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m Jin Ho's Theology Article Archive

2003/05/22 (10:02) from 211.245.9.185' of 211.245.9.185'	Article Number : 167
올빼미	Access : 3049 , Lines : 28

우리 내면의 악을 넘어서는 신앙의 언어, 예수의 평화('평화포럼' 강연원고)

우리 내면의 악을 넘어서는 신앙의 언어, 예수의 평화

21세기 들어 미국이 벌인 두 차례의 전쟁은 강력하게 정치 세력화한 미국의 근본주의적 기독교의 신앙관과 깊이 연루되어 있다. 선과 악이 대립하고 있는 세계에서 악을 응징하고 제거함으로써 진정한 예수의 평화를 가져올 수 있다는 믿음이 바로 그것이다. 또 이러한 미국 기독교의 영향권 아래 여전히 단단하게 붙잡혀 있는 한국 기독교 보수주의자들이 주도하여 벌인 시청 집회도 평화에 대한 이와 유사한 신앙관에 기대고 있다.
하지만 좀더 역사를 거슬러서 보자. 근대의 전쟁 가운데 기독교가 연루되지 않은 전쟁이 얼마나 될까? 나아가 서양의 기독교사와 전쟁의 역사는 얼마나 깊이 연루되어 있던가? 그리고 이러한 기독교적 전쟁의 역사는 ‘악을 제거하기 위한 신앙적 명분’이 항상 배후에 있어왔다. 요컨대 전쟁과 기독교 신앙 사이의 친화적 관계는 근본주의적 신앙 태도만이 아닌, 기독교 신앙 자체의 속성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그런데 이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전쟁을, 무기를 통한 상대방의 제압에 목적을 둔 폭력적 행동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면, 예컨대 자본주의는 ‘돈’이라는 무기로 인간에 대한 인간의 폭력적 제압을 수반하는 사회제도라고 할 수 있으며, 가부장제는 ‘성’을 매개로 하는 인간간의 폭력적 관계의 제도화이며, ‘문명화’란 인간 중심적 가치에 의한 존재의 폭력적 착취를 구조화한 제도 형성 과정이라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개념을 너무 과도하게 확장하는 것은 종종 개념화 자체를 무력화시키기도 하지만, 내가 여기서 전쟁을 타자에 대한 자기 중심의 대상화, 배제화로까지 확대하는 것은 우리의 신앙이 삶의 어느 지점에서도 면죄부를 받을 수 있는 지점을 확보하고 있지 못하다는 것을 말하기 위함이다.
여기서는 ‘지구화’globalization’라는 최근 사회적 변동의 양상만을 좀더 생각해보자. 지구화는 (집합적이든 개체적이든) 모든 행위자들의 공간 지각 양식과 공간 행위 양식의 변화를 포괄하는 경험 양식의 변동에 관한 일종의 패러다임적 개념이지만, 지구화의 최근 양상을 주도하는 것이 ‘글로벌 자본’global capital 체제와 ‘글로벌 웨펀’global weapon 체제라는 데 이견을 달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이에 관한 모든 복잡한 논의는 생략하고, 이 글에서 이러한 지구화의 양상과 관련하여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문명화 과정의 폭력성이 직접적으로 미치는 공간이 전지구적으로 확장되었으며, 그것이 거의 ‘동시적’인 경험이 되었고, 그러한 시공간적 성격은 점점 첨예화되고 있다는 점이다. 요컨대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오늘 우리에게 지구화적 경험은 ‘전지구의 전쟁터화/전장화(戰場化)’를 의미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글로벌 웨펀 체제든, 글로벌 자본 체제든, 이러한 현재의 지구화 추세에서 ‘미국’은 가장 결정적인 위치를 차지한다. 이때 ‘미국’은 국가 체제로서의 미국에 한정된다. 즉 미국 문화, 미국인, 미국의 브랜드, ... 등 미국이라는 한정어가 붙은 것 일체가 아니라, 민족국가nation state라는 제도에 한정된 미국을 현재 진행 중인 지구화의 중심축으로 본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지구화의 논리, 지구적 전장화의 논리를 나는 ‘아메리카주의’라고 명명하고자 한다.
