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2/08/24 (01:45) from 211.49.91.18' of 211.49.91.18' | Article Number : 102 |
올빼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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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cess : 2296 , Lines : 20 |
| 당대비평 20호 머리글입니다(오늘 출간되었군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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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숙면을 꿈꾼다 어린 시절 태풍이 막 지나간 뒤 골목길은 유난히 한가했다. 나는 인적 없는 골목에서 이 끝에서 저 끝까지 달리기를 몇 번이고 거듭했던 기억을 떠올렸다. 왕성한 활동력을 가진 사내아이에게 며칠 간의 감금이 얼마나 참을 수 없는 것인지를 하소연하듯, 전력을 다해 달렸다. 그날 나는 기진맥진해서 돌아온 뒤 마루에 대자로 누워 잠들어버렸다. 그때의 평온함은 두고두고 잊을 수 없다. 월드컵이 끝났다. 몇 편의 글을 연이어 쓰느라 온통 긴장한 뇌의 신경 세포 사이로 달력 넘어가는 장면이 지각되었다. 어느새 그로부터 한 달이나 지났던 것이다. 그 초대형 태풍이 닥쳐오기 시작하던 무렵, 아마도 6월 초쯤, 건방떨며 몇 개의 글발을 날렸다. 국가와 자본의 선동 전략에 매수된 사람이 되지 말자는 취지의 글이다. 그땐 이 정도의 설익은 주술로 강풍이 진화될 줄 알았다. 결과는 내 몸둥아리가 날아가버렸다. 몸저 누울 틈 없이 분주했지만, 마음에 깊은 상처를 입었던 내게 던진 똘똘한 후배의 말이 바쁜 중에도 사라지지 않고 머리를 맴돌았다. 설사 자본과 국가의 선동이 있더라도, 그것을 창조적으로 되받아칠 수 있는 '대중의 가능성'을 발견할 줄 모르는 '창백한 지식인의 자족적 결벽증'을 걷어치우라고! 우리나라 사람 가운데 한국 팀 선수들이 멋진 플레이를 펼치고 경기에서 이기기까지 하는 것을 보면서 대견함과 통쾌함을 느끼지 않은 이가 있을까? 나 역시 그런 기분을 공유한 채 한국 팀의 경기를 관전했다. 텔레비전을 통해 중계되는 시각적 이미지, 그것이 재현해내는 지극히 감각적인 리얼리티에 몰입하는 중에, 국민으로 부름받은 것에 대한 자긍심이 어느새 나를 지배하고 있다. 이러한 국가의식 혹은 민족의식과 연관될 수 있다면, 나는 그 누구와도, 그 무엇과도 동지의식을 가질 자세가 이미 된 상태로 주위를 두리번거린다. 낯모르는 아저씨가 무례하게도 귓가에서 술취한 괴성을 지르더라도, 그 소리가 '대~한민국'이라면 활짝 웃는 얼굴로 다섯 번의 박수로 그에게 기꺼이 맞장구를 칠 수 있었다. 심지어 상대가 부패한 정치인, 악덕 기업인, 초국적 기업이라 하더라도, 그들이 우리의 '기호'(signs)를 나와 공유한다면, 그들의 전력(前歷)에 대해 얼마든지 무딘 사람처럼 대할 수 있었다. 나의 예민한 촉수는 공식적 매체를 통해 넘치도록 흘러나오는 월드컵 축구 담론을 향하고 있었다. 반면, 그밖의 것들은 보이지도 들리지도 만져지지도 않는 지각 외부의 공간으로 밀려나버렸다. 결국 나는 텔레비전을 시청하는 중에 자본주의와 국가주의에 순응적인 사람이 되었고, 다른 것에 대해 감각마비를 일으키고 있었다. 텔레비전이 담아내는 시각적 리얼리티는 이렇게 은밀하게 메시지를 끝없이 내게 전달한다. 그 영상매체에 감정이입하는 한, 나는 그 메시지에로 규율되게 하는 판옵티콘에 갇혀버리고 만다. 