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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3/10/08 (11:57) from 61.254.100.232' of 61.254.100.232' | Article Number : 273 |
올빼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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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cess : 2781 , Lines : 110 |
| 박승옥 <한국민주화운동과 운동문화에 대한 반성적 고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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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민주화운동과 운동문화에 대한 반성적 성찰 박승옥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이 글에 나타난 주장과 논지는 모두 글쓴이의 개인의견으로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의 공식 입장이 아님을 밝힙니다) (생각 하나) ‘민주화운동 시대’는 지나갔다 2003년 현재 5.18민중항쟁을 제대로 기억하는 청소년은 찾아보기가 힘들다. 심지어 광주에서도 그렇다. 광주지역 청소년들의 5.18민중항쟁에 대한 인지도가 해마다 떨어지고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12일 (사)광주사회조사연구소에 따르면 지난해 11월 19~12월 7일 광주지역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생활실태 조사 결과 5.18 발생연도를 묻는 질문에 응답자 1천 9백 31명 중 ‘1980년’을 정확히 알고 있는 학생은 12.1%에 불과했고 잘못 알고 있는 학생이 12.9%, 전혀 모르고 있는 학생이 73.7%를 차지했다.(ꡔ호남신문ꡕ, 2003.5.13) 1980년대 내내, 그리고 1990년대 전반기까지 해마다 5월이 되면 전국 각지에서 수많은 젊은 가슴을 흔들어놓던 ‘5월투쟁’은 이제 없다. 동시대의 사람들을 역사의 기억 속으로 호명해내던 광주는 1960년대, 70년대의 ‘4월투쟁’이 사라진 것처럼 역사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5월 광주는 오늘의 청소년들에게는 자신들의 현재와는 거리가 먼 역사책의 한 구석 글자로 존재할 뿐이다. 민주화운동 또한 급속히 역사 속으로 파묻혀 가고 있는 중이라고 말하는 것이 솔직한 표현일 것이다. 적어도 1997년 대통령선거에서 김대중씨가 당선되기 전까지 5월 광주문제는 과거의 문제가 아니라 현재의 당면과제였고 전남광주의 지역 현안이 아니라 전국의 국가 의제였다. 1980년부터 그때까지 5.18에 견줄 만큼 휘발성이 강한 당면의 사회 의제, 국가 의제는 없었다. 그러나 호남의 정치와 민주화운동의 상징인물이던 김대중씨가 권력을 잡자마자 5월투쟁과 5.18민중항쟁의 현재성은 썰물처럼 빠져나가 버렸다. 1995년 12월 21일 5.18특별법이 제정되면서 전두환, 노태우가 구속되고 국가권력의 폭력으로 말미암아 비 롯된 5.18민중항쟁이 국가 공식기념일이 되면서, 이것은 이미 예견된 일이기도 했다. 그리고 이제는 5.18기념식조차 국가가 공식기념식을 여는 광주 이외의 지역에서는 시민사회단체 주최로 소규모로 근근이 명맥을 이어나가고 있는 정도이며 그나마 지난날 이른바 ‘5월투쟁’의 비장함과 열기는 찾아보기가 힘든 것이 현실이다. 이것은 60년대, 70, 80년대 민주화운동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이제 민주화운동 시대는 지나가버렸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끔찍한 악몽의 군사독재 시대가 먼 과거가 되어버린 그만큼 정확히 민주화운동의 시대 또한 먼 과거로 역사의 벽걸이 액자 속으로 들어가고 있다는 현실을 인정해야만 한다. 물론 이 말은 이제 민주주의가 완성되었다거나 해결해야 할 민주주의의 일반 과제가 사라졌다는 뜻이 아니다. 민주주의운동이란 늘 현재진행형의 운동이란 사실을 부인하고자 하는 것도 아니다. 아직도 우리가 해야 할 민주주의의 실천 과제를 외면하자는 것도 아니다. 다만 이제 시간의 흐름과 함께 시대가 변했고 시대의 의제와 과제 또한 바뀌었다는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는 것이다. 어느 시대나 시대의 과제가 있고 그 시대의 주요 의제와 과제에 따라 사람들의 삶은 변모를 거듭한다. 적어도 20세기 후반기 한국의 시대적 과제는 빈곤과 기아로부터의 해방, 군사독재체제로부터의 해방, 분단의 극복이었고 민주화운동은 수많은 사람들의 삶의 체험을 규정했을 뿐만 아니라 뒤바꾸어 놓기까지 했다. 그리하여 그 숱한 저항과 희생과 헌신의 결과로 1987년 6월항쟁을 통해 군사독재체제는 그 일부가 무너졌다. 민주화운동 세력의 분열로 인해 지체 내지는 연기된 것이기는 하지만 민주화운동을 했던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세 사람이 차례로 대통령이 되었고 세상은 변했다. 민주화운동 세력 가운데 일부가 권력을 잡게 되면서 지금은 오히려 민주화운동 세력의 권력화와 일부의 부패, 아마추어리즘이 도마에 오르고 있는 실정이다. 한마디로 민주화운동 시대는 지나갔고 오늘의 시대 의제와 과제는 다른 그 무엇이다.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의 1년이 넘는 국회 앞 천막농성의 결과 2001년 1월 제정된 ‘민주화운동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에 관한 법률’과 ‘의문사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 2002년 7월 제정된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법’ 등은 이 같은 시대의 변화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법적 표현이다. 그러나 민주화운동 시대가 지나가고 미흡하고 더디지만 절차적 민주주의가 조금씩 확립되어 가는 이 시점의 한국 사회가 바람직한 사회, 또는 바람직한 방향으로 나가고 있는 사회라고 말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아직도 한반도는 남북이 분단된 상태로 시시때때로 교전이 일어나고 있다. 게다가 최근에는 북한핵을 둘러싼 갈등과 대립으로 언제 어느 때 우리의 의사와는 전혀 무관하게 전쟁이 일어날지 가늠조차 할 수 없는 불확실성의 긴장상태에 놓여 있다. 유니세프에 따르면 6개월에서 7살까지의 북한 어린이 62%가 발육부진 상태이고 30%는 빈혈 증상을 보이고 있는데 이는 방글라데시보다 더 비참한 상황이다. 그런 반면 남한은 1년간 버리는 음식물 쓰레기가 8톤 트럭으로 1,880대분, 년간 8조원으로 이 정도면 굶주리고 있는 북한 동포 전부를 4~5년이나 먹일 수 있는 액수이다. 또한 남한 내부에서도 2003년도 평균 하루 2명의 ‘빈곤자살자’와 1천 2백만 원짜리 한가위 선물상품 위스키로 상징되는 빈부격차가 나날이 더 심화되고 있다. 오늘날 우리는 이른바 근대화, 즉 경제개발과 성장의 구호 아래 극심한 자원 약탈과 생태계 파괴를 일삼은 대가로 갈수록 불안한 미래를 살고 있다. 