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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신학논문은행에 대하여

1999/10/05 (00:55) from 203.252.22.54' of 203.252.22.54' Article Number :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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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버 현상을 어떻게 볼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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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버 현상을 어떻게 볼 것인가?


김성기 교수 (한일신대)  
      천리안: atomkim


0. 서  문 \ 3

1. 제2미디어 시대의 도래 \ 5

2. 사이버스페이스의 사회학 \ 8

3. 사이버 문화와 <카오스의 아이들> \ 10

4. 기독교 커뮤니케이션의 재인식을 위하여 \ 12

5. 맺는말 \ 15




0. 서  문

전세계가 새로운 통신수단의 시대로 이행하는 역사적 변화의 기로에 서 있다. 커뮤니케이션 테크놀로지가 지수 함수적으로 급격하게 혁신되는 과정 속에서 우리 삶은 갈수록 <미래에의 충격>에 휩싸여 가는 것이다. 1980년대 초반부터 추진되고 있는 통합정보통신망(ISDN)은 종전의 모든 전자 통신망을 통합하여 전세계를 하나의 거대한 통신체계로 만들고 있다. 가히 전세계를 전자적으로 '코팅'하는 것이다.
새로운 커뮤니케이션 테크놀로지는 실로 우리의 환경이 되었다. 나날의 삶은 컴퓨터, 비디오, 팩스 등이 주조해 놓은 정보환경 속에 몰입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이며, 따라서 그러한 기술혁신에 적응하는 속도는 빨라지고 있으며 일상의 경험 내용도 변모하고 있다. 최근에 일고있는 인터넷 열풍이나 사이버스페이스 논의는 그 소산에 불과하다. 분명한 것은 새로운 커뮤니케이션 테크놀로지가 우리 시대의 문화전환(cultural turn)을 이끌고 있다는 사실이다.
방금 '문화전환'이라고 했다. 이 표현은 미디어, 정보기술, 문화산업 등의 발전에 힘입어 문화 영역이 사회적 삶의 중심성을 이루며 그에 수반하여 정체성 형성에서도 문화적 경험이 차지하는 비중이 높아지는 추세를 지칭한다. 그리고 이 같은 문화전화를 배경으로 하여 '포스트모던' 문화나 사회 같은 개념이 부상하는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포스트모던'이라 함은 작금의 문화전화가 일으킨 여러 변모 양상을 가리키는 한편, 앞으로 우리가 문화와 새로운 방식으로 관계한다는 점을 시사한다.  
이 글은 두 가지 점에 초점을 맞춘다. 하나는 문화전화의 양상을 사이버공간의 세계를 중심으로 살펴보는 일이다. 앞서도 비추었듯이 오늘의 문화전화는 인터넷이나 가상현실 같은 전자매체의 옷을 입고 나타나기 때문이다. 요컨대, 커뮤니케이션 매체의 성격과 기능에 모종의 변화가 일고 있다고 보아, 그 변화의 실체를 추적하고자 한다. 다른 하나는 사이버문화가 우리 삶의 내면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냐 하는 점이다. 사이버문화는 단순한 기술혁신의 소산물에 그치지는 것이 아니라 갈수록 문화의 하부구조를 변형시키고 있으며, 종래에는 우리의 삶터로 되어가고 있다는 판단에서다.
이러한 문제의식을 배후에 깔고서 필자는 먼저 오늘날 문화전환에 대한 마크 포스터의 기본 주장을 간단히 살펴보고자 한다. 그 다음 사이버공간의 성격을 둘러싼 논쟁점을 정리한 뒤에, 사이버문화의 최전선을 질주하는 젊은 비평가의 목소리를 들어보도록 하겠다. 그리고 종교 커뮤니케이션의 관점에서 볼 때 사이버공간이 오늘의 기독교 문화에 제기하는 과제와 그 종교적 의미는 무엇인지를 비춤으로써 논의의 결론을 대신할 것이다.

