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m Jin Ho's Theology Article Archive

1999/06/25 (13:39) from 203.252.17.174' of 203.252.17.174'	Article Number : 31
김진호	Access : 2705 , Lines : 105

斷과 公의 변증법 - IMF 관리체제하에서 민중신학적 실천 담론의 모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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斷과 公의 변증법
IMF 관리체제하에서 민중신학적 실천 담론의 모색

1

민주주의의 축제마당이라는 선거를 앞두고 청천벽력 같은 '국가 부도' 선고를 맞이했다. 설사 선거 결과가 기대밖이라 해도 어느덧 그런 것쯤은 크게 괘념치 않을 만한 내성이 생겼다. 그저 성탄절 선물을 기대하며 걸어놓은 양말 속에 아무 것도 들어 있지 않음을 발견한 때의 허탈함 이상은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희망을 위한 반대급부적 전조쯤이라 여기면서. 그런데 전혀 뜻밖에도 주님의 오심을 기리는 우리에게 내림한 것은, 희망의 전조를 견딜 만한 가벼운 고통쯤으로 여기던 안이한 우리의 머리 위에 벼락치듯 떨어진 철퇴 뭉치. 이른바 현대판 신탁통치라는 'IMF 관리체제'의 내림. 까딱하면, 불쏘시개로도 부적합한 원화를 내팽개쳐 버리고, 가치가 될 만한 현물을 잔뜩 몸에 지닌 채 현해탄을 헤엄쳐 식량과 연료를 사 와야 하는 운명에 처할지도 모른다는 다소 과장된 불안감에 한 해를 보냈다.[1]
위기다. 신정 연휴와 설 연휴를 보내고 졸업·입학 시즌을 맞이하기까지 교인들의 얼굴엔 수심이 가시질 않는다. 막막함일 게다. 혹은 불안감. 갓난 자식에게 분유를 사 주기 위해 도둑질하다 잡혔다는 어떤 사람처럼, 당장의 생계에 대한 아무런 대책조차 갖지 못한 채 내던져진 사람들의 처절한 이야기가, 불과 몇 달 전 '국민소득 만 달러', OECD 회원국이 되었다는 선진국 진입 1순위 나라 백성의 이야기라니. 이럴 때 교회 안팎으로 '하늘뜻을 선포하도록 자리매김된 자'에게 '실어증세'(失語症勢)가 나타난 것이다. 설교자의 위기다. 이것은 동시에, '무엇을 이야기할 것인가'를 도무지 발견하지 못해 당황하는 '신학의 위기'이기도 하다. 더구나 민중신학자로서 역사에 대한 구체적 문제의식을 신앙의 전면에 내세우는 신학의 재구성을 부르짖으면서도 석 달이 넘도록 아무 말도 못한 채 전전긍긍하기만 했던 내 모습이 참을 수 없이 부끄럽고 분통이 난다.
지금이야말로 희망을 얘기해야 할 때다. 그런데 무엇을 말하나 …, 궁하다. 입이 궁하고 생각이 궁하다. 이럴 때 말을 잊지 않으려고 그토록 많은 생각과 많은 토론을 해 왔건만, 그토록 지식 쌓기에 욕심을 부려왔건만, 흉측한 괴물을 앞에 두고 잔뜩 주눅든 얼굴로 목구멍을 맴돌며 튀어나오지 않는 말에 답답해하듯 허망하게 의자에 앉아 있다.
이럴 땐 되는 안 되든 아무 말이라도 지껄여대야 한다. 희망의 원리를 찾아 이리저리 말하기를 억지로라도 시도해 보아야 한다. 그것은 IMF 관리체제를 맞아 지금 엄습하고 있는 그리고 앞으로 닥쳐올 재앙에 직면할 교회 안팎의 '위기의 사람들'에게 목회자로서 그리고 민중신학자로서 할 말을 갖기 위함이다. 바로 우리 시대의 하늘뜻인 '희망의 원리'를 찾아, 그 신탁을 선포함으로써 말이다. 그리하여 신앙이 시사하는 희망은 어떤 함의를 갖는가, 그것은 과거를 반성하는 어떤 논거를 제시해 주며, 미래에 대한 어떤 비전을 지향하게 하는가, 또 그것은 어떤 실천과 사고를 조직하게 하는가, 를 성찰하기 위함이다. 지금 허우적대며 이 말 저 말을 찾아 헤매는 일 속에서 희망의 원리를 발견하려는 우리의 성찰적인 실천 담론의 실마리가 풀리기를 기대해 본다.

2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은 파시즘을 야기한 1930년대 독일 자본주의의 위기를 맞아 '대중의 강간'이라는 분노섞인 표현을 썼다. 이것은 그의 불후의 논문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의 '후기'에 등장하는 어구인데(Benjamin, 229), 파시즘의 '정치의 미학화'를 비판하는 데 사용한 용어다. 그는 자신이 '기계복제시대'라고 명명한 근대 과학 문명의 불가피한 변화를 '대중 문화의 등장'에서 본다.[2] 비로소 '대중'(귀족이나 부르주아지가 아니라)이 문화의 주체가 된 것이다. 그는 이런 대중 문화의 근대적 매체를 '영화'에서 발견한다. 그에 의하면 이제 '영화'라는 문화 매체는 (작가의 예술혼<아우라>이 표현되는 장이 아니라) '대중 정치'를 야기시키는 공간이 되었다. 이른바 민중이 주인되는 사회가 대중의 정치에 의해 도래하리라는 믿음에 그는 고무된다. 그러나 그가 설정한 이러한 희망의 가능성은 역사에서 철저하게 배신당하고 만다. 그가 본 것은 (역사의 주역이 된 대중의 대두가 아니라) 파시즘의 매체 조작 바로 그것이었던 것이다. 이것은 대중의 욕망을 조작하여, 대중을 왜곡된 욕망의 분출자로 만들고, 결국 역사의 위선적인 진보, '진보라는 이름의 질곡'의 공범자로 만들어버렸던 것이다. 벤야민은 바로 이것을 '대중의 강간'이라는 노기어린 표현으로 적고 있는 것이다.[3]
한국의 '3~5공'까지의 정부는 대중을 정치로부터 배제시키기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강압적 권력 형태를 띠어 왔다. 그러나 1980년대 후반 폭발적으로 등장한 '대중의 정치'[4]는 이런 유형의 권력의 통제 방식이 한국에서 더 이상 유용하지 않음을 입증했다. 이제 대중의 정치는 공식적인 활동무대를 갖추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동시에 온갖 자극적인 매체 조작에 의해 규범을 상실한 대중의 무분별한 욕망 표출이 난무하는 시대의 서막이었다. 욕망 표현이 다양해졌다는 것을 문제 삼고자 함이 아니다. 문제는 욕망이 '왜곡된 자아 중심주의'로 온통 물들어버렸다는 데 있다. 대중은 물욕에 찌든 투기꾼이 되었고, 배타적인 집단주의(학연·지연·혈연 등)의 투사가 되어 버렸다. 권력은 자신들의 이익만을 위해 매체 조작 기술자들을 고용하여 대중을, 대중의 욕망을 조작한 것이다.[5] 대중의 조작된 욕망의 무분별한 표출은 심각한 이기주의를 조장했다. 자신의 욕구 표출의 자유만이 신성하다고 여겨졌고, 자신의 집단주의가 보호되는 것만이 민주주의의 요체인 양 생각되었다. 그러는 가운데 대중은, 조작의 주역인 권력이 의도하는 대로, 점차 탈정치화, 탈동원화(demobilization)되어 가는 동시에 특정 사안(학연·지연·혈연에 매개된)에서만 정치화, 동원화되었다.
