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m Jin Ho's Theology Article Archi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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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호의 신들의 사회6]대중의 아픔을 품은 독재자와 신앙
한겨레21 / [2011.01.07 제843호]


대중의 아픔을 품은 독재자와 신앙
-- 대형교회 시대, 독재에 순치된 신앙이 제도화하다







한국전쟁 이후 개신교회는 빠르게 성장하기 시작했다. 이 시기 교회 성장의 핵심에는 반공주의와 증오의 정치가 있었다. 한데 본격적인 성장은 1960년대~1990년대 초까지의 기간이었다. 지난 연재에서 보았듯이 이 시기의 성장은 반공주의를 성장, 발전의 동력으로 전환시킨 ‘생산적 증오’의 신앙과 관련이 있다.
이때 성장은 두 개의 축으로 나뉜다. 지난 시기 전투적 반공주의를 행동화했던 월남자교회들이 하나의 축이라면, 이 시기에 새로 설립한 교회들이 다른 축이다. 전자를 대표하는 교회가 영락교회이고, 후자는 순복음교회가 대표적이다. 이 글에서는 이 두 교회를 상징적 축으로 하는 교회의 대부흥이 동시대 한국사회와 어떻게 상호연관성을 맺고 있는지, 그 성장의 사회학에 대하여 이야기하고자 한다.

한 처음에 월남자형 대형교회가 있었다

각 교단의 통계자료들로 정정일 목사가 만든 재적교인 통계에 기초하여 계산하면, 개신교회는 1960년에서 1970년까지 10년간 약 500%가 증가한 3백만 명(3,192,621)을 넘어섰고, 1977년에는 5백만을 넘었으며, 1990년에는 1,200만에 달했다. 물론 이 수치는 과장되어 있다. 1995년 인구센서스에서 자기가 개신교 신자임을 밝힌 사람의 수가 876만여 명이었는데, 이 수치는 개신교 신자 수가 최대였던 때의 수치다. 아마도 재적통계 속에는 중복교적, 그리고 교회나 교단마다 수 부풀리기 현상이 적지 아니 게재되어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1960~1990년 사이 기간에 전 세계적으로 유래 없는 엄청난 교세의 성장이 있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없다. 1993년 2월, 미국의 《크리스찬월드》(Christian World)는 규모로 보는 세계 50대 교회를 발표하였는데, 1위에 여의도순복음교회가 오른 것을 비롯해서, 10위 안에 5개, 50위 안에 23개의 한국교회가 포함되었다.
영락교회는 이러한 대부흥의 초기 국면을 주도한 교회로, 1965년에 이미 재적교인 1만을 넘어서는 세계적 규모의 초대형교회 반열에 섰다. 1945년 27명으로 시작한 이 교회의 급속한 성장은 국가와 맺고 있는 특별한 관계로서 설명할 수 있다.
월남자기독교도들을 대표하는 기구인 ‘이북신도대표회’의 중심에는 영락교회와 한경직 목사가 있었다. 이것은 한국 선교에 가장 큰 기여를 하였고 한목사의 든든한 후견자인 미국 북장로회와의 연결망에서 그가 차지하는 특권적 위치와 깊은 관련이 있다. 이것은 그가 미국 정계의 보수, 반공주의적 인사들과의 특별한 연결망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이런 이유로 영락교회는 해방정국과 한국전쟁을 전후로 하는 시기에 남한의 반공주의를 대표하는 유력한 인사들(장도영, 오제도, 선우종원 등)에서 극우 테러리스트까지 폭넓은 보수 우익의 기지였다.
해서 한국전쟁 이후 남한사회의 극우 편향적 제도화가 폭력적으로 형성되던 시기에, 아직 소수 종파인 그리스도교는 특권과 특혜를 누렸고, 영락교회는 그 중심에 있었다. 그리고 1961년 군사쿠데타가 일어나고 개발주의 정책이 본격화하던 시기에도 이러한 기조는 계속되었다. 이미 한경직 목사는 1961년 6월 군사정부의 국제적 지지를 위해 개신교지도자들의 국제친선사절단을 이끌었고, 1966년부터 시작된 국가조찬기도회와 국회조찬기도회의 중심인물이었다.
이미 앞의 연재글에서 보았듯이 개신교회는 해방이후 한국전쟁을 전후로 하는 초강경 반공주의체제의 성립과 궤를 같이 하며, 이러한 체제의 자양분 역할을 하기도 했고, 또 이 체제의 최대 수혜자였다. 그리고 ‘교회의 세속적 성공’을 이끌었던 교회는 영락교회였다. 비기독교 국가에서 최초로 도입된 사례인 군종제도는 그 특혜의 진수를 보여준다. 이 제도는 압도적으로 개신교회를 위한 것이었고, 그 결과 개신교는 엘리트군인과 사병 모두에서 최대 신자를 보유한 종파가 되었다. 그리고 한경직 목사는 처음부터 이 제도의 도입과 운영에서 주도권을 쥐고 있었다.
이러한 교회 성장의 유형은 한국 근대국가 형성기의 전투적 반공주의 기조 속에서 국가와 교회가 서로 긴밀하게 연동하면서 성장을 이룩한 경우라고 할 수 있다.(나는 영락교회를 중심으로 하는 이러한 교회 대형화의 양상을 ‘월남자형 교회’로 부르고자 한다.)

