도 없고 '수맥' 때문에 풍수지리협회나 수자원공사에서 태클 걸 일도 없을 것 아닌가? 다음과 같은 광고는 거의 매일 볼 수 있다. '이 약은 동양의학 2천년의 신비를 집대성한 것으로서, 오장육부의 기를 북돋고 피를 맑게 해주며 위를 튼튼하게 해주어 겨울에 감기 한 번 안 걸릴 정도로 몸이 튼튼해지고 기운이 샘솟으며 머리가 총명해져서 학업 능력이 향상되고 무쇠도 씹어 삼킬 수 있을만큼 소화력을 강하게 해주어 당신의 건강 뿐 아니라 운명마저도 바꾸어줍니다. 단 열흘 동안만, 다시는 만나볼 수 없는 파격적인 특가로 모시겠습니다.' ...카드 할부로 건강식품 수집하는 게 취미인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누가 봐도 헛소리임이 분명하지만 만약 우리가 관련 부처 공무원이라고 할 때 이 광고를 허위/과대광고로 단속할 수 있을까?


사상체질이라는 것이 있는데 한의대 다닌다고 하면 누구라도 체질을 봐 달라고 부탁해올 정도로 일반인들도 흔히 알고들 있는 것이다. 주로 이것을 밑천삼아, 우리나라에서 '漢醫學'을 '韓醫學'으로 바꾼 것으로 알고 있는데 비유하자면 - 신도들에게는 미안하지만 - 기독교에서 장로교파를 분파(分派)해 나오면서 '기독교'라는 이름을 버리고 '장로교'라고 하는 것 만큼이나 - 실제는 그렇지 않지만 - 보기 민망한 일이다. 각설하고, 사람의 체질을 4가지로 분류하는데, 4체질이 아니라 각자 나름의 이론을 펼치며 8체질 또는 16체질, 64체질을 주창하는 사람들도 있다. 어떤 것이 옳을까? 무엇이 정통이고 무엇이 사이비일까? 누가 정파(正派)이고 누가 사파(邪派)인가? 모르긴 해도, '2체질'로 줄어든다면 모를까 - 이때 그 두 체질은 '양인'과 '음인'이 되겠지? 아니면 '남'과 '여'? - 8, 16, ... 이렇게 늘어나면 늘어날 수록 분류가 세밀해지고 개별화가 더 잘 될 테니까 - 개개인의 특성에 더 잘 맞출 수 있게 된다는 의미에서 - 더 우수한 이론 아닐까? 그래서 어쨌다는 것이냐고? 좋다, 임팩트가 좀 약했던 것 같다. 예전에 '그것이 알고 싶다'이던가 어디선가의 TV 프로그램에서 체질을 다룬 것을 본 적이 있다. 8, 16, 64 체질 얘기도 거기서 본 것이지만, 어쨌든 기자던가 하는 사람 한 명이  경희의료원 사상의학과를 비롯, 몇 군데의 한방병원/한의원에서 체질감별을 받았는데 결과가 다 제각각이더라는 것이다. 학교를 갓 졸업한 새내기 한의사도 아니고 다들 상당한 경력과 인지도의 소유자들이었는데도 불구하고 그리되었던 것이다. 어떻게 된 것일까? 방송에서는 딱히 어떤 결론을 내리기 조심스러워하며 끝을 맺었던 것으로 기억되는데, 한의사들이 죄다 엉터리이거나 방송국 측에서 어떤 속임수를 쓴 것이 아니라면 사상체질이라는 것의 유효성과 신뢰성에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다. 이제마가 애당초 '사상체질'로써 말하려 했던 것이 오늘날 한의학자들이 이해하고 있는 것과 달랐을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긴 하나, 그런 것을 접어두고 볼 때 이렇게 객관적으로 공인할 수 있는 체질감별을 누구도 할 수 없다면 사상체질의학 그 자체에 결함이 있거나, 현대인의 체질이 이제마 생존 당시와는 많이 달라졌거나, 현재로서는 아무도 사상의학을 정확히 이해하고 있지 못하거나 세 가지 중 하나일 것이고 그 모두의 경우, 사상의학은 신뢰성과 효용을 상실하게 되며 계속 전수되어야 할 가치 또는 필요가 있을지도 의문이라 할 것이다.


