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m Jin Ho's Theology Archive 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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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5/16 (21:50) from 211.209.169.199' of 211.209.169.199' Article Number : 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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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책 [예수의 독설]이 출간 되었습니다
[예수의 독설](삼인, 2008.5)

머리글

2008년 서울, ‘갈릴래아 예수’의 독설을 상상한다


1987년 늦은 가을, 보름 가까이 도서관에 푹 박혀 끙끙대며 기획안을 만들었다. 이미 식어버린 내 마음 속의 민주주의의 열기를 책갈피 속에 투사하며 정신의 허기를 채우려는 듯이 날마다 꼼짝 않고 글과 씨름했다. 안병무 선생께 면담을 청하여 약속받은 그 날을 준비하기 위함이다. 「마태오복음」을 하느님 나라의 열망이 좌절된 공동체의 고통과 연계시켜보려는 것인데, 그 시절 우리 자신의 심정과 유사한 정서를 이 복음서에서 읽어보고자 함이었다.
바라만 보기에도 벅찼던 선생에게 석사논문 지도를 부탁하려면 단단히 준비해야 했다. 이미 두어 달은 족히 고민해온 것이기에 남은 보름의 시간이 논문 지도를 부탁하려 생각을 다듬는 기한으로 결코 부족하지 않았지만, 그이가 흠모해마지 않던 이였기에 내겐 결코 여유로울 수 없는 기간이었다.
드디어 그 날이 왔다. 기억으로는 너닷 장 되는 연구계획서를, 수없이 읽어대서 토씨 하나까지 너덜해진 그 기획안을 들이밀며 다짜고짜 브리핑을 시작했다.
아마 10분도 못 되었을 것이다. 선생은 내 말의 여백을 뚫고 들어와 비수 같은 한마디 말로 나의 생각을 난도질하고는 곧 자리를 떴다. “군(君)이 하기엔 너무 벅차군. 다른 걸로 준비하게.”
노태우 정권이 탄생하던 그 해 12월 중순, 역사의 반동적 흐름 앞에 심한 상실감에 빠져 있던 무렵, 흥겹지 않은 마음으로 크리스마스 행사를 준비해야 했다. 김지하의 <금관의 예수> 얘기로 시작하는 선생의 글 「예수와 민중」(󰡔신학사상󰡕 50<1985 가을>)을 다시 읽은 것은 바로 그때였다. 당시 <금관의 예수>는 피 끓는 진지함이 없는 이가 생각 없이 선택하면서도 그렇지 않은 양 자신을 가장(假裝)하고자 할 때 안성마춤의 크리스마스용 상찬(上饌)이었다. 그래도 그날을 준비할 조금의 진지함이 남아 있을 때 자신의 위선에 대해 살짝 위안받을만한 거리로 선생의 이 글은 꽤 쓸 만했다. 아무튼 이런 동기로 읽은 것이지만, 이 독서는 예수 연구자로서의 나의 이력에선 하나의 전기가 되었다.
「예수와 민중」은 ‘교회의 예수’를 ‘금관을 쓴 예수’와 동일시하면서, 그 화려한 외양에도 시멘트로 처발라져 꼼짝달싹할 수 없는 박제된 예수가 거지들로 인해 해방되는 이야기로 시작된다. 거지는 금관을 벗겨냄으로써 예수를 해방시켰고, 동시에 그것은 거지의 굶주린 배를 채워주는 밥이, 아니 생명이 되었다. 여기서 해방자 예수는 동시에 해방받아야 하는 존재로 묘사된다. 신이 구원의 대상이자 주체이고 민중 또한 그러하다는, 익히 알고 있던 민중신학적 어법인데, 문뜩 낯선 것을 접한 이처럼 생경함이 느껴졌고, 또 새삼스런 놀라움과 통쾌감이 무력해진 영혼에 침투했다.