점점 뚜렷해지는 기상이변과 함께 인간의 문명 자체가 과연 지속가능하겠는가라는 절망감을 불러일으킬 정도의 위기에 직면해 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이윤 창출의 도구가 된 첨단 과학기술은 그 파급효과에 대한 진지한 검토 없이 마구잡이로 남용되고 있고 지상의 모든 생명을 서너 번 싹쓸이 하고도 남을 핵무기로도 모자라 이제는 우주공간으로까지 날아가는 무기를 개발하겠다고 열을 올리고 있다. 그 한편으로는 포화상태에 이른 인구증가의 그늘 아래 도처에서 기아와 질병의 참상이 벌어지고, 도처에서 끔찍한 분쟁과 제노사이드가 자행되고 있다. 한마디로 성장과 진보라는 이름의 생산력 발전 지상주의는 물질만능의 점점 더 거세지는 소비중독과 함께 인간관계를 파괴하고 생산관계가 바뀌기에 앞서 사회 자체를 파괴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그리하여 바야흐로 인류는 제6의 멸종을 향해 스스로 눈먼 행진을 하고 있는 게 아니냐는 우려의 목소리도 나오고 있는 실정이다. 위험사회론, 제로 성장론, 대안공동체론 따위의 숱한 용어는 이런 현실인식과 고뇌의 진지한 표현일 것이다. 현실은 늘 역사를 필요로 한다. 정치적 필요에 따른 기억과 망각의 선택적 역사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의 대안적 삶을 모색하는 고통스런 탐구의 출발점 또한 늘 역사를 필요로 한다. 왜냐하면 모든 사회적, 환경적 문제의 뿌리는 결국 우리 인간과 인간사회 자체에 있으며 인간의 본성과 사회 그 자체에 대한 깊은 성찰은 결국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를 발전이나 진보, 근대화라고 믿고 달려왔던 역사를 다시 천천히 들여다보는 데서 출발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민주화운동 시대는 지나갔지만 이제 우리는 그 역사에 대한 성찰을 필요로 하는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다. 한국 민주화운동은 단순히 군사독재체제를 무너뜨리는 체제변화만을 시도했던 것은 아니었다. 단순한 민주주의와 자유와 평등과 통일의 정치체제 변혁만이 아니라 새로운 문화와 새로운 삶의 양식도 창출해내려 했던 새로운 사회 잉태의 역동적 문화운동이기도 했다. 무수한 사람들이 이 거대한 프로젝트에 참여했으며 그 과정에서 깊고 풍부한, 헤아릴 수조차 없는 복수의 삶이 어우러진, 소설보다 훨씬 더 다채로운 파노라마가 펼쳐진 한편의 시대 역사극이기도 했다. 한국 민주화운동의 성과와 한계에 대한 논의와 별도로, 민주화운동에 대한 미화나 왜곡을 배제하면서 먼저 차분한 현재적 되감기가 필요한 까닭은 다른데 있지 않다. 도대체 그때 민주화운동에 헌신했던 수많은 사람들은 목숨을 내놓으면서까지 무엇을 추구했었고 그러한 민주화운동의 결과 산통 끝에 낳은 오늘의 사회에 어떤 울림을 주고 있는지, 오늘의 혼미와 위기에 지난 시기의 민주화운동은 도대체 어떤 시사를 던져주는지 살피는 일이야말로 대안 모색의 출발이기 때문이다. 성장의 경제, 성장의 정치, 성장의 민주주의가 뿌리부터 재검토해야 할 숙제로서 대두되는 지금의 시점에서 민주화운동이 일구어놓은 우리 사회의 무성한 담론과 문화를 재검토해보는 일이야말로 바람직한 삶과 사회를 추구하는 여정의 이정표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민주화운동의 역사에서 우리가 이끌어낼 수 있는 덕목은 너무나 많다. 5.18민중항쟁 기간에 보여주었던 협력과 우애의 저항공동체 정신, 목숨을 내걸고 시대적 과제에 대해 도전하던 그 치열한 투쟁과 사회정의와 공동선을 위해 모든 기득권을 포기하던 결단 등등은 아마도 어려운 시기가 닥치면 다시 그 혼을 불러내어 재현시켜야 할 개인적, 사회적 시대정신일 것이다. 그러나 돌이켜볼 때 민주화운동은 그 피할 수 없는 저항적 성격과 다급한 시대적 요청, 지금은 상상조차 못할 군사독재정권의 야만적 탄압, 그리고 특히 민주화운동의 일선에 있던 수많은 개개인의 성격 때문에 야기된 부정적이고도 좁고 얕은 궤적이 늘 그림자처럼 따라붙어 있었다. 이것은 불가피한 일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당시 좀더 깊은 성찰적 자세가 가장 중요한 민주화운동의 기본 덕목으로 자리잡고 있었더라면 일어나지 않았을 수도 있는 불필요한 개인적, 사회적 낭비와 상처가 참으로 많았음을 시인하지 않을 수 없다. 만약 그 당시 민주화운동이 좀더 넓고 깊은 안목에서 인간과 사회에 대한 포용과 성찰의 인식을 공유했더라면 민주화운동의 역사와 그 현재적 유산이 훨씬 풍부해졌으리라고 유추해볼 수 있는 대목이 너무나 많은 것이다. 학생운동 세력들은 왜 1979년 박정희를 암살한 김재규 구명운동에 적극 나서지 않았던가. 1980년 서울역에서 학생 시위대는 왜 중국의 천안문에서처럼 비폭력 무저항의 연좌 농성을 선택하지 않고 뿔뿔이 흩어지는 회군을 선택했던가. 1986년 서노련은 왜 그렇게 급속하게 배타적 계급주의와 정치주의로 치달아 결국은 반공개 조직을 포기하고 실패로 끝난 전위조직 결성으로 나아갔는가. 1987년 6월항쟁 이후 왜 민주화운동 세력은 대선을 앞두고 그렇게 갈갈이 분열되어 결국은 정권교체에 실패하고 말았던가. 1989년 3월 왜 하필 그 시기에 문익환 목사는 사전 준비작업 없이 느닷없이 개별적으로 방북을 결행하여 공안정국을 조성했던가. 왜 하필이면 그 해 5월 공안정국의 소용돌이 속에서 전교협(전교조의 전신)은 좀더 시기를 늦추지 않고 대다수 회원들의 부정적 의견에도 불구하고 노조를 결성하여 결국 1,500여명의 조합원이 교단에서 쫒겨나고 1만여 명이 넘는 조합원으로 하여금 탈퇴각서를 쓰게 하는 도덕적 열패감에 휩싸이게 했는가 등등등...... 역사에서 ‘그때 만약’이란 단어는 불필요하다고 말한다. 맞는 말이다. 역사는 비가역의 수많은 선택에 의해 이미 그렇게 그런 방향으로 지나왔고 또 지나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실의 삶의 방향과 시대정신을 찾기 위한 성찰적 대안 모색 작업에서 ‘그때 만약’ 이란 단어는 ‘왜’라는 의문과 함께 당대를 살았던 사람과 집단에 대한 재검토를 위해 촛불집회의 촛불과도 같이 반드시 필요한 말이다. 그리고 이제 그런 진지한 역사성찰 작업이 시작되어야 한다. (생각 둘) 민주화운동과 북한: 금기와 우상 널리 알려져 있다시피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특히 80년대 이후 북한에 대한 태도를 놓고 두 개의 서로 다른 흐름이 있었다. 북한을 대안사회로 인식하는 경향(이른바 ‘엔엘그룹’)과 북한사회를 비판적으로 인식하는 경향(이른바 ‘피디그룹’)이 그것이다. 물론 그 중간에는 꽤 다양한 인식상의 스펙트럼이 존재하고 있었다. 지금은 남한의 국민소득이 1만 달라가 넘는데 비해 북한은 1990년대 1천 달라 수준이었다가 근년에 더욱 떨어져 2002년 현재 대략 500달러 정도일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그러나 역사의 선택이고 역설이지만 지금으로부터 30, 40년 전인 1950년대와 60년대에는 상황이 정반대였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실제 북한은 한국전쟁 후의 폐허 속에서 과감하게 민족반역자와 친일파를 숙청하고 토지개혁을 단행하여 농업생산성을 높였을 뿐만 아니라 일찍부터 경제개발계획을 시행하여 남한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역동적인 높은 경제 성장과 풍요를 기록하면서 나름대로 사회주의 사회의 목표인 평등사회를 이룩하고 있었다. 