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m Jin Ho's Theology Article Archi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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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호의 신들의 사회10]진보신학이 꽃 피우다(한겨레21. 854, 201.3.28)
WCC 현상과 더불어
진보신학이 꽃피우다
[한겨레21 / 2011.03.28 제854호]  





향년 90세의 원로신학자 유동식은 1982년도에 발표한 글에서 한국신학이 꽃을 피우던 시기로 1970년대를 평한다. 나는 이런 평가를 1980년대까지 연장해도 무방하다고 본다. 우선 지난 글에서 본 것처럼 교회는 한국판 번영신학을 이 시기에 발전시켰다. 비록 학문적 체계에 있어서나 성과물의 양에 있어서 번영신학이 활성화되는 시기는 1990년대 후반 이후로 보이지만, 미국적 담론을 한국적 상황에 적용한 일부 대형교회 목회자들의 창조적인 재해석이 돋보이는 시기는 뭐니뭐내해도 1980년대였다.
한편 ‘한국적인’ 진보신학의 시대 또한 1970~80년대에 도래했다. 이 글은 한국의 교회 상황과 진보적 신학의 활성화 문제의 연계성에 집중하고자 한다.

이 대목에서 먼저 개신교 교단들 간의 분열 얘기를 해야겠다. 간략한 스케치를 하면, 신사참배를 거부했던 이들을 주축으로 하는 ‘고신파’가 1951년 분립했고, 1953년에는 현대신학을 수용하는 한국기독교장로회(기장)와 거부하는 대한예수교장로회(예장)가 갈라섰다. 이 둘은 식민지 시대의 유산이 한국전쟁 기간 중에 교단분열로 나타난 사례다.
두 번째 교단분열은, 1948년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44개국 147개 교회 대표가 모여 세계교회협의회(WCC. World Council of Churchs)를 조직하고, 미국 에반스톤에서 열린 제2차 총회 때 한국교회가 가입신청을 하게 되면서(1954년) 교회들 간에 벌어진 격렬한 논쟁의 산물이다. 그 결과 1959년 장로교에선 WCC 가입파인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측(예장 통합)과 반대파인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측(예장 합동)이, 감리교에선 가입파인 기독교대한감리회(기감)와 반대파인 예수교대한감리회(예감)가, 1961년 성결교에선 가입파인 기독교대한성결교(기성)와 반대파인 예수교대한성결교(예성)로 각각 분립한다.(그러나 성결교는 WCC에 참여하지 않기로 했다.) 그리고 1960년대 이후 WCC 가입 반대파 교단들, 특히 예장 합동측에서 무수히 작은 교단들이 분립하여 나가게 되는 것이 세 번째 분열이다.
이러한 분열과 맞물리며 한국교회는 급속한 성장을 거듭한다. 이것은 교단간의 성장주의 경쟁의 과열을 낳았다. 교세 성장률이 최고조에 있던 1975년 각 교단의 성장주의 정책을 보면 그것이 여실히 드러난다. 예장 통합측은 2,685개 교회를 1984년까지 5천 교회로 늘리겠다는 계획을 입안했고, 합동측은 2,484개 교회를 10년 후에 1만 개 교회로 늘리겠다고 선언했으며,, ‘기감’은 15,000교회, 100만 신도 계획을 세웠고, ‘기성’과 ‘기장’은 2천 교회 운동을 벌였다. 대개가 무모하리만치 과도한 목표치였다.
한데 이 글에서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이러한 교단간 규모 경쟁에서 신학생 수가 성장 목표치를 가정한 숫자로 급격히 팽창했다는 점이다. 이는 당장 신학교에 대한 투자의 급격한 증대를 가져왔고, 교원의 수요 또한 급격하게 늘어났다. 한편 성장에 여념이 없던 교단 총회나 개별 교회는 신학교의 교수(敎授) 방법과 내용에 대한 통제에 신경을 쓸 겨를이 없었다. 즉 학문적 자율성이 한국 개신교 역사상 가장 잘 구현되고 있었다.
교단 소속 신학대학들 간의 경쟁이 불음 뿜은 중심 주제는 WCC에 관한 것이었다. 상대적으로 더 보수적인 교단들이 WCC를 반대한 이유는, 가톨릭, 그리스정교, 심지어 삼위일체론과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정하는 유니테리언(Unitarian)까지 함께 하는 교회일치운동에 대한 문제의식이 하나고, 타종교와의 대화를 강조하는 종교다원주의 혐의가 둘째며, 용공 혐의가 마지막 다른 하나다. 하여 이들 교단의 신학자들은 사력을 다해 자신들의 자폐적인 근본주의적 신앙을 정당화하고자 애썼고, 반공주의와 신앙을 결합하고자 노력했다. 하지만 이들의 노력은 근본주의 특유의 반지성주의와 반현장주의적 성향 탓에, 경험을 신학적 논리로 구성하는 데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했다.
