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m Jin Ho's Theology Article Archi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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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호의 신들의 사회4]그리스도교 반공주의, 그 심성의 사회심리학
<한겨레21> 837호(2010 11 26)

그리스도교 반공주의, 그 심성의 사회심리학



사회학자 조희연에 따르면 남한사회는 건국 초기부터 대단히 빠른 속도로 ‘반공규율사회’로서 조직되어 갔다. 이것은 일종의 ‘심성의 정치학’(politics of mentalité)으로, 반공주의라는 증오의 정치가 어떻게 남한사회를 비일상적인 강력한 사회적 결속의 사회로 전환시킬 수 있었는지에 관한 해석을 담고 있다. 또한 일종의 ‘심성의 경제학’(economics politics of mentalité)적 해석도 수반하여, 발전동원체제라는 비상한 병영적 성장사회를 가능하게 한 심성(집단인식)적 토양이 되었다는 주장을 담고 있다.  
한편, 그는 말하고 있지 않지만, 반공규율사회론은 ‘심성의 사회심리학’(social psychology of mentalité)으로도 볼 수 있다. 무엇보다도 식민지 체험과 전쟁의 체험, 그로 인한 정신적 외상을 다른 심리적 요소로 전환하는 것에 관한 심성 작용과 그 효과에 관한 해석을 내포한다.
이 세 번째 해석, 즉 심성의 사회심리학적 물음은 그리스도교 반공주의를 해석하는 중요한 문제틀이 된다. 이 글은 그리스도교, 특히 개신교가 왜 그토록 강력하고 완고한 반공주의적 집단인식에 사로잡히게 되었는지, 그리고 그러한 집단인식이 사회와 접속하면서 어떻게 번안되었고 그 효과는 어떠했는지를 살펴보는 데 초점이 있다. 하여 근대 한국사회와 종교, 특히 반공주의적 개신교의 관계를 묻고자 하는 것이다.   

왜 반공인가

개신교 지도자들 사이에서 ‘반공’이라는 문제의식이 자리잡기 시작한 것은 대략 1930년을 전후한 때부터다. 항일운동의 축이 사회주의 그룹으로 옮겨가고 미국계 선교사들에 의해 장악되어 있던 교회는 빠르게 체제내화 되었다. 이에 개신교 교회들 내부에서는 교권의 권력독점에 대한 문제제기가 빗발쳤고 이념적 갈등이 첨예화되었다. 나아가 교회를 떠나는 이들도 속출했다.
이렇게 되자 교회 지도자들은 공산주의를 악마화하는 담론을 유포하기 시작했다. 당시 3대교단의 하나인 성결교의 지도자 이명직은 성서 「요한묵시록」에 나오는 ‘붉은 용’이 소련 공산주의라고 하면서, 일본 이탈리아 독일의 반공연맹을 지지한다는 글(1938)을 썼다. 이는 개신교 각 교단과 단체들이 연합하여 만든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의 사회신조(1932)에 담긴 반공의 교리화와 맥을 같이 한다. 이점에서 가톨릭도 예외가 아니다. 교황 비오 11세가 만든 <무신론적 공산주의에 관한 회칙>(1937)이 가톨릭계의 각종 매체를 통해 보급되어, 공산주의자들과는 어떤 것도 함께 할 수 없으며, 우리 시대에 격퇴해야 할 악마적 존재임이 천명되었다.
교회뿐 아니라 학교, 신문, 잡지 등 그리스도교가 보유하는 공식적 담론의 장은 사회적으로 매우 폭넓었고 견고했다. 식민지 당국을 제외하면 공적 영역에서 가장 강력한 사회적 조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아직 전 인구의 3% 안팎의 작은 종단임에도 말이다.
당시 불교나 천도교 등은 매우 광범위한 신자를 보유한 거대종단이었지만, 개신교처럼 집회가 많지도 않은데다, 이들이 보유한 사회적인 공적 담론의 장 또한 상대적으로 적었다. 가톨릭은 개신교보다 훨씬 규모가 작았고(개신교의 1/4), 또 외국계 신부들에 의해 교권이 철저하게 장악되어 있던 터여서, 사회적인 접촉의 면은 매우 협소했다.
한편 식민지 당국은 이 무렵 공산주의에 대해 강도 높은 이념공세와 정치적 탄압을 본격화하고 있었다. 이것은 교회의 반공담론이 신자 대중과 시민사회의 생각에 침투할 가능성이 그 만큼 높아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너무 과장할 수는 없어도 교회는 빠르게 반공주의의 아성이 되어 갔다.

