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04/26 (09:42) from 222.111.33.237' of 222.111.33.237' Article Number : 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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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 바르트의 죽음


청년 바르트의 죽음

조성돈  |  huioscho@naver.com

    
        

칼 바르트

● 편집인주: 이 글은 책'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에서 발췌한 글입니다. 이 책은 바르트 외에 여러 목회자들의 장례설교를 모은 책입니다. 일부는 자녀를 잃은 목회자가 한 설교입니다. 이 시기에 우리들에게 위로와 평안을 줄 수 있기를 바라며 출판사의 승낙을 얻어 글을 옮깁니다.
● 출처: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새물결플러스)

    
 
칼 바르트는 교회 역사상 가장 탁월한 신학자 중 한 명으로 손꼽히는 20세기 신학자다. 그는 자기 당대의 교회를 향해서 뿐 아니라 시대를 초월해 모든 시대의 교회들을 향해 말했던 몇 안 되는 위대한 신학자였다.
이 설교는 그가 1941년 6월 25일, 스위스 부벤도르프에서 자신의 둘째 아들 로베르트 마티아스 바르트의 장례식 예배 때 한 것이다. 나흘 전 마티아스는 알프스 산맥을 등반하던 중 추락사 하였는데, 당시 그의 나이는 스무 살이었다.
이 설교문은 아들을 잃은 슬픔 중에서도 결코 흔들리지 않았던 바르트의 개인적인 믿음을 보여줄 뿐 아니라 견고한 그의 신학을 명쾌하게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무척 중요하다. 바르트의 성숙한 신앙관과 그의 신학의 핵심요소(이 설교에서는 “지금”과 “그 때”의 변증법적 이해)들이 슬픔의 절정 속에서 잘 드러나 있다. 우리는 이 설교에서 성경이 말씀하시는 증언에 귀를 기울이려는 그의 결단을 엿보게 된다. 또한 우리는 그의 설교에서 모든 현실을 이해할 수 있는 참된 열쇠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초점을 맞출 때에야 가능하다는 주장을 발견한다. 이 얼마나 칼 바르트다운 설교인가!
이 설교문을 독일어에서 번역하는 과정에서 원문의 내용에 충실하기 위해 고린도전서 13장 12절의 관용어 표현을 그대로 두었다. 그 부분을 영어식으로 옮기면 설교의 일부분은 앞뒤가 맞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참고로 새개정성경(NRSV)에서 “우리는 거울을 통해 희미하게 봅니다.” 라고 번역된 이 구절을 바르트는 “수수께끼 같은 말씀속에서 거울을 통해 보는 것 같으나”라고 표현했다.
바르트는 독일의 개혁파 목사로 1, 2차 세계 대전 전후로 제네바와 독일에서 교수 생활을 했던 기간을 제외하면 일생의 대부분을 스위스의 바젤에서 보냈다. 설교 당시 그는 바젤 대학교에서 교의학을 강의하고 있었다.


청년 바르트의 죽음



우리가 지금은 수수께끼 같은 말씀 속에서 거울을 통해 보는 것 같으나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고린도전서 13:12


제가 오늘 이 말씀을 선택한 이유는 이 말씀이 제 아들 마티아스가 특별한 관심을 가졌던 첫 번째 성구였기 때문입니다. 이 성구는 마티아스가 매일 대하던 노(老) 신학자의 그림 밑에 새겨 있던 말씀입니다. 우리가 독일 본에 살고 있을 당시 마티아스는 어린 학생이었습니다. 어느날 저는 우연히 그 애가 이 구절을 라틴어로 필기해 묵상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Videmus nunc per speculum in aenigmate, tunc autem facie ad faciem (지금은 우리가 수수께끼 같은 말씀 속에서 거울을 통해 보는 것 같으나, 그 때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라.)