여기서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 되는 사실은 아메리카주의라는 것이, 최근 두 차례의 전쟁에서 보이는 것처럼, 근본주의적 기독교 신앙에 채색된 이들을 제외한 거의 모든 세계인에게 파렴치한 국가 이기주의로만 나타나는 게 아니라는 사실이다. 반대로 아메리카주의는 아름다운 언어로 수놓아져 있는 제국의 공예품이기도 하다. 인류의 장밋빛 미래를 선사하는 근대화의 언어는 지구에 속한 모든 사람들 하나하나의 개인적 욕망과 얽혀 있다. 잘 살아보고픈 욕망이다, 집이나 땅을 소유하고픈 욕망이다, 아름다운 여자를, 멋진 남자를 만나고픈 욕망이다, 행복한 가정의 삶을 영위하고픈 욕망, ...이다. 모든 사람들은 각기 자기 자신의 이유를 통해 지구적 전장화에 동원되며, 지구적 전장화의 가치를 수호하는 전사가 된다. 그런 점에서 아메리카주의적 지구화는 곧 모든 이의 욕망의 언어로 번역될 수 있는 것들의 총합인 ‘팍스아메리카나’를 내포한다.
그런데 우리가 주지할 것은, 전쟁은 항상 승자와 패자를 가른다는 사실이다. 한 언론인 출신 저술가가 말한 이른바 ‘20 대 80의 사회’라는 말은 지구화를 ‘소수의 승자 대 다수의 패자’로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즉 그에 의하면 팍스아메리카나는 소수의 승자에게 주어지는 전리품이 마치 모든 이의 것인 양 이야기하는 ‘기만의 언어’라는 것이다.
한데 문제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왜냐면 전쟁이란 상대방의 것을 빼앗을 만한 대상과 벌이기 마련이고, 이 싸움은 대개 쉽게 결판나지 않기 때문이다. 패자는 물론 전쟁의 희생자가 되겠지만, 실제로 희생자의 대다수는 전쟁 당사자라기보다는 제3자인 경우가 많다. 특히 빼앗길 자원 자체를 거의 갖고 있지 못한 무력한 존재들이 전쟁의 주된 희생자인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집합체의 차원에서든(거업․국가 등) 개체의 차원에서든, 전쟁 당사자에게 동원된 경우도 있고, 혹은 그러한 동원에서 배제된 경우도 있다. 이때 동원의 대상이 되는 게 특권이 될 만큼, 동원은 적으나마 일정한 보상의 약속 아래 이루어지며, 이들의 소유 자원이 비참할 정도로 빈약하기에 그러한 약속이 효력을 갖는다.
또한 우리가 확인해 둬야 하는 사실은, 팍스아메리카나는 이미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져 있는, 즉 다수에게 공개된 기만의 언어라는 점이다. 문제는 그럼에도 왜 다수의 사람들은 이러한 팍스아메리카나에 ‘자발적’으로 설득되는가에 있다. 바로 이 점이 예수의 평화를 이야기하는 하나의 문제의식이다.
지그문트 바우만의 ‘악의 합리성’rationality of evil 개념은 바로 이에 대한 대답이다. 악이 근대의 체제 속에서 공모지점을 확보해 두고 있다는 것이다. 근대적인 욕망의 정치가 바로 그 공모의 장치인데, 그것은 자신의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 타자의 욕망을 잠식하는 것을 하나의 합리성으로 구성하는 메커니즘이다. 나는 이것을 인류 문명사 일반을 읽는 코드로 해석한다. 근대는 그러한 코드의 시공간적 차원의 근대적 확장을 보여주며, 지구화는 그것이 더욱 극단화된 것으로 이해한다. 그리하여 지구화의 특징은 전쟁의 후방 지역의 극소화 및 전방 지역의 극대화에 있다고 본다.
