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01/26 (03:41) from 92.226.135.235' of 92.226.135.235' Article Number : 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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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영희 선생



절필 선언 리영희 “세상 고민 놓으니 소화가 잘돼”

옥살이 규칙적 생활에 16년 위궤양이 나았지 그러니까 박정희는 내 은인이야
수많은 피 흘리고야 대통령 욕해도 되는 세상이 왔어
단란한 가정 이루고 인류에 봉사하는 게 참삶


 한승동 기자  



어둠의 시간에 그가 있었다.
아픔의 시간에 그가 있었다.
거짓에 길들여지는 시간에 그가 있었다.
그러나 이런 시간속에서
그가 있었다가 아니라 그가 있는 것이다.
리영희!












<리영희저작집>(한길사)에 실린 고은의 <어떤 서사> 첫머리다. 지난 18일의 저작집 출간기념회에서 리영희(77) 선생은 50년간에 걸친 파란만장한 집필활동 마감을 공개 천명한 뒤 지금까지와는 다른 삶을 위해 여생을 가꾸고 있다.

“나이 든 지식인 여생 보내기로는 읽지 못한 동서양 고전들 보는 게 좋아. 나는 무신론자야. 유일적 존재를 전제한 종교를 나는 받아들이지 않아. 그런 신은 존재하지 않아. 불교는 달라. 유일 절대자의 지배 같은 걸 받아들이는 게 아니라 부처님 가르침을 스스로 깨우치는 건데, 그 깨우침 자체가 부처의 경지야. 그 철학 경전 읽기가 지식인에겐 아주 좋아. 고전도 될수록 원어로 읽어. 영어 일본어 프랑스어 중국어지.”

지난 22일 서울 연세대 북문쪽 연희동에서 선생을 만났다. 경기도 산본에 있는 자택이 수리중이어서 선생은 요즘 두 집이 분리돼 있으면서도 하나로 연결된 독특한 구조의 연희동 ‘아들네’에서 따님 및 아드님 가족들과 함께 지내고 계시다. 잔디마당으로 이어진 높지 않은 턱을 내려서면서도 선생은 아주 조심스러워했다. 그래도 얼굴색이 좋고 눈빛은 여전히 형형했으며 피곤한 기색도 별로 없어 보였다. 선생이 바깥으로 나오기 전 사모님은 “한 시간 이상은 무리”라고 주의를 주었다. 하지만 인터뷰는 결국 한 시간 반을 넘겼다.

“많이 회복됐어. (2000년 말 뇌출혈로) 오른쪽 반신 신경마비가 온 이래 6년간 죽 나아지고 있는 거지. 말과 기억력 사고력도 점차 좋아지고 있어. 오른 팔과 손가락을 못 써. 잠은 잘 자. 세상일에 대해 별로 생각하지 않고 사니까. 세상일 나 혼자 떠안고 사는 듯한 그까짓 허황된 생각 버리니까 소화도 잘 돼. (1977년 말 부터 반공법 위반 죄목으로) 2년간 광주에서 복역할 때 꼭같은 시간에 꼭같은 양의 식사를 하는 규칙적인 생활을 한 덕에 16년 동안 고생했던 위궤양이 나아버렸지. 사람들이 박정희를 욕하지만, 그는 내 은인이야.”

약간 어눌해진 말투와, 지난 일을 되살리고 그것을 적절하게 표현하기 위한 단어들을 찾아내느라 고심하시는 통에 선생의 유머조차 술술 풀리진 못했다. “(당시 복역) 말기가 가까워지니까 일반수 동으로 옮기더군. (79년 10월)박정희가 죽었다는 소식 듣고 너무 충격받고 흥분했던지 그때 일반수들에게 한 얘길 꼬투리잡아 날 먹방에 집어넣었어. 그… 뭐야, 그거 있잖나, …그래 곱징역, 곱징역을 살았지. 22일간이나.” 그 다음 얘기는 이렇게 이어졌다. “수많은 피를 흘리고 한 덕에 대통령을 마음대로 욕해도 되는 세상이 됐어. 뭐가 부족하다는 건가. 모든 게 자유지. 언론자유는 아마 세계최고 수준이 아닌가 싶어. 수구언론이 오히려 절제하지 못하고 지나치게 함부로 남용하는 게 문제야.”