우리는 이제 막, 처참하게 부서진 마티아스의 유해가 마지막 안식을 취한 무덤에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그 아이의 짧은 생애에 대한 조사(弔謝)를 들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를 마티아스와 그 아이의 이름을 다시 부를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는 우리들을 위로하시고 자유케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살펴보기 원합니다. “우리가 지금은 수수께끼 같은 말씀 속에서 거울을 통해 보는 것 같으나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라는 구절은 지금 우리에게 매우 적절한 말씀입니다.
“지금”과 “그때” 모두 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가 이 모든 소망과 약함, 비밀을 가지고 있든지, 또 이것을 제대로 이해했는지 여부와 상관없이 우리를 도우실 것입니다. 지금과 그때는 서로 깊이 연결되어 있는 불가분의 관계입니다. “지금”뿐 아니라 “그때”! 이 둘은 나누어지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하나입니다. 우리는 지금 우리에게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상 우리는 진정한 현실을 알지 못합니다. 모든 일을 명확히 깨달을 수 있으며 모든 것이 영광스러워지는 것을 볼 수 있는 것은 “그때”에야 가능합니다. “지금”우리에게 주어지는 대답은 사물을 거꾸로 보이게 하는 거울처럼 수수께끼 같겠지만 “그때”에는 하나님이 우리를 아시는 것처럼 우리도 그분을 알게 될 것입니다.
지금과 그때, 이 둘이 분리할 수 없는 이런 방식으로, 즉 천상과 지상의 어떤 세력도 분리할 수 없는 방식으로 엮인 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에 의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십자가에서 비참하게 죽으시고, 영광 가운데 부활하셔서, 지금처럼 희미한 거울이나 수수께끼 같은 말씀이 아니라 나중에 얼굴과 얼굴을 마주 해 보는 듯한 명백함을 주시며, 지금과 그때를 함께 묶으신 이가 예수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입니다. 장차 우리가 접하게 될 하나님의 찬란한 영광의 광채들은, 현재 우리가 풀기 위해 애쓰고 있는 수수께끼 같은 이미지를 올바르게 교정해 줄 눈부신 광채입니다.
현재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가운데 그분과 함께 “지금”과 “그때”가 교차하는 접경지역에 서 있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이 경계선에 서서 믿음과 사랑, 소망을 가지도록 하시려는 그분의 은혜입니다. 이 접경은 빛이 어둠 위를 비추는 곳, 죽음의 목전에서도 생명으로 인해 기뻐날 뛸 수 있는 곳, 죄인이지만 의롭다 칭함을 받는 곳, 포로로 잡혀있지만 자유로운 곳, 길이 보이지 않는데도 오히려 소망을 품게 되는 곳, 의심 중에도 확신을 얻게 되는 곳, 비통한 가운데서도 기뻐할 수 있는 곳, 바로 그런 곳입니다.
마티아스를 생각할 때, 우리는 바로 이 접경지역 외의 다른 어느 장소에도 우리 자신을 두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그 아이는 이 경계선을 넘어갔지만 우리는 아직 이쪽 편에 서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접경지역에 서 있다고 해서 우리가 마티아스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눈에 그 거리가 얼마나 멀리 있는 것처럼 보이든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지금”과 “그때”, 이 둘 사이에는 조금의 거리도 없습니다. 지금 우리 마티아스는 여전히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그러나 그 아이는 지금 우리의 모습이나 그 아이의 생전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살아 있습니다. 마티아스는 변함이 없는 동시에 완전히 다르게 변화되었습니다.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생명과 죽음, 죽음과 생명 양쪽 모두에 대해 가르쳐 주셨으므로 우리는 마티아스를 기억하며 그 아이에 대해 이야기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물론 마티아스도 영적인 일뿐 아니라 이 세상의 인간적인 일들을 “수수께끼 같은 말씀 속에서 거울을 통해 보는 것 같이” 보았습니다. 