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m Jin Ho's Theology Article Archi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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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1/13 (14:40) from 112.145.248.24' of 112.145.248.24' Article Number : 1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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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호의 신들의 사회2]지구화 시대 신들은 귀환하고 있다
지구화 시대 신들은 귀환하고 있다

<한겨레21> 831호(2010 10 18)




영혼도 바꿔라!

첫 경험의 황홀함은 오래 가지 않았다. 국가(문민정부)가 나서서 퍼뜨린 지구화(또는 세계화)의 장밋빛 꿈, 그토록 화사했던 장미 다발이 한갓 조화(彫花)였다는 사실이 들통나버린 뒤, 사람들은 지구적 자본의 시간 속으로 난폭하게 빨려 들어갔다.
IMF(국제통화기금)의 통제 아래서 기업구조조정의 혹독함만큼이나, 아니 그 이상의 뼈저린 ‘생각의 구조조정’이 시작되었다. 재생산되지 않는 일체의 것은 나태한 것, 불필요한 것, 잘라 버려야 할 것이 되었다. 영혼의 절개수술이 시작되었고, 그렇게 구조조정 되지 않은 영혼들, ‘불필요한 것들’이 여전히 악성종양처럼 덕지덕지 붙은 영혼들은 지구적 시간의 장에서 퇴출대상 1순위다. 국내 최고의 재벌그룹 총수이자 세계적 기업의 사실상의 소유자인 이건희는 지구화 시대를 적극적으로 이끌어갈 신경영의 원칙을 이렇게 말했다. “마누라와 자식 빼고는 다 바꿔라.”

영혼 없는 몸들

고스트 인 더 쉘(Ghost in the Shell). 애니메이션 영화의 전설이 된 <공각기동대(攻殻機動隊)>의 영어제목이다. 여기엔 ‘몸 없는 영혼’, 혹은 이 몸 저 몸을 옮겨 다니는, 몸이라면 구석구석까지 ‘다 바꿀 수 있는’ 새로운 존재가 사건을 추동한다. 한데 지구화 시대 한국은 빠른 속도로 ‘영혼 없는 몸’의 존재에 관한 신화가 담론권력을 획득하고 있다. 재생산에 유리한 갖가지 생각의 기술들, 그 타인의 품성들로 자기 영혼을 끊임없이 쇄신할 수 있는 자, 그이가 지구화 시대의 승자가 된다는 얘기들이 전설상의 무용담처럼 세간을 떠돌고 있다.
하여, 최근 한국사회의 개신교가 퇴조하고 있다는 것에 관하여 분석하였던 지난 호의 이야기처럼, ‘근대의 신’은 자기의 자리를 내주어야 했다. (개신교의 신관에 나타나는) 배타적 정체성을 강조하는 신, 그 붙박이 신이 거주했던 영혼은 청산의 대상이 되고 있다. 퇴거를 명령받은 신은 존재에게 말을 걸 수 없다. 침묵하는 신, 그런 신은 많은 사람들의 영혼에서 죽었다.
그런데 이것이 전부가 아니다. 너무 빠르게 사회가 바뀌고 있다. 빠른 것에 어지간히 이골이 난 자들이 살고 있는 사회인데도, 사람들은 그 속도에 현기증을 느낀다. 사회뿐 아니라 사람들의 영혼도 초고속 변모 중이다. 한데 아직 그 경로는 예측불가다. 어떤 형식의 제도화도 안착되지 못한 채 한도 끝도 없이 바뀌고 있다. 그러니 실상 영혼의 쇄신을 위해 전력을 다 한다 해도 안전하지 않다. 언제 어떻게 불행이 닥칠지 예측할 수 없다. 단지 신경영전략 묵시록의 ‘바뀌어야 산다’는 가르침대로 무턱대고 달리고 달릴 뿐.
이렇게 빠른 변화를 위해 영혼 속 붙박이들을 제거해야 살아남을 거라는 사회에서 많은 사람들은 ‘난 데 없는’ 재앙을 맞닥뜨렸다. 예측할 수도, 통제할 수도 없이 재앙은 닥쳐왔다. 이런 ‘무차별 리스크의 사회’에서 재앙을 혹은 그런 예감을 겪으며 사는 이들은 다시 종교를 찾는다. 존재에게 말을 걸고 위안을 주는 신이 필요하다. 신들이 귀환하고 있는 것이다.

