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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12/26 (07:58) from 62.104.211.64' of 62.104.211.64' Article Number : 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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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초의 개혁주의 문화 신학의 개념
Welker 교수의 개혁주의 문화신학 한국개혁신학회 국제 심포지엄 2000. 10. 7.

21세기초의 개혁주의 문화 신학의 개념

The Idea of a Reformed Theology of Culture in the Beginning of the 21st Century


발제자: 미하엘 벨커 교수(Prof. Dr. Michael Welker, Heodelberg University)
통역자: 이 승 구 교수(Dr. Seung-Goo Lee, Kukje Theological Semin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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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초에 "문화"라는 용어와 문화 현상은 학계와 여러 매체들(the media)의 큰 주목과 열 광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그러므로 시카고 대학교 신학부의 캐뜨린 태너(Kathryn Tanner) 가 근자에 출판된 그녀의 책제목에서 잘 표현하고 있듯이, "문화 이론들"이 "신학의 새로운 과제"(a new agenda for theology)가 되고 있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문화 신학"에 대한 폴 틸리히의 이상(vision)이 다시 언급되고 검증되는 것은 오히려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런데, 이 강의의 제목으로 여러분께서 제게 주신 "21세기초의 개혁주의 문화 신학의 개 념"에 비추어 볼 때, 여러분들은 이런 일반적 흥미와 관심을 휠씬 넘어서고 있다고 생각되어 진다. 여러분들께서는 특정한 신앙 고백적 전통과 형상을 지닌 신학, 즉 개혁 신학이 어 떻게 열매 있게, 건설적으로, 그리고 신학적으로 책임성 있게 문화와 관련할 수 있는지를 탐구하고자 하는 것이다. 여러분들이 "개혁주의 문화 신학의 개념"에 대해서 말하는 것은 매 우 현명한 일이라고 생각된다. 여러분은 또한 "개혁주의 문화 신학의 프로젝트"에 대해서도 말할 수 있었다고 본다. 이에 기초해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해 보고자 한다: "문화 신학이라는 것은 과연 좋은 개념인가?" 그리고 "개혁주의 문화 신학이라는 것은 과연 신빙 성 있는 프로젝트인가?"

이 발제에서 나는 처음부터 그것은 막고 저항하는 것이 아주 쉽다는 것을 잘 의식하고 있지 만, 여러분들의 질문을 다시 깊이 생각해 보고자 한다. 신학은 하나님에 대해서 생각하고 하 나님에 대해 말하는 학문이다.* 그런데 "문화 신학"(theology of culture)이라는 말은 신학과 문화 이론을 혼동하거나 심지어 우상 숭배를 낳을 수도 있는 개념으로 생각될 수도 있다. "문화 신학"이라는 말을 할 때 우리는 이 용어에 대한 이런 반론들을 염두에 두고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학 일반, 특히 개혁 신학이 문화 현상과 어떻게 연관해 왔으며, 연관될 수 있었는지를 생각해 보아야만 한다. 이를 위해서 우리는 먼저 "문화"라는 말의 여러 의미들을 생각해 보고자 한다. 그리고 둘째로 이런 다양한 "문화"의 의미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의미와 연관된 여러 다른 형태의 신학들을 생각해 보고자 한다. 이 과정 가운데서 이 복잡 한 과제에 있어서 개혁 신학이 어떤 잠재력을 가지고 있으며 어떤 기여를 할 수 있는지를 생각해 볼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우리는 대중 문화의 하나로 소위 "매체-문화" (media-culture)라고 불려지는 것의 특정한 위협에 대해서 생각해 보고자 한다.

1. "문화"라는 용어의 다양한 의미 The Many Meanings of the Term "Culture"

