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4/01/27 (17:35) from 61.73.44.252' of 61.73.44.252' | Article Number : 289 |
올빼미
|
Access : 3080 , Lines : 40 |
| 이병동치(異病同治), 동병이치(同病異治) (2004.1.25하늘뜻나누기 원고) |
|---|
|
이병동치(異病同治), 동병이치(同病異治) 궁에서 ‘의녀 수련’을 받게 된 ‘장금’이 환자 진료 실습을 받고 있을 때 있었던 일입니다. 교육담당교수의 지시에 따라 그녀는 세 명의 환자 상태를 살펴본 후 어렵지 않게 질환의 성격과 처방을 내립니다. 반면 다른 수련생인 ‘신비’는 쩔쩔맵니다. 그러나 교수는 장금의 신속한 답변을 무시하고 신비에게 처방전을 낼 기회를 줍니다. 열흘의 말미를 얻은 신비는 더듬거리며 서투른 솜씨로 환자를 이모저모 살피고 되는대로 질문을 던집니다. 방향도 계획도 없는 막연한 조사입니다. 그런데 그 과정을 지켜보면서 장금은 교수가 왜 자신에게 기회를 주지 않는지를 비로소 깨닫게 됩니다. 해답은 이렇습니다. 세 명 중 첫 번째와 두 번째 환자는 같은 질환을 앓고 있지만 병의 원인은 전혀 달랐기 때문에 처방이 다를 수밖에 없었고(동병이치), 세 번째 환자는 앞의 둘과는 다른 질병을 앓고 있었지만 원인은 첫 번째 환자와 같았기에 첫 번째와 동일한 방식의 처방이 필요하다는 것이었습니다(이병동치). 드라마 <대장금>의 이 장면은 의미심장합니다. 장금은 다른 수련생에 비해 특출한 지식의 소유자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지식’은 속단을 낳습니다. 얼핏 보고도 환자의 상태를 확연히 알 수 있기에, 그녀는 환자와 대화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의학적 지식이 없다면 의사와 환자는 만날 이유가 없습니다. 의사에게 지식은 이 만남의 절대적인 조건입니다. 의학 지식을 통한 진료 및 치료 과정을 통해 의사와 환자는 관계 맺기에 돌입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관계 맺는 일은 양자간의 대화를 필요로 합니다. 물론 환자의 신음소리나 표정, 안색 등도 진료에서 일종의 언어입니다. 또 의사가 바라보고 만져주는 것 또한 언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말을 한다는 것이 다른 어떤 요소보다 대화에서 결정적인 의미를 지닌다는 것을 더 얘기할 필요는 없을 겁니다. 그런데 드라마에서 장금의 지식은 대화를 가로막고 있습니다. 지식은 환자를 더욱 잘 알려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고도 그를 충분히 알 수 있다는 편견을 낳았던 것입니다. 지식은 ‘내가 너를 이미 알고 있다’는 확신을 선사해 주었고, 그리하여 그에게 가장 필요한 것을 줄 수 있다는 자부심을 낳았습니다. 이러한 문제는 드라마의 또 다른 장면을 통해서 더욱 진지한 논점에로 다가서고 있습니다. 시험을 보는 장면입니다. 교수가 낸 문제는 ‘약재’(藥材)와 독재(毒材)를 쓰라는 것입니다. 여기서도 장금은 거침없이 써내려 갑니다. 하지만 그녀는 이 답안으로 낙제 점수를 받습니다. 반면 신비는 역시 몇 개 쓰지 못한 채 제출하지만, 대다수 수련생이 낙제 점수를 받은 과목에서 최우수 성적을 받습니다. 결국 장금은 자신의 문제를 깨닫고 재시험에서 최고 성적을 받습니다. 여기서 출제자는 약재와 독재가 미리 존재하는 게 아니라는 것을 가르치려고 했던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효능 좋은 약재라 하더라도, 알맞게 사용하지 않으면 독재가 될 수 있는 반면, 독재 또한 적절하게만 사용한다면 약재가 될 수 있다는 것이지요. 앞의 장면에서 장금의 지식이 ‘(너를) 이미 알고 있다는 확신’ 아래 상대와의 대화를 가로막고, 편견을 조장하고 있다면, 여기서는 그 지식이 이분법적으로 단순 분류된 인식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을 강변하고 있습니다. 좋은 것과 나쁜 것은 미리 정해져 있고, 지식은 그러한 분류 지식 자체인 것입니다. 요컨대 이분법적 지식의 체계는 속단의 체계이자 편견의 체계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지식 체계의 문제는, 환자는 의사의 지식에 따라야 한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즉 권력 관계가 처음부터 양자의 관계를 불균등하게 규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권력이란 타인에게 자신이 의도한 것을 강제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합니다. 드라마에서 의녀교육 담당교수가 그토록 장금의 지식에 대해 경계를 했던 것은, 대화를 가로막는 지식이 권력 관계의 약자에게 심각한 피해를 줄 수 있다는 사실을 가르쳐야 했기 때문입니다. 한데 이것은 이분법적 지식의 부작용의 일부에 지나지 않습니다. 