TV에 나오는 한의사들을 보면 대개 이렇게들 말을 한다. "계란의 효능은, 본초강목에 보면 어쩌구저쩌구..., 또 단백질과 포화지방산이 풍부해서 어쩌구저쩌구..." 이렇게 '한방+양방'으로 말하는 것이 거의 정형화되어 있는데, 만약 본초강목에도 동의보감에도 나와 있지 않은 - 실제로는 어떤지 모르겠지만 - 타조알의 한의학적 효능을 묻는다면 어떤 대답이 나올까? ...네이버에 물어보라고 한다고?


극히 일부이겠지만 - 이런 전주곡으로 시작되는 노래 가사는 항상 '일부'가 아닌 '전부'에 대한 대량학살로 끝난다는 것은 알고들 있겠지? 나는 그러고 싶지 않지만 - 한의학으로 에이즈를 치료할 수 있다느니, 서양의학 책들과는 달리 한의학 의서들은 개정판이 나오지 않는 이유가 한의학이 영구불변의 진리를 말하고 있기 때문이라느니 - 이 얘기는 당신이 어디선가 들어본 적이 있겠지만 - 하는 말들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한의대생들 가운데에도 양방과목을 줄이거나 아예 없앴으면 좋겠다고 말하거나 '양방적' 사고를 갖고 있는 교수들을 경원시하는 학생들이 있는데 - 물론 양방과목들이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으며 서양의학과 한의학을 뒤섞어 배움으로 인해 한의학의 정체성이 혼미해지고 그로 인해 학생들이 혼란스러워하는 현상은 나도 안타깝다(여태까지 한의학을 비난, 매도해 놓고 이렇게 말하는 것을 가증스럽게 여길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나 역시 학생의 - 또는 학생이었던 - 입장에서 안타깝다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다). 이 혼란의 궁극적 해결책은 의료일원화(의학의 일원화는 필요하지 않다. 각자 제 나름의 길을 가면 될 것이기 때문에)이고 그 모델은 중국식보다는 일본식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 이런 학생들은 나중에 그들처럼 될 가능성이 있다. 사회 어디에나 원리주의자, 극단주의자, 쇼비니스트들이 발견되기는 하지만 특히 한의계에서는 그런 사람들이 비판과 의심의 눈초리를 받기는 커녕 '정통'으로 간주되고 - 위기의 농촌을 구할, 농촌후계자처럼 - 한의학의 적통(嫡統)을 계승할 것으로 기대되고 있는 듯 하다. 이것은 나만의 관찰일까?


학문 본질상의 문제점과는 거리가 있는 주제일지도 모르지만, 한의계의 척박한 학문적 풍토 역시 지적하고 싶다. 알려진 사실들, 참이라고 받아들여지는 것들에 대한 검증과 정확성, 무오류성 추구의 노력이 부족해 보인다는 말이다. 단적인 예로, 최승훈 교수님의 학부생 시절만 하더라도 학교에서는 내경의 저자가 '황제'라고 가르치고 배웠다고 하는 사실이다. 내경에 대한 문헌학적 고증이 언제 시작되었고 그 당시까지 얼마만한 성과를 거두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대통령 연설문의 작성자가 대통령 본인이라고 하는 것 만큼이나 잘못되고 상식적으로도 의심이 가는 지식이 그렇게 가까운 과거에 이르기까지 대학이라는 곳에서 가르쳐졌다는 것에서 한의계의 학문적 풍토에 대한 회의를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벽에 걸린 액자나 책장 속 화타, 허준의 그림 아래 '(상상화)'라는 세 글자가 눈에 띄지 않는다고 해서 슬픔을 느꼈다면 감수성 과잉일까?