1 제2미디어 시대의 도래

서두에 우리시대 문화전화의 기본 구도를 그려보았다. 새 미디어 테크놀로지가 오늘날 문화변동의 엔진 구실을 하고 있으며, 그 변동과 더불어 삶과 문화의 내면에 상당한 변화가 일고 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로부터 이런 의문이 싹튼다. 그러한 문화변동이 어떻게 해석되고 또 향후 문화의 진로에 어떤 변형을 줄 것인가 하는 질문 말이다. 이 대목과 관련해서 주목할 만한 논의가 있는데, 미국의 지성사가인 마크 포스터의 <정보양식mode of information> 개념이 그것이다. 이 논의는 세기말 문화 변동의 메커니즘을 조망하는 한편 그 변동으로 인해 빚어진 삶의 새 양상을 점검하는 데 퍽 유용하다는 판단에서다.  
정보양식이라 함은 전자적으로 매개된 커뮤니케이션 체제를 일컫는다. '전자적 커뮤니케이션에 의해 매개되는 사회관계'가 오늘날 사회적 삶의 하부구조를 이룬다는 주장이다.
과거 생산양식에 버금가는 대체물이 곧 정보양식이라는 것이다. 가장 일반적인 수준에서 생산양식이라 함은 인간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대상물을 만들어내고 교환하는 방식을 지칭한다. 이에 비해 정보양식은 상징적 기호들을 매개로 하여, 의미를 소통하고 주체를 구성하는 방식을 가리킨다.
이러한 정보양식에 대한 분석은 기존의 사회이론으로는 충분치 않다. 왜하냐면, 기능주의든 맑스주의든 기존의 주류 사회이론은 공히 <근대적인> 인식론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근대적 인식론의 주춧돌은 '인간 주체의 합리성과 효율성에 기초하여 역사와 사회를 발전, 진보시킬 수 있다.'는 발상을 전제로 한다. 흔히 말하는 <모더니티의 프로젝트>란 바로 이를 두고 쓰이는 표현이다.
포스터의 기본 논지는 이렇다. 커뮤니케이션의 전자적 매개는 현대사회의 조직을 바꿔놓고 있으며 특히 인간 상호작용의 구조를 변형시킨다. 예로, 컴퓨터 통신에서 잘 드러나는 언어의 유연성은 기존 문자언어의 확실성과 구체성을 뒤흔든다. 이런 변동으로 인해 새로운 커뮤니케이션을 경험 함, 즉 인간과 새로운 리얼리티 사이의 상호작용이 싹튼다. 이는 19세기와 20세기 초의 산업혁명에 버금가는 <거대한 변환>의 조짐이다. 그 결과 주체에 대한 기존의 사유방식도 달라진다. 새로운 언어형태는 사회적 관계망과 그 속에서 구성되는 구체 모두를 변모시킨다고 보기 때문이다.
요컨대 근대적 주체는 정보양식에 의해 대체되고 대신 <다중적이고 분산적이며 탈중심화된>  주정체성이 불안정한 주체가 출현한다. 여기서 우리는 포스트구조주의적 관점을 읽을 수 있다. 정보양식 논의는 주체 구성에서 언어의 <수사적, 수행적, 자기지시적> 역할에 주목하는 포스트구조주의 이론과 부합되는 동시에 포스트모던 사회와 문화의 가능성을 찾는다.
포스터에 따르면 언어는 더 이상 리얼리티를 재현하지도 않으며 주체의 도구적 합리성을 고양시키는 중립적 도구도 아니다. 언어 자체가 리얼리티를 재구성하고 심지어는 리얼리티 그 자체로 된다. 이런 인식에 기반하여 그는 근대사회의 위대한 이론가들과 결정적으로 결별하게 된다. '마르크스나 베버 같은 이들은 사회이론 내에서 언어의 위상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였다, 언어와 커뮤니케이션보다는 행동(노동)과 제도(관료제)를 강조했을 따름이다, 따라서 이들은 인쇄 문화에 깊이 뿌리밖은 18세기 계몽주의의 충실한 후예였다.' 등등
21세기 전야에 삶의 일반적인 조건을 둘러싸고 두 가지 논란이 주목을 끌고 있다. 하나는 <포스트모던> 사회와 문화에 관련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커뮤니케이션 체제에서의 광범위하고 대대적인 변화와 관련된 것이다.