대중은 권력에 의해, 권력의 욕망에 의해 '강간'당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는 '고통 불균등 분배 체제'의 재등장이었다. 그 동안 최악의 복지제도를 가지고도 실업의 위기를 심각하게 체험하지 않았던 고성장 사회 신화는 한갓 휴지조각이 되어버렸고, 백만이 넘는 사람을 막막한 생존 위기의 나락에 던져버리려는 결정(노사정위원회의 정리해고 입법화 합의)을 보면서도 그 선택의 불가피성을 이해하지 않을 수 없는 체제가 등장하게 된 것이다. 마치 공동묘지에 세워진 팻말 같은 대중 사회의 위기적 현실을 담은 체제가 출범한 것이다. 이른바 IMF 관리체제의 시작.
우리의 1998년은 여기에서 출발해야 한다. 바로 '대중의 강간'에 대한 분노에서 말이다. 그런데 분노는 '비판'을 수반한다. 그러나 우리가 진정 희망의 원리를 찾고자 한다면, 비판은 그 주소를 잘 찾아야 한다. 왜냐하면 종종 비판은 대중을 강간한 자를 재강간하는 것으로 귀결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강령은 모순의 원흉에게 보복하기 위해 바로 그들의 논리를 모방하는 모습을 띤다. 예수님의 원수 사랑 계율은 바로 여기에서, 비판을 수행하는 성찰적 자세를 가르친다. 응징의 순환고리의 단절.
지금 우리를 짓누르는 지난 시대의 암울한 유산은, 원하든 원치 않든 간에, 자아 중심주의적인 배타주의적 욕망의 체제에 바로 우리가 공범이 되었다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다. 우리가 받은 배제주의라는 세례는, 우리가 인식하든 않든, 이미 우리의 사고를 지배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진정 희망의 원리를 지향하는 비판을 수행하려면, 비판 주체인 '우리'로부터의 '단절'이 필요하다.
(벤야민의 동료이자 프랑크푸르트 학파 제1세대의 대표적 인물인) 아도르노는 이것을 말하기 위해 '개인의 말살'을 주장한다(Adorno, 92~94). 또 안병무는 "폭력의 악순환으로부터의 斷"이라고 표현한다(안병무 1982, 184). 예수님은 이것을 '원수 사랑' 명제로서 제시한다. "너희는 …라고 들었지만, 나는 …라고 말한다"라는 표현은 바로 청중의 인식을 지배하는 배제주의적 사고로부터 '斷'하라는 요청인 것이다. 요컨대 이것은 폭력적이고 배제주의적인 체제의 논리로부터의 단절을 뜻한다. 그리고 이 단절의 대상은 원흉인 '아무개'만이 아니라 그것의 세례를 받은 우리 모두를 포함한다.
벤야민은 이 단절을 '메시아 사건적 종말'에서 찾았다(Benjamin, 343~56).[6] 이것은 탈배제주의가 실현될 그 결정적 사건이 일어날 '궁극의 지점에 대한 소망'에서 바로 희망의 원리가 발현한다는 주장이다. 유다교의 종말론에서 영향받은 그의 유물론적 종말사상은 도피적/탈세적 종말주의가 아니다. 그것은 미래의 현재로의 개입에 초점이 있다(Benjamin, 355).[7] 이 점에서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의 "때가 찼다.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선포와 벤야민의 메시아니즘은 합류하고 있다. 민중신학자 안병무는 "당신이 가장 그리운 얼굴이 누구입니까?"라는 박성준의 질문에 뜬금없이 이렇게 대답한다. "나는 '폭동'을 그리워해요. '민중봉기'를! 이 그리움, 오래됐어요. …… 내게는 제일 보고싶고 그리운 게 그거예요. 종말론적인 환상이라 할 수 있겠지만, 세상이 완전히 한 번 바뀌는 그런 개벽이 그립지, 개인의 얼굴 따위 뭐 그리 그립겠소"(안병무·박성준, 33). 벤야민과 안병무, 이 두 분들은 모두 종말을 갈망하는 현재의 소망, 그 소망을 갖고 사는 현재의 삶 속에, 바로 그러한 현재의 실천 속에서 '희망의 원리'를 찾고 있다. 아도르노는 비록 종말론을 명시적으로 얘기하지는 않지만, 현실에서 결코 완전히 실현되지는 않는 배제주의에 대해 '끝없이 부정'하는 비판을 말하면서, 거기에서 구원의 희망을 발견한다(Adorno, 279). 이 세 분들은 모두, 이 세계를 지배하는, 심지어 우리의 무의식까지 지배하고 있는 배제주의에 결코 타협하지 않는 비판을 말하고 있다는 점에서 합류하고 있으며, 이것은 희망의 원리로서의 예수님의 종말론적 메시아주의와 일치한다.
