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m Jin Ho's Theology Article Archi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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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1/13 (14:43) from 112.145.248.24' of 112.145.248.24' Article Number : 1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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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호의 신들의 사회3] 근대적 신의 발견_‘식민제국의 영’이 된 신
근대적 신의 발견_‘식민제국의 영’이 된 신

<한겨레21> 834호(2010 11 08)


찰머스 존슨은 미국을 ‘로마제국의 재현’이라고 말하며, 그것은 군사기지에 의존하는 저급한 군국주의에 지나지 않다고 비판한다. 리차드 호슬리는 그럼에도 ‘새로운 로마’인 미국이 그 악마적 생명력을 지속하는 이유는 식민지적 종교가 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이것은 미군 주둔지가 외적 군사기지로서만이 아니라 종교적 심성 내면에 설치된 신성기지로서 존속하고 있기 때문이다.
필경 이런 내면의 신성기지가 전 세계에서 가장 활발한 곳은 한국의 개신교일 것이다.  

미국보다 미국적인 종교, 한국개신교

2003년 1월, 기독교도들이 시청광장에서 대대적인 친미 집회를 열고 있었다. 반미시위가 연일 계속되었고 주한미군 철수 문제가 크게 여론의 탄력을 받고 있던 때였다. 그는 심하게 갈라지는 허스키한 목소리로 우렁차게 소리를 내질렀다. 영어였다. 10만(주최측이 추산)의 군중 앞에서 한 기도인데 말이다. 사람들은 어느 대목에서 ‘아멘’하는 추임새를 넣어야 할지 당황했다. 하지만 그의 관심은 군중이 아니라 백악관이었고, 그 집무실에서 있었다는 기도회와 함께 한 신, 아마도 미국 국적의 ‘그 신’에 있었을 것이다.
분자생물학자인 최재천은 찰스 다윈 탄생 200주년을 기리는 한 인터뷰에서, 한국인에게 다윈이 그다지 중요한 인물로 기억되지 않는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동경대학의 사쿠라 오사무 교수의 한중일 삼국의 진화론 수용에 관한 논문을 소개했다. 이에 따르면 동아시아 삼국 가운데 유독 한국인만이 다윈을 경시하였는데, 그 이유는 기독교(개신교)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한국의 미국주의가 미국에서도 가장 보수적인 기독교 우파의 세계관을 추종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 글은 바로 이러한 한국개신교의 미국주의가 어떻게 정착하고 발전해왔는지를, 그 뿌리체험을 중심으로 살피는 데 초점이 있다.

미국주의 종교의 탄생

1893년에서 1983년까지 한국에 파송된 개신교 선교사는 거의 90%가 미국인이고, 그 대부분은 미국에서도 가장 극단적인 근본주의적 신앙을 가진 자들이었다. 한편 이들 개신교 선교사들은 선교지 분할 협정을 맺었는데, 이중 미국 선교부들에 할당된 영토는 조선 국토의 71%였다. 한편 신자수는 평안도와 황해도를 포함한 서북지역이 전체의 80%를 점했다. 특히 평안도 지역은 가장 활발한 개신교의 아성이었다. 그런데 주목할 것은 이 지역은 미국인 선교사들의 영향력이 가장 막강했고, 이들의 활약으로 조선 전역에서 선교사들의 헤게모니가 확고부동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그것은 1907년의 이른바 ‘평양대부흥운동’의 효과다. 이제까지 대부분의 연구는 이 사건을 1904년에 발발한 러일전쟁과 관련해서 해석하지 않았다. 하지만 일본군의 진군루트에 있던 평안도 지역에서 군대폭력을 피해 많은 이들이 교회로 유입해 들어오게 되는 것이 이 부흥운동의 전사(前史)였음은 의심의 여지없다.
그보다 10년 전에 청일전쟁의 주요 전투지였기에 그 학살의 기억을 잊을 수 없던 이곳 사람들은 일본군에 대한 깊은 공포심을 갖고 있었다. 또한 진군하는 군대의 폭력 또한 무자비했다. 종군기자들의 기사에 따르면, 평안도의 1월, 그 살 속을 파고드는 추위에도 사람들은 마을을 비우고 산으로 도주했다. 다행히 교회가 있으면 사람들은 그곳으로 몰려 들어갔다. 미국인 선교사들이 진치고 있던 곳을 일본군이 함부로 유린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교회는 갑자기 사람으로 들끓게 되었다. 선교사들과 교회 지도자들은 당황했다. 그들은 준비가 되어 있지 못했다. 더욱이 두 차례의 전쟁으로 사람들의 마음은 강퍅해 있었다. 그들 간에 서로 다투는 일이 비일비재했고, 남의 것을 빼앗기도 하고, 이웃에게 폭행을 휘두르기도 했다. 심지어는 살인도 종종 일어났고, 가정폭력은 예사였다.
이때 지도자들의 행동은 전쟁을 해석하고 그 고통을 이해하려는 노력보다는 골방으로 들어가 기도하는 것이었다. 당혹스럽고 난감한 만큼 기도는 절절했겠다. 그리고 뜻밖에도 기도 중에 영의 체험이 있었다. 지도자들은 흥분했고 열정에 휩싸였다. 그리고 곧 이 신령스런 집회에 교회 전체가 열광하게 되었다.
공동체는 순식간에 ‘잘’ 통합되었고, 지도자들은 강한 윤리적 강령으로 공동체의 도덕재무장을 요구했다. 그것은 남과 다투지도 남의 것을 욕심내지도 남에게 폭력을 휘두르지도 않아야 하는 것뿐 아니라, 전통의 관행을 증오하고 척결하는 것을 포함했다. 곧 이들의 강력한 도덕재무장 운동은 매우 배타적인 종교적 사회적 태도를 포함했다.
이 소식은 빠르게 퍼져나갔고, 그러한 운동방식과 신념의 기조 또한 전국화되었다. 이제 서북기독교의 독특한 체험은 지역과 교파를 불문하고 전 조선의 신앙을 특성화시키는 일반화된 원체험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이에 대해 하나 더 언급하면, 이 사건 이후 서북의 선교사들은 신학교육의 내용과 형식, 그리고 목사임용에 관한 일체의 권력을 장악했다는 점이다. 요컨대 평양대부흥운동은 조선기독교의 원체험이 되었고, 배타주의적 신앙관을 제도화할 정신적 물리적 자원을 선교사들이 장악하게 하는 직접적인 계기였다.