그런 점에서 팍스아메리카나는 악의 합리성의 근대적 버전이다. 이런 관점에서 팍스아메리카나의 논리적 연원이 1세기 지중해 지역의 지배적 이데올로기였던 ‘팍스로마나’라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로마의 황제 아우구스투스가 스페인과 갈리아 원정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돌아왔을 때 원로원은 그의 귀환을 기념하기 위해 ‘아우구스투스 평화 재단’을 설립했다. 클라우스 벵스트는 “이 제단 위에서 희생자는 연기처럼 사라져갔다”고 말한다. 평화를 기억하는 이 제의는 그 평화를 위한다는 명분 아래 희생된 이들을 망각하게 했다는 얘기다. 곧 ‘평화’ 제의는 희생자를, 그 고통과 피를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지우는 효과적인 수단이었다는 것이다. 세네카는 위대한 영웅이자 황제인 아우구스투스가 이룩한 제국적 질서의 평형 상태를 일컬어 ‘팍스로마나’라고 명명한다. 그것은 권력의 중심인 로마에 의해 시작되고 유지되며 귀결되는 평화이며, 그러한 압도적 힘에 의해 지탱되는 평화가 없다면 세상은 야만과 혼돈에 사로잡히게 될 것이라는 주장이다. 그런 점에서 팍스로마나는 평화를 위해 압도적인 우위에 있는 공공선을 대표하는 존재를 필요로 하는 평화이며, 그러한 공공선의 유일 담지자는 압도적인 힘의 담지자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팍스로마나는 진리를, 도덕적 당위를 자신과 일치시킨다.
우리는 주후 2세기 후반 일단의 교회 지도자들의 저술에서 이러한 ‘로마의 평화’를 ‘예수의 평화’, 곧 팍스크리스티Pax-Christi와 동일시하려는 시도들을 발견하게 된다. 당시가 아직 교회가 소수자로서 억압의 대상이었던 때임을 기억한다면 이러한 해석이 그다지 문제될 것은 없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로부터 불과 반세기도 못돼서 교회는 ‘새로운 주류’의 반열에 오르게 된다. 그리고 거짓말처럼 평화를 독점한 동시에 자원을 독점했던 구세력의 모습을 그대로 닮아갔다. 과거 자신들이 당했던 것처럼 소수집단 가운데 일부를 희생양삼아 박해하고 그들의 재산을 교회의 재산으로 귀속시키는 방식이 그 대표적인 사례다. 힘에 의한 평화,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평화는 이렇게 소수자의 일부를 악의 상징으로 지목했고, 그들을 표적 삼아 질서를 위배하는 이에 대해 가혹한 ‘평화의 테러’를 가했으며, 그들의 자원을 자신들이 관리하는 것이 정당하다는 논리를 제기했다. 결국 비루한 존재이던 시절 교회가 품었던 주류에의 ‘찬란한’ 꿈은 이와 같이 찬란한 시절이 왔을 때 ‘비루한’ 것이 되고 말았다. 여기서 앞서 한 말을 다시 한번, 보다 확장된 의미에서 반복하면, 전쟁과 기독교 신앙 사이의 친화적 관계는 근본주의적 신앙 태도만이 아닌, 기독교 신앙 자체의 오래된 속성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기독교 신앙에 대해 다시 근원적으로 되돌아보아야 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최근 전세계의 많은 사람들은 미국의 전쟁을 ‘추잡한 전쟁’이라고 본다. 하지만 다수의 미국인과 주류 미국 교회, 그리고 흥미롭게도 주류의 한국 교회는 미국의 전쟁을 ‘악’을 응징하는 ‘거룩한 전쟁’으로 본다. 역사는 정당성이 약한 전쟁도 대개는 많은 이들의 지지를 통해 수행되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하물며 ‘팍스로마나’, 그리고 그것의 현대적 버전인 ‘팍스아메리카나’의 이데올로기가 보다 효과적으로 작동되는 (우리가 넓은 의미에서 규정한) 많은 전쟁들은 더욱 넓은 지역에서 동원된 더욱 많은 자원병들에 의해 수행된다. 