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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12/26 (08:19) from 62.104.211.64' of 62.104.211.64' Article Number : 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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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에서의 "프로테스탄트 원리"와 현대성의 위기


Welker의 문화에서의 개신교 원리와 현대성의 위기

[ 한국 복음주의신학회 포럼 2000. 9. 30. ]

문화에서의 "프로테스탄트 원리"와 현대성의 위기

발제자: 마이클 벨커(Prof. Dr. Michael Welker)
통역자: 이승구(Dr. Seung-Goo Lee)

서문

먼저 제가 이렇게 한국에 올 수 있도록, 그리고 한국 복음주의 신학회 회원들 앞에서 "문화 에서의 프로테스탄트 원리와 현대성의 위기"에 대해서 발제할 수 있도록 초청해 주신 것에 대해 감사를 드리고 싶다. 이 초청에 대해서 여러분들과 특히 김영한 교수님, 그리고 그의 동료들에게 감사를 표한다. 이것이 나에게는 첫 한국 방문이지만, 나는 지난 4 반세기 동안 한국과 한국 교회, 한국의 신학적, 영적 발전과 어떤 연관성을 지니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왜냐 하면 나는 지난 25년 동안 독일의 튜빙겐 대학교, 뮨스터 대학교, 하이델베르크 대학 교, 그리고 미국의 프린스톤 신학교에서 한국인 박사 과정 학생들과 함께 공부하고, 그들을 지도해 왔기 때문이다. 나는 나에게서 지도 받은 한국인 박사 과정 학생들이 보여준 성실함 과 신중함, 기독교 신학과 기독교 교회에 대한 큰 헌신을 높이 평가한다. 다른 나라들과는 달리, 독일의 신학부는 3대 고전어(古典語)인 히브리어, 희랍어, 라틴어에 대한 지식을 요구 한다. 대부분의 한국인 박사 과정 학생들은 독일어 뿐만 아니라, 이 세 고전어 시험도 통과 해야만 한다. 그리고 박사 과정 세미나에서는 영어로 쓰여진 문헌들도 부가적으로 제시되므 로, 결국 한국 학생들에게는 6개 언어에 대한 습득과 사용이 요구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자연 언어[自然語]뿐만 아니라, 많은 신학적, 철학적, 사회적 사상가들 이 사용하는 이론적 언어도 다루어야 하는데, 이것이 가장 큰 요구가 된다고 할 수 있다. 그 러나 한국인 박사 과정 학생들은 큰 인내와 굉장한 열심을 보면서, 공부가 끝난 다음에 여러분 나라에서의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한국 교회와 신학부에서 봉사하기 위해서 지식의 대양과 바다에 깊이 들어갔다.

나와 함께 공부한 박사 과정 학생들과의 여러 접촉에서 나는 책이나 학술지(學術 誌)에서는 얻을 수 없는 독특한 형태로 이 나라의 교회와 공동체에 대해서 많이 배울 수 있 었다. 내가 듣고 배운 바를 나는 사도 바울이 로마서 1장 8절에서 하고 있는 말로 요약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너희 모든 사람을 인하여 내 하나님 께 감사함은 너희 믿음이 온 세상에 전파됨이로다"(롬 1:8). 나는 여러 분들의 강한 신앙과 여러분들의 교회의 힘과 성장, 영적인 열심과 생동성, 선교적인 힘과 추진력, 세상의 다른 나라들, 특히 세속회된 환경 가운데 살고 있은 덜 활기 있고, 생동감이 덜한 교회들의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희망을 주는 하나님 앞에서의 여러 분들의 삶에 대해서 하나님께 감사한 다. 여러 분들의 삶과 증언과 사역은 한국 교회의 삶에 대해서 뿐만이 아니라, 온 세상의 교 회들에게도 굉장히 중요한 것이다.

이제 잠시 에큐메니칼 세계 가운데서의 독일 교회와 독일 신학의 역할과 과제를 언급하고자 한다. 만일 우리 독일이 높은 수준, 아니 최고 수준의 좋은 신학 교육 제도를 가지 고 있지 않다면, 여러 분들이 박사 과정 학생들을 독일로 유학 보내지는 않았을 것이다. 독일이 낳은 몇몇 종교 개혁자들과 함께, 19세기와 20세기의 세계적으로 주도적인 신학자들 과 철학자들로 독일은 온 세상 교회에 큰 기여를 했다고 할 수 있다. 더 나아가서, 독일의 통일 이후에, 한국같이 아직도 분단된 나라들에게 시사적(示唆的)일 좀 이상하고 좀 부담을 주는 상황이 독일 교회에 나타났다. 이전에 공산 치하에 있던 이전 동독에는 인구의 10 퍼센트도 안 되는 이들만이 기독교회에 속해 있다. 이 가장 세속화된 영역이 또한 문화적으로 도 사회적으로도 가장 어려운 지역이라는 것은 매우 슬픈 사실이다. 그러나 통일 이후 이전에 공산 치하에 있던 가장 세속화된 영역을 포함해서도 독일 국민의 거의 80 퍼센트가 기독 교회에 속해 있다. 그들은 교회가 존재하기를 원하며, 소위 교회세(敎會稅)를 내고, 그 대부분은 교회가 독일에서 행사하고 있는 큰 사회 봉사적 영향(diakonical impact)에 대해 매우 감사하고 있다. 그들 중 대부분은 자녀들에게 세례를 베풀어주기를 원하며, 어떤 형태건 종 교적 교육을 받는 것을 좋게 생각한다.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은 때때로, 특히 성탄 전야와 세 례, 견신례, 혼인식 등 특별한 때에 교회에 참석한다. 그리고 대부분은 목사가 집례하는 장례식을 원한다.