수치심에서 증오로―신사참배의 심리학
 한데 1930년대 말 사회가 전시동원 체제로 전환되자 개신교 교회들은 반공주의 문제보다 더 심각한 현안에 직면하게 된다. 강화된 동원 체제의 일부였던 신사참배가 그것이다. 교회는 신사참배에 민감하게 반응했고, 이를 계기로 외국계 선교사들이 추방됐으며, 박형룡 남궁억 등 주요 한국인 지도자들이 망명을 떠났다. 끝까지 신사참배를 거부한 지도자들 70여명이 구속됐고, 당시 사립학교의 70%를 점하고 있던 신학교를 포함한 그리스도교계 학교들이 모두 폐쇄되거나 관공립학교로 흡수되었다.
하지만 결국 교회의 대부분은 적극적이든 소극적이든 신사참배에 동조했다. 1938년 9월 장로교 총회는 신사참배 지지를 공식적으로 표명했다. 사회학자 강인철에 의하면 개신교 신자의 절대다수인 근본주의 성향의 그리스도교도들 대다수는 신사참배에 마지못해 참여했던 소극적 지지자였다. 그런데 이들에게 우상숭배로 해석될 수 있는 신사참배 행위는 씻기 어려운 상처였다. 하여 이들의 각종 후일담에 따르면 신사참배의 수치심은 그리스도교의 식민지 체험 가운데 가장 뼈아픈 고통이었다.
당시 개신교 신자들 중 서북지역의 장로교 신자들이 40%를 넘었는데, 장로교 신자들은 조선의 그리스도교 신자들 가운데 가장 근본주의적이었고, 특히 서북지역의 장로교는 필경 전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근본주의 신앙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당연히 신사참배에 가장 적극적으로 저항한 이들 역시 서북지역 장로교도였다. 그럼에도 그들 대부분은 신사에 참배해야 했다. 근본주의적 신앙으로선 수용할 수 없는 것을 수용했다. 말할 수 없는 굴욕감과 수치심이 그들을 사로잡았다.
그런데 바로 이런 수치심이 증오로 전환되면서 조선의 그리스도교 신앙은 활력을 되찾는다. 공산주의가 악마의 표상으로 해석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이미 십년 이상 반공이 신앙의 기조 속으로 스며들어온 데다, 공산주의와 적대하면서 근대적 신앙과 신학을 구축해온 서구의 전통 또한 공산주의를 악마화하기에 훌륭한 기반이 되어주었다. 마지못해 신사에 참배를 해야 했던 자신들의 행위는 얼치기 악마의 그것에 지나지 않지만, 그런 것으로 괴로워하는 사이에 무시무시한 악마는 이미 이웃으로 우리의 일부가 되었고, 많은 신자들을 빼앗아 갔으며, 시시각각 사람들의 영혼을 빼앗기 위해 우리를 포위하고 있다.
이러한 반공의 신앙이 불꽃을 피우기 시작한 것은 해방 직후 북한에서의 체험과 관련이 있다. 그리스도교 신자들을 당혹스럽게 했던 것은 여기저기 흩어져 있어 잘 보이지 않았던 공산주의자들이 이미 사회 전역 구석구석까지 퍼져 있다는 사실이었다. 더욱이 신자들, 심지어 지도자들 가운데 많은 이들이 공산주의에 물들어 있었다. 1946년 미군정청이 조사한 자료에 따르면 당시 남한에서 공산주의와 사회주의에 대한 선호는 80%에 달했다. 이것은 북한 지역에서도 그다지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근본주의적 그리스도교도들은 자기들이 악마에 포위되어 있다는 두려움에 휩싸였다. 교회는 적으로 첩첩이 포위된 외로운 섬과 같았다.
당시 북한 지역에서 그리스도교도, 특히 장로교 지도자들은 비교적 탄탄한 사회적 자원을 보유하고 있었다. 하지만 전국적으로 해방정국은 ‘인민의 정치’가 고도로 활성화되어 있었고, 특히 북한 지역의 지배적인 정치권력은 그러한 인민의 사회정치적 동원을 요긴하게 활용하고 있었기에, 식민지 시절 이렇다 할 저항의 경력을 공준받지 못한 교회로서는 자원을 활용하여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하기가 쉽지 않았다.
악마적 대상인 공산주의자들이 정국을 주도하고 있는 상황에 심각하게 위축되어 있던 근본주의적 개신교 지도자들은 재산의 사회적 공여에 동의할 준비가 되어 있지 못했다. 그런데 토지개혁은 실시되었고, 수많은 자산가들은 심한 모욕을 받으며 재산을 ‘강탈당했다.’ 많은 개신교 지도자들은 그렇게 기억했다.
더 이상 앉아서 바라볼 수많은 없다. 행동이 필요하다. 악마와의 전쟁 말이다. 바로 그것을 가능하게 한 것이 ‘월남’이었다.