통계기준이 다소 다르긴 하지만 1960년 남한의 일인당 국민소득이 85달러인데 비해 북한은 137달러였고, 또 1961년 당시 북한은 남한에 비해 석탄 2배, 전기 5.7배, 철 16배, 비료 10배, 시멘트 4.3배를 생산하고 있었으며 트랙터는 남한에서는 아예 1대도 생산하지 못하고 있는데 비해 무려 4,000여대나 생산하고 있었다. 이를 바탕으로 북한은 자신만만하게 남한의 빈곤과 불평등을 부각시키면서 남북경제교류를 강하게 주장하였다.(1960년 8월 14일 북한의 김일성이 제안한 남북협상 통일방안 참조) 실로 금석지감을 감출 수 없는 역사의 드라마이다. 당시 남한은 미국의 경제원조에 기생하여 친일파들이 득세하면서 부패의 악순환 속에 경제 발전 자체가 정체된 채 보릿고개와 판잣집으로 대표되는 부익부 빈익빈의 불평등이 더욱더 확대되고 있었다. 철조망의 장막과 남북분단의 강요된 단절 상황이라 할지라도 이 같은 현실이 남쪽에 전달되지 않을 수는 없었다. 피비린내 나는 빨갱이 사냥의 악몽이 지속되고 있던 남한 사회에서 1960년대 의식 있는 지식인 가운데 일부가, 특히 학생운동 세력과 진보운동의 지도적 리더쉽 가운데 일부가, 나아가 일반 민중들 사이에서까지 북한 사회주의 사회를 우리가 지향해야 마땅한 대안의 사회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명백한 사실이다. 1960년의 4.19혁명과 그에 뒤이은 남북통일론의 전개, 그리고 밑으로부터의 민주주의 운동을 전면 부정하고 시계추를 거꾸로 돌린 5.16군사쿠테타와 쿠데타 정권에 맞서 싸운 한일회담반대투쟁, 삼선개헌 반대투쟁 및 제1차 인혁당 사건이나 통혁당 사건, 동베를린 사건 등등 60년대 내내 계속된 민주주의 운동과 이른바 ‘공안사건’의 흐름에 대해서 말할 때 이 같은 시대의 일반 배경과 일반 민중의 의식 깊숙한 곳에 저류로 흐르고 있던 북한에 대한 막연한 동경 심리를 염두에 두지 않고서는 60년대 민주주의 운동의 전체상을 제대로 파악했다고 말할 수 없다. 박정희 정권의 경제개발계획 자체가 북한을 본뜬 국가주도의 사회주의적 냄새가 물씬 풍기는 정책이었다. 그래서 일부에서는 박정희의 해방 후 남로당 활동 전력까지 들먹이며 의심과 경계의 눈초리를 보내기까지 하는 웃지못할 소극도 있었다. 그러나 북한에 대한 동경과 기대는 70년대 들어서면서 급속히 퇴색하기 시작한다. 주체사상과 유일사상이 강조되고 독재체재가 강화되면서 북한 사회는 경직 현상을 나타내기 시작했고 남한의 급속한 경제 발전 결과 오히려 70년대 들어서면서부터는 남한이 북한을 경제지표 면에서 압도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한국의 민주주의 운동은 70년대 들어서면서부터 비로소 여러 가지 측면에서 북한이란 멍에를 벗어버리고 독자의 길로 나아가기 시작했다고 볼 수 있다. 특히 학생운동과 전태일로부터 발화된 민주노동운동 및 재야운동의 경우에 그러했다. 종교계의 운동과 결합해서 이른바 학생, 노동, 농민, 문화예술인, 지식인 등 재야민주화운동 세력이 형성되고 한국 민주주의 운동의 역동성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70년대부터라고 할 수 있다. 즉 70년대부터 한국 민주화운동은 북한의 그늘에서 벗어나 북한도 똑같은 전체주의 사회라는 비판적 인식과 함께 독자적이고도 독특한 민주화운동을 전개해나가기 시작했고 이를 바탕으로 새로운 민주변혁의 이론이 싹트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북한에 대한 비판적 인식이 확산되어 가는 와중에 80년 5.18민중항쟁 이후 학생운동 내부에서부터 북한을 대안사회로 확정하고 주체사상을 지도사상으로 받아들이는 세력이 새롭게 형성되었다. ‘강철서신’이 지하 팜플렛으로 유포되고 북한방송을 청취하며 주체사상을 학습하는 학생들이 나타나기 시작했고 이들이 학생운동의 주요한 세력으로 성장하게 되었던 것이다. 물론 이들 주체사상 신봉 세력 대부분은 1990년대 들어 북한의 실상과 정보가 공개되기 시작하면서 소멸되거나 오히려 ‘북한민주화운동’으로 방향을 선회하기까지 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80년대의 학생운동은 1960년대와 1970년대의 학생운동 역사에서 이끌어낼 수 있는 학습효과를 얻지 못한 측면이 있었던 것이다. 민주화운동은 기존의 모든 권위와 금기에 과감히 도전하는 질문과 실사구시의 근본주의 경향을 띌 수밖에 없었다. 1950년 한국전쟁 이후 냉전체제의 최전선에서 북한의 존재는 남한을 철저한 친미 반공규율 사회, 빨간 색만 보아도 조건반사를 보이는 집단 정신병 사회, 지독한 스트레스 사회를 만들어 놓았다. 북한은 건드릴 수 없는 불가촉의 금기 가운데 금기였다. 이에 따라 모든 가치체계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의 모든 영역에서 기형적인 왜곡이 자행되었고 사회생활뿐만 아니라 개인의 일상생활까지 억압적인 비틀림과 신경과민이 내면화되어 있었다. 민주화운동은 처음부터 이 같은 금기를 깨지 않으면 성립이 될 수가 없었다. 때문에 1950년대 60년대 일부의 북한체제에 대한 동의는 당시의 북한체제가 체제경쟁에서 사실상 우월했다는 역사적 사실에 근거하여 그렇다 치더라도 1980년 이후 학생운동 세력의 급격한 북한 체제 수용은 금기에 대한 근본주의적 도전과 우상파괴 정신 이외에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 그리고 이 때문에 민주화운동은 비로소 반국적 전망에서 벗어나 전국적 전망을 실제로 갖게 되는 효과가 있었다고도 볼 수 있다. 그러나 당시 주체사상을 신봉하던 일부의 세력은 금기와 우상을 파괴하면서 동시에 새로운 우상과 금기를 만들어낸 점이 있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북한에 대한 극단의 왜곡 대신 극단의 미화가 존재했던 것이다. 물론 북한을 비판하는 다른 일부 세력의 경우에는 북한이 아닌 사회주의권 국가들에 대해 극단의 미화가 존재하고 있었다. 어떤 종교나 정치 신념도 구체적인 사실 확인과 끊임없는 회의 그리고 성찰에 바탕을 두지 않는 광신은 인간과 집단을 외골수의 닫힌 운동으로 치닫게 만든다. 학생운동의 일부에서 나타났던 이 같은 경향은 일반 민중들에게 민주화운동 전체의 인상을 부정적으로 만드는데 일조했다고 볼 수 있다. 백낙청의 분단체제론이 지적한 바처럼 북한과 남한의 독재정권이 서로 경쟁적 의존관계를 맺고 있듯이 사실 군사독재정권은 이른바 ‘주사파’들을 민주화운동을 공격할 때 시시때때로 꺼내 쓸 수 있는 조커처럼 북한카드와 함께 사용하기도 했다. 이점은 ‘피디’라고 지칭되는 그룹에서 사노맹을 비롯하여 이른바 전위당을 모색하던 일부의 세력에게도 그대로 적용된다. 남한의 민주화운동 세력에게 북한은 이중의 판도라 상자였다. 무엇보다도 과연 북한이 민주주의가 확고히 정착된 대안의 사회체제인지 아닌지 그리고 또한 민주화운동 세력이 북한에 대해 어떤 입장과 관계를 설정하는냐의 문제가 있었다. 그러나 또 하나의 상자가 있었다. 북한이 남한에 대해 어떤 구체적인 통일전략과 정책프로그램을 실행하느냐의 문제였다. 민주화운동은 어찌됐든 두 개의 판도라 상자를 다 열었다. 두 번째 상자와 관련해서 북한은 사실 남한의 민주화운동을 지도하거나 지원할 수 있는 실력이나 논리를 점차 잃어가고 있었거나 또는 처음부터 갖추지 못하고 있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1968년 울진 삼척과 청와대로 무장게릴라를 침투시킨 것은 이 점을 명백히 입증한다. 한국전쟁을 통해 빨치산투쟁의 불가능성이 학습되었음에도 그리고 한국의 민중 사이에 반공 반북 이데올로기가 깊숙이 내면화되어 있음을 수많은 사례를 통해 파악하고 있었을 터인데도 평화통일의 구호와 전혀 배치되는 그런 무모한 사건을 저질렀다는 사실 자체가 호지명의 월맹과 달리 김일성의 북한이 취한 지극히 고식적인 민주기지건설론과 대남통일전선전략의 비현실성을 역설해준다. 