이런 사실들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교회 안에서의 밀도 깊은 종교적 교 제를 추구하지는 않는다. 그들 대부분은 그들의 신앙에 대해서 말하거나 종교성에 대해서 말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있어서 종교란 일종의 금기(taboo)이다. 천주교 신학자 칼 라너는 "익명의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을 만들어 낸 바 있다. 그는 천주교 의 시각에서 다른 종교들과 세속 세계에 속해 있는 사람들도 그리스도인들의 근본적 신념들을 지니고 있다고 말하기를 원했고, 그래서 그들을 "익명의 그리스도인들"이라고 불렀다. 물 론 나는 이 견해에 대해서 매우 회의적이다. 그러나 우리 독일 교회 안에는 좀 다른 의미에 서이기는 하지만 '익명의 그리스도인들'이 상당히 많이 있다고 할 수 있다. 많은 수의 교회 원들, 즉 이전에 교회에 속해 있었고 지금도 교회세(敎會稅)를 내고 있는 이들이 이제는 기독교 신앙의 내용에 대해서 별로 알지 못하고, 신앙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 신경 쓰지 않 으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을 단순히 세속주의의 잘못된 정신이나, 교회 지도자들과 종교 교사들의 무능력이나,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 그리고 그 내용에 대해서 신경 쓰지 않으려고 하는 불경건한 사람들의 게으름과 심지어 죄악성과 악함 때문만이라고 해서는 안될 것이다. 우리 독일 사회와 문화 가운데서 우리가 목도(目睹)하고 있는 익명의 그리스도인에로의 정 향은 신학과 교회의 가르침의 오랜 발전 가운데서 조건화된 것이라고 나는 논의하고 싶다. 그것은 현대성의 정신의 압력에 직면해서 최선을 다하려고 노력한 그 발전의 결과라는 말이 다.

김영한 교수님께서는 앞으로 몇 일 동안 다양한 주제에 대한 5 가지 강의를 하도록 초청해 주셨다. 나는 이 강의들 중 하나를 우리 독일의 이 독특한 상황과 문제의 집적(集積 을 다루어 보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독일에서는 학문적 신학이 하나님에 대해 서 생각하고, 하나님과 사람들의 관계에 대해서 생각하고, 바른 신앙 개념에 대해서 생각하 는데 최선을 다해 왔다. 또한 기성의 많은 점에서 잘 보호된 교회는 현대의 합리성과 정신 으로 무장된 교육받은 사람들에게 말하는 데 나름대로 최선의 노력을 하여 왔다. 그리고 많 은 신실하고 똑똑한 지도자들과 교사들은 독일 교회와 문화를 주도하는 신앙의 형태를 개발 하는 데 최선을 다했다. 이 신앙이, 한편으로는, 대부분의 사람들을 익명의 그리스도인이 되 게 하였고, 또 한편으로는 이 신앙이 독일 교회의 이상하고도 조용한 세속화의 원인이 되었 다. 이 발제에서 나는 그 원인이 된 신앙이 어떤 것인지를 여러분께 제시해 보려고 한다. 이 신앙이 왜 강력하게 되었는지, 교회들이 어떤 면에서 이런 신앙의 유익을 얻었는지, 왜 많은 동시대인들과 심지어 신학을 하는 나의 동료들까지도 이런 종류의 신앙을 옹호하려고 하는 지를 밝혀 보려고 한다. 동시에 나는 서구의 산업 사회와 정보 사회의 다른 교회들에도 폭 넓게 퍼진 이런 형태의 신앙 때문에 우리가 어떤 어려움을 격고 있는 지도 말해 보고자 한 다.

여러분들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면서 나는 이 함정, 이런 종교적 병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방도를 묘사해 보려고 한다. 여러분들도 세속화의 물결에 타격을 입을 수 있기에 이것이 여러분들에게도 어느 정도 관심의 대상이 될 수 있다고 믿는다. 이 세속화의 물결은 독일이 통일된 후에 훨씬 더 강화되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도 장래에 비슷한 경험을 하게 되리라고 생각한다. 물론 이 초기적 진단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은 이로부터 벗어 나는 길에 대한 공동의 추구이고, 그것이 앞으로 몇 일 동안 제가 여러 번의 강의를 통해서 말하려 는 주된 주제가 될 것이다. 무론 이 모든 발제에서 저는 여러분들로부터 배우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그러나 또한 여러분들과 우리의 경험을 나누고, 다원주의, 현대성, 후-현대성 (post-modernity)에 대한 학문적 분석을 하고, 종교 개혁 신앙의 잠재력을 살피며, 이 어려운 그러나 또한 흥미 있는 현재의 상황 가운데서의 개혁 교회와 개혁 신학의 독특한 과제를 생각해 보기를 원한다.