선발대형교회의 시대, 도래하다

한편 순복음교회는, 지난 연재글에서 보았듯이, 군사정부가 추진한 개발주의와 보다 긴밀히 연관된다. 1958년 자택에서 모임을 시작했고, 수가 늘어나면서 천막교회로 이어갔지만, 조용기 다운 목회가 본격화된 때는 1961년이었다. 박정희 군사정부가 개발주의 정책을 시작한 것이 1962년이었는데, 조목사가 부흥사로서 성장주의 목회의 본격적인 시동을 건 시기는 그 전 해였다.
한국이 초고속 성장을 하던 시기인 1970년대에 국가 평균성장률이 9.2%였는데, 순복음교회는 1963년 재적교인이 3천 명을 넘어섰고, 1972년부터 1981년까지 평균 9.3% 성장했다. 서대문에서 여의도로 교회당을 옮긴 1973년 1만 8000명을 돌파했고, 1993년 《크리스찬월드》가 발표한 세계 최대교회 50개 리스트에서 교인 60만 명으로 단연 1위를 차지하였다. 이 수치는 2위인 안양남부순복음교회의 6배에 달하며, 2~10위까지를 합한 수보다 거의 두 배 가까운 규모다. 2010년 현재 재적교인수가 78만 명에 달한다고 하는데, 미국 최대교회인 레이크우드교회(조엘 오스틴 목사)는 5만이 못 되는 규모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1970년대 10년 동안 이 교회의 교인 성장률이 1600%를 넘는다는 점이다.
홍영기 교회성장연구소 소장은 영락교회의 성장에는 정치적 요인이 중요하지만, 순복음교회는 사회경제적 요인과 보다 밀접히 관련된다는 논점을 제시하였다. 즉 1960년대 국가가 주도한 개발정책으로 빠른 속도로 도시로 유입된 대대적인 이농민을 주요 대상으로 하는 목회 모델의 성공 사례로서 해석하고 있는 것이다.
1960년대에 도시로 올라온 이들 이농민들은 중랑구, 관악구, 성북구, 성동구, 광진구, 서대문, 영등포 등, 한강지류나 야산에 무허가 주택단지를 형성하며 집단으로 거주하였다. 기초생활을 위한 최소한의 조건도 갖추어지지 않은 주거지와 노동조건 속에서 혹독한 삶을 살아가야 했던 사람들에게, 학대와 폭력이 난무한 야만적 도시생활 속으로 내던져진 사람들에게 국가는 거의 아무런 기회도 제공하지 않았다. 바로 이들에게 교회가 다가간 것이다.
매 예배는 부흥회와 같았다. 우는 사람, 방언하는 사람, 고함치는 사람, 박수를 치며, 발을 구르며, 펄쩍펄쩍 뛴다. 어떤 사람은 질병이 치료되었다고 춤은 추며, 어떤 사람은 경련을 일으키며 나뒹군다. 그 광경에 대다수의 교인들은 신의 은사를 확인했다.
조용기 목사는 이들에게 ‘축복’의 말을 전한다. 병 고침만이 아니라, 부자가 될 거라고. 그리고 영의 축복까지도. 이른바 ‘3박자 구원’의 메시지다. 전후 부흥사들의 병고침의 메시지에, 1960년대식 ‘잘 살아보세’의 구호가 신탁처럼 바뀌어 추가되었다. 이농민들에게 그것은 복음, 희망의 메시지이자 구원의 소리였다.
조용기 목사는 월남기독교도가 아니었고, 순복음교회도 월남자형 교회가 아니었다. 이 교회는 ‘오직 성장’을 위해 모든 것을 총동원하는 전형적인 군부독재 시절의 담론과 제도에 병행하는 신앙담론과 제도를 통해 대부흥을 이룩했다. 그리고 교회로 몰려들어온 사람도 개발독재시대의 대중, 시대의 저주에 존재가 거덜난 이들이었다. 그들에게 교회는 축복을 선사하며, 그들은 교회에 충성을 다했다. 이렇게 반공주의의 증오의 기조를 성장의 동력으로 전환시켜 자기의 발전과 교회의 발전을 동시적으로 실현하게 하려는 ‘생산적 증오’의 담론을 실현시킨 교회 모델, 순복음교회를 필두로 하는 이런 교회의 양상을 나는 ‘선발대형교회’라고 부른 바 있다.

