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m Jin Ho's Theology Article Archi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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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2/10 (00:54) from 112.145.248.24' of 112.145.248.24' Article Number : 1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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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호의 신들의 사회5]부흥운동의 교회화 - 군부독재체제의 국민화 담론의 일부가 된 신앙
부흥운동의 교회화 - 군부독재체제의 국민화 담론의 일부가 된 신앙


<한겨레21> 840(2010.12.17)




지난 글에서 나는 그리스도교 근본주의자들의 신사참배는 그들에게 씻을 수 없는 수치심을 안겨주었다고 보았다. 한데 (수치심에 관한 감정의 사회학 연구들이 보여준 것처럼) 해방을 전후로 한 시기에 ‘자기에 대한 수치심’은 ‘타자에 대한 증오심’, 곧 ‘고강도의 반공주의’로 전환되었다.
한데 이 글과 다음 글에서는 전쟁으로 표상되는 증오심, 곧 그 파괴성이 ‘생산적 증오심’으로 전환되는 것에 관해 다루고자 한다. 이 시기에 한국사회는 성장주의적 질주를 거듭하였다. 그리스도교, 특히 개신교 또한 성장주의에 미쳐 있었다. 하여 이러한 전환에 관한 논의 초점은 한국사회의 성장주의와 그리스도교 신앙이 서로 어떻게 연동되어 있었는지에 맞추어져 있다. 먼저 이 글에서는 그 심성적 뿌리체험을 중심으로 그 연동성의 맥락에 관하여 이야기하고자 한다.  

전후 그리스도교, 파괴적 증오심에서 생산적 증오심으로
 
그리스도교 역사학자 김흥수는 한국전쟁 이후 기복신앙의 양상에 관한 기념비적 연구에서 통념과는 다른 견해를 피력했다. 그는 기복신앙이 한국의 전통적 대중문화를 무성찰적으로 흡수한 결과가 아니라 한국전쟁 이후의 사회적 병리현상과 관련되어 있다고 보았다. 나아가 이러한 신앙이 이후 한국의 성장주의 신앙의 제도화에 주된 내용이 되었다고 지적해 기복신앙과 성장주의의 연관성에 관한 논점을 제시했다.
결론보다 더욱 의미심장한 것은 한국전쟁을 보는 그의 시선에 있다. 그는 그리스도교 대중의 고통에 초점을 두면서 연구를 수행하였다. 문학을 제외하면 대중의 ‘고통 감성’에 초점을 두는 것은 한국전쟁 연구에서 여간해서는 찾아보기 힘들다. 특히 그가 주목한 감성은 ‘생존욕망’이다.
한국전쟁은 전 세계의 어떤 국지전에서도 볼 수 없는 혹독한 살육과 파괴의 전쟁이었다. 하지만 전쟁이 끝난 뒤에도 이런 파괴성은 오랫동안 계속되었다. 죽음 같은 굶주림, 자연재해(태풍, 가뭄, 홍수), 전염병(결핵, 나병, 뇌염 등) 등 재앙은 1950년대 내내 사람들의 몸과 정신을 옥죄었다. 게다가 독재정부 치하에서 벌어지는 정치테러 또한 끊이지 않았다.
이 시기에 개신교에서는 사탄론과 이단론이 극성을 부렸다. 김흥수는 이 현상을 생존욕망과 연관시켜 해석한다. 그는 당시 설교나 각종 기고들을 분석해 개신교 지도자들의 담론 속에 사탄론이 이 시기에 현저하게 늘어났다는 점을 지적한다. 또한 무수한 이단이 1950~60년대에 속출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그가 말하고 있지는 않지만, 서로를 악마화하는 교파분열 또한 195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 가장 극심했다(장로교만 49개 교단으로 분열된 것을 포함해 개신교 교단이 60여개가 될 정도로). ‘파괴’는 전후에도 여전히 시대의 심성적 기조인 것이다.
하지만 전후 시대에 대한 김흥수의 설교분석에 따르면 사탄론은 ‘선민구원’ 담론과 매우 강고하게 얽혀 있었다. 식민지 말기에서 전쟁기까지 악마론은 공산주의의 박멸을 강조하고 있었다. 반면 전후 사탄론은 멸공의 언술과 결합되어 있지만 동시에 구원서사의 일부이기도 했다. 하여 증오심은 공격, 파괴에서 위로, 상흔 극복 등의 ‘생산적’ 기조로 바뀌고 있다는 것이다.
식민지 시대부터 대표적인 이단심판관이자 반공의 화신임을 많은 이들에게 확증시켜준 학자이자 목회자였던 박형룡도 전쟁을 거치면서 특유의 공격적 언술에서 후퇴하여 “하나님만이 진정한 피난처”라는 실존적인 위로의 메시지를 남겼다. ‘적’을 향한 비타협적 공격성의 언술은 여전했지만, 그것은 공산주의자들이 일으킨 동족상잔으로 희생된 남한의 그리스도교 대중을 향한 축복의 약속으로 이어졌던 것이다.
정리하자면 전후 한국 그리스도교는 남한 사회 전체에서 가장 반공주의적 증오심에 불타 있던 사회적 세력의 하나인데, 특기할 것은 이 증오심이 파괴적인 동시에 생산적인 심성적 기조를 띠었다는 점이다.
한데 이러한 모습을 가장 극적으로 보여주는 종교 현상이, 이 시기에 집중적으로 등장한 이른바 ‘이단들’이다.
 