한편 안병무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이 비판의 입지점을 '公'이라고 말한다(안병무 1986). 이것은 창조신화에 대한 그의 알레고리적 이해의 귀결인데, 여기서 그는 인간 죄의 근원성이 있다면 그것은 '사유화할 수 없는 것을 사유화한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公을 진정 公답게 하는 것'의 필요성을 역설한다. 이것은 대단히 소중한 민중신학적 상상력의 소산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 이유는 (폭력의 악순환으로부터) '斷'하는 실천이 현재의 우리의 삶에 개인적 윤리적 강령 이상의 의미를 지니기 위해서는, 즉 희망의 현재화/역사화를 향한 사회적 실천을 함축하기 위해서는 '公의 신학'이 요청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公은 斷의 구체화/물질화를 위한 신학적 교두보를 제공해 준다. 가령 대중을 강간한 자를 재강간하는 식으로 수행되는 보복은 힘을 점유한 뒤 권력이 대중의 복수심을 자극하여 자신의 가학성을 발휘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그것은 폭력과 배제주의를 속성으로 하는 권력의 본원적 욕망의 표출이며, 따라서 그것으로부터 '斷'한다는 것은 권력의 욕망을 억제하는 公의 실천을 필요로 하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公의 실천은 권력 욕망의 억제를 지향하는 관념뿐 아니라 그러한 제도를 지향하게 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희망의 원리의 잠정적 실현태의 하나로서 복지민주주의를 생각하게 된다. 왜냐하면 복지민주주의는 '공적인 것'을 독점하려는 권력의 욕망을 억제하는 경향을 지닌 현실적인 하나의 사회적 실현태이기 때문이다.

3

우리 시대의 복지민주주의를 논하기에 앞서, 희망의 현재화/역사화의 한 성서적 실례로 요시아 개혁을 언급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국가복지'적 문제설정이 담긴 이 역사적 실험이 성서 전반에 뚜렷한 잔영을 남기며 야훼 신앙 전통의 주된 강조점의 양상을 형상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몇 년 전에 나는 요시아 개혁의 성격을 '위로부터의 혁명'이라고 명명한 바 있다(김진호, 1991, 202 이하). 이 용어는 구조론적 혁명이론가인 트림버거가 개념화한 것으로, 국제적 압력으로 인한 체제 통합의 위기를 맞아 국가 관료들이 주도하여 위로부터의 대개혁을 단행했던 일본의 메이지 유신이나 이집트의 낫세르 체제 등의 수권 과정을 설명하기 위해 제안된 것이다(Trimberger 1972). 비록 그녀의 과정 설명 하나하나를 요시아 개혁에 적용하는 데는 무리가 많지만, 그럼에도 트림버거 가설의 핵심적 내용, 즉 '국제적 제국주의의 압박' 아래 '국가 관료층을 구성하는 특정 지배 분파가 중심'이 되어 대지주 세력 등을 견제하고 몰락하고 있던 농민층에 재분배를 단행함으로써 '국가적 계급구조의 일정한 변형'을 이룩하여 수권 기반을 확고히 하였다는 것은, 요시아 개혁의 이해에 유용하다.

요시아 개혁은 크게 두 가지 점에서 특성을 지닌다. 하나는 흔들리는 왕권체제의 재확립이요, 다른 하나는 민중적 개혁이다. 이 두 요소가 어떻게 결합될 수 있는가를 알려면 그 당시에 이르기까지의 한 세기 반에 이르는 역사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우선 요시아 개혁은 미완의 '위로부터의 혁명'이던 히즈키야 개혁의 재현이라 할 수 있다. 히즈키야 개혁은, 예후 쿠데타에 희생됐던 아하지야 이래, 아달리야, 요아스, 아마지야 등에 이르기까지 유다 왕국의 네 명의 통치자가 연거푸 피살되는 등, 왕권이 극도로 불안하던 주전 9세기 후반에서 8세기 전반까지의 상황에 그 연원을 두고 있다. 이 과정은 정국 장악 능력에 있어 왕실이 중대한 손상을 받았음을 시사한다. 또한 이것은 다른 한편으로는 귀족 세력의 국정 개입 능력의 강화와 맞물려 있다. 초기 왕국 시절(솔로몬-로호보암 시대) 民에 대한 가장 심각한 압박이 '부역'이었다면, 주전 8세기 이사야 예언자 시대에는 대지주 귀족들의 축적의 횡포가 두드러지게 부각되고 있다. 이런 정황은, 농민층으로 과대대표될 수 있는 '암하아레츠'(Oppenheimer 1977)가 왕실과 귀족 간의 정쟁에서 '왜 번번히 전자의 편에 서게 되었는지'에 대한 사회경제적 이유를 설명해 준다.[8] 아마지야가 피살당한 이후, 암하아레츠에 의해 등극한 우찌야(열하14,21)[9]도, 역대기에선 그의 성공을 대단히 강조하고 있지만, 사실 북왕국 여로보암 2세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한 평범한 군주에 불과했다(Miller & Hayes, 383). 그리고 우찌야의 아들 요담을 승계한 아하즈는 내내 앗시리아의 영향권 아래 있었다.