김지하가 구원받아야 할 예수를 ‘교회의 예수’로 동일시하고 구원자 예수를 민중에 의해 금관이 벗겨진 예수, 하여 ‘교회 밖의 예수’로 말하고 있다면, 다시 말해 교회의 예수가 아니라 민중 현장을 끌어안게 된 예수에게서 신의 해방 사건을 역설하고 있다면, 안병무 선생은 이 ‘교회 밖의 예수’, ‘민중 현장의 예수’에서 ‘역사의 예수’를 읽어낸다. 말할 것도 없이, 그 자신의 시대에 예수는 유대교 회당이나 성전 언저리에서 금관을 쓴 이로 살아간 것이 아니라 민중의 고통 현장 한가운데서 그들과 더불어 살아간 이라는 얘기다. 교회로 인해 그러한 예수가 유실되었다면, 즉 ‘교회의 예수’는 ‘역사의 예수’가 아니라 그이를 왜곡시킨, 하여 신의 해방 사건을 무력화시킨 셈이다. 반면 민중 현장을 상상하며 예수를 바라보면, 교회로 인해 망각되어버린 예수, 곧 역사의 예수를 성서 속에서 읽어낼 수 있는 안목이 생긴다는 얘기다.
자주 접하다 보면 이런 얘기가 상투적으로 들린다. 민중신학을 접한 지 채 2년도 못돼서 나는 그런 매너리즘에 빠져있었다. 한데 이 순간 머리를 스치는 생각에 나는 스스로 놀랐다. 이 말 속에는 예수에 관한 역사적 연구가 직면했던 역사학의 위기를 넘어서는 실마리가 숨겨 있었던 것이다.
20세기가 시작할 무렵 예수에 관한 역사적 연구는 파산 상태에 있었다. 그리고 세기 말까지 학문적 주제로서 거의 빈사 상태였다. 하여 안병무 선생이 역사의 예수를 찾아 떠난 독일 유학길(1956~1965년)은, ‘아무 것도 배운 것이 없다’는 과장된 귀국 발언처럼 해답을 얻을 수 없는 것이었다. 선생의 지도교수이던 귄터 보른캄(G. Bornkamm) 등이 1950년대 초중반 호들갑스럽게 연구의 소생 가능성을 주장했던 것은 단지 하나의 해프닝에 지나지 않았다.
본래 예수에 대한 역사적 연구는 처음부터 ‘교회의 예수’와는 다른 실체로서의 ‘역사의 예수’를 발견하려는 취지에서 시작된 것이었다. 그것은 기독교도의 주관적 이해로부터 구분된 객관적 예수, ‘지금 여기’의 요소를 제거한 ‘그때 거기’의 예수를 찾아낸다는 역사학적 문제의식의 발로이다. 물론 기독교도가 주장하는 예수(교회의 예수)만이 역사학적 제거의 유일한 대상은 아니다. 좀 더 확대해서 오늘날의 사람들이 생각하는 예수가 아닌, 그때 거기의 예수, 즉 역사가 자신의 시대성과 분리된 예수 자신의 시대의 예수를 찾아내려는 학문적 운동이 바로 역사의 예수 연구의 목표였다. 학자들은 그 예수를 ‘갈릴래아의 예수’라고 불렀다.  
그런데 20세기가 시작할 무렵 연구자들이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던 사실은 ‘갈릴래아의 예수’를 찾아 떠난 학문적 여행이 도달한 곳은 ‘유럽의 예수’였다는 것이다. 이렇게 ‘고대 팔레스타인의 예수’ 대신 ‘모던 예수’를 발견하게 된 것을 연구사는 ‘실패’로 규정했고, 이런 사정은 20세기 내내 변함없었다.