먼저 포스트모던 문화는 구조적으로 제한적이거나 근본적으로 결함이 있는 것으로 묘사되는 현존 사회에 대안적인 것으로 나타난다. 하지만 역사의 획기적 단절이나 자본주의의 새 단계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그보다 주목해야 할 점은 <문화와 사회>의 관계에서 문화 영역의 비중이 커지는 추이이다. 실제 문화는 경제 중심의 전통적 결정론으로부터 자유로와지고 있으며, 이를 배경으로 <문화연구>라 불리는 간학제적 분야가 그 영향력을 높여가고 있다. 사회과학의 경우 오랫 동안 주변화되었던 문화가 중심 무대로 떠오른다는 점도 그러한 예에 속한다. 이처럼 포스트모던 문화에 대한 논의는 문화의 재중심화 과정에 초점을 맞추며, 더 근본적으로는 문화라는 범주의 논리를 다시금 검토하고 조정하는 쪽으로 나아간다.
한편 새 미디어 테크놀로지는 종종 더 나은 삶과 더 공평한 사회에 이르는 희망적인 열쇠로 여겨진다. 그것을 둘러싼 담론은 대개 정보교환 및 소통방식에서의 기술혁신에 더 주목하며, 그러한 테크놀로지가 기존의 개인들과 제도들에 커다란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보는 편이다. 테크놀로지 중심의 지속적이며 단선적인 변동을 내세우는 이 관점에 따르면, 오늘날 전자적 기기들은 물적생산의 효율성 증대를 더할 뿐이지 그외의 다른 효과는 없다. 포스터의 접근은 이와 다르다. 그는 앞서 언급한 문화논의에 비추어 새 미디어 테크놀로지가 내포하는 의미를 탐색한다. 새로운 커뮤니케이션 경험의 비판적 이해는 새로 부상하는 개인의 정체성이나 주체 유형에 대한 가치 평가를 요구하는 반면, 포스트모던 문화 논의는 미디어 테크놀로지와의 관계에 대한 정교한 성찰을 포괄해야만 한다는 주장이다.    
이런 맥락에서 포스터는 인터넷이나 가상현실 같은 전자매체 산물이 우리의 소통 관습을 변경시키는 동시에 우리의 정체성을 심대히 재규정하며 그리하여 <제2의 미디어 시대>라는 명칭이 정당화된다는 것이다. 포스터는 같은 제목의 최근 저작에서 기존의 방송 모델(broadcast model)에 입각한 미디어를 제1미디어 시대로, 이후의 인터액티브(interactive model) 모델에 입각한 미디어를 제2미디어 시대로 구별한다. 이 구별은 절대적인 것이기보다는 상대적이고 수사적인 것으로 보아야 한다. 이항대립을 설정함으로써 그 둘 사이의 차이를 뚜렷하게 하려는 의도가 강하게 배어있다는 뜻이다.
이 점을 전제할 경우 그가 제시하는 차이는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발신자와 수신자의 상호변환과 탈중심화가 그것이다. 여기서 탈중심화란 메시지의 소스가 일방에 속하지 않고 유동적이라는 말이며, 따라서 발신자와 수신자의 위치가 지속적으로 바뀌게 된다. 20세기 초의 비판이론가들이 주목하던 바도 이와 연관된다. 예로, 벤야민과 엔젠스베르거 등은 공히 매스미디어의 민주적 성격에 주목한 바 있다. 라디오, 영화, 텔레비전 등 제1미디어 시대의 매체들은 커뮤니케이션 능력을 고양시킬 뿐만 아니라 민주적 잠재력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매스미디어는 기본적으로 일방통행의 모델에 따른다. 소수의 발신자와 다수의 수신자를 상정하기 때문이다. 포스터가 보기에 제1시대 미디어의 잠재력은 오히려 전화가 웅변한다. 전화는 누구든 메시지를 <창조>하고 그것을 누구에게나 자유자재로 전달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전화는 인터넷의 아버지인 셈이다.
인터넷이라는 커뮤니케이션 테크놀로지는 제2미디어 시대의 총아다. 그것은 과거 전화의 민주적 구조를 가장 잘 구현한다. 그리고 그것을 매개로 하여 이른바 정보고속도로가 가능하게 된 것이다. 데이터와 영상 이미지, 음향과 도표 등 모든 정보가 디지털 부호가 되어 마치 고속도로 위에서 자동차가 달리듯 질주하는 것이다. 특히 80년대 말과 90년대 초에 이르러 광통신의 도입과 함께 대량의 정보를 '실시간'에 주고받을 수 있게 된다. 커뮤니케이션에 인터액티브 개념이 적용되는 순간이다. 이런 뜻에서 제1미디어 시대와 제2미디어 시대의 핵심적 차이는 방송모델-인터액티브모델이라는 대립 구도 위에서 전개된다는 사실을 거듭 확인하게 된다.  