문화에 대해서는 정의들도 많고, 그에 관한 이론들도 많이 있다. 이미 고대(古代)로부터도 우리는 문화라는 말에 대해 "농경"에서 "자연적 성장을 잘 돌아보는 것"을 거쳐 "보호"와 "예배"에 이르는 폭넓은 개념 정의들을 찾아 볼 수 있다. 옥스퍼드 대학교의 영문학 교수인 테리 이글톤(Terry Eagleton)은 그의 가장 유용한 책 {문화의 개념}에서, "문화"는 실재(實 在, reality)와의 상호 작용에 집중한다는 점에 주목하면서 "실재론적"(realist)이고 "구성주의 적"(constructivist) 차원을 제공하고 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문화들은 우리가 노동이라 고 부르는 자연과의 끈임 없는 관계 위에 세워진 것이다....... (그러므로 문화라는 개념은) 규 제(規制, regulation)와 자연스러운 성장(spontaneous growth)을 둘 다 시사하는 것이다." 이글톤은 이 세상의 많은 대립은 문화 현상 때문에 의문시될 수 있다는 점을 보여 주고 있다. 왜냐 하면 문화는 항상 "양면"(both sides)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문화는 한편으로 는 서술적(descriptive)이고,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평가적(evaluative)이며 심지어 규범적 (normative)이기까지 하다는 것이다. 즉, 문화는 "만드는 측면과 만들어지는 측면, 합리성과 자연성", "성정과 계산, 자유와 필연성"의 측면들을 다 포함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문화 는 현실적인 면과 이상적인 면, 실재의 개념과 좀 모호하지만 온전함에 대한 이상을 모두 가지고 있다. 이것은 왜 문화가 매혹의 대상이 되며, 학문적으로 다루기 힘든지를 잘 설명해 주는 것이다. 용어의 복잡성과 문화 현상의 복잡성은 이런 정의의 문제 이상의 복잡함을 가지고 있다.

역사의 과정 가운데서 문화의 주된 의미는 점점 더 확대되어졌다. 그래서 이제 문화는 복잡 한 인간의 활동 전부로만 여겨지는 것이 아니라, 현실적이고 가능한 인간사(人間事)의 복잡 한 상태(a complex state of actual and possible human affairs) 모두를 지칭하는 것이 되었다. 이런 인간사들은 자연적 실재들에만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이고 상징적 실재들에도 집중하는 것이다. 레이몬드 윌리암스(Raymond Williams)가 잘 보여준 바와 같이, 18세기에 는 "문화"(culture)가 "문명"(civilization)과 동일시되어졌고, 온갖 종류의 현대적 진보와 연 관되어지게 되었다. 19세기에 나타난 문화와 문명의 구별과 심지어 대립은 문화를 (문명이 나 현대성의 진보와 대립하여 서는) 전통, 또는 참된 가치의 보고(寶庫)들과 연관시키게 하 였다. "문화"라는 말이 전통과 저항과 연관되게 된 것은 매우 흥미 있는 일이 아닐 수 없다. 문화라는 말이 보수적 함의와 진보적 함의, 심지어 혁명적 함의도 가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 리하여 "문화"는 고전적, 귀족적, 엘리트와 연관되기도 하고(소위 고전 문화) "민중들"과 연 관되기도 하며, 심지어 "대중"과 연관되게도 되었다(소위 대중 문화).

요한 코트프리드 헤르더의 저작들은 문화와 그 근본적 의미의 두 번째의 가장 중요한 변화를 잘 열거하고 있다. 헤르더는 "문화"라는 말을 복수로 사용한다. "그는 '지구의 모든 부분 에서' (자신들은 그것을 누리지 못하였으나) 아주 뛰어난 유럽 문화에 의해 그 후손들이 행복하게 되는 이상한 영예를 위해 죽어간 사람들의 주장으로 보편적 문명으로서의 문화라는 유럽중심주의에 반대하였다." 문화 개념의 이런 의식적 다원화는 문화 개념의 현대적 범례 (modern paradigm)에 도전하는 것이다. 맥락적, 참으로 다양한-맥락적(poly-contextual) 사 유가 나타난 것이다. 이제 문화 일반에 대한 추상적 이론화와 구체적 문화를 다루는 것이 구별되었다. "문화"라는 용어로 잠재적인 규범과 가치가 전달되는 것이 분명하게 되었고, 이 제 그것이 의문시 된 것이다. 그래서 이제는 이전에 "이상하고, 야만적"이라고 불려졌던 사람들의 문화에 대한 큰 관심과 열심히 일어났고, 각 학문 분과에서 그 관심을 키워가고 있 다. 그리고 자신들의 문화에 대한 비판[문화 비평, Kulturkritik]이 기본적인 주제가 되었다. 또한 자신들의 문화와 다른 문화들이 역사 가운데서 어떻게 변형되고 변화해 갔는가 하는 것이 계속되는 연구의 확장되는 분야가 되었다. 심지어 한 민족 안에 하나의 문화가 있다고 할 수 있는지, 아니면 한 민족 안에서도 문화를 다원적으로 보아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이 제기되는 것이다. 20세기는 한 문화 안에서의 급진적 차별화에 공정하기 위해서 "하-위 문 화"(sub-culture) 또는 "다문화적(多文化的, multicultural)이라는 용어들을 가지고 실험하였다. 사회 체제(社會體制, social systems)의 분화(分化, differentiation)와 종교, 계급, 언어, 인종적 배경의 차이 등이 "문화"라는 용어의 분화와 구체화를 가증(加增)시켰다. 그리하여 오늘날에는 경제 문화, 정치 문화, 개신교 문화, 상류 계층의 문화, 스페인어를 쓰는 이들의 문화, 도시 문화 등의 말들이 나타나게 되었다.

