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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중앙	Access : 3163 , Lines : 78

[인물] 장공 김재준 - 토착 신학자의 삶

월간중앙 2001년 11월호

한국사회의 ‘중심 잡아주기’에 바친 토착 신학자의 삶

조우석의 독서일기

"내가 살아온 한국의 (근·현대) 80년은 ‘빈 들’이었다. 빈 들은 성서에도 나오듯 ‘돌로 떡을 만들라’는 식의 물질만능과 경제제일주의이고, 악마에게 절을 하고라도 권력만 잡으면 된다는 권력숭배 사조,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라면 그대로 하는 광신적 기복종교에 의해 지배되는 공간이었다.” 현대사에 대한 이런 통렬한 지적이 다름아닌 생존하는 목사 한분의 입에서 나왔다는 점을 주목하자. 강원룡 목사의 전3권짜리 자서전 ‘빈들에서’(초판 1993, 대화)에 나오는 구절이다.

남다른 사회적 행동반경의 측면에서 국내 개신교 지도자 중 가장 신뢰할 만한 사람이 강 목사인 것으로 나는 알고 있다. 또 본디 책 중에서 가장 흥미로운 것이 자서전 내지 전기물인데, 이 책은 ‘좋은 의미에서 정치적 성향이 강한’ 강목사의 해방 전후의 시기, 즉 그의 청년기 이후부터 시작해 복잡다단했던 사회활동의 상당수를 설득력 있게 보여준다. 근거 없는 자화자찬만 담은 자서전류와는 분명 구분되는 자서전 ‘빈들에서’가 갖는 이런 성격과 이 책에 대한 호의적인 판단은 강목사가 청년학생운동, 사회교육활동과 종교간 대화 등의 측면에서 가장 두드러진 인물이고, 정치현실에도 개신교 목사로는 가장 긴장감을 유지한 채 깊숙이 개입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아쉬운 점은 국내의 대표적 개신교 목회자의 책을 통해 기대함직한 도덕적 감흥이나 신학적 성찰은 상대적으로 기대에 다소 모자란다는 점이다. 즉 보수적 목회자들이 갖게 마련인 ‘사회적 정적주의(靜寂主義)에서 벗어난 점은 이를 데 없이 훌륭하나, 그저 복잡다단한 사회활동의 되풀이여서 과연 이런 활동이 신학과 어떻게 연결되나 하는 부분에서 아쉽다는 것이다.

내가 읽은 책 가운데 가장 강렬한 느낌으로 다가온 개신교 목사의 자서전으로는 장공(長空) 김재준 목사의 ‘범용기’(凡庸記, 1983, 풀빛)를 꼽고 싶다.
함석헌을 연상시키는 단문(短文)으로 건조한 듯하면서도 우리 시대의 삶에 대한 정확한 증언과 기록은 지금도 기억에 선하다. 우리 민족사 속의 기독교에 대한 자리매기기에도 좋은 텍스트이기도 하다. 그런데 강목사의 중학시절 은사이기도 했던 장공을 놓고 강원룡 목사는 자서전 ‘빈들에서’에서 이렇게 회고해 주목거리다.
‘중학시절 김재준 선생님과의 만남은 사상적으로 가장 중대한 사건이었다’
.
하기는 토착적 신학자로서 주목받아야 할 인물인 장공은 교육자로서도 극히 이례적으로 성공적이어서 그의 후배나 제자들의 이름을 들면 그것이 곧 개신교의 가장 광채나는 이름들이 된다.
그 장공의 제자 중 한명인 김경재(한신대, 한국크리스찬아카데미 원장) 교수가 장공의 탄생 100주년을 맞아 편안한 읽을거리로 쓴 ‘김재준 평전’은 아마도 올해 나온 책 중 가장 주목할 만한 단행본으로 기록되지 않을까 싶다.

2001년 한국 지식사회를 위한 토론과 담론의 장으로서 그렇다는 얘기다. 생전에 깊은 교유를 나눴던 함석헌과 함께 탄생 100주년을 맞는 장공의 삶을 간직한 매우 효율적인 기록이라는 측면에서뿐만 아니다. 이 책은 토착신학의 전개와 함께 우리 현대사에서 개신교의 공(功)과 과(過)를 가늠하기 위해 매우 중요한데, 이 점을 암시한 책의 서문 한 구절을 귀띔해 드리겠다.

