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05/18 (08:40) from 87.128.129.26' of 87.128.129.26' Article Number : 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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융의 <삶의 회고>






사람들이 나를 博識하다거나, 혹은 賢者라고 일컫는 것을 나는 받아 들일 수 없다. 한 인간이 개울물에서 한 그릇의 물을 길어 올린 일이 있다고 하자, 그것이 무슨 대수로운 일이란 말인가. 나는 그 개울물이 아니다. 나는 개울 물가에 서있다. 그러나 나는 아무 것도 행하지 못하고 있다.

다른 많은 사람들도 같은 개울 물가에 서 있다. 그들도 개울 물을 가지고 무언가를 해야만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아무 것도 행하지 못하고 있다. 나는 내가 벗나무 가지에 버찌가 영그는 것을 주의 깊게 바라보았던 사람이었다고는 한 번도 생각한 일이 없다.

나는 다만 우두커니 서서 自然이 이룩하고 있는 것을 찬미하면서 바라보고 있을 따름이다. 여기에 한가지 훌륭한 이야기가 있다. 한 제자가 랍비를 찾아가서 물었다. "옛날에는 神의 얼굴까지 보았던 사람들이 있었는데, 왜 지금은 그런 얘기조차 없습니까?"

"그 이유는 요즘은 아무도 전만큼 몸을 낮추려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로다." 라고 랍비는 대답했다. 흐르는 개울 물에서 물을 얻으려면 조금은 몸을 굽혀야 하는 것이다. 다른 대부분의 사람들과 나와의 차이는 나에게 있어서 "경계벽"이 투명하다는 데 있다. 이것이 나의 特性이었던 것이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 벽이 너무도 불투명하기에 그 배후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고, 또한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런데 나에게는 그 배후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이 어느 정도 보였고 그것이 일종의 내적인 확실성을 나에게 제공해 주고 있었던 것이다. 아무 것도 볼 수 없었던 사람들은 아무런 확실성도 가지고 있지 않았으며, 또한 어떤 결론도 끌어내 올 수 없었으며 - 설사 결론을 얻었다고 할지라도 그것을 스스로가 믿을 수 없었던 것이다.

도대체 무엇이 나로 하여금 生命의 흐름을 볼 수 있게 하였는지 나 역시 모른다. 아마도 무의식 그 자체였을지도 모른다. 혹은 초기의 꿈이었을지.. 그 꿈들은 처음부터 나의 길을 결정해 놓고 있었다. 어린 시절부터 나는 고독을 느껴 왔으며,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왜냐하면 나는 사물을 알고 있기 때문이고, 또한 그 事物에 대해서 거의 아무 것도 알지 못하고 알려 하지도 않는 사람들에게 무언가를 알려야 했기 때문이다.

孤獨이란 자신의 주위에 사람이 없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는 중요하게 생각되었던 것들이 남에게 전달되지 못하던가, 혹은 자신이 남이 허용할 수 없는 어떤 관점을 가질 때 생기게 되는 것이다. 나의 고독은 초기의 꿈의 체험으로부터 시작되었으며, 그리고 내가 無意識에 대해서 연구하고 있었을 때, 그 절정에 도달했다. 인간은 남보다 더 많은 것을 알게 되었을 때 고독하게 된다. 그러나 고독은 반드시 교제와 적대적인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해 개개인이 그 개성을 잃지 않고 스스로를 남과 동일시 하지 않을 때에만 참다운 교제가 생기게 된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

우리들이 무언가 비밀을 가지게 되고, 또한 불가능한 무언가에 대한 예감을 갖는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그것은 우리들의 생활을 무언가 비개인적인 누미노스에 의해서 가득 채워 준다. 그것을 한 번도 체험한 일이 없는 사람은 무언가 중요한 것을 놓쳐 버린 사람일 것이다.

인간은 자신이 어떤 점에 있어서 신비로운 세계에 살고 있다는 사실, 즉 事象이 형성되고 경험하는 가운데 어떤 것은 설명하기 어려운 것으로서 남고, 또한 반드시 모든 事象이 예감될 수만은 없다고 하는 사실을 認識해야만 하는 것이다. 또는 믿기 어려운 사실이 존재하고 있다. 그러므로 비로소 전체성을 갖게 되는 것이다. 나에게 있어서 이 세계는 처음부터 무한히 넓고 파악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나는 나의 생각을 관철시키는데 상당한 어려움을 겪었다. 나의 내부에는 다이몬이 있었던 것이다. 결국 다이몬의 존재는 決定的이어서 그것이 나를 압도하고 말았다. 내가 어떤 지점에 도달했을 때도 나는 결코 그 지점에 머물러 있을 수가 없었다. 나의 비전을 뒤 쫓기 위해 나는 서둘러 앞으로 나아가야만 했던 것이다. 당연히 나와 같은 시대의 사람들은 나의 환상을 인정할 수 없었으며, 그들은 다만 서둘러 앞으로 전진하고 있는 어리석은 한 사람을 보았을 뿐이다.