모든 일들은 그 아이를 상상의 세계에 젖어들게 했고 마티아스의 독특한 열망은 때로는 장엄하고 때로는 역설적인 역사적 인물이나 사건들의 내면, 외부세계의 표상을 통해 나름대로 해답을 구하게 하곤 했습니다. 어린아이 때부터 지녔던 모험심은 그 아이로 하여금 시간과 공간을 잊어버리게 하곤 했습니다. 이 열정은 학업에서 선두를 달리게 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습니다. 마티아스는 또래 친구들을 통해 얻게 되는 기쁨이나 실망에도 깊은 관심을 가지곤 했습니다. 그 아이를 산으로 이끌었던 것도 바로 그 열정이었습니다. 그 아이의 생각이나 의도했던 모든 일들은 항상 현실과는 어느 정도 차이가 있었습니다. 마티아스는 빠른 두뇌회전에도 불구하고 늘 아이 같은 생각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흡사 그에게 주어진 능력과 가능성들을 바깥 세계의 주어진 임무와 사람들을 통해 실험하고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마티아스는 신학을 마치 모든 학문의 기본 토대인 것 같은 자세로 대했습니다. 마티아스의 염원과 소망, 또 무엇보다도 신학과 목회에서 증명되었어야 할 가능성에 대해 그 아이는 분명한 생각을 가지고 학문에 임했던 것입니다. 어쨌든 현세의 모순과 소요와 요구들이 그 아이에게는 다소 이질적으로 느껴졌고, 어떤 면에서는 적개심마저 지니게 했는데, 그런 사실을 생각해 볼 때 이 아이는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 이 20세기보다는 19세기 초에 더 잘 어울리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분명 마티아스에게는 거울이나 수수께끼 같은 말씀을 넘어서 “그때”가 이미 “지금”과 같았습니다. 지금 그 아이는 자신이 분명히 보고 싶고 알고 싶었던 것, 즉 하나님과 모든 일들에 대해서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하나님이 영원 전부터 그 아이를 아셨던 것처럼 그것을 보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팔과 무릎위에서” 이 아이는 아비나 형제들보다도 더 잘 알게 된 것입니다. 그 아이가 요셉처럼 이 삶의 참된 현실을 꿈꿔왔던 걸까요?(창37:6) 아니면, 그 아이를 “순진한 바보”로 여겼던 우리가 맞았던 걸까요? 그것에 대해 우리는 알 수 없고 또 알 필요도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 하나는 분명합니다. 우리가 “지금”과 “그때”가 만나는 경계선에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서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마티아스를 생각할 때, 이곳에서는 그에게 이 모든 일들이 막연했었지만 거기서는 참된 영광만이 그의 눈을 가득 채울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알게 됩니다. 지금 우리는 마티아스가 언제나 바랐지만 결코 채워지지 않았던 것을 여전히 보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갑자기 번쩍하면서 눈부신 광선이 우리의 눈을 사로잡을 것입니다. 그때 우리 눈은 지금 여기서 우리가 서로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보고 있는 것과 동일하게 그 아이를 보게 될 것입니다. 저는 우리가 그때 그 아이와 함께 모두 즐거워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그 아이가 그것에서 우리와 전혀 다르게 볼 수 있다는 사실에 기쁠 뿐입니다.
마티아스는 희미한 거울과 수수께끼 같은 말씀처럼 처신하곤 했습니다. 자신이 정말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분명히 표현하진 않았지만, 그 아이는 불편한 것에 쉽게 적응하거나 그것을 간단히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자신이 보기에 명쾌하지 않은 계획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 아이가 학교 문제에 대해 어떤 협정을 맺어야 할 때 그 일을 쉽게 처리하지 못한 것이 그 예입니다.
마티아스는 어렸을 때, 집에서 했던 한 연극에서 “방랑자”역을 맡은 적이 있습니다. 그 아이가 맡은 역할은 아버지의 커다란 지팡이와 모자를 쓰고 무대 위를 가로질러 사라지는 것이었습니다. 그 아이를 잘 알고 있던 가족들과 관람객들은 그가 무대 저편으로 사라지기 위해 방랑자로 분장한 모습을 하고 걸어오는 것을 지켜봤습니다.