이상에서 보듯 히즈키야가 아하즈에게서 왕위를 승계할 당시 유다의 왕권은 지극히 불안정했다. 이 때 안정된 왕권을 위협하는 내적 세력은 지난 120여 년간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해 왔던 대지주 귀족 세력이었고, 그들 배후에 직간접으로 앗시리아가 도사리고 있었음은 이론의 여지가 없다. 요컨대 국제적 제국주의의 압박으로 국내적 통합이 심각하게 위협당하던 상황이었다. 다행히 그가 즉위할 당시 앗시리아는 내란에 휩싸였고, 그 사이 앗시리아로 유출되던 막대한 양의 공납물이 고스란히 왕실 창고에 비축되었다. 필시 그는 이 기금을 바탕으로 해서 개혁을 단행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의 개혁은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는가? 첫째로, 그것은 예루살렘 성전의 기능을 강화하는 조치와 맞물려 있다. 반아달리야 봉기 때부터 예루살렘 성전 고위 사제들과 암하아레츠가 왕당파의 주요 세력이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둔다면, 히즈키야의 이 조치는 자신의 지지세력의 국정 장악 능력을 강화하려는 목적과 결부되어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둘째로, 그의 개혁은 세제 개혁에 큰 비중을 두고 있음이 분명하다. 비록 성서 전승들이 그의 개혁의 사회적 성격에 관해 침묵하고 있지만, 유다의 물자 비축성으로 추정되는 지역명[10]과 "왕에게 속한"(lmlk)이라는 히브리어 명문이 새겨진 도기들은 필시 과거 앗시리아로 유출되었을 식량을 포함해서 현물로 징수됐을 조세 등을 비축하는 행정체계가 수립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며(Miller & Hayes, 444~45), 다른 한편으로 이것은 조세의 도량형이 표준화되었다는 것을 뜻하기도 했을 것이다(Bright, 404). 이러한 과세의 표준화가 불공평한 조세 징수 관행을 억제하는 효과가 있었음은 두말할 나위 없다. 요컨대 권력을 통해 조세 감면을 받아왔던 귀족은 더욱 많은 양의 조세 의무를 져야 했을 것이고, 이것은 일반 농민이 감세 대상이 될 사회경제적 가능성을 열어 준다. 국가는 더 이상 기층대중의 잉여생산물의 가혹한 수탈에 의존하지 않고서도 필요 자산의 축적이 가능하게 된 것이다. 요컨대 히즈키야가 단행한 개혁의 본질은 앗시리아라는 고대적 제국주의의 잠재적 압박 아래서 흔들리는 왕권의 강화에 초점을 두고 있었으나, 그것의 수행 과정은 왕권 견제 세력인 귀족의 권력과 부를 억제하는 방향으로 진행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그의 지지세력인 소토지보유농, 즉 암하아레츠에게 부를 재분배하는 일정한 효과를 발휘했을 것이다.
그러나 앗시리아를 재통합한 산헤립의 주전 701년의 서진(西進)은 이제 막 출발한 히즈키야 개혁의 기반을 송두리째 앗아갔다. 그리고 그의 개혁이 어느 정도의 성과를 이룩했는지, 성서는 그리 만족할 만한 답을 주지 않는다. 요컨대 야훼 신앙사에서 그의 개혁은 그리 뚜렷한 각인을 남기지 못했음이 분명하다. 그를 승계한 므나쎄 왕은, 55년이라는 긴 통치기간에도 불구하고, 앗시리아에 깊이 예속된 매우 비자립적인 통치자였는데, 이 기간은 개혁 세력이 실각하고 친앗시리아 파가 득세한 가운데 선왕의 개혁 기반이나 정신이 크게 훼손당하는 시기였다.
므나쎄의 아들 아몬이 즉위한 지 얼마 안 돼서 피살되자, 정국에는 회오리바람이 몰아쳤다. 암하아레츠가 다시 등장하여 살해자들을 죽이고 8세의 요시아를 등극시킨 것이다. 그 내막을 알 길은 없으나, 이 왕의 집권에는 암하아레츠 외에 레위인, 그리고 왕실 서기관 집단 등이 개입되어 있었으며, 그 중심부에는 예루살렘의 고위 사제와 일부 중앙의 귀족 세력이 있었다. 이들이 권력 연합을 형성하고 안정된 수권 기반을 갖추기 위해 시행한 정책이 이른바 요시아 개혁인 것이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이것은 히즈키야 개혁의 재판(再版)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성서에는 이 개혁에 관한 많은 정보가 내장되어 있을 뿐 아니라, 그것의 깊은 의의에 대한 반응이 야훼 신앙사 앞뒤를 올라가고 내려가면서 펼쳐지고 있다. 그리하여 히즈키야 개혁은 후대의 요시아 개혁으로 말미암아 그 의의가 야훼 신앙사에서 그늘로 밀려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요시아 개혁호의 출범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국제정세상의 변화와 맞물린 국내의 정세 변화를 고찰해야 한다. 당시는 국제적 세력 재편기였다. 앗시리아-이집트로 이어지는 국제적 패권국가 연결망이 바벨론-메대로 이어지는 연결망에 의해 대체되고 있던 시기였다. 이러한 상황은 유다 조정에서 므나쎄 정권의 배후 세력인 친앗시리아파를 크게 위축시켰다. 아마도 므나쎄를 이어 등극한 아몬의 피살은 당시 집권층의 이러한 불안감과 결부된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필시 도전 세력을 결집시킬 명분이 되었을 것이며, 대중의 공공연한 정치 개입을 자극하는 계기이기도 했을 것이다. 대지주 귀족의 횡포로 예농화되어 가던 소토지보유농 계층의 불만이, 마치 부글부글 끓는 물의 증기가 솥뚜껑을 밀치고 대기로 치솟듯 터져 나왔다. 왕정사회에서 왕의 피살이라는 상황은 그토록 민감한 사안이었던 것이다. 여간해선 불만이 저항으로 전화되기 어려운 농민층[11]이, 왕의 피살이라는 비보를 전하며 선동한 일단의 사람들[12]에 의해 정치적으로 동원된 것이리라.
준혁명 상황에서 집권하게 되었음에도 요시아 정부가 개혁 정책을 본격화한 시기는 재위 제18년부터다.[13] 그만큼 도전 세력이 만만치 않았다는 얘기다. 필시 이것은, 쇠퇴일로에 있었음에도 여전히 유다 인근에서 위협적인 힘을 갖고 있던 앗시리아의 위세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아무튼 요시아 정부는 이 문서로 인해 개혁의 고삐를 바짝 움켜잡을 수 있었음이 분명하다. 마치 혁명기와 같던 집권 상황처럼, 고위 사제, 왕실 서기관, 왕실 예언자, 고위 관료 등의 연대가 가시화되고, 농민을 선동하는 대중 예언자들의 활동이 활발해졌다. 일시에 개혁 연합은 대세가 되었던 것 같고, 저항 세력의 입지는 크게 위축되었다. 이런 분위기를 타고 왕실과 집권 세력은 개혁 정책을 본격화할 수 있었던 것이다.
