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4/07/14 (15:26) from 61.73.43.102' of 61.73.43.102' | Article Number : 523 |
올빼미
|
Access : 2955 , Lines : 39 |
| 아무도 그의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2004-07-11하늘뜻나누기 원고) |
|---|
|
아무도 그의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IMF 관리체제’ 때 대기업에서 퇴출당한 김모 씨(45세)는 이후 몇 년간 이곳저곳을 전전하며 직장생활을 계속했습니다. 하지만 그 어느 곳에서도 그는 1년 이상을 버티지 못합니다. 변화된 근무 환경 속에서 적응하는 데 실패했던 것이지요. 그의 업무수행 능력은, 과거와는 달리 이젠 언제나 낙제였습니다. 이런 생활이 길어지면서 아내와의 다툼이 빈번해 집니다. 그리고 막 사춘기에 접어든 큰 아이의 행동에서 상처를 받습니다. 온 식구들이 자기만 공격한다고 느끼는 순간이 점점 많아졌고, 그의 마음이 더 이상 감당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을 때 그는 충동적으로 가출을 합니다. 그리고 이 행동은 가정 내에서의 그의 자격에 회복할 수 없는 치명적인 사건이 됩니다. 이제 그는 가출이 아니라 집에서 퇴출되고 말았습니다. 수중에 돈이 떨어지자 김 씨는 신용카드에서 대출을 받았고, 곧 그가 신용불량자가 된 것은 정해진 수순 같은 것이었습니다. 현대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시민적 덕목을 들라면, 단연 ‘신용’이 최우선일 것입니다. 그러한 요건을 상실한 김 씨는 시민사회의 정상적인 일원으로서의 자격을 박탈당한 셈이 되었습니다. 점점 친구들은 그를 피하기 시작합니다. 심지어 친형제, 친누이들조차 그를 꺼려합니다. 사십여 년간 유지해온 사적인 네트워크로부터 그는 퇴출당한 것입니다. 이쯤 되자 김 씨는 자기 조절 능력을 상실해 버립니다. 술에 대한 의존성이 커졌고, 무기력해졌습니다. 목표도 없고 의지도 없습니다. 존재의 의미를 상실한 그는 자기 자신으로부터조차 퇴출당한 것입니다. 정부가 내놓은 신용불량자 대책은 이런 무기력한 사람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었습니다. 어쩌면 김 씨 같은 이에겐 국가가 제공한 회생 프로그램은 무능력자의 회생의 기회라기보다는 국가나 사회의 (무능력자에 대한) 책임회피의 알리바이에 다름 아닌지도 모릅니다. 얼마 안 가서 그는 행방불명이 되었습니다. 죽었을지도 모르고 노숙자가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리하여 한 평범한 남자는 직장으로부터도, 가족으로부터도, 사적인 친분관계로부터도, 그리고 국민으로부터도 퇴출당한, 귀속될 곳을 모두 잃어버린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 세상에 살고 있지만, 그가 귀속할 곳은 없습니다. 그는 존재하지만, 누구도 그를 존재하는 이로 여기지 않습니다. 그는 이제 더 이상 김 부장도, 남편도, 아버지도 아닙니다. 친구도 아니며, 시민도 국민도 아닙니다. 그는 누구에게도 기억되지 않으며, 아무도 그의 이름을 부르지 않습니다. 가장 심각한 것은 그 자신도 스스로를 존재로 여기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이런 사람에게 외형상 나타나는 전형적인 특징은 말이 어눌해진다는 데 있습니다. 존재의 부재는 언어의 상실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루가복음>> 11장 14절에는 ‘벙어리 악령 들린 사람’이 나옵니다. 여기서 ‘벙어리’라는 것은 단순히 언어적 표현으로서의 소리를 발하지 못하는 장애라는 의미를 넘어섭니다. 