신 재림의 자리 - 한국적 시민종교

괴로움을 견뎌내고 싶을 때 사람들은 ‘종교적’이 된다. 특히 괴로움을 회피할 수단을 스스로 발견할 수 없을 때 그렇다. 하여 사회의 불안정성이 높아서 재앙이 언제 닥쳐올지, 어떻게 회피할 수 있을지 예측 가능하지 않을 때 사회의 종교적 성향은 급상승한다. 계산 가능성이 무망한 상황에서 감성적 열정이 현실을 감내하는 주된 동력이 된다. 이 감성적 열정은 집단의 결속력을 극대화하여 공동의 행동을 조직하는 핵심동력이다. 이 집단은 각자 자기 식의 해석을 열렬하게 시도하지만 그 해석들이 소통하면서 공동체를 결속시키고 행동을 조직하는 게 아니라 열광적인 감성적 공조가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지성적 소통은 없고 감성적 공조가 넘치는 현상, 그것이 바로 이 글이 말하는 ‘종교적’이라는 것의 핵심이다.  
사람들은 종교적인데 마땅히 찾아갈 종교가 없다. 한국적 근대를 가장 잘 체현한 종교였던 개신교는 이웃과 삶을 나누는 것을 싫어하는, 고강도의 배타주의적 신을 섬긴다. 심지어 이웃을 공격하고 자기의 분신으로 만들어야만 존재감을 느끼는 신의 종교다. 한편 최근에는 가톨릭과 불교에서도 개신교 따라하기의 분위기가 역력하다.
한데 지구화 시대의 신경영전략은, 그 ‘영혼의 시장화’는 자기 자신에 관한 확고부동한 정체성까지도 바꾸라고 한다. 자기를 비우고 타인의 생각으로 채우라는 것이다. 그렇게 해야 타인의 취향에 다가갈 수 있다고, 하여 그이의 소비를 최대한 활성화시킬 수 있다고 말이다. 배타적 신, 그 확고부동함이 성공의 인식론적 전제였던 때가 있었지만, 이제는 그 생각이 청산되어야 자기 자신도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영혼의 시장화는 배타주의적 정체성을 수술대 위에 올려놓고 절개하고자 한다. 한데 여기에는 단서(但書) 가 붙는다. 사람들은 자기 정체성에 대한 존재의 구조조정을 수행할 때 영혼의 시장화가 그 주된 이유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배타주의는 ‘나쁜 품성’이기 때문이라는 인문학적 비판이 곁들여진다.
그럼에도 지배적인 종교들은 여전히 배타주의적 신을 숭배한다. 이 시대착오성 탓에 종교적인 사람들이 찾아갈 종교가 없는 현상이 벌어진다. 그리고 이럴 때 신앙의 대안을 향한 다양한 시도들이 활발해진다.