비행기는 길어야 3~4시간 탈 수 있는 정도여서 가까운 중국 나들이도 어렵다고 했다. “예전에 외국 많이 다녔지. 그래선지 그땐 국내 경관이 썩 맘에 들진 않았는데 나이 들면서 우리 나름의 아기자기한 맛을 알게 됐어. 자동차운전 연습도 하고 있어. 뇌출혈 환자 신경 되살리는데는 자동차 슬슬 모는 게 좋다는군. 육체적 운동신경 회복에도 도움이 돼. 포도주도 뇌신경에 좋다기에 한잔씩 하지.” 물리치료나 운동으로 나아질 수 있는 것은 다 해봤다. “통증은 없어. 그냥 굳어지고 흔들리고…. 숟가락이나 펜 집기가 어려워. 엽서 한 장 쓰는 정도야. 끝 인사 쓸 때쯤 되면 손가락이 굳어져. (발병 뒤)처음 2년 동안 언어능력이 빨리 회복되더군. 약 80% 정도 회복됐어. 하지만 기억력은 많이 잃어버렸어.”


고전 보며 여생 보내려는데 2시간만 책봐도 눈이 쓰려
손 굳어 펜 잡기도 힘들고…뇌신경 좋다기에 운전 연습해


  

 

선생이 최근 사람들이 모이는 공개적인 자리에 나서길 꺼리는 건 신체적 불편 외에 이런 사정 탓도 있다. “만나는 사람 이름을 잘 기억하지 못해. 실수도 하고…. 책 활자도 오래 못 봐. 최고로 가야 2시간 정도. 눈이 쓰리고 시력도 떨어져. 결국 연구 등을 위한 필요조건의 절반 정도를 잃었어. 모든 게 50%씩 준 것이야. 하지만 그만했으면 쓸만큼 써왔고….” “신문기사도 한 부당 하루 2~3꼭지 골라서 볼 뿐이야. 신문 정보들이라는 게 오래전부터 되풀이돼온 것들이 많아 별 새로운 게 없어. 의미없는 건 안 봐.” 텔레비전은 어떠냐고 물었다. “동물의 왕국 같은 걸 봐. 인간보다 월등 선한 동물한테서 많이 배워. 그리고 역사 다큐멘터리도 봐. 오락물은 하도 저열해서 보는 건 시간낭비야.”

80 평생을 돌아볼 때 어떻게 사는 것이 가치 있고 존엄한 삶이라 생각하는지 물었다. “평범한 것, 단란한 가족 이루는 것, 그게 학문과 수신 등 모든 것의 기초야. 그것 안되면 사회적 활동도 어려워. 그리고 동시대적 생을 위해, 인류를 위해 뭔가 봉사하는 것이지. 이기주의는 인간성에 역행하는 아주 큰 악덕이야. 미국식 자본주의 작동원리가 바로 극단적 이기주의에 토대를 두고 있는데, 돈 물신 숭배에 자유와 책임의 진정한 의미도 모르는 미국식 생활양식에 물든 젊은 세대가 걱정이야. 더불어 사랑하고 나누면서 행복을 추구해야 하는데, 이는 미국식 자본주의 소비문화·이기주의하고는 양립하기 어려워.”

지난해에 나온 자전적 대담집 <대화>에서 선생은 말했다. “이 긴 시간에 걸친 나의 삶을 이끌어준 근본이념은 ‘자유’와 ‘책임’이었다. 인간은 누구나, 더욱이 진정한 ‘지식인’은 본질적으로 ‘자유인’인 까닭에 자기의 삶을 스스로 선택하고, 그 결정에 대해서 ‘책임’이 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이 존재하는 ‘사회’에 대해서 책임이 있다는 믿음이었다. 이 이념에 따라, 나는 언제나 내 앞에 던져진 현실상황을 묵인하거나 회피하거나 또는 상황과의 관계설정을 기권으로 얼버무리는 태도를 ‘지식인’의 배신으로 경멸하고 경계했다. 사회에 대한 배신일 뿐 아니라 그에 앞서 자신에 대한 배신이라고 여겨왔다. 이런 신조로서의 삶은 어느 시대 어느 사회에서나 그렇듯이 바로 그것이 ‘형벌’이었다.”