성서는 이 개혁의 사회적 특성에 대해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넓은 의미로 요약하면, 대지주들의 치부 수단을 억제함으로써 예농화되어 가던 농민을 복원시키고, 그럼으로써 대지주 귀족의 국정 개입 능력을 약화하여 결과적으로 왕권을 강화한다는 전략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던 것 같다. 이 점에서 요시아 개혁 연합은, 비록 계급적 차원에서 보수파가 포함되어 있었으리라는 점을 배제할 수는 없지만, 이들 상이한 이해관계를 갖는 여러 분파들을 묶어내면서도 과감한 개혁 정책을 실행할 수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는 요시아 개혁의 국가복지적 차원에 대해 간략히 언급하고자 한다.
우선 우리가 주목할 것은 신명기 14장 22~29절에 반영된 십일조에 관한 규정이다. 당시 십일조는, 오늘날과 같은 헌납금이 아니라 중앙성소에 내는 일종의 조세였다(Cr semann, 85). 십일조에 관한 언급들이 예루살렘이나 벧엘(창세28,22; 아모4,4) 등, 남북 이스라엘의 중앙성소와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은 이것을 입증한다. 그렇다면 이 조세의 주요 부담자는 누구인가? 십일조와 관련된 전승은 '소출'의 십분의 일을 강조한다. 이것은 십일조가 인구의 절대다수를 점하고 있던 소토지보유농과 결합되어 있는 국가세임을 암시한다. 부재지주에게 소출을 얘기하는 것은 어색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신명기 14장 22절 이하에 언급된 십일조는 "야훼의 성소에서 먹고 마시라"고 한다. 만일 십일조가 이렇게 운용된다면, 사실상 조세로서의 성격은 폐지되고 만다. 그럼에도 폐지를 명시하는 대신 이렇게 표현하고 있는 것은 소출의 십분의 일을 야훼께 '바치지 말라'고 명시할 수는 없었던 탓이리라. 결국 농민은 이 과중한 조세로부터 면세를 받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되면 국가는 도대체 어떻게 운용되는가? 그 대체 수입원이 전제되지 않고서는 도무지 기획할 수 없는 정책이다. 우리의 상상은, 그 동안 전 국토의 많은 부분을 장악하고 있으면서도 조세를 포탈해왔던 대지주 귀족들에게 국세를 징수함으로써 그것이 가능했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요시아 정부는 이런 조치를, 그것이 성공적이든 아니든, 결코 시행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요시아 개혁의 조세 정책은 농민을 예농화 또는 유민화했던 귀족의 토지 겸병(兼倂)의 위협으로부터 농민을 보호함으로써, 대지주 귀족을 견제하는 데 성공하였고, 이것은 국내적으로 대중의 지지를 받는 체제의 통합을 가져왔으며 또한 국제 경쟁력의 강화를 이룩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리하여 강한 수권 능력을 갖춘 정부를 구축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본문에 따르면, 요시아의 조세 개혁은 또 다른 조치와 결합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28~29절에는 또 다른 십일조가 언급되고 있는데, 매년 드리는 십일조가 아니라 3년마다 드리는 십일조에 관한 얘기다. 이것은 거류하는 지역의 성채 안에 비축되어야 한다. 즉 십일조의 '조세'적 성격을 기본적으로 규정지었던 중앙성소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의 용도는 십일조가 비축된 지역의 '사회적 약자들의 생활보조'와 관련이 있다. 다시 말하면 이것은 일종의 중앙정부가 추진한 지방단위의 '복지기금'으로서 활용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면제년 제도의 도입과 함께(Cr semann, 87~90 참조), 단순히 몰락 농민을 위한 수혜적 보호조처만이 아니라, 그들을 다시금 노동계급으로 복원시키는 재투자의 의미를 지녔을 것이다.
요컨대 위로부터의 개혁 주체인 왕실은 소토지보유농민의 예농화를 억제하기 위해 아래와 같은 정책적 조치를 취하고 있다. 첫째로, 조세를 1/3로 감세하여 농민의 조세부담률을 대폭 낮추었다. 왕실은 국가의 체제 통합의 비용을 농민의 조세로 충당하는 대신 대지주 귀족에게서 충당하고자 했다. 이미 말한 것처럼 이러한 조세 정책은 빈부격차를 완화하여 막대한 부를 축적한 대지주 귀족 세력을 견제하는 정책효과를 지녔다. 둘째, 몰락한, 또는 몰락하고 있는 농민의 복귀를 위해 일종의 복지세와 면제년이라는 부채탕감 조치를 과감히 도입했다. 여기서 우리는 시혜의 차원을 넘어서 '탈노동화한 대중을 재노동화'하는, 현대적 의미의 복지정책과 유사한 정책을 요시아 개혁에서 찾아볼 수 있다. 물론 이러한 신명기 개혁의 배경에는 분명 야훼주의적인 해방적 정신이 담겨 있었고, 이 정신이 반야훼주의의 온상인 (왕권적) 정부 속에 일정하게 스며들 수 있었음을 반영한다. 또한 이 전통은 후대에 야훼 신앙사를 기술하는 과정에서 과거 역사를 해석하고 미래를 전망하는 해방적인 희망의 원리의 한 측면을 구성하게 되었다.

4

한국의 복지 수준은, OECD 회원국들과의 비교는 고사하고, 1인당 국민소득 1만 달러 이상의 중상위 소득국들과 비교해서도 단연 최하위를 차지한다. 그나마 1987년 이후 분출한 노동쟁의로 일부 노동계급의 교섭력이 괄목할 만하게 증대한 대가로 '기업복지'가(국가복지가 아니라) 확대되었다.[14] 이것은 일본식 복지제도를 이식하려 했던 결과로 보이는데, 자본주의적 시장의 폭력성으로부터 노동자와 기타 서민을 보호하기 위한 국가적 분배의 조절 기제를 기업에 전가시킨 것에 다름 아니다. 게다가 국가복지에 대한 일본 기업복지의 대체 효과는 상당히 실질적인 반면, 우리 나라의 경우는 몇몇 대기업 노동자에 한정된, 그리고 그 질에 있어서도 매우 미미한 '형식적 복지'에 그치는 형편이다(송호근 1994, 386).
