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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신학논문은행에 대하여

1999/10/05 (01:04) from 203.252.22.54' of 203.252.22.54' Article Number :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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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의 근원을 묻는 물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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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의 근원을 묻는 물음  




뉘 탓이냐


함석헌



이게 뉘 탓이냐
비단에 무늬를 놨다는 이 강산에
다섯 즈믄 겹 쌓아 솟은 바람터에 올라
보이느니 걸뜬 피뿐이요
들리느니 가슴 내려앉는 숨 소리뿐이요
맡아지느니 썩어진 냄새뿐이요
그리고 따 끝에 둘린 안개 장막 저 쪽엔
무슨 괴물이 기다리고 있는지
그건 알지도 못하고
그러다 그러다 가게 됐으니
이게 뉘 탓이냐
신선의 산이라 했다는 걸
군자국(君子國)이라 했다는 걸
예의지방(禮儀之邦)이라 했다는 걸
집엘 가도 안을 자식이 없고
길을 걸어도 손 잡을 동무가 없고
오래 거리를 다 뒤타도
이야기를 들을 늙은이를 볼 수 없고
봉 사이, 물결 위에는 스스로
달 바람이 맑고 밝건만
듣고 볼 사람이 없으니
이게 뉘 탓이냐
뉘 탓이냐
어느 뉘 탓이란 말이냐
네 탓
내 탓
그렇다 이 나라에 나온 네가 탓이요
그 너 만난 내가 탓이다
무얼 하자고 여기를 나왔더냐

아니다 탓이람 그 탓이다
애당초에 그이가 탓 아니냐
무얼 한다고 삼위(三危)요 한배(太白)요
그냥 계시지 못하고 홍익(홍익)이니 이화(이화)니
부질없이 이 인간 세상을
내려다보신단 말이냐
그 탓이다 그이가 탓이다
그 한 탓에 이 노름이다

이게 뉘 탓이냐
가없고 변저리없는 아득한 한 누리에
둘은 없는 묵숨불 탔다면서
소리를 지른 것이 목구멍에 잠기고
뛰어 본 것이 그림자 위에 되떨어지고
생각을 한 것이 살얼음 틈에 녹아나
하늘 가에 맴도는 조롱박 속에서
콩알처럼 흔들려 바사지게 됐으니
이게 뉘 탓이냐

나를 본 자 아버지 본 거라
하늘 위 하늘 아래 나 홀라 높다
네 자신을 알아라
하늘이 내게 속알을 주셨다
거룩하게 거듭거듭 일러는 주셨건만
불이란 불은 다 불다간 꺼졌더구나
물이란 물은 다 흘러선 흘더구나
바람조차 불다가 불다간 돌아도더구나
종교요 과학이요 두루 캔 뒷 끝은
싹 트는 알 하나의 하품에 놀라
공든 탑보다도 말 먼저 무너져
얼굴이 파랗게 질리게 됐으니
이게 뉘 탓이란 말이냐

뉘 탓이냐고
개인 탓, 사회 탓,
물질 탓, 정신 탓,
그렇다 산 내 탓이요 있는 너 탓이다
뭐 탓다고 이 곤두박질이겠느냐
어떻다고 이 가슴 답답한 냄새겠느냐

아니야 너도 아니오 나도 아니야
제 탓이람 차라리 쉽지만
있자 해서 있는 인생이더냐
없자 해서 없는 자연이더냐
탓이람 그의 탓이다
그가 애초에 탓을 일으키셨다
말씀(뜻) 낸 것이 말썽의 탓 아니냐

영원의 두루뭉수리 그냥을 품고
늙은 암탉처럼 업디는 아버지를
무엇 하자 가만 아니 두고
그 날개를 들치고 나오셨을까
밑 모르는 캄캄 빈 탕에 아로새김을 하자
열쌔고 거세게 슬프게 나서는
한 줄기 외론 따뜻한 빛
아이들은 가만 못있는 것
가만 아니 계신 아들 탓이다
그저 계시면 그저 하나이신 걸
한 번 번쩍 나선 탓
위는 영원한 눈도 깜짝 못하는 쌈이
버러지니, 천지요 만물이요 역사였더라

그러나 아아
삼켜도 삼켜도 삼켜 낼 길 없는 어둠을
삼키려 드는 칼날 같은 그 맘을
누가 아느냐 누가 받느냐
모든 탈의 탓의 탓의 또 탓으로
타고 탓고, 타고 탄, 또 타고 탈 그 탐

아아 그 한 맘의 끝이
쇠도 아니 드는 어둠이 맨바닥 위에
아버지 그린 얼굴을 그린다고
좇고 좇다가
한 몸이 다 탓구나
인젠 그 탓을 빛 지울 곳도 없고
번쩍 탔던 그 순간 그는
단번에 만물을 불러내어
아버지 모습을 그 모든 위에 지져 박았고
네 탓, 내 탓, 육 탓, 영 탓, 안 탓, 모른 탓
모든 탓이 거기 죄 다 탔으니
아무 탓도 아무 탈도 아무 탄도 할 곳 없는
다만 빛의 나라뿐이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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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감상

