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11/06 (07:26) from 84.173.34.39' of 84.173.34.39' Article Number : 4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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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지우 시인의 인터뷰


천박한 시대, 한국문학과 인문학의 길  

[인물과 사상] 황지우 한국예술종합학교 총장에게 듣는 문학과 현대사
 
지승호   
 
올 초에 한국예술종합학교(이하 한예종) 총장으로 취임한 황지우 시인을 만났다. 원래는 한예종 총장으로서 가지고 있는 한국 예술 교육의 현주소와 전망 등을 위주로 해서 80년대 저항시인으로서 현 정권에 대해 가지고 있는 생각, 시인으로서의 황지우에 대해서 들어볼 생각이었다. 황지우의 시 세계를 가지고 인터뷰 글이라는 잡글을 쓴다는 것이 몹시 부담스럽기도 했는데, 결국 시에 대한 얘기가 주를 이루게 되었다.

김우창 선생께서 한용운에 대해 ‘종교가이며, 혁명가이며, 시인이었다. 그는 어느 때나 이 모든 것이기를 원했다’고 했는데, 이것은 황지우에게도 일정하게 해당될 수 있는 얘기인 것 같다. 이것은 한국 사회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독특한 가계 탓인 것 같기도 하다. 고종석 선생은 <말들의 풍경> '獻詞(헌사)- 사랑과 우정, 또는 교태와 굴신'이라는 글에서 ‘이 청년 시인의 이미지는 승려 형과 혁명가 아우의 이미지와 버무려지며 기이한 아우라를 만들어냈다’고 표현했다.

그런 그가 (그의 표현대로라면) ‘공익근무’를 몇 년째 하면서 겪었을 마음고생(시인으로서의 고통과는 다른)을 생각하니 현실 얘기를 좀더 집요하게 파고드는 것이 쉽지 않았다.

‘형태 파괴적 작업을 통해 날카로운 풍자와 강렬한 부정 정신, 그 속에 도사린 슬픔을 가장 효과적으로 드러낸’(<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 ‘진흙탕 속에서 화엄의 꽃이 피듯이 현실의 세계와 화엄의 세계를 끊임없이 왕복하는 과정 속에 어느 순간 그 두 세계의 경계를 지우고 있는’('게 눈 속의 연꽃'), ‘이곳을 살아가는 동시대인의 객관적인 삶의 이미지와 시인의 개별적인 삶의 이미지가 독특하게 겹쳐져 있는’(<어느 날 나는 흐린 주점에 앉아 있을 거다>- 이하 <흐린 주점>) 등의 평가에서 보듯 그의 시는 시대의 아픔을 대변하는 아름다움으로 우리의 뇌리에 강하게 남아 있다. 황지우 시인과의 만남은 한예종의 석관동 캠퍼스 총장실에서 10월 2일 오후 4시 반부터 2시간가량 이루어졌다.

행복한 청년 시절을 겪은 세대와 참을 수 없이 가벼운 세대의 사이

지승호 - 한국문학(소설, 시를 포함한)의 위기 내지는 침체를 이야기하는 분들이 많은데요.




▲황지우 한국예술종합학교 총장     © 인물과사상 문종석  


황지우 - 아무래도 우리 근대 백년의 특수성과도 관련이 있을 텐데요. 근대문학의 기점이 되는 식민지에서부터 분단, 전쟁, 독재 이런 슬픈 시간들을 경과하면서 우리 한국문학의 위상이, 역사정치의 하중을 견뎌냈던 것, 그것들의 하중을 넉넉히 받으면서 문학 고유한 부력이라고 그럴까, 역사의 하중과 문학 자체가 가질 수밖에 없는 상상력의 부력, 그런 것에 의해서 한국문학이 행복했던 청년 시절(고통이 행복이 되는 그런 청년 시절)을 지내왔다고 봐야겠죠. 90년대 들어서 이른바 형식적 수준에서나마 남한 사회에서 민주주의가 이루어졌잖아요.

70년대 유신에서부터 80년대 광주를 ‘청년’으로 통과할 수밖에 없었던 저 같은 세대로서는 갑자기 하중이 덜어졌을 때의 홀가분한 공백, 또 중력이 사라졌을 때의 그 현기증, 아찔한 느낌이 없지 않았죠. 저로서는 그게 제 시집 <흐린 주점>을 관통하고 있는 기본 정서가 아닌가 싶습니다. 한국문단 전체로 말하자면 갑자기 타깃이 사라져 버렸을 때의 자유 내지 허망함과 그 빈자리를 1990년대, 2000년대 요즘 젊은 세대들의 문학 작품에서 보이는 참을 수 없는 가벼움, 그리고 일상성 이런 것들이 대치하고 있는데요. 이것이 우리 세대의 관점에서 보면 위기 내지 심어지는 공황상태로까지 지각되는 측면이 있지만 뒤집어서 보면 이제 문학이 진정으로 문학다워질 수 있는, 그런 자유도 얻은 게 아닌가 싶습니다.

그러나 민주화의 뒷문으로 이른바 시장주의, 상업주의의 후폭풍이 강하게 밀어닥쳤는데요. DJ 정부 이후 노무현 정부에 이르기까지, 자유의 대가로 적어도 우리가 다방이나 커피숍에 만나서 이야기할 때 누가 도청하거나 엿듣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은 없어졌는데.... 글쎄요. 세대감각이겠죠. 하중을 털어버림으로써 자유로 남았을 때, 뒷문으로 들어온 상업주의의 흡반이 불가항력적으로 강하니까 거기서 문학의 키치화라든가 문학의 낭비, 이를테면 언어의 남용이라든가 이런 것이 우리 세대처럼 진정성의 강박관념을 갖고 있는 관점에서는 한국문학이 시시해져 버렸다고 할까, 적막해져 버렸다고 할까 그렇게 생각되는 측면이 있죠. 더 두고봐야겠습니다.

하지만 저는 기대합니다. 이 빈터에서, 빈자리에서 진정으로 문학적인 작품이 나올 거라고 봅니다. 우리 세대에서 지나치게 억압으로 다가왔던 미션, 의식, 이념의 낭비적인 강박관념 같은 것이 털어졌다는 점에서는 진정한 문학 작품이 나올 수 있는 여건이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지승호 - 문학의 위기라는 맥락과 같이 인문학의 위기라는 얘기도 많이 나오고 있는데요. 일부에서는 ‘인문학의 위기가 온 것이 지금 사람들이 살아가는 얘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하고는 동떨어진 관념적인 얘기만 하니까 그런 것이 아니냐? 학문이 대중에게 완전히 유리된 채 대중들에게 다가가려는 노력이 부족했던 것 아니냐’라고 얘기하고 있는데요.

