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m Jin Ho's Theology Article Archi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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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3/17 (16:41) from 61.73.110.38' of 61.73.110.38' Article Number : 1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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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호의 신들의 사회9]교회의 신학 대 신학대학의 신학, 갈등이 시작되다
교회의 신학 대 신학대학의 신학,  
갈등이 시작되다
[한겨레21 / 2011.03.14 제852호]  





1970~80년대를 전후로 하는 시기에 한국개신교가 이룩한 가파른 양적 성장의 요인을, 앞의 글들에서는, 크게 세 가지 범주로 설명하였다. (1)도시빈민으로 편입된 이농민들의 대대적인 신자화, (2)빌리 그레이엄 전도집회를 비롯한 대규모 선교대회를 매개로 한 시민계층의 광범위한 개종, (3)모던체험의 문화공간으로 몰려든 전후 청(소)년 계층의 교회 유입이 그것이다.
이 글에서는 이렇게 하여 대형화된 교회들을 ‘교회의 신학’이라는 관점에서 살펴보고자 한다. 한국교회가 처음으로 신학적으로 자기 서사를 갖추기 시작한 때가 바로 이 시기였다. 한편 한국의 신학교들이 체계적으로 운용되기 시작한 때도 바로 이 시기다. 한데 신학교들과 신학자들은 이러한 교회의 신학에 대해 대체로 무관심하거나 비판적이었다. 즉 교회의 신학과 신학대학의 신학은 다분히 서로 대립적이었다. 이것은 이 시기 한국기독교를 이해하는 또 하나의 키워드다. 여기서는 바로 이런 시각에서 한국에서 벌어진 ‘신학 대 신학’ 혹은 ‘교회 대 신학’의 긴장과 갈등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려고 한다.

순복음 신화, 욕망의 신앙으로 퍼져나가다

교단들의 교회 재적교인 통계를 합친 수자로 보면 1960년에 60만 명을 조금 상회하였는데, 1990년에는 1천만 명을 넘는다(재적교인 통계는 중복교인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실재보다는 훨씬 과장되어 있다). 이런 양적 폭발 과정에서 대형교회들이 등장했다. 한국개신교의 폭발적 성장은 대형교회로 부상한 몇몇 교회들에 의해 추동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60년에 5,011개였던 한국교회의 총수가 1990년에는 35,869개로 약 615%가 늘었지만, 이 가운데 미자립 교회의 비율이 70~80%에 이른다는 점을 대형교회의 등장과 약진의 추이와 비교하면 한국개신교의 성장이 얼마나 대형교회 현상에 치우쳐 있는지를 보여준다.
이 중에서 순복음교회의 성장은 상상을 초월한다. 1958년 천막교회로 설립할 당시 교인 5명이던 교회가 1993년에는 60만 명으로, 35년 동안 무려 12만 배나 성장했다. 이러한 순복음 신화는, 대략 1980년대부터 이단시비가 본격화되지만, 교단을 불문하고 수많은 교회와 목회자들에 의해서 회자되고, 명시적이든 비명시적이든 선망과 모방의 대상이 된다. 이른바 순복음 현상이 한국교회의 양적 성장이 폭발적으로 일어나던 시기를 풍미했다.
가장 두드러진 것은 병치료, 방언 등 이른바 ‘신유(은사) 체험’이 많은 교회들을 들썩이게 했다는 점이다. 은사능력을 가진 부흥사들이 수많은 교회를 돌아다니며 부흥회를 이끌었고, 교회는 부흥회를 정례화하였다. 또 평신도 은사자들도 교회를 돌아다니며 간증집회를 이끌었는데, 이들은 종종 목회자와 갈등을 일으켰다. 또한 교회를 돌아다니며 목회자들의 은사능력을 비교하는 교인들의 수가 적지 않았으며(이렇게 교인들의 순회는 재적교인수와 실교인수의 오차를 낳는 주요인의 하나가 된다.), 많은 목회자들과 교인들이 은사자가 있는 기도원을 찾아다니곤 했다. 한편 노천기도원은 은사체험을 갈구하는 이들의 열광적 기도로 넘쳐났으며, 부흥사가 되려는 이들의 훈련의 장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만이 아니다. 순복음 현상은 은사 중심적 신앙을 만연시킨 것만이 아니라 한국교회와 목회자, 그리고 평신도의 일상적 생각에 미친 영향 또한 지대하다. 은사체험은 ‘일상에 끼어들어온 비일상’에 관한 것이다. 그것이 삶과 기억을 뒤흔들어 놓음으로써 새로운 태도로 현재를 맞이하며 살아가게 하는 동력이 된다. 한데 은사체험은 모든 이에게 일어나지 않는다. 또한 종교 현상학적으로 소득수준이 낮고 학력이 낮으며, 남성보다는 여성, 그리고 노년의 연장자들에게 보다 잘 나타난다. 그리고 간접체험까지 포함한다고 해도 신유체험자의 수는 상대적으로 많지 않다.
한데 순복음 현상의 다른 측면은 ‘일상에 끼어든 일상’에 관한 것이다. ‘성공지상주의’가 바로 그 대표적 사례다. 건강과 재산의 축복이 영적 축복과 서로 얽혀 있다는 삼박자구원론은 도시 빈민으로 편입된 이농민들에게 현실의 불리한 여건을 극복하게 하는 삶의 적극적인 의지로 이해될 수 있었다. 그것은 성공의 가치를 위해 모든 효과적인 수단과 방법을 도구화할 수 있는 삶의 태도다.