아직도 제겐 자기 힘에 벅찬 산행 길을 가벼운 발걸음으로, 어떤 위험도 아랑곳하지 않는 새끼 염소처럼 바위 사이를 껑충껑충 뛰어다니며 따라오던 아홉 살짜리 아이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그 아이는 집처럼 편안한 곳에서조차 늘 어딘가에 멀리 떨어져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저는 그 아이를 완전히 이해한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 사람이 많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얼마 전, 그 아이는 저에게 “아버지, 저한테는 정말 내놓을 만한 인생 경험이라곤 없는 것 같아요!”라고 자신을 내비쳤던 적이 있습니다. 그 아이에게는 자기 나이 또래 아이들과 비교해 더 풍부했던 학문에도 불구하고 정말 이렇다 할만한 인생의 경험이 없었습니다. 아마도 이것이 우리들이나 다른 이들이 마티아스를 이해하기 힘든 이유였는지도 모릅니다. 마티아스는 희미한 거울이었으며 수수께끼 같았습니다. 우리는 그 아이가 군대 생활을 통해 어쩌면 세상을 더 잘 이해하고 좀더 가까이 할 수 있는 사람이 되지 않을까 기대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론 이 강압적 과정이 그 아이에게 예기치 못했던 영향을 미치게 되지는 않을까 걱정하곤 했습니다. 하지만 그런 기대나 걱정도 지금은 아무 소용이 없게 되었습니다. 그 아이는 자신의 “지금”을 자신이 시작했던 대로 끝내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습니다. 좀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의 “지금”은 그의 뒤로 닫혀 버렸고 갑자기 그 아이의 생은 “그때”로 넘어가 버렸기 때문에 이제 우리는 그 아이를 곤란하게 만들었던 여러 일들에 대해 더 이상 신경 쓸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우리 마티아스와 그 아이의 신비롭고도 짧은 방랑의 길을 진정으로 이해하기 위해, 우리를 놀라게 한 그 아이의 여행의 시작과 끝을 참되게 이해하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그 아이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주님을 인정하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 아이가 자신과 우리 주님의 눈부신 부활의 광채 속으로 똑바로 걸어 들어가 우리 눈앞에서 사라져 버렸기 때문에 우리는 더 이상 그 아이와 그 아이에 대한 놀라운 일들을 보지 못합니다. 우리는 이 눈부신 광채를 볼 수 없기 때문에 우리의 마티아스가 누구였고 어떤 사람이었는지 더 이상 알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인생의 경험이 일천했던 우리 마티아스를 위해 하나님의 아들이 대신 자신을 내주셔서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셨던 것입니다.(요3:16) 이것은 진실이며, “그때”는 바로 마티아스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만약 우리가 이 사실을 알고 기억한다면, 우리가 만약 그 아이를 그 곳에서 찾는다면, 지금이라도 우리는 우리가 필요한 만큼 그를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모든 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그 아이를 시작부터 끝까지 있는 그대로 사랑했던 것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지금도 우리의 기억 속에 자리한 그 아이를 사랑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계속 그러할 것입니다.
솔직히 이 세상에서의 그 아이의 끝은 너무나 갑작스러웠습니다. 이것은 또 하나의 희미한 거울, 특별히 고통스럽고 끔찍한 종류의 수수께끼입니다. 그 아이는 마지막 여름 여행을 스위스의 산으로 떠났고, 다시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우리에게 또 하나의 커다란 수수께끼가 던져진 지난 6월22일(2차 세계대전이 일어난 날-옮긴이) 밤 마티아스는 조용히 우리 곁을 떠났습니다. 이 땅에 남게 된 우리는 그 아이와 작별 인사를 하며 여러 날을 고통스럽게 보내야 했습니다. 그 아이가 생전에 우리와 함께 있었을 때 왜 좀 더 잘 해주지 않았을까, 왜 한 번만 더 아이의 손을 잡고 따뜻한 대화를 나누지 않았을까 하는 열망에 사무쳐서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무엇이며, 무엇을 할 수 있으며, 무엇을 알 수 있으며, 우리의 질문이나 묵상이 무슨 소용이며, 우리의 소원이 이 죽음이라는 크고도 냉혹한 수수께끼 앞에서 무슨 가지가 있단 말입니까?