그리고 이들 다수의 사람들에게 이 전쟁은 숭고한 평화의 전쟁이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전쟁의 주체들, 그 학살자들은, (아니 우리들 자신은) 대개 결코 전쟁에 광분하는 반평화주의자라고 스스로를 생각하는 게 아니라, 자신들이야말로 가장 현실적인 평화를 추구하는 자들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이 전쟁에 동원/참전하고 있다는 것이다. 요컨대 이러한 평화주의, 곧 악을 제거함으로써 실현된다는 평화주의는 결코 낯선 것이 아니라, 모든 국가들이 추구하는 평화에 다름 아닌 것이다. 그러니 ‘가장 현실적’이라는 평가는 아주 틀린 주장은 아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평화는 반드시 학살을 동반하는 평화, 필연적으로 희생자를 낳는 평화라는 데 있다. 아니 희생자를 ‘필요로 하는 평화’라는 점이 문제의 핵심이다. 자신들은 선의 편이며 ‘절대악’ 혹은 ‘악에 포획된 자’를 응징하는 실천은 거룩하다는 신념이 이 평화의 필수 논리다. 그러기에 평화를 위한 전쟁에서 발생하는 희생은 때로는 희생자들이 적이기 때문이거나 아니면 필요한 응징을 위한 불가피한 희생이라는 생각으로 정당화된다. 요컨대 이 평화는 희생자의 시선을 무시한다. 다른 말로 하면, 거룩한 전쟁에 참전한 병사에게 희생자의 문제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그들의 고통이나 절규에 귀 기울이지 않고 전쟁은 수행된다는 것이다.
한편 기독교 신앙은 ‘악’에 대해서 가장 경직된 태도를 갖고 있다. 주변이 온통 악에 둘러싸여 있다. 바우만이 말한 ‘포위된 요새 신드롬’은 전체주의적 사회의 집단적 정체성일 뿐만 아니라, 집단주의를 정당화하는 개인들의 합리적인 자기 의식일 뿐만 아니라, 기독교인의 신앙적 정체성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이 전쟁은 존재 주변에서만 벌어지는 것이 아니다. 심지어 자기 내면이 전쟁터이기도 하다. 한국과 미국의 기독교인이 가장 애창하는 찬송가라는 <나 같은 죄인 살리신>/<어메이징 그레이스>은 내면에서 치열한 전쟁을 벌이는 기독교인의 심성적 고뇌를 안고 있다. 이렇게 내면에서까지 악에 포위된 채 요새에 갇혀 있다는 생각은 스스로를, 어떤 구체적인 피해의 경험과 관계없이 자기 자신을 ‘악의 피해자라고 생각’하면서 현실이라는 전장을 경직되게 맞이한다(세습적 피해자 의식). 그래서 이런 사고에 젖은 이들은 매일매일을 악과의 전쟁이라는 마음으로 살아가며, 그 극단의 상황에서 전쟁을, 즉 악을 소멸시키는 정의의 거룩한 전쟁을 기꺼이 수행하게 되는 것이다. 기독교 신앙은 찬송가나 성서에서 그러한 전쟁의 기억을 늘 되새기는 과정에서 형성되고 강화되며, 그것은 악을 정복해 가는 과정으로 삶을 해석하는 군사주의적 가치를 자신의 몸에 새기는 과정에 다름 아닌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신앙 속에서 희생자(의 고통과 절규)는 망각된다.
이때 우리가 주지해야 하는 것은 이러한 전쟁을 통한 평화라는 신념/신앙은 결코 져서는 안 되는 게임이라는 점이다. 그런 점에서 신앙은 끊임없이 현실의 강자와 타협하며, 국가 권력 나아가 전지구적 권력과 타협하는 선택을 하게 된다. 그런 맥락에서 신앙도 국가 권력을 악의 징벌자로서 정당화하며, 지구적 권력 또한 그러한 방식으로 정당화하는 기재로서 작동하는 종교 장치라는 것이다. 요컨대 이러한 평화를 의미하는 신앙은 ‘힘의 미학’을 숭배하는 신앙인 것이다.