물론 북한군부 일부의 맹동주의에 혐의를 돌렸다고는 하지만 이는 더더욱 궁색한 변명일 뿐이며 당시 남북한 쌍방이 모두 북파 남파 공작원들을 일상적으로 침투시키는 냉전과 첨예한 이데올로기 대립의 긴장상태임을 감안해도 그렇다. 결과적으로 이 사건 이후 북한은 절대로 믿을 수 없는 호전적인 집단의 인상을 남한 민중 사이에 강하게 각인시켰다. 더욱이 문제는 박정희 독재정권이 병영국가화와 유신체제를 통한 영구집권을 획책하는데 절호의 기회를 제공해주었다는 점이다. 무엇보다도 남한의 민주화운동 세력에게조차 북한 정권을 통일운동의 파트너로 삼기에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인식을 확산시켰다. 아마도 북한이 남한의 체제 변화를 진정으로 유도했다면 체제경쟁에서 열세로 돌아서기 시작하는 1970년대 이후에는 일체의 대남전략을 포기하고 통일을 위한 평화적 대화의 수준이 말 그대로 실천적으로 가능하게 될 때까지 아예 불개입의 의사를 공개적으로 천명하고 이를 실제 실천에 옮기는 것이 훨씬 나았을 것이다. 남한의 민주화운동 세력에게 통일운동은 당위의 문제였다. 그러나 북한체제와 북한정권과의 현실적 관계 설정의 문제는 통일운동의 아킬레스건이었다. 북한 민중과의 연대라는 구호는 명분으로는 가능했으나 실천으로는 헛된 구호였기 때문이다. 1970년대 통일운동이 대중적으로 활성화되지 못한 까닭 가운데 하나는 바로 이 지점이었다. 그리고 1980년대와 90년대 통일운동의 활성화는 군사독재정권이 무너져가고 남한의 경제성장에 대한 자신감이 확산되어 가고 있는 상태에서 실제 북한정권과의 관계설정 문제를 떠나 감성적으로 당위였던 통일을 대중적으로 확산시킨 금기와 우상파괴의 도전이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1970년대 이전 남한은 북한과의 체제 경쟁에서 열세에 놓여 있었다. 때문에 북한의 통일전략은 남한의 민주화운동을 규정하는 측면이 강했다. 그러나 21세기에 들어 세상은 변했고 북한은 극심한 기아에 허덕이며 외부의 원조가 없으면 체제 자체의 존립이 위협받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제는 남한의 통일전략이 북한체제를 규정하는 시대로 바뀌었다. 미국 내 강경보수파와 국내 극히 일부의 수구세력이 주장하는 북폭이나 무력 공격에 의한 북한 정권의 전복이란 곧바로 한반도 전쟁을 의미하며 이는 다시는 일어나서는 안 될 재앙임이 분명하다. 남한의 경제성장을 그대로 북한에 이식하는 성장위주의 정책 주입 또한 북폭 만큼이나 어리석은 짓일 것이다. 남한 민주화운동의 경험이 웅변하고 있듯이 북한의 체제변화와 민주주의의 확립은 시간이 얼마나 걸리건 북한 민중들이 내부에서 모색하지 않으면 안 되는 과제이다. 남한이 개입하면 할수록 오히려 북한 정권의 강화만 가져다 줄 뿐이라는 것은 지난 역사를 조금만 살펴보아도 알 수 있는 상식이다. 때문에 남한의 경험을 타산지석으로 삼아 이른바 무에서 유를 창조하듯 환경을 염두에 둔 새로운 경제정책을 펼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맞고 있는 북한에게 그렇게 변화하도록 지원하는 일이야말로 진정으로 북한 내부의 변화를 촉진시키는 지름길이며 그것이 실제적으로 북한 민중을 위하는 것이고 통일을 앞당기는 일이다. 이런 점에서 최근 논의되고 있는 북한 인권문제에 대해서 남한의 진보 세력과 시민사회단체들이 오히려 이른바 보수세력에게 의제를 선점당하고 그것을 외면하는 일종의 기피현상은 극복되어야 할 것이다. (생각 셋) 민주화운동과 국가주의, 폭력, ‘우리 안의 파시즘’ 일본제국주의와 군사독재체제를 겪은 한국사회에서 국가지상주의에 대한 성찰과 문제제기는 있어왔지만 민주화운동의 내부에 내면화된 국가주의와 폭력에 대해 문제제기를 한 것은 최근의 일이며 그것은 한국 사회의 민주주의 진전과 표리관계를 이룬다고 할 수 있다. 문부식, 임지현 등 주로 ꡔ당대비평ꡕ 관계자들에 의해 논의된 ‘우리 안의 파시즘’은 민주화운동과 시민사회 내부, 개인의 일상생활 수준으로까지 시선을 돌려 가부장의 권위주의와 내면화된 국가주의, 폭력 등을 천착했다는 점에서 민주화가 부분적으로라도 이루어졌다고 운위되는 한국사회에 근본적인 질문을 던졌다고 할 수 있다. 사실 민주화가 진전되지 못한 상태에서 날이면 날마다 군사독재정권의 폭력에 노출되어 있는 민주화운동 세력에 대해 내부의 권위주의와 폭력 문제를 거론하기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 1991년 4월 강경대 타살에 연이은 이른바 5월 ‘분신정국’의 와중에서 시인 김지하가 ‘죽음의 굿판’을 거론하며 민주화운동 내부의 생명경시 경향을 질타한 적이 있지만, 이는 그의 본뜻인 생명의 고귀함에 대한 성찰과는 무관하게 부적절한 시점에 부적절한 매체를 통해 부적절한 방식으로 군사독재정권과 함께 민주화운동을 공격한 결과를 야기하고 말았고 김지하 개인의 일종의 ‘사건’으로 끝나고 말았다. 국가주의와 폭력의 문제는 공격성이라는 인간 본성, 인간의 사회성에 대한 성찰과도 관련되어 있는 개인과 사회의 근본 문제이다. 그만큼 쉽게 단정지울 수 없는 어려운 주제이다. 더구나 일본제국주의 같은 파시즘 체제의 광폭한 야만을 겪은 한국 사회에서 배타적 국가지상주의의 침략으로부터 공동체를 지켜주는 것이 국가라는 이중적 인식이 내면화되어 있는 경우에 더더욱 그렇다. 그럼에도 군사독재정권에 저항하면서 동시에 효율의 이름으로 모방 ․ 복사된 민주화운동 내부의 권위주의와 비민주주의, 국가주의 의식과 성차별 및 외국인 노동자 차별 등등의 문제에 대한 자기반성적 성찰은 대단히 의미있는 문제제기였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이런 문제제기가 ‘동의대사건’의 민주화운동 인정 여부라는 정치적 쟁점으로 비화되어 다소 이분법적인 논쟁으로, 속된 말로 ‘변절자 논쟁’처럼 끝나고 만 아쉬움은 있다. 그러나 앞으로 민주주의가 바람직스럽게 진전되려면 과연 국가주의가 탈색된 국가를 넘어 근본적으로는 국가가 해체되어야 하는 것인지, 국가를 해체한다면 대안 사회는 어떤 것인지, 탈민족주의의 구체적 가능성이 무엇인지 등등의 논의를 진전시키는 것은 우리 사회의 민주적 대안 모색에서 반드시 필요한 의제라고 볼 수 있다. 간디의 통찰대로 인간은 국가가 아닌 마을 규모의 단순소박성에서만 진리와 비폭력의 비전을 가질 수 있는지도 모른다. 한국 민주화운동은 명백히 국가의 민주화만을 목표로 한 것이 아니었고 사회의 민주화, 공동체의 민주주의를 확립하는 것을 추구했다. 그러나 정치체제의 변화가 곧바로 사회의 변화를 가져오지 못한다는 것은 현실사회주의의 몰락 이후 러시아 사회주의 사회와 중국의 실상이 알려지면서 여실히 입증되었고 민주화운동의 진전으로 정치제제가 변화된 1990년대의 한국 사회에서도 이는 마찬가지로 다양한 부문, 다양한 층위에서 확인되는 바였다. 국가와 국민만 있는 역사는 결국 국가주의, 파시즘으로 귀착될 위험성이 많다는 지적은 사실이다. 한국 민주화운동 또한 국기에 대한 경례를 없앤 민중의례를 만들고 국민교육헌장 폐기선언을 하는 등 나름대로의 노력이 있었다고는 해도 결국 거대한 국가주의의 공세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는 지적 또한 사실이다. 국가의 차원을 뛰어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개인과 공동체, 그리고 나아가 세계라는 두 방향으로의 시각 확대가 필요했음에도 국가 밖으로는 거시적 정보와 지식 부족이, 국가 안으로는 미시적인 깊은 성찰의 부족이 존재했음을 부인하기는 어렵다. 