문화에서의 "프로테스탄트 원리"와 현대성의 위기

독일과 서구 사회에서 개신교(protestantism)는 그 자체를 "자유의 종교"(religion of freedom)로 이해하고, 그렇게 제시하기를 애호해 왔다. 현대주의 개신교(modern protestantism)는 이 자유의 종교가 신앙에 뿌리 박혀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현대주의 개신교의 확신에 의하면 신앙에서 각 개인은 하나님과 직접적인 관계를 가지는 것이라고 본다. 각 개인의 하나님에 대한 이 직접적 관계는 각 개인에게 파괴될 수 없는 위엄을 주는 것이 라고 한다. 하나님과의 이런 직접적 관계와 이 위엄에서 모든 인간의 평등의 근거를 이끌어 낸다. 이와 같은 모든 인간의 본질적 평등성에 보편적 이성(universal reason)과 보편적 도덕(universal morals)이 근거한다는 것이다.

바로 이와 같은 것이 현대주의 개신교의 큰 이상이었다. 모든 인간은 자유롭고 평 등하다는 것이다. 그들의 지각과 행동은 공통의 정향에 근거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공통의 정향은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관계, 즉 신앙에 의해서 파악되고 개발되는 관계에 근거하고 있다는 것이다. 현대주의 개신교는 그 자체를 이런 정향의 힘을 아주 명백히 표현하 는 종교로 칭송해 왔다. 사실 (현대주의) 개신교는 현대성의 이런 근본적 가치들을 유지시키 고 발전시키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문화적으로 주도적인 세력이었던 것이다. 무엇이 이런 프로테스탄트 원리의 이 힘과 영광에 대한 신뢰를 깨뜨린 것일까? (이제부터 이 문제를 탐구해 보도록 하겠다 -- 보역).

I. 보편적 통일성을 위한 투쟁과 차별화와 다원화 과정들: 현대성의 내부 갈등과 위기

여러 가지 이유들로 하여 우리는 현대에 와서 자유와 평등이라는 추상적 정신(ethos)의 한 계를 의식하게 되었다. 보편적 인간의 평등이라는 현대주의의 정신 아주 형편없이 무기력한 것이든지, 아니면 거짓으로 가득찬 것이라는 사실에 우리가 직면한 것이다. 이 지구 상에 사는 많은 사람들은 좀더 풍요한 사회가 그들의 동물들을 먹이는 수준 이하에서 살고 있다. 우리 사회들의 많은 긴장과 갈등들, 문화적으로 소수파의 사람들을 받아들이기 어려워하는 많은 문제들, 문화간의 적대감과 인종차별주의 -- 이 모든 경험들은 자유와 평등의 정신이 개신교 사회 내에서조차도 그 작용적 한계에 이르렀음을 보여 주고 있다. 그러나 프로테스 탄트 원리와 그 힘을 의문시하는 것은 이 지구상의 불의하고 불공평한 삶의 조건들만은 아 니다. 우리는 기술적으로, 경제적으로 힘있는 사회들이 다른 사회들과 문화를 굴복시키고 정 복하는 데 이 프로테스탄트 원리를 사용하여 온 여러 가지 예를 알고 있다. 통합 (integration)이라는 현대 자유주의 이상이 유럽과 미국의 문화를 온 세상에 퍼져 나가게 하 는 것이다. 그들이 참으로 보편적 이성과 도덕이라는 참된 신앙을 전파하는지, 아니면 그들 의 문화적 형태를 전파하는지를 비판적으로 묻지도 않고 말이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온 사 회가 문화적으로 지도적인 집단의 사람들을 포함해서 (그들 중의 많은 이들은 자신들이 보 편적 이성과 도덕의 이상을 전파한다고 참으로 확신하고 있던 참으로 경건한 개신교도들이 었다) 사실은 아주 위험하고, 심지어는 치명적인 이데올로기들을 포회하고 지지했던 예를 보아 왔다. 파시즘과 인종차별주의, 그리고 생태학적 야만주의는 그것들의 대표적인 예에 불 과한 것이다.

이것들 보다 사람들의 이목을 덜 끌고 덜 악한 수준에서도 추상적 평등성과 하나의 보편적 이성과 도덕을 믿는 프로테스탄트 원리의 힘은 평가절하 되어 갔다. 사회학자들은 이런 발전 과정을 '사회 체제의 분화'(the differentiation of the societal systems)라고 명명 한 바 있다. 이런 분화 단계의 의미는 무엇인가? 우리는 지금 19 세기 유럽에서 가장 가시 적으로 나타났고, 20 세기에 점차 더 강력해진 발전 과정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정치, 법, 학계, 종교, 교육, 가정, 그리고 매체(媒體, media)가 점점 더 자율적이 되고, 점점 더 자족적(自足的)이게 되어 간 과정이다. 정치, 법, 경제, 과학, 종교, 교육, 매체와 같 은 소위 사회 체제들(societal systems)이 그들 나름의 합리성을 개발하고, 그들 나름의 형 태를 가지며, 그들 나름의 과정을 개발해 간 것이다. 그리고 다른 체제들이 그들의 자율성을 존중하지 않으면, 다른 체제들과 투쟁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하여 법은 정치에 의해 오염 되어서는 안된다고 하며, 과학들은 시장의 관심에 귀를 기울여서는 안되고, 종교는 다른 사회적 세력에 의해 지배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물론, 이것들은 부분적으로만 이루어 질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적어도 각 사회 체제의 자율성이 사회 발전에 있어서 중요한 목표 요 추진력이 되어갔다.