신이 전능자라는 인식은, 신이 할 수 없는 게 없으며 그 압도적 힘으로 악을 제거할 것이라는 인식은 바로 이러한 평화주의와 맞닿아 있다. 왜냐면 신은 물론 정의의 편일 것이기 때문이며, 또 필연적으로 승리할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패배하는 신’이란 생각할 수 없는 불경이다.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라고 물었던 나다나엘은, ｢요한복음｣에 의하면 “참된 이스라엘 사람”, 즉 ‘율법에 충실히 사는 경건한 사람’이다. 그것은 그의 생각이 가장 ‘유대인다운’ 모습을 보여준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예수는 유대인의 모범적인 사고방식에 의하면 결코 메시아일 수 없는 자였다. 그래서 아비의 피가 섞이지 않은 자식이라고 하면서도 애써 다윗의 족보 속에 그를 넣으려 했던 넌센스가 필요하기도 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는 메시아다운 명예 없이 태어났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신의 패배’의 전조였다. 한편 복음서들의 예수의 마지막에 관한 묘사를 보면 그는 신의 철저한 침묵 속에 죽어갔다. 그가 그토록 축복을 베풀었던 대중도 외면했고, 목숨을 다해 함께 하겠다던 제자들도 외면했다. 그리고 신마저도 그를 위한 아무런 행동을 하지 않는 가운데서, 그 흔한 미래의 약속조차 없이 그는 최후를 맞이해야 했다. 악과의 전쟁에서 신은 무력했고 결국 패배했다. 부활은 ‘신의 패배’라는 소재를 반전시키지 않는다. 예수가 부활했음에도 여전히 세상은 악이 지배하고 있고, 모든 것이 악에 물들어 있다. 요컨대 부활은 승리의 노래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신의 패배에도 불구하고, 아니 바로 그 패배 때문에 신이 사람들의 가슴속에 간직되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야기를 앞으로 돌려 예수의 예루살렘을 향한 도정을 떠올려보자. ｢마가복음｣은 예수의 예루살렘으로의 행보에 제자들이 한편으로는 기대에 부픈 모습과 다른 한편으로 두려워하는 이중적 태도를 취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하느님 나라의 도래가 임박했다는 것을 설파하고 다녔던 그동안의 활동이 이제 막바지에 접어들었다는 것을 시사한다. 제자들은 이제 뭔가 결정적인 일이 벌어질 것을 직감했던 것이다. 예수가 진정 메시아였다면 그들은 더 이상 그 비루하기 짝이 없는 어부나 세리 따위가 아니라 한 순간에 신이 다스리는 나라의 주체가 될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그들에겐 더 없이 처절한 저주만이 돌아올 터... 이런 갈등은 제자들이 유대인인 한 어렸을 적부터 체득해왔던 메시아 인식에 따른 자연스런 귀결이며, 그렇기에 예수를 따라다니는 동안 줄곧 그들의 뇌리 속에 떠나지 않고 남아 있던 동요의 흔적이었다. 그래서 모든 것이 명명백백 판명되는 순간은 기대되면서도 두려운 것이었다. 한데 이제 그것이 더 이상 유보될 수 없는 지경에 도달한 것이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마가복음｣에 의하면, 예수는 그런 제자들의 기대를 여지없이 무너뜨린다. ‘어린 아이가 내게 오는 것을 막지 말라’, ‘하느님의 나라는 보잘것없는 이들 가운데 가장 보잘것없는 존재인 아이들의 것이다’, ‘우리 조직의 일원이 아니더라도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모두 우리의 동료다’, ‘첫째가 되려는 이는 꼴찌가 되어 모든 이를 섬겨야 한다’ 등의 말이 이 대목에 집중되어 나타나고 있다. 승자의 기대감에 부픈 이들에게 패자의 태도를 요구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의 평화에 대한 태도를 읽을 수 있다. 예수는 ‘승리-정의, 패배-악’이라는 인식론적 논리틀이 무너지는 곳에서 평화의 도래를 이야기하는 것이다. 다가와 겐조(田川健三)가 말한 ‘역설적 반항’이라는 말은 그것을 더 없이 잘 묘사하는 개념이다. ‘승리-정의, 패배-악’이라는 논리틀이 ‘옳음 대(vs) 그름’의 이항대립적 틀 속에서 그름을 제거하는 과정으로 전쟁을 이야기하고, 그름을 상징하는 세력이 패배하고 배제되는 곳에서 평화를 이야기한다면, 예수는 ‘옳고 그름’의 틀 자체가 해체되는 곳을 염원하면서 평화를 말하고 있다. 옳고 그름의 인식틀은 무수한 죄인을 만들어내고 죄인에게 가혹한 세계의 질서를 구축하였다. 혁명은 그러한 질서를 전도시키는 사건이다. 즉 그름이 옳음이 되고 옳음이 그름이 되는 세상이 혁명인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매우 다른 것 같지만 또한 같은 것이기도 하다. 여전히 한 편은 옳고 다른 한 편은 그르다는 것이다. 한 편은 많은 것을 얻고 다른 편은 많은 것을 잃는 체제다.