1980년대 중반 이후 북미를 중심으로 역사의 예수 연구는 다시 활력을 얻었다. 연구서가 폭증한 것은 물론이고, 질적인 수준에서도 상당한 도약이 있었다. 그런데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사실은 최근의 이 연구 경향도 거의 예외 없이 현재성이 배제된 ‘갈릴래아의 예수’에만 몰두하고 있다는 점이다. 현재를 배제한 과거의 복원, 그것이 실현되지 못하면 연구는 실패할 운명이었다. 아무튼 달라진 것은 최근 북미의 연구자들은 그것에 성공할 수 있다는 낙관적 믿음을 가지고 있고, 또 지금 당장도 상당히 근접해갔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한데 과연 그런가? 북미 예수 연구 집단 중 시민사회의 주목을 받는 데 가장 성공한 ‘예수세미나’를 포함한 최근의 연구 경향 일반에 대하여, 독일학자이면서도 북미 연구자들 사이에서 더욱 열렬히 환호를 받고 있는 게르트 타이쎈(Gerd Theissen)은 그것은 ‘갈릴래아의 예수’라기보다는 ‘캘리포니아의 예수’의 기조를 띤다고 비평한 바 있다. 또 ‘예수세미나’의 열렬한 포교사인 마커스 보그(Marcus Borg)는 이 연구집단 외부의 연구자이면서 가장 성공한 연구서를 저술한 이의 하나로 평가받는 버튼 맥(Burton Mack)을 겨냥하여, 맥의 예수가 “LA 고속도로에서 교통사고로 죽었다”는 진담 섞인 농담을 편다. 요컨대 최근 북미 연구자가 찾아낸 예수는 ‘유럽의 모던 예수’는 아니었지만 ‘아메리칸 모던 스타일의 예수’라는 얘기다.
그렇다면 지난 18,19세기의 연구를 평하던 시각에서 보면 최근의 역사의 예수 연구 또한 예수 연구의 부활로서 평가할 수 없다는 것이다. 다만 그렇지 않다고 그들이 믿을 뿐.
한데 최근 북미의 예수 연구를 포함해서 이제까지의 연구는 한결같이 예수 자신의 동시대성(과거)과 해석자의 동시대성(현재)을 날카롭게 단절시키고, 현재와 분절된 과거적 실체로서의 예수를 복원해내는 것이 바로 ‘역사의 예수’ 연구의 핵이라고 본다. 그런 점에서 최근의 예수 연구도 실패라고 평할 수 있는 것이다.
한데 안병무 선생은 「예수와 민중」이라는 짧고 허술한 글에서 놀랍게도 ‘교회의 예수’에 대해서 ‘민중 현장의 예수’를 말하는 김지하의 주장을 소재로 해서, ‘교회의 예수’를 극복하고자 했던 서구의 ‘역사의 예수’와는 다른 민중신학적 ‘역사의 예수’론을 펴고 있다. 서구의 역사의 예수가 해석자 동시대성(현재)을 제거한 과거의 예수를 주목한 반면, 선생의 민중신학적 역사의 예수론은 해석자의 동시대성에서 과거의 예수를 읽는 실마리를 발견한 것이다. 요컨대 과거를 현재와 구분하는 역사학에 대하여 과거와 현재를 연결하는 역사학적 시선을 선생은 이 글에서 제안하고 있다.
너무 얘기가 길었다. 아무튼 선생의 이 글을 읽으면서 내가 어렴풋이 발견한 것은 역사의 예수와 오늘의 민중 현장 사이의 연계성을, 그 연구 방법론적 실마리를 찾아낸 것이다. 이것이 내가 역사의 예수에 대한 공부를 시작한 출발점이다. 물론 지금의 관점에서 정리한 과거의 이야기니만큼, 설명의 세공은 과거보다 훨씬 정련된 시선을 담겨 있다. 하지만 예수에 관한 역사적 연구의 가능성을 어렴풋이나마 발견한 시점이 1987년 크리스마스 어간이었고, 이 낙망의 시간에 민중신학적 예수 읽기에 관한 희망을 느끼게 됨으로써 역사가 수련생인 나와 오늘의 민중 현실, 그리고 과거의 존재인 예수 사이의 연계성을 통해 나의 영혼에 생기를 불어넣는 구원사건이 발생했으며, 이것이 계기가 되어 역사의 예수에 관한 공부가 시작되었다는 얘기다.  