그 결과, 서로 다른 사회 체제들 안에서는 각기 다른 합리성과 다른 도덕이 발전되 어 갔다. 상식은 이런 현상을 주목하고, 상식은 시장에서 어떤 현상이 일어나는 지를 이해 할 수 없고, 계량화된 과학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모르겠다고 인정한다. 상식은 정치나 매체에서의 세력의 역할을 이해하지 못하며, 종교로부터 소외되었다. 한편으로는 하나의 체 제가 사회 전체를 주도하기를 바라는 사람은 더 이상 아무도 없다. 오늘날 우리는 시장이 너무 강력해지고, 너무 주도적이게 될까봐 우려한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 우리는 이런 소위 '사회 체제의 분화' 과정에서 나타나는 세력의 분화와 견제와 균형을 높이 사게 되었다. 이것은 오늘날 하나의 중심의 상실, 하나의 합리성의 상실, 그리고 하나의 도덕성의 상실을 안 타까와하며 애도하는 많은 이들이 없다는 말은 아니다. 그러나 이런 발전 과정에 대해서 매우 편안하고 관용적인 분위기가 일반화되고 있다는 말이다. 사람들은 정치가 정치가들을 위 해서만 가장 중요한 것이라는 것에 쉽게 동의한다. 종교도 신학자들과 목사님들이나, 특히 헌신된 종교적인 사람들에게만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한다. 법은 법률가들에게만 가장 중요 한 것이고, 교육도 교육 체제와 어떤 가정(家庭)들에게만 가장 중요한 것이 된 것이다.

현대 사회는 다체제적 구조(多體制的 構造, multi-systemic structure)의 이 발전에 대항해서 이 구조를 형성하고 재형성하기를 원하는 많은 유인들, 운동들, 집단들과 정당들을 발전시키고 이끌어 내는 것으로 반응하였다. 그래서 우리는 종교를 강화하기를 원하는 집단 들과 운동들과 정당들을 보게 된 것이다. 마찬가지 이유에서 교육을 강화하기 원하는 집단 과 운동과 정당들이 있으며, 또 다른 이들은 시장(市場, market)을 강화하기 원하는 등 이런 운동이 계속되는 것이다. 따라서 정치와 종교를 더 강하게 연관시켜 보려는 정당도 있으며, 정치와 종교를 더 나누어 보려는 정당들도 있은 것이다. 또 시장과 정치의 연관성을 증진시 키려는 압력 집단들도 있고, 정치와 경제를 강하게 연관시키는 것에 저항하는 압력 집단들 도 있다. 우리 사회의 다체제적 구조(多體制的 構造, multi-systemic texture)를 유지시키거 나, 중지시키거나, 재형성하거나, 또는 바꾸기를 원하는 이 모든 운동과 유인들과 집단들, "연합들" 모두의 복합체를 "시민 사회"(civil society)라고 한다. 그러므로 시민 사회란 특 정한 목적을 지닌 다수의 정당들과 운동들과 유인들이다. 그것은 전체 사회를 이루는 데 있 어서 중요하고 빠뜨릴 수 없는 체제들(systems)인 법, 종교, 정치, 교육 등등을 재형성하기 를 원하는 정당들, 운동들, 유인들(initiatives), 그리고 그런 공동체들로 구성된다. 사회 체제 (社會 體制)들(the societal systems)과 시민 사회의 이 복잡한 구조를 사회적 다원주의 (societal pluralism)라고 부른다.

처음 보기에 이 사회적 다원주의는 많은 사람들에게 좀 복잡한 것으로 여겨질 것이다. 그러나 사회적 다원주의는 이 발제문에서 좀 자세하게 설명하려고 하는 바와 같이 분명 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사회적 다원주의는 그와 함께 개혁파 전통이 항상 중시해 온 구조, 즉 세력 구분의 구조(the structure of the division of powers)를 가져온다. 근대 민주 주의의 교부들이라고 할 수 있는 청교도들은 인간의 죄성에 대한 확신 때문에 세력을 분화 시키는 일에 힘써 왔다. 그들은 세력을 분화시키고 상호 통제를 해야만 우리를 죄의 세력에 빠진 데로부터 이끌어 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사회적 다원주의는 이 세력의 분화와 분리를 증가시키고 증진시켰으며, 동시에 이런 세력 분화를 개발하고 도전하며 그것을 증진시키는 다양한 유인들(initiatives)을 개발했다. 그렇다면 현대주의 개신교는 왜 이런 발전 과정을 환 영하고 이를 즐기지 못했는가?

오늘날 우리는 프로테스탄트 원리와 (현대성의 위기 가운데서 개신교를 큰 요인으 로 만든) 보편적 통제에 대한 열망의 문제점을 보기 시작했다. 소위 "자유의 종교"는[개신교 는] 해방과 비판의 다양한 발전에서 제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19 세기와 20 세기에 처음에는 부르조아지의 자유를 위한 투쟁과 후에는 소위 프로레타리아의 자유를 위한 투쟁 에 있어서, 그리고 식민지에서의 투쟁에 있어서, 소위 자유의 종교인 개신교는 민족 국가들 의 제국주의적이고 식민주의적 정치의 편에 섰었다. 이성의 통일성과 보편적 도덕에 사로잡 힌 나머지 현대주의 개신교는 현대성으로부터 후-현대성으로 천천히 이동하는 기간 동안에 일어난 사회 세력들의 다원화에 민감하지 못했다. 무엇보다도, 프로테스탄트 원리는 기독교 신앙이 다른 문화적 세력들 가운데서 그 자체를 표현하고 개발할 수 있는 능력을 약화시키 고 심지어 파괴시키기까지 하였다. 이 파괴와 부패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위에 프로테스 탄트 원리가 근거해 있는 신앙에 대한 주도적 이해를 상세하게 살펴보아야만 한다.