나는 많은 사람들의 감정을 상하게 했다. 왜냐하면 그들이 나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자마자, 문제는 끝난 것이라고 나는 더 이상 관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서둘러 앞으로 나아가야만 했던 것이다. 나는 사람들에 대해서 참을성이 없었다. 나는 나에게 부과된 내적인 법칙에 항상 순종해야 했으며, 선택의 자유는 남아있지 않았다. 물론 나는 항상 그것에 순종했던 것은 아니다. 도대체 누가 모순없이 살아갈 수 있다는 말인가.

어떤 사람들에게 있어서 그들이 나의 내적 세계에 관계가 있는 한, 나는 항상 그들과 가까운 존재로서 있었다. 그러나 그들과 나를 연결시키는 것이 존재하지 않을 경우, 나는 더 이상 그들과 함께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 사람들이 더 이상 내게 할 말이 없게 되었을 때도, 그들은 계속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나는 고통스럽게 배워야 했던 것이다.

나는 나의 인생이 걸어온 길에 대해서 만족해 하고 있다. 그것은 풍요로운 것이었으며 많은 것을 나에게 가져다 주었다. 그토록 많은 것을 나는 어떻게 기대할 수 있었겠는가? 전혀 예기치 않은 일들이 내게 계속해서 일어났던 것이다. 만일 내가 좀 더 다른 인간이었다면 많은 일들이 달라졌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運命的인 일들이었다. 왜냐하면 나는 현재의 내가 되도록 모든 일들이 일어났었던 것이다. 많은 일들은 내가 계획한 대로 이뤄졌으나, 그것은 항상 나에게 있어서 이로운 것만은 아니었다.

그러나 거의 모든 것이 자연스럽게 運命에 의해서 발전해 갔었다. 나는 완고함 때문에 생겼던 많은 어리석은 일들을 후회하고 있다. 그러나 그러한 완고함이 없이는 나 자신의 目標에 도달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실망하기도 하고, 또한 실망하지 않고도 있는 것이다. 나는 사람들에게 실망하기도 하고 나 자신에게 실망하기도 한다. 나는 사람들로부터 경탄할 만한 일을 배웠으며, 나 자신에게 기대할 수 있었던 이상의 일을 수행했다.

나는 나 자신에 대해 놀라고 실망하고 또한 기뻐하고 있었다. 나는 고뇌하고 의기소침하고 또한 환희를 느끼기도 했다. 나 자신은 동시에 이러한 모든 것들이었으며 總計를 계산할 수는 없다. 나는 궁극적인 가치와 무가치를 결정할 수 없다. 즉 나 자신에 대해서, 또 나 자신의 生涯에 대해서 판단을 내릴 수가 없는 것이다. 내가 전적으로 확실하다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나는 사실상 아무 것에 대해서도 자신이 없다. 나는 나 자신이 태어나서 존재했었다는 사실만을 알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나는 무언가에 의해서 운반되어 왔다는 느낌이 들 뿐이다. 나는 내가 알지 못하는 무언가의 기초 위에 존재하고 있다.

우리들이 태어난 이 세계는 무자비하고 잔혹하다. 그리고 동시에 신성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 어떤 요소가 더 중요한 것인가 즉 가치있는 것인가 무가치한 것인가는 氣質의 문제라고 볼 수 있다. 만일 무의미함이 절대적으로 우세하게 되면, 삶에 대한 의미는 우리들의 발달의 각 단계와 더불어 급격하게 사라져 버리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일은 있을 수 없으리라.

아마도 모든 形而上學의 문제처럼 양쪽이 다 진실일 것이다. 삶이란 의미가 있기도 하고, 혹은 무의미 하기도 하다. 나는 의미가 우세하게 되고 人生이라는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기를 바라고 있다.

老子는 "모든 것은 밝디 밝은데, 오로지 나 자신만이 안개에 덮여 있구나." 라고 말했는데, 이 말은 내가 老年이 된 지금 느끼고 있는 바를 잘 나타내 주는 것이다.




- 칼 융 자서전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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