2 사이버스페이스의 사회학

앞서 <정보고속도로>라는 비유가 정보의 움직임에만 주목한다면, 사이버스페이스는 인터넷상에 남겨지는 흔적의 세계라고 할 수 있다. 데이타, 영상이미지, 음향 등이 서로 어울리면서 커뮤니케이션의 관계를 남기는 것이다. 이것의 의미는 처음에는 가상현실 장치가 만들어낸 버추얼 리얼리티를 지칭했으나 컴퓨터 통신기술의 발달에 따라 인터넷의 더 넓은 영역들로 급속하게 퍼져나갔다.
이제 사이버스페이스라는 말은 전자 미디어를 통해 상징이나 이미지나 소리를 교환하는 모든 곳으로 확장되고 있으며, 그에 따라 진짜 세계와 감각적으로 거의 유사한 이차 세계가 구성되고 있다. 마크 포스터의 정보양식 개념은 이 새로운 추이의 문화적 의미를 개념화하는 한 방식이었다는 평가도 가능하다. 요컨대, 컴퓨터를 통해 막대한 양의 정보 유통이 가능해지면서 컴퓨터 통신은 단순한 통신수단을 지나 모든 삶이 이뤄지는 공간을 만들어냈다. 인터넷은 바로 이 공간의 길이다.
컴퓨터와 네트워크로 형성되는 사이버스페이스의 문화적 특징은 익명성으로부터 나타나는 것이 많다. 대면하지 않는다는 익명성이 철저히 보장되기 때문에 남녀노소, 지역, 빈부, 학력 등, 모든 사회적 장벽이 사라진 가운데 꺼리낌 없는 대화를 즐긴다. 이렇듯 사이버 공간에서 활동하는 이들은 사회문화적 구속에서도 자유롭다. 네트워크 안에서는 기호나 취미, 성향과 연령 등이 중요한 기준으로 작용하며, 이러한 기준에 의해 집단이 형성되고 행위의 구분이 생겨난다. 중요한 것은, 지금까지 시간적 공간적 제약을 받아왔던 커뮤니케이션과 인간관계가 사이버문화에 의해 그 폭을 넓힐 수 있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새롭게 변화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 변화는 크게 세 가지 특징을 보인다.
첫째, 세계의 이미지화를 들 수 있다. 예를 들어, 컴퓨터 그래픽과 비디오 등이 발달함으로써, 무의식, 상상의 세계 등 이전에는 주관적이고 불가지의 영역에 속했던 것들을 어느 정도 객관적 이미지로 표현할 수 있게 되었다. 여기서 <객관적>이란 누구든지 읽고 보는 것이 가능하다는 뜻이다.
둘째, 커뮤니케이션의 동시공존이다. 미디어의 종류가 증가함에 따라 대면 소통이든 매체간의 소통이든 다양한 커뮤니케이션이 무리없이 동시에 존재하게 되었다. 사람과 정보와 매체가 동시에 존재하는 양상을 보인다는 말도 된다. 이는 기존의 커뮤니케이션에서는 찾아볼 수 없던 획기적인 현상이다.          
셋째, 지각 방식의 이중화다. 지금까지 우리들은 오직 <볼 수 있는 것>만을 보아왔다. 그러나 가상현실로 대표되는 정보화의 진전에 의해, 현실세계에서 보는 것과는 구별되는 또 하나의 방식, 즉 컴퓨터를 통해서 보는 지각 방식이 동시에 성립할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은 인간의 지각과 이해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다. 방금 서술한 내용은 한마디로 <사회적 시간과 공간의 재구성>으로 요약된다. 새로운 미디어는 경험을 물리적 소재지로부터 분리시키면서 사회적 '시간'과 '공간' 개념을 재규정한다는 것이다. 이는 커뮤니케이션 경험이 사회적 물리적 제약으로부터 벗어남을 의미한다. 때문에 일찍이 보드리야르는 '시뮬레이션의 시대는 모든 지시체의 소멸과 함께 시작된다'고 말했다. 1980년대의 보드리야르에게 미디어 문화는 시뮬레이션한 것이었다. 미디어, 특히 텔레비전을 통해 대중문화는 진리를 포착하는 주체의 능력을 해체하는 또 다른 경험 층위를 도입함으로써 개인 사이의 상징 교환을 대체해 버렸다는 것이다. 이를 웅변하는 진술이 바로 '걸프전은 일어나지 않았다.'는 주장이다. 그가 보기에 당시 걸프전은 텔레비전 화면 바깥에서는 일어나지 않은 이벤트였다. 텔레비전을 통한 공통 경험이 없다면 개별적이었을 집단들이 서로 결합되는 동시에 <여기와 저기>가 문화적으로 모사된다는 것이다.