읽을 책과 생각의 단서를 주는 대신 나의 말을 들어주는 선생의 교수법은 퍽 힘들었다. 모든 게 내 몫이었고, 선생은 나의 생각의 구성 방법에만 코멘트를 주었을 뿐이다. 당신의 생각과 다르더라도 논지의 설명력을 중시한 교수법을 통해 나는 연구사가 강제하는 생각의 질서보다는 내 나름의 생각의 틀을 찾아 긴 우회로를 비틀거리며 달려갔고, 목적지 없는 긴 여행길을 이리저리 헤매며 갔다. 그리고 덕분에 이 공부길은 그 성과와는 관계없이 내겐 자유로운 해방감을 만끽하는 신앙적 순례의 여정이 되었다.
어느덧 20년의 세월이 흘렀다. 내가 하고 싶었던 것은 최소한 예수 연구의 3부작을 내놓는 것이었다. 하나는 역사의 예수 연구사, 특히 20세기 후반의 연구 경향을 소개하는 것이다. 역사의 예수 연구가 빈사상태에 있던 때 허우적대며 가능한 모든 방법을 통해 실마리를 찾아 헤매던 중 갑자기 사막의 신기루처럼 나타난 북미의 연구물들을 접했다. 1980년대 끝 무렵부터다. 잔뜩 희망을 품고 탐독하다 낙담하고, 거기에서 그런 경향과는 다른 나의 방식을 찾기 시작한 공부의 여정, 그것을 책으로 소개하고자 하는 것이다. 󰡔예수 르네상스―역사의 예수 연구의 새로운 지평󰡕(한국신학연구소, 1996)이라는 엮음집이다. 여기에는 연구자로서의 방황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런 점에서 이것이 이 주제에 관한 훌륭한 책은 아닐 수 있어도, 내겐 어느 저술보다 깊은 고민과 열정, 애정이 깃들어 있다.
두 번째는 나의 시각으로 연구사를 평가하고 대안을 모색하는 책을 내는 것이다. 내 식의 방법을 정리하고, 그 시각에서 연구사를 메타비평하는, 그리고 그 눈으로 역사의 예수를 읽어보려는 것이다. 󰡔예수 역사학―예수로 예수를 넘기 위하여󰡕(다산글방, 2000)는 이렇게 해서 만들어졌다. 책을 낼 당시에는 평생에 이 책 이상의 것을 다시는 낼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적어도 내 능력에는 이것이 한계 지점이라고 생각했다. 한데 몇 년이 못가서 이 책의 문제점이 무수히 발견되었다. 결국 수정판을 생각하게 되었고, 지난 2004년 이후 조금씩 정리하여 ‘모던 예수’라는 이름으로 초고를 만들어 2006년에 같은 제목으로 강좌를 열기까지 했다. 아직 정리할 게 좀더 남았지만, 곧 완성하여 공개할 계획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생각한 것은 예수 시대 민중사를 쓰고자 하는 것이다. 예수운동이 예수의 독백적 사건이 아니라, 대중과 더불어 일으킨 사건에서 비롯된 것이고, 그것에 대한 대중의 기억을 통해 전수된 것이 예수 기억의 한 축이라면, 그러한 기억의 역사를 동시대 민중운동사의 맥락에서 정리해보려는 것이다. 한데, 실은 이것은 내겐 너무나 요원한 작업이다. 우선 체력의 한계를 절감하고 있어, 가능할지 우려스렵기까지 하다.
한데 그러한 기획과는 별개로, 또 다른 의미로 󰡔예수의 독설󰡕을 내놓게 되었다. 그것은 두 번째 책에서 시도한 복음서를 통한 예수 읽기가 나의 생각을 담는 형식으로 단지 한 면만의 타당성을 지닌다는 생각 때문이다.