이런 전염병 같은 다원화는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고, 이제 "문화"는 "삶의 방식"(way of life)과 동의어가 되었다. 이에 반해서 "문화"라는 용어는 아직도 사회에 대해 "상상하는 규 범적인 방식"이라는 의미로 사용되기도 한다. 문제는 어떤 근거에서 그렇게 말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19세기의 낭만주의자들은 예술이 문화-지도적이고 문화를 형성시키는 힘을 지니고 있다고 제안하였다. 그러나 그 희망, 즉 예술이 (인간적 사랑과 함께) 현대 사회의 주도적 특성에 저항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 그들이 "노동과 착취의 경제적 필연성에 반하고 국가의 규제에 반하며, 기술로 향하는 충동을 지닌 연구에 반할 수 있다"는 그 희망은 실패였다는 것이 드러났다.

50년대 말과 60년대에는 사회 과학과 문화 과학에서 문화에 대하여 이론적으로 정초된 공통된 개념을 얻을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한 집중된 논의가 제기되었다. 이 논의 이후에는 문화 에 대한 모든 이론들과 정의들이 그 주제에 대한 일종의 무력함을 공유하고 있는 듯하다. 이 무력함은 문화가 참으로 무엇인지를 요약하는 공식을 제시해 보려는 성향에서 잘 나타나 고 있다. 이와 관련해서 우리는 인간 행동의 상징적 토대로부터 가장 중요한 인간의 작품들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목록을 열거할 수 있다. 그리하여 한 문장 안에서 가치들(values), 상 징들(symbols), 의식들(rituals), 그리고 제도들(institutions)이 언급되거나, "공동체의 영적 속성들 전체"(the sum of the spiritual properties of a community)가 해독되는 것이다. 테 리 이글톤(Terry Eagleton)은 간명하게 이렇게 요약하고 있다: "문화라는 복잡한 개념은 전 후 영국의 가장 뛰어난 문화 이론가인 레이몬드 윌리엄스(Raymond Williams)가 다양한 때 에 다음과 같은 것을 의미한다고 정의한 사실에서 가장 극적으로 드러난다: 온전함의 기준(a standard of perfection) 정신의 습관(a habit of mind) 예술(the arts) 일반적 지적 발달(general intellectual development) 생활 방식 전체(a whole way of life) 의미 체제(a signifying system) 감정의 구조(a structure of feeling) 삶의 방식에서의 각 요소들의 관계(the interrelations of elements in a way of life) 그리고 경제적 생산으로부터 가정, 그리고 정치 제도들에 이르는 모든 것들."

그러나 문화에 대한 대부분의 정의들과 이론들은 문화가 기억들과 기대들을 통한 사람들의 의사 소통을 돕는다는 사실에 명시적으로나 함축적으로 동의하는 듯하다. 문화에 힘입 어서 우리는 우리들의 기억들과 기대들을 연관시키고, 분리시키며, 공유하고 구별하는 놀라운 능력을 발전시킨다. 우리는 우리들의 기억들과 상상에서 다른 이들이 기억하고 예상하고 기대하는 바를 예기하고, 재생시키며, 재구성하는 것이다. 기억과 상상의 영역에서 움직임으로 우리는 우리의 감정, 사상, 그리고 실천에 강력하게 동조(同調)할 수 있다. 이 때문에 우 리는 항상 서로에게 말하거나, 서로를 보거나 서로를 만져 보지 않고서도 있을 수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우리는 이따끔씩만 시사적(示唆的)인 착륙을 하고 대부분은 물리적 실재와 구체적인 면대면(面對面)의 접촉 이상으로 비행하면서도 서로 의사 소통을 할 수 있다. 어떤 사회학자가 "사회의 뇌"(the brain of the society)라고 부른 "문화"라는 복합적인 실체가 이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우리 문화의 특정한 힘의 한 부분은, 비록 그것이 상당히 다른 가치들과 덕들을 품고 있을 지라도, 그것이 굉장한 양의 분명한 공통적 기억들과 기대들을 제공한다는 데에 있다. 그 래서 우리가 사실상 정확히 같은 가치관과 덕에 대한 이해를 가지고 있지 않아도 다른 이들 의 처지를 잘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가능성은 후기 현대의 다원주의적 사회와 문화 가운데서 상당히 높여지고 개발된 것이다. 사회학자들이 말하는 것과 같이, 다른 "사회 체제"들은 서로 다른 상징 체계들과 합리성을 가지고 작용하는 것이다. 즉, 법, 정치, 시장, 과 학, 교육, 예술, 종교들은 하나의 공통된 규범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이 대부분의 사회 체계들 또는 영역들(spheres)은 또 그 자체로도 상당히 분화되어 있다. 예를 들어 서, 과학들과 인문학들, 분화된 시장 체제들, 고도로 분화된 매체(media)와 정보의 세계, 그리고 다양한 기독교회들을 볼 때 이것이 잘 드러난다. 우리는 하나의 위계질서를 가지지 않 은, 오히려 다위계적 구조(多位階的 構造, a multicultural texture)를 지닌 복잡한 세계안에서 사는 것이다.