지금 무슨 말을 해도 용납되는 이 시대에야 비로소 소리높여 떠들어대는 자들이 그때 숨소리마저 죽이고 비굴하게 몸을 숙일 시절에도 선생은 결코 묵인하거나 회피하지 않았다. 그래서 학교와 신문사에서 쫓겨나고 여러번에 걸쳐 1천일 이상 영어의 몸이 돼야 했다.

“또 폭력, 일체의 폭력을 거부해야 돼. 박정희 정권 이래 군사정권의 폭력, 제도의 폭력 같은 것 말이지. 자유로운 사고를 억압하는 종교·이념의 폭력, 자본·돈의 폭력 그런 폭력의 요소들은 제거돼야 해. 사회엔 일정정도의 규제와 압력이 불가피하지만 압도적 힘을 지닌 소수 강자들에 의한 억압은 절대 거부해야 돼.”

실은 선생에게 ‘딱딱한 얘기’를 먼저 물었다. 선생은 나중에야 “앞에서 한 그런 얘기 별로 하고 싶지 않다”고 했지만, 일단 이야기가 시작되자 특유의 성실과 열정으로 이어갔다.

-지금의 한반도를 둘러싼 동북아시아 정세가 1백년 전과 비슷하다는 지적들이 많다.

=백년 전과도 비슷하고 주변 열강들에 우리가 농락당한 1920년대 이후 상황과 더욱 비슷하다. 1920~30년대는 바로 제국주의 각축전이 치열하게 전개된 시대다. 그럼에도 상당히 다른 점은, 미국 일본, 그리고 여기에 영국까지 포함한 진영에 대항하는 러시아 중국 쪽이 전쟁이나 제국주의 또는 패권을 추구할 이유, 지역적으로 위기상황을 조성할 동기가 없다는 것이다. 자신들에게 해로우니까. 건설과 평화 쪽이 그들에게 유리하다. 오로지 문제는 역시 지금도 백년 전과 마찬가지 입장을 추구하는 미국 일본 영국이다. 이들 남북분단 고착화를 노리는 외부세력 때문에 우리 내부갈등구조가 지속되고 있다.

-그때와 다른 점 중엔 거대 중국의 등장과 한반도 남쪽이 경제적 성공 덕에 경제·군사적 위상이 강화됐다는 것을 들 수 있을 텐데.

=남쪽 위상이 커졌다 한들 남북 적대시 정책을 계속 강요당하는 상황에서는 주변상황 대처능력은 상쇄되고 만다. 남쪽이 100이고 북쪽이 30이면 긍정적 분위기일 땐 둘이 합치면 130이 아니라 150, 200도 될 수 있지만, 부정적 에너지로 가득한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는 조금도 나아졌다고 할 수 없다. 분단 고착화를 강요하는 미국 일본, 전쟁을 해서라도 북쪽마저 통합해 일제 지배하의 조선처럼 만들려 들 그들이 있는 한, 남쪽 경제력이 아무리 강해져도 끝없이 군사·전쟁 지향 쪽에 그것을 쏟아부어야 하는 상황에서 정세대응능력은 오히려 떨어질 수밖에 없다.


미국식 자본주의 작동원리는 극단적 이기주의야
젊은 세대 거기 물들어 자유와 책임의 의미 모르지


  

 

-강성우익 아베 신조가 등장한 일본은 정말 위험한가.