II. 주관주의적 신앙 - 그 순기능과 역기능 (힘으로서의 주관주의적 신앙과 종교적 함정으로서의 주관주의적 신앙)

오늘날 서구 사회에서의 신앙에 대한 일반적 이해는 믿는 개인이 "전적으로 다른" 어떤 것을 전적으로 확신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이 "전적 타자", 이 "초월적" 세력, 또는 모호하게 파악된 초월적 인격은 동시에 아주 밀접하기도 한 존재이다. 이 "피안"(the 'Beyond'), "피조물적 의존의 종국적 준거점"(the final point of reference of creaturely dependence)에 가 장 깊은 확신이 주어진다. 칼 바르트(Karl Barth)는 이런 이해를 "간접적 데카르트주 의"(indirect Cartesianism)라고 옳게 명명한 바 있다. 이 간접적 데카르트주의는 "나는 어 떻게든 내가 의존함을 느낀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또는 "나는 어떻게든 내가 의존함 을 느낀다 - 그러므로 나는 믿는다"는 말로 요약할 수 있다.

이런 "신앙" 개념은 강한 '자기-지시'(自己-指示, self-reference), 즉 '경건한 자아의 자신에 대한 강한 관계'에 접근하는 것이므로 기독교 신학은 이 '신앙'을 다른 모든 형태의 자기-지시(self-reference)와 구별하려고 노력해 왔다. "신앙"이라고 불린 내적 확실성이 존 중되는 만큼 다른 모든 형태의 자기-지시는 "죄"라고 낙인찍히고 거부된 것이다. 이런 배경 하에서는 순진하고 사소하며 건강한 형태의 자기-지시와 왜곡되고 경악할만하고 심지어 악 마적인 형태의 자기-지시들을 구별하는 모든 시도들조차도 위험한 것이다. 이런 종교적 형 태에는 역설적이고 신경병적인 정신이 동반된다. 왜냐 하면 "전적 타자"에 대한 이 공허한 확실성을 "순수한" 자기-지시의 아주 단순하고 근본적인 형태와 구별하기가 아주 어렵기 때 문이다. 만일 우리가 "확실성"을 경험하는 수준에 이르기를 원한다면, 그 어떤 자기-지시도 약간의 차이(difference)라는 요소를 포함해야 함이 분명해지면 질수록, 이런 형태의 신앙은 세속적 자기-의식에로 빠진다고 하는 것이 점점 더 분명해지는 것이다.

이런 형태의 신앙의 적극적인 면은 이런 형태의 신앙을 가지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데에 있는 듯이 보인다. 적어도 개인의 자기-지시가 중요한 문화들, 즉 전형적 현대 사회에 속한 문화들에서는 말이다. 이런 형태의 신앙은 종교적 형태로 나타나기도 하고 순수한 변증법적 자기-지시의 형태로 나타나기도 하므로, 이는 다양한 방식으로 해석될 수 있 는 것이다.

이런 형태를 "신앙"으로 거듭거듭 제시하고, 그것을 진정한 기독교적 태도로 권한 이는 그 누구보다도 키에르케고르이다: "...... 바로 이것이 ...... 신앙의 형식이다: 자아와 관련 되고 그 자체가 되려고 하면서 자아는 자신을 그것을 정초시킨[세운] 힘 안에 투명하게 있게 하는 것이다," 또는 "신앙은 바로 자아가 자아이고 자아가 되려고 하면서 그 자체를 하 나님 안에서 투명하게 발견하는 것이다."

이런 형태의 신앙은 칸트, 슐라이어마허, 키에르케고르, 로테(Rothe), 트뢸취, 그리고 19세기와 20 세기초의 다른 사상가들에 의해 만들어졌고, 그들의 저작들에 대한 상당히 인기 있는 학문적, 그리고 일반적 공적 수납(public reception)에 의해서 전파되었으므로, 우리는 이것을 "신-개신교적 신앙"이라고 부를 수 있고, 이는 주로 19 세기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는 직접적으로나 간접적으로 20 세기의 다양한 신학 사상가들과 그 사유의 스타일에도 나타나고, 그것들에 의해서도 전파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이는 서구 산업 사회의, 교육받은 사람들 사이에 광범위하게 퍼진 종교성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 "신-개신교적 신앙"이라는 말보다는 "주관주의적 신앙"(subjectivist faith)이라 는 조직적 용어를 선호한다. 이런 형태의 "공허한 신앙"을 이해하고 이를 전파하려는 대부분의 신학적 시도들은 한편으로는 이 가장 깊고 가장 확실한 확실성이 분명히 인간론적인 현상임을 드러내려고 노력하며, 또 한편으로는 이것을 사소한 사건이나 일상적 지각적 작업 의 결과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에 의해서 주어지는 것으로 보려고 한다.