이 복잡한 문화를 전제로 할 때 "문화 신학"의 과제는 무엇일까? 이 과제에 개혁 신학은 어떤 기여를 할 수 있을까?

2. 개혁신학의 주제와 과제의 하나로서의 "문화" Culture as a Topic and a Task of Reformed Theology

문화가 기억들과 기대들을 통한 사람들의 의사 소통에 도움이 된다면, 문화는 사람에게는 필수불가결(必修不可缺)한 것이 아닐 수 없다. 문화는 도덕들이나 상식과 같이 자기 부과적 이고(self-imposing) 반드시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문화 없이는 살 수 없다. 그러나 또한 문화는 그저 중립적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문화는 선하고 악한 규범 등과 가 치들에 의해 형성된 것이고, 따라서 선하고 악한 규범과 가치를 매개하고 전달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구체적인 문화에 대한 솔직한 진단과 문화에 대한 망상에 사로잡힌 것이 아닌 비판적 관점을 가지는 것은 문화와 관련하려는 모든 신학에게는 필수적인 일이다. 우리는 그런 신학을 "비판적 토착화 신학"(a critical contextual theology)라고 명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비판적 토착화 신학은 전세계의 30명 이상 되는 개혁신학자들을 연합시켜 1998년에 하이델베르크에 모여서 "개혁 신학: 그 정체성과 교회일치성"이란 주제로 학술회 의를 하게끔 한 바 있다. 기본적 기독교 신념에서뿐만 아니라, 토착화에 대한 상당한 민감 성, 그리고 우리가 다원화된 정황과 급격한 문화적 변화 한 가운데서 신학적 방향 정향 (orientation)을 얻어야만 한다는 이해에 있어서 강한 공동성(a strong communality)이 존재 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발전 과정에서 나타나고 있는 주요한 요소들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현재적 범례와 정신으로부터 현대-이후적 범례와 정신으로의 전이; -민족 국가의 위기: -시장, 매체, 그리고 기술의 굉장한 힘과 문화적, 사회적 다원성을 파괴할 위협 -문화적, 정경적 기억의 약화 -공통적 정향의 계속적인 위기 -이 지구에서 일어나고 있는 대량 불의와 가난과 생태학적 파괴 -상대주의, 냉소주의, 그리고 무관심의 분위기가 주는 위협 -지도력과 안내를 제공할 수 없는 신학들과 교회들에 대한 불만.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적, 지역적 상황에 대해 비판적으로 토착화하려는 의지, 그리고 우리가 살고 있는 구체적 문화와 관련해서 이 의식을 잘 동조시키려는 의지는 문화 현상과 관련 된 신학적 과제의 한 차원일 뿐이다. 문화의 편재성과 다면서, 그리고 그것이 가져오는 매혹 은 많은 개혁주의 신학들에서 강하게 발전되어 왔던 우상 파괴적인 과제를 요청한다. 문화 일반과 어떤 특정한 문화가 우상이 되고, 그것이 유사-종교적 분위기를 얻을 수 있은 위협 은 심각하게 다루어져야만 한다. 테리 이글톤(Terry Eagleton)은 이렇게 말한다: "만일 종교가 제의(祭儀, cultus), 감각적 상징, 사회적 연합, 집단적 동일성, 실천적 도덕성과 영적 관 념론의 연합, 지성인들과 민중 사이의 유대를 제공한다면, 문화도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이 다." 그런데 문화는 "한탄스러운 대체물[代案]"만을 제공할 뿐이다. 이글톤의 논의는 "문화가 실천적인 것이 되어 가면 갈수록, 그것은 조화적[調整的] 역할을 점점 더 잘못하게 되고, 문화가 조화적이게 되면 될수록, 문화는 비효과적이게 되어 간다"는 것이다.