독재와 신앙, 동거를 시작하다

목회학 연구자인 박종현 박사는 이 시기 교회성장의 또 다른 특징을 제기한다. 장로교에서도 그러한 징후가 뚜렷해지지만, 교역자 파송이 매우 엄격하게 지켜졌던 감리교와 성결교에서조차 이 시기에 대형화된 교회들을 중심으로 카리스마적 지도자에 의한 장기간 목회 그리고 은퇴한 뒤에까지도 이어지는 은퇴목사제도가 정착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1970년대 이전과 이후를 가르는 특징이며, 바로 이런 제도의 정착과 더불어 이른바 한국형 메가처치(mega-church)가 정작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을 그는 3선개헌과 유신으로 이어지는 박정희 정권의 영구집권모색과 연계시킨다. 그것은 이 시대의 시대정신이기도 했다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선발대형교회의 특징이라기보다는 1970년대에 탄생한 한국형 대형교회의 특징이라고 보는 게 적합하다.
하지만 독재자의 카리스마가 가장 빛나는 것은 공동체의 틀이 잘 짜여 있어서 안정된 성장을 구가하던 월남자형 교회보다는, 부흥회 같은 분위기로 좌절한 사람들의 영혼을 격렬하게 주체화하면서도 그들을 관리하는 데 성공하여 공동체의 동력으로 전환시킨 순복음교회 같은 선발대형교회에서다. 특히 이 시기에 은사를 베풀며 복음을 전하는 열혈 여성신자들, 이른바 ‘전도부인들’은 수많은 교회에서 갈등과 분열의 미시적 원인이었다. 이들 여성 은사자들은 종종 목회자의 가르침에 반하는 환상체험을 교회에서 설파함으로써 교회의 상징적 질서를 대표하고 있는 목사나 장로의 권위를 격하하는 강력한 질서교란자들이었다.
여성신학자 이숙진에 의하면 방언은 지배언어에서 소외된 여성이 주체화되는 주요 조건이었다. 게다가 남성주류사회의 협상과 공생의 기술에 소외되어 있던 그녀들의 주체화는 기성 교회의 질서를 교란시키는 문화적 혁명의 요소였다. 해서 1970년대를 전후로 하는 시기에 전도부인들은 그리스도교가 사람들의 일상에 파고들고 활기차게 하는 주된 동력이면서 동시에 교회 내적 분쟁과 분열과 원인이기도 했다.
그런데 바로 이 시기에 기층대중을 흡수하여 대형화에 성공한 교회들은 이런 열광적인 전도부인들을 체제내화하는 데 성공한 교회이기도 했다. 박종현을 포함한 여러 목회학자들은 순복음교회의 고도성장 배후에는 ‘구역장제도’가 있었다고 지적한다. 많은 중소형교회들이 이들 영을 받은 여성들이 은사를 무기로 목사와 장로의 권위를 격하함으로써 내환과 분열, 해체를 거듭하고 있을 때, 순복음교회는 그녀들의 야생마 같은 불타는 열정을 교회 성장의 자원으로 전환시키는 데 성공하였는데, 이 야생적 은사를 순치시키는 장치가 바로 구역장 제도였던 것이다.
이렇게 독재시대에 한국 그리스도교는 급성장하였고, 많은 한국형 대형교회들을 탄생시켰다. 이들 교회들, 특히 선발대형교회들은 시대의 고통을 담지한 이들에게 축복과 희망을 제공해줌으로써, 많은 이들에게 행복과 자기실현의 기회를 줄 수 있었다. 하지만 동시에 이 교회들은 그 시대의 코드라고 할 수 있는 성장과 권위주의를 체화한 담론과 제도를 통해 대형화를 이룩했다. 초월적 권력에 저항하지 않고 그 권력의 질서에 순응함으로써 대중은 꿈을 실현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기도원이 필요했다