황지우 - 저는 시인이니까 개인적인 얘기로 대답을 할게요. 한반도 유사 이래로 지금 시점의 우리들처럼 이렇게 낭비하고 풍요로웠던 시대가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 점에서 식민지 시대에 살았던 우리 부모들이 한반도 유사 이래로 가장 불우했던 세상을 살다간 사람들이고, 지금 우리 자식들이 가장 풍요로운 시간을 아주 거침없이 낭비하는 세대잖아요. 그 중간에 우리가 끼어 있는 것 같은데요. 이렇게 풍요로우면서도 우리는 어떻게 이렇게 천박할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거리의 간판이며, 돈 처발라서 만든 큰 빌딩들이며, 우리 건축이나 바깥으로 드러나 있는 시각문화들, 그걸 보면 정신이 없어요. 저는 이런 우리 문화 전반의 상스러움이나 천박성에도 인문학의 직무유기의 일단이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오늘도 차 타고 오면서 문득 그 생각이 들었는데요. 제가 중학교 때는 에세이를 읽었거든요. 그때는 김형석 교수, 안병욱 교수, 이어령 교수의 에세이 이런 것들을 탐독했습니다. 그 외에는 철학이라든가 사상이라든가 역사에 대해서 읽을 만한 책들이 없었죠. 그런 에세이를 매개로 해서 인문적 갈증을 대신 했었는데요. 그러나 지금과 비교하면 그런 낮은 차원의 에세이도 안 읽는 시대가 된 것 같습니다. 그때는 그래도 백성들이 실존주의의 어떤 용어들을 가지고도 서로 대화를 하고 했을 정도인데, 지금 누가 그렇습니까? 정말 정신의 천박성이 끔찍스러운데, 제가 3월에 학진(학술진흥재단)의 ‘인문학의 위기’ 토론회에 가서도 그 얘기를 했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 인문학자들이 과거 명제에 너무 짓눌려 가지고 인생에 대해서 깨달음과 어떤 성찰의 즐거움을 주는, 니체의 표현을 빌리면 즐거운 지식으로서의 인문학을 과학의 이름으로 전부 박멸시켜 버렸던 게 아닌가 싶습니다. 그날 학진의 보고를 들어보니까 (구체적 통계가 정확한지는 모르겠지만) 한국에서 1년에 논문이 2000편 나온답니다. 그게 돈 타먹기 위한 논문의 양산이지, 그것이 어떤 의미 생산을 통해서 우리 역사라든가 삶이라든가 미래에 대한 전망이라든가 이런 것에 대한 성찰을 독자 대중에게까지 지식을 나눠주고 있는가 하는 회의가 들었습니다. 전 인문학은 반드시 이성의 이름이 아니더라도 결국 계몽주의의 성격을 가질 수밖에 없는 건데, 그런 직무를 포기했던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특히 제가 프랑크푸르트 도서전 때 한국의 책 100권을 선정하는 일에 가담을 했었는데요. 외국 사람들에게 우리나라의 어떤 책을 제일 먼저 읽히게 할까, 문학, 철학, 역사, 사회과학, 예술 등의 분야에 걸쳐서 100권으로 집약을 한다고 할 때 우리 오천년 문화의 두께를 어떻게 압축해서 100권으로 보여줄까를 고심해서 관련 책들을 읽어봤는데요. 우선 우리 저술가들, 인문학자들한테는 푸코나 데리다나 롤랑 바르트 같은 프랑스 인문주의자들이 구사하는 수사적인 즐거움, 이런 게 너무 없어요. 글을 맛깔스럽게 써주지를 않습니다. 너무 평면적이고 자료를 나열하는 정도예요. 분석과 해석을 통해서 해석학적인 입체의 면을 보여주지 않으니까 지루하더라구요.

그래서 저는 그때 우리 심사위원들한테 그런 얘기를 했습니다. ‘우리 인문학 저자들한테 필요한 것은 수사학이고, 작문법이다’라고. 르네상스 때의 역사 서술이 수사학을 위해서라고 하는데, 그런 측면을 저간에 과학의 이름으로 너무 걷어내 버린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실 인문학의 위기, 위기 하지만 1년에 2000편이 나오는 지원을 해주고 있다는 얘기를 들으면서 우리가 60년대 김형석의 에세이를 읽었던 시대의 인문학과 비교를 하면 그나마 이공계나 이쪽에서 넘어오는 떡고물이 널려 있는 게 아니냐, 인문학의 위기를 단순히 정부지원 부족, 인문학과의 지망생이 점점 적어지는 것만을 탓할 수는 없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물론 그 문제는 대학교육의 제도적 차원에서 또 다른 큰 문제이기는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독자와 소통할 수 있는 인문학의 자기 노력이라고 할까, 그런 게 더 먼저 있어야 되지 않을까, 제 자신이 인문학 범위 안에 있기 때문에 그런 반성이 되더라구요.

지승호 - 진중권씨가 예전에 ‘요즘 지식인이 더 어려워졌다. 탄압을 안 해주니까’라는 얘기를 했는데요.(웃음) 탄압 받던 시절에는 ‘고뇌하는 지식인’이 되기도 쉬웠고(?), 세상은 적과 아군의 구별이 뚜렷하고, 단순했다고 볼 수도 있지 않습니까? 정치면에 있어서도 민주화가 정착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편에 대한 공격은 자제해야 된다는 분위기도 있었는데요. 얼마 전에 최장집 교수는 ‘민주화 세력은 노무현 정부와 결별해야 된다’고 얘기를 해서 논란이 있었는데요.