더욱이 최근 한국 자본주의의 위기는, 이런 형식적 수준의 기업복지마저 사치스런 현실로 만들어 버렸다. 외환위기를 겪으면서 한국의 내로라하는 기업들이 무차별적인 적대적 인수합병의 대상으로 전락해 버린 지금, 복지제도 운운하는 것은 너무 한가한 얘기처럼 들린다. 그러나 복지제도라는 것 자체가 자본주의적 '위기'에 대한 인본주의적 대응으로 고안된 것이라면, 위기 이후에나 복지 문제를 얘기할 수 있다는 주장 또한 얼마나 한가한 소린가? 올 한 해 동안 실직자의 수가 1백5십만 명이 훨씬 넘을 것이라는 추정이 공공연한 상황에서, 그것도 실직자에 대한 거의 아무런 대책도 갖고 있지 못한 터에, 이 위기를 넘길 때까지 무작정 참고 기다리라고 하는 것은 너무나 무책임한 소리처럼 들린다.
더욱이 IMF 관리를 성공적으로 넘겼다는 멕시코의 예를 보아도, "현재의 위기를 잘 극복하면"이라는 말이 단순히 '장밋빛 꿈'을 키워 주지만은 않는다는 사실이 명백하다. 1997년 9월 현재 세계 제11위의 수출국이라는 화려한 경제성적표를 자랑하는 멕시코 자본주의의 이면은 그리 아름답지만은 않다. 무엇보다도 멕시코의 심각한 분배구조의 파행성[15]은 IMF '선교사'들의 신자유주의적 성장주의의 배설물이 얼마나 독성이 심한지를 여실히 보여준다.[16] 자본이 선점한 지구화라는 세계적 변화의 압력 아래서, 국가/정부는 '공급중심적' 역할에 치우칠 것을 강요받는 상황이다(김정훈, 240). 즉 국가는 초국적 자본이 자국에서 만개할 여건을 공급하기 위한 지역 정책을 추구하지 않을 수 없게 되는데, 이것은 많은 경우에 '분배' 구조의 악화를 억제하는 조절 능력의 포기 또는 양도를 수반한다. 이렇게 되면 빈부 격차의 심화를 넘어서 결국 체제의 안정적인 재생산 자체가 위협받는, 이른바 '시장의 실패'를 초래하고 말 것이다. 요컨대 신자유주의자들의 성장론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지만, 자본주의라는 수레의 무한대로 치닫는 원심력적 질주를 그냥 내버려 둔다면, 필경 그 바퀴에 깔려 죽는 무수한 희생양을 양산할 뿐 아니라 그 수레 자체도 제 힘에 못이겨 산산조각날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자본주의는 이런 원심력의 파괴력을 견제하는 구심력적 장치들을 만들어 왔는데, 그 중의 하나가 바로 복지인 것이다. 문제는 성장과 복지를 제도 속에 얼마나 잘 조화롭게 결합시키느냐에 있다.[17]

이미 김영삼 정부는 세계 경제의 추세를 예측하며 전향적인 국가발전 전략을 모색한 바 있다. 이른바 '정보화 사회에 대비하는 국가경쟁력 강화 전략'을 정부의 정책 곳곳에서 시행하고자 했다. WTO 체제를 맞이하여 정부의 자본에 대한 국가자본주의적 방제 수단이 시대착오적 유물임이 분명해진 상황에서, '작고 효율적인 정부론'이 나온다. 여기에는 크게 두 가지 대응 전략이 함축되어 있는데, 하나는 자본에 대한 정부의 '규제 완화'를 전제로 하는 신자유주의적 전략이며, 다른 하나는 하이테크 중심의 기술경제 개발 전략이다. 이 점에서 김영삼 정부의 성장모델은, 3공화국 이래 일관되게 추진되어 왔던 신중상주의적 성장모델과의 분명한 차별성을 지니고 있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분배구조의 안정적 재생산에 기반한 '국민적 삶의 질'의 향상이라는 차원이 지속적으로 유보되는 방식의 성장이라는 점에서 과거의 권력과 연속성을 지닌다. 송호근은 이러한 김영삼 정부의 성장모델이 "효율성의 사적 변환에는 성공한 반면, 공공성의 보장에는 실패하였다"고 평가한다(송호근 1995, 163). 요컨대 한국 자본주의는 그 양적 성장에도 불구하고 (사회적 불평등을 넘어서는) 화해의 품성을 제도화하는 데 실패했다.
여기서 우리는 민중신학의 '公'에 대한 문제제기를 다시금 숙고하게 된다. 백종국은 김영삼 정부의 자본과 기술 중심적 규제 완화 정책을 계기로, 한국 자본주의가 몇몇 재벌기업의 이해관계에 의해 국가적 정책이 좌지우지되는 '천민자본주의'로 귀결하고 말았다고 비판한다(백종국 1992). 그러한 체제의 배설물을 지금 우리는 씹고 있는 것이다. 한국 자본주의의 주도세력인 재벌은 무분별한 차입경영를 통해 그 천민성을 최대한 발휘했고, 한국 정부의 막대한 인적 제도적 자원은 한갓 이들의 후견인 노릇을 하는 데 그쳤던 것이다. 공공성을 상실한 정부와 '시장의 실패'는 서로 맞물려 있는 것이다.
