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8/05/18 (16:23) from 211.209.169.199' of 211.209.169.199' | Article Number : 1657 |
올빼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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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cess : 2389 , Lines : 30 |
| 쉬볼렛, 예수, 5.18, 그리고 다시 쉬볼렛(2008.5.18하늘뜻나누기 원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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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볼렛, 예수, 5.18, 그리고 다시 쉬볼렛 길르앗 사람 입다는 여섯 해 동안 이스라엘의 사사로 있었다. 입다는 죽어서, 길르앗에 있는 한 성읍에 묻혔다. ―｢판관기｣ 12장 7절 외뿔소야,/ 너는 돌에 관해 안다,/ 너는 물에 관해 안다,/ 오너라/ 에스트레마두라의/ 목소리 들리는 곳으로/ 내 너를 데려 가리라. ―파울 첼란 <쉬볼렛> ‘쉬볼렛, 악의 평범성에 대하여’. 지난 2005년 2월 20일, 천안살림교회에서 한 저의 하늘뜻나누기 제목입니다. 그리고 오늘 저는 제목에 이 히브리 단어를 다시 사용하고 있습니다. 쉬볼렛은 ｢판관기｣에 나오는 한 학살 사건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단어입니다. 내용을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이스라엘에 아직 왕이 없던 시절, 성서가 판관(또는 사사)들의 시대라고 부르는 그 시대에 이스라엘은 지파들의 느슨한 연맹 형식으로 존속하고 있었습니다. 이 연맹의 범위는 명료하지 않지만, 에프라임을 중심으로 하고, 그 인근의 족속들이 비교적 잘 엮인 지파동맹의 범위인 것은 분명했던 것 같습니다. 바로 이 연맹의 일원인, 요르단 동편의 길르앗 족속이 지도자인 입다(Jepthah)를 중심으로 너무 강하게 결속되어 있자, 동맹의 종주국인 에프라임 지파는 이러한 권력집중 현상을 우려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이는 전쟁으로 비화됩니다. 에프라임 지파의 군대가 강을 건너 출병했다가 입다가 이끄는 길르앗군에 의해 참패당하고, 귀향하려는 패잔병들은 요르단 강 앞을 지키고 있는 입다의 병사들의 심문을 받아야 했습니다. 입다의 병사들은 강을 건너는 사람마다 ‘쉬볼렛’을 발음하게 합니다. 그리고 ‘시볼렛’이라고, 에프라임 방언 식으로 말하는 이들은 학살을 당합니다. 쉬볼렛이라는 단어의 말뜻이 무엇인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원래 의미가 어떤지, 나쁜 용례로 쓰인 것인지 여부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이 학살의 현장에서 이 단어는 죽음의 냄새가 너무 짙게 깔린 음울한 단어가 되었습니다. 여기서 저는 상상을 이어가 봅니다. 과연 이 단어는 이후 이스라엘에서 어떻게 사용되었을까? 학살자의 수를 ｢판관기｣가 4만 2천 명이라고 과장되게 말하고 있는 것을 보건대, 이스라엘은 이 단어에서 죽음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세월이 흘러, 빨리 잡아도 5백 년쯤 후대에 이 쉬볼렛/시볼렛 학살사건의 기억을 문서로 기록한 이들은 이런 문장으로 끝을 맺습니다. “길르앗 사람 입다는 여섯 해 동안 이스라엘의 사사로 있었다. 입다는 죽어서, 길르앗에 있는 한 성읍에 묻혔다.” 판관들의 이야기 끝에 넣는 전형적인 어구입니다. 이는 이 이야기가 입다의 영웅담으로 편입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후 기억의 행로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칩니다. 