황지우 - 사르트르의 구분법인 지성인과 기능적 전문인, 그 구분법에 의하면 지금 우리 사회는 기능주의적인 테크노크라트(technocrat: 기술관료), 즉 전문가 시대로 진입해서 지식인의 목소리가 전달되지 않고, 이제는 광야에서 외치는 외로운 목소리가 없어져 버렸죠. 사실 인문학은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 못지않게 중얼중얼 거리는 것으로서의 담론이라고 할까, 눌변의 깊이도, 담백한 맛도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이제는 외치는 소리도 들어주지 않고, 외칠 만한 뚜렷한 타깃이 없어졌을 때 저는 인문학이 계속 혼잣말하는 것, 당장 안 읽어주더라도 미래를 위해서 작은 목소리라도 저장해 둘 필요가 있고, 작은 목소리로 대화하는 네트워크는 얼마든지 생길 수 있고, 생겨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지식인보다는 전문인의 시대로 와서 특히 진보적 지식인들의 비판기능이 현저히 약화되어 버렸다는 것은 저도 동감을 해요. 그러나 저는 지식인의 비판기능 못지않게 내적 목소리로 한 시대를 치유해 가는, 그런 데서 지식인 내지 인문학의 자기 자리를 부여받고 넓혀 가는 그런 것도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지승호 - 최장집 교수의 의견에 대해서 이의가 있을 수도 있는데, ‘낡은 좌파 지식인의 고루한 의견’으로만 받아들이는 건 좀 지나친 게 아닌가 싶구요. 얼마 전 평택대책위에서 ‘제2의 광주항쟁’이라고 표현했을 때 광주의 일부 시민운동 단체들에서도 반발을 했는데요. 운동이라는 게 표현의 과잉이 있을 수도 있고, 평택 문제는 현재 진행형이지 않습니까? 이제는 과거 정권의 잘못을 들어서 ‘그 사람들과 우리가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것만으로 우위를 삼기에는 많은 시간이 흘렀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 면에서 민주화 정권들의 자기 성찰이 부족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드는데요.

황지우 - 하하하. 저는 시쟁이고, 예술학교 '시다바리'를 하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에 제가 답하기는 부담스러운데요. 거기에 대해 답할 능력이 저한테는 없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평택의 문제를 광주항쟁에 비교할 수 있느냐 하는 부분은 저로서는 납득이 안 가네요. 옛날에 이창동씨가 장관 시절에 대구 지하철 방화사건을 광주에 얼핏 비교했을 때 ‘어떻게 그걸 광주에 비교하느냐?’고 하면서 비극의 정도를 가지고 우열을 나눈 것 같은 생각이 들어 썩 바람직해 보이지는 않았습니다. 그건 하나의 메타포(은유)가 되어 있으니까 메타포로 쓰인 것으로 이해해야지, 우리가 더 비극적으로 당했다는 것을 계속 이야기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비극을 독점할 수 있는 것도 아닌 것 같구요.

문제는 과거 진보세력이 두개의 정권을 지나오면서 내부비판자, 내재적 비판자로서의 역할을 등한시했다는 지적은 수긍할 수밖에 없을 것 같은데요. 그러나 아직도 한나라당이 너무 강하고 언론들이 저렇게 강력한 힘을 발휘하고 있기 때문에....(웃음) 상대적 비교 때문에 내재적 비판자로서의 역할을 참아온 것은 사실인 것 같습니다.

지승호 - 최장집 교수가 하신 말씀도 ‘한나라당이 집권해도 된다’ 이런 것이 아니라 ‘한나라당의 집권을 너무 두려워해서 스스로에 대한 성찰과 비판을 하지 않는 것이 상황을 더 나쁘게 만들 수 있다’는 얘기 같습니다.

예술교육의 문제

지승호 - 80년대 체제에 저항한 시인의 이미지를 가지고 계신데, 지금 예술학교 총장 하시고 이런 부분이 일부 사람들에게는 친권력적이고, 문화권력적인 부분으로 비춰질 수도 있을 것 같거든요. 이런 선택이 시인으로서 부담스러울 수도 있었을 것 같습니다. 어디선가 ‘공익근무’라고 표현하시지 않았습니까?

황지우 - 고민을 많이 했죠. 누가 강하게 부탁을 하면 거절을 못하는 여린 심성이랄까, 우유부단함이랄까 그런 게 있습니다. 70-80년대 제가 반유신 시위에 가담하고, 광주항쟁 때 유인물 만들어서 종로에 뿌리다가 잠시 들어가서 고초를 겪고 한 것도 우유부단함, 누가 강하게 말하면 거절을 못하는 심성하고도 관계가 있지 않나 싶습니다. 그걸 또 뒤집으면 저의 얄팍한 공명심이랄까, 누구도 안 하려고 하는데 꼭 해야 할 대의가 있을 때 자기 관리를 하기보다는 그런 쪽에 그냥 몸을 내줘버리는, 그런 저의 성격적인 결함에서 왔던 것 같기도 하구요. 총장직 이거 안 하려고 여러 번 도망치고 했는데, 어쨌든 예술교육이 갖는 어떤 작은 대의라고 할까, 특히 한국 예술교육의 패러다임 변화를 위해서는 지금 시기라도 기틀을 만들고, 전기를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제 전공이 미학이었기 때문에 그런 전공적 관점에서 볼 때 해방 이후 우리 예술교육이라는 게 한쪽으로는 일제시대 때 도제교육의 유산을 물려받고, 다른 한쪽으로는 미군정 때 대위 하나가 한국의 대학교육 시스템을 다 결정했다고 하는데 그 유산을 물려받은 거죠. 그 모델이 미 주립대학이었다고 합니다. 서울대의 모델이 그런 거죠. 유니버시티 안에 단과대학으로서 음대, 미대 두개가 있는데, 궁극적으로는 일반 교양인을 교육하는 데 있어서의 음악이나 미술 교육이 필요하다고 하는 그런 설정에서 우리 종합대학이 모델링이 됐고, 그것이 해방 이후 지금까지 100여 개가 넘는 국립, 사립 종합대학 안에서의 단과대학으로서의 예술교육 시스템이었거든요.

전형적으로 전공의 자율성이라는 미명 아래 각 학과가 너무나 지나치게 칸막이가 쳐져 있고, 그 칸막이 안에서 교수의 미학적 독재, 주로 교수는 대가들이니까 그런 거에 의해서 학생의 창의성이 가지치기되어져 버리고 있는 이런 현상이 아직도 보편적으로 만연되어 있죠. 사제 관계를 통해서 레슨이라든가 등등 먹이사슬 구조가 쫙 번져 있는 이런 상황에서 학생이 대가 교수에 사유화되는 것이 아직도 대부분의 예술대학의 형편들입니다. 그건 한예종도 예외가 아닙니다.