=일본 스스로 중국에 대한 공포감을 조성하고는 군사대국화로 나아가고 있다. 주로 미국쪽 강요와 사주에 의한 건데, 일본 지배계급이 추종하고 있다. 지금 미국은 동아시아 이권확보를 위해 엄청난 전쟁준비를 하고 있다. 그런 상황은 점차 접촉부면이 확대되고 있는 한국 일본의 일반국민들은 느끼지 못해 괴리가 생기고 있다. 이는 극우반공 미국숭배에 전쟁지향적인 매스컴의 실태 오도 탓도 크다. 그들은 자신들 이익을 위해 일본과 남한의 일체화가 선이라는 허상을 만들고 있다. 물론 그렇다고 양국 민간인끼리 적대시하자는 얘긴 아니다. 다만 그 실상, 백년 전과 거의 다름 없이 돼가는 실상을 제대로 알고 대처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른바 한-미-일 공조가 남쪽만의 경제적 번영에는 기여했을지 몰라도 지난 오랜 세월간의 3국공조는 우리 민족전체에겐 재앙이었다고도 볼 수 있다.

=한민족과 동북아시아가 공존하기 위해선 남북한 평화가 핵심적 요소다. 미국이 굳이 북한을 교살, 고사하려는 정책을 50여년간이나 지속해 오지 않았다면 남북 사이가 이처럼 위태로운 지경에 빠지진 않았을 것이다. 둘 사이에는 공존 쪽으로 가는 상황이 조성됐을 것이다.

미국의 이익은 한반도만이 아니라 만주 중국에도 걸쳐 있다. 31년 일본의 만주침탈과 37년 중국전역에 대한 침략을 미국은 전적으로 도와주었다. 자신이 직접 먹을 수 없는 상황에서 미국은 일본을 시켜 일종의 대리전쟁을 하도록 하고 돈과 무기와 심지어 휘발유까지 지원했다. 미국 일본이 대립하게 되는 것은, 일본이 중국에서의 이익을 독식하고 독자적인 제국 건설의 야욕을 노골화하면서다. 그 전까진 미국과 영국, 앵글로색슨은 일본을 전면적으로 지원했다. 지금 세계 금융도 그들이 지배하고 있지 않은가.

-그런 상황에 대처하기 위해 중국의 위상을 대응요소로 적절히 활용하는 지혜가 필요하다는 주장도 있다.

=중국 활용은 당장 가능한 일이 아니다. 군사기지까지 둔 미국의 올가미에 채워진 상황에서 자주니 하는 얘기 자체가 우스울 수 있다. 하지만 그런 점을 의식하고 그런 방향을 추구해가야 한다는 건 옳다.

그렇지만 열강들에 묶여 우리의 운명이 그들에 의해 좌우되는 상황은 가능한 한 피해야 한다. 현실적으로 바람직한 것은 남북이 화해해 열강들에 대응하는 것이다. 어느 한 나라 또는 복수의 나라들에 예속당하지 않는, 비교적 넓은 행동범위를 확보하는 게 좋다.


최근 타이 쿠데타 소식에 대한 우리 사회 일각의 대응에 대해 선생은 매우 격한 용어를 쓰며 분노를 표시했다. “오로지 권력쟁취에만 목적을 둔 일종의 원시인들 육탄전쟁 같아. 아주 몰상식하기 짝이 없어. 긴 인류의 역사에서 더 많은 교훈을 얻어야 해.” 선생은 또 미국이 세계화, 민주화란 미명 아래 미국이익을 극대화하는 미국화를 위해 엄청난 돈과 물량을 쏟아붓는 부도덕한 현실을 지적하면서 “미국 패권이라고 하는데, 패권 정도가 아니야. 냉전 때와도 달라. 미국의 실체는 바로 제국주의야. 지금의 이라크, 그리고 지난 50여년간 (친미정권 수립을 위해) 라틴아메리카 13개국 등에 개입해 쿠데타를 일으키고 정권을 전복한 미국의 실상을 봐.”


-그래도 미국·일본쪽에 붙어야 살 수 있다는 주장이 여전히 통하고 있다.

=본질 파악은 인간 개인 단위로 생각하면 쉽다. 예컨대 어느 동네에 힘세고 난폭한 깡패가 있다 치자. 그 ‘꼬붕’이 되는 게 유리하다는 얘기는, 온갖 패륜적 행위로 선량한 이웃들을 괴롭히더라도 나만 잘 살면 되는 것 아니냐는 얘기와 같다. 국가도 마찬가지로 ‘인격’ 같은 게 있다.