기독교 신학은 그런 실용적 논의 이상의 것으로 나아가야만 한다. 비판적으로만 아니라, 적극적, 건설적으로 말이다. 이글턴(Eagleton)이 말하는 종교의 "조화적"[調整的] 역할"이 무엇 인지 좀더 분명히 제시되어야만 한다. 기독교는 문화에 예술이 제공할 수 없는 형태와 방식 으로 무엇을 제공할 수 있는가? 이 문제에 대한 개혁 신학의 대답은 하나님의 법이 인간 문 화에 그런 형태를 제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성경에 강하게 토대를 두고 있는, 특히 구약의 전승에도 관심을 가지고, 실재론적이고 공적 신학(a realistic and public theology)에 강한 관심을 지닌 개혁 신학은 다른 신학들처럼 율법을 희화(戱畵)하거나 심지어 악마적인 것으 로 만드는 일을 거의 하지 않았다. 다른 신학들이 "율법"과 "죄의 세력 아래 있는 율법"을 혼동하고 율법을 그저 "명령"(imperative)이나 "고소"(accusation)으로만 이해하고, 또 율법 을 십계명 정도로만 이해한데 비해서, 개혁신학은 율법에 대해 폭넓은 견해를 제공하였다. 우리가 기독교적 유산과 기독교적 가치가 이 지구상의 많은 문화들을 형성하는데 어떤 역할을 하는지를 이해하기 원한다면, 우리는 율법에 대한 아주 예민하고도 폭 넓은 견해를 필요로 하는 것이다.

성경적 전통들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법을 적어도 다섯 가지 차원에서 보도록 한다. 첫째로는 "토라", 즉 하나님과의 언약적 관계 안에서의 삶을 위한 복합적 안내자로 보도록 한 다. 율법은 개인과 공동체의 근본적 기억들과 기대들을 형성하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의 역사와 우리 문화에 형태를 부여한다. 왜냐하면 율법은 우리의 집단적 문화적 기억들을 성경 적 전승들에 의해서 형성된 정경적 기억 안에 근거하도록 하기 때문이다.

둘째로, 하나님의 법은 그 나름의 방식으로 이 세상에 있는 유대-기독교적 문화들과 도덕들의 중추가 아니라면, 그런 중추를 제공하는 세 가지 규범적 형태들(normative forms)을 연 관시킨다. 신명기와 제사장 문서의 율법 조문들에 나타나고 있는 언약서(the book of covenant)에서, 율법은 정의(正義)를 위한 규범적 추구를 자비(慈悲)를 위한 규범적 추구, 즉 가난한 자들과 연약한 자들을 위한 배려와 연관시킨다. 그리고 이 정의를 위한 추구와 자비를 위한 추구 모두를 제의(祭儀) 가운데서의 하나님과의 만남 가운데 있는 진리를 향 한 추구와 연관시킨다. 하나님의 율법에서는 규범적 형태들의 이런 연관이 아주 강력하다. 정의와 자비의 연관은 모든 법적, 도덕적 발달의 규범을 제공한다. 그것은 율법이 몇몇 특권 자들의 보호막 구실을 하지 못하도록 하며, 우리로 하여금 사회적 배려의 형태를 확대하고 제도화하도록 하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의 진리 추구는 우리의 법적 도덕적 성취를 끊임 없이 비판하고 개정하도록 하며, 사람들의 마음과 정신 깊은 곳에 있는 정의와 자비의 큰 가치를 확언하는 정신을 북돋우게 한다.

셋째로, 십게명에 있는 하나님의 법은 개인들과 공동체의 정신(ethos)을 제공하는데, 이는 하나님께 대한 언약적 관계와 선한 이웃이 되는 도덕을 연관시키는 정신이다.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이끌어내신 하나님, 우리를 노예 됨에서 해방시키신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지켜야 할 자유를 주시며, 이 자유를 하나님 앞에서 그리고 공동체 안에서 보존하도록 하신다.

넷째로, 특히 지혜 전승에서 하나님의 법은 우리를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에로 인도하는 원 천과 인도자로 우리를 만난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지혜와 선한 법과 삶의 리듬에 대한 통찰에로 인도하며, 이는 또한 하나님 말씀의 빛에서 이 법과 리듬을 의문시하고 더 낫게 만들며, 하나님의 영의 인도하심을 찾게끔 하는 것이다.