반면 WCC 지지 교단의 신학자들은 새롭게 열린 엄청난 국제적 학문시장의 풍요로운 지적 자원을 접촉할 기회를 누릴 수 있었다. WCC 세계대회는 매 7년마다 개최되는 것을 원칙으로 하며, 수십 개국의 수백 개 교단에서 파송한 수천 명의 신학자들과 교회지도자들이 모여 세계의 문제들에 대해 함께 논의하는, 그리스도교계의 최대의 행사다. 한 회기에 발표된 문헌만도 수천 편에 이르며, 대회의 의제는 향후 수년간 국제적 학문의 장을 주도하였으며, 이때 주목받은 연구자는 국제적인 주목을 받는 학자로 발돋음할 수 있었다. WCC에 가입한 한국의 각 교단의 대표자들과 신학자들은 바로 이런 신학의 보고를 접하게 된 것이다.
WCC에서 가장 주목받는 학문적 담론들은, 특정 시공간과는 무관한 교리적 논의 따위가 아니라, 현장(locale)에 대한 신학적 성찰을 다루는 ‘맥락적 신학’(contextual theology)이었다. 여기에는 지역적 맥락(제3세계)과 의제적 맥락(섹슈얼리티, 인종 등)이 포함된다. 그것은 WCC를 축으로 하는 세계 신학계가 이제까지 그리스도교를 지배했던 서구 중심주의적 담론 양식을 지양하려는 노력과 깊은 관련이 있다. 서구신학 또한 특정한 시공간적 맥락의 산물이었음에도 초시간적인 진리 담론처럼 행세해왔던 것이다. 그것은 서구의 제국주의의 역사와 맥을 같이 한다. 서구 제국의 팽창주의와 서구 그리스도교의 선교론은 ‘쌍생적’이었다는 문제제기다.
이에 대한 반성으로 제기된 대표적인 신학 담론이 ‘신의 선교(미시오 데이) 신학’이다. ‘미시오 데이’라는 용어는 1952년에 처음 사용되었고, 1960년대에 서구신학에 대한 서구인 자신의 비판적 대체물로 확고한 자리를 잡게 된다. 여기서 이에 대립되는 개념은 ‘교회의 선교’다. 곧 세계를 지배하고자 하는 서구 제국주의적 선교가 아니라, 가장 낮은 곳에서 가장 낮은 이의 모습으로 세계와 만나 세계를 섬기는 ‘신의 선교’인 것이다.
이 개념이 한국에 처음 도입된 것은 1970년 어간이다. 그리고 이것은 한국에서 서구중심주의와 아울러 대형교회주의에 대한 비판으로 수용되었다. 교회의 대형화가 빠르게 진행되고 있지만 아직은 그리 두드러진 교회가 있지는 않았던 시절, 그리고 번영신학이 소개되어 대형교회의 자기언어로 자리잡기 이전의 시절에 이미 한국의 신학자들은 규모 중심적 교회주의에 대해 ‘신의 선교’를 강조했던 것이다. 이것을 가장 빠르게 제도화하려 했던 교단은 ‘기장’으로, 교단의 각 신앙선언서와 인권지침서 및 교육지침서 등에 반영하기 시작했다. 다음 글에서 다룰 1970~80년대 한국의 기독교사회운동은 WCC를 중심으로 하는 진보적 신학운동의 가장 적극적인 수용계기가 되었고, 또한 그러한 신학의 가장 열렬한 소비범주가 되었다. 아무튼 ‘신의 선교’ 신학은 수많은 현장의 문제들과 결합하면서 등장하는 이른바 맥락적 신학들에 대한 서구신학의 지지이론이 되었다.
한국에서 가장 주목받은 맥락적 요소는 ‘분단’, ‘군부독재와 개발주의’, 그리고 ‘다종교 상황’의 문제였다. 곧 국제적 학문시장에서 한국을 대표하는 신학은 ‘통일과 탈분단의 신학’, ‘민중신학’, ‘종교신학’이었다. 이러한 진보적 신학들은 제도권과 비제도권이라는 두 개의 구별된 학문의 장에서 각기 두드러진 발전을 이룩하였는데, 후자는 기독교사회운동을 다루는 다음 글로 미루고 여기서는 제도권 내부에서의 진보적 신학운동만을 이야기해보자.   