저는 일찍이 교수협의회 의장할 때부터 칸막이를 걷어내고, 장르 간 융합교육의 길을 터주고, 학생이 자기 전공을 스스로 구성하고, 커리큘럼이나 4년 또는 6년간의 전공 트랙을 설계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예술대학 내에 유연한 구조의 자유를 줘야 한다, 학생이 나는 죽으라고 피아노만 치겠다고 하면 그 길을 주고, ‘나는 조각과 비디오를 엮어보겠다’고 하면 그렇게 해주는 탈장르적인 융합교육의 길을 열어주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거 하나가 제가 총장을 하는 이유입니다.

지승호 - 한국 예술 교육의 현주소에 대해서는 어떻게 진단하고 계십니까? 예술종합학교가 문화기술 교육의 원조로 평가받고 있고, 총장 취임 시에도 그 부분을 강조하셨다고 하던데요.

황지우 - 아까 제가 민주화 이후 뒷문으로 후폭풍이 불어왔다고 했지 않습니까? 제가 시인으로서, 개인으로서는 그 부분이 굉장히 괴롭습니다. 시장과 개인으로서의 예술가가 어떻게 만나야 하는가,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가, 그래서 그 시점에 저는 ‘차라리 은둔하자’고 해서 은둔을 했고, 그렇게 시적 포즈를 잡고 썼는데, <흐린 주점>이라는 시집이 어느 날 난데없이 베스트셀러가 되어 있는 겁니다. 제가 시장에 등을 돌리니까 시장이 뒤에서 베스트셀러 현상으로 꿀꺽 삼키는 거예요. 굉장히 괴로웠어요. 이 시장이 없는 거냐, 내가 등 돌렸는데도 진공청소기의 모터처럼 빨판으로 빨아 당기는데, 과연 이것이 무슨 의미냐는 생각이 들었죠.

이른바 문화산업이라고 하는데, 그것이 급성장해서 2010년이면 우리 문화산업부문의 총매출이 지금보다 10배 이상 급팽창할 것 같습니다. 다음 세대인 학생들은 성장과정 자체가 우리보다는 훨씬 더 시장 지향적이죠. 그리고 또 다른 한편에서는 문화가 자본으로 인식되는 피에르 부르디외의 주장 이래로 정치경제학이 아니라 문화경제학의 패러다임으로 전환되는 속에서 ‘학생들이 건강하게 자기 내구력을 가지면서 시장에 대응할 수 있는 교육적인 길을 열어주어야 하지 않겠느냐’ 하는 고민을 했습니다.

저는 궁극적으로는 기초예술, 순수예술과 CT(Culture Technology: 문화기술)의 변증법적인 피드백 운동을 통해서 일정한 긴장 관계를 미래의 예술가들이 갖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제가 장르 융합교육과 다른 한편으로는 이른바 시장과의 관계, 산학협력, 오히려 기초예술이 적극적으로 대응하는 것, 그렇게 함으로써 모두에서 말씀드린 천박성을 어느 정도 덧씌울 수 있는, 조금 세련되고 고급스럽게 덧씌워질 수 있는 그런 제공자의 입장으로 가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황지우의 시 세계

지승호 - 소설가 이인성씨가 “한 권의 시집을 위해 8년을 다듬어 온 황지우의 지독한 장인정신. 황지우의 장인적 태도야말로 90년대 이후의 ‘날림'의 글쓰기 속에서 문학을 살아남게 하는 마지막 힘이 될 것이다”라고 평했는데요. 그런 태도로 인해 작품이 많지는 않은 듯합니다. 다음 시집은 계획은 없으신가요?

황지우 - 그건 아주 개인적인 이야기니까요. 저한테는 오히려 잘 됐습니다. 이 일 하면서 속상한 일들이 많으니까 시가 안에서 부글거리는 것 같아요. 제가 <나는 너다>라는 시집에서 ‘나는 사람을 만날 때마다 다친다. 오! 풀이여’라고 쓴 적이 있었는데요. 이 일이 어쨌든 사람을 많이 만나야 하고, 그것도 첨예한 이해 관계 속에서 만나야 하니까 옛날하고는 다른 차원이기는 하지만 매일 상처받습니다. 기스 나고 있어요.(웃음)

지승호 - ‘뼈아픈 후회’를 읽은 어떤 분들은 ‘내가 지나간 자리는 모두 폐허다’하는 표현을 관계에 의해서 상처받은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는데요. 어떤 부분에서 주로 상처를 받습니까?

황지우 - 장사를 하는 차원이든, 정치를 하는 차원이든, 예술을 하는 차원이든, 기본적으로 사람들 사이에서 내가 기대하는 게 있기 때문에 기대가 높을수록 상처의 질량이 커지는 것 같아요. 그러나 우리가 도인이 아니기 때문에 한 인간에 대해서 어떠한 기대도 하지 않고, 온전한 믿음을 줄 수 있을까, 또 인간으로서는 한계일터인데, ‘바람직한 것은 기대 없는 믿음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기대는 하지 않고 믿어주는 것, 그것은 부모, 자식 관계에서도 잘 안되잖아요. 부모도 자식한테 기대하는데.

지승호 - 오히려 가까운 사람들이 더 치명적인 상처를 주는 것 같습니다. 부부 관계, 부모 자식 관계가 그런 것 같은데요. 그 시에 대해 ‘시대 변화에 따른 자기 성찰이 돋보인다’는 평이 있었고, 현실사회주의의 몰락 때문에 그 시를 쓰신 것 아닌가 하고 해석하는 사람들도 있었는데요.
황지우 - 저는 사적 삶에서의 징후로써 썼을 뿐인데요. 현실사회주의의 붕괴가 저한테는 세계관에 패닉을 줬던 것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이루어질 수 없는 것으로서의 약속이라고 할지라도 젊은 시절에 세상을 바라보는 어떤 한 방식, 잘 다듬어진 세계관으로서 거기에는 상당수가 80년대 너무나 혹독하고 절망적인 현실 때문에 그런 게 생길 수 있었겠죠. 그게 혁명의 지침이었다기보다는 하나의 도덕의 척도가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그게 사라져 버렸지만 모든 청년에 대한 추억이 그러했던 것처럼 그건 아름다운 것이었다고 생각하구요. 아름다운 이상을 위해서 역사의 블랙홀 속에 사라져 버렸던 그 많은 사람들에 대해서 우리는 어떻게 속죄해야 할까, 그 덧없는 이름들을 우리 예술가나 작가들이 어떻게 다시 불러내야 할까, 향후에 단순한 후일담 문학이 아니라 그 부분을 조명할 때 진정한 문학적 성취가 다시 나올 수 있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지승호 - 광주항쟁이 선생님 예술에 있어서나, 인생에 있어서나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 같은데요. 광주를 주제로 한 시극 <오월의 신부>를 뮤지컬로 만드시기도 했구요.