‘이 책은 김재준이라는 한 인간의 평전이지만, 긴 안목으로 말한다면 한국 정신문화사 속에서 그리스도교가 역사의식과 사회변혁의 동력으로서 어떠한 영향을 주었는가를 아울러 이야기하는 책이기도 하다’.
자, 이 정도의 원력(願力)을 담은 서술이라면 기대하고 읽어봄직하지 않을까? 과연 저자는 장공의 현대사 속의 위상을 불교사 속의 원효, 유교사 속의 퇴계나 율곡에 각각 비유한다. 이런 비유는 논란의 여지가 없지 않겠으나, 그 어떤 고등종교라도 한반도에 상륙하면 전래 200년을 전후해 자기화의 중요한 과정을 통해 토착화되고 원숙한 이론체계를 내놓게 된다는 상징으로 저자는 이런 발언을 했을 것이다. 저자의 말을 다시 확인해 보자.

‘이와 비슷하게 기독교는 한국땅에 전래된 지 200년 뒤 김재준과 함석헌을 낳았다. 이 점에 관해서는 세월이 훨씬 지난 뒤에라야 두 인물의 역사적 중요성이 확연하게 보이겠지만, 앞당겨 그렇게 판단하는 필자의 소신을 굳이 감추려 하지 않겠다’.

나 역시 무언가 짚이는 대목이 없지 않다. 그렇다면 여기서 장공과 깊은 동지 관계를 가졌고 이 땅 기독교의 주류인 예수교장로회의 큰 어른으로, 지난해 타계한 고(故) 한경직 목사의 삶과 비교해 보면 좋겠다. 물론 한목사는 보수 교단의 대표적 인물이어서, 진보 교단의 대표적 인물인 장공과 극히 대조적인 사회적 위상을 가진다. 어쨌거나 한목사는 장공보다 사회적 지명도가 상대적으로 더 높은물론 탈정치적 성향의 한목사를 우리 사회가, 무엇보다 우리네 정치권력이 받아들이기 용이했기 때문이다- 분이다.

한목사 타계후 우리 사회가 그를 추모했던 내용의 주류는 과연 무엇이었던가? 한목사가 한국 최대 교회를 이끈 담임목사이면서도 ‘깨끗한 가난’을 선택했다는 미덕을 빠짐없이 거론하는 것으로 시종했다. 평생 당신 소유의 집 한칸 없이 사택에서 생활했고, 자신의 이름으로 된 통장 하나 없었던 일화는 과연 사표가 될 만하다. 그러나 한목사 삶의 개인적 유산이 ‘돌로 떡을 만들려는 경제제일주의’와 ‘턱없는 광신의 기복종교’라는 교회공통체의 부정적 덕목과는 어떻게 연결되고 있나 되묻고 싶다.

구약과 신약에서 나타나듯 성직자에게 주어진 몫은 두가지다. ‘제사장적인 경건함’과 ‘예언자적 용기로서의 역사의식’이다. 예언자로서의 모습은 아모스에게서 나타나듯 ‘의로움을 사모하기를 목마름같이 하는’ 것이었다. 물론 그 의로움이란 개인은 물론 ‘공동체 삶의 중심 잡아주기’를 말한다. 밝히거니와 바로 이 점이 현대사 속에서 보수신학을 견지해온 개신교 지도자들에게 아쉬웠던 모습이기도 했다.

한목사의 경우 결과적으로 ‘제사장적 경건함’의 모습은 보여줬으나 그것도 개인적 미덕에 그쳤고, 유감스럽게도 그의 분신인 교회에조차 적용되기 힘들었다. 세상이 다 아는 바이지만 오히려 그 반대였던 것이 사실이다. 특히 그가 이끌어온 영락교회가 한국교회의 가장 큰 특징인 ‘외형적 성장’을 주도한 대표적 교회로 기억되는 것은 역설이다. 대형 교회는 세계에서 유례가 드물고, 그 바탕에는 기복주의와 크게 다르지 않은 복음주의적 신앙 행태가 있다는 것은 거의 상식이다. 형태 때문에 그 ‘한국적 현상’은 1970년대 이후 세계적으로 주목받기도 했지만, 지금은 많은 신학자들에 의해 극복해야 할 유산으로 지목되고 있지 않은가?