야훼계 문서 저자(Jahwist)는 창세기 2~11장에서 확산 심화되어 가는 인간의 죄의 전개를 신화적으로 그리고 있다. 그런데 그의 신학에 따르면, 인간 범죄의 원형성은 '경합적 관계'(rival relation)와 결부되어 있다. 성서는 카인의 아우 살해가, 심지어 신께 예배드리는 일에서조차 상대방을 경쟁자로 의식하는, 그리하여 상대방보다 우월한 자신을 확인하려는 욕망 이외에 다른 설명을 주지 않는다. 한편 창세기 11장의 바벨탑 이야기는 이 세상의 언어를 하나로 통일시킨, 다시 말하면 이 세상에는 하나의 담론만이 존재한다고 확신했던 어떤 (가상적 혹은 실존의) 존재의 신 모방 욕망을 소재로 하고 있다.[18] 이것은 자아 중심적인 총화만을 허용하는 배제주의를 전제한다(김진호 1995). 그런 욕망의 주역에게 있어서 신은 자신이 도달하지 못한 권력의 정상에 존재하는 분으로 인식된다. 요컨대 이 이야기는 배제주의와 인간의 범죄의 연계성을 시사하고 있다. 그러므로 창세기 3장의 아담의 죄를 '공적인 것의 사유화'라고 본다면, '公'의 문제는 '비경합성'과 '탈배제주의'를 요건으로 한다.[19]
이런 점에서 국가의 공공성은 경합성과 배제주의를 기본 속성으로 하는 시장의 기재에 위임할 성격의 것이 아니다. 요컨대 '규제 완화'라는 신자유주의적 이데올로기는 야훼적 정치경제 윤리에 위배된다. 이런 점에서 송호근이 김영삼 정부의 규제 완화 조치에서 절차적 차원의 완화와 목적 차원에서의 완화가 뭉뚱그려 이해되는 우를 범했다고 문제제기한 것은 경청할 만하다(송호근 1995, 154). 즉 기업 활동의 목적 자체가 영리 추구, 즉 일체의 대상에 대한 私事化에 치중되어 있는 한, 정부의 규제 완화가 공공성을 사사화하는 것으로 나타나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정부의 역할에 있어서 공공성을 확대한다는 것은 시혜적 차원의 복지 개념을 넘어선다. 왜냐하면 시혜적 의미의 복지 이해는 탈배제주의를 포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탈배제주의를 실천하는 공공성이란, 배제당한 자에 대한 단순한 구휼 차원에서의 복지라기보다는, 그들을 우리 사회 속에 '재통합'하는, 냉혹한 세계 체제의 배제주의의 희생양들에게 해방을 가져다 주는 정신이 담긴 역사적 제도와 관련된다. 이러한 적극적 의미의 복지는, 요시아 개혁에서 비롯된, 탈노동화한 대중을 재노동화하려는 취지의 면제년 정신과 상통한다. 요컨대, 오늘날 하느님 나라의 잠정적 실현태를 구상하는 데 있어 적극적 복지의 문제 설정은 중요한 실마리가 될 수 있다.

5

위에서 나는 斷의 구체화/물질화를 위한 신학적 교두보를 논하는 데 있어 민중신학의 公의 문제설정은 중요한 함의를 갖는다고 보았다. 바로 그 속성에서 오늘날 민중신학이, 적극적 복지라는 국가복지적 제도를 요청하는 논거가 제시된다. 하지만 이 글을 마감하면서 나는 민중신학은 다시 斷의 문제설정에 의해, 公의 문제설정이 자칫 빠지기 쉬운 유물론적 환원주의의 오류를 견제해야 한다고 본다. '斷의 신학'은 역사에서 영구한 안착지를 구하지 않는다. 그것은 배제주의에 대해 끝없이 비판하는 순례의 여정을 그 신앙적 윤리적 품성으로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1998년 IMF 관리체제하에서 민중신학의 실천 담론은 이와 같이 구체성과 추상성을 오가는 '斷과 公의 변증법'을 내포해야 하는 것이다. ♣

김용학, 1992, {사회구조와 행위} (서울: 나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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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1. 지난해 12월 24일 새벽 0시 5분, 임창렬 당시 경제부총리는 G7 소속 국가 등 선진국의 80억 달러 조기 지원 및 세계은행(IBRD)과 아시아개발은행(ADB)의 각각 30억·20억 달러 지원 합의를 발표하였다. 이 '크리스마스 선물'로 일단 모라토리엄의 위기는 넘길 수 있었다. 그러나 물론 그것은 위기의 해소가 아니었다.
2. 특히 그는 대중의 역사의 무대로의 등장이 영화 같은 전자통신 기술을 통한 시각적 매체를 경유하고 있음을 통찰하고 있다.
3. 동일한 문제의식을 아도르노는 1944년에 출간된 한 에세이에서 이렇게 표현한다. "지배세력이 생산해낸 고통을 인식하지 못하도록 금지시키는 일은 재배세력의 메커니즘에 속"한다(Adorno, 92). 또 빌헬름 라이히도 1933년의 자신의 대표적 저작에서 이러한 문제의식을 이와 같이 표현한다. "설명되어야 할 것은 배고픈 어떤 사람이 도둑질을 했다든가 착취당한 어느 노동자가 파업을 일으켰다는 사실이 아니라, 배고픈 사람들 중의 대부분은 왜 도둑질을 하지 않으며, 착취당하고 있는 사람들 중 대부분은 왜 파업을 하지 않는가라는 사실"이다(Reich, 42). 이와 같이 동시대의 대표적 사상가들은 독일 나치즘이라는 파시스트 정권의 등장에 공범자로 등장한 대중의 문제에 당황하고 있으며 그 가슴 아픈 현상을 설명하려 한다.
4. 나는 이것을 '대중의 민중화'라고 주장한다. 여기서 민중은 '해방적(하느님 나라 지향적)으로 정치화된 대중'이라는 함의를 갖는다. 이것은 통상 민중의 개념으로 함의되어 왔던 상반된 두 요소, 즉 고난의 담지자로서의 민중과 역사의 주체로서의 민중이라는 두 요소를 분화시켜 후자의 의미로 민중을 재개념화한 것이다. 실제로 이 두 요소는 역사적으로 결코 동일화될 수 없는 '차이'를 지닌다. 그러므로 이렇게 민중을 재개념화하면 경험적 성찰을 담은 이론을 구성할 수 있게 된다. 또한 민중신학 민중론이 주로 공격을 받아왔던 민중의 우상화라는 비판에 대한 반비판의 입지를 확보하게 된다. 이러한 형성론적 민중 개념화의 과제는 역사의 주체로서 형성되어 가는 민중의 형성 과정을 어떻게 구체화하는가에 있다. 그리고 이렇게 이론화하는 과정은 필연적으로 대중의 고난과 대중의 정치화의 상관관계를 추적하는 작업을 동반한다(김진호 1993, 27~33).
