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09/07 (01:56) from 211.187.216.29' of 211.187.216.29' Article Number : 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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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정말로 사랑하는 예수님이 보고 싶다.



옥한흠 목사의 장남 옥성호 "중환자실의 아버지 곁에서..."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의사는 고개를 흔들었습니다.

“어떻게 이 상태로 생명이 유지되고 있는지 의학적으로 납득이 되지 않아요. 이산화탄소가 이 정도로 쌓이면 힘들어지는 게 당연한데 그럴 때마다 몸속 다른 곳에서 예상치 못한 화학적 작용이 일어나 그 이산화탄소를 또 낮춥니다. 목사님의 기초체력 자체가 워낙 좋으셨나봐요.”

기초체력이라고요? 아니 몇 년째 그 힘든 폐암투병에 온 몸의 장기가 다 암세포로 전이된 상태에 기초체력은 무슨 놈의 기초체력입니까?

“하지만....”

의사는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습니다.

“이 상태로는 오래 못 버티십니다. 폐의 섬유화 진행 속도와 이산화탄소 수치를 볼 때 어느 순간 더 이상 몸이 버티지 못하고.....마치 컵의 끝까지 찼던 물이 찰랑이다가 한꺼번에 쏟아지듯이 갑자기 몸 전체가 무너지겠지요.....죄송합니다.”

의사의 진단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사실 중환자실에 내려오던 날부터 의사들은 고작해야 며칠을 예상했었으니까요. 아버지가 중환자실에 들어오신 지도 이제 16일이 지나갑니다. 그 동안 앙드레 김 선생님을 비롯해 이미 여러 명의 환자들이 주검이 되어 중환자실을 나갔습니다. 아버지 바로 옆 침대에 누웠던 두 명의 환자도 이미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습니다. 어떻게 보면 지금의 상황은 기적이라고밖에 할 수 없습니다. 가장 위중한 상태에서 그 방에 들어가신 아버지는 지금도 비록 기계에 의존하고 있지만 여전히 생명의 끈에 묶여 있으니까 말입니다.

도대체 지금 아버지가 붙잡고 있는 이 생명의 끈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아니, 하나님께서는 왜 지금도 아버지에게 생명을 허락하고 계신 걸까요?

제자훈련을 위해 평생의 삶을 바친 강명옥 전도사님이 아까 저희 형제들에게 눈물을 흘리며 말했습니다.

“너희들이 아버지의 메시지를 들어야 해. 하루에 두 번씩 중환자실에서 아버지를 만날 때마다 그 분이 너희에게 전하고 싶어 하는 그 메시지를 들어야 해. 들을 수 있어야 해. 아버지는 지금 뭔가 우리에게 말하고 싶은 게 있으신 거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으신 거야. 도대체 무엇 때문에 하나님께서 아버지의 생명을 지금까지 붙들고 있는지 너희가 들을 수 있어야해.”

그렇습니다. 정말 듣고 싶습니다. 알고 싶습니다. 의식이 없는 아버지께서 저렇게 누워서도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무엇인지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전달하고 싶으신 그 뜻이 무엇인지 말입니다. 아버지의 앙상한 가슴에 청진기를 갖다대면 들을 수 있을까요?

아버지는 암이 재발된 작년 이 맘 때부터 그 누구도 알 수 없는 힘든 투병생활을 해왔습니다. 하지만 아버지에게 암이 주는 고통이 특히 더 힘들었던 이유는 그가 더 이상 그토록 사모하는 교회에서 예배드리는 것조차 힘들어졌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뿐 아니라 시간이 갈수록 기도하기도 힘들어지고 성경 한 줄 읽기도 힘에 부친다며 괴로워 하셨습니다.

“이제는 정말로 사랑하는 예수님이 보고 싶다. 예수님을 만나고 싶다.” 아버지는 자기를 찾는 가까운 분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시곤 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그토록 그리워하는 예수님이 바로 저기에 계신데 아버지는 지금 의학적으로 설명하기 힘든 그 생명을 순간순간 이어가고 있습니다.

입버릇처럼 아직도 내가 할 일이 남았으면 하나님께서 나를 고쳐주실 것이라고 말하던 아버지의 말을 저는 믿었습니다. 그리고 분명 사랑의교회에 또 한국교회에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 가족을 위해 아버지가 하실 일들이 남아있다고 저는 확신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를 사랑하는 모두는 힘을 다해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이런 생각이 듭니다. 어쩌면 아버지가 일어나서 외치는 그 소리보다 지금 저 고독의 중환자실에 홀로 누워 우리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더 크기 때문이 아닐까?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지금 이 순간도 그의 생명을 잡고 계신 것이 아닐까? 어쩌면 평생을 육체의 병마라는 가시를 안고 살아온 그에게 건강해서 외치는 소리는 애초에 어울리지 않는 것이 아닐까? 하나님께서는 다른 사람이 아닌 옥한흠에게는 더 이상 초라할 수 없고 더 이상 아플 수 없는 바로 그 자리에서 외치는 소리 없는 메시지가 가장 어울린다고, 그것이 그에게 허락하신 ‘족한 은혜’라고 생각하시는 것은 아닐까?