󰡔예수 역사학󰡕에서 말하고자 한 것은 ‘모던 예수’는 역사학의 실패가 아니라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이라는 데 있었다. 요컨대 과거를 현재와 단절시키는 데서 역사학이 성공하리라는 실증주의적 역사인식론을 넘어서, 과거와 현재 사이의 대면/대화를 통해 역사를 구성하는 현대적 역사학으로서 예수 역사학을 재건하고자 하는 것이다. 특히 그 방법론적 가능성을 ‘민중 현장’과의 접속에서 찾고자 했다.
그것은 예수에 관한 대중의 기억을 담은 책인 「마르코복음」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이 속에는 권력에 의한 민중의 고통이 예수를 기억하는 그들의 행위와 깊이 얽혀 있다. 그것은 예수 동시대에 예수를 보고 그와 함께 했던 민중의 예수 기억과 연결되어 있다. 여기서 자세히 논할 수는 없지만 안병무의 민중론인 오클로스론은 그것을 입증하는 훌륭한 역사학 방법론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오늘 우리는 권력에 의한 고통의 현장을 보며 예수에 대한 바람을 갖는다. 요컨대 예수 동시대 민중사건 속의 예수 기억-「마르코복음」의 민중사건 속의 예수 기억-오늘 우리의 민중사건 속의 예수 기억, 이 거대한 사건적 연계는 고통의 유사성에서 기억의 유사성을 찾을 수 있다는 역사학적 가능성을 시사한다.
그런 점에서 예수 읽기는 오늘 우리 시대의 고통에 관한 보다 직접적인 읽기/이해를 예수 텍스트 읽기와 연동시키는 작업을 필요로 한다. 󰡔예수의 독설󰡕이 담고자 한 것은 바로 이 점에 있다. 오늘 우리 시대의 고통의 결이 수없이 다양하기에 그것은 하나의 거대한, 일관성 있는 스토리로는 불가능할 것 같고, 오히려 단편적인 에피소드를 통한 예수 읽기가 안성마춤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찾아낸 것이 그간 했던 설교 중에서 관련된 내용을 뽑아서 재정리하는 방식을 택했다.
그런데 그러한 다양한 단편적 이야기들을 하나로 꿰는 것은 권력이다. 여기서 권력은 군대나 경찰 같은 외적 규제를 통해 실현되는 것만이 아니라는 점을 주지해야 한다. 오히려 그것은 내면적인 작동 기재를 갖는다. 우리 시대에는 너무나 촘촘하고 정교하게 구성되어 있지만, 예수 동시대에도 적어도 촌락차원에서는 매우 정교했다. 관습의 형태로 실재하는 권력의 힘을 읽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국가의 외적 규제력과 어떻게 연동되는지를 살피는 것이 중요하다. 이러한 권력 읽기를 통해 예수의 단편적 이야기들은 큰 틀 속에 엮인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예수가 동시대의 거시적이고 미시적인 권력과 벌인 싸움들에 주목한다. 그것은 건건마다 다양하게 나타나지만, 전체적으로 권력에 대한 독설을 통해 민중을 규제하는 규범을 희화화하거나 무력하게 하려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요컨대 고통의 장치에 대한 예수의 독설이 이 책의 주제인 것이다.

이 책은 지난해 부활절 직전에 출판사에 넘겼다. 실은 그 부활절에 맞추어 내고 싶었는데, 너무 늦게 넘어간 탓에 불가능했고, 해서 크리스마스 때에 출간하면 좋겠다는 의견을 전했다. 그러다 정권이 바뀌었고, 그 전후로 하는 한국의 지배적인 교회들의 일련의 움직임을 보면서 조금 더 생각의 정리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출판사의 일정과 나의 사정이 겹치면서 책은 다시 미루어졌고, 이른바 실용정부가 탄생한 직후에 출간되게 되었다. 나로선 다행이다.