5. 대중 매체 연구자들에 의하면 한국 사회에서 '대중 조작'이라는 권력 행위 유형이 계기적으로 등장한 시기는 6공화국을 기점으로 한다(이효성, 210). 한편 정치학적으로 권력은 권력 행사자의 차원에서 다음 네 가지 유형으로 나눌 수 있다: 권위, 강제력, 설득, 조작. 이 가운데, 앞의 셋은 권력 행사자의 의도가 명시적인 반면, 조작은 권력 행사자의 의도가 비명시적인 특성을 갖는다(이효성, 206~208).
6. 이것은 이른바 그의 '지적 유언장'이라 불리우는 [역사철학 테제]의 주제인데, 여기서 그는 '진보의 타락'에 대한 대안적 문제의식을 유물론적인 유다주의적 종말론에서 찾고 있다. 이러한 주장을 담은 이 글은 직접적으로는 히틀러-스탈린 협약에 대한 반응이지만, 그 자신의 표현대로 "20년 동안 소중히 간직해 왔던" 사상의 귀결인 것이다.
7. 이 글([역사철학 테제]) 마지막 절인 제18절 말미에서 그는 "메시아적 현재시간의 모델로서 전 인류 역사를 엄청나게 축소해서 포괄하고 있는 현재시간(Jetztzeit)은 우주 속에서 인류의 역사가 만든 바로 그 형상과 정확하게 일치한다"고 말하며, 또 부제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이렇게 해서 그는 메시아적 시간의 단편들로 점철된 '현재시간'으로서의 현재라는 개념을 정립하게 되는 것이다."
8. 이와는 반대로 솔로몬 왕국의 분할 시에는 농민층이 왕에 대항하고 있다.
9. 여기서는 신명기역 역사서에는 왕위 승계를 표시하는 상투적인 어구인 "… 죽고 …가 그 뒤를 이었다." 대신 "'암하아레츠'가 우찌야를 왕으로 삼았다."라고 표기되어 있다. 이것은 최소한 정상적인 왕위 승계가 아니라는 사실을 함축하고 있다.
10. 여기에 표기된 지명들은 헤브론, 십, 수꼿, 그리고 mm t이다. 여기서 mm t는 '정부'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이며, 따라서 예루살렘을 지칭했을 것이다.
11. 농경사회에서 농민층이 정치적으로 동원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전자본주의 혹은 비자본주의 사회에서의 농민의 정치적 동원을 연구한 많은 학자들의 관심은 그 과정을 설명하려는 데 모아졌다. 베트남 혁명을 연구한 새뮤얼 팝킨은 대중(특히 농민) 개인이 혁명에 참여하게 되는 과정을 다음과 같이 도식화한다.
RP=(CB) P + (SB×L) - C
(RP: 개인이 혁명에 참여할 확률/ CB: 배제 가능한 집합이익<일반적으로 극히 작음>/ SB: 선택적 보 상/ P: 혁명의 성공 확률이 개인의 참여에 의해 증가하는 부분/ L: 정치적 리더십과 신뢰성/ C: 혁명 에 참여하는 데 드는 비용).
팝킨에 의하면 이 도식에 따라 가장 중요한 변수는 '정치적 리더십과 그들의 신뢰성'이라고 한다(김용학, 197~98). 즉 지도자들이 대중/농민의 정치적 동원에 가장 중요한 요소라는 것이다.
요시아를 등극시키는 데 참여한 암하아레츠는 이미 말했듯이 소토지보유농을 경향적으로 지칭한다. 그런데 이들이 정치적으로 동원되는 데는 지도자들의 존재와 그들에 대한 신뢰성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대중이 일상에서 접하는 사제들이나 선동의 전문가인 예언자들은 매우 적합한 직업집단이다. 더욱이 지난 두 세기 동안 몇 번이나 왕이 피살될 때 동원되었던 전통은 대중에게 성공 확률에 대한 커다란 확신을 심어 주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당시 유다는, 다소 예외적으로 P의 수치가 상대적으로 매우 높은 상황이었다고 추정할 수 있다.
12. 이러한 임무는 요시아 개혁호의 주역이 된 레위인과 일단의 사제들이 수행했을 것이며, 여기에는 조정의 고위 인사들이 관련되었을 것이다.
13. 열왕기와 역대기는 모두 요시아 제18년에, 일반적으로 원신명기라고 알려진 '율법책'을 발견했다고 보도한다. 그런데 역대기는 개혁의 시작을 재위 12년부터로 잡고 있다. 이것은 요시아가 20세 되는 해인데, 아무래도 작위적인 냄새가 난다.
14. 송호근은 한국 복지제도의 현실을 단적으로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고 한다. "한국의 복지체제는 '주변적 국가복지'와 '형식적 기업복지'를 결합한 형태이다"(송호근 1994, 385).
15. [한겨레신문] 1998.2.25자의 한 기사에 의하면, 멕시코의 실질 실업률은 25~50%나 된다고 한다.
16. IMF 관리체제의 대표적 실패 사례로 꼽히는 소말리아의 예를 여기서 상세히 이야기할 필요는 없으리라.
17. 국가적 위기를 맞은 우리에게 클라우스 오페(K. Offe)의 다음과 같은 주장은 주의깊게 경청할 만하다. "자본주의와 복지국가는 공존할 수 없지만, (자본주의는) 복지국가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김정훈, 240에서 재인용).
18. 일반적으로 추정하는 것처럼 야휘스트가 솔로몬 왕실의 한 서기관이었다면, 이 '총화주의자'는 어쩌면 솔로몬일지도 모른다.
19. 창세기에 대한 나의 이러한 신학적 상상력은 임혁백의 견해로부터 착상을 얻은 것이다. 임혁백은 '공공재'의 속성을 비경합성과 배제 불가능성이라고 본다(임혁백, 61~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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