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3/09/16 (14:18) from 61.254.100.48' of 61.254.100.48' | Article Number : 176 |
올빼미
|
Access : 4172 , Lines : 21 |
| 보수주의 신앙의 탄생에 관하여(2003.9.7하늘뜻나누기 원고) |
|---|
|
보수주의 신앙의 탄생에 관하여 40대 중반의 한 남자는, 가족을 돌보는 것은 ‘가장’의 마땅한 의무라고 주장합니다. 그의 이야기는 계속 이어집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열심히’ 일해야 한다고 말입니다. 제가 보기에, 그는 근면 성실한 사람의 표상처럼 보입니다. 그는 술도 먹지 않고 담배도 피우지 않습니다. 물론 룸살롱 같은 데는, 영업담당 부장 직위에도 불구하고, 입사 초기 몇 번을 제외하고는 전혀 가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의 독실한 신앙은 그로 인한 불이익을 기꺼이 감수할 자세를 스스로에게 심어주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가정적인 사람은 아닙니다. 거의 매일 야근이고, 한 달이면 족히 사오일 정도는 출장으로 집에 들어오지 못합니다. 모처럼 집에 있을 때도 세 딸이나 아내를 위해 이벤트를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오히려 오랜 직장 생활 탓에 부실해진 건강으로, 종일 비실거리며 하루를 보냅니다. 그리고 틈만 나면 성경을 읽고, 신앙 서적을 봅니다. 주일이면 거의 예외 없이 교회엘 가고, 여름과 겨울에 휴가를 교회 수련회에 맞추어 보냅니다. 직장 동료로 만난 그의 아내는 전업주부입니다. 첫째 아이를 낳으면서 7년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었고, 이년 터울로 줄줄이 딸 셋을 낳았습니다. 신혼여행 이후로는 여행이란 교회 수련회밖에 없었고, 이젠 남편 못지않은 경건한 신앙심을 가진 사람입니다. 셋째 아이를 낳은 이후로는 남편과 성관계를 거의 갖지 않았다고 하는데, 그녀의 친구 말에 의하면 그녀는 성관계를 불순한 것으로 생각하는 것 같다고 합니다. 그리고 남편의 말을 통해 짐작해 보건대, 친구의 그러한 판단은 그리 틀린 것 같지 않았고, 놀랍게도 이 부부에게 그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 것 같다는 것입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부부싸움이 거의 없다는 점입니다. 그 남자의 말에 따르면, 아내가 아내의 도리를 다하고, 남편이 남편답게 처신하는 데 무슨 갈등이 있느냐고 합니다. 입시생인 첫째 딸이나 사춘기를 보내고 있는 다른 두 딸도 부모들과 아무런 갈등이 없다고 말하는 그는 자랑스러워하는 모습이 역력합니다. 모범적인 중산층 크리스천 가족의 모습은 이런 것이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분명 그는 이러한 자신의 모습을 신앙적 모범형에 준한 것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한데 이런 맥락에서 그의 신념은 가신의 가족의 범위를 넘어섭니다. 그는 자기 가족의 모습이 정상이라는 가정 아래서, 다른 가족을 판단합니다. 나아가 자신의 가족관과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의 모습을 도무지 받아들이려 하지 않습니다. 이혼은 하느님의 뜻에 거스르는 것이고, 독신 또한 하느님의 질서를 거스르는 행위에 불과합니다. 동성애 성향의 사람에 대해서는 훨씬 완고한 태도를 갖습니다. 경제적으로 무능한 남편과 살림에 서투른 아내는 한마디로 ‘게으른 자’로 취급됩니다. 제 나름으로 그의 태도를 해석하자면, 그에게서 남자는 남자답게 성공적이어야 하고, 여자는 여자답게 성공적이어야 하며, 자녀는 자녀답게 성공적이어야 합니다. 언제나 ‘성공적인 것’이 긍정되며, 또 언제나 성별, 세대별 질서를 중요시합니다. 내가 그의 생각에 대해 구체적인 상황을 들어 추궁하면, 그의 대답은 몹시 궁색해집니다. 거의 아집처럼 자기 자신의 생각만 정상이고 다른 모든 것은 비정상이라는 식의 얘기만 반복될 뿐입니다. 그것은 물론 당연한 일입니다. 왜냐면, 그가 말하는 정상적인 삶은, 성별적이든 세대별적이든, 현실의 모습이 아니라 추상화된 이미지에 의해 고정된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노동할 때의 현실적인 모습과는 달리, 신앙적 신념을 표명할 땐 좀처럼 현실의 사람들의 세계로 나오려 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의 생각을 아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그는 이중적인 질서 속에서 생각하고 판단합니다. 단 그것이 이중적이지 않은 대목은 자기 자신의 삶에 관한 것뿐입니다. 자신의 삶은 신앙적으로 올바르다고 확신하기 때문이겠지요. 몇 년 전에 개봉된 미국 영화 <아메리칸 뷰티>는 매우 날카롭게 이러한 중산층적 가치를 비웃고 있습니다. 사랑으로 묶여야 할 부부는 자신의 역할에 충실할수록 죽음 같은 삶을 살 뿐입니다. 주인공의 유명한 독백적 대사 “일 년도 되지 않아 나는 죽을 거야”는, 성실한 미국의 중산층 가장의 절망적인 고독을 단적으로 말해줍니다. 근면 성실한 삶을 구원과 직결시켰던 미국 중산층의 청교도 신앙을, 영화는 ‘죽음의 예감’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히려 말도 안 되는 사랑의 불장난에서 그는 죽음 같은 삶의 감옥에서 탈출합니다. 딸의 친구를 욕망의 대상으로 삼게 되면서, 뱃살을 빼기 위해 조깅을 하고, 마리화나를 피우고, 빨간 스포츠카를 사고, 햄버거를 먹습니다. 