황지우 - 저만이 아니죠. 그게 모두의 트라우마(외상후 스테레스장애)였죠. 지금도 트라우마구요. <오월의 신부>의 주제적 관점은 사라져버린 아름다운 사람들, 불멸의 자리로 장엄화해지려고 하는 그런 게 기본적으로 깔려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뮤지컬로 지금 준비중인데 어떻게 나올지 모르겠어요. 대단히 궁금해요.

지승호 - 이미 공연되지 않았습니까?

황지우 - 재작년, 작년에 이윤택씨가 뮤지컬로 광주, 부산, 창원, 대구, 서울에서 공연을 했는데요. 우선 너무나 열악한 제작 조건, 예산 부족 때문에 화려하고, 다이내믹한 연출 개성이 충분히 실현 못 되었지만, 공연은 성공하더라구요. 이번에 제대로 된 프로덕션 과정을 통해서 뮤지컬이 된다면 어떻게 될까 귀추가 주목됩니다.

지승호 - ¡¸묵념 5분 27초¡¹라는 시는 제목만 존재하는데요. 광주에 진압군이 들어간 날인 5월 27일을 상징한 것 같은데요.

황지우 - 그때 그렇게 장난쳤던 것이 검열에 대한 장치이기도 하고, 혹은 자기 검열의 산물이기도 했을 겁니다. 형태 파괴적인 실험이, 이제는 모르겠습니다. 오히려 형식 때문에 잔존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드는데요. 저는 문학에 있어서 굉장히 이중적입니다. 문학의 내재성, 자율성, 형식주의의 힘을 강하게 신뢰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현실 인식이라든가 이런데 대해서 민감하죠. 그래서 80년대는 민중문학론으로부터 제가 많이 성가심을 당했습니다.(웃음)

지승호 - 그 시대에 맞는 어떤 메시지를 전하는 것하고, 시적인 아름다움을 같이 추구하는 그 사이에서 갈등을 하셨던 것 같은데요. 그러다 보니 ‘당시 유행하던 민중시에 비해 현실도피적이며, 관념적이고, 지식인적이다’는 비판을 받았던 것 같습니다.

황지우 - 다 맞는 소리죠. 그런데 현실도피적이었던 것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요. 그렇게 말한 사람보다 더 현실 앞에 맞서서 당하지 않았습니까? 지식인적이었다? 그런 지적은 제가 수긍합니다.

지승호 - 네이버 백과사전에 보면 ‘1980년대 민주화 시대를 살아온 지식인으로 시를 통해 시대를 풍자하고 유토피아를 꿈꾸었다’라고 나오는데요.(웃음) 선생님이 꿈꾸었던 유토피아는 어떤 세계입니까?

황지우 - ‘이러이러한’이라는 식으로 서술된 유토피아를 가질 수는 없겠죠. 지금도 문학은 유토피아에 대한 열망으로 쓰인 것이라고 생각하구요. 유토피아란 다가오지 않는 것이니까 유토피아겠죠. 80년대 우리 모두에게 절절했던 것은, 너무나 헤픈 말이긴 하지만, 자유 아닙니까? 지금은 아무렇게나 말해도 되는 세상이고, 기본 인권으로서의 자유를 어느 정도 갖게 되니까 그때 가졌던 유토피아는 이미 다 와버린 건데...

지승호 - 에리히 프롬이 얘기한 것처럼 ‘신체적인 자유’도 있을 수 있지만, ‘무엇을 할 수 있는 실질적인 자유’가 더 중요할 수도 있지 않습니까? 능력까지 갖춰지는 자유까지 이야기한다면 지금은 말할 수 있는 자유는 주어졌지만, 신자유주의 공세 같은 것 때문에 노동자들은 더 힘든 상황이 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상대적인 박탈감도 더 크구요.

황지우 - 그 부분에 대해서는 다시 유토피아가 또 와야 되겠죠.(웃음) 8월에 학교 아시아 장학생 유치 때문에 동남아 3개국을 짧게 출장을 갔습니다. 베트남, 캄보디아, 타일랜드를 갔는데요. 캄보디아에서 정말 힘들었습니다. 제노사이드 수용소에 갔는데, 콧물 나고, 토하고, 숨을 못 쉴 지경이었는데요. 잔인성이나 비극의 넓이로 볼 때 광주사태는 정말 아무것도 아니라고 느껴질 정도로 전율적인 야만이 이념의 이름으로 자행이 됐었는데요. 그리고 지금 그들의 평균 생활비가 30만원, 교사가 50만원입니다. 우리가 거기서 학생을 여기 데려올 때 한 달에 70만원씩 생활비를 주거든요. 학생들이 이걸 아껴서 송금을 하더라구요.

그리고 90년 초에 광주에서 살 때 농민운동 하는 선배 때문에 필리핀에서 온 농민운동가하고 광주댐 근처에서 영계백숙에다가 저녁밥을 먹고 소주를 마셨는데요. 운동권도 우리 운동권이 더 부자예요. 그 선배가 밥을 샀거든요.(웃음) 아무리 양극화, 양극화하지만 상대적 수준에서 우리 사회가 가지고 있는 잉여의 양이 이웃 아시아 국가들에 비해서 현저하게 과분할 정도라는 느낌은 받고 왔습니다.

지승호 - 참여정부가 지지자들의 기대에 엄청나게 못 미친 것은 사실인 것 같은데요. 참여정부에 대해서 어떻게 평가하시나요? 너무 이해하려고 했던 측면이 상황을 더 어렵게 만든 게 아닌가 싶기도 한데요.

황지우 - 하하하. 그건 노코멘트로 하죠. 코멘트 할 만한 능력이 없는 것 같아요. 제가 사회과학을 하거나 그런 건 아니니까...

젋은 시인들, 언어의 낭비가 많다

지승호 - 요즘 젊은 시인들의 시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연애시 같은 것들이 한때 유행하기도 했는데요.