근대적 신앙은 이렇게 만들어졌다_문명론과 제국주의, 그리고 선망

미국의 선교 역사에 관한 최근의 수정주의적 연구에 의하면 미국의 국제정치적 정책 형성에서 선교사들의 역할은 대단히 중요했다. 특히 그들이 보내온 정보는 그 지역에 대한 미국 시민사회의 일반적 이미지를 형성하는 데 결정적이었고, 또한 정치지도자들의 정책자료로서도 매우 적극적으로 활용되었다. 하여 편견에 기초한 근본주의자들의 순진한 정보는 제국의 국제정치의 수단이 되었고, 그 사이에 ‘여론’이라는 도구화된 담론의 장치가 작동함으로써 미국의 시민사회가 제국주의의 공모자가 되었다는 관점이다.
한데 한국에 파송된 미국 선교사들의 각종 문건들에서 엿보이는 조선인들에 대한 이미지는 동아시아 3국 가운데 가장 부정적이다. 게으르고 불결하고 부정직하고 부패한 족속 ......, 대충 이렇다. 해서 그들은 조선인은 스스로는 근대화하는 것이 불가능하고, 타국의 힘에 의해서만 개화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러한 편견은 그들의 목회관에 그대로 관철되었고, 그것이 토착문화에 대한 배타적 태도의 기반이 되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한편 선교사들은 수많은 교육기관을 운영했다. 1910년의 통계에 따르면 당시 인가된 학교의 35%가 미션스쿨이었다. 더욱이 이 학교들은 학생 수가 많았고 시설이 훌륭했다. 또 가장 체계적인 커리큘럼을 갖고 있었고 교사의 질도 높았다.
그렇지만 동시에 이곳에서도 선교사들의 문명주의적 편견의 효과는 여실히 드러났다. 1920년대의 한 연구에 따르면 미션스쿨의 조선인 청년들은 미국인을 닮는 것과 근대화하는 것, 그리고 복음화하는 것을 동일시하였다. 조선의 역사나 문화, 그리고 식민지로부터의 독립은 부차적인 관심거리로 전락하거나 관심 영역 밖으로 퇴출되었다. 심지어 음악, 의복, 음식, 나아가 가옥의 양식 등에서 백인 따라하기는 기독교 복음의 일부처럼 여겨졌다. 이렇게 백인 우월주의적 신앙과 교육은 조선인 기독교도의 내면성을 형성하는 데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조선인으로서의 열패감과 서양인과 서양문화에 대한 선망이 뿌리 깊게 인식의 한 자리에 터 잡은 것이다.
한데 이러한 기독교 신자들이 대거 식민지 조선사회의 엘리트로 등장했고 그들을 통해 근대주의적 계몽운동이 활발해졌다. 이들은 일본 유학파 출신의 진보적 지식인들이나 좌파 지식인들과 함께 식민지 조선의 대중사회를 이끌었고, 해방 이후에는 가장 막강한 지배계층으로 자리잡는다. 해방직후까지도 기독교인구는 고작 전 인구의 3%를 넘지 않았음에도, 이들의 담론화 능력은 점차 한국인의 근대주의적 심성을 지배했다.