국가의 틀 안에 그냥 갇혀 있을 경우 민주화운동 또한 새로운 지배계급의 충원으로 끝나고 말 위험은 늘 있는 것이다. 따라서 국가란 무엇이고 과연 국가의 존재이유가 무엇인지 상대적으로 열린 시각에서 근본적 천착이 필요하며 이제 한국 사회는 그런 의제를 수용할 만큼 열린 민주주의로 나아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공동체 또는 사회는 개인의 확장이자 개인과는 또다른 별개의 차원이라는 양면성을 지닌다. 사회성의 극한까지 치달은 벌, 개미 같은 초개체 곤충집단의 군체와 포유류인 사람 사회는 조금 다르다. 그럼에도 사람이 사회성 동물인 한 사회와 개인의 관계는 그 수준이 끊임없이 변화할 것이며 또 탐구 주제의 첫 자리를 내놓지도 않을 것이다. 근대에 이르러 형성된 서양의 민족, 국가와 10세기도 훨씬 전부터 민족의 범주가 형성되었던 동아시아의 그것은 전혀 다른 측면이 있음은 차치하고 민족주의는 한국에서 민주주의 운동과 긴밀히 결합되어 있었다. 일본제국주의와 싸웠던 민족해방운동 세력들은 좌와 우를 막론하고 민주주의를 민족국가의 첫 번째 정체성으로 내세우는데 주저하지 않았고 1960년대 이래 한국의 저항적 민주화운동도 저항적 민족주의 운동과 동전의 양면처럼 결합되어 있었다. 한국의 민족주의는 남과 북의 국가주의를 넘어서 있었고 민주화운동은 개인과 국가를 넘어서 사회적 과제, 민족적 과제에 몸을 던진 행위라는 성격이 강했다. 1964년과 1965년의 한일회담 반대투쟁과 1980년대 불붙기 시작한 미문화원 점거농성 등의 반미운동에 민주화운동 세력이 앞장서 나선 것은 군사독재정권이 친미 친일정권이라는 인식도 인식이었지만 민족주의를 이렇게 적극적으로 평가한 데서 비롯된 자연스런 귀결이었다. 때문에 한국에서의 저항적 민족주의는 국가주의와 동일시 할 수 없는 측면이 있었으며 저항적 민족주의는 나름의 열린 민주주의를 지향하고 있었다. 이점에서 저항적 민족주의는 긍정적이었다. 그럼에도 식민지 시대 한국의 민족주의가 개인의 삶을 넘어서는 거부할 수 없는 절대적 신화였고 해방 후에는 남과 북의 권력 도구로 갇혀버렸다는 주장 또한 맞다. 민족주의는 늘 배타적 제국주의와 인종주의로 나아가려는 추동력이 내부에 응축되어 있음은 보스니아나 팔레스타인, 아프리카 등등 오늘날 전세계의 종족분쟁 지역을 조금만 살펴보아도 알 수 있다. 따라서 저항적 민족주의가 민주주의의 진전과 함께 열린 민족주의, 민주적 민족주의로 전화하지 못한다면 금방 정치권력의 가부장적인 닫힌 민족주의 속에 갇혀버리고 마는 포로 신세로 전락해버릴 위험성은 늘상 있고 그런 점에서 ‘민족주의는 반역이다’라는 다소 도발적인 주장은 경고의 적색등 역할을 충분히 하고도 남는다고 할 수 있다. 국가폭력과 저항폭력에 대한 논의는 국가주의와 관련해서 핵심에 속하는 문제이다. 한국전쟁 이후 적대와 증오의 이분법적 진영 대결정치에 익숙한 한국 민중은 국가‘폭력에 대한 무감각과 무지, 폭력에 대한 감수성 자체가 결여된 대중’이 아니라 오히려 국가폭력에 익숙한, 국가폭력을 너무나 당연시한 대중이라고 설명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왜 한국에서는 군사독재정권에 대항해서 라틴아메리카나 동남아에서처럼 운동세력이 무장투쟁을 선택하지 않았는가 하는 일부의 질문에 대해서는 한국전쟁의 경험이 그 답변서를 대신해줄 수 있을 것이다. 1960년대 일부 진보운동 세력들 내부에서 중국식 무장투쟁이, 1970년대 말 남민전 관련자들 내부에서 도시게릴라 투쟁에 대한 논의가, 그리고 1980년대 일부에서 무장투쟁에 대한 검토 수준의 논의가 있었다고는 하지만 그것은 한반도는 종심이 얕고 밀림이 없으며 고도로 중앙집권화되어 있다는 점 등등을 거론하며 그야말로 한국전쟁 당시 빨치산투쟁의 무모함과 실패에 대한 교훈을 되새기는 정도의 것이었다고 한다. 대신에 한국의 민주화운동이 선택한 투쟁방식은 길거리 시위와 연좌농성, 성명서 발표와 집회 또는 기도회 등등 지극히 평화적인 것이었다. 이것은 압도적인 국가폭력에 달리 대항할 수 있는 수단이 없었기 때문에 불가피한 선택이기도 했다. 그러나 국가폭력이 어느 선을 넘었을 때 아무리 국가폭력에 익숙해 있고 외면하거나 숨죽였던 일반인들이라 할지라도 분노가 국가폭력의 공포를 넘어서는 경우가 있었다. 최루탄이 눈에 박힌 채 끔찍한 주검으로 나타난 김주열군에 대한 소식과 집회를 마치고 돌아가던 고대생들에 대해 국가가 동원한 깡패들이 폭력을 휘둘렀다는 소식을 듣고 일어선 4.19 당시의 일반 시민들이 그런 예였다. 한국 민주화운동 역사에서 국가의 폭력에 대항하여 유일하게 무장투쟁을 벌인 1980년 5.18민중항쟁의 경우도 닥치는 대로 일반시민의 머리를 깨부수고 유방을 도려내고 마구잡이로 찔러대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진압부대의 살인과 만행에 대한 본능적 분노가 살인적 공포를 이겨낸 경우이다. 5.18민중항쟁은 자연발생적이고도 정당방위적인 무장투쟁이었고 그것도 일반 시민의 전폭적 지지를 얻어낸 것이었다. 1970년대 초반까지는 시위와 집회 정도는 대체로 가능했고 처벌 또한 구류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유신체제가 들어서고 긴급조치가 발동되면서 군사독재정권은 모든 시위와 집회, 노동쟁의와 소규모 모임까지 금지시켰고 처벌 또한 인플레시켜 사형과 징역형이 다반사로 남발되었을 뿐만 아니라 제명, 해직, 해고 등을 당한 사람에 대해서는 블랙리스트를 작성, 생존권마저 박탈하는 폭력을 저질렀다. 1980년 ‘민주화의 봄’이 되어 학내시위와 노동쟁의가 폭발적으로 분출되었고 복교와 복직이 이루어졌지만 그것도 잠시 뿐이었고 전두환 군사독재정권 아래에서는 유신 때보다 더 강한 국가 폭력에 시달려야 했다. 그리하여 때로는 1970년 전태일의 분신 이후 특히 1980년대와 1990년대 초반까지는 극도의 억압 상황과 압도적인 국가폭력에 대해 아무런 저항수단도 갖지 못하다는 막다른 인식이 팽배했을 때 극단적인 자기희생을 통한 저항수단을 찾게 되는 경우가 발생했고 이것이 할복과 분신, 투신 등의 자살로 나타나기도 했다. 바로 이같은 상황에서 1980년 이후 학생운동에서 화염병이 등장했던 것이고 적어도 1987년 6월 항쟁까지는 화염병 정도는 압도적인 국가의 물리력에 맞서 시위행위를 지속시키기 위한 도구로 용인되는 경향도 없지 않아 있었다. 화염병 정도 가지고 국가의 물리력이 무력화된다고 생각하는 몽상가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화염병 또한 경우에 따라 살인까지 저지를 수 있는 무기임은 분명하다. 더구나 화염병 피해자들 대부분이 동시대를 살아가는 젊은 전투경찰대원들이고 그들은 자의가 아닌 국가 국방의무라는 타의에 의해 동원되었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었다. 아무리 국가폭력과 저항의 폭력이 차원이 다른 문제라고 하더라도 명백히 폭력은 폭력이고 죽음은 죽음이며 폭력은 민주주의의 해결방식이 아니다. 알카에다의 폭력과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폭력을 동일한 차원에 놓았을 경우 이는 또 다른 왜곡이며 국가폭력과 저항폭력을 동일한 폭력으로 접근하는 방식은 억압과 불평등의 차별성을 흐리며 거대파시즘에 대한 비판의 시선을 희석시키는 오류를 범한다는 조희연의 지적(｢과잉 과거청산인가, 과소 과거청산인가｣, 2002.8)은 일면 옳은 것 같으면서도 다른 시각에서 보면 균형을 잃은 주장이다. 국가폭력이건 저항폭력이건 폭력이란 차원에서는 같은 것이며 폭력은 민주주의의 본질인 갈등과 대립의 평화적 관리 및 해결과는 정반대의 대척점에 서 있는 갈등 해결 방식인 것이다. 