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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신학논문은행에 대하여

2001/12/18 (01:38) from 129.206.82.105' of 129.206.82.105' Article Number : 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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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이트헤드
문창옥│광운대 강의  

화이트헤드의 궁극적 목표는 문명의 쇠퇴를 막고 창조적 전진을 부추기는 데 있었다. 그에게 있어 형이상학적 사변은 문명을 위한 사유의 모험이요, 그 산물로서의 형이상학적 우주론은 이 모험의 결실이다.



모든 것은 흐른다
“모든 것은 흐른다.” 이것은 서구 철학적 사유의 기원에 놓인 우주의 실상에 대한 근원적 직관이다. 그러나 이 근원적 직관은, 존재와 사유의 일치를 기점으로 진정한 존재의 동일성을 역설했던 엘레아(Elea) 학파의 논리에 의해 곧바로 허상으로 정리되었다. 진정한 의미의 존재, 사유 가능한 존재는 불변적 동일자이다. 감각이 포착하는 유동하는 세계는 사유 불가능하기에 진정한 존재가 아니며, 진정한 존재가 아니기에 사유될 수 없다. 서구의 정통 철학은 이런 과격한 시각을 피해 가기 위해 다양한 전략을 구사했음에도 불구하고 결코 유동하는 세계와 ‘합리적으로’ 화해할 수 없었다. 이들 철학은 부지불식간에 엘레아 학파의 이념적 유산으로 생계를 꾸려 왔기 때문이다. 그 결과 변화하는 것, 시간적인 것은 언제나 철학의 울타리 밖에 머물러 있었다.
베르그송(H. Bergson)은 ‘순수 지속(dur鲴 pure)’에 대한 직관을 전면에 내세워 동일자의 추상성을 폭로하고 엘레아의 이념을 현란하게 비판하면서 변화의 실재성을 복구하였다. 그러나 베르그송은 그것을 ‘지성’의 영역 밖에 안치함으로써, 순수 지속(실재하는 시간)과 공간적 연장(또는 ‘공간화된’ 시간) 간의, 그리고 직관과 지성 간의 화해 불가능한 이원성을 한층 더 부각시키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그런 점에서 베르그송 또한 엘레아 전통의 한계 안에 있었고, 그 전통의 또 다른 희생자였다고 할 수 있다.
화이트헤드(A. N. Whitehead)는 엘레아의 전통, 특히 존재와 사유의 일치라는 기점 자체를 파기함으로써 변화 유동하는 사태에 대한 시각을 회복하고 이렇게 회복된 시각 속에 드러나는 유동하는 실재의 실상을 합리적 체계로 기술해 낸다. 이것이 과정철학(process philosophy) 또는 유기체철학(philosophy of organism)이다. 따라서 이 철학은 베르그송에서 첨예화되었던 직관과 지성 간의 이원성을 파기하고 양자를 화해시키려는 시도라고 할 수 있다.
화이트헤드는 이 체계 구축을 위해 인간에게 가능한 모든 영역, 모든 층위의 경험을 고려한다. 경험론 철학이 전통적으로 주목해 왔던 경험, 특히 정제된 언어로 명석 판명하게 구획되어 나타나는 경험은 인간에게 가능한 전체 경험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인간 경험의 생동성에 비추어 볼 때 그것은 박제가 되어 벽에 걸린 추상이다. 이런 추상 경험에서 실재의 실상을 포착하려는 것은 헛된 일이다. 그것은 이미 묵시적 명시적으로 해석된 경험, 따라서 선택 가공된 경험이다. 인간의 자의적 선택에 앞선 살아 있는 구체적인 전체 경험에 주목해야 한다. 그는 일상의 내적, 외적 감각 경험, 과학적 경험, 예술적 경험, 종교적 경험, 그리고 심지어 환상이나 착각까지도 우주의 실상에 대한 모종의 정보를 담고 있는 것으로 간주하고, 이들 모두에 의미를 부여하고자 한다.
