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99/06/25 (13:44) from 203.252.17.174' of 203.252.17.174' | Article Number : 2 |
김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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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cess : 3021 , Lines : 59 |
| 뚫―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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뚫―어! -------------------------------------------------------------------------------- * 통일염원 51년(1995) 12월 3일 오백 스물 네번째 모임 * 본문 : 이사야서 58:12 * 곳 : 한백교회당(연남동 민주언론운동협의회 강당) -------------------------------------------------------------------------------- 12 너는 물이 항상 흐르는 동산이요, 물이 끊어지지 않는 샘줄기, 너의 아들들은 허물어진 옛 터를 다시 세우리라. 너는 '갈라진 성벽을 수축하는 자' '허물어진 집들을 수리하는 자' 라고 불리리라 -------------------------------------------------------------------------------- 이래저래 바뻤던 탓에 오랫동안 덮어뒀던 원고를 다시 써볼려고 책상에 앉아 콤퓨터를 켰습니다. 쓰다 만 것이어서 절반쯤 써 놓은 것을 다시 두어번 읽어보고 원고에 집중하려 애쓰면서 머리를 쥐어짜고 있는데, 머리가 채 워밍업도 되기 전에, 갑자기 밖에서 들리는 한 파열음이 저의 머리칼을 온통 곤두서게 만들고 말았습니다. 그것은 '징' 하는 소리였습니다. 우리 예배 때 듣던 것 같은 고요한 소리가 아니라, 귓 속에 가득히 찬 귀밥을 대번에 뚫어 놓고도 남을 만한 찢어질듯 우람한, 그리고 그 여운을 길게 남기는 그런 소리였습니다. 그리고 연이어 그 소리에 결코 못지 않을, 비록 허스키한 음성이었지만, 째지는 듯한 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립니다. '뚫―어!'. 그런데 징 소리에 발작을 일으킬듯이, 날카롭게 곤두서 있던 뒤틀린 심사가, 이 남자의 목소리와 더불어 '시치미를 뚝 떼고' 차분하게 회상에 젖은 듯한 모습으로 점점 멀어져 가는 그의 소리를 감상하고 있었습니다. 20년 가까운 망원동 살이에서 오랬동안 낯익게 들어온 소리였습니다. 하지만 최근엔 거의 들은 기억이 없는, 참 오랬만에 들은 소리였습니다. 그가 안나타난 탓인지, 내가 무관심한 탓인지는 모르겠습니다. '뚫' 자에 강세가 붙으면서 참았던 숨이 터지듯 갑자기 내뱉어집니다. 아마도 그 순간 입에서 튀어나온 침 덩어리가 족히 1 미터는 허공을 날았을 듯합니다. 이 발음은 길게 이어집니다. 마치 활시위를 당기듯 길게 이어지는 '뚫' 발음은 그 다음에 이어지는 소리를 잔뜩 끌어당깁니다. 그리고 곧 기다렸다는 듯이 '어' 소리가 튀어나옵니다. 그렇지만 이번에는 길게 이어지는 소리가 아니라, 마치 군대의 기합소리처럼 짧고 단호한 소립니다. 징 소리가 난 때부터 '어' 소리가 끝날 때까지 족히 10초는 되었을 듯한데, 징 소리의 여운은 아직도 귀속에 생생하게 남습니다. 누구라도 그의 독특한 소리를 들으면, 비록 똑같은 소리의 반복일지라도, 그 다음 소리에 귀기울이지 않을 수 없게 하는 그런 소립니다. 그리고 마치 귀 속뿐 아니라 가슴 구석구석까지 응어리진 곳을 팍 뚫어주는 그런 소립니다. 그러니 정말 그에게 굴뚝 청소를 맡기기만 한다면 한 겨울을 행복하게 보낼 것만 같은 그런 소립니다. 마침 아침에 전두환의 말같지 않은 소리를 듣고서 부화가 잔뜩 올라 있던 차에, 그의 소리를 들으니 몇년 묵은 체증이 가라앉듯 한 느낌이었습니다. 저는 어제〈코드명 J〉라는 영화를 비디오로 봤습니다. 미래 세계를 배경으로 하는 이른바 공상과학 영화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저의 눈을 번쩍 뜨이게 하는 대목이 있습니다. 콤퓨터 정보시대에 돌입한 우리 시대도 이미 두드러지게 겪고 있는 '정보의 과잉현상'이, 이 영화에서는 더욱 극단적으로 드러나서 스토리의 배경이 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콤퓨터라는 기계는 비단 우리 몸 밖에 있는 '단순한 기계'로 치부될 수가 없습니다. 그것을 어떻게 이용하느냐의 문제에 따라 그것의 의미가 좌우되는 단순한 수단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마치 돈이 단순히 물건과 물건을 교환할 때 편의를 위해서 사용하는 우리 몸 밖에 있는 하나의 활용수단에 그치지 않듯이 말입니다. 돈은 이미 우리 삶의 일부가 됐습니다. 우리의 욕망을 규정하고 삶을 이끌어갑니다. 아니 그것은 우리의 욕망, 우리의 삶의 일부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런데 정보통신 시대는, 금이나 은을 대신해서 종이조각이 화폐로 이용되었듯이, 정보가 지폐를 대신하는 화폐의 역할을 하기도 합니다. 