결국 아버지가 살아오신 삶 전체가 주는 메시지는 듣는 사람들마다 다를 것입니다. 하지만 아버지를 아는 많은 분들에게 그 분의 삶을 규정하는 한 가지 단어를 들라면 분명 많은 분들은 ‘은혜’라고 말할 것입니다. 정말로 아버지는 은혜를 부여잡고 평생을 살아왔습니다. 자신의 이름 ‘옥한흠’을 ‘한없이 흠이 많은 사람’이라고 풀어 설명하며 그런 흠투성이의 인간을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하고 또한 목말라했던 사람입니다. 그렇기에 저는 확신합니다. 아버지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지금의 환경 속에서도 하나님이 주시는 ‘족한 은혜’에 감격하고 그 은혜의 신비를 지금도 우리에게 전하고 있다고 말입니다. 그렇기에 그가 평생 전하고자 애썼고 또한 지금도 전하고 있는 그 ‘은혜의 메시지’가 변함없이 교회 속에서 선포되도록 하는 것이 저를 포함한 살아있는 자들의 몫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개인적으로 우리 가족과 아버지와 평생을 함께 보냈던 동역자들에게 지금 아버지가 버티시는 순간순간은 그를 좀 더 편안히 놓아 보내도록 준비시키는 하나님이 허락하신 또 하나의 ‘은혜’입니다. 이 점은 사랑의교회의 많은 성도들에게도 동일할 것입니다.

지난 주 잠시 의식을 찾으신 아버지께 칠판에 써서 물었습니다.

“아빠, 특별히 보고 싶은 사람 있으세요?”

아버지는 힘들게 이렇게 썼습니다.

“내가 아는 모든 사람들”

아버지가 알고 그리워했던 모든 사람들 중에는 누구보다도 당신이 생명보다 또한 가족보다 사랑했던 사랑의교회 성도들이 들어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분들의 사랑과 기도에 이 자리를 빌어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아까 중환자실에 서 있던 중 까마득히 잊고 있던 아주 오래 전 어느 날 아침이 생각났습니다. 제가 6학년이던 어느 주일 새벽 아버지는 저와 동생을 깨웠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차에 태워 어디론가 갔습니다. 평소에 아버지와 드라이브(?)를 한 기억이 거의 없던 우리들은 의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것도 아버지에게 가장 바쁜 주일 새벽에 말입니다. 한 시간이나 갔을까요? 서울 근교 어느 산 중턱에 차를 세운 아버지는 앞에 펼쳐진 ‘야산들’을 바라보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야~ 하나님이 어쩜 이렇게 기가 막히게 자연을 창조하셨을까? 정말로 놀랍지 않냐?”

저희는 별로 놀랍지 않았습니다. 뭐, 대단한 산들도 아니고 기껏해야 동네 야산들 아닙니까? 하지만 아버지는 혼자 도취되신 듯 말을 이었습니다.

“성호야, 승훈아, 우리 함께 하나님을 찬양하자. 이런 자연을 만드신 하나님을 함께 찬양하자.”

우리 형제는 마지못해 아버지와 함께 ‘주 하나님 지으신 모든 세계’를 불렀습니다.

왜 산소호흡기를 끼고 있는 아버지를 바라보며 그 날 아침이 생각났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마도 저는 아버지가 저토록 무력한 상태에서도 꿈에서나마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며 그 어느 날 새벽처럼 황홀해하기를 바랬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우리 어리석은 인간의 눈에는 한없이 초라해 보이는 지금 이 순간조차도 아버지를 꼭 안아주시는 하나님을 그가 온 몸으로 느끼며 찬양하기를 너무도 간절히 원했기 때문인지 모르겠습니다. 지금 이 순간도 아버지를 안아주시는 하나님을 바라봅니다. 그 분의 안아주심 속에 이 밤도 쉬고 있는 아버지 그리고 곧 영원히 안식할 사랑하는 그 아버지를 그리워합니다.


http://missionlife.kukinews.com/article/view.asp?page=1&gCode=kmis&arcid=0004047443&code=2311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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