음양오행과 오운육기는 자연현상 및 인체 생리/병리를 설명하는 데 있어 매우 강력하고도 효과적인 도구이다(내가 이렇게 말하다니 뜻밖인 사람도 있겠지만 - 실제와의 부합여부는 논외로 한다 - ... 나는 독자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다). 너무 강력하고 효과적이다보면 스스로의 힘에 겨워 쓰러질 수도 있지 않을까? 음양오행(이후 '오운육기'는 생략)은 세상 만물의 이치를 설명할 수 있다. 흔히, 동양철학을 하는 사람들은 마치 세상 이치에 통달한 듯한 인상을 주곤 하는데, 그것은 음양오행을 꺼내들면 세상만사 설명 안 되는 일이 별로 없기 때문일 것이다. 하나 여기서 '모든 이의 책임은 누구의 책임도 아니다'라는 격언이 떠오르는 것은 왜일까? 모든 것에 대해 설명 가능한 하나의 원리란, 사실 아무것도 설명하고 있지 않은 것 아닐까? 음양오행의 세계상 속에서는 우주만물이 하나의 통합적이고 유기적인 체제를 이루고 있다. 일월성신과 지구(라는 개념은 없었지만), 하늘과 땅, 자연과 인간이 모두, 서로 맞물려 돌아가는 하나씩의 톱니바퀴들이었고 용과 호랑이, 혼백과 몸뚱이, 죽은 자와 산 자가 모두 이 세계의 구성원이었다. 우주와 인간 세상이 별개가 아니었기에 임금이 부덕하고 인심이 사나워지면 까마귀가 울어대고 다리 다섯 달린 송아지가 태어났으며, 마찬가지로 도읍의 지기(地氣)가 다하면 나라가 어지럽고 도적의 무리가 설쳤다. 압도적인 자연의 힘 앞에 인간은 무력했기에 사시사철과 24절기에 맞춰 농사를 짓고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잤으며 하늘의 노여움을 사지 않기 위해 제사를 지냈다. 이것이 이 세계의 질서를 거스르지 않는, 순리에 따르는 삶이었다. 그러나 언젠가부터 모든 것이 바뀌어 버렸다. 아직도 추운 겨울에는 옷을 입고 더운 여름에는 옷을 벗어야 하긴 하지만 이제 인간은 더이상 자연 앞에 무력한 존재가 아니었다. 비가 오지 않으면 물을 끌어다 댔고 어두워지면 불을 켜면 그만이었으며 무엇보다도, 비가 오지 않아도 공장의 기계가 돌아가는 데는 별 문제가 되지 않았다. 아직 해와 달을 움직이는 데에는 미치지 못했지만 지구로 달려오는 소행성 정도는 핵미사일을 쏘아 튕겨버릴 수도 있게 되었다. 음양오행 방정식에서 종속변수이던 인간이 독립변수가 되어 버린 것이다. 아직 되어 가고 있는 중일 수도 있겠지만.


땅 위에 동서남북 4방향을 가리키는 선을 그으면 음양오행의 좌표계가 하나 만들어진다. 4방위 그 각각의 중간 방위들을 포함한 8방위 또는 16방위나 그 이상의 방위 각각에 오행이 대응하여 이 좌표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에 오행적 속성을 부여한다. 그런데 이 좌표평면을 지면에 수직하도록 90도 회전, 일으켜 세운다면 어떻게 될까? 지면과의 교선에 대해서는 여전히 오행을 대응시키는데 문제가 없겠지만 사선방향이나 지면에 수직한 좌표축에 대해서는 어떨까? 나는 잘 모르겠지만, 여전히 오행의 대응이 가능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그 오행적 속성의 영향이 중력, 고도와 그에 따른 기온 변화나, 지중(地中)과 공중(空中)의 차이에 의한 영향보다 더 강할까? 음양오행의 세계는 잘 짜여져 있고 조화롭지만 거기에서는 '순리'를 따르는 것 말고는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다. 그리고 이미 인간은 더이상 '순리'를 따르지 않을 뿐더러 세계를 바꾸어 놓았다. 이제 음양오행은 자신이 만든 세계가 붕괴되는 것을 목격해야 하며 새로운 세계에의 접근도 금지당했다. 또 익숙한 환경에서 벗어나게 되면 그는 길을 잃고 헤맨다. 일단 불온한 의도의 유도심문에 걸려들면 그는 할 말을 못 찾아 허둥댄다. 소위 '발칙한' 질문들을 던지면 우물쭈물하거나 오히려 화를 내고 마는 것은 마치, 신의 은총으로 이교도를 감화시키려던 전도사의 모습과도 닮아 있다.