시민종교의 발견 - 촛불 의례

2002년 6월, 미군 장갑차가 두 명의 여중생을 압사시킨 사건에 대해 규탄하는 촛불시위가 그해 11월 이후 수차례에 걸쳐 전국적으로 벌어졌다. 이후 ‘촛불’은 광범위한 대중시위의 의례양식으로 정착되었다. 특히 2008년 광우병 촛불집회는 그 절정을 보여준다.
2002년 깃발논쟁에서 발단이 된, 이른바 운동권이 주도한 시위에 대한 청산 담론은 2008년에 이르면 거의 일반화되었다. 이것은 한국 민주화운동의 저항의 인적 정신적 유산에 대한 거부를 포함한다. 특히 1980년대 민주화운동은 과학주의적 열정이, 즉 강한 지성주의가 바탕에 깔려 있다. 한데 최근의 촛불집회들은 지성보다는 감성적 열정을 중심으로 통합된 집합행동이다. 무수한 해석들이 나와 때로는 격렬하게 논쟁을 하고 있지만, 그 해석들이 사람들을 결속시킨 것이 아니라 분노가 그것을 가능하게 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수십만의 대중을 한데 결속시킨 그 불같은 분노는 여간해선 한정된 시공간의 경계를 넘어서지 않는다는 점이다. 서로 암묵적으로 약속된 시간에만 분노하고 그 이후에는 차분한 일상으로 돌아간다. 또 그 공간에서 해산할 때는 자신의 분노의 흔적들을 청소하기까지 한다. 마치 열정이 분출하는 광적인 예배를 마치고, 언제 그랬냐는 듯 편안한 표정으로 일상으로 복귀하는 이의 모습처럼 말이다.
그렇다면 그 분노의 정체는 무엇일까? 분명 미군 장갑차 사건이나 광우병소 수입 같은 사안들은 분노할만하다. 하지만 그것은 표면적 계기들이다. 부조리하다고 판단하는 사안들이 있다고 그것이 곧바로 집단행동으로 옮겨지는 것은 아니다.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중간단계의 장치들이 필요하다. 가령 넷 공간에서 짧은 시간에 압축적이고 다층적으로 벌어진 강렬한 토론은 공분을 집단행동으로 점화시키는 매개역할을 한다. 하지만 더 깊은 차원에서 사회적인 사안들에 공적 분노를 표출하도록 ‘스탠바이’(stand by)된 영혼의 상태(동기화된[mobilizational] 마음상태)가 있기에 더욱 가능하다.
이런 관점에서 나의 해석을 얘기하자면, 이 공적 분노의 정체는 지구화 시대 그 광속의 변화가 지난 시절 영혼을 채웠던 진리들, 신들, 그 절대적인 것들을 해체해 버린 것과 관련이 있다. 삶은 깊은 수렁에 빠지듯 헤어 나올 수 없는 고도의 리스크 사회의 늪으로 내던져졌는데, 그 위기를 견뎌낼 논리적인 내적 자기 준거가 사라진 것이다. 요컨대 사람들의 마음의 상태는 존재론적 위기(ontological crisis) 상황에 놓여 있다. 하여 지금 겪고 있는 고통의 질이 지난 시대의 그것보다 더 크기 때문이 아니라 고통을 견디는 내적 해석체계의 부재가 다른 시대의 사람들보다 고통을 더 심각하게 체감하게 한다. 한데 고통은 종종 분노로 표현된다. 화를 폭발할 대상이 필요하다. 그런데 공적인 분노의 대상이 보인다. 개별적으로 화를 내는 것이 아니라 집단적으로 공분할 대상이 생긴 것이다. 하여 사적인 마음 상태는 종종 공적 분노로, 그것을 행동화하는 내적 동력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내가 ‘한국의 시민종교’라고 부르는 현상은 바로 이러한 상황에서 사람들이 자기의 분노를 표현하는 공공적 출구를 찾아냈다는 것을 의미한다. 지구화 시대 종교의 위기에 대해 대안적 신앙을 발견하려는 시도들 가운데 하나는, 종교제도들 밖, 시민사회의 영역에서 일어난 종교현상, 곧 시민종교라는 것이다.
이 시대에 사람들 각자의 삶은 고통에 휩싸여 버렸다. 그것은 예측되지도 해석되지도 못한 채 사람들의 삶을 파멸의 위기로 내몰았다. 이 정체 모를 위기 앞에 분노가 치민다. 하지만 도대체 어디를 향해, 누구에게 분노하란 말인가? 바로 이때 사회적, 국가적 스캔들이 발생했다. 시민들의 사적인 분노를 결속시키고 공적인 분노로 전이시킬 만한 사건이다.  
그런데 그 전이를 해석할 확고부동한 진리체계, 혹은 그런 신탁을 내린 절대적 신은 영혼의 자리에서 퇴거당하고 있다. 해서 사람들은 공적 분노를 표출해야 하지만 하나의 진리 내용 혹은 한 분인 신의 신탁에 따라 결속할 수 없다. 하여 무수한 해석들이 서로 논쟁한다. 그런데 해석은 달라도 그들을 하나로 묶어 행동하게 하는 경우가 있다. 종교적 의례가 그런 경우다. 의례는 생각을 합체시키는데 효과적이지는 않지만 행동을 공유하게 하는 감정의 합체를 낳는 장치다. 그런 상황에서 우연히 발견한 것이 촛불시위, 아니 ‘촛불의례’다. 그리스도인들이 열정적인 예배를 드리듯 사람들은 열정적인 촛불의례에 참여함으로써 사적 분노들을 공적 분노로 모우고 집합적으로 소비할 시공간적 장소를 발견한 것이다. 한국의 시민종교는 이렇게 발명되었다.