화이트헤드는 두 가지 전략을 택하여 이 과제에 접근한다. 하나는 ‘실체­속성’의 범주와 주어­술어의 논리 간의 밀접한 상관성을 근간으로 하는 전통 실체철학의 모든 구성적 논의를 근본적으로 비판 해체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사변적 상상(imagination)에 힘입어 존재와 시(공)간 간의 전통적 관계를 역전시켜 재구성하는 것이다. 화이트헤드의 형이상학적 우주론은 이 재구성의 최종 산물이다.


실체철학 비판
흔히 변화는 그 주체로서의 존재자가 시간 속을 여행하면서 겪는 모험으로 이해된다. 물론 이것은 상식과 자연언어가 공유하고 있는 그림이다. 그래서 예컨대 우리는 “사과가 며칠 전까지만 해도 파랗더니 어느새 빨갛게 익었군” 하는 식으로 말한다. 이 그림에서 변화는 그 주체인 임의의 동일적 존재 S가 ‘균일하게 흐르는’ 물리적 시간축 위의 임의의 시점 t1에서 성질 Q1을 갖고 있다가 다른 시점 t2에서 성질 Q2를 갖게 되는 사태라고 아주 소박하게 도식화될 수 있다. 그러나 이 도식은 변화와, 변화 밖에 있는 동일 불변의 주체를 상정하고 있다. 그리고 이로 말미암아 이 도식은 그 소박성에도 불구하고 서구 합리주의 철학의 역사 전체를 관통하면서 진정한 의미의 변화에 대한 합리적 기술을 가로막는 요인으로 기능해 왔다.
이 역사가 간혹 실재 세계의 변화를 긍정적, 적극적으로 기술하는 경우에도, 이 기술에 의미를 주기 위해서는 공공연히 변화의 밖에 있는 변화의 담지자 또는 변화의 기점에 호소해야 했다. 그러나 실재가 온전히 변화 생성하는 것이라면 임의의 물리적 시점 t1에서 다른 시점 t2에로 존속하는 변화의 동일적 담지자라는 것은 있을 수 없다. ‘변화’의 궁극성을 인정하는 한, 물리적 시간 속의 한 시점 t1에 하나의 존재 S1-Q1이 있고 다른 한 시점 t2에 또 하나의 존재 S2-Q2가 있을 뿐이다.
며칠 전의 사과와 오늘 아침의 사과는 결코 온전히 동일한 것일 수 없다. 그럼에도 이를 전제하는 자연언어의 변화도식은 표피적 변화를 기술할 뿐 긍극적 의미의 변화를 기술 설명하지 못한다. 오히려 어떤 의미에서 그것은 불변의 동일자를 전제하는 것이기에 근본적으로는 변화를 거부, 부정하는 도식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은 자연언어의 논리를 따랐던 모든 형이상학적 구성에서 ‘모든 것은 흐른다’는 직관이 이성(지성)의 타자로 비합리적 공간을 배회하든가 아니면 우연적인 현상, 실재의 표피적 흔적과의 부질없는 교섭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었던 기본적인 이유이다.
역설적이게도 이 도식의 전형은 엘레아의 ‘존재’와 감각적 ‘변화’ 간의 간극을 매개하고 그 양자간의 체계적인 화해를 최초로, 그리고 진지하게 추구했던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 그가 변화하는 세계를 기술하면서 사용한 주어­술어 논리는 자연언어를 정형화한 것이었고, 그가 존재의 기본 구조로 제시했던 실체­속성(substance-attributes)의 범주는 이에 대한 형이상학적 상응자이다. 그래서 실체­속성의 범주를 축으로 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은 자연언어의 묵시적 전제에 따라 그려 놓은 세계의 밑그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자연언어의 한계 안에 있었음에도 이를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 결과 그가 형이상학과 논리학에서 보여 준 탁월한 구성적 논의는 그로서는 결코 의도하지도 달가워하지도 않았을 것으로 보이는 실체철학이라는 유령의 산실이 되고 말았다. 특히 근대 형이상학은 이 실체철학의 직접적인 변종들이다. 우리는 데카르트(Descartes), 스피노자(Spinoza), 라이프니츠(Leibniz), 헤겔(Hegel)에게서 그 대표적인 사례들을 본다.