분명 그는 점적 익명화되어가는 무기력한 40대의 삶의 진부함에서 벗어나는 것이 무엇인지에 관해 잘 알고 있지 못합니다. 한번도 생각해보지 못한 삶의 기회였기에, 자신이 누구였는지를 기억해낼 만한 적절한 언어를 갖고 있지 못합니다. 최근 ꡔ남자의 탄생ꡕ이 출간되자 비로소 더듬더듬 제기되는 남성의 자기 언어의 부재에 관한 논의처럼, 이 영화는 미국 중산층 남성 또한 자기 언어의 부재를 경험하고 있음을 말해줍니다. 전형화된 삶, 구체성을 결여한 상징적 이미지로 구성된 가장, 남편, 아버지의 모습, 그것은 현대 사회에 와서 남성의 소외를 야기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의 무기력을 표현할 언어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화는 딸의 친구인 10대 소녀를 욕망하면서, 철없는 사람처럼 허둥대며 부자연스럽게 행동하는 중년남자를 그리고 있는 것입니다. 근대 세계는 국가를 중심으로 하는 사회적 통합을 실현하는 주된 장치로서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으로 나뉜 경험세계를 창출합니다. 전자는 노동의 공간이고 후자는 휴식의 공간입니다. 또 전자는 남성의 공간이고 후자는 여성의 공간입니다. 물론, 이런 표현에서 드러나듯 이러한 분할은 남성 중심적입니다. 여성의 가사노동은 노동으로 평가받지 못하고 남성 노동자의 휴식을 위한 일종의 접대행위로 간주됩니다. 이러한 세계의 공사 영역의 제도화는 남자와 여자를 이 체제에 맞는 품성의 존재로 만들어냅니다. 그리고 남자와 여자는 각각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에서 자신의 전문성을 개발해냅니다. 그 결과 남자는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요소가 강화되고, 여자는 감성의 전문가로 성장합니다. 여기서 앞서 말한 중산층 크리스천의 신앙은 바로 이러한 근대적 사회의 종교적 발명품이라는 점을 짚어둘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 신앙의 사람들이 자신의 삶을 변증하기 위해 들먹이는 성서 구절이 학문적으로 반박될 때, 그런 부류의 사람들은 갑자기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모습을 감추고, ‘영’을 들먹이곤 합니다. 이런 경우 ‘영’의 역할은, 우습게도, 남성 중심의 근대적 가치관을 보편적인 것인 양 오독해온 것이, 자기 자신을 정당화해줄 줄 알았던 근대적 학문에 의한 비판에 직면하게 될 때, 궁색한 근대주의 신앙의 도피처에 다름 아니라는 것임을 여실히 드러내고 맙니다. 다시 현대 세계 얘기를 계속해 보겠습니다. 문제는 근대 자본주의 사회가 자신이 양분시켜온 공사 영역이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다시 통합되고 있다는 데 있습니다. 이른바 ‘소비자본주의’는 자본주의가 온갖 것을 상품화하면서 사적 영역을 상품화하는 데까지 이르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개념입니다. 이것은 감정을 충동질함으로써 소비 욕구를 창출하게 되는 사회를 가리킵니다. 한데 문제는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남성은 감성적 상품에 별로 자극받지 않는 반면, 감성의 전문가가 되어버린 여성이나, 아직 여성의 영향권 아래서 성장하고 있는 미성년자는 그러한 상품에 충동질되는 욕구의 주체라는 점입니다. 그것은 다시 말하면, 상품미학이 극도로 발전한 후기자본주의 사회에서 남성의 하위주체였던 여성과 미성년이 자신의 욕구를 표현하는 주체로 부상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중대한 변화가 일어납니다. 남성의 가장으로서의, 남편으로서의, 아버지로서의 ‘당당함’을 평가하는 이가 남성의 언어에 의해 포박된 식솔이 아니라 새롭게 주체로 부상한 아내이며 미성년자라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 당당함의 기준은 소비자본주의가 새롭게 이미지화한 대중스타입니다. 결국 이상적인 자태로 이미지화된 대중스타를 남성은 모방해야 하고, 또 그 모방은 항상 실패로 귀결되는 현상이 벌어집니다. 요컨대 이제 남성은 늘 아내와 자식들의 평가를 두려워하는 나약한 남성으로 전락하게 됩니다. 이것이 오늘날 남성 소외의 주된 양상입니다. 오늘 우리의 세계는 시시각각 이런 모습으로 변화하고 있고, 최근 개봉된 한국 영화 <바람난 가족>이 그리고 있는 것처럼, 가족은 더 이상 강한 남성에 의해 지켜질 수 없는 상황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현대 남성의 고독은 구원을 갈구하지만, 우리의 중산층적인 신앙적 가치관은 그것을 무시합니다. 권위가 다시 선 가장 중심의 가족을 회복함으로써 갈등과 분열의 위기에 놓인 가족의 평화를 이룩하려는 이른바 가족로망스는 그래서 더욱 실패의 위기에서 다소 먼, 중산층 가운데서 비교적 성공적인 부류 중심의 신앙으로 고착화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최근 비로소 이데올로기의 영역에서 일상의 영역으로 점유공간을 확장하면서 부상하고 있는 한국 사회의 보수주의의 주된 토대로 기독교신앙이 자리잡고 있는 것도 이런 맥락과 관련이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남성의 소외는 가족이 남성 중심주의로 점철된 탓이라는 점을 이 신앙 체계는 간과하고 있습니다. 성별, 세대별 위계가 흔들리고 있는 사회에서 적합한 신앙은 그러한 삶의 구조 밖이 아니라 그 안에서 진정 행복한 것이 무엇인지를 진지하게 묻는 태도에서 나온다는 것입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