오랫동안 많은 사람들은 "신앙"이라고 불린 이런 종교적, 또는 유사-종교적 확실성 의 경험을 아주 귀하고 강력한 것으로 여겨 왔다. 왜냐하면 이는 특별한 점에서 종교적 전 달을 도입시켜 주는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그 누구도 직접성과 부정의 이 경험을 피할 수 없다. 사람이 자신의 "내적 자아"를 말하려고 하자마자, 그/그녀는 이 유사-종교적 확실 성에 직면하게 되는 것이다. 내가 나의 내적 자아의 가장 깊은 심연에 이르려고 할 때 내가 만나는 "타자"라는 요소는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이신가? 우리는 이것을 칼빈이 "신에 대 한 자연적 의식" 또는 "신의식"이라고 했던 바를 현대 정신에 잘 전달될 수 있는 형태로 표현한 듯이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분명히 문화적으로 길들여지고, 문화에 적응 된 자연적 확실성이라고 할 수 있다. 칼빈은 (자연의) 심미적 힘 앞에서, 우주 법과 사회 질서 앞에서 희미한 경외감을 느꼈다면, 이에 대한 현대의 종교적 변이는 공허한 자기 의식 의 빈곤한 변증법 개념만을 가진 것이다.

고전적 주류 교회의 신학과 가르침과 선포의 많은 부분은 이런 형태의 추상적이고 공허한 신앙을 아주 높이 평가해 왔었다. 그들은 이 공허한 확실성이 종교적 자의성과 양 면성으로 드러나지 않도록 보호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였다. 그들은 이 확실성이 자의식 (自意識)의 토대이며, 모든 인식론적, 도덕적 가치의 열쇠이고, 인격의 참된 토대라는 관념주 의적 주장(the idealist assertion)을 받아들였다. 그들은 이 빈곤한 형태의 신앙을 온갖 종 류의 "총체성"(wholeness)의 수사(修辭)로 장식했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님에 의해서 주어진 자기-지시와 순전히 인간주의적인 기원의 자기-지시 사이의 차이를 강조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전형적인 현대적 형태의 종교성의 내적 구조에 대한 이런 비판적 분석 때문 에 이것의 힘을 평가절하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이런 형태의 신앙은 우리들로 하여금 종 교적 정신(religious mentality)과 세속적 정신(secular mentality)을 편안히 융합하도록 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예를 들어서, 우리로 하여금 종교적 전달에서 도덕적 전달로 또 도덕적 전달에서 종교적 전달로 쉽게 나아가도록 한다. 무엇보다도, 그것은 욕심을 내고 그것을 만 족시키는 기제(mechanism)를 될 수 있는 한 효과적으로, 그리고 온전하게 만족시키려는 소 비주의 문화에 대한 좋은 배경적 초점이 된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식의 말을 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이미' 그러나 '아직 아니', '아직 아니' 그러나 '이미,' 자신과의 친밀성, 그러나 이는 타자와의 만남이 되고, 가장 깊은 확실성 그러나 동시에 변증법적인 차이를 동시에 말 하게 하는 것이다....... 더 나아가서 이런 형태의 신앙은 보편주의적 태도와 정신의 종교적 부호화를 가능하게 한다. 그리고 역으로 그것은 종교적 정신을 보편주의적 분위기로 장식하는 듯하다. 그것은 계속해서 다음 같은 신호를 보내는 것이다: "잠재적으로는, 그 어떤 합리 적인 사람도 종교적이지 않을 수는 없다."

그 희미함과 모호성과 양면성에도 불구하고 신성에 대한 "자연적 의식"의 힘을 강조했던 칼빈과 같이, 우리도 주관주의적 형태의 신앙의 힘을 인정해야만 한다. 그러나 우 리가 이런 형태의 신앙을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그것의 촉매적(catalytic) 잠재성을 신중하게 취급한다고 해도, 우리는 동시에 분명한 판단과 솔직성을 가지고서 그것은 내용-부여적 (content-laden)이고 공동체적 경건을 조직적으로 방해하며 약화시키고, 그것이 상당히 많은 교회들을 종교적으로 할말이 없게끔 만들고 (메세지를) 전달할 수 없도록 몰아갔다는 것을 분명히 해야만 한다.

III. 신앙의 상실로서의 주관주의적 신앙?

우리가 칼빈, 루터 또는 사도 바울과 같은 위대한 신학자들을 조심스럽게 살펴 볼 때, 우리는 이와는 상당히 다른 신앙 개념을 보게 된다. 바울은 다른 회중들에게 "그들의 신앙이 온 세상에 알려졌다"고 하며, 이 신앙을 기뻐하고, 그것에 대해서 더 알기를 원한다. 그는 또한 신앙의 "성장"에 대해서 말할 수 있었고, 신앙의 상호 증진과 강화에 대해서 말할 수 있었 다. 바울은 또한 "그리스도와 함께 온" 신앙, 또는 "성령의 은사로서의 신앙"에 대해서 말함 으로써 객관성의 근본적 차원을 볼 수 있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앙의 두 가지 형태의 객 관성이 주관주의적 신앙에 앞서고, 그 토대가 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로, 신앙은 그리스도와 함께 온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사로, 성령의 은사로 오는 것이다. 둘째로, 이 신 앙은 가시적이고 빛나며 주목을 모으는 형태와 모양을 띠게 된다. 그리고 세 번째로, 그리고 앞의 두 가지 것에 근거해서 개인이 이 신앙을 공유하고 형성하며, 강화하도록 초청 받고 축복받는 것이다.

