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orean Article Bank

한국신학논문은행에 대하여

2002/02/13 (10:52) from 129.206.82.101' of 129.206.82.101' Article Number : 119
Delete Modify 홍종한 Access : 7241 , Lines : 37
상대성 이론 (1) : 사물의 실재와 인간의 관점
상대성 이론 (1): 사물의 실재와 인간의 관점

홍종한


상대성이론은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하는 시간과 공간의 개념을 근본적으로 변화시켰다.  이 이론은 물론 아인슈타인의 천재성에 의해 발견된 것이지만, 이런 이론은 아무 근거없이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것이 아니고, 이 이론의 배경에는 신비한 자연의 현상을  이해 하고자 심혈을 쏟았던 많은 사람들의 땀과 노력 이 있는 것이다.  내 전공이 철학은 아니지만,  상대성이론을 기술하기 전에 먼저 그 배경에 깔려있는 철학적인 문제를  생각해 보는것이 순서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 이번호에서는 이문제를 다루어 보고자 한다.     

먼저, 인간에 의해 인식된것으로서의 사물과 인간의 의식여부와는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사물은 같을 필요가 없다.  가령, 나는 눈이 상당히 나빠 안경이 없으면 아주 가까이 있는 물체도 잘 구분하지 못한다.  그래서 나는 안경이 없이 내가 감지한 사물의 실재(reality)와 진짜 사물의 실체는 다른것 임을 잘 알고 있다. 사람이 사물을 인식하는 것하고 동물이 사물을 인식하는 것이 똑 같은가?  사람은 사람의 안경을 쓰고 있고, 개는 개만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안경을 쓰고 사물을 파악하고 있으리라.   내가 배운 바에 의하면, 개는 색맹이다.  그러므로 어떤사물에 대한 사람의 인식과 개의 인식은 다를 것이다.  어쩌면 과학자는 사물의 실재가 무었인지도 모른체, 인간의 관점에서 자연을 기술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한편, 어떤 인식의 주체(그것이 인간이든 개이던) 와 독립해서 실재는 정말 있는 것일까? 아니면 모든인식은 결국 인식주체 상대적인 것인가?   만일 우주 어느곳에 우주인이 살고 있다면 그들은 자연의 실재를 우리와 다르게 보고있는 것은 아닐까?     가령 예를 들어 젖가락을 물이 담긴 컵에 집어 넣으면 내눈에 분명 젖가락이 꺽여서 보인다.  우리는 굴절의 법칙에 의해, 그것이 꺾여 보이는 것일 뿐이라고 배웠을 뿐만 아니라, 그것이 얼마나 꺾이는가 하는 것을 계산해 내는 방정식도 알고 있다. 그러나 이 이론은 정말 진리인가?  다른 별에 사는 우주인도  그렇게 기술하고 있을까?    혹시 만에 하나라도,  젖가락이 물에 들어가면 정말 꺾이는 것이 아닐까?    다른 예를 들어 보자.  멀리 사라지는 자동차는 작게 보인다.  미술을 하는 사람들은 원근법이라는 법칙을 도입하여 이것을 설명한다.  그러나 이 또한,  내 눈에  그렇게 보이는 것이 아니고, 정말 차가 작아지는 것은 아닐까?        

물론 사물의 실재의 존재를 의심 해서는 과학을 할수 없다.  그러므로 나는 과학자로서 실재의 존재를 의심하지는 않는다.  나는 다만 여기서 사물을 인식하는데 ‘인간의 관점’이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가 하는 점을 생각해 보고자한다.  인간의 관점은 동물의 관점과 다른 것이다.  만일 개의 IQ가 어느날 갑자기 인간과 같이 높아졌다고 하자.  이 개는 프리즘에서 나오는 7개의 빛을 구분하지 못한다.    과연 천재적인 개는 빛에 대해 인간과 똑 같은 이론을 만들어 낼것인가?  모르기는 해도, 그렇지 않을것 같다.    왜냐하면 개의 관점은 인간의 그것과  다르기 때문이다.  여기서 말하는 ‘인간의 관점’ 이란 물론 모든 인간에게 다 적용되는 보편적인 관점을 말하는 것이다.    인문과학, 즉, 소설, 시, 음악, 혹은 미술은 작품에 자연을 해석한 작가의 주관이 들어가 있지만,  자연과학을 하는 과학자는 가능한 한 주관을 배제하고, 객관적으로 사물을 기술하고자 노력한다.  그러면 과학자가 자연을 기술할때 적용하는 ‘인간의 관점’ 이라는 것은 어디까지가 주관적인 것이고 어디까지가  객관적인 것인가? 사물의 실재를 인식하는데 필요한   ‘인간의 관점’ 이라는 것은  과학에서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가?