황지우 - 요즘 젊은 시인들의 시는 거의 못 봤어요. 왜냐하면 제가 지금 폐업 상태에 있기 때문에 남의 시를 보는 것이 두려워요. 그래서 일부러 안 봅니다. 그런데 이번에 어떤 문학상 심사 때문에 시집을 보는데, 제가 누워서 보다가 발딱 일어나 본 시집을 하나 발견했거든요. 문인수 시인이라고, 나이는 많은데 신인 취급을 받고 있죠. 제 개인적인 느낌으로는 고은의 <문의마을에 가서>라는 시집 이래로 4반세기 만에 한국어가 도달할 수 있는 매우 순도 높은 시집 한 권을 맛보게 되었다는 느낌을 가졌습니다. 그가 젊은 시인은 아닙니다. 늦게 시작한 신인 시인인데, 거기에도 연애감정을 이용한 시들도 언뜻언뜻 비치는데, 역시 성찰의 깊이가 놀라울 정도로 대단했습니다. 신춘문예 심사에 가서 최근의 응모작들을 통해서 트렌드 같은 것을 읽게 되는데, 언어의 낭비가 너무 많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승호 - 언어의 낭비라고 하면 구체적으로 어떤 걸 말씀하시는 건가요?

황지우 - 안 써도 될 말들이 너무 많아요. 수다 내지 채팅 이런 새로운 환경이 우리 시 안으로 들어온 탓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지승호 - 통신에서 쓰는 용어라든지 어투에 대해서 한글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좀 불편해하는 것 같은데요.

황지우 - 문학 작품은 세태에 대한 거울이니까 한글의 순수성을 파괴하는 것 같은 어법이나 표현법이 투영이 되겠죠. 중요한 것은 그것이 시 안에서, 또는 소설 작품 안에서 자기 필연성이 있느냐, 작품 안에서 자기 필연성이 있느냐 하는 것이 중요한 판단기준이 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대부분 자기 필연성 같은 것이 느껴지지 않고, 짜낸다고 할까요? 그런 느낌이 좀 강했습니다.

지승호 - 황지우 하면 ‘시인’이 떠오르는데요. 지금 시대에 시인은 어떤 존재라고 생각하십니까?

황지우 - 이교도죠, 이교도. 다른 신조로 사는 사람들. 현재의 신조가 아닌. 현재의 크리드(신조)가 아닌 거기서 벗어난 자일 텐데, 그건 호모 시대 때부터, 향가를 썼던 시인들 때부터 지금까지 시인의 자리는 그런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지승호 - 형제들이 아우라가 강하신데요.

황지우 - 그건 너무 개인적인 건데... (웃음)

지승호 - 고종석 선생이 <한국일보>에서 연재한 <말들의 풍경>-"獻詞(헌사)-사랑과 우정, 또는 교태와 굴신"편을 통해 “황지우 시인의 ‘나는 너다’의 헌사를 통해 드러낸 형제애가 인상 깊다”고 했는데요. 형제들이 모두 예사롭지 않아서 세인들의 관심을 많이 끌고 있는데, 선생님께 형제는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까?

황지우 - 물론 자전적 요소로서 제 장형이 늦깎이 스님이고, 제 아우가 80년대 노동운동의 현장에 오래 있었고, 그러니까 그건 사실이죠. 그러나 그걸 제가 시에 끌어들였을 때는 자전적 사실이 아니라 시적 사실이 되는 것 같습니다. 시의 백그라운드로 들어와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크게 중요한 것 같지는 않구요. 다만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80년대 제 문학이 틈바구니에 끼어 있었기 때문에, 부적절한 비유겠습니다만, 창비(창작과비평)와 문지(문학과지성) 사이에 끼어 있었기 때문에 (20때 학교는 개강하자마자 휴교 상태여서 우리 학교에서는 오히려 두개의 잡지가 교과서였죠.

창비와 문지는 다 읽고 다니지 않아도 겨드랑이에 끼고 다녀야 하는 징표였습니다) 항상 이렇게 협공 받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지만 ‘바로 그 자리가 문학의 자리다, 작가의 자리다’라고 생각했고, 지금 돌아봐도 그러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 경계에 서 있는 자로서의 시 또는 작가, 하나의 메타포로서 하나는 선(禪), 선지의 자리, 다른 하나는 치열한 노동현장에서의 운동, 말하자면 시는 그 사이에 있어야 되지 않느냐, 언제나 떨리는 경계에 작가는 있어야 하지 않느냐 싶은데, 이것은 저만이 아니라 동서고금의 모든 작가들을 보면 그런 자리에 있었던 것 같습니다. 고리키도 그랬고, 브레히트도 그랬구요.

지승호 - 요즘 하시는 일이 공익근무라고 하셨지만, 예전의 일도 공익을 위한 것이었고, 지금 하는 일보다 훨씬 고통스럽고, 힘든 과정을 거친 일인데요. 지금은 겉으로 보기에는 훨씬 더 안전한 공익근무를 하고 계신데, 그게 후에 선생님의 예술을 평가할 때 어떻게 작용하시리라고 보십니까?

황지우 - 두고봐야죠. 그런데 아까 진중권씨 이야기도 나왔지만 젊었을 때 그런 고통의 자리가 물론 깨지는 자리지만, 그 상처는 화려했죠. 쥐어 터져도 도덕적으로는 쾌감이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는 지금 자리가 더 고통스러운 거죠. 그러나 우리 젊은 세대의 제자들, 후배들 거기서 나오는 산물들에 대해서 우리가 따갑게 혹은 뜨겁게 의미 부여를 해주고, 격을 대주고, 그래야 할 나이라고 생각되는데, 제대로 그것이 안 되는 것 같습니다.

지승호 - 예술뿐만 아니라 교육에서도 영역을 파괴할 필요가 있는데, 미학의 그런 점이 좋은 쪽으로 많이 작용한 것 같습니다. 엘리트가 자유로운 감성을 갖기는 쉽지 않을 텐데, 그런 점에서 좋은 조건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충분한 명성은 얻었지만, 경제적으로는 불우한 젊은 시절을 보내셨는데요. 그런 상황이 선생님의 정서에 어떤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하십니까?

황지우 - 우리 세대라는 게 전부 절대적인 빈곤에 연루되어 있었으니까요. 그때 밥 세끼 제대로 먹는 친구가 몇 명 됐습니까? 김승옥, 이청준, 이런 기라성 같은 선배들도 야전침대 놓고 집이 없어서 과에서 자고, 그런 빈곤의 전통과 결핍감이 결국 어떤 표현물을 만드는 것 같습니다.