민주화운동의 역사를 살펴보면 대체적으로 평화적인 수단을 통한 저항이었을 경우 일반 대중의 지지가 있었고 화염병이나 쇠파이프 등 폭력적 수단이 동원될 경우 지지가 적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군사독재체제가 절차적으로는 무너져버린 1990년대에 들어서서 시위현장이나 노동쟁의에 등장하는 폭력은 정당방위의 행위로 인식되기보다 과격집단의 상투화된 투쟁방식으로 인식되어 일반 민중과는 점점 더 괴리되어 갔다고 볼 수 있다. 왜 한국 민주화운동 가운데 특히 학생운동은 함석헌을 위시한 종교계와 지식인들의 재야민주화운동이 주장하는 비폭력 무저항 평화운동 방식을 채택하지 않았는가 라는 의문은 학생운동의 철학적 근거와 깊이에 대한 의문이기도 한데 무엇보다도 학생운동에 어떤 식으로든 강한 영향력을 미친 마르크스주의의 기본사상이 폭력혁명을 주장하고 있었던 데 기인한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이것이 군사독재정권에 대한 분노를 시위현장에서 즉자적으로 화염병 투척으로 발산해버리고 마는 어찌 보면 무장투쟁도 아니고 평화적 투쟁도 아닌 전략적으로도 대단히 미숙한 어정쩡한 선택의 배경이었다고 할 수 있다. 최근 종교인들의 ‘새만금중단 삼보일배’에서 극명하게 드러났던 무저항 비폭력 평화운동의 호소력은 모든 사람을 아와 적으로 구분하던 당시의 이분법적 사고와 시대적 상황에서는 비집고 들어갈 여유와 공간이 없었던 것이다. (생각 넷) 민주화운동 환원주의, 진보 환원주의의 경향에 대하여 인간의 모든 행위와 사회생활까지 이기적 유전자의 명령으로 설명하는 유전자 결정론과 마찬가지로 지난 민주화운동 시기에 민주화운동을 하는 사람들 사이에는 모든 사회적, 정치적, 문화적 문제를 민주화운동이나 변혁으로 귀결시키는 이른바 환원주의의 경향이 있었음이 사실이다. 모든 악의 축은 군사독재체제와 자본주의였고 모든 비리와 모순은 이에서 비롯되었으며 민주화운동과 변혁운동이 이 모든 문제를 해결해준다는 소박한 환원주의, 만능주의가 팽배해 있었다. 이것은 아마도 사물의 발전을 모순의 지양으로 보고 거기다 주요모순과 부차적 모순을 구분하여 그 둘을 선후의 문제로 본 ‘모순론’의 일정한 영향도 있었을 것이다. 때문에 여성문제도 환경문제도 매개 고리에 불과한 부차적 영역이라는 인식이 은연중에 팽배해 있었다. 특히 1980년대 어느 한 때에는 부문운동과 지역운동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흐름의 한편에 노동운동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경향이 지나쳐 학생운동이나 여성, 환경, 학술, 문학, 문화예술, 법조, 보건의료 등 당시 확산되어가고 있던 부문운동을 소시민운동으로 규정하고 가능한 모든 사람들이 노동현장에 들어가야 한다는 노동현장 지상주의라고 부를만한 주장도 있었다. 전두환 군사독재정권의 탄압 아래서도 1982년 한국공해문제연구소, 1983년 민주화운동청년연합, 1983년 여성평우회, 1984년 민중문화협의회, 1984년 한국산업사회연구회 등이 설립되어 활발한 활동을 펴나간 것은 이 같은 ‘현장 투신’의 흐름과는 별개로 꾸준히 진전되고 있던 각 부문운동의 성과였고 이것이 오늘날 시민사회단체의 뿌리라고 볼 수 있다. 이런 환원주의는 민주화운동의 주요 담당층이 학생들이었다는 점에서 그 운동인식의 관념성을 일정하게 반영하는 측면이 있었다. 그리고 앞에서도 지적한 이분법적인 이데올로기의 강한 영향도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다보니 무엇을 주요모순으로 놓느냐에 따라 운동이 분열되고 치열한 관념적 이론투쟁을 벌이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없다. 사회이론이란 다만 이론일 뿐이고 이론에 따른 실천처럼 어리석은 짓은 없음에도 80년대 사회구성체 논쟁은 결국 그것을 추구했다고 볼 수 있다. 1980년대 초반의 학생운동에서 무림과 학림, 자민투와 민민투, 엔엘과 피디의 분열이 그렇고 1987년 대선을 앞두고 민통련을 비롯한 전체 민주화운동 세력이 비판적 지지파와 후보단일화파, 독자후보파로 분열되어 결국 정권교체에 실패하고 지체된 민주화의 길로 들어서게 된 배경에는 어찌 보면 이 같은 환원주의의 영향이 내재되어 있었다고도 볼 수 있다. 인간사회의 현실은 아무리 심오하고 복잡한 이론을 갖다 대더라도 설명 불가능한 여백이 아주 넓게 있으며 이론을 항상 멀리 뛰어넘어 변화하고 심지어 예측불가의 복잡계에 가깝다는 사실을 환원주의는 쉽게 인정하지 않는다. 한국 민주화운동의 사회에 대한 인식과 역사에 대한 인식은 이러한 복잡한 사회와 역사를 단순화하고 도식화한 진보 보수의 이분법적 도표에 손쉽게 손을 내민 측면이 있었다. 실제로 자본과 노동,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 생산력과 생산관계, 억압 착취와 해방, 정(正)과 반(反)과 그 합(合)으로서의 새로운 정(正) 등등 역사법칙과 사회법칙을 내세운 이분법의 분류는 군사독재정권의 억압과 착취가 뚜렷하면 할수록 강한 설득력을 갖는 단순논리일 수가 있었다. 그러나 이런 환원주의는 사회와 역사에 대한 일종의 단세포적 색안경 쓰기이며 개인의 삶과 사회의 변화 폭을 자를 대고 잘라내 스스로 좁은 우리에 갇히는 광신의 맹동으로 치달을 수가 있다. 1990년대를 거치면서 이 같은 진보 환원주의는 물론 아직도 의연히 존재하고는 있지만 현실의 그 복사판이 없는 변화 앞에 자연히 근거를 잃고 대부분 잦아들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오히려 보수가 아닌 수구세력들이 광신의 환원주의자들이 되어 목소리를 높이는 기막힌 역사의 후속편을 보게 된다. 다윈이 진화라는 말을 거의 쓰지 않고 변화를 역설했듯 역사에 진보나 보수는 있을 수가 없고 단지 변화만 있을 뿐일지도 모른다. 역사에 비교우위는 없으며 어느 사회이든지 변화는 자연선택에 비교되는 비가역의 역사선택(historical selection) 결과일 뿐일지도 모른다. 우연과 필연이 교차하는 역사의 그 시기에 한국이 유례가 없는 고도 경제성장을 이루었고 민주화를 진전시켰던 것은 역사의 필연적 법칙이나 사회발전 법칙에 따른 예정조화의 이행이 아니라 다름 아닌 그 시대적 조건 속에서 한국민이 그렇게 역동적으로 살았기 때문에 가능했던 역사선택이었을지도 모르는 것이다. (생각 다섯) 이분법의 문화: 미화된 민중론과 민중문학, 민중문화 한국전쟁 이후 아예 사회운동 세력이 말살된 상태에서 맨 먼저 민주화운동의 기치를 들었던 것은 1960년 4.19 당시의 대학생들이었다. 이후 학생들은 한국 민주화운동의 주담당층이었고 이들이 지식인, 종교인, 문화예술인, 노동자, 농민 등 각계각층의 일반인이 되어 졸업 후에 사회운동을 하는 경우까지 감안하면 대학은 한국 사회 민주화운동의 양성소였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5천만 인구에 300만 명이나 되는 대학생이 있는 지금과 달리 1960년에서 대학정원이 배로 늘어나기 전인 1980년 초반까지 대학생들은 대다수 동년배의 청년들에 비교해 특혜받은 소수의 엘리트층이었다. 1960년 전체 총인구 2,500만 명 가운데 대학생은 10만 명에 불과했다. 1970년에는 전체 3,150만 명 가운데 대학생이 20만 명이었고 1980년에는 3,740만 명 가운데 60만 명이었다. 그리고 졸업정원제가 실시된 이후인 1985년에는 4천만 명 가운데 130만으로 급격하게 늘어났다. 1970년대까지 학생운동은 서울대, 연대, 고대, 이대, 서강대, 전남대, 부산대, 경북대 등 이른바 일류대학 학생들이 주도했다. 이들은 대학생 가운데에서도 엘리트였고 이들 가운데 일부가 1960년대 후반부터 탈춤을 비롯한 전통문화를 새롭게 민중문화의 재창조라는 관점에서 복원시키는 운동을 벌였다. 