저는 요즘 구약성경 사무엘하 12장 23절에 나오는 다윗이 그의 죽은 아들을 향해 한 말을 거듭해서 숙고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내가 다시 돌아오게 할 수 있느냐? 나는 그에게로 가려니와 그는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리라.” 그리고 이 말을 통해서, 저는 왜 자신이 더 이상 금식하지 않고 울지 않아야 하는지를 정당화하고 있는 다윗의 모습에 그 어느 때보다 놀라고 있습니다. 정말이지 만일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시지”(고전15:20) 않았더라면 다윗은 정신 나간 냉혹한 아버지로 비난받았을 것입니다. 이 어두컴컴한 “지금”이 그 찬란한 “그때”와 이렇게 가깝고도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지 않았더라면, 다윗은 어떻게 그 끔찍한 고통을 더 이상 슬퍼하지 않을 수 있었겠습니까? 그러나 그리스도는 진실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고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 우리가 현재 겪고 있는 끔찍한 고통과 아픔으로도 감히 견줄 수 없는 성 금요일의 신비는 이제 부활절 뒤를 따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지금 살아 계셔서 통치하시며 승리자로 군림하고 계십니다.
“그때”가 “지금”과 얼마나 가까워졌는지요! 그러므로 “이곳”에서의 죽음은 더 이상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특별한 영역도 아니고, 애도하며 궁금해야 할 것도 아니며, 금식하고 눈물을 뿌려야 할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죽음이 우리를 두렵게 만들고 아픔 속으로 몰아넣는 힘이 있다는 것을 잘 압니다. 그러나 우리는 죽음이 더 이상 사망의 쏘는 힘이 없다는 것(고전15:55)을 알고 있습니다. 그뿐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분의 영광에 들어가시기 위해 고난을 받으신(눅24:26)이후, 죽음 그 자체는 그리스도께서 대신 고난을 당하심으로써 그 유익을 선물로 받은 이들에게 그저 그분의 찬란한 영광으로 가는 통로가 되었다는 것을 알고 믿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다윗이 옳았습니다.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것으로 여기고 소망을 포기하고 한숨을 쉬고 눈물을 흘리기보다, 무덤 저편에서 영원한 생명을 맛보고 있을 사람들을 위해 크게 기뻐해야 합니다.
어쩌면 우리 마티아스의 마음속 깊은 곳에 어떤 깊은 무력감과 무방비 상태가 자리 잡고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아직 완성되기에는 갈 길이 멀었던 그 아이가 어떻게 자신의 삶을, 마치 폭풍우가 휩쓸고 지나간 것처럼 그렇게 앗아간 그 강한 세력에서 도망칠 수 있었겠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지금 그 강한 세력을 포로로 잡으시고, 그 죽음의 세력을 쓸어버리시고 감금해 버리신 분이 계시다는 것을 알고 또 믿고 있습니다. 그분과 얼굴과 얼굴을 마주 대하게 될 때 우리는 이 일들을 우리 눈으로 직접 보게 될 것입니다. 분명 “그때”는 “지금”과 아주 가까이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슬픔 가운데 마냥 애도만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비록 우리가 지금 당장 기뻐할 수는 없더라도, 질적으로 완전히 다른 종류의 환희로 가득 찬 음성을 이 모든 일이 일어났던 악한 장소 프뤼덴호른이나 우리가 방금 전에 보고 온 무덤에서까지 들을 수 있습니다. 이 환희로 가득찬 음성은 이 불완전한 자들마저 완성될 것에 대해, 또 마티아스가 어떻게 죽음을 통과하고 하나님의 종으로 완성될 것인지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 음성은 평화와 기쁨과 더 풍성히 얻게 되는 생명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는 것입니다.(요10:10) 이런 음성을 듣게 될 때, 하나님의 선하신 뜻과 우리 마티아스의 삶과 죽음의 목적을 이루신 그분께 감사하는 것 외에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또 무엇이 있겠습니까? 비록 지금은 눈물을 흘리고는 있지만 하나님은 우리들의 삶의 목적도 동일하게 이루시고 계십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라.” (요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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