쿤은 '과학혁명의 구조'에서 과학의 발전은 진리의 계속적인 축적의 결과가 아니라 기존의 반대학설이 우위를 점하면서 그동안 공식적이던 학설체계를 전복시키는 일련의 과학혁명들을 통해 이루어진다고 주장했다. 여기에서 그 유명한 '패러다임'이라는 단어가 처음 등장했는데, 서양과학사에서는 이러한 패러다임의 전복이 여러 번 있었음을 우리는 볼 수 있다. 베이컨, 데카르트, 코페르니쿠스, 뉴튼, 다윈, 프로이트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동양에서는 그에 상응할 만한 변화의 역사를 찾기 어렵다. 한의학에서는 사상의학이라는 것이 비교적 최근에 등장하긴 했지만 그 이전의 것들을 무효로 되돌리지도 않았고 아직 한국 - 그것도 남한에서만 - 통용되는, 현재로서는 학설의 하나일 뿐이다. 말하기도 민망한 제3의학은 차치하고라도 말이다. 한편 콩트는 '실존철학 강의'에서 인간의 정신이 세 단계를 거친다고 했는데, 모든 것의 배후에 하나의 신이 존재한다고 보는 신학적 단계, 모든 것을 몇몇의 이념으로 환원시키는 형이상학적 단계, 목적과 근원에 대해 질문하는 대신 원인, 법칙 그리고 관계에 대해 질문하는 실증주의 학문적 단계가 그것이다. '실증주의'란 간단히 말해, 인식을 학문적으로 증명 가능한 사실들에만 국한하는 (과학)철학사조인데 음양오행과 오운육기의 한의학은 형이상학적 단계에 위치하고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과거에 그러했고 현재도 그러하며 아마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한의학의 패러다임은 황제와 신농씨 이후로 지금까지 근본적으로 깨지지 않고 있다. 워낙 우수하기 때문일까? 한의학은 여태껏 근본원리들에 대해서 심각한 의문이 제기되지 않은 채로 지나왔다. 서양문물이 물밀 듯 들어오고 논밭과 초가집이 주상복합아파트로 바뀌는 와중에도 그 파도를 그대로 뒤집어 쓰지 않고 빗겨 맞았던 한의학은, 그 존재를 용납해 준 외적 환경과 행운에 의해 위기를 피할 수 있었던 것이지 내적으로 도전을 극복한 것이 아니다. 한의학은 생존한 것이 아니라 생존당한 것이다. 마치 조선이 일제로부터 해방당하고 민주주의를 이식당했듯이. 소행성이 지구와 충돌해 공룡은 멸종하고 악어가 살아남았듯이.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한의학은 아마존 정글의 원주민들이 태고의 생활 양식을 보존하고 있듯 수천 년 전의 모습이 지금까지 소실되지 않고 남아 있는 것이다.


해방 이후 한의과대학이 세워지고 한방이 다시 공인받게된 것도 정치/사회적 여건 덕택이 컸던 것으로 보인다. 정확한 때는 모르겠지만, 한의사 면허 제도가 만들어지고 한방의료가 제도권내로 들어온 것은 광복 이후 민족주의의 물결이 넘쳐 흐르던 가운데 일제에 의해 흔들리고 사라진 것들을 원래대로 되돌리려던 당시의 욕구에 의한 바가 클 것이다. 그래서 장래 문제를 일으킬 소지에 대한 예측없이 한/양방이 병존하는 체제가 되었고 이미 면허제를 실시중이던 양의사에 대등한 지위를 부여키 위해 한의사 면허제를 시행하기 시작하였고 면허 시험 응시 자격을 제한하기 위해 한의과대학이 설립되었을 것이다. 이런 시나리오가 참이라면, 한방의료의 제도권 복귀는 자체의 역량과 당위성에 의했다기보다는 외부적 요인에 의한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근래 한방의료의 각광도 평균수명 연장, 소득수준 향상과 건강욕구의 증가, 만성/난치질환의 비중 증가 및 전통적으로 보신을 좋아하는 국민 성향 덕택이 크다고 할 것이다.