그런 ‘종교성’이 잃어버린 것
 
내가 보고 있는 것이 타당하다면, 최근 발명된 한국의 시민종교는 지구화 시대 사람들의 영적, 존재론적 혼란을 감당하는 밑거름이 되고 있다. 내적 준거가 부재하면 더 심각하게 체감되는 고통을 감당하기 위해 사람들은 극단적 행동을 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가령, 혁명에 참여하거나 자살을 하거나. 반면 종교의례는 혁명이든 자살이든, 그런 극단적 행위를 실제가 아니라 상징적으로 수행한다. 해서 시민종교는 사람들 개개인의 분노를 충분히 담아내되 그 위험부담을 최소화한다.
하지만 그리스도교의 예배가 그랬던 것처럼, 감성이 과하게 넘치는 종교적인 집단적 소비는 지적인 사유를 최면시키야만 효력을 발생시키는 신앙 양식이다. 해석이 과하게 넘치는 사회가 문제이듯 감정적 공조가 지나치면 그런 종교는 이벤트가 난무하는 사회, 성찰이 결핍된 사회로 우리를 몰아갈 수 있다. 제도종교 내에서 벌어지는 신앙의 이벤트화도 그렇지만, 제도종교 밖에서 벌어지는 시민종교적 현상도 이벤트적 감응에 더 익숙한 사람을 만든다. 최근 국가나 지자체장들을 비롯해서 여든 야든 정치엘리트들은 경쟁하듯 이벤트 정치에 몰두하고 있다. 시각적 미디어의 첨단화의 부작용이겠다. 한데 한국의 시민종교는 이런 양상을 성찰하는 시민적 능력을 강화시키지 못하고 있다.  
지적 토론은 합의의 미덕으로 이어지는 생각 나눔의 도구다. 또 감성적 공조는 포용의 미덕으로 이어지는 마음 나눔의 도구다. 해서 이 두 요소가 잘 합류한 시민종교 혹은 시민사회가 우리가 지향해야할 미래비전이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지금 우리의 시민종교는 그런 비전을 가로막고 있다.
지난 번 실린 글과 이 글을 서론으로 하는 이 연재는 지구화 시대를 맞아 근대적 신이 퇴거하고 그 자리에 새로운 신들이 도래하고 있는 한국적 시민종교의 등장을 말하면서, 우리 사회의 성찰적 발전을 가로막는 왜곡된 종교성의 요소를 분석적으로 이해하려는 데 초점이 있다. 그런 시민종교가 형성되기까지 과거 이력을 돌아보고 현재의 양상과 추이를 살피는 데 9편의 글이 이어질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가능성의 징후들을 2회에 걸쳐 이야기함으로써 총 12회에 걸친 연재를 마치고자 한다. □ (김진호_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연구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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