질병치료에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던 김계화라는 여성이 만든 할렐루야기도원은 1970,80년대에 매우 유명했다. 시인 정대구는 ‘할렐루야 기도원에서’라는 제목의 연작시에서 이렇게 말한다. “물러나 주저앉듯 수용되어 있는 / 의지가지 없이 늙고 병든 자 / 그 무리들 속에 하나님을 찾아 헤맸네 / 혹 여기에 계시지 않을까”
이 시기 기도원에 관한 인류학적 연구를 수행한 이요한 박사는 기도원을 자주 찾는 이들이 월 35만원 이하의 저소득층, 고졸 이하의 저학력층에서 많이 나타나며, 좌절된 현실에 대한 절망감에서 기도원을 찾게 되었다는 연구성과를 발표한 바 있다.
나운몽에게서 그랬던 것처럼 기도원은 그런 곳이었다. 한데 조용기 같은 부흥사들이 교회를 기도원화했다. 거기에 그들은 성공에 대한 진취적 열망을 새로운 신앙의 코드로 첨가시켰다. 하지만 여전히 실패한 이들은 많았고, 기도원화한 교회의 희망의 메시지로는 더 이상 포용할 수 없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바로 그런 이들에게 기도원은 여전히 필요했다. 교회는 절망의 나락에서 몸이 망가지고 정신이 비틀어지고, 공동체의 통합에 부정적인 역할을 하는 이들, 그들을 수용할 다른 신앙 공간을 여전히 관리하고 있었다. 이 시기에 기도원이 바로 그런 장소였다.
정리하면, 한국의 모던공간으로 교회는 이렇게 그 시대의 모던을 실현하면서 대형화하고 있었다. 즉 교회는 한국적 모던을 체현하며 성공을 이룩했다. 그 과정에서 모던 한국의 ‘아픔’을 흡수했다. 나운몽의 기도원이 그랬고, 박태선의 부흥회가 그랬다. 그리고 선발대형교회의 부흥회 같은 예배가 또한 그러했다.
하지만 그 성공은 한국적 모던의 질서에 순치된 신앙만을 제도화했다. 신앙은 아픔을 흡수했으나, 아픔의 제도를 문제시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게다가 그 제도를 정당화하기까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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