과학의 발달과 인간의 관점

그림 1 에서 돌을 A에서 굴리면 돌이 굴러가는 바닥과 돌과의 마찰을 무시할경우 꼭같은 높이에 있는 B에 가서 멈춘다.  A가 서울에 있고 B가 부산에 있어도 마찬가지다.   이 현상을 잘 살펴보면, 돌이 자기가 있었던 위치를 기가 막히게 기억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가?  돌은 사람같이 기억력을 가지고 있는가?  아리스토텔레스는 무생물을 생물같이 보았다.  그는 주장하기를 이세상의 모든 사물은 자연스러운 위치(natural place) 혹은 고향 으로 가고자 하는 갈망이 있으며, 돌의 고향은, 우주의 중심(혹은  지구의 중심)이기 때문에 땅으로 떨어지고 불의 고향은 하늘이기 때문에 하늘로 올라간다 고 가르쳤다. 사람들은  불행히도 이리스토텔레스의 이 관점을  1,800년 동안 의심하지 않고 믿었다.  한편, 뉴튼의 관점에 의하면  돌이 땅에 떨어지는 것은 만유인력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만유인력을 볼수 있는가?  볼 수 없다.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돌 과 땅, 그리고 돌이 땅으로 떨어지는것, 그것뿐이다.  만유인력은 이 두 데이타를 연결시키기 위해 뉴튼이 시도한 그의 이론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고향이라는 개념을 도입하여 이 두 데이타를 연결 시켰다.  그림 1에서도 우리가 보는 것은 A에 있던 돌이 B에 가서 서는 것이다.  우리는 이 두 데이타를 돌이 기억력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고 연결 시킬수도 있고, 혹은  돌의 위치 에너지 가 보존된다는 법칙을 써서  연결 시킬수도 있다.  이 연결 시키는 것이 철학적으로 말하면 인과율이다.

자연과학과 인과율

불이 나면 재가 생긴다.  이경우 불이 ‘원인’ 이고 ‘재’가 ‘결과’ 이다. 그러나 ‘재’가 있아고 해서, 꼭 ‘불’이 났다고 결론을 내릴수는 없는 것이다.   이것은  인과율의 역의 문제로,   ‘결과’ 가 주어졌을때 ‘원인’을 찾아내는 것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은 것이다.  왜냐하면, ‘결과’ 에 대한 ‘원인’ 은 하나가 아니고 여러가지가 있을수 있기 때문이다.  과학이란 자연현상을 분석하는 것인데, 많은 경우 자연이 제공하는 데이타를 가지고 (결과), 그에 대한 ‘원인’ 을 찾아 내는 것이다.   뉴톤에 의하면,  만유인력이 ‘원인’이고, 돌이 땅에  떨어지는 것이 ‘결과’ 이다.   그러나 뉴톤이 들고나온 ‘원인’ 이 ‘결과’에 대한 유일한 설명인가?  아니면 뉴톤의 ‘원인’과  돌이 땅에 떨어지는 ‘결과’ 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인가? 회의론자 ‘흄’은 “원인으로 간주되는 사건과 결과로 간주되는 사건 사이에 경험을 통해 확인될 수 있는 필연적 연결(necessary connection)이 없다”  고 했다.