-이런 상황은 친일, 친미파와 관련한 역사적 경험과 밀접한 관련이 있을 텐데.

=친미 친일파 1세대는 살기 위해 투항하고 호도했는데, 지금 3세대에 이르러서도 그런 생각 못 버리고 있는 건 개개인들의 유전학적 문제이기도 하려니와 그렇게 해야 지배할 수 있는 현실이 있기 때문이고 미국이 그런 현실을 만들고 있다.


선생은 중국의 동북공정에 대해선 중국의 움직임이 미국의 한반도·동북아 정책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면서 “그것은 중국의 문제이기도 하면서 역시 미국의 문제”라고 봤다. 그러면서 동북공정에 대한 논란이 자칫 일본에 대한 현실적·구체적 일체감을 조성하려는 미국의 계획적인 의도에 놀아날 수도 있다며 경계했다.

끝으로, 나라 바깥을 널리 다녀 본 경험상 한국이 살만한 나라라 보느냐고 물었다. “특별히 더 살기 좋은 나라란 생각은 들지 않는다. 나는 애국주의 같은 거 싫어한다”면서 덧붙였다. “사람답게 살게끔 서로 사랑을 나누고 협력하고, 그리고 평화롭게 사는 곳, 그런 곳이면 세상 어디든 살만한 곳이지.”

한승동 선임기자 sdhan@hani.co.kr





독자에게

선생을 뵌 건 1977년 말 서울 현저동 서대문구치소에서였다. 78년 초인지도 모르겠다. 추운 날씨였는데, ‘출정’이라 했던가, 교도관들이 법원쪽에 조사받으러 나가는 ‘수인’들을 ‘법무부 차’에 태우기 전 포승줄로 묶어 줄을 세우고 있었다. 솜을 넣은, 색바랜 푸르딩딩한 무명 누비옷을 걸친 사람들 사이에 어쩌다 밖에서 넣어준 약식 한복을 입고 있는 사람들도 있었다. 선생은 우리처럼 푸른 옷이었고 칭칭감은 흰 포승줄이 선생의 양손을 허리춤 양쪽에 묶어놓고 있었다.

당시 유신반대 학내시위 주동 등으로 붙잡혀 들어간 다른 학생들처럼, 무슨 책을 주로 봤느냐는 검사의 다그침에 우리도 선생의 책과 글들을 줄줄이 읊었다. 우리는 아직 귀때기 새파란 스무살 남짓 풋내기들이었다. 구치소에 들어간 지 한달여 만에 우리는 책에서만 보던 선생을 그곳에서 뵀다. 잠깐이었지만.

전주교도소를 거쳐 다시 79년 봄 광주교도소로 이감됐을 때, 거기서 또 선생을 만났다. 교도관이 따라붙는, 사방 바로 바깥 담장속에서 하는 운동 시간이었는데, 먼저 나와 산보중이던 선생에게 들뜬 인사를 드렸다. 우리는 그해 7월17일 제헌절 특사로 풀려났고 선생은 남았다. 그 몇달 뒤 대통령이 살해당했다. 나라 안팎을 휩쓴 충격과 흥분과 불안속에 선생은 먹방에 보내져 22일간 ‘곱징역’을 살았다. 그리고 그해 말 ‘12·12 쿠데타’가 일어났고, 몇달 뒤 미처 피어나지도 못했던 ‘서울의 봄’은 ‘광주항쟁’과 함께 스러졌다.

선생을 다시 뵌 것은 88년 <한겨레> 창간 때였다. 서대문에서도 그랬고 광주에서도 그랬던 것처럼 선생과는 언제나 잠깐씩 마주쳤을 뿐이다. 지난 주, 처음 뵌 지 30년만에 비로소 장시간 선생을 마주했다. 어느새 우리 나이 오십이 다됐고, 선생은 팔순이 가까왔다.

한승동 선임기자 sdh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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