환자를 잘못되게 할 수 있다는 가능성의 사실 못지않게, 이미 그러한 지식이 통용되는 것 자체가 부작용을 유발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지식 권력이 행사되면서 사람들의 머리 속에 좋은 것과 나쁜 것, 아름다운 것과 추한 것, 참된 것과 거짓된 것을 미리 속단하게 하는 인식이 심어진다는 것입니다. 누구나 어느 것이나 잘못할 수도 있고 잘할 수도 있습니다. 유용할 수도 있고 무가치할 수도 있습니다. 멋지거나 아름다울 수도 있고 추잡하게 보일 수도 있습니다. 어떤 말이 어느 상황에서는 참된 것이지만 다른 상황에서는 거짓된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가변성은 자기 자신의 경우에는 비교적 잘 적용되지만, 타인에게는 좀더 경직되게 적용되곤 합니다. 관계하기 전에 미리 그 성격이 단정되고, 이러한 평가에 따라 그들이 받을 대우가 미리 결정됩니다. 그리하여 어느 것은 좋은 것이 되고, 다른 어느 것은 나쁜 것으로 미리 정해집니다. 또 어떤 이는 좋은 편이고, 또 다른 어떤 이는 악의 화신임이 관계를 통해 경험해보기도 전에 결정됩니다. 성서의 율법은 자칫 이러한 특성을 지니기 쉽습니다. 가령 <<레위기>> 10장 12절부터 열거되는 정결한 음식과 부정한 음식, 적절한 희생제물과 부적절한 제물, 오염되어 부정탄 존재와 청결해지기 위한 예식들, 거룩한 백성의 생활 요목들 같은 것들이 그렇습니다. 어떤 사연이 있었더라도 어느 순간 그 사연은 잊혀지고 평가의 결과만 살아남아 사람들의 삶에 끼어듭니다. 그래서 율법 준수가 존재의 결정적인 요목으로 남게 된 상황에서는, 규정은 경직된 채 사람들의 삶의 일부가 되어 버립니다. 바리사이 운동은, 비록 그것이 예수 당시에는 하나의 입장도 아니요, 하나의 위계질서 체계를 가진 것도 아니며, 하나의 조직으로 통합된 것은 더더욱 아님에도, 전체적으로 이러한 이분법적인 율법 질서를 금지와 허용이라는 원칙에 따라 경직되게 삶에 적용하려는 경향이 있었다는 점에서는 대차가 별로 없습니다. 이러한 신앙 체계에서 사람들의 경험은 억눌림당합니다. 경험한 대로 보는 것이 아니며, 경험한 대로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경험한 것을 기존의 해석의 틀 속에 끼워 맞추려는 경향을 띱니다. <<요한복음>> 9장은 선천적으로 소경인 자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볼 수 있게 되는 사건을 다루면서, 예수님과 바리사이가 벌인 논쟁을 통해 경험을 착취하는 해석의 횡포에 저항하는 예수 이미지를 강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바리사이는 본 대로 말하기보다는 해석의 틀 속에 본 것을 끼워 맞추면서 가치판단하는 존재입니다. 흥미롭게도 예수님은 이들을 향해 역설적으로 ‘보지 못하는 자’라고 단언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 복음서는 다양한 바리사이 운동이 비교적 통합된 거대한 종교운동으로 변모하던 시절 저술된 것이니, 예수 당대보다는 자기 시대의 바리사이의 이미지를 부각시켰을 겁니다. 하지만 제가 보기엔 이러한 모습은 바리사이 운동에 대한 예수 이미지의 연장선상에 있습니다. 또 그것은 교회의 주류적 흐름이 바리사이의 모습과 비슷해지고 있다는 것을 비판적으로 지적하려는 저자 자신의 문제의식이 얽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 역시 역사적으로 실재했던 예수상을 다시 부활시킨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일본의 급진적 예수 연구자인 다가와 겐조의 표현처럼, ‘예수님 말씀’의 가장 중요한 특징의 하나는 ‘역설’입니다. 그것은 이분법적 지식의 틀 속에서 벌어지는 논쟁과는 달리, 논쟁 구도 자체를 비아냥대는 말투입니다. 기존의 이분법적 인식의 틀이 구축한 논쟁 구도는 질문과 대답의 가능성을 제약합니다. 그런데 역설은 이러한 질문-대답의 구조를 깨뜨리는 말입니다. 이러한 논쟁 구도가 사람들의 경험을 그 자체로 바로 직시하게 하지 못한다고 보았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역설적으로 제기된 말씀은 새로운 의미의 가능성의 공간 속에서 독자들과 대화의 틀 속에 던져진 것입니다. 이분법적 지식으로 머리를 가득 채웠던 장금은 약재와 독재의 이분법을 해체하는 답안을 제출합니다. 먼저 본 시험지에 제출한 것과 같은 답변은 약재-독재의 이분법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나 약재인지 독재인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쓰이느냐에 따라 약재도 독재도 될 수 있다면, 중요한 것은 의사와 환자간의 대화 없이는 약재도 독재도 아무 것도 아닌 단지 재료들의 나열에 불과합니다. 비록 전문 지식의 담지자와 대중이라는 설정은 우리 주위에 널려있지만, 중요한 것은 대화는 그런 상황에서도 이렇게 출발한다는 것입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