가령 예를 들어, 돌맹이를 던져 유리창을 깨트렸다고 하자.  100 번을 던지면 100번 깨진다.  그래서 사람들은 결론을 내린다.  돌맹이를 던진것이 ‘원인’ 이고 유리창이 깨진 것이 ‘결과’ 이다.  그러면 정말 창문은 돌에 의해 깨진것인가, 아니면 돌을 던진것과 창문이 깨진것은 아무 관계가 없는 것인가?   돌을 던졌을 때 창문이 우연히 깨졌을 수도 있지 않은가?  100 번 던져 100번 깨졌더라도, 돌을 던진것과 창문이 깨진것은 아무 인과 관계가 없을 수도 있지 않을까?  이상한가?  그럴수 없는가? 가령 밤이 오고 난뒤 낮이 온다.  인류 역사상 이것이 어긋난 적은 한번도  없다.  그러면 ‘낮’ 이 원인이고 ‘밤’ 은 결과인가?  아니다.   여기서 밤과 낮은 아무런 인과 관계가 없는 것이다.  밤과  낮은 지구가 태양 의 주의를 돌기 때문에 생기는 것 이지 않는가?  이와  마찬가지로 뉴톤의 만유 인력 법칙과 사과가 떨어지는 것은 아무런 인과 관계가 없을 수도 있는 것이다.    지금은 그럴듯 하게 보여도, 훗날 어느 학자가 나타나서 뉴톤의  이론이 틀렸다고 할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부인할수 없는 것이다.  그럴수가 없다고 증명할수 있는가?  증명할수 없는 것이다.  이것이 흄의 비판이었다.  사실 나중에 아인슈타인은 상대성 이론을 들고 나와 뉴톤이 틀렸다고 주장했다.  후에 또 어떤사람이 나타나서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이 틀렸다고 주장할지 모르는 것이다.   과거에 태양이 지구를 돈다는 천동설에 근거 하여 사람들은  매우 정밀한 해시계를 만들었고, 또 지구상에 일어나는 많은 현상을 설명했다.  그렇다고 천동설이 맞는것은 아니다.   뉴톤 역학체계도 많은  자연현상을 설명하기는 해도 우리는 그것이 불변의 진리인지 아닌지 도무지 알 재간이 없는 것이다.  뉴톤 본인도 그 자신의 이론이 절대적으로 확실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으며, 뉴톤주의자들 중의 한 사람으로 이해되 는   흄은  ‘인과론’ 에 근거 하여 뉴톤의 역학체계가 확실지 않다는 것을 인정하였다.  즉, ’흄’ 은 뉴튼역학이 세상을 휩쓸고 있을때 돌연 혜성 같이 나타나서, 찬물을 끼얹은 것이다.   

사물의 실재와  인간의 인식

이제 조금 다른 문제를 생각 해보자.  내가 인식하는 사물의 형상이 정말 사물의 실재 와 같은가?  가령 내가 파란 색의 컵을 봤다고 하자. 그 컵의 색깔이 진짜 파란 것일까?   내가 파란 색으로 보는 이유는 그컵이 빛을 흡수한뒤, 파란빛만  내보내기 때문에 그렇게 보이는 것이다.  그러므로, 컵은 근원적인 속성 이라 해도, 파란색은 파생적인 속성인 것이다.  파생적인 속성은 관측자에 따라 달라질수 있는 것이다.  즉, 개도 컵을 인식하기는 하지만 파랗다고 인식하지 않는다.  이 예를 돌이 떨어진다는 것에 적용하면, 돌이 떨어지는 것은 자연이 제공하는 데이타로 근원적인 양으로 볼수 있지만, 뉴톤의 만유인력 법칙이나, 아리스토테레스의 이론은 모두  파생적인 것이다.  즉, 흄에 의하면, 데이타를 연결시키는 인과율, 즉, 과학자가 들고 나오는 이론은,  파생적인 것이다.  그것은 관측자에 따라 다를 수가 있는 것이다.   