지승호 - 어디에선가 ‘살면서 가장 두려웠던 것이 배고픔과 고문’이라고 표현하신 것 같은데요.

황지우 - 기억나네요. "사람과 사람 사이의 信號(신호)"에서 썼던 것 같은데요. 그건 제 자전입니다. 자전이면서 우리 모두의 인권이 안 되는 조건들이었으니까, 굶어죽을지도 모른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 어디 가서 쥐어 터지지 않느냐 하는 두려움이 있었는데요. 지금 돌이켜보면 ‘근본적이지만, 참 조악한 공포였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웃음)

지승호 - 80년대에 쓰신 특이한 형식의 시들에 대한 평론가들의 평에 대해 “나는 한 번도 평자들이 말하는 이른바 ‘실험시’를 쓴 적이 없다. 나는 리얼리스트이다. 일그러진 형식은 일그러진 현실에서 온다”라는 말씀을 하신 적이 있으신데요.

황지우 - 바로 그겁니다. 아까도 말했듯이 모든 언론 상황이, 담론 상황이 철저하게 검열되고, 매스컴은 커뮤니케이션이 아니라 반커뮤니케이션이었고, 신문은 전부 반대말로 되어 있었구요. 그랬을 때 결국 시가 숙명적으로 기대는 게 언어인데, 적어도 40년대 일제 강점하에서는 언어 자체를 빼앗겨버렸죠. 70, 80년대 상당 기간 동안 한글은 있는데, 한글의 의미를 빼앗겨버린 상황에서, 공적 언어 자체가 그렇게 되어버렸기 때문에 그거에 대한 항체로서 저는 시의 형식을 난자질한 거죠. 시가 일그러졌다기보다는 일그러진 척하면서 독자들한테 신호로서 보내는 거죠. 놀라운 것은 노동운동을 하는 친구가 제 시를 노동자들한테 보여줬더니 너무나 잘 이해를 하더래요. 가슴으로 이해하고, 신호로 이해하니까 그런 것 같은데요. 일종의 몸짓 언어였죠.

지승호 - 광주항쟁 이후 두 번의 큰 실망을 하신 것 같은데요. 87년의 대선 실패와 현실 사회주의의 몰락을 보면서 절망을 하신 것 같은데요. 그 이후 시 세계가 달라졌다는 평들이 있지 않습니까?

황지우 - 달라질 수 있는 사전 계기랄까, 그런 것이 이미 초기 시에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미 말한 선(禪)과 운동, 문학성과 사회성, 아주 거칠게 단순화시킨다고 하면, 두개의 명제가 항상 제 안에서 같이 갈등하고, 공존하고 싸우고 있었죠. 87년 대선 때 그때 운동권이 세 파로 찢어졌잖아요. 단추(단일후보 추대)파, 비지(비판적 지지)파니 해서. 그때 우린 전부 뭔가 들려 있었던 것 같아요. 박종철 이후 6월을 거치면서 장이 열리니까 뭔가에 붙들린 상태에서 종파주의적인 분열을 가져왔고, 그것 때문에 다시 군정이 연장되었죠. 그때 제가 귀향하고 칩거했던 것은 1차적으로는 심리적으로 더 서울에서 견디기 어려웠고, 거기에는 명백히 나의 오류도 들어 있었고, 우리 모두의 오류도 들어 있었습니다.

일부 대선 캠프에 참여했던 상당수 사람들은 총선 출마로 나가더라구요. 저는 시인이니까 ‘저것들 꼴불견이다’라고 생각하고, 환멸을 하기도 했죠. 그래서 말은 거창하게 누군가가 유배를 당해야 한다고 생각해서 제가 저를 유배시킨 것 같습니다. 그래서 무등산 언저리에서 2-3년 놀았죠. 일종의 정치적 청산주의 같은 겁니다. 그러면서 제 안의 한쪽에 있었던 선불교적인, 혹은 신비주의에 대한 동경, 이런 게 확 열리면서 밀교적인 체험도 했구요. 그때 광주에 내려가니까 상처받은 사람들 안에서 묘한 기류가 흐르더라구요. 도류라고 할까요? 도에 빠진 사람들. 아마 그런 소용돌이의 가장자리에 제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걸 현실도피주의라고 지적하시면 ‘그렇다. 그랬다’고 얘기할 수밖에 없는 거죠.

지승호 - 그렇지 않았으면 견디가 힘들었을 것 같기도 하구요. 그때 광주에서 짧지만 아주 공동체적이고, 평화적인 경험들을 했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런 것이 선생님의 시에 녹아든 부분이 있습니까?

황지우 - <게눈 속의 연꽃>과 <흐린 주점>에 같이 걸쳐져 있는 감정이 그런 건데, 제가 사상가나 운동가라면 문제가 되겠지만, 일개 시 나부랭이를 쓰는 사람이니까 사적 체험과 방황 이런 것은 작가들한테는 오히려 좋은 것 같아요.

황지우의 시

지승호 - 좀 유치한 질문이긴 한데, 쓰신 시 중에서 어떤 시절의 시에 가장 애착이 갑니까?

황지우 - 전 제가 써놓은 것을 쳐다보기도 싫어요. 그래서 외운 시도 하나도 없습니다. 그런데 하여튼 젊었을 때 썼던 것이 문득 ‘내가 이렇게도 썼구나. 이렇게 쓸 수 있었다니. 스물 몇 살 때’ 이런 식의 느닷없는 재발견이랄까 이런 게 있어요. ‘메아리를 위한 각서’라고 모든 행의 첫 글자가 두음으로 연결이 됩니다. 불, 풀, 물, 줄, 그렇게 7행으로 쓰인 무의미한 시인데, 그거 보면 재밌더라구요.

지승호 - 요즘 젊은 사람들이 듣는 음악으로 치면 랩의 라임을 맞추는 것과 같은 거 아닌가요?

황지우 - 일종의 라임이죠. 소리로만 번적하는 시를 한번 써볼까 하고 끼적거릴까 하다가 그런 것들이 몇 개 나온 것 같습니다.

지승호 - 아까 시가 안에서 부글부글 끓는 것 같다고 하셨는데요. 떠오르는 시상들의 일관되거나 공통된 주제 같은 것이 있습니까?