마찬가지 맥락에서 사이버스페이스는 시공간의 시뮬레이션을 전제로 하는데, 시뮬레이션 개념이 현실세계의 무한한 복합성과 유동성을 무시한다는 지적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주요한 문화변동을 표시하는 것만은 분명하다. 게다가 미디어 수용자 또한 이전의 시공간 개념과는 다른 기준으로 생활하는 추이를 보인다. 사이버스페이스를 통하여 가상적 공간과 장소, 가상적 공동체 등등의 새로운 경험이 구성된다는 말이다. 이에 미국의 사회학자 셰리 터클은 '스크린 위의 생'을 논하면서 '우리네 삶은 모더니즘의 계산법(modernist calculation)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의 시뮬레이션(postmodernist simulation)으로 자리를 바꾸고 있으며, 그리하여 자아는 다중화되고 있다.'고 진단하고 있지 않던가.
사이버스페이스나 가상현실이 몸과 정신, 자아와 기계에 대한 저간의 사고 방식에 도전적인 질문을 일으킨다는 점은 분명한 것 같다. 예로, 사이버스페이스가 여는 실시간 공동체 속에서 우리는 리얼한 것과 버추얼 한 것 사이의 경계에 거주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 경계를 사는 법을 배우는 일이 중요한 삶의 과제로 등장할 조짐이며 어느 면 이미 강박으로 다가오고 있다. 하지만 '실시간 공동체'라는 말을 쓸 때 주의해야 할 점이 있다. 사이버스페이스에서는 커뮤니케이션 행위자 간의 상호작용이 순전히 전자적인 형태로 이루어지는데, 이 경우 그 만남의 장소는 육체의 현존을 배제하기에 커뮤니케이션과 공동체의 성격에 대하여 다시금 성찰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게다가 전자 미디어는 우리 모두를 흡사 인류학자들로 만드는 것 같아 보인다. 거실에 앉아서 스크린상으로 우리에게 재현되는 모든 <타자들>의 세계를 조사한다는 의미에서 말이다.
컴퓨터와 모뎀을 갖춘다면 이제 우리는 사이버스페이스의 시민, 즉 네티즌으로서의 기본 자격을 얻는다. 인터넷이 우리를 사이버스페이스의 세계로 인도해 줄 것이다. 사이버스페이스는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기 때문에 그는 전세계 어느 곳이든 가볼 수 있으며 자유롭게 대화할 수 있다. 정보통신기술의 발달은 사이버스페이스라는 가상공간을 창출해냈고 네티즌들은 이 가상의 공간에서 실제로 생활을 한다. 정치, 경제, 문화, 그리고 범죄까지 현실세계에서 이뤄지는 모든 활동이 현실세계와는 다른 양상으로 전개되고 있는 곳, 그렇다면 그곳에 사는 네티즌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그들은 우선 젊다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대개는 신세대로 분류되는 10대에서 30대 사이가 주류를 차지하고 있다. 이처럼 아직까지는 사이버공간이 상대적으로 젊은 사람들에 의해 지배되고 있기 때문에 나이가 많은 사람들이 사이버 공간 안에서 자유롭게 활동하기 위해서 자신을 어린 사람으로 정체화하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 신세대가 정보사회의 주역으로 높이 평가되는 것은 그런 맥락에서다.
아무튼 사이버 공간에는 기존의 세계와는 다른 사람들이 살아간다고 할 수 있다. 네티즌들은 거기에서 현실 속의 자신과는 다른 자아를 만들어 생활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평소 소심하던 사람이 네트워크 안에서는 대범한 사람으로 활동하기도 하며, 특히 대인 관계에 어려움을 겼는 사람들일수록 더욱 깊이 빠져드는 경향도 보인다. 이 점은 영화 [네트]를 상기해보면 충분할 터이다.