한의과대학의 체제도 문제다. 원전학, 경혈학 등을 제외한 생리학, 병리학, 약리학, 예방의학, 진단학 및 소아과, 부인과, 안이비인후과, 피부과, 정신과, 재활의학과 등은 모두 의과대학의 기초/임상 구성을 그대로 옮겨 온 것이다. 한데 한의학은 국소가 아닌 전체를 보는 의학이라 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왜 그렇게 뿔뿔이 찢어 놓은 것일까? (양방중심의 의료일원화에 대응하기 위한 것이라는 이유를 제외한다면 말이다. 그리고 이 이유도 기초분야의 분과에 대해서는 구실이 되어주지 못한다.) 한의학에서 생리와 병리를 구분할 필요, 당위성이 있을까? 한의학에서의 예방의학은 무엇을 다루는 분과인가? 기공체조? 태극권? 그런 것들은 기공술사나 태극권 사범의 밥그릇 속에 들어있어야할 것들 아닐까? 현재의 이러한 분과는 한의학의 내적 당위성, 필연성에 의한 것이 아니라 정치적 필요에 따른 단순 모방, 짜깁기에 불과하다.


대학 제도는 한의학 교육에 이상적인 수단이 아니다. 최선의 한의학 교육제도는, 서양학문에 물들지 않도록 아이를 정규 학교에는 보내지 않고 어려서부터 사서삼경을 외우도록 하여 한학적 소양과 암기능력을 배양한 다음, 고명한 의원(醫員) 아래 이론과 실기의 구분없이 도제식 교육을 받게 하는 것이다.


로컬 한의사들 중 상당수가 전통적인 침뜸과 약 이외에 물리치료, 아로마, 테이핑, 적외선, 훈증, 마사지 및 그밖에도 다양한 신종 요법들을 사용하고 있는데 이런 것들이 대체 언제부터 한방에 포함되어왔던 것인지 의문이 생기지 않을 수 없다. 물론 학교에서 배운 것만을 임상에서 써야 한다는 법은 없지만, 이런 신종 요법들을 사용하는 한의사들 가운데 어느 정도나 한의학 이론에 입각해 자신의 요법을 해석하고 적용하는 것이며 그 정당성에 대해 소신을 갖고 있을 것인지 회의를 품게 된다. 현재의 임상계에는 한의학에 기반한 것인지 의심스러운 저 나름의 신종 진단법과 치료법들이 넘쳐나고 있고 거기에서 빚어지는 것은 한의학과 서양의학에다가 잡다한 여러 대체의학이 짬뽕된 - '접목된'이 아니라 - 잡종의학이다.


많은 말을 썼지만, 간단히 말해 나는 한의학을 믿을 수 없으며 '양방적 사고'를 버리라는 말을 따를 수 없다. 그런 백기투항은 압도적인 상대방 앞에 어찌해 볼 도리가 없을 때에나 하는 것이다. 전세(戰勢)는 오히려 그 반대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첩보들이 여기저기에서 들어오고 있다.




한의대에 들어오는 학생들은 대개 똑똑하고, 적어도 공부는 잘 하는 이들입니다. 그러나 그들 중 상당수가, 학교에서 배우는 것을 이해하기보다는 그저 받아들여야만 한다는 것에 당혹스러워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자신만만하고 재기가 번뜩이던 학생들이, 의문을 갖고 답을 찾으려 하기보다는 그저 주어지는대로 받아들이기에만 익숙해져가는 것은 그저 외울 것이 너무 많기 때문일까요? 일부 학생들을 제외하고는 혼자 공부하다가, 밥을 먹다가, 잡담을 하다가 옆에 있는 친구와 한의학에 대한 질문, 대답을 주고 받는 모습을 보기 어렵습니다. 제 관찰이 틀리지 않다면 그것은 한의대생들이 진리추구보다는 졸업해서 면허따고 개업해서 돈버는 것에만 관심이 있기 때문일까요? 또는 다들 전공 공부에는 영 흥미들이 없는 것일까요? 아니면 한의학의 특성상, 그저 임상을 접하지 못했기 때문에 섣불리 무언가를 묻고 답하기가 어려운 것일까요? 다들 한의학은 어떻게 공부하는 것인지 나름대로 터득했기 때문 아닐까요? '한의대생은 묻지 않는다. 그저 외울 뿐이다'라는...