드디어 증오의 정치가 실행되었다―월남자 교회와 ‘증오의 정치’의 제도화

수많은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월남했다. 불확실하지만 추정컨대 그 수는 남한 전체 개신교 신자의 삼분의 일에서 절반에 육박하는 정도나 되었다. 하지만 그 수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이들은 미군정 당국, 그리고 미국 종교계와 정치계에 대한 접근성이 매우 높은 집단이었다는 점이다.(통역정치, 선교사정치 등의 용어는 이들이 미국과의 접근경로를 시사한다.) 군정 당국은 이들에게 일본인이 두고 간 막대한 종교재산을 무상으로 공여했고, 이것을 토대로 영락교회 등 이른바 ‘월남자 교회’들이 속속 세워진다. 그리고 이들 월남자 교회는 남한사회의 반공주의를 추동하는 중심세력이 되었다. 이들 교회는 한편으로는 남한 정국의 극우 테러리즘의 행대대원들이 충원되고 조직화되는 주요 공간이었고, 다른 한편으로 반공주의적인 공적 정치가 담론화되고 제도화되는 마당이기도 했다. 기독청년면려회 서북연합회나 영락교회 청년회와 대학생회, 대동강동지회나 서북청년단 등, 각종 테러정치의 행동대 역할을 했던 단체들이 바로 월남자 교회를 중심으로 하여 활동하였다.  
지난 글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미국의 시민사회는 주로 선교사들이 제공한 정보를 통해 아시아의 많은 국가와 사회에 대한 집단적 기억을 형성하고 있었고, 정치인들은 그러한 시민사회적 인식을 활용해서 국제정책에 관한 여론정치를 수행했다. 한데 한국통으로 알려진 선교사들 거의 대부분은 근본주의자들이었고, 서북계 장로교 지도자들과 매우 친화적인 이들이었다. 그러므로 월남자 교회는 군정청의 후원 외에도 미국의 교회와 시민사회로부터 막대한 기부금을 유치할 수 있었고, 나아가 미국의 정치세력과의 비공식 외교라인을 보유할 수 있었다.
생각을 실행에 옮기는 일은 그리 간단하지 않다. 특히 복수심은 보다 격한 행동을 필요로 하기에 실행되기가 훨씬 어렵다. 하지만 복수심은 실행되지 않을 때 다른 감정보다 더 큰 상처를 남긴다. 한데 그리스도교, 특히 개신교는 근본주의적 신앙이 감당하기 어려운 굴욕과 수치심을 증오심으로 전환시킴으로써 그 내적 상처를 봉합하려 했다.
이때 대상의 전환이 있다. 수치심을 안겨준 대상보다 훨씬 안전한 증오의 대상이 선정된다. 식민지 당국도 선교사도 모두 적대시하는 대상이다. 공산주의가 바로 그들이다. 그들을 악마화함으로써 그리스도인들은 수치심에서 벗어날 수 있는 심성적 기반을 얻은 것이다. 한데 증오는 종종 복수라는 외향적인 공격적 감정과 만난다. 복수심이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월남자 교회는 그러한 복수심을 실행에 옮길 수 있는 사회적 기반을 갖추었다. 하여 복수가 실행되었고, 그 과정에서 교회는 더욱 견고한 공격적 반공주의 신앙으로 무장하게 되었다.
한국전쟁이 일어났다. 그것은 비단 1950년부터 3년간의 전쟁에 한정되지 않는다. 이미 1946년 이래 남한사회는 내전상황에 있었다. 아무튼 한국전쟁은 이제까지 전 세계의 어느 국지전보다 많은 이들을 단기간에 죽음으로 몰아갔고, 사회적 자원의 거의 대부분을 파괴하였다. 이러한 엄청난 파괴와 살육, 거기에는 이념의 갈등이 도사리고 있다. 그리고 그리스도교도들은 이러한 이념 갈등의 최전선에서 많은 피해를 입었고 또 그 이상의 가학성의 주역이 되었다. 그리고 전쟁이 끝났다.