3 사이버 문화와 <카오스의 아이들>

인터넷 사용이 대중화되면서 인터넷을 둘러싼 새로운 문화가 등장하고 있다. 특히 다양한 멀티미디어 기술이 네트워크 기술과 결합하면서 사이버스페이스는 그 끝을 알 수 없을 만큼 끊임없이 발전하고 있다. 실제로, 사이버공간을 들어가보면 마치 우주에서 유영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는다. 한번 들어가면 어떤 미로에 빠져든 느낌마저 들 지경이다. 머지 않아 소설과 영화에서나 볼 수 있었던 가상현실 체험이 현실로 다가올 전망이다. 그렇다면 기술의 발전과 인테넷이 몰고올 사이버문화는 어떤 모습일까.
그런데 '사이버문화를 읽으면 21세기가 보인다.'고 주장하는 논의가 있어 흥미롭다. '사이버문화는 삶의 새 지평이다, 이는 첨단 기술과 인간의 상상력이 어울려 시너지 효과를 자아낸 결과다, 선형적인 물리적 현실의 법칙이 종언을 고하고 그 빈자리를 불확정의 확률론과 카오스론이 또아리를 튼다, 이제 문명은 최고의 진화 국면에 다다르고 있다.' 등등. 우리 식으로 표현하면 신세대 문화론이라 부름직한 그것은 주의주장의 파격뿐만 아니라 21세기 문명의 진로를 모색하는 당당함도 드러낸다는 점에서 주목할 가치가 있다.
논의의 주인공은 더글러스 러쉬코프(D.Rushkoff). 프린스턴 대학에서 컴퓨터와 문학을 전공한 그는 1994년에 {사이베리아(Cyberia)}와 {미디어 바이러스(Media Virus)}라는 책을 출간함으로써 일약 지적 스타로 떠올랐으며, 이후 대중문화와 테크놀로지가 공조하여 창안해 낸 사이버문화의 최전선을 질주하는 대표적 비평가라는 평판을 얻고 있다. 그가 보기에 사이버문화는 새로운 우주다. 거기에 막 이주한 우리는 마치 이민자처럼 방황하고 있다. 반면 사이버 키드는 그 낯선 세계에 비교적 잘 적응하고 있다. 잘 적응하다니, 이 무슨 말인가! 바로 이 물음에 대한 답이 최근 {플레잉 더 퓨쳐(Playing the Future) (1996)}을 통해서 개진되고 있다.
이 책에서 피력하는 '카오스의 아이들' 개념은 오늘날 젊은 세대의 문화 발상법을 이해하는 데 좋은 참조가 될 수 있으리라. 러쉬코프는 두 가지 입론을 내세운다. 첫째 60년대 이후 태어난, 이른바 X-세대는 미디어와 공생적 관계를 맺는다. 그들에게 미디어는 무엇을 비추는 창이나 거울이 아니라 그 자체로 '함께 노는 타자' 즉 친구이다. 둘째, 미디어는 기존 문화틀의 한계를 극복하면서 세 에덴 동산으로 나아가는 일종의 비상구이다. 이는  X-세대라는 용어의 창안자 더글러스 커플랜드의 소설집 {신을 찾아가는 아이들(Life after God)}을 배후에서 움직이는 기본 모티브이기도 하다.
여기서 러쉬코프 논의의 핵심은 이렇다. 미디어 경관(media scape)을 배후로 자라난 아이들에게 미디어는 단순한 도구가 아니라 그 자체로 삶의 일부인 반면 기성세대는 그것에 저항감을 느낀다. 이 차이는 미디어 경관을 주어진 환경으로 인정하는냐 여부에서 비롯한다. 러쉬코프는 그것을 기정 사실화할 뿐만 아니라 인간문명의 궁극적 진화라는 구도에 비추어 접근한다. 지구가 하나의 살아있는 유기체라는 이른바 <가이아 가설>을 염두에 둔 듯, 미디어 경관은 살아있는 유기체의 확장에 다름 아니라는 주장이다.
그리고 미디어와 접촉하는 빈도가 커질수록 미디어 경관은 커지는데 이와 관련해서 주목할 만한 논지가 바로 '미디어는 곧 바이러스', 아니 '미디어 바이러스'라는 개념이다. 생물학적 바이러스가 몸에서 몸으로 퍼져나가듯 그렇게 미디어 바이러스는 미디어 경관에 퍼져나간다는 것이다.
미디어 바이러스의 모양은 여러 가지다. 이벤트, 고안물, 테크놀로지, 사유체계, 시각 이미지, 의상 스타일, 심지어는 팝영웅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의 주목을 끌고 흥미를 자아내는 모든 것을 가리킨다. 이 바이러스가 일단 부착되면 그것은 자신의 숨은 안건을 '이데올로기적 코드인 밈'의 형태로 미디어 경관 속에 투여한다. 그렇게 투여된 밈은 우리의 일상, 교육이나 현실을 지각하는 방식에까지 스며든다는 것이다. 바꿔 말하면, 미디어 바이러스는 정치, 종교, 제도, 경제, 사유체계와 맞붙어 싸우도록 고안될 수 있다. 과학자들이 바이러스를 사용하여 질병을 치유하듯이 미디어 활동가는 사회구조상의 약점이나 허구적 이데올로기의 질서에 일격을 가하는 과정에서 미디어 바이러스를 활용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이상의 논의가 성립한다면 정작 신세대 문화가 품고 있는 밈의 내용이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러쉬코프는 주장한다. 질서가 아니라 카오스라고. 카오스가 자연의 본질이라고. 그런데 저간의 근대 문명은 자연의 진화를 자연스레 인정하기 보다는 역으로 굴레와 속박의 그늘을 드리웠다. 하지만 지금은 그러한 굴레와 속박이 안팎의 도전에 직면하고 있다. 이에 기성 문화는 놀람과 두려움에 떨고 있는 반면 '과거가 없는' 새 세대는 자유롭다. 게다가 이들은 미디어 문화와 친숙하지 않던가. 새로운 미디어 바이러스에 문화적으로 '면역'되기 않았기 때문에, 카오스를 향한 문명의 자연스런 진화에 이미 동참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근대 과학 문명의 근본에 대한 도전인 셈이다.
하여, 러쉬코프는 거듭 주장한다. '길가에서 노는 아이들이나 그들의 전자적 놀이 문화는 얼핏 방종하고 타락한 듯 보이지만 실은 그 내면에 새 문명으로 도약을 향한 충동이 숨어 있다고, 그리고 현재 신세대는 바로 그런 카오스의 세계를 향하고 있다고.' 이로부터 우리는 사이버문화의 기본 지향을 읽어낼 수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의식의 확장 내지 해방이다. 아이러니와 신성 모독적인 태도를 표나게 드러내는 펑크 문화나 사이키델릭 예술이 높이 평가되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다. 거기에는 만성 노이로제 상태에 처해 있는 기존 현실을 뛰어넘겠다는 비전이 스며있기 때문이다. 단적으로, 러쉬코프는 '카오스의 아이들'에게서 세기말 오딧세이의 모습을 보는 것이다.