사실 문학과 문화는 한국전쟁 이래 반공문학이거나 서구의 조악한 모방문화에 불과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한국문학과 문화의 토양은 불모에 가깝게 척박한 실정이었다. 그래도 문학은 4.19 이후 김수영, 신동엽, 백낙청 등이 참여문학과 민족문학의 논의를 진전시키면서 새로운 문학적 활력을 소생시키고 있었다. 그러나 문화예술 분야의 경우에는 그 어떤 움직임조차 없었고 때문에 이 같은 대학가의 탈춤운동은 분단 이후 최초로 저항적 민중문화운동을 모색하는 출발점일 수 있었다. 이후 탈춤과 풍물, 민요, 판소리 등은 1970년대 말에는 민주노조 노동자들에게, 1980년대에는 전대학가에 급속히 확산되어 시위와 집회에는 반드시 풍물과 탈춤이 새로운 저항적 민중문화의 한 양식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민주화운동의 과정에서 민중에 대한 논의는 역사발전 주체로서의 민중의 개념과 그 함의에 대해 꽤 깊이 있게 여러 번 거듭된 주제 가운데 하나였고 민중문화에 대한 논의 또한 그러했다. 그런데 한국의 학생운동과 민중문화운동에서 나타난 특징 가운데 하나가 바로 미화된 민중론이었다. 민중들은 역사발전의 주체, 생산의 주체로서 지배층의 문화에 오염되어 있지만 대자적 의식으로 각성되기만 하면 곧바로 주체로서의 건강성을 회복할 것이라는 주장이었다. 19세기의 갑오농민전쟁 이래 의병전쟁과 식민지 민족해방투쟁, 해방후의 빨치산투쟁과 4.19혁명, 특히 5.18민중항쟁 등 저항운동의 역사에서 나타난 민중들의 끈질긴 투쟁과 희생은 이런 아이디얼 타입의 민중에 대한 산 본보기들로 즐겨 인용되었다. 문제는 이런 민중론의 현실성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민중과 지배층을 단순하게 이분법으로 갈라놓고 모든 문화를 재단하면서 민중은 선 지배층은 악이라는 극단의 미화론을 펼친 데 있었다. 심지어 민중들의 범죄조차 사회구조악이 만든 왜곡된 의식의 결과이거나 불가피한 생존권 확보의 수단으로 인식하기도 했다. 물론 그런 측면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개개인의 수많은 편차와 다양한 삶의 양상까지도 단순하게 한 마디 말로 뭉뚱그려 단순하게 선과 악이라는 기준 속에 집어넣는 것은 현실의 설명치고는 너무나 유치한 단선논리였다. 앞에서도 지적했든 이런 극단의 민중 미화는 학생운동과 민중문화운동의 담당자들이 대부분 민중 출신이 아닌 지배층 내지는 중산층 출신의 일류대 대학생이라는 엘리트들이었고 때문에 이들이 일정한 과격한 관념론에 손쉽게 빠져버릴 수 있었다는 사실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했다. 자신이 처한 현실과 이상 내지는 신념과의 괴리가 미화된 민중론으로 표출되었고 이것이 ‘학삐리’ 또는 ‘학출’이라는 다소 자학적인 용어와 함께 노동자, 농민 등 민중으로의 ‘이전’을 당위로 여기는 풍토에 상승작용을 일으켰던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일정하게는 학생운동과 민중문화운동 세력의 엘리트주의적인 사고가 드러났다고 할 수 있다. 바로 민중을 각성시키는 전위적 역할이 이들 지식인 선각자들이 수행해야 할 역사적 책무로 상정되었던 것이다. 1960년대 말에 극히 일부에서 학생들의 공장 취업이 시작되어 전태일 이후 눈에 띄게 늘어났다가 특히 1980년대부터는 폭발적으로 전개된 노동운동으로의 존재이전, 위장취업은 이로서 비롯된 현상이었다. 1980년대 민중문화운동은 한국문화의 지도를 바꾸는 새로운 문화 패러다임의 변혁운동이었고 이는 많은 궤적을 남겼다. 민중문학, 노동자문학, 민중문화, 노동자문화, 민중미술, 민중건축, 민중음악 등등 무수한 민중문화의 담론들이 나타났고 실험적 작품과 활동이 전개되었다. 그러나 문학에서 민족문학론의 거두었던 성과와 수많은 작품들에 비해 민중문학과 민중문화를 내걸었던 활동의 결과물과 실제 작품들이 그 수와 질에서 일정한 수준에 도달하지 못했다고 평가되는 것은, 그리고 1990년대 들어서 급속히 민중문학과 민중문화의 담론과 작품들이 사라지고 만 까닭은 역시 이분법 문화의 불모성과 미화된 민중론의 비현실성이 현실로 드러났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현상은 아마 인문사회과학의 영역에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래도 이런 이분법의 횡행 아래서도 비록 정리되지는 않았지만 백화제방처럼 발아된 창의적인 실험과 사고는 이후 다양한 문화운동의 자양분 역할을 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리고 이들 공장과 농촌으로 들어가 활동을 했던 학생들의 열정과 순수함은 그 어떤 사회적 존재이전보다 값진 것이었고 실제 그것이 한국사회의 민주화에 크나큰 현실적, 도덕적 거름이 되었다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다. 1970년대와 1980년대 사회정의와 불평등을 말하면서 자신은 그야말로 상류층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명백히 이들은 위선자들이었다. 신자유주의를 비판하고 빈곤층에 대해 말하고 비정규직의 아픔을 말하면서 대규모평수의 아파트에 살면서 예금통장에는 수 억 원의 재산을 갖고 있는 사람들, 아이엠에프 때 그 기회를 틈타 재산을 축적해놓고도 진보와 정의를 말하는 사람들은 명백히 위선자들이다. 이들에 비해 이들 민중론자들은 적어도 위선자들이 아니었던 것이다. 미화된 민중론의 변형은 최근의 생태주의 논란에서 발견되기도 한다. 땅에 뿌리박고 사는 풀뿌리 민중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하루하루의 생존이며 가족과 이웃들과 어울려 삶의 기쁨을 향유하면서 서로 돕고 보살피면서 다음 세대를 위하여 준비하여 가는 생활이다. 그들에게는 지배와 정복과 영토확장과 같은 ‘전쟁의 동기’를 잉태하는 욕망이 있을 수 없다. 정복인간(homo conquistador)은 본래 풀뿌리 민중의 심성과는 질적으로 전혀 다른 차원의 멘탈리티에 뿌리를 두고 있음이 확실하다. 김종철의 이 주장은 아메리카 원주민들에게도 환경파괴와 끊임없는 종족전쟁의 역사가 있었음을 증명하는 고고학적 발굴과 인류학의 현지보고서들을 무시하는 미화된 민중론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의 불모성은 민중문화운동의 역사적 경험에서 충분히 유추해볼 수 있을 것이다. (생각 여섯) 역사의 민주화 작업: 아래로부터의 역사 우리는 왜 광주를 기억하려 하는가? ...그러한 역사의 비극을 가져온 폭력과 그 폭력의 구조에 연루된 우리 자신의 과거와 반성적 관계를 갖지 못한다면 기억은 무엇이고 역사는 또 무엇이겠는가? 혹시라도 나의 이런 질문이 어색하고 불편하게 느껴지는 사람이 있다면... 광주 망월동의 기념식에 참석해보라... 공식적 추모 행사의 앞줄에서 머리를 조아리고 있는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물어보라. 설사 그중 절반은 과거 학살의 참여자들이라고 해도 당신은 놀라지 마라... 지금도 여전히 권력자인 한국의 과거 군사정권 협력자들은 그들이 배신한 민중의 무덤에 참배하고 있다. 바로 이 비극적인 희극이 지금 한국 사회에서 광주항쟁의 기억이 처한 현실이다.(문부식, ꡔ잃어버린 기억을 찾아서ꡕ, 삼인, 2002, 48~49쪽) 역사는 그 자체로서는 사실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 역사는 아무 것도 소유하고 있지 않고 아무 것도 행동하지 않는다. 행동하고 소유하고 싸우고 화해하고 가족과 사회와 국가를 이루고 역사를 만들어나가는 것은 실제 살아있는 사람들이다. 