한의대 강의실에서 있었던 어떤 특강에서, 강사가 기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손을 들어보라고 했을 때 강의실에 흐르던 불편하고 무거운 침묵은 저만이 느낀 것이었을까요? 저는 손을 들려다 참았습니다. 그리고 속으로 비웃었을 뿐입니다.


높은 커트라인을 보고, 한의예과가 전통의학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첨단학문을 배우는 곳인줄 알고 들어왔던 예과 1학년 1학기 처음 한 달도 지나지 않아서, 예과생 필수 교양서이던 '음양이 뭐지?', '오행은 뭘까?'를 보다가 집어던진 후로, 저는 신학대학을 다니는 회교도였습니다. 그곳에서 제가 배운 것은 냉소(冷笑) 뿐이었습니다. 그리고 때때로 다른 학생들 앞에서 성경 암송을 제대로 하지 못했을 때, '쪽팔리기'는 했지만 결코 '부끄럽지'는 않았습니다. 제가 지은 죄는 적국의 의용병 막사로부터 탈영을 감행하지 못하고 주저해온, 용기 없음과 단호하지 못함입니다.


어렸을 때 좋아한 '기동전사 건담'이라는 일본만화에 '뉴타입'과 '올드타입'이라는 인류의 유형 두 가지가 나옵니다. '뉴타입'이란 '인류가 우주식민지를 건설하고 우주 공간에 나와 살게 됨으로써 각성(覺醒)을 얻게 된(무엇을 깨달았다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신인류'를 말하는 것이고 '올드타입'은 뉴타입이 아닌, 기존의 인류를 일컫는 말입니다. 저는 그냥 '올드타입'으로 살다 죽기로 결정했습니다. 저는 종교를 포함, 아무러한 '주의(主義)'도 갖고 있지 않습니다만, 사상 전향을 거부합니다. 더이상 헬렌 켈러도 아니면서 분명히 보이고 들리는 것을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다고 할 수도,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 것을 보인다고 들린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이 글의 많은 부분에 단서와 조건이 삽입되어 있고, 심증만 무성할 뿐 이렇다 할 물증이 없다는 것도 인정합니다만,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말하면 말할수록, 지금 이 글을 쓰면서도 더욱, 제가 가지고 있는 의혹이 사실이라는 확신이 강해집니다.


자신이 어떤 일을 하고자 할 때 그것이 인생의 중요한 문제 가운데 하나라면,  자신이 욕구하는 바가 자신의 내부에서 나오는 진정한 것인지 아니면 자신이 그것을 원하고 있다고 착각하게 만드는, 외부에서 온 것인지를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외부에서 들어와 시나브로 자신의 의식인 양 머리 속에 자리하고 있는 '가짜 욕구'는 세상 사람들의 말, 편견, 언론에서 만든 이미지 따위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그런 욕구는 조건과 상황이 조금만 바뀌어도 비누거품처럼 사라지고 마는 것입니다. 쓸데없는 욕심에 인생을 낭비하는 사람들을 우리는 너무나도 자주 목격하고 있습니다. 한의사라면 일정 수준 이상의 안정적인 생활을 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해도 좋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제가 정말로 원하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무엇이 '소망'이고 무엇이 '욕심'인지를 냉정하게 따져볼 때, 불안은 사라지고 우리는 좀 더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의대 교수님들 중에서만 해도 분명히 '양방적' 사고 방식을 갖고 있는 분들이 제법 있다는 것을 고려할 때 다른 방법을 생각해 볼 수도 있지 않겠느냐는 충고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는 것도 기본적으로 한의학에 대한 애정을 바탕으로 할 때 가능한 것입니다. 저는 이혼 청구를 하려는 것이 아니라 혼인 무효 확인 청구를 하려는 것입니다. 또, 새로운 애인이 저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제가 가야 할 길은 분명해 보입니다.


폴 발레리라는 사람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용기를 내서 그대가 생각하는대로 살지 않으면 머지 않아 사는대로 생각하게 된다" 저는 이 말이 옳음을 믿으면서, 이제 용기를 내어 보려 합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 익명, 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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