‘실용’ 혹은 ‘선진화’라는 구호 속에 새 정부가 구성되었다. 근데 아무리 봐도 그 내용이 불명확하다. 몇 년 전 ‘참여’라는 말에서 느낀 생경함보다 훨씬 더하다. 아마도 현 정부의 주역들도 그런 모호함을 느낄 것 같다. 저마다 다소간 의견이 다르고, 그 다름을 두고 이렇다 할 대화나 조율이 부족하다. 또한 대화의 장에 내놓을 만큼 다듬어진 것도 없는 듯하다. 요컨대 ‘선진’이나 ‘실용’이라는 기호는 의미가 비어있다. 그것은 이 비어 있는 기의를 채우기 위해 다중의 권력행위자들이 경합을 벌이는 가운데 현 정부가 구체화될 것이라는 뜻을 포함한다.
근데 내가 주목하는 것은 후발대형교회라고 부르는 최근 급성장한 대형교회들의 움직임이다. 여기저기서 그 추이에 대해 여러 가지로 의혹을 던진 바 있고, 올해 주로 이 문제가 나의 연구의 핵이 될 예정인데, 아무튼 나는 여기에서 한국 특유의 보수주의가 구성될 가능성에 주목한다. 그리고 이것은 박세일이 주장한 공동체적 자유주의 담론과, 그 속에 함축된 뉴라이트적 지향과 엮인다.
고통의 구조가 한국사회 속에 정착하는 배후에 일단의 한국교회의 흐름이 관련되어 있을 법하고, 그것을 나는 뉴라이트적 지향에서 실체적 흔적을 추적하고 있는 것이다. 이 책은 바로 이러한 체제의 제도화를 주목하면서 예수를 보려는 시각을 담고 있다. 향후 체제의 권력이 민중의 고통을 어떻게 구성할 것인지, 그리고 이에 대해 예수가 했을 법한 독설의 내용이 어떠했을지를 드러내보려는 것이다. 다행히도 출간 시간의 지연으로, 이런 문제의식을 일부나마 담아낼 수 있는 시간적 여유를 얻을 수 있었다.
아마도 이 책을 나보다 더 꼼꼼히 읽은 이가 있다면 그는 강지환 님일 것이다. 그는 이 책의 전담 편집자이다. 너무 섬세하고 철저하게 보고 많은 조언과 충고를 통해 이 책은 편집과정에서 어느 정도 보완될 수 있었다.
삼인 출판사에서 나의 책이 나올 수 있게 된 것에 나는 퍽 만족스럽다. 오래 전부터 알고 있던, 출판사의 부사장이자 실질적인 운영자인 홍승권 님의 인격을 흠모하기 때문이고, 몇 차례 식사를 나누며 함께 했던 직원들 사이의 분위기에 한시적이나마 그들의 일원으로 운명이 엮인 것이 즐겁기 때문이다.
이 책의 수록된 원고의 대부분은 한백교회에서 한 설교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런 점에서 한백은 이 책의 공동 저자인 셈이다. 나에게 영적 자양분이 되어준 한백 식구 모두에게 감사한다. 나는 그들에게 배우고, 그들로부터 상처를 치유받아 왔다. 전직 목사인 나는 지금 그곳에서 한 사람의 신자로서 내가 얻은 것을 되갚으려 봉사한다. 이 책의 그러한 되갚음의 한 행위로서 의미가 있었으면 좋겠다.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회원들과 상임연구원, 그들과 함께 나의 40대 후반을 같이 하는 게 너무 즐겁다. 지난 17년간 함께 했던 수많은 이야기들이 소중하기에, 어느 때보다도 할 일이 많은 지금 그 일의 실무 책임자로서 일하는 어깨가 버겁지만, 내가 조금은 기여한 사람으로 기억되었으면 좋겠다. 이 책을 그들 모두와 공유하고 싶다.
마지막으로 우리 시대의 고통에 관한 예수 읽기의 보다 가치 있는 책의 출현을 위해 나의 책이 하나의 징검돌이 되었으면 좋겠다.

2008년 4월 4일
망원동 올빼미의 작업장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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