통일과 탈분단의 테마는 주로 유럽과 미국의 선교국이나 국제네트워크의 그리스도교 기구들과 연관되어 있는 학자들 사이에서 보다 많이 발전했다면, 민중신학은 주로 ‘기장’의 한국신학대학(현 한신대학)을 중심으로, 그리고 종교신학은 ‘기감’의 감신대학을 중심으로 발전했다. 물론 그렇게 한정할 수만은 없다. 다른 대학이나 기구들의 학자들 가운데도 진보적 신학의 전문가들 또한, 많지는 않았지만, 매우 중요한 활약을 하였다. 그리고 통일과 탈분단의 신학은 주로 WCC 등 국제 그리스도교기구들을 단위로 해서 전개되는 남북간의 국가간 정치신학 범주의 영역에서, 민중신학은 반독재와 관련된 국가정치신학의 범주에서, 그리고 종교신학은 종교간 대화의 범주에서 국제적으로 활발한 토론이 되었다.
이들 학자들과 기구활동가들, 목회자들이 주축이 되어, WCC에 가입된 교단을 포함한 여러 교단들에서 진보적 문건들이 신조나 선언 형식으로 만들어졌고 통용되었다. 비록 교회 현장은 대다수가 매우 보수적이고 심지어 반지성주의적 근본주의에 경도되어 있었음에도, 교단이나 기구들은 일정하게 진보적인 신학을 기조로 하는 다양한 활동이 매우 활성화되어 있었다.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그것은 교회가 신학에 대한 지원을 늘렸음에도 학문적 자율성을 침해하지 않는 상황이 조성된 ‘의도하지 않은 결과’다. 이러한 비의도성의 핵심에는 WCC를 축으로 하는 진보적인 국제적 학문시장이 조성된 결과다. 한국 신학계의 ‘국제통’들은 한국의 지역학적 신학의 활성화를 이끌었던 주역이었다.
반면 한국교회의 과대성장에 관한 신학적 논의는 그다지 많지 않았고, 별로 주목할 만한 성과도 없었다. 예외적으로 몇 건의 연구들이 주목받았는데, 종교사회학 분야에서 한완상은, 발전지상주의로 인한 급속한 이농현상이 야기한 공동체성의 상실과 정체성의 붕괴가 불안심리를 야기하였는데, 교회의 성장은 바로 그것에 대한 반작용의 열광으로 해석하였다. 비교종교학 분야에서 유동식은 무교적 전통신앙과 순복음교회의 모성적 성령 신앙이 갖는 신앙구조적 유사성을 강조함으로서, 교회의 빠른 성장을 해석하려 했다. 그러나 대개의 신학자들은 빠른 성장 자체를 성령의 역사로 보는 나이브한 말을 반복할 따름이었고, 그것의 맥락성을 해석하려는 시도를 거의 하지 않았다. 나아가 한국 교회의 자기 해석적 틀인 번영신학에 대한 논의는 적어도 1990년대 중후반 이전까지는 신학자들에 의해서는 거의 시도조차 되지 않았다.
요컨대 교회의 급격한 성장의 문제는 국내외 신학의 장에서 ‘외부’였다. 하여 많은 신학자들은 대체로 무논리로 성장을 자화자찬하거나 반대로 성장지상주의를 비판하거나 했다. 그리고 교회는 이러한 학문적 논의를 신학적으로 반박하지 못했고, 그리 관심도 없었다. 교회가 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반박은 신학교가 교회에 유용한 학생들을 배출하지 못하다고 뒷담화 투로 불평하는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이러한 반박은 적어도 1980년대까지는 신학의 내용과 형식에 거의 영향을 미치지 못하였다.
하여 목사수련생으로 교회에서 일하면서 동시에 신학대학에서 공부하는 신학도들은 심각한 정체성의 혼란을 체험해야 했다. 물론 학문의 진보성과 교회의 보수성 사이에서 중립지대가 없지는 않았다. 공부를 게을리 하는 것과 교회를 외면하는 것, 이런 어느 한 편에 경도된 극단의 행동만이 정체성의 혼란을 해소하는 유일한 선택지는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중립지대를 선택한 학자들이 생각보다 많았기 때문이다. 현장성을 무시한 채 서구 중심적인 낡은 신학 담론을 매우 추상적으로 반복하여 말하는 신학자들이 바로 그렇다. 적어도 당시의 대학에선 이것이 교회 현장을 존중하는 모습처럼 여겨졌다. 그들도 교회 현장에서 유용한 신학을 가르칠만한 언술을 가지고 있지 않았음에도 말이다. 그러므로 신학도들 가운데는 맥락적 신학보다는 서구 중심적인 추상적 신학에 더 관심을 기울이는 선택을 함으로써 갈등의 중립지대를 찾으려 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훗날 진보적 신학이 퇴조하고, 교회의 통제가 강화될 때, 이러한 중립지대를 선택한 신학자들과 신학도들은 담론 지형의 중심에 서게 된다. 즉 과거처럼 약한 정체성의 존재가 아니라 강한 정체성의 존재로 부상한다. 그래서 신학의 탈식민주의는 더욱 중요해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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