20세기 철학은 불변적 동일자에 매달리는 근대철학의 사변을 거부하였다. 이는 형이상학적 사변 그 자체를 거부하는 물줄기의 원천이 된다. 형이상학적 사변은 이성에 대한 과잉 신뢰 또는 ‘문법적 착각’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스스로 해결할 수도 없고 의미도 없는 난제들을 양산할 뿐이라는 것이 그 주된 이유였다. 20세기 주류 철학은 더 이상 존재와의 화해를 시도하지 않는다. 인간이 지금껏 경험한 화해의 이야기는 모두 공허한 신화로 치부된다. 이들 철학은 존재가 이성으로서는 화해할 수 없는 타자라는 데 묵시적 또는 명시적으로 공감한다. 그리고 이런 공감은 형이상학의 역사가 다중을 현혹시키고 때로 통제 억압하는 이성에 의한 폭력의 역사에 불과했다는 자기 파괴의 철학으로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화이트헤드는 신화를 만들어 내어 존재와 합리적으로 화해하지 못하는 문명은 쇠퇴 소멸할 것이라고 단언한다. 특히 20세기가 향유하고 있는 문명은 곳곳에서 쇠퇴의 징후를 보이고 있다. 화이트헤드는 다양한 문화영역에서 극도로 파편화되어 서로 겉도는 관념들의 충돌 현장에서 현대문명의 위기를 읽고 있었다. 이들 관념을 비판적으로 조정하고 극복할 메타 문맥(meta-context)이 필요하다. 그것은 실재의 실상을 알려 주는 신화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런 신화를 구축하려면 무엇보다도 자연언어를 근간으로 하는 기존의 관념들을 넘어서서 사변적 상상의 모험을 감행해야 한다. 오늘날 과거의 형이상학적 체계들이 단순한 신화로 치부되는 까닭은 그들이 이들 관념을 조정함으로써 다양한 인간 경험에 의미를 줄 수 있는 메타 문맥의 기능을 다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화이트헤드는 유동하는 세계와 화해할 신화, 곧 형이상학적 우주론을 구축하기 위해 무엇보다도 먼저 자연언어를 버리고 새로운 언어를 구상한다. 화이트헤드가 보기에 자연언어는 자연을 적대적으로 파악하여 이를 통제, 지배하기 위한 실용언어이며, 자연을 인식하고 화해하기 위한 사변언어가 아니다. 전통의 사변언어는 모두 인간의 자유로운 창조적 사유를 억압하는 자연언어의 변종이다. 그렇기에 전통의 실체철학과 주어­술어 논리는 실재의 실상에 온전히 다가설 수 없는 태생적 한계를 지니고 있다. 이들은 유동하는 존재 위에 떠 있는 불안정한 외피를 붙잡고 있을 뿐이다. 따라서 어떤 의미에서 이들은 실재를 기술하고 설명해 낼 수 있는 설명항이 아니라 그 자체가 설명되어야 할 피설명항이다. 진정한 의미의 설명항은 실재의 실상을 관통하는 사변언어에서 모색되어야 한다. 화이트헤드는 자연언어를 낳은 전제들의 굴레에서 벗어나 새로운 사변언어를 만들어 구사한다. 그래서 과정철학의 언어는 생경하다. 이 언어에서 변화의 도식은 전혀 다른 존재론적 토대와 논리 위에 재구성된다. 그래서 또한 그의 우주론 체계는 한없이 낯설다.