‘이단들’에게서 ‘생산적 증오’의 심성이 잉태하다
 
1954년 나운몽은 최초의 기도원인 용문산기도원을 설립하여 이곳을 중심으로 부흥집회를 열었다. 그의 집회에서는 입신 상태에서 방언을 하고 온몸을 전율하듯 떨기도 하며 바닥을 구르기도 하고 울부짖듯 예언을 하는 등 엑스타시 상태의 각종 은사체험이 난무했다. 하지만 그의 부흥집회의 하이라이트는 ‘치유’였다.
전후 온갖 질병이 사람들의 몸과 정신을 극도로 괴롭히고 있던 때다. 하지만 고통을 감당할 만한 몸과 정신의 인프라는 갖춰져 있지 않았다. 특별히 몸도 영혼도 고갈된 사람들은 기도원의 대중집회에서 발광하며 상처를 치유받고자 했다.
나운몽의 부흥집회는 빠르게 전국화되었다. 그 자신이 전국을 다니며 집회를 열었을 뿐 아니라, 제2, 제3의 나운몽이 전국 각처에서 등장했고, 명상과 침묵의 기도가 아닌 발광하듯 울부짖고 거기에서 카타르시스를 체험하는 열광적 기도원들이 속출했다.
바로 그 무렵 박태선의 등장은 전후 대중적 신비주의 운동의 극치를 보여준다. 남산, 한강백사장 등에서 열린 그의 집회에는 수십만의 군중이 몰려들었고, 그가 전국을 순회하며 벌이는 집회에는 거대한 종교 페스티벌이 벌어졌다. 개신교도의 수가 아직 극소수에 불과하던 때였다. 하지만 그의 집회에는 개신교 신자가 아닌 이들도 무수히 많았고 개종자 또한 많았다. 아무튼 주목할 것은, 나운몽의 집회처럼, 여기서도 무수한 신비체험들이 속출했다는 점이다. 물론 그 절정에는 영락없이 치유행위가 있었다. 대구의 노광공은 박태선의 추종자였다가 독자적인 활동을 벌인 부흥사였는데, 역시 그의 집회에서도 치유는 대중의 열광을 최고조로 집중시키는 요소였다.
그밖에도 변계단, 김성희 같은 여성 은사자들은 상처부위로 판단되는 몸을 어루만지거나 때리면서 기도를 드렸고(안찰기도), 많은 이들이 질병에서 치유되었다. 안찰기도나 나운몽의 방언기도 등, 열광적인 대중집회 풍경은 빠른 속도로 개신교 전역으로 퍼져나갔는데, 그러한 확산은 질병의 고통에서 해방되고 싶은 사람들의 열망 때문이었다.
여기서 하나 더 언급할 것은 이들은 예외 없이 ‘증오’를 신비체험, 특히 종교적 치유행위의 자원으로 활용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물론 그 대상은 ‘빨갱이’다. 하지만 ‘분노를 동력화’하되 그것으로 전쟁 혹은 유사전쟁을 벌였던 해방 정국의 월남자 그리스도교 과격파들과는 달리, 이들은 분노를 사람들의 몸과 정신을 치유하는 데 활용했다. ‘파괴적 증오심’이 아닌 ‘생산적 증오심’을 가장 극적으로 보여준 이들은 전후 한국사회의 부흥사들이었다. 그런 점에서 이들의 활동은 주류 개신교계와 별반 다르지 않다. 다만 그들은 좀더 열광적이고 실제적인 치유를 수행했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그런데 이들은 미국적 근본주의의 세례를 받은 서북계 개신교 주류에서 성장한 사람들이 아니라 그리스도교의 변두리 혹은 외부에서 등장했고, 거의 모두 정규의 신학교육을 받지 못한 평신도 출신 지도자였다. 예나 지금이나 주류가 코드화한 언술에 익숙하지 않은 이들이 흔히 사용하는 그리스도교적 키워드는 ‘성령’이다. 이 시기의 부흥사들도 그랬다. 그들은, 내가 해석하고 있는 것처럼 공산주의에 대한 증오를 치유의 정신적 자원으로 동력화한 것이라고 말한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성령의 은혜’라고 주장했다. ‘치유 받은 사람들은 은혜의 수혜자들일 뿐이다. 그들은 한 게 없고 단지 받은 것이다’라고(그러나 기적체험에 관한 인류학적 연구들에 따르면 기적은 그 수혜자들의 호응 없이는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아무튼 이들 성령운동적 부흥집회의 주역들인 평신도 지도자들을 주류 교단들은 예외 없이 이단으로 규정하거나 혹은 이단시했다. 박태선이나 노광공은 스스로를 메시아라고 주장했고, 나운몽은 단군설화의 한울님과 하나님을 동일하다고 주장하고 공자나 석가 같은 현인이나 예언자를 배척한 교회를 비판하였으니 근본주의적 개신교회의 성서적 스토리라인과 충돌을 면하기 어려웠다.
여기서는 이들의 주장과 행위에 대한 교리적 평가는 유보하고, 이들이 일으킨 운동의 사회적 효과에 주목하겠다. 무엇보다도 이들이 주도한 기도원과 부흥집회 현상은 전후 한국사회 대중의 고통과 갈망 사이에 깊이 파고든 것이었기에 가능했다. 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체제의 성격이 아니라, 몸과 정신의 질병, 그것으로 인한 고통에서 어떻게 해방될 것인가에 있었다. 부흥집회는 바로 그것과 대면했고, 거기에서 대중의 광적인 반응과 서로 얽혀들면서 폭발적으로 활성화됐다.
말했듯이 주류 교회는 이들을 배척했다. 하지만 그것만은 아니다. 교회는 모방을 시작했다. 이제 기도원은 주류 교회들 내부로 들어왔고, 부흥집회를 이끄는 부흥사들은 교회 안에서 그 일을 계속했다.
 