황지우 - 제 기본 정서는 측은지심인 것 같아요. 감상주의로 떨어지지 않고, 인간을 따뜻하게 보듬는 측은지심, 내가 비록 상처받았지만, 측은지심을 갖는 시들을 좀 더 써봐야 하지 않을까 싶구요. 한때는 건축적인 시집, 이를테면 욕심이 생길 때가 있잖아요. ‘단테가 신곡을 석줄, 석줄, 열한 음절, 33칸토로 100칸토를 만드는 식으로 건축적인 그런 걸 좀 이제는 해봐야지 않느냐’ 하고 생각하다가도 ‘너무 부질없다. 너무 과욕을 하면 안될 것 같다’는 생각을 하기도 하고 있습니다.

지승호 - 신세대 소설가 중 한 명은 ‘내가 과연 샐러리맨처럼 열심히 글을 썼나?’하는 생각이 들어서 출퇴근 시간 정해서 글을 쓴다고도 하던데요. 언젠가 ‘그 어느 예술도 시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말씀을 하셨는데, 요즘 젊은 작가들한테는 시장에서 살아남아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훨씬 더 클 텐데요. 예술과 상업을 어떻게 조화시켜야한다고 보십니까?

황지우 - 당기고 버티는 긴장 관계 속에서 그것이 작가로 하여금 글을 쓰게만 한다면 그건 얼마든지 좋다고 생각합니다. 직업 혹은 육체노동자처럼 시간 정해놓고 나인 투 파이브(9 to 5)로 출퇴근하면서 쓰는 것도 대단히 좋은 것 같습니다. 제가 수년 전에 미국 IWP(아이오와 국제 창작프로그램)에 한 학기 갔다가 D. H. 로렌스 흔적을 따라서 산타페 등의 뉴멕시코 지역을 훑었어요. 그가 완전히 고립된 산속 농장에서 만년을 보냈는데, 거기 가서 ‘모든 것을 단절하고 이렇게 처절하게 썼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쓴다는 것 자체의 종교적인 심성을 느꼈습니다. 저는 그것이 너무나 부럽습니다. 제가 단절하기 위해서 노력을 했는데, 물러 터져서 단절이 잘 안 되니까¡¦¡¦ 옛날같이 국사범 같은 일이라도 저질러버리고 단절해버릴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니까요.(웃음)

지승호 - 공지영씨의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이 한국 소설로서는 몇 년 만에 처음으로 종합베스트셀러 1위에 올랐다고 하던데요. ‘공지영 신드롬’이 그전부터 있긴 했지만, 그 소설이 영화화되면서 폭발한 면도 있는 듯합니다. 봉준호 감독의 <괴물>이 관객 1500만 명을 바라보는 상황이구요. 문화 콘텐츠의 중심이 문학에서 영화로 완전히 넘어가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데, 그 점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황지우 - 당연하죠. 문학의 상대적인 침체를 아까 지적하셨는데, 저는 이 부분에도 하나의 요인이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표현 능력을 갖는 한 사회의 일정한 인자들이 있을 텐데, 그 주력이 모두 영화로 빠져나가서 60년대에서 80년대까지 문학이 가지고 있던 호황이 점점 꺼져 버리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괜히 영화 탓을 하게 되요.(웃음) 영화에 대해서는 저도 깊은 애정을 갖고 있는데, 누구나 지적하고 있듯이 천만이 넘는 블록버스터만으로 한국영화의 힘이 평가받고, 또 그렇게 지탱해야 한다고 한다면 한국영화가 곧 바닥날 거라고 생각합니다. 진짜 단시간에 영화적 잠재력을 다 탕진해 버리는 수도 있는 굉장히 위험한 현상이라고 생각이 돼요.

100만, 많아야 400만이 들었을 때 화제가 되고, 동시에 여러 장르의 다양한 감독들의 작품이 살아남아야 될 텐데, 배급시스템이라든가 무엇보다도 관객의 영화에 대한 자각이 필요하지 않느냐 하는 생각이 듭니다. 쏠림현상 이런 게 굉장히 심각한 것 같아요. 싹쓸이식의 영화 생산은 굉장히 단명하게 할거라는 생각이 들고, 굉장히 위험스럽습니다. 김기덕이나 홍상수 감독이 국내에서 대접을 못 받는 것도 우리 문화의 천박함의 징표일 수도 있는데요. 천만 구조로 가니까 1년에 시나리오가 5000편이 서울에 돌아다닌다고 하더라구요.(웃음)

지승호 - 로또의 꿈하고 비슷한 것 같은데요. ‘영화 한편 성공하면...’ 하는.

황지우 - 영화의 로또 현상이에요. 불길해요. 한국영화의 힘, 한국영화의 절정이라고 하지만...

지승호 - 한예종 출신이 점점 한국 문화계에서 큰 역할을 하기 시작한다는 얘기들이 있던데요. 어떤 분들이 계십니까?

황지우 - 갓 10년 됐는데요. 이 부분은 너무 우리 사회가 이 아이들에 대해서 과잉 기대를 해서도 안 되고, 너무 모른 체해서도 안 되고, 이제 싹에 불과하니까 곁눈질로 이렇게 바라봐 줬으면 좋겠습니다. 이런 거 저런 거 얘기하면 자화자찬밖에 안 되니까, 하여튼 저희 학교를 이끌어가는 우리 교수들로서는 한국의 바우하우스 같은 거, 혹은 줄리어드 스쿨 같은 것을 만들어보자는 거였는데, ‘여기서 문화예술의 콘텐츠가 지속적으로 나올 수 있게 학생들을 어떻게, 재고가 빵빵하게 차 가지고 나가게 하는가’ 하는 부분에 대해 고심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 작품 하나 하고 반짝 하고 사라지게 할 것이 아니라.......

지승호 - 마지막으로 하실 말씀은 없으신가요?

황지우 - 아마도 말씀드린 것처럼 물적 생산력은 우리 역사상 미증유의 성과를 올리고 있는데, 과연 원효가 살던 시대만큼, 혹은 퇴계나 다산이 살던 시대만큼 시대정신이 있는가, 이런 것에 대해서 저 자신도 반성을 하구요. 그런 어떤 정련된 문화가 우리가 살다가는 지상의 한 척도로서 남을 수 있게끔 작가, 지식인, 인문학자, 예술가들이 내적 성찰을 다시 한번 해야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리고 이 학교가 문화 생태계로서의 지역주민들의 쉼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도 있구요.

* 본문은 월간 <인물과 사상> 2006년 11월호에 게재된 기사이며, 출판사의 허락하에 전재합니다.  
 

2006/11/02 [02:58]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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