그렇기에 '거리두기'는 나에게 있어서 '월드컵 바로보기 관전 수칙 제1 원리'였다. 한데 나는 한 번도 그 원칙에 철저한 적이 없었다. 번번이 텔레비전의 절묘한 이미지 재현의 장치 속으로 말려들곤 했다. 땀으로 범벅된 채 질주하고 넘어지고 허공으로 솟구치는 선수들의 모습에서 절정의 남성미를 발견하는 순간, 그 원초적 공격성에 매료된 나의 시야에는 어느새 경기장과 세계의 공간이 중첩되어 나타났다. 신체에 관한 세상의 우등과 열등의 이데올로기가 얼마나 말도 안 되는 것인가를 강도 높게 비판하면서도, 그 우열의 이데올로기가 몸에서 자연스럽게 체현된다. 태어나면서부터 무수히 반복되면서 나의 일부가 된 하나의 세상의 이치였기에 말이다. 그러한 허망한 가치를 내 몸에서 분리시키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던가? 그것을 자연스럽게 느끼지 않으려고 얼마나 발버둥쳤던가? 한데 월드컵 경기 관전에서 나는 또 한번 이런 유혹에 넘어가고 말았다. 또 다시 거리두기 전략은 실패했다. 그 두려움 때문에, 텔레비전의 최면효과로부터 결코 자유롭지 못하다는 패배의식 때문에 나는 어느 땐가부터 비판만을 일삼는 자족적 결벽증 증세를 갖게 되었다. 이런 불량한 정서 상태로는 일상 생활을 숙면취하듯 편안하게 맞이할 수 없다. 그것을 전혀 생각 못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심각하게 느끼진 못했는데, 후배의 신랄한 말 한마디에 퍼뜩 정신을 차리지 않을 수 없었다. 국가와 자본의 은밀한 메시지를 담고 있는 비주얼 리얼리티는 우리에게 어떤 현실을 지각하게 하면서도 또한 다른 현실을 망각하게 하는, 결국 우리를 현실적이면서도 동시에 몰현실적이게 만드는 절묘한 장치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하지만 동시에 그러한 후기자본주의적 리얼리티 메커니즘의 공세 속에서도 그것을 맞받아 치는 대중의 창조적 가능성을 신뢰하는 것, 그러한 꿈을 해석해내는 것이 정말로 필요하다. 나의 결벽증을 제대로 치료하려면 말이다. 그러면 마음의 상처를 씻고, 오랜만에 숙면을 취할 수 있으리라. 월드컵 태풍은 지나갔다. 바야흐로 포스트월드컵의 시기다. 이제 성찰이 필요하다. 천하를 요동케 하는 태풍의 광기가 모든 것을 쓸어버리고 지나간 뒤에, 폐허가 된 '우리 속의 민중'(나는 이것을 '성찰적인 민중당파성'이라고 말하고 싶다)을 다시금 주목하면서 그 광기를 해석해내야 한다. 그런데 아직 그런 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이 안타깝다. 태풍이 지난 뒤의 빈 골목길처럼. 누군가 분주히 비어있는 곳을 달려야 한다면, 그래야 우리가 평온한 숙면을 취할 특혜를 누릴 수 있다면, {당대비평}이 먼저 성찰의 달리기를 시작하면 어떨까? 혹 누군가가 우리처럼 달리기를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지만. 여기엔 무엇보다도 최소한 두 가지가 필요하다. 하나는 월드컵 자체를 성찰적으로 읽어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것으로 인해 현실의 무대에서 추방당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새삼스레 주목해보는 것이다. 우리는 '특집'과 '연속기획'에서 이 두 가지를 담아보려 했다. 이 책이 출간되는 날, 나는 오랫동안 갖지 못했던 숙면에 빠지고 싶다. 김진호(목사/ 본지 편집위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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