전후, 계속되는 전쟁의 기억

하지만 그렇지 않다. 전쟁으로 동원된 마음까지 휴전상황에 들어간 것은 아니다. 마음은 여전히 그 증오의 정치에 과잉 동원된 상태에 있었다. 심성의 전쟁은 계속되어야 했다. 증오는 남한 사회 구석구석을 휘저으며 공산주의를 색출하는 심성적 자원이 되고 있었고, 나아가 내면에서까지 악과의 전쟁을 계속하고 있었다. 교회는 그러한 심정의 내전을 충동질하는 주된 사회적 기구였다.
전후, 전쟁의 상처들이 소용돌이치고 그것을 치유하기 위해 사투를 벌이는 온갖 사회적 행동들이 미친 말처럼 울부짖는 시간, 그리스도교의 전후는 종식된 전쟁을 심성에서 계속되게 하는 방식으로 그 상처를 마주했다. 악마가 사라질 때까지 증오와 복수는 계속되어야 한다고......  
1961년 쿠데타를 일으킨 군부권력은 여전히 과잉 동원되어 있는 심성의 정치를 발전동원체제를 위한 기반으로 활용했다. 마음의 반공주의라는 심성의 장치는 사회를 전시동원체제처럼 비상시의 상황으로 이어가게 했다. 이른바 발전동원체제는 바로 군부독재권력이 해석한 ‘전후’였다. 아직 증오와 복수를 멈추어서는 안 된다. 내부의 전쟁은 계속되어야 한다. 사회가 발전하여 저 북쪽의 악마를 압도하고, 나아가 그들이 궤멸될 때까지 이러한 비상시의 동원체제는 계속되어야 한다고......
이렇게 교회와 군부독재정부는 유사한 ‘전후’를 추구했다. 그들은 공통된 적, 공산주의라는 악마와의 전쟁을 계속하고자 했고, 그렇게 사회적 증오와 복수의 심성으로 조직된 신앙과 이념으로 스스로를 무장했다. 이 두 체제는 심성에서라도 전쟁이 계속되어야만 존속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그들은 아직까지 우리 사회의 반공적 냉전주의의 축을 이루고 있다. □

김진호_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연구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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