얼마간 세월이 흐르면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 단어에서 아무도 죽음의 냄새를 맡을 수 없게 됩니다. 아니 오히려 한 영웅의 영웅담, 자랑스런 조상의 무용담을 떠올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로부터 다시 2천 5백년 쯤 지난 1955년에 출간된 문지방에서 문지방으로(Von Schwelle zu Schwelle)라는 파울 첼란(Paul Celan)의 시집에서 ‘쉬볼렛’이 등장합니다. 이 단어가 제목인 시에서 그는 1936년 발발한 스페인 내전을 이야기합니다. 왕족과 귀족, 그리고 교회 등이 자행해온 학정에 저항한 끝에 1931년 국민투표를 통해 시민과 민중세력이 연합한 공화파가 평화적으로 정권을 잡은 뒤 다시 1936년 2월 총선에서 다시 승리하였을 때, 젊은 장군 프랑코는 군인을 책동하여 쿠데타를 일으킵니다. 그로부터 3년간 계속된 이 내전은 사망자만 1백만 명이 넘는 대재앙의 역사로 남겨지게 됩니다. 1950년대 중반, 파울 첼란은 그러니까 스페인 내란이 발발한 지 20년이 조금 못된 시기에, 아직 그 독재자가 생생하게 살아 있고, 자기에게 저항했다는 이유로 수만 명을 죽이고, 수십만 명을 구금하던 정치보복이 계속되던 시절에, 그 죽음들에 관한 기억을 되살리면서 성서의 오래된 학살의 이야기를, 성서 자신이 왜곡시켜버린 뒤, 이젠 거의 아무도 거기에서 죽음의 음울한 기조를 읽어내지 못하던 바로 그 이야기를 호출해낸 것입니다. “그들은 나를 끌고 갔다,/ 저기,/ 내 앞에서 아무런 맹세도 하지 않은/ 깃발 펄럭이는/ 시장 한가운데로” 어쩌면 시인은, 스페인 내전 당시 죽임당했던 이들을 기리는, 아직 기념관도 없던 시절의 광장에서 펼쳐지던 조촐한 행사를 참관하면서 이 시를 썼는지도 모릅니다. 그는 거기에서 “반 꺾인 깃대”에 죽은 이들을 위해 걸은 조기를 보면서, 바로 그 현장, 죽임의 현장, “에스트레마두라의/ 목소리 들리는 곳으로” 호출당합니다. 하여 시인은 “비엔나와 마드리드에서의/ 쌍둥이 같이 붉던/ 어둠을 기억하라”고 외칩니다. 그것은 죽임당한 이들의 그 소리를 대행하는 것입니다. “여기 시장 한 가운데서/ 그곳, 쉬볼렛을 외쳐라” 그가 기억하라고 외친 ‘쉬볼렛’, 이 말을 통해서 스페인 내전의 희생자가 이 시가 쓰이던 시대의 역사 속으로 호출되고, 나아가 길르앗-에프라임 전쟁의 희생자 또한 시간의 부름을 받습니다. 잊혀진 죽음의 이야기가 사람들 앞에 그 처참한 몰골을 드러냅니다. 그 가려진 이야기가, 그 봉쇄된 입이 열리게 된 것입니다. 시인은 하나의 학살 이야기를 하면서 다른 학살의 기억을 회생시킴으로써, 두 개의 학살 이야기는 서로 연결되고, 나아가 세계의 학살의 이야기들이 서로 연결되고 연대하여, 역사의 봉쇄된 목소리를 부활시키고 학살자의 만행을 상기시키는, 죽임당한 자의 기억의 정치를 펴게 되는 것입니다. 죽은 자, 죽임 당한 자의 연대는 이렇게 산 자, 승리한 자, 저 성공한 학살의 주인공을 기억의 심판대 위로 올려 보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2007년, 파울 첼란이 부활시킨 쉬볼렛은 콜롬비아 출신 여성작가인 도리스 살체도(Doris Salcedo)의 작품을 통해서 다시 역사의 학살에 관해 재의미화된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왔습니다. 영국의 테이트 모던 겔러리(Tate Modern Gallery)에 설치된 거대한 작품, 그것은 놀랍게도 미술관의 바닥을 길게 좌우로 균열을 내고 있습니다. 이 작품의 이름이 <쉬볼렛>입니다. 도대체 균열이 난 바닥과 학살은 무슨 연관이 있을까요? 내게 이 작품에 대해 이야기해준 이가 전해준 테이트 모던 갤러리는 원래 화력발전소였다가 폐쇄(1981년)된 후, 건 20년 뒤인 2000년에 갤러리로 화려하게 재건축된 전시장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곳은 꽤 흥미로운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직사각형 모양의 이 건물은 템즈 강가에 세워져 있는데, 강을 등진 쪽은 창 하나 없는 콘크리트 벽면이고, 강을 바라보는 쪽은 화려한 상가가 있고, 또 전면 유리로 되어 있어 강의 아름다운 모습이 한눈에 내려다보이게 리모델링된 것입니다. 