생성의 원자론
화이트헤드가 유동하는 세계를 기술하고 있는 존재론적 지평의 중심에는 t1-S1-Q1, t2-S2-Q2, t3-S3-Q3……의 도식이 자리하고 있다. 여기서 S1, S2, S3…… 등은 과정철학에서 문제되는 모든 사태의 뿌리에 놓인 단위존재(unit-being)이다. 이 단위존재는 위의 도식이 시사하고 있듯이 자신의 시간점에서 생성 소멸할 뿐 시간축을 따라 여행하지 않는다. 그것은 임의의 시점 t1에서 성질 Q1을 갖는 것으로 생성하고 그 생성의 완결과 더불어 소멸한다. 물론 이때 그것이 점유하는 시간점은 0의 시간점이 아니라 폭을 갖는 시간점(unit-time)이다. 이 시간점은 단위존재의 생성에 힘입어 이와 함께 현실화한다. 이처럼 단위시간을 실현시키면서 그 시간 동안 생성하는 궁극적 실재는 화이트헤드가 물리적 생리적 심리적 과정으로서의 일상적 경험이 갖는 기본 구조에 대한 반성과, 현대물리학의 중요한 몇몇 연구 성과에서 확인할 수 있었던 미시 물리적 사태의 기본 특성들로부터 유비적으로 일반화(철학적, 상상적 일반화)하여 탄생시킨 것이다. 화이트헤드는 이렇게 탄생시킨 실재에다 ‘현실적 존재’ 또는 ‘현실적 계기’라는 이름을 준다. 현실적 계기는 그에 선행하는 현실적 계기들(즉 과거의 세계 전체)을 자기화하는 경험을 통해 자신을 구성해 가는 과정으로서의 존재이다. 그것은 자기 창조의 과정을 통해 존립하고, 이 과정의 완결과 함께 소멸한다. 완결한 주체는 후속하는 현실적 계기의 생성을 위한 소재, 즉 객체가 된다. 현실적 존재는 주체로서 생성하고 소멸하여 객체가 된다.
변화하는 세계는 생성 소멸하는 현실적 계기들의 구성체이다. 현실적 계기들은 세계의 궁극적 구성자이다. ‘궁극적’이라는 말은 그것이 분할될 경우 그 현실적 존재성을 상실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발생론적 지평에서 순차적으로 현실적 계기를 구성하는 부분들은 그 전체로서의 생성을 떠나서 존립할 수 없는 것들이다. 현실적 계기는 생성의 최소 단위이자 존재의 최소 단위라는 말이다. 이런 의미에서 현실적 계기는 그 자신의 시간폭을 ‘일거에’ 향유하면서 생성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생성의 내적 과정은 ‘시간적 전후관계’를 함의하지 않는다. 이 내적 과정을 분할하여 얻는 시간폭은 현실 속에 존립할 수 없는 추상적 시간이다. 그리고 이런 의미에서 그것은 생성 중에 있는 한, 통일적이고 원자적인 것으로서 분할 불가능하다. 이것이 생성의 원자론(atomism of becoming)이다.
이것은 특히 화이트헤드가 현실적 계기를 ‘획기적 계기’라 부르면서 역설하고 있는 논점이다. 여기서 ‘획기(epoch)’라는 말은 ‘하나의 전체로서의 발생과 존립’을 효과적으로 표현한다. 이는 획기라는 말이 ‘정지(arrest, hold)’라는 어원적 의미 이외에 ‘주기(period)’라는 파생적 의미도 갖고 있다는 점을 고려할 때 분명해진다. 일반적으로 ‘주기적 진동’이라는 것은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 그 주기 전체를 필요로 하며, 그 속의 어느 한순간에서는 존립할 수 없다. 0의 시간점으로서의 순간과 주기적 진동은 양립할 수 없는 개념이기 때문이다.