다섯째로, 이 끊임없는 갱신과 이 구원적 인도하심(saving guidance)은 아주 필요한 것이니, 선한 법은 그 모든 차원과 놀라운 내적 역동성에도 불구하고 죄의 세력 아래 올 수 있고 이 죄의 세력에 의해서 전적으로 부패될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율법과 복음, 율법과 영의 유명한 구별이 아주 핵심적인 것으로 나타난다. 우리들의 문화, 우리들의 도덕, 심지어 우리 들의 종교에 대한 비판적 의식이 필수적인 것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밝혀 주는 바와 같 이, 이 모든 문화, 도덕, 종교라는 세력들은 죄 아래로 타락할 수 있는 것이다. 종교와 정치 의 이름으로, 유대법과 로마법이라는 두 가지 법의 이름으로,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의 여론의 이름으로, 친구들과 원수들, 통치하는 이들과 통치 받는 자들에 의해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 에 못 박히셨다. 종교 개혁에 있어서 매우 필수적인 이 가장 중요한 신학적 통찰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법을 무시하거나 멸시하도록 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법에 대한 분명한 의식이 없이는 성경 전승 가운데 깊이 뿌리 내리고 있는, 우리들의 문화의 깊이 가운데서 이것들을 형성하는 세력들을 보지 못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개혁 신학은, 하나님의 법에 대한 균형 잡혀 있고 바른 견해를 가지고 있으므로 그 어떤 다 른 신학들보다도 성경의 전승들 가운데 나타나고 있는 문화를 형성시키며 문화를 변혁시키 는 세력들에 대한 진단을 잘 할 수 있다. 이 전승들을 우리들의 문화와 우리들의 교회 안에서 살아 있게 만드는 놀라운 과제는, 이제 마지막으로 우리가 세상의 대부분의 문화들이 지 난 수십 년간 경험하고 있는 가장 극적인 변화에 초점을 맞추어 볼 때 더 분명하게 될 것이다.

3. 매체 문화에서의 문화적 정경적 기억의 상실 The Loss of Cultural and Canonic Memory in a Media-Culture

지난 수십 년 동안에 걸쳐서 세상에 대해 아주 급진적으로 다른 태도가 형성되었다. 세상에 대한 이 새로운 태도는 전자 매체의 확산, 특히 텔레비젼과 이제는 인터텟의 급진적이고 전 세계적 확산과 더불어 일어났다. 텔레비젼과 인터넷의 전세계적 확산과 함께 문화적 기억 (cultural memory), 즉 고전의 위계 질서, 정경적인 것, 역사적 기억이 당대의 위기에 방향 제시를 해 줄 수 있다는 것 등에 대한 근본적, 이중적 평가절하 현상이 나타났다. 문화적 기 억의 첫째 평가절하는 새로운 매체가 끊임없이 우리의 주목을 끄는 홍수 같은 자료의 인플 레이션을 가져오게 한 사실과 연관된다. 오늘날의 세계와 가까운 장래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아주 굉장한 집중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과정 가운데서 과거를 파악하고(보존하며) 함 께 과거를 살아오게 하는 일은 급진적으로 감소되었다. 과거를 기억하고 재구성하며, 전통적 본문을 암송하고 형성적 연속성 위에서 작업하는 개인적, 공동적 행위는 이제 다른 형태의 "세계 형성"과 "자아 형성"으로 대치되었다. "세상을 비시간화하고, 공간화한다는" 공식이 이 과정을 파악하기 위한 시도 가운데서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현재와 가까운 장래에 대한 집중적이고 집단적인 주목이 "문화적 기억"(cultural memory)을 형성과 개발을 억압하고 있다. 현재와 가까운 장래에 대한 집중은 계속적인 자 극과 흥분과 함께 하는 것이다. 이 자극은 공유된 기억과 문화적 기억의 억압은 인간의 삶 을 전반적으로 "냉각시키는"(cooling off) 하는 데로 인도한다는 사실을 드러내 준다. 하이델 베르크 대학교의 이집트 학자인 쟌 아스만(Jan Assmann)은 끌로드 레뷔-스트로스(Calude L vi-Strauss)의 통찰을 더 발전시키면서, "뜨거운 기억과 차가운 기억"(hot and cold memory)를 구별하고 있다. "차가운 기억"이란 과거 사건들로부터 독특한 것과 비상(非常, extra-ordinary)한 것들을 제거한 기억을 말한다. 과거 사건들로부터 역사를 형성시키는 힘 을 제거한 기억, 그 사건들로부터 영향을 받고 그 사건들에 영향을 미치는 사회에서 역사를 형성시키는 힘을 제거한 기억이다. "차가운 기억"의 관점에서 본 역사는 더 이상 "우리가 그 안에서 사는" 역사가 아니다. 그것은 더 이상 계속적인 형성을 위해 적응될 수 있는 공 유된 경험의 영역이 아니다. 매체들은(the media) 이런 "차가운" 기억들에 대한 자극으로 가 득차 있다. 왜냐 하면 매체들은 계속해서 과거 사건들을 제공하고, 상관없는 일련의 사건들 에 주목하도록 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제시되는 기억이 너무 많이 있고, 오늘과 가까운 장래 에만 집중하는 것은 기억의 계속적인 냉각화, 특히 "우리가 그 안에서 사는" 역사에서 계속 적으로 방출시키는 일에 책임이 있다.