오늘 현재 여기 살아 있는 우리들이다. 역사는 카아(E.H. Carr)가 역설한 바 지난날과의 끊임없는 대화라기보다는 바로 오늘 현재와의 긴장된 대화이다. 우리가 역사를 문제 삼는 것은 다름 아닌 오늘이 문제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역사를 성찰한다는 것은 오늘의 문제의식에서 오늘의 문제를 제기한다는 것과 같은 뜻의 말이다. 과거청산이란 말 자체는 타당하지 않은 정치적 용어이지만 그것이 과거를 성찰한다는 의미라면 과거지향의 퇴행적 작업을 넘어선 미래의 재구성 작업이 충분히 될 수 있다. 이미 예정된 역사가 없듯 정해진 과거나 정해진 현재, 정해진 미래도 없으며 끊임없는 역사선택이 있을 뿐이기 때문에 과거청산 작업 또한 역사선택의 한 방향일 수 있는 것이다. 5.18민중항쟁과 민주화운동 기억, 곧 역사의 국가화, 권력화를 지적하는 것은 온당한 일이다. 이미 김대중내란음모사건 관련자와 1980년 5.18 이후의 광주항쟁 관련 구속자에 대한 보상이었던 5.18관련 3차 보상 때부터 이런 문제제기가 있었고 이는 충분히 예견될 수 있는 사실이었다. 정권이 교체되면서 승리의 전리품을 챙기는(trophysm) 듯한 이런 보상은 김대중 정권의 성격을 고스란히 드러내주는 것이었으며 이후의 수많은 부패를 예고하는 것이기도 했다. 마땅히 그동안 군사독재정권이 은폐해왔던 의문사와 조작 공안사건의 진상을 규명하고 책임자를 가려내며 민주화운동 전체 관련자에 대한 명예회복 작업을 수행하면서 동시에 화해와 용서를 통한 관용의 사회통합을 이루어나가야 하고 그렇게 할 수 있으리라고 기대했던 국민의 정부는 그러나 정권을 잡자마자 이런 사회적 절차는 아예 무시 생략하고 무엇보다도 먼저 자신들의 명예회복과 보상에만 급급했던 것이다. 그나마 유가협 부모님들의 힘든 천막농성의 결과 뒤늦게 의문사법과 민주화관련보상법이 통과되었지만 사실 이런 과거청산의 노력은 때를 놓쳤다는 지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1988년 국회 5공비리 청문회의 5.18민중항쟁에 대한 불철저한 조사를 시작으로 1995년 5.18특별법의 제정과 전두환 노태우 구속 및 12.12군사쿠데타 재판 등등 과거청산의 실천이 토막토막 잘라져 길게 지체되면서 시간의 마모에 노출되었고 일반민중의 관심사 서열에서 한참이나 뒤편으로 밀려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던 것이다. 과거청산 작업이 그 어느 나라보다 철저했다고 알려져 있는 프랑스에서도 해방 직후인 1945년 1월 많은 부역자들이 ‘적과의 내통’이란 죄목으로 유죄선고를 받고 총살당하거나 감옥에 갇혔지만 부역지식인의 처형을 놓고 ꡔ전투ꡕ지의 알베르 까뮈와 ꡔ피가로ꡕ지의 프랑수아 모리악이 벌인 청산론과 관용론의 논쟁을 거쳐 급속히 그 열기가 식어갔고 몇 년 뒤에는 대부분의 부역자들이 사면을 거쳐 풀려났다. 심지어 패주하는 독일군을 따라 독일에 은신했던 1급부역자 르바테는 1946년에야 재판정에 서 총살형을 언도받았으나 몇 달 후 감형되었고 1952년에는 특별사면으로 출감하기까지 했다. 실제로 프랑스 민중의 부역자에 대한 격렬한 처벌 요구는 약 20개월만에 관용과 용서의 요구로 변화되었던 것이다.(ꡔ과거청산-국가별 사례와 쟁점ꡕ: 2002) 그럼에도 오늘날에도 과거청산의 유효성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민주화운동의 기억이 권력화, 국가화되기 이전에 민주화운동의 기억이 사회화, 공동체문화화 되어야 한다는 당위는 민주화운동의 실천력 한계로 당위에 그쳤고 아직도 숙제로 남아 있는 실정이다. 2001년 제정된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법에 따라 설립된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는 이 같은 당위에 부응하여 민주화운동 기억의 사회화, 공동체문화화 작업을 수행할 것으로 기대되었지만 출범 초부터 광범위한 민주화운동 세력과 시민사회단체의 지지와 협력을 얻지 못한 채 점차 일반 관변단체의 관료적 사업 방식을 답습해나가는 측면이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2기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와 2기 민주화운동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원회 역시 사정은 대동소이하다. 그러므로 이 시점에서 과거청산의 국가기구에 대한 재검토는 기억과 망각의 정치적 위계화와 의제적 국가화를 경계하기 위해서도 반드시 필요한 작업이다. 그러므로 이 시점에서 민주화운동의 기억은 기억에 대한 역사정리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기억에 대한 성찰과 당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삶의 생생한 기억 표출이 필요하다. 수동적인 피해(victim)와 희생(sacrifice)뿐만 아니라 능동적인 투신과 헌신의 역사가, 조직과 집단과 투쟁의 역사뿐만 아니라 아래로부터의 개인의 삶의 역사가 필요한 것이다. 민주화운동의 개인화는 집단에 파묻혀 사라져버린 개인의 삶을 찾아야 한다는 점에서 긍정의 요소가 있고 필요한 작업이지만 이름 있는 특정 인사에 의한 독점화와 배타적 상징화는 타기해 마땅하다. 이것이 바로 역사의 민주화, 기억의 민주화의 첫걸음이다. 정치사 제도사 위주의, 문서자료 위주의, 강자 중심의 역사 서술을 넘어서 민중들의 기억을 있는 그대로 불러내 아래로부터의 살아 있는 역사를 구성하자는 주장은 그러므로 민주화운동의 역사에 그대로 들어맞는 제안이다. ‘’역사는 민중항쟁의 역사로서 끊임없이 확대 발전해왔고... 역사발전의 계기마다 민중의 자각이 분출되었고...“ 등등 어찌 보면 상투적인 녹음기 역사서술은 지양될 필요가 있다. 진보환원주의와 마찬가지로 추상적인 역사의 발전법칙만을 되뇌는 역사 서술은 오늘의 개인의 삶과 사회변화에 아무런 울림도 주지 않는다. 그것은 그냥 종이낭비의 죽어 있는 쌔까만 글씨일 뿐이다. 흔히 한국의 경제성장과 민주화에 대해 압축성장, 압축민주화라는 용어를 쓰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용어 자체가 서구를 기준으로 놓고 보는 지극히 편협하고 비주체적인 관점의 표현이다. 역사에 비교우위는 없다. 어느 사회이든지 무수한 인과요소의 상호작용에 의해 변화하고 재구성되며 그 기억 역시 시간의 흐름에 따라 그리고 사람들의 인식 변화에 따라 끊임없이 재구성된다. 오늘날의 위기와 혼돈, 혼란은 고통스러울 수도 있지만 또한 새로운 질서로 재조직되는 ‘즐거운 무질서’일 수 있다. 무엇보다도 역사를 다시 보아야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역사는 늘 우리에게 교훈보다는 인간의 삶과 사회에 대한 새로운 질문을 던져주고 있으며 우리는 해답보다는 그런 질문을 찾기 위해 역사를 성찰하는지도 모른다. 민주화운동의 기억은 이제 성찰이 필요한 야생의 기억, 야생의 인간과 사회, 자연 그 자체이다. 그리고 이제 그것을 사회화하기 위해 우리는 과거를 청산하기보다는 성찰하는 시각을 가져야만 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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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호 선생의 신학에 관한 질문과 민중신학을 둘러싼 토론을 나눌 수 있는 공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