‘생산적 증오’, 제도화하다―교회 성장주의의 발명
 
1960년대, 사회적인 전후 복구는 본격화되었다. 쿠데타를 일으킨 군인들이 이 일의 주역이었다. 이들의 발전 프로그램의 수행방식은 군인스럽게, 전시동원체제와 유사한 이른바 ‘발전동원체제’였다. 성장과 발전을 위해 가용자원을 총동원하는 방식으로 사회가 조직되는 것을 말한다.
흥미롭게도, 이 발전동원체제는 반공을 향한 증오심을 발전의 동력으로 활용함으로써 실행되는 체제다. 여기서 우리는 이 시기 개신교회와 국가 사이의 절묘한 유사성을 발견하게 된다. 곧 ‘생산적 증오’의 메커니즘이 양자에서 유사하게 나타난다는 것이다.
1960년대에 시작된 발전 프로그램 덕에 1970~80년대 한국사회는 고도성장을 이룩하였다. 그리고 바로 그 시기 교회는 더욱 빠른 속도로 성장했다. 국가적 성장의 주역이 군사정권이었다면, 교회 성장의 주역은 순복음교회를 상징적 표상으로 하는 일련의 부흥사적 목회자들과 그들을 추종하는 ‘한국판 십자군’이었다.
조용기는 단시일에 세계 최대의 교회를 만들어냈다. 그는 나운몽으로 대표되는 전후 한국사회의 제도권 외부의 부흥사들의 역할을 효과적으로 대체한 교회를 발명한 것이다. 그리스도교도에게 있어서 일상 밖의 공간인 기도원과 일상 안의 공간인 교회 사이의 융합과 분열을 교묘히 안배함으로써 이른바 ‘순복음신화’는 실행된 것이다.
순복음교회의 예배는 나운몽의 용문사기도원을 옮겨놓은 것과 같은 분위기로 연출되었다. 여기서도 연일 벌어지는 치유가 그 핵심이었다. 여전히 집회에 참석한 이들은 질병에 시달리고 있었다.
사회는 빠른 속도로 산업화되고 있지만 사회적 안전장치는 거의 부재한 상황에서 광범위한 이농민에게는 계속되는 빈곤과 열악한 노동 상황만이 존재의 전부처럼 보이던 때였다. 더구나 조상대대로 살아온 땅을 떠난다는 것은 삶의 준거가 삭제되는 것을 의미했다. 고통을 해석하고 견뎌낼 만한 정신적 영적 자양분이 모두 거덜난 존재, 이것이 바로 이 시대 이농민의 모습이었다.
조용기는 이들에게 신의 치유를 선하사면서 ‘삼박자구원’을 설파한다. 몸을 치유한 신은 동시에 풍요도 선사할 것이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영적 축복이 있다. 몸과 정신의 치유를 직간접으로 경험한 이들은 그의 메시지를 손쉽게 받아들였다. 마치 국가가 국민에게 발전동원체제의 충실한 일원으로 살아가도록 고무시키는 것처럼, 교회는 신자에게 자기와 가족의 발전을 위해 모든 가용자원을 다 활용하라고 격려하는 것과 같았다. 그리고 많은 입지전적인 성공담이 간증이라는 담론형식을 따라 유포되었다. 한편 그럼에도 실패는 어디서나 있었다. 기도원은 바로 이들 실패자들을 위한 일상 밖의 공간이었다.
이렇게 그와 순복음교회의 성공은 나운몽 등의 일탈적 성령운동을 교회적 성령운동으로 체제내화시킴으로써 가능했다. 이는 성령이 교회주의를 위해 도구화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공산주의에 대한 분노로 집결된 심성적 기조는 이제 성장의 동력으로 전환되었고, 그것은 교회주의를 더욱 견고히 했다. 나아가 이것은 군부 권위주의 시대의 ‘국민화 담론’의 일부가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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