4 기독교 커뮤니케이션의 재인식을 위하여   

재작년 말 미국을 떠들썩하게 했던 사이비 종교 집단 [천국의 문(Heaven's Gate)]이 있었다. 당시 그 사건은 우리에게도 상당한 화제를 뿌렸지만 곧 기억에 사라졌다. 그저 이른바 <세기말 조짐>으로 여겨졌을 뿐이다. 일본의 유사 종교집단 [옴]의 사린 살포 사건과 국내 다미 선교회 사건 이후 사회적으로 유사 종교에 대한 경각심이 커진 상황에서 [천국의 문] 역시 사이비 종파의 집단 광기로 보이기에 충분하였다.
그런데 그 사건은 여느 사이비 종파의 그것과는 좀 다른 면모가 있었다. 물론 집단 광기라는 점에서는 여느 사이비 종교 현상과 다를 바 없었지만 그 집단이 컴퓨터 전문가 집단이라는 사실이 특이했으며, 또 그들이 인터넷상에 구축한 홈페이지 [천국의 문]가 웅변하듯이 전자 문명의 추이와 상당한 친화성을 지녔다는 점이다.    
나는 그 당시 사건을 대하면서 좀 엉뚱한 생각을 했다. '[천국의 문]은 혹 컴퓨터 통신망을 통해 '천국의 문'으로 들어가려 했던 것은 아닌가?' 하고 말이다. 내가 그 집단에 주목한 것은 컴퓨터 통신망을 종교 활동의 미디어로 삼았다는 점이다. 이와 관련하여 '새로운 정보 기술이 오늘의 영적 생활을 어떻게 재규정하는가'라는 질문이 기독교 내부에서도 구체적으로 제기되는 현실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버튜얼 스페이스(가상공간)는 사회적 문화적 경험영역에 새로운 에너지를 방사하는데, 그 에너지는 뭔가 중요한 영적통찰을 품고 있다. 맥루한의 '미디어는 메시지다'는 유명한 경구에서도 암시하듯, 그대로 가상공간은 아주 중요하다. 사이버스페이스라는 매체는 영성에 의해 뒷받침된 진화적 활동의 새 차원에 이르는 문을 개방한다. 컴퓨터가 우리의 신성 경험을 통해 거미가 줄을 치듯 엮어지는 방식을 더 심층적으로 이해하고자 할 경우 반드시 참고해야 할 프랑스 가톨릭 신부가 있다. 그 사람의 이름은 떼이야르 드 샤르뎅(Thihard de Chardin)이다.'