칸트는 흄의 책을 읽고 독단의 잠( dogmatic slumber) 에서 깨어 났다고 고백했다.  그만큼 흄의 도전은 심각했던 것이다.  이 도전에서 뉴튼역학을 구해내기 위해, 칸트는 소위 말하는 ‘코페르니쿠스적인 인식전환’ 을 시도했다.  흄은 주장하기를, 우리의 마음은 백지장같아서, 바깥세상이 찍어 내는 데이타를 사물의 실체로 인식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칸트에 의하면, 우리는 자연이 제공하는 데이타를 그대로 복사 해 인식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 안에는 데이타를 종합 분석하는 능력이 있는 것이다.  이것은 후천적인 경험에 의한 것이 아니고, 선척적인 것이라는 것이 내가 이해하고 있는 칸트의 인식론이다.   칸트는  인과율, 뉴톤의 절대 시간, 절대 공간, 그리고 수학을 인간이 사물의 실재를 인식하는 데 쓰는 우리의 마음안에 있는 골격(framework)이라 했다.  사물의 실재가 인간이 인식하는 것과  정말 같은지 다른지는 알 재간이 없지만, 모든 인간은 똑같은 골격을 통해서 사물을 인식 하기 때문에 사물의 실재는 모든 인간에게 같게 인식되는 것이다.  우리가 뉴톤의 만유인력 법칙이 사과를 떨어 뜨리는 ‘원인’ 이라고 받아들이는것은   우리 안에 있는 시간과 공간의 직관형식(forms of intuition)  안에서, 수학과 인과율을 적용해서, 인간이 그렇게  인식해서 그런것이다.  이것은 인간에게 주어진, 사물을 이해하는 방법으로, 아무리 시간이 흐른다 해도 변하지 않는 것이다.   모든 인간은, 돌맹이를 던져 유리창을 깼을 때 돌맹이를 던진것이 ‘원인’이고 유리창이 깨진것이 ‘결과’라고 똑같이 인식하는 것이다.   그것은 인간이 내재해 있는 인과율을 써서 사물을 인식하기 때문에 그런것이다.  이 인과율은  경험에 의해 얻어진 지식이 아니고 우리에게 선천적으로 주어진것이다.   흄에 의하면 사물이 우리의 인식을 유도해 내지만, 칸트에 의하면 사물의 데이타가 우리안에 들어 온뒤,  우리 안에 있는 시간과 공간의 직관형식을  통해 인식이 형성된 후에 그 인식의 실재를 자연에서 찾아내는 것이다.  즉,  세계 속의 객관적 질서로서 인간의 인식으로부터 독립해서 존재하는 것으로 간주되어왔던 인과율이, 칸트에게서는 인간에 의해 세계에 부여되는 질서로 간주된다.  이로써 칸트는 ‘코페르니쿠스적인 인식전환’ 을 통해, 인과율을 파생적인 위치에서,  근원적인 위치로 올려놨다.

그러나  칸트는 사물의 실재를 인식하는 데 ‘인간의 주관’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을 주장했고, 이것은 후에   현대 물리학에서 끝없는 논의의 대상이 될 객관적인 사물의 실재와 그것을 인식하는 인식의 주체의 구분을  모호하게 하는 판도라의 상자를 열게 된다.   

아인슈타인과 흄의 회의론

뉴톤이나 칸트에 의하면 내가 관찰하든지 말든지 시간은 흘러가는 것이고, 지구상에서의 한 시간은 이 우주 어디에서도 똑같은 한시간인 것이다.  그러나 흄의 회의론을 심각하게 받아 들인 아인슈타인은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졌다.  화성에 있는 시계와 지구에 있는 시계가 일치  되  있는지  않는지 우리가 어떻게 아는가? 그것은 재 봐야 하지 않을까?    아인슈타인은, 이 일치의 문제, 혹은 ‘동시성’의 문제가,   뉴톤이나 칸트가 주장한데로, 선천적인 지식이 아니고 후천적인 지식인 것이라고 주장했다.  보다 정확하게는,  “사건들 사이의 절대적인 관계라기보다 인식 주체상대적인 그리고 부분적으로는 규약적인 관계로 보았다.” 이것이 상대성 이론의 출발이다.  이 문제는 다음에 깊이 다루어 보기로  하자.   

(감사의 글: 이글을 읽고 도움말씀을 주신 서을대 철학과의 조인래 교수님과 부산외국어대 문화학과 박병철 교수님께 깊은 감사를 표하는 바 입니다.  그러나 이 글에 잘못이 있으 면 전적으로 본인의 책임음을 알려 드립니다.)

Backward Forward Post Reply Li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