로마서의 첫장에서 바울은 복잡한 일련의 영적 작업을 "신앙"이라고 분명하게 묘사 하고 있다: "첫째는 내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너희 모든 사람을 인하여 내 하나님께 감사함은 너희 믿음이 온 세상에 전파됨이로다...... 내가 너희 보기를 심히 원하는 것은 무 슨 신령한 은사를 너희에게 나눠주어 너희를 견고케 하려 함이니, 이는 곧 내가 너희 가운 데서 너희와 나의 믿음을 인하여 피차 안위함을 얻으려함이라"(롬 1: 8, 11-12). 바울은 또한 데살로나가 전서 첫장에서도 이렇게 말하고 있다: "하나님을 향한 너희 믿음의 소문이 각처에 퍼진고로..."(살전 1:8). 바울은 또한 그들에게 "너희 믿음을 굳게 하고.... 너희 믿음을 알아보려고" 디모데를 보내었다고 말하고 있다(살전 3: 2, 5). 그리고 "너희 믿음...... 의 기쁜 소식"에 대해 기뻐한다고 말한다(살전 1:6, 7ff.).

골로새서와 에베소서, 데살로니가 후서와 히브리서에서도 공동체의 신앙이 공적으로 알려졌다는 사실을 감사함으로 언급하는 말들이 나타난다(골 1:4, 엡 1:15, 살후 1:3, 히 13:1 참조). 빌레몬서와 디모데 후서에서도 "알려진" 개인들의 신앙에 대한 언급이 나타나고 있다(몬 1:5, 딤후 1:5 참조). 이런 사실들에 대한 이해는 왜 우리로 하여금 주관주의적 신앙 에 대해 반발하도록 하고, 그에 대한 대안을 찾도록 하는가?

우리가 제 2 부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주관주의적 신앙은 교회와 신앙의 파괴와 상당한 종교적 손실의 원인이 된다. 이런 증상은 우리로 하여금 현대주의 신학과 현대주의 적 경건에 대해 철저한 자기 성찰과 자기-비판을 하도록 한다. 주관주의적 신앙이 (다음에 언급할 요소들의 상호 작용으로 말미암아) 신앙을 막을 뿐만 아니라, 신앙을 체계적으로 파 괴하는 힘이 되게 하는 적어도 5 가지 요소들을 지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첫째로, 주관주의적 신앙은 초월적 원리(a transcendental principle)의 형태로 다가 온다. 그것은 마땅히 신앙이 그러해야만 하는, 신앙의 전달을 직접적으로 돕고 살아 있게 하 는 형태로 오는 것이 아니다. 보편적으로 접근 가능하다는 것 때문에 잘 드러나지 않기는 하지만, 그것은 개별화하는 것이고 생기 없는 것이다.

둘째로, 주관주의적 신앙은 필연적으로 공허한 종교적 형태로 온다. 그것은 신앙이 마땅히 그래야만 하듯이,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얻게 하고 증진시키며, 그 빛에서 자아와 세 상에 대한 내용이 있는 지식(content-laden knowledge)을 증진시키는 드러내는 형태[示唆 的 形態, a disclosing form)로 오지 않는 것이다.

셋째로, 주관주의적 신앙은 무조건적이고 강한 확실성(an unconditional and utmost certainty)의 형태로 온다. 그것은 자충족적인 종교적 형태를 지닌다. 비록 이런 '신앙'이 계 속해서 거듭 작용할 수 있고, 작용해야만 하지만, 그것은 신앙이 마땅히 그러해야만 하듯이, 단순한 확신으로부터 진리에 대한 신중한 개인적 공동적 추구에로 나아가도록 하는 규범적 인 것을 제공하지 못한다.

넷째로, 주관주의적 신앙은 직접성에 대한 경험과 그 직접성에 대한 질문을 연관시키는 점에서 역설적(paradoxical)이고, 자기-억압적(self-inhibiting)이며, 심지어 신경병적 (neuroticizing)이기까지 하다. 그것은, 신앙이 마땅히 그러해야 하듯이, 신앙을 가지고 그것을 전파하는 사람들의 기쁨과 찬양과 고귀하게 함을 증진시키지 못하는 것이다.

다섯째로, 주관주의적 신앙은 일종의 도피주의적 성격(an escapist character)을 가졌다. 그것은 종교적 삶의 표현적이고, 축제적이며, 전달적이고, 진보적 형태로부터 벗어나는 원인이 되며, 심지어 그런 것들에 반발하기도 한다. 신앙은 그럴 필요도 없고, 그래서도 안 되는데 말이다.

신앙은 하나님의 창조적이고, 생명을 지지하며, 생명을 유지시키는 능력의 정합성을 알기 원하며, 이 힘들과 따라서 하나님의 존재와 뜻을 계속해서 더 잘 알아 가기를 목적한 다. 그러므로 바르게 이해된 신앙은, 모든 신지식의 잠정성(혹, 현세성, temporariness)과 부적절 가능성(possible inadequacy)을 의식하면서도, 무엇인가 객관적으로 있는 것을 발견하 려하며, 무엇인가를 알려고 하는 것이다. 특히 그 주된 대상인 살아 계신 하나님에 대한, 문화적 지식의 한 특별한 형태로서의 신앙은 언제나 그 나름의 잠정성(현세성)을 의식하며, 의 문시될 수 있는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다. 바로 이점에서 신앙은 일반적 지식과 다른 것이다.