인용문의 출전은 우리말로 [사이버 은총]이라 번역함직하다. 저자는 과정 신학을 전공한 여성 학자로서 샤르뎅의 진화론 연구를 출발점으로 삼는다. 샤르뎅의 진화론적 관점으로부터 책의 부제 그대로 <디지탈 시대의 신성 찾기>를 그려보인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먼저 샤르뎅(1881-1955)이란 누구인가. 그는 프랑스 태생의 예수회 신부였으나 고생물학자로서도 탁월한 업적을 낸 바 있다. <북경원인>이 그의 발굴 작품이며, 지층의 구조를 연구하고, 고대 인간의 발자취만을 더듬는 과학자만이 아니었다. 지질학, 고생물학적 발견 속에서 함축된 인간의 의미를 숙고함으로써 과학과 종교를 조화시키고, 더 나아가 우주의 미래를 예시함으로써 현대 기독교 신학계로부터 예언자적 사상가로 추앙받고 있다.
그는 과학적 진화론을 신학에 도입한다. 하지만 그의 진화론은 단순히 사물 바깥만 보는 과학에 머물지 않는다. 물질의 내면을 주장하고 인류의 미래를 내다보는 데까지 이르면 그는 물질과 정신의 연결선 위에서 독특한 사상가로 자리잡는다. 베르그송의 [창조적 진화론]의 영향이 강하게 배어 있다는 이 대목의 논의를 설명하면 이렇다.
<여럿으로 흩어져 있음>에서 <하나로 모임>. 샤르뎅은 생명의 역사가 한 방향으로 움직이는 정향진화를 주장한다. 사람을 알려면 생명의 역사를 보아야하고, 생명을 알려면 우주의 역사를 보아야 한다. '지구발생', '생명발생', '인간발생'은 계속 이어지는 운동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이 우주는 강력하게 합치는 힘으로 뭉친 하나의 조직이요 덩어리이며 하나의 양자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역사나 의식이 우주 속에 차지하는 자리가 무엇인지 알 수 없다'고 단언한다.
사람이 출현한 이후 생명은 완전히 새로운 진화의 세계로 들어갔다. 그것은 '인공'이 기관과 별도로 도구를 만듦으로써 개체의 행동 양식을 깊이 있게 하면서 동시에 다양화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자유를 잃지 않고서 말이다. 또한 '생각'을 통해 한 사람 한 사람을 하나의 의식으로 통합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긴 것도 전혀 다른 진화의 세계를 여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 논의는 오늘날 사이버스페이스와 관련하여 자주 인용된다. 기술 세계가 점점 복잡해지면서 '더 깊이 있는' 신성한 의식이 산출된다는 것이다. 이 논지가 곧 사이버스페이스라는 뉴미디어 세계에 적용될 때, 컴퓨터는 단지 깡통으로 그치지 않고 결국에는 의미와 사랑으로 충만한 정신계(noosphere)로 이어진다는 주장이 나올 수 있다. 인공지능(artificial intelligence)과 사이버스페이스만 해도 그렇다. 그것은 더 이상 기계나 정신이냐는 이분법 구도 속에서 찢기지 않는다. 그보다는 '하느님의 손'에 힘입어 오메가 포인트로 향하는 길목에 서 있는 것으로 봐야 한다는 것이다.
맥루한의 '지구촌' 개념의 이면에 새겨진 '우주적 낙관주의'와 상통하는 대목이다.  
이런 맥락에서 건축학자 마이클베네딕트는 사이버스페이스를 '천상도시'라는 상황에 비추어 개 념화한다. '(타락 이전의) 에덴이 우리의 순진함, 아니 무지 상태를 나타낸다면, '천상의 도시'(Heavenly City)는 우리의 지혜, 지식 상태를 나타낸다. 에덴이 자연 물질계와 우리의 친밀한 접촉을 나타낸다면, '천상의 도시'는 우리가 물질성과 자연 모두를 초월함을 나타낸다. 에덴이 상징화되지 않은 비사회적 현실의 세계를 나타낸다면, '천상의 도시'는 개화된 인간 상호 작용과 형식과 정보의 세계를 나타낸다. (따라서) '천상의 도시'라는 이미지는 사실 --- 사이버스페이스의 종교적 비전이다.'
그런데 이 같은 전망이 신학적으로는 범신론으로 비치기 쉬우며, 동양의 유기체적 자연관과 밀접하게 연관되는 것으로 보인다.
물론 현재 정보혁명의 추이를 살펴볼 때, 사이버은총이라는 우주적 낙관주의는 분명 얼토당토않다. 첨단 정보 테크놀로지의 발전이 엄연히 현대 자본주의의 틀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을 뿐더러, 인간의 자유로운 소통보다는 통제와 억압에 기여한다는 지적이 상식화된 마당에, 제니퍼 콥의 논의는 지나치게 한가한 전망이 아니냐는 비판도 나올 수 있다.  
그러나 정보 시대에서 거룩함이나 신령의 새 위상을 모색하는 제니퍼 콥스의 논의에서 경청할 만한 점도 있다. 나는 그것을 다음 세 가지로 정리하고 싶다.
첫째, 기계와 정신의 오랜 이분법을 재고될 필요가 있는데, 그 재고는 수렴의 견지에서 취할 수 있다는 점이다. 둘째, 그럴 경우 매체를 보는 시선에 변화가 일어날 수 있다. 인간과 매체의 공진화라는 관점의 확립이 가능하다는 점이다. 셋째, 그 공진화를 아우르고 정향짓는 오메카 포인트가 상정될 경우 기독교적 관점에서 본 세속적 문화의 진보 논리가 확보 가능해진다는 점이다.   


5. 맺는말
어느 종교든 교리가 있으며, 그 교리는 대개 문자의 형식을 나타낸다. 그러니까 교리가 뜻이라면 그 뜻을 담아 전달하는 그릇이 문자였다는 말이다. 문자로 전달되는 교리가 사람들의 의식에 설득력을 일으킬 때 비로소 종교 커뮤니케이션이 달성된다고 말할 수 있으리라.
하느님의 말씀도 마찬가지다. 그것은 교리라는 형태의 옷을 입는다. 성서가 바로 그것 아닌가. 그런데 성서라는 말씀의 옷 또한 커뮤니케이션 매체의 일종인데 오늘날 문자라는 매체에 비해 시각 영상 매체가 더 우위를 차지하는 상황에서 말씀 또한 새로운 옷을 기다리는 것은 아닐까, 하고 질문을 던져볼 수 있다. 아니, 그래야 한다고 본다. 단적으로, 종교적 영성과 기술적 매체 테크놀로지의 관계에 주목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같은 입론이 인정된다면 앞으로 기독교는 날로 급변하는 정보시대의 문화변동 속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새롭게 구축하는 작업에 나서야 할 것이다. 바꿔 말하면 기독교 커뮤니케이션은 오늘날 정보 기술 혁명의 소산을 어떻게 수용할 것인가라는 과제를 떠안고 있다는 말이다. 그렇다고 지금 내가 그러한 과제를 풀어낼 수 있다는 주장은 아니다. 다만 근래 미디어 논의에 비추어 볼 때, <사이버공간에서 영적 삶의 지평은 무엇이냐>는 물음은 비단 종교 커뮤니케이션의 차원에서뿐만 아니라 21세기 문명의 진로와 관련해서도 퍽 유의미한 생각거리를 제시한다고 나는 판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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