만약 그가 오늘날 ‘농아자’라고 표현되는 존재와 같다면, 그는 말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라도 자신의 의사를 적극적으로 표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본문에서 사람들은 그를 ‘악령 들려’ 그렇게 된 사람으로 보고 있습니다. 즉 그의 장애는 단순한 기능 장애를 넘어서 신적인 저주가 함축된 장애입니다. 그 문화권에선 모두 그렇게 이해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다른 방식으로라도 ‘적극적으로’ 자신의 언어를 구성할 수 없습니다. 악령 들린 자가 소리가 아닌 방식이더라도 말을 한다는 것은, 그 대화 상대자를 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본문의 ‘벙어리’는 누군가 다른 이에 의해서만 표현되는 존재여야 합니다. 그는 그렇게 틀잡힌 질서 속에서 살아야만 하고, 자기 자신도 그런 질서의 저주받은 일원이라고 생각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그의 벙어리 상태는 실어증, 곧 자신을 표현할 언어를 상실한 상태를 의미합니다. 또한 그의 실어증은 세상과의 대화를 차단하는 실어증입니다. 그를 주변의 관계와 분리시키는 실어증입니다. 요컨대 그는 세상에 속하나, 세상의 어느 곳에도 귀속되어서는 안 되는 존재, 그러한 탈귀속성을 그의 존재의 운명처럼 만드는 실어증인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그를 고쳐주었습니다. 물론 소리를 통한 언어 기능의 회복이라고 단순하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말을 한다는 것은 그가 자신의 느낌, 자신의 생각, 자신의 욕망을 말로 표현할 수 있는 존재라고 스스로를 의식해야만 가능합니다. 그런데 벙어리 악령 들린 이는 그런 존재가 아닙니다. 말을 하는 것 자체가 사람들에게 재앙인, 그래서 실어증이 신이 자신에게 내린 운명이라는 자괴감에서 결코 헤어나오지 못하는 그런 이입니다. 그가 말을 하게 되었다는 것은, 자신의 존재에 대한 중대한 변화를 자각하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예수의 기적은 수혜자의 이런 의식상의 변화까지를 모두 포함해야만 이해될 수 있습니다. 그러자 '그 주위에 있던 사람들의 일부’가 예수님을 비난합니다. “저자는 악령의 괴수인 베엘제불의 힘을 빌어 그 일을 하였다”고.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 사실을 주지해야 합니다. 우선, 유사한 얘기가 나오는 <<마태오복음>> 9장 32~34절과 12장 22~30절, 그리고 <<마르코복음>> 3장 22~27절은 비난자를 ‘바리사이’ 또는 ‘예루살렘에서 온 율사들’이라고 표현하고 있는 데 반해, <<루가복음>>의 본문에선 ‘사람들 가운데 일부’라고 말하고 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기적 사건을 보며 놀라워하는 사람들이 예수의 청중 또는 복음서의 청중이라면, 바리사이나 율사는 그들과 구별되는 존재, 즉 외적 존재라고 할 수 있는데 반해, 사람들의 일부란 ‘내부의 존재’입니다. 곧 <<루가복음>>에선 비난자의 목록에 청중 자신도 포함될 수 있다는 점, 나아가 그것을 읽는 우리 자신도 비난자일 수 있다는 가능성을 암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제가 굳이 <<루가복음>>을 본문으로 택한 것도 바로 이 이유에서입니다. 두 번째로 주지해야 하는 점은, 비난의 내용입니다. 저들은 큰 악령(의 힘)으로 작은 악령을 쫓아냈다고 합니다. 이때 큰 악령은 추상적인 개념이고 작은 악령은 구체적인 증상입니다. 즉 후자는 경험되는 것이라면, 전자는 해석되는 것입니다. 