신앙에 대한 모든 지식에 동반되는 하나님의 자유의 측면과 하나님은 제거될 수 없 다(cannot be disposed of)는 사실은 어떤 성경 전승에서는 "하나님에 대한 경외"(the fear of God)라고 불리운다. 신앙을 구성하시고, 유지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신앙의 확신 가운데서 하나님께서는 개인을 신앙을 통해 언급하심으로써 개인의 영적, 신체적, 감각적, 그 리고 감정적 개별성만을 받아들이고 심각하게 취하시는 것이 아니다. 신앙에서 우리는 보편적 위엄(a universal dignity)도 얻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이 위엄은, 루터가 말하는 바와 같이,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는 것"이다. 이것은 그들이 이 땅에서 하나님의 현존의 담지자들이(bearers of God's presence) 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신앙은 인격의 보호와 발 전에 대한 관심을 살아 계신 하나님에 대한 지식에 대한 관심과 연관시키는 것이다. 이 관심이 공허하고 개별화하는 신앙으로 축소될 때, 신앙은 조직적으로 약화되는 것이다.

신앙에서는 살아 계신 하나님, 그리고 하나님의 자유에 대한 집중에 신앙의 삶에 참여하는 모든 이들에 대한 예민성이 동반된다. 이것은 신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사람들 이나 지적으로 놀라운 정리를 한 분들에게만 해당되는 말이 아니라, 신앙에 다소간 수동적으로만 참여하는 사람들과 경건에 대한 호기심에서, 그리고 슬픔과 추억 가운데서 신앙의 삶에 들어온 사람들에게도 적용되는 것이다. 신지식(神知識)에 대한 불붙는[열정적인] 관심 과 연관된 하나님의 자유와 살아 계심에 대한 존중은 사실 "문화적 배움"(cultural learning) 과 "영적 배움"(spiritual learning)에 대한 높은 관심과 연관되어 있다.

신앙에는 분명히 지식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지식에 반해서, 지식으로 가득찬 신앙의 연약성에 대한 지적이 있어야만 한다. 신앙은 원리적으로 감정의 영향을 받을 위험이 아 주 높다. 위에서 언급한 하나님의 자유와 살아 계심에 대한 예민성과 다양한 증언의 의미, 그리고 신자들의 구체적 인격성 때문에 그러한 것이다. 아마도 오늘날의 문화 가운데서는 이것을 문제라고 보지 않고, 신앙의 힘이라고 보기도 하는 듯하다. 그러나 예민한 신앙과 너무도 쉽게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신앙을 왜곡하고 파괴해 버리기도 하는 문화적 도덕적 분위기, 매체의 유행과 19 세기 사람들이 "시대 정신"(Zeitgeist)라고 부른 것의 여러 다른 형태들을 이해하자마자 위험은 자명하게 인식되는 것이다. 이런 문제들에 대한 주관주의적 신앙의 절대적 무기력성은 우리로 하여금 생산적 대안을 추구하도록 하는 전제가 된다고 할 수 있다.

적극적으로 보면, 신앙의 내용에 대한 역사적, 문화적, 정경적, 그리고 신학적 무게를 다시 높이 평가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이 신앙의 내용에는 하나님에 대한 풍성한 사랑 과 이해, 세상에 대한 풍성한 사랑과 이해, 그리고 사람들에 대한 풍성한 사랑과 이해가 포함된다. 신앙은 이 풍성한 사랑과 이해를 다른 맥락에서 다른 형태로 추구하고, 전달하고자 한다. 종교 개혁의 내 가지 "오직"(sola)은 우리를 이 풍성한 내용에로 인도하고, 다시 방향지우게 한다: 오직 성경(sola scriptura), 오직 그리스도(solus Christus), 오직 신앙 (sola fide), 오직 은혜(sola gratia). 현대 정신이 주관주의적 신앙의 왜곡으로부터 벗어나도록 하려면, 이 네 가지와 연관된 종교 개혁적 통찰이 존중되고 현대인들에게 새롭게 해석 되어져야만 한다. 현대 정신이 '자유의 종교'를 약속하는, 그러나 사실은 자기 파괴적이고 자기를 세속화시키는 종교성에로 몰아 가는 '프로테스탄트 원리'에 대한 고착에서 벗어나도록 하려면, 이 네 가지 "오직"과 연관된 종교 개혁적 통찰이 존중되고 현대인들에게 새롭게 해석되어져야만 한다. 전형적인 현대주의 개신교는 종교 개혁적 개신교에 의해 교정될 필요가 있다. 이것은 우리가 과거로 되돌아 갈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이다. 우리는 현재 문화로부터 후-현대 문화로의 역사적 전환과 발전, 그리고 단일 위계적 (monohierarchical) 사회로부터 다원주의적 사회로의 역사적 전환과 발전을 침착하게 검토해야만 한다. 서구 사회의 병든 교회들을 지금까지도 주도하고 있는 현대 개신교를 극복하고 우리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만 하는가를 이해하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이런 발전을 점검해 보아야만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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