문화적 기억에 대한 두 번째 평가절하는 첫째 평가절하를 강화하고 상승시키는 것이면서, 동시에 두 번째 문제도 첫째 문제에 의해 강화되기도 하는 것이다. 그 두 번째 문제는 매체 들이 세상을 제시하는 것이 순진하고 단순한 "역사의 통일성"과 순진한고 단순한 "생활 세계의 통일성"을 급진적으로 의문시하게 한다는 점이다. 이전에는 이런 문화적으로 "자 명한 가정들을" 의문시하는 것이 과학과 예술의 특권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소위 상식도 그런 역할을 하게 되었다. 다름(otherness), 삶의 양식의 이국성, 전체적 개념의 낯섦, 세상 의 다른 지역의 전통에 대한 호소의 타자성 등이 날마다 (각종 매체들을 통해서) 분명히 제 시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제는 놀라운 것이 항상 있는 일이 되었다. 이제 우리는 이국적인 것에 대한 경험, 그리고 우리가 살지 않는 다른 생활 세계와 아주 친숙하게 되었다. 이국적 전통들과 생활 세계에서 나오던 특정한 가치와 잦은 충동에 대한 지식이 우리 자신의 생활 세계를 풍성하게 하기만 할 뿐 아니라, 우리 자신의 생활 세계에 대한 거리감 있는 태도와 깨어진 태도를 형성하게도 하는 것이다. 이런 효과들은 대구모의 대중 여행에 의해 더 고조 (高潮)된다.

매체들이 우리에게 이국적 생활 세계와 전통들을 친숙하게 하는 방식은 전체로서의 세계에 대한 우리의 관계만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생활 세계의 다름 과 그 각각의 문화 속에서 전통과 연관하는 방식의 차이에 민감하게끔 한다. 친숙해 보이는 것들 가운데서는 이국적인 것이 눈에 잘 뜨인다. 그런데 "이국적인 사람들"에 대한 거리가 사라질 수 있는 것처럼, 어떤 친척들, 이웃들, 동족 중의 어떤 사람들과의 거리가 더 멀어질 수 있는 것이다. 세상에 대한 이렇게 달라지고 복잡해진 관점은 새로운 정향을 요구한다. 이 제는 사람들을 인도하는 데 있어서 자기들의 전통이나 자신들의 "고전"만이 특권을 가지고 독점하도록 권면할 수 없게 되었다. 오늘의 상황은 불확실성, 정체성과의 실험, 조심해서 판 단하고야 헌신하는 일, 모든 형태의 "문화적 유산"에 대한 극도로 강한 집착을 버리는 것이 요청된다. 이런 상황 속에서 개발되는 기억이란 될 수 있는 대로 많이 '냉각된' 기억인 것 이다.

이런 태도의 변화는 다른 자명하게 보이는 많은 문화적 가정들에도 영향을 미친다.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은 또 종교에 깊은 영향을 미친다. 노인과 젊은이들 사이의 관계에 대한 문화 적 평가가 바뀌고 있다. 급진적으로 변하는 "오늘과 내일"에 몰두하는 이 복잡한 세계는 기본적으로 더 이상 "삶의 경험"과 성숙함에서 오는 침착하고 건전한 지혜를 요구하지 않는 다. 오히려 사물들을 재빨리 취하는 능력을 요구하며, 변화와 적응이 가능한 지성을 요구하 는 것이다. "옛날"은 전문가들과 박물관에게 양도해 버리고, 진짜 세상은 젊은이들에게 속한 세상이 되어 버렸다!