원자적 시간론
시간축 위에서 잇따라 생성하는 현실적 계기들 사이에는 순차적인 ‘이행’의 관계가 성립한다. 이는 원자적 생성으로서의 현실적 계기가 자신을 완결지어 주체로서는 소멸하고, 후속하는 새로운 현실적 계기들의 생성에 ‘여건(data)’으로 주어지는 그런 일련의 사태의 구조적 반복으로 나타난다. 여기서 현실적 계기 하나 하나의 내적 생성은 미시적 과정이고, 한 현실적 계기에서 후속하는 다른 현실적 계기에로의 이행은 거시적 과정이다. 그리고 이런 거시적 이행 관계를 토대로 무수한 현실적 계기들이 합종연횡하고 있는 구성체가 지금의 세계이자 우주이다. 따라서 세계가 갖는 모든 특성들은 궁극적으로 이들의 생성에 의존하고 있으며, 이들의 생성으로 분석되고 기술될 수 있다. 결국 ‘분할 불가능하다’는 의미에서 비연장적인 현실적 계기들이 연대하여, ‘분할 가능하다’는 의미에서 연장성을 갖는 세계를 구성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시간이건 공간이건 물리적 차원의 연장성은 현실적 존재들의 상호 연관이라는 근원적 사태에 의존하는 파생적 사태이고, 무한 가분성을 갖는 것으로 이해되는 수학적 연장성은 이런 파생적인 물리적 연장으로부터 다시 추상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순수한 관념이다. 그리고 지속 없는 순간이라는 개념은 이런 추상적 시간에 들어 있는 관념적 존재를 지칭한다. 제논(Zenon)은 이런 시간을 실재의 시간으로 간주한 결과, 역설에 힘입어 존재의 불변부동을 논증할 수 있었다. 그러나 실재로서의 시간은 사실상, 잇따라 생성 소멸하는 현실적 계기들이 순차적으로 현실화시키는 ‘획기적 시간’들, 즉 ‘시간의 양자(time-unit, temporal quantum)’들이다. 이들은 현실적 계기의 원자적 생성과 운명을 같이하기에 역시 원자적인 것이다. 그래서 생성의 원자적 단위인 현실적 계기가 구현하는 단위시간은 곧바로 실재 시간의 최종 단위가 된다. 이것이 화이트헤드의 시간철학, 이른바 ‘시간의 획기성 이론(the epochal theory of time)’의 기본 토대이다. 화이트헤드가 생성의 원자론자임을 자처했던 만큼, 이 이론은 ‘원자적 시간론’이라 할 수 있겠다. 이 생성의 원자론과 원자적 시간론에서 전통의 존재와 시간(공간) 간의 관계는 역전되어 있다. 생성(존재)이 시간(공간)에 존재론적으로 선행하기 때문이다.


변화와 결합체
현실적 계기들의 계기가 추상으로서의 수학적 시간뿐만 아니라 이런 추상의 토대가 되는 파생적 실재로서의 물리적 시간에도 존재론적으로 앞서는 것이기에, 현실적 계기의 생성은 추상적이거나 파생적인 시간축을 전제로 하는 자연언어의 ‘변화’라는 개념으로는 기술할 수 없는 사태가 된다. 요컨대 현실적 계기들 하나 하나는 자신이 점유하는 각각의 단위시간 내에서 생성 소멸하기 때문에 ‘변화한다’고는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그것은 유동하는 거시세계의 감각적 사태들을 분석적으로 기술하고 자연언어가 품고 있는 변화의 도식을 설명할 토대가 되는 불변자이다. 따라서 현실적 존재의 생성 소멸은 변화의 일종이 아니다. 이 양자는 존재론적으로 지평을 달리하는 사태이다.
변화라는 개념은 연장된 물리적 시간을 향유하는 거시적 세계, 현실적 계기들의 ‘결합체(nexus, 정확히 말하자면 사회 society)’에서 그 자연적 의미를 회복한다. 여기서 변화는, 특정의 현실적 계기들이 잇따라 생성 소멸하는 가운데 빚어지는 이들간의 차이로 환원된다. 앞서의 도식을 사용하자면, 세계의 과정을 구성하고 있는 궁극적인 실재인 현실적 계기들을 t1-S1-Q1, t2-S2-Q2, t3-S3-Q3……라고 할 때(여기서 t1, t2, t3…… 등은 ‘획기’, 즉 단위시간으로서의 시간의 양자들을 상징하며, 이들의 연속된 계열이 물리적 시간을 파생시킨다), 변화는 이행관계를 맺는 현실적 계기들인 t1-S1-Q1, t2-S2-Q2, t3-S3-Q3……의 거시적 이행 과정에서 나타나는 이 계기들간의 차이로 설명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새로운 도식에서 보자면 자연언어의 논리에 전제된 변화의 담지자인 동일적 주체는 현실적 계기들의 이행적 상호연관으로 구성되는 ‘사회’이다. 이 사회의 동일성은 그것을 구성하는 현실적 계기들이 모종의 특징을 계승하여 공유하게 되는 데서 온다. 화이트헤드는 이를 ‘한정 특성(defining characteristic)’이라 부른다. 전통의 용어로 하자면 ‘형상(form)’이다. 그러므로 변화를 겪으면서 물리적 시간 속을 여행하는 모든 자기 동일적 존재자들은 물론이고 이들을 감싸안고 있는 것으로 간주되는 물리적 시간(공간)까지도, 생성 소멸할 뿐 변화하지 않는 원자적 실재들의 역동적인 상호 연대에 의존하고 있는 파생적 실재들이다.