한국적 근대의 제도화는 근대적 신앙과 이렇게 결합되었다

일본 식민제국은 몰락했지만 조선의 독립은 유보되었다. 미국은 조선의 자립능력을 의심했고, 앞서 말한 것처럼 기독교 선교사들의 조선에 대한 이해는 그러한 의심의 토대가 되었다.
강인철에 의하면 군정기와 제1공화국 시절, 법과 제도가 매우 미비했던 상황에서 일제 식민지 당국이 버려둔 사회적 자원은 대량으로 교회와 기독교계 지도자들에게 공여되었다. 또한 미국 본국에서 송달된 막대한 후원금이 교회로 몰려들어왔다. 미션스쿨은 더 늘었고 더 견고해졌다. 특히 개신교계 대학이 설립되면서 엘리트 충원 능력이 비약적으로 향상되었다. 각 교단의 재산이 엄청나게 불어났고, 얼마 안 가 교단신학교들이 속속 설립되었다. 개신교 목회자들을 위한 고등교육 수준은 다른 종단의 그것을 압도했고, 일반 교육기관의 수준에 비해서도 매우 높은 편에 속했다. 나아가 기독교계 신문, 잡지들도 대거 창간되었다. 또한 기독교 기관이 아님에도, 정계, 법조계, 언론계, 교육계의 요직을 차지한 기독교도의 수는 매우 많아, 거의 20~30%에 달했다. 전체 인구의 5%도 안 되는 종교에서 말이다.
이렇게 한국의 자주적 근대국가가 출현하던 시기 한국의 개신교는 그 과정에 가장 깊게 개입되어 있던 사회세력에 속하고, 또한 그만큼 커다란 특혜를 독차지한 집단이다. 국가제도의 차원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라, 사회적이고 문화적인 근대의 출현에서도 기독교는 중요한 위치를 점했다. 특히 한국적 근대가 민족의 열패감과 미국주의를 내면화하는 문명화의 결합을 통해 구현되었다는 점에서 기독교는 한국적 근대를 상징하는 종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근대적 신앙의 영, 식민주의적으로 도구화되었다

그런데 한국적 근대주의와 개신교 신앙에 관한 논의에서 간과해서는 안 되는 것이 있다. 그것은 특히 다음에서 다룰 반공주의와 발전주의적 종교에 대한 이야기에서 해석의 중요한 실마리 역할을 할 것이다. 그것은 바로 ‘영’이라는 신앙 요소다.
‘영’은 ‘몸의 해체’와 관련된 종교적 체험을 반영한다. 1세기 지중해 지역의 예수파들 사이에서 영은 그런 존재로 등장했다. 어떤 엘리트의 몸도, 어떤 화려한 건축물도, 어떤 강력한 제국도 독점할 수 없는, 생김새도 성향도 알 수 없는 미지의 존재, 그리고 그 종교적 효과를 함축하는 표현이었다. 해서 영은 종종 그 시대의 위대한 몸들에서 배제된 이들의 활기 넘치는 운동으로 나타났다.
하여 제도화된 종교로서의 기독교에서 이 ‘영의 관리’는 매우 중요한 지도자의 덕목이었다. 이제 영은 체험되는 것이 아니라 해석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해석의 왕이 영을 독점하는 결과를 낳았다. 하지만 그럴수록 영은 다른 엉뚱한 곳에서 출몰해서 그 특유의 에너지 넘치는 화력을 넘치게 쏟아내었다.
한데 1905년 평양대부흥운동에서 영을 담지한 이들은 교회의 지도자들이었다. 영은 기존의 몸을 아무것도 해체하지 않으면서도 힘을 발휘했고, 나아가 그 몸을 더욱 견고하게 했다. 즉 영의 해석자가 곧 영의 체험자였다. 지도자의 몸에 안착하여 그 몸을 위해서만 봉사하는 영, 지도자의 몸을 위해서만 활력을 뿜어내는 영, 그렇게 순화된 존재로 영은 도구화되었다.
민중신학자 안병무는 말년에 자신의 마지막 과업으로 성서를 번역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미완에 그쳤고, 선생의 유지에 따라 그 일부도 공개되지 않고 폐기되었다.
어느 날이다. 그는 냉소에 찬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내가 프뉴마의 기막힌 번역어를 발견했어.” 모두들 궁금해하는 표정을 확인하며 선생은 말했다. “기(氣)’가 그것이지.” 우리 모두는 무릎을 쳤다. “아, 그렇게 하면 ‘영’이라는 번역어가 담고 있는 인격체 같은 느낌이 사라지는구나!” 영은 그리스어 프뉴마의 번역어인데, 이 단어는 ‘바람이나 숨’이라는 뜻의 히브리어 르아흐를 번역한 것이다. 바람, 숨이 몸속에 갇혀있기만 한다면 그야말로 우수꽝스러운 일이다. 한데 영은 마치 그런 몸속에 들어 있는 무엇처럼 느껴지기에 뭔가 석연치 않았다. 한데 선생은 그것을 ‘기’라고 함으로써, 인격체와 관련된 무엇이 아니라 어떤 사건과 관련된 것, 그 흐름의 흔적처럼 보이게 했다.
그런데 선생의 다음 말에 우리는 모두 씁쓸하게 웃어야 했다. “근데 말이지, ‘하기오스 프뉴마’, 이 말이 문제야!” 하기오스는 거룩하다는 뜻의 형용사다. 그러니까 이 말은 ‘성령’으로 번역되었다. 한데 영을 기로 바꾸려니 성령은 ‘성기’가 되고 말았다. 느낌 속에서 이 번역어는 다시 몸이 되어 버린 셈이다.
그러니 영의 오독 가능성을 방어하려는 일은 여전히 대안 없는 실험으로 남겨두어졌다.

김진호(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연구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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