따라서 교육적 형성(educational formation)에 대한 이해와 개념도 변하고 있다. 이제 교육 적 이상은 질서 있는 지식의 획득과 개발(the acquisition and cultivation of ordered knowledge)이라는 개념으로부터 상황에 적절하고 필요한 기능을 익숙하게 선별할 수 있는 것으로 전환하고 있다. 인터넷에 접속할 수 있는 노트북 컴퓨터는 자기 자신만의 장 서를 소장할 필요를 없도록, 급기야는 도서관도 필요 없도록 하는 듯하다. 유치원과 학교에서 아이들에게 무엇을 암기하도록 요구하는 것은, 최소한 독일에서는 아주 부담스럽고 거추 장스러운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사실 이는 신체적으로 장애 있는 이들의 수준에까지 이르렀다. 집중의 유연성이 (무엇인가를 암기하려는 것에 의해서) 방해받아서는 안 된다는 것 이다.

전자 매체의 전세계적인 확산은 이와 같이 세상에 대한 이해와 실재에 대한 지각을 바꾸고 있다. 이런 변화는 또한 비행기와 사람들의 운송이 전세계적으로 집중되고 활발해 지는 것 과 연관되어 있다. 이 세상이 포장된 도로와 자동차를 사용하는 것으로 바뀌고, 행상 교통과 철도 수송의 집중화, 그리고 특히 항공 교통의 폭발적 방전은 전자 매체의 발달과 병행하는 것이다. 이 두 가지 발달은 서로가 서로를 강화시키는 것이다. 그 둘은 모두 경제 발전의 신속화, 강화, 그리고 국제화를 낳는다. 이처럼 경제와 매체는 세상과 실재를 형성하는 일에서 주도적인 요인들로 나타나고 있다.

전자 전달 매체와 운송 체계의 국제적 확산은 새로운 소비 기술의 승리주의적 발달과 함께 가는 것이다. 새로운 소비 기술들은 전자적 전달의 흐름을 강화시키고, 동시에 새로운 경제 적 재화에 대한 필요를 증진시킨다. 그리고 경제적 전달이 강화되면, 전자적 전달도 증진되고, 이것은 또 다시 새로운 기술들과 경제적 재화에 대한 필요를 증진시킨다. 그렇게 되면, 정치 체제, 교육 체제, 그리고 가정도 이에 맞게 적응해야 한다. 그것들이 법과 종교와 함께 시장의 역동성에 반하게 되면, 그것들은 아주 희망 없는 수세에 몰리게 된다. 소비주의, 양 부모 모두가 일하게 되는 일이 상례화 되는 일, 이에 따른 가정, 하교 제도, 의료 제도의 스트레스 강화 -- 이 모든 발전은 결국 핵가족의 파괴와 교육 체제의 기능화를 낳게 된다는 연속적인 탄식이 따라 나오게 되는 것이다. 핵가족의 종교적 안정화를 위한, 그리고 고전적 교육 체제에 지지해 왔던 종교와 교회도 오직 이 발달을 따라 잡는 일만을 할뿐이다. 경제- 기술 -매체의 순환 체제의 강화와 함께 언제나 한 발 늦은 종교와 교회들은 형성적 역할을 할 수 있는 영향력과 가능성을 상실하게 된다.

기술 - 경제 - 매체의 국제적 순환 체계는 개인들의 세계관과 그들의 관심만을 변화시킬 뿐만 아니라, 그들의 기억과 기대와 전통에 대한 평가와 시대와 교육까지를 변화시킨다. 이 국제적 순환 체제는 또한 개인들의 고착된 정향과 민족 국가와 정치를 향한 사회 체제의 정향도 바꾼다. 종교와 교회, 정치와 사회는 역사적 정향과 "뜨거운" 기억(hot memory)의 굉 장한 약화를 경험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교회와 국가" 또는 "교회와 사회"와 같은 어구 들로 오랫동안 발전되어 온 이원론적 세계관도 잃게 되었다.

이런 상황 가운데서 개혁신학이 매체-문화(the media-culture)의 도전과 이와 연관된 문화 적 기억과 정경적 기억의 계속적인 약화를 직면할 수 있는 준비를 잘 갖추고 있다고 강한 말로 결론 내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독일과 미국에서의 나의 경험으로부터 나는 이에 대해서 힘을 북돋아주는 관점에서 말하기 어려움을 느낀다. 그러나 여러분들께서, 우리가 언급한 어려움과 위험에도 불구하고, 문화라는 주제를 신학적 주제의 하나로 정하신 것 자체가 옳은 방향에로 나아가는 한 걸음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개혁신학은, 그 자체를 "공적 신학"(public theology)라고 부르든지 아니든지 간에, 항상 우리의 삶의 법적, 정치적 차원에 관심을 가져 왔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증언에 대한 장애물을 제거하기 원한다면,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서 우리에게 주신 보화를 존중하기를 원한다면, 우리 는 반드시 폭넓은 사회적, 문화적 분석을 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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