또한 정보는 문자를 통한 지식을 대체합니다. 나아가 정보는 우리로 하여금 경험한 것과 경험하지 않은 것을 혼돈하게 만듭니다. 수많은 정보들을 통해서 우리의 경험 세계는 온통 가상현실의 세계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요컨대 정보는 돈보다도 더욱 강력한 파급력으로 우리의 욕망, 우리의 삶을 규정하고 지배하며 이끌어갑니다. 우리는 점점 정보의 운반자에 불과한 존재로 되어갑니다. 정보가 우리가 되고 우리는 정보의 한 수단처럼 되어갑니다. 이 영화는 바로 이런 정보과잉 상황을 극단화합니다. 우리의 손과 발, 몸 구석구석에까지, 그리고 심지어 두되까지도 정보를 저장, 유통시키는 기계적 유기체가 돼버렸습니다. 이 영화의 주인공은 자신의 두뇌 속에 정보를 입력하여 밀수하는 사람입니다. 엄청난 정보가 머리 속에 들어가려니, 기존에 들어가 있던 기억들은 제거돼야 합니다. 용량초과 때문에 말입니다. 경험과 유전을 통해서 형성된 인간이라는 유기체는 이렇게 기계적인 정보의 매체로 이해되고, 그리하여야 행복과 욕망이 실현될 수 있다는 세계의 문법에 강요당하며 살게 됩니다. 그런데 바로 이런 상황에서 오늘날의 AIDS처럼 무시무시한 질병이 등장합니다. NAS(신경감퇴증)라는 질병입니다. 신경감퇴증세를 보이다가 끝내 죽고마는 그런 병입니다. 그리고 그 시대의 의학기술로는 불치의 병입니다. 정교한 정보 기계화의 과잉 속에 사는 사람들에게 정보 과잉 환경으로 인한 정보를 감지하는 신경이 마비되는 역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 굴뚝 청소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습니다. 다만 '뚫어'라는 반복되는 소리만 냅니다. 뚫을 굴뚝이 없는 나로선 아무 의미도 없는 소립니다. 하지만 그는 나에게 '이야기'를 합니다. 책을 통해서, TV를 통해서, 신문과 라디오와 잡지를 통해서, 그리고 수없이 만나는 사람들을 통해서 얻어 듣는 말에 온통 뒤덮혀 사는 나는, 우리 시대의 많은 사람들처럼, 소리에 대해 '신경감퇴증'에 걸린 사람입니다. 무수한 소리를 듣고, 그 속에서 무수한 이야기를 접하지만, 이미 이야기 과잉 환경 속에서 이야기에 대해 NAS, 즉 신경감퇴증에 걸려버린 것입니다. 이야기가 없어진 것입니다. 그것이 나의 이야기든, 타인의 이야기든, 나와 타인이 함께 엮어가는 이야기든 간에 말입니다. 그런데 굴뚝 청소부의 '뚫어'라는 소리는, 줄거리도 없고, 그 소리와 나와의 접점도 없지만, 그 단순한 소리는 내게 이야기로 다가옵니다. 그것이 하느님의 계시이어도 좋고, 이 세계를 휩싸 않고 있는 하나의 전체, 대우주로서의 생명이, 나라는 소우주와 접맥되는 지점이어도 좋습니다. 영화〈베를린 천사의 시〉에서 이 세상엔 이야기가 없다고 탄식하는, 이 세상엔 이야기꾼이 필요하다고 속삭이듯 절규하는 한 늙은이의 갈망이 나에겐 굴뚝청소부의 외침 속에서 실현되었던 것입니다. 여하튼 이 낯익은 목소리의 굴뚝 청소부는 내게 이야기를 합니다. 그는 나에게 있어서 세계의 이야기꾼이 된 것입니다. 그는 '뚫어'라는 한마디의 소리로서 내게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너는 물이 항상 흐르는 동산이요, 물이 끊어지지 않는 샘줄기, 너의 아들들은 허물어진 옛 터를 다시 세우리라. 너는 '갈라진 성벽을 수축하는 자' '허물어진 집들을 수리하는 자' 라고 불리리라(이사 58, 12). 온통 노폐물로 가득해버린 시대입니다. 해방 이후부터만 따져보더라도, 아직 한번도 제대로 청소해보지 못했지 않습니까? 이 기회가 어떻게 주어진 것이건, 마치 겨울을 따뜻하게 나기 위해서 미리 굴뚝 청소를 할 기회가 주어진 것처럼, 지저분한 것들을 치워버릴 때가 온 것입니다. 이번도 안하고 넘어간다면 우리의 시대뿐 아니라, 우리 자식들의 시대는 더욱 불행한 계절을 맞이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얼마전 제가 설교 때에 '잔인해져라!'라는 구호를 소개한 적이 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자면, 이 문구는 1960년대 후반 프랑스에서 민중운동이 격렬하기 전개될 때, 민중세력이 외쳤던 구호입니다. 철저하게, 더욱 철저하게 사회의, 역사의 노폐물을 쓸어버려야 한다는, 철저한 청산을 향한 구호입니다. 성서에서 아모스, 호세야, 이사야, 미가같은 예언자들의 철저한 청산 부르짖음이 그 사회로부터 외면당하자, 결국 이스라엘 남북 왕조는 공히 몰락의 운명을 맞이해야 했습니다. 오늘 읽은 이사야서의 본문은 왕국이 몰락한 뒤에, 그 잿더미에서 '갈라진 성벽을 수축하는 자', '허물어진 집들을 수리하는 자'를 부르고 있습니다. 이 본문은 이 성서를 읽는 모든 시대, 모든 사람들을 향해 철저한 청산과, 그것에 기초해서 세상을 재건하라는 사명을 우리에게 부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이야기꾼이 되라고 우리를 부르고 있습니다. 이런 사명을 가진자 다운 삶을, 신념을 가지라고 우리를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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