순복음 현상에서 대형교회 신학으로의 발전

그런 점에서 조용기의 삼박자 구원론은, 비록 나락으로 추락한 이들의 구체적인 고통에서 유래한 신앙담론에서 시작된 것임에도, 인간의 보편적 욕망을 신앙화한 것으로 확대해석될 여지를 갖고 있다. 더욱이 전후의 반공주의적 증오의 체제가 발전동원체제로 이행하는 시기의 지배적인 제도화의 논리가 성공지상주의였으니, 이런 신앙은 일종의 시대정신처럼 거의 모든 개신교도들의 생각을 사로잡을 수 있었다. 그런데 이것이 1970년대 중후반 이후 하나의 신학으로 자리잡기 시작한다. 그것은 미국의 ‘번영신학’(prosperity theology)이 한국의 대형교회적 신앙과 결합되어 나타난 결과다.
미국의 번영신학은 1960년대 후반 이후 일어난 새로운 대부흥운동 과정에서 등장한 성공지상주의적 신학이다. 법학자이자 미국 기독교교회협의회(NCC) 실행위원인 딘 켈리(Dean M. Kelley)가 포착한대로 이 시기 미국의 주요 교단들은 성장이 멈추거나 감소하기 시작한 반면, 새로운 복음주의 교단들과 교회들이 급격한 성장을 시작했다.
바로 이러한 성장에 대한 신학적 서사로 등장한 것이 이른바 번영신학인데, ‘적극적 사고’를 신학의 키워드로 제시한 노만 빈센트 필(Norman Vincent Pearl)이 그 선구자이며, 그의 문제틀을 목회에 적용하여 커다란 성공을 이룬 크리스탈 교회(Crystal Cathedral)의 목사인 로버트 슐러(Robert Schuller), 󰡔목적이 이끄는 삶󰡕을 저술한 새들백 교회의 목사 릭 워렌(Rick Warren), 󰡔긍정의 힘󰡕의 저자인 레이크우드 교회의 목사 조엘 오스틴 등, 미국의 대표적인 대형교회 목사들이 이 번영신학을 이끄는 이들이다.  
요컨대 번영신학은 1970년을 전후로 하는 시기 이후 급부상한 미국판 대형교회(‘메가처치’라는 용어는 바로 이러한 특성의 대형교회를 함의하는 개념이다)의 자기 서사로 등장한 신학으로, 그 용어 그대로 신학의 키워드를 ‘번영’에 두고 있다. 번영이라는 목적을 신앙적 현실관의 최상위에 두고 그것을 위해 자신의 내면을 적극적으로 구성해 가는 자기 개발적 삶의 태도를 강조하는데, 이것은 공동체성을 강조했던 19세기에서 20세기로 넘어가는 시기의 부상한 복음주의와는 다른 양상의 복음주의 신학이 등장했음을 뜻한다. 그런 의미에서 번영신학이 담고 있는 신앙 양식을 ‘신복음주의’라고 부르는데, 신자유주의적 성공담론의 원조격 되는 담론 양상이 바로 이 미국판 대형교회 신학에서 유래하였다.
조용기는 아마도 1970년대 후반 경부터 로버트 슐러와의 관계를 본격화한 것으로 보이는데, 바로 이 시기에 번영신학의 내용을 빌어 순복음교회의 신학을 발전시킨 것으로 보인다. 이후 한국의 대형교회의 목사들이 앞 다투어 번영신학을 수입하여, 빠른 속도로 한국개신교가 지향하는 교회의 신학으로 자리잡아갔다. 목회의 다양한 현장을 통해서 교인들은 번영신학 식의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자기개발을 일종의 신앙적 가치관이자 윤리로 수용하게 되었다. 하여 최근 이들 번영신학의 중심인물들의 책은 불티나게 소비되고 있고, 교회의 갱신 프로그램의 신학적 골격을 이루고 있다.(이에 대하여는 다음에 좀더 자세히 다룰 것이다.)
조용기의 삼박자 구원론은 다분히 신유능력에 의존하는 은사주의적 기복주의 신앙의 기조가 강하게 깔려 있는데, 이것은 중산층 남성, 그리고 학력 수준이 높고 보다 합리적인 청년층의 기호와 잘 맞지 않는다. 즉 그 자체로는 담론의 이미지가 신학의 보편성을 담아내기에 적절하지 않았다. 그러나 로버트 슐러의 번영신학을 차용함으로써 조용기의 삼박자 구원론은 모던담론으로의 이미지 갱신 효과를 얻을 수 있었다. 그것은 순복음교회에 대한 불편함이 남아 있는 이들에게도 그 신학이 영향력을 갖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며, 그런 점에서 ‘조용기-로버트 슐러’의 조합이 만들어낸 적극적 사고의 신앙/신학 담론은 1970년대 대형교회의 신학으로 많은 개신교도와 목사들의 생각에 파고들어 갔다.