그리고 도리스 살체도의 <쉬볼렛>은 화려하게 치장된 한 편과 견고하게 막힌 다른 한 편 사이를 가로지르면서 무려 167미터 길이의 균열을 내고 있습니다. 살체도 자신은 이 작품이 오늘 우리의 세계의 이면에 숨겨진 인종주의와 식민주의에 균열을 내고자 하는 것이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한데, 이 작품이 설치된 공간을 통해서 우리는 보다 깊은 차원의 의미를 읽어낼 수 있습니다. 강을 등진, 견고한 벽으로 막힌 이 웅장한 갤러리 뒤편에는 런던 시의 커다란 빈민가가 놓여 있다고 합니다. 미술작품을 통해 세상을 보여주고자 하는 이 미술관은, 저 흉측한 동네를 수많은 관광객의 눈에 보이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지요. 그리고 전망 좋은 다른 편엔 화려한 상가와, 환하게 열린 개방된 공간을 연출함으로써, 시선의 미학을 구축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작가는 바로 그러한 감춤과 드러냄, 누구라도 당연히 그렇게 했을 법한 저 자본주의적인 미학에 균열을 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작품을 ‘쉬볼렛’, 바로 학살의 현장을 상징하는 용어로써 이름지었습니다. 그것은, 누구라도 당연히 할 법한 그것은 바로 학살이라고. 파울 첼란의 시들을 비평가들은 ‘전율의 미학’이라고 평합니다. 그렇다면 도리스 살체도의 작품은 ‘은폐의 미학’이라고 할 법합니다. 그런데 은폐된 뒤편엔, 양차 세계대전스러운 야만적 학살 대신에, 후기자본주의 사회 식의 학살이 자행되고 있었습니다. 작가는 지구화 시대의 학살을 이렇게 증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5.18이 이제 28주년을 맞습니다. 그간 반미, 반군사독재, 나아가 비폭력 평화주의, 그리고 그러한 시민정신에 의거한 사회통합의 거점 등등, 다양한 이름 짓기와 의미부여가 계속되어 왔습니다. 이러한 5.18에 대한 기존의 기억의 방식들은 하나의 공통점을 갖습니다. 언제나 기억의 공동체로 하여금 하나로 연대하자는 메시지가 넘실거렸던 것입니다. 이 모든 기억 방식들은 한때 중요한 역할을 하기도 했고, 지금은 마치 기독교의 예수 기억처럼 말과 형식만 남은 기억 예전이 되어가는 듯이 보입니다. 그런데 5.18에 관한 지배적인 기억들은 번번이 희생자 자신에게로 돌아가려 하지 않았습니다. 이데올로기화되기 이전에, 죽임당한 이들 자신에게로, 그 잃어버린 목소리에로 돌아가려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도청을 최후까지 사수하겠다던 청년들 다수가 최하층의 빈민계층이었고, 행방불명자 가운데 다수가 그러하리라는 추정이 매우 개연성이 있습니다. 그런데 5.18의 의미부여는 그러한 배제된 이들의 시선보다는 시민계층의 시선에서 수행되었고, 시민적 가치로부터 퇴출된 이들의 죽음에 주목하지 않았습니다. 요컨대 5.18광주에서 기층대중의 이야기는 유실된 기억일 뿐입니다. 그렇기에 한국의 민주화 시대에 최악의 양극화가 초래되고 엄청난 비정규직 노동자가 양산되었으며, 제3세계 출신 이주(노동)자에게 그토록 배타적인 사회가 형성될 때까지, 광주의 기억은 전혀 개입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하여 죽임당한 자들의 기억인 성서의 쉬볼렛에서 도리스 살체도의 쉬볼렛까지 이어지는 기억의 정치적 양식을 통해 5.18을 다시 기억하는 일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올빼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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