‘예언자적 용기로 역사의식’보여준 대승적 기독교인

장공 김재준 목사와 그의 행동반경과 목회자적 위상이 중요한 것은 바로 그가 이런 고질적 상황에 대한 기독교 내의 총체적 반성을 상징하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한국 개신교의 주류인 장로교회는 교회사적으로도 특이한 신앙형태라서, 18세기 성경의 ‘축자(逐字)영감설’(성경의 글자 하나 하나가 계시와 영감에 의해 서술됐다는 설)에 기반을 둔 이 신앙형태는 유럽사회에서는 20세기 초에 벌써 조락(凋落)을 경험했다.

그 이전 19세기말 미국사회에 이식됐던 정통주의 신학은 ‘배에 실려’ 초창기 한국사회를 찾은 선교사들의 손에 의해 이 땅 개신교의 주류를 이룬 것이다. 개신교가 ‘토착 신학’의 측면에서 덜 활발한 것도 그런 연유 때문이다. 한경직 목사가 이런 신학적 입장을 대표하는 지도자라면, 장공은 그 반대편에 서 있다. 이 대목과 관련해 저자는 이렇게 언명한다.

‘그(장공)는 한국교회의 병폐 밑바닥에 놓여 있는 가장 심각한 질병 세가지를 이렇게 지적한다. 첫째는 복음을 무오류설에 입각한 성경주의적 ‘책의 종교’로 전락시키는 위험, 둘째는 몰역사적이고 사회참여 책임을 외면하고 비판하는 타계주의적 신앙, 셋째는 물량주의적 성장론에 빠져버린 데서 오는 세속화의 위험이 그것이라는 것이다. … 즉 한국교회의 병폐에는 마치 성경을 육법전서처럼 이해하고 하늘과 땅의 모든 구체적인 일을 기록한 도참비결 문서처럼 생각하면서 정작 ‘살아계신 그리스도의 사랑의 인격’과 사귐을 동반하지 않는 보수적 성경지상주의자들이 존재한다’.(157~158쪽)

오강남 교수의 책 ‘예수는 없다’의 메시지를 요약한 듯 싶은 구절이다. 놀랍게도 바로 이런 명백한 사실이 주류 기독교인들에 의해 철저히 외면돼온 과정이 지난 100년의 세월이다. 서구의 주류 기독교는 변화하는 데도 세상 바뀌는 줄 모르고 기복신앙의 형태 속에서 교회 대형화에 매달려온 과정이었던 셈이다.

우리는 안다. 바로 그런 행태가 강원룡 목사가 지적했듯 ‘돌로 떡을 만들라’는 식의 물질만능과 경제제일주의 속에 천민자본주의를 부추긴 핵심동력이라는 점을 익히 알고 있다. 또 그것이 악마에게 절을 하고라도 권력만 잡으면 된다는 권력숭배 사조와 무관하지 않음도 알고 있다. 그리고 또 그런 행태는 앞에서 언급했듯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라면 그대로 하는 광신적 기복종교에 의해 지배되는 공간이라서 건강한 한국사회의 시민들에게 이유 모를 껄끄러움을 심어 주었고, ‘교회 나가는 사람들’이 최소한 더불어 일하기에는 왠지 편하지 않은 외방족(外方族)이라는 느낌으로 연결됐음을 익히 알고 있다.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저자는 불교용어 ‘대승’(大乘)을 끌어들여 장공을 함석헌과 함께 기존의 교회환경을 뒤집어 놓은 ‘대승적 기독교의 창시자’라고 규정한다.

대세인 양 우리 사회에 존재하는 ‘소승적 전통 기독교’쪽의 반대편에 서는 사람이 장공이었고, 따라서 아직도 사회의 차가운 비판 속에서 자기개혁을 요청받고 있는 기독교의 자기독선을 치유하는 대표적인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런 장공의 실체 발언은 과연 어떠한 것이었나를 살펴보자. 한국의 전통문화에 대한 거부감을 생리로 해온 평균적 기독교인들과 천양지차인 것은 물론 생각 이상의 탄력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것이 장공의 말이다. 다음은 이왕에 나온 김재준 전집에 비치는 장공의 육성이지만, 다소 길게 인용해볼 가치가 있다고 판단된다.