신학 대 신학, 교회 대 신학, 갈등의 시작

한편 개신교의 교세가 급성장 하던 시기에 각 교단들은 넘쳐나는 목회자의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목회자 양성을 위한 신학교육의 투자를 활발히 했다. 여기에 교단분열의 효과는 신학교육 열기의 또 다른 동기가 된다. 교단 간 경쟁은 교회수 뿐만 아니라 자기 교단의 신학적 색깔을 생산하는 경쟁에 열을 올리게 했던 것이다. 급성장기의 교회들은 신학교육의 내용에 관여할 여유가 없었고, 신학교에 대한 투자는 이전 시기에 비해 매우 활발했다. 그리고 해외 유학을 마치고 현대적 신학을 공부하고 온 학자들이 속속 신학대학으로 유입되었다. 신학대학이 양과 질적으로 급성장하는 계기를 맞게 된 것이다.
그밖에 지난 글에서 언급한 바 있던, 최대의 교단인 대한예수교장로회의 대규모 분열을 야기시킨 세계교회협의회(WCC) 가입 문제를 둘러싼 분열(통합측과 합동측) 또한 한국개신교 신학의 질을 급부상시키는 기회가 되었다.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측을 비롯해서, 한국기독교장로회나 감리교, 성결교, 성공회 등 WCC 가맹 교단의 신학자들은 현대적 신학운동과 교류할 장을 얻었다. 특히 당시 유럽의 교회들이 활발하게 논의하고 있던 맑스주의와의 대화, 아시아 종교들과의 대화 같은 뜨거운 주제들을 다루는 신학 전문가들이 속속 등장하게 되었다. 또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아우슈비츠 이후의 신학’ 운동이 일어나면서 유대교와의 교류가 본격화되었고,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1965) 이후 가톨릭교회가 현대적 신학과 대화를 시작하게 되면서, WCC를 매개로 하는 신학적 대화의 장은 한층 폭넓어졌다.
그런데 신학교육이 활성화되자 교회와 신학 간의 대립이 본격화되었다. 신학대학마다 ‘신학은 교회를 위해 봉사해야 한다’는 강령 같은 말들이 수없이 회자되었으나, 유럽 선진국의 신학이 진정 교회를 위한 신학이라는 생각이 신학자들을 지배했고, 교회는 신학대학이 배출한 학생들이 교회 현장에 유용하지 않으며, 신학자들의 언어 또한 목회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생각에 지배되었다.
그럼에도 신학과 교회가 서로 협력적이 될 때가 있는데, 주로 타교단의 신학이나 신앙을 비판할 때가 대표적이다. 한국의 주요 교단들은 순복음교회에 대한 비판을 본격화했다. 대략 1980년경부터다. 목사들은 이단시비를 시작하였고, 신학자들은 번영신학에 대한 비판을 시작하였다. 번영신학은 고난을 삭제하고 축복만 강조한다는 비판이 주된 논조였다. 1943년 히틀러 암살음모에 가담하였다가 처형당한 신학자인 디트리히 본 훼퍼가 나치의 성장주의를 지지한 독일교회들을 겨냥해서 한 말인 ‘값싼 은혜’가 번영신학을 겨냥한 말로 재활용되었다.
그런데 번영신학은, 말했듯이, 순복음교회 만의 신학이 아니다. 그것은 대형교회들의 자기서사로 빠르게 확산되고 있었다. 하여 이러한 신학자들의 비판은 대형교회의 신학에 대한 비판이며, 대형교회를 선망과 모방의 대상으로 여기던 중소형 교회들의 신학에 대한 비판이기도 하며, 목회 과정에서 목회자들의 신학적 담론에 동화된 신자 대중의 신앙(적 욕망)에 대한 비판이었다. 그런 이유로 신학과 교회 간에는 높은 벽이 생겼고, 신학은 한국교회들로부터 영향력을 제약당한 고립된 공간이 되었다.
하여 이 시기 신학이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영역은 교회가 아니라 교회의 변두리였고, 교회적 신학이 아니라 비판적 신학이었으며, 보수가 아니라 진보였다. 이것은 훗날 1990년대 후반 이후 교회와 신학 간의 전쟁에서 교회가 신학을 정복하여 무력화시키는 사태의 출발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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