한나 아렌트가 옮음이라는 자의식에 과도하게 무장한 이들이 혁명적 질서의 구축을 위한다는 ‘대의’를 위해 희생에 무딘 감각을 갖게 된 ‘감정의 과도함’을 비판한 것이나, 바우만이 혁명의 주체 혹은 혁명의 대상적 주체(민중 혹은 프롤레타리아)로 동일시된 피해자가 가해-피해에 관한 과거의 기억을 전유하고, 자신의 기억만을 절대화하여(‘기억의 신성화’) 그 기억에 의거한 새로운 질서를 구축하려는 혁명의 상상력은 악의 새로운 합리성에 다름 아니라고 문제제기한 것은 바로 위와 같은 ‘예수의 평화’와 유사한 비판적 인식을 보여준다. 예수는, 자신이 설파한 하느님 나라가 도래했을 때 그 나라의 축복을 받을 것이라고 당연하게 여기는 이들, 즉 예수의 기억을 독점하면서 새로운 주체가 되기를 열망하는 자신의 측근 제자들을 향하여 (얻은 자의 심성이 아닌) 잃은 자들의 심성을 요청하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예수의 평화, ‘팍스크리스티’라는 주장이다.
예수는 악이 우리 밖의 아무개에게 부여된 저주의 징표가 아니라 바로 우리 안의 일상 속에 도사리고 있음을 보여줌으로써, 우리가 ‘정의의 사도’라는 인식을 해체하고자 했다. 그렇다면 정의를 위한 전쟁이란 아무런 명분이 없어진다. 악을 징벌한다는 평화관, 아니 그 전쟁관은 일상 속에서 증오심을 양산했으며 전장이라는 비일상의 상황에서 잔인무도한 학살의 신념/신앙적 배후가 되었고, 일상과 비일상의 경계가 급속히 사라져가는 지구화 시대에 사람들의 평범한 실천 속에서 벌어지는 폭력과 학살을 정당화하는 이념적/종교적 장치가 되고 있다. 이것은 우리 밖의 악을 제거하겠다는 주장 자체가 우리 내면의 악을 은폐하는 것, 즉 타자에 가해를 가하면서도 자신의 가해성을 인식하지 못하는 태도, 자신이 자발적으로 동원됨으로써 공모된 체제의 악에 대해 몰인식하게 하는 악의 평범화적 태도와 연관되었다면, 예수는 이러한 내면의 악과 우리를 직면하게 함으로써 악의 평범화를 해체하고자 했던 것이다. 예수의 평화의 실천은 이러한 내면의 악과의 투쟁을 통해서 선-악의 이분법적 인식틀을 넘어서는 세계를 향하고 있다. 그리하여 예수의 평화는 힘 숭배 신앙과의 대결이며, 비루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아름답다고 얘기해온 카인의 후예들의 패권주의적 인식의 질서에 대한 투쟁이고, 그러한 질서를 넘어서는 상상력에 기초한 세계의 제도화를 향한 도정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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