요컨대 비난의 내용인 즉, 불순한 사상이 그를 고쳐준 것이라는 주장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가 바알제불과 같이 악한 힘에 의존하니 고침받은 이에게 일어난 일이 부당하다는 것입니다. 이에 대한 예수님의 반박을 주목해 보면, 비난자의 말의 취지가 좀 더 분명히 드러날 것입니다. 비난자의 주장의 초점이 ‘큰 악령’에 있었으니, 즉 예수의 주장이 불순하다는 데 있었으니, 있을 법한 반박은 자신의 사상이 정당하다는 것을 바알제불의 그것과 비교하는 방식으로 입증하는 것일 겁니다. 한데 예수님은 “큰 악령으로 작은 악령을 추방한다는 게 말이 되느냐?”라고 반박합니다. 즉, 저이가 말 못하게 하는 악령에서 해방되었으니, 내 사상은 해방하는 영이지 구속하는 악령이 아니라는 주장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말의 내용이 아니라, 말의 형식입니다. 즉 예수는 다시 초점을 ‘고침받은 이’에게로 옮겨놓고 있는 것입니다. 사상 논쟁이 아니라 말 못하는 이의 억눌림에서부터 생각해야 한다는 얘깁니다. 자신의 사상의 내용이 아니라, 사람들이 무엇으로 아파하고, 무엇이 필요한가를 고려하는 게 더 중요하다는 얘깁니다. 말 못하는 이의 언어를 앗아간 사회, 그의 말 못함을 이용해서 사회적인 안전/안보의 틀을 짜는 사회, 그러한 사회의 안보가 아니라, 그 사회에 의해 희생된 이의 안전을 강조하겠다는 얘깁니다. 아무도 벙어리 악령 들린 이를 만나려 하지 않았습니다. 아무도 그와 얘기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로 인한 재앙을 예방하기 위해 세상은 그의 이름을 부르지 않았습니다. 그가 말하면 세상은 그 말로 인해 오염되어 재앙을 받을까봐, 사람들은 모두 그렇게 했습니다. 그렇게 그는 소속성을 박탈당한 것입니다. 그렇게 사회에 귀속되지 않는 한에서 그는 세상에 존재할 권리를 허용받았고, 사회의 안전에 기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한데 예수님은 그를 만났고, 그의 이름을 불러줍니다. 세상의 안전에 관한 사상이 아니라, 그러한 안보에 관한 사상보다 세상의 희생양인 그의 고통을 더욱 중요하게 여겼던 탓입니다. 세상의 부적응자, 살아가면서 하나하나 세상에 귀속될 권리를 박탈당해 가는 이를 무능력자로 만들어버리고, 그들이 자신의 말을 할 권리를 박탈하는 실어증을 조장하는 사회에서, 그들의 말 찾아주기를 향한 시도를 민중신학자 안병무 선생은 ‘증언’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예수님 주변에서 귀속성을 박탈당한 사람들인 오클로스를 통해서, 그는 유신 체제 하에서 고통당하는 이의 실어증 걸린 모습을 읽어냅니다. 그들의 말은 경제개발이라는 사상 아래서 묵살되었습니다. 말하는 것이 세상을 위험하게 할 것이기에 그들의 말을 막던 세상이었습니다. 안병무 선생은 바로 그 막힌 말, 민중의 잃어버린 말을 대언하고, 그들의 경험에 기초해서 세상의 폭력을 드러내는 것을 ‘증언’이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지구화의 폭력성 앞에서 우리는 잠시 잊을 뻔 했던 안병무의 ‘증언’을 다시금 떠올리게 됩니다. 사회의 숱한 퇴출 기재들, 그 속에서 귀속할 곳을 하나하나 빼앗겨가는 사람들, 그리고 그들의 무능력화와 자기 파괴의 양상, 이 모든 것이 그들의 말을 빼앗음으로써 작동되고 있다는 사실을 오늘 우리는 실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선생의 가르침은 아무도 그들의 이름을 부르지 않는 사회에서, 우리의 신앙은, 신앙의 과제는 바로 이들의 이름을 기억해내고, 그 이름을 부르는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이름을 망각하게 하는 세상의 장치들을 읽어내고, 그것에 대항해야 한다는 것, 바로 이것이 선생의 증언의 신학입니다. □ (올빼미)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