‘요컨대 우리 한국인은 샤머니즘은 일단 논외로 하고 유교·불교 등 기독교 아닌 타종교를 받아들인 이후만 하더라도 약 1,500년의 긴 역사를 이룩해 왔다. 좋건 궂든 이것이 한국인의 체질을 형성하고 있으며 한국사회의 생활의 전형을 형성하고 있는 것만은 사실이다. 우리나라에 온 선교사들은 이 점에서 너무 고자세였다고 생각된다. 그들은 한국인과 한국문화를 하나의 공백과 같이 다루고 있었다. 무엇이 있었다 해도 그것은 일고의 가치도 없는 악의의 소산이라 하여 일망타진을 기도했던 것이다. 불당의 불상이나 유교의 제사를 단순한 우상숭배로 치부하여 그 박멸을 기도했다. 이런 것들이 걸림돌이 되어 한국인의 복음 이해에 막대한 지장을 가져왔던 것이다.’

좋다. 아마도 이 정도의 탄력성과 민족사 속을 스며드는 친화력을 기왕의 기독교가 가졌더라면 우리 현대사가 이 정도로 파행적으로 흘러왔을까 하는 회한이 들 정도다. 다소 신학적 담론 위주로 글이 흘러가다 보니 막상 장공 김재준의 연대기적 정보가 소홀하다는 느낌을 준다. 이 기회에 그의 삶을 더듬어 보자.

그는 탄광마을로 유명한 속칭 아오지가 있는 함북 경흥군에서 출생했다. 성장기에 유교적 덕목을 상당히 깊숙하게 내면화한(바로 이 지점에서 함석헌과 코드를 함께한다) 그는 식민지 지방관료 생활을 하던 중 서울로 유학해 중동학교와 YMCA에서 이상재·윤치호·신흥우 등의 강연을 듣고 신문화에 눈을 뜬다. 이때 기독교에 입교했고 자유주의적 신학의 분위기가 강한 일본 아오야마신학원 유학생활(1926∼28)을 거쳐 다시 미국유학 길에 오른다.

프린스턴신학교 유학(1928∼32)에서 당대 첨단의 신학적 움직임을 접한 그는 귀국후 한경직 등과 함께 일제하 한국신학의 중심이던 평양신학교를 중심으로 활동했다. 장공이 위대한 이유는 일제 하와 해방후 건국 초기까지 이렇다 할 사회활동이 미진했던 점을 4·19를 기점으로 충분하게 만회하면서 한국현대사의 성장과정과 삶을 함께한다는 점이다. 군사정권 하에서의 한일굴욕외교나 3선개헌 등의 크고 작은 사건에서 장공은 양심적이고 건강한 기독교인들을 대표로 하는 인물로 떠올랐다. 이후 1970년대에도 경화되어 가던 박정희의 억압적 통치에서 함석헌·천관우·지학순·이병린 등과 함께 선봉에 섰던 원로였다.

또 하나, 그는 제도권 교회의 밖에서 ‘예언자’로 활동했던 함석헌과 상당부분 구분돼야 한다. 우열의 개념이 아니라 서로의 차원이 달랐다. 무엇보다 장공은 진보적 교단인 기장(기독교장로회)의 실질적이고 정신적인 구심점을 해온 사람으로 기억된다. 즉 보수 교단인 ‘예장’이 그를 파문하고 인정하지 않으려 할 때 장공은 ‘기장’을 탄생시켜 오늘의 교단으로 성장시킨 주역이다. 이를 교권갈등의 시각으로 보는 것은 허무주의적 시선이다.

왜냐하면 이미 현대사의 상식이 돼버린 것처럼, 기장의 탄생은 그나마 기독교가 현대사에서 기능해야 하는 양질의 요소를 보여준 계기였고, 바로 그의 존재 때문에 기독교가 가톨릭과 함께 그래도 평균적 심성을 가진 한국인들에게 호감을 갖게 하는 중심축인 것이 분명하다.

거듭 말하거니와 장공은 그 자체만으로도 매력 있는 거인이다. 그러나 이 책은 계몽적 성격의 저작으로는 훌륭하지만, 좀더 분석적 서술을 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을 갖게 한다. 장공이 기독교를 넘어 근대사에서 차지하는 위상 때문에라도 그렇다. 책 속의 ‘은총’ 이니 뭐니 하는 교회용어를 포함해 너무 기독교적인 서술도 걸린다. 이 점은 아마도 교단 내에서조차 장공이 잊혀지는 현상이 걱정된 저자가 의도적으로 쉽고 편안하게 서술했기 때문에 나온 결과이겠지만, 분명 아쉬운 점이라 아니할 수 없다. 너무 ‘호교론’(護敎論)쪽에 서 있다는 측면도 이 책의 범용성(汎用性)을 깎는 요인으로 지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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