결국 화이트헤드는 생성을 투명한 시간축에 존재론적으로 선행하는 실재로 상정함으로써 시간과 존재 간의 전통적 관계를 해체 역전시키고, 변화를 이런 실재들의 계기에서 일어나는 파생적 사태로 기술, 설명하는 가운데 유전하는 세계를 합리적 구도 속에 끌어들였다. 여기서 전통의 실체라는 개념, 즉 다양한 속성들의 동일적 담지자는 사실상 궁극적인 것이 아니라 최선의 경우 파생적인 것이요, 최악의 경우 추상적, 논리적인 것이 된다. 어떤 의미에서 전통의 실체­속성의 도식도 역전되고 있는 것이다. 동일성은 성질(형상)에 있는 것이요, 실체는 이질적인 생성들로 해체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파생적인 동일성은 사회에 참여하고 있는 현실적 계기들이 공통 특성의 계승을 부분적으로 거부하게 될 때 와해의 길을 걷게 된다. 이것은 우리의 감각에 잡히는 거시적 존재들의 붕괴 또는 소멸을 설명해 준다.


사변이성의 모험과 문명의 창조
화이트헤드의 과정철학은 변화하는 세계를 사변적 이성으로 붙잡고 있는 20세기 신화이다. 그는 이 신화를 통해 존재와 시간, 이성을 화해시킴으로써, 인간이 갖는 모든 층위, 모든 영역의 경험에 의미를 주고자 하였다. 이런 의미에서 그의 신화 체계는 해석학적 기능을 갖는다. 이는 그가 다양한 인간 경험에서 드러나는 정보를 빠짐없이 의미 있는 것으로 고려하는 데서 문명이 그 생존의 활력을 얻는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나아가 이 신화체계는 파편화되어 충돌하는 관념들을 비판적으로 조정, 극복한다. 그는 자유로운 상상과 창조적 사유를 억압하는 이들 관념을 비판적으로 극복하는 것이야말로 문명을 창조적으로 이끌어 가기 위한 출발점이 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화이트헤드의 궁극적 목표는 문명의 쇠퇴를 막고 창조적 전진을 부추기는 데 있었다. 그가 반(反)형이상학의 시대를 살면서 이에 역행하여 형이상학적 사변을 역설한 이유는 여기에 있다. 그에게 있어 형이상학적 사변은 문명을 위한 사유의 모험이요, 그 산물로서의 형이상학적 우주론은 이 모험의 결실이다.
그러나 화이트헤드가 구축한 이 우주론은 자기 파괴의 기제를 내장하고 있다. 그것은 사유로 환원 불가능한 ‘우연적 존재의 집요한 특수성’이다. 이 기제는 그 체계 자체를 개방된 잠정적인 구조로 몰고 간다. 이는 그가 말하는 이성이 존재를 뿌리째 파악하는 독단적 이성이 아니라 잠정적으로 존재와 화해하고 있는 실험이성이라는 사실과 맥락을 같이한다. 사변언어 또한 마찬가지다. 그것은 실험적 장치이다. 따라서 그의 신화가 우리의 경험을 배반할 때, 유동하는 세계 경험을 적절히 담아 내지 못할 때 우리는 이 신화를 수정하거나 폐기하고 새로운 신화를 구축해야 한다. 이것은 또한 화이트헤드 자신의 요청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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