고난의 근원을 묻는 물음

김 경 재 (목사,한신대 대학원 교수,신박)  
들어가는 말  
존경하는 교육계 원로 김남식 선생님께서 또 숙제를 주셨다. 함석헌 전집 제 6권 시집 <수평선 넘어> 안에 수록되어 있는 그 분의 종교시 "뉘 탓이냐"를 읽고 감상문을 써내라 하셨다. 국민학교 학동처럼 나는 선생님의 숙제를 받고서 몇 주간을 끙끙 앓았다. 이번에는 너무 어려운 숙제를 주셨기 때문이다.
본래 시라곤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에게 함석헌 선생의 깊은 종교적 사상시 이해란 첨부터 벅찬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래도 나름대로 자기의 감상문을 써내라시는 엄한 말씀 앞에 학동은 부끄러운 손으로 감상문 한 장을 써 올린다.
너무나 심원한 종교시  
"뉘 탓이냐"라는 시는 너무 심원한 종교시여서, 함석헌의 사상적 깊이와 높이를 따르지 못하는 감상자들은 어쩔 수 없이 껍데기만을 감상할 뿐이다. 그 누구가 말하기를 "종은 종치는 사람의 힘 만큼만 울린다"고 했던가. 한국 미술사 학계의 원로이셨던 고유섭(高裕燮) 선생이 학생들을 이끌고 문화 답사를 다니실 적에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문화 유산에 대한 문맹자 같은 젊은이를 두고 하신 말씀이었다. 깨어진 기왓장 조각 한 개에서, 풀 밭에 뒹구는 깨어지고 이끼 낀 석탑의 기단 한 장에서 고유섭 선생은 천년 절터 성불사(成佛寺)의 종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어쩔 수 없이 정신세계란 그런 것이다. 그냥 싸구려 물건처럼 돈만 있고 권력만 있다고 자기의 것으로 소유할 수 있는 그런 세계가 아니다. 종은 종치는 사람의 힘 만큼만 울리는 원칙처럼 함석헌의 종교시 "뉘 탓이냐"라는 시인의 정신의 종 또한 우리가 그 종을 우리의 정신의 힘으로 타종하는 그 만큼만 울려 우리 영혼의 귀에 들리는 법이다. 그것을 우리는 "해석학적 원리"라고 부를 수 있다.
시의 감상을 비롯한 작품의 감상은 어차피 원저자의 영혼 속에 울리던 그 종소리를 다시 고스란히 그대로 복원해 내는 일은 아니다. 작품의 바른 해석은 원자의 마음 속에서 일어났던 작품의 원의미를 그대로 복사하듯이 재구성해 내는 일이 아니며 또 그렇게 해 낼 수도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작품의 해석이란 우리의 영혼 속에서 다시 우리의 영혼의 타종 작업을 통해서 내 영혼의 종을 울리게 하는 길 뿐이다.
우리가 감상하려고 하는 종교시 "뉘 탓이냐"는 문단으로는 12문단 105행의 장편 시이다.
그 중에서 아홉 째 시단과 열째 시단을 다시 한번 읽어 본다.

영원의 두루뭉수리 그냥을 품고
늙은 암탉처럼 업디는 아버지를
무엇 하자 가만 아니 두고
그 날개를 들치고 나오셨을까
밑 모르는 캄캄 빈 탕에 아로새김을 하자
열쌔고 거세게 슬프게 나서는
한 줄기 외론 따뜻한 빛
아이들은 가만 못있는 것
가만 아니 계신 아들 탓이다
그저 계시면 그저 하나이신 걸
한 번 번쩍 나선 탓
위는 영원한 눈도 깜짝 못하는 쌈이
버러지니, 천지요 만물이요 역사였더라

고난의 근원을 묻는 물음  
"뉘 탓이냐"라는 종교시는 현실 한 복판에 엄존하는 고난과 비극을 대면하여 그것들이 존재하게 된 모든 상대적 이유를 넘어서서, 인간과 역사 속에 있는 그 고난의 발생처와 그 존재 의미를 태초의 우주 창생 원점에까지 추구해 들어간 것이다.
이 시가 쓰여진 시대적 배경은 정확하게 말할 수 없지만 1930-1940년대 한국민의 고난 생활상이 일제 식민치하에서 절정에 도달한 때, 아니면 6.25 동족상쟁의 전쟁 폐허 속에서 쓰여진 시이다. 시인은 우선 현실의 비탄을 노래한다.
보이는 건 피뿐/들리는 건 한숨/맡아지는 건 썩어진 냄새 뿐/…이라고 했다.
집엘 가도 안을 자식이 없고/길을 걸어도 손잡을 동무가 없고/오래 거리를 다 뒤져도 이야기를 들을 늙은이를 볼 수 없다/…고 탄식의 영탄을 한다.
시인은 우선 역사현실의 이 비참한 생의 현실이 뉘 탓이냐고 묻는다. 그것은 너의 탓이기도 하고 나의 탓이기도 하다고 노래한다. 그것은 개인의 탓이기도 하고 역사의 탓이기도 하다고 자조 한다. 그것은 물질 탓이라고 아니면 정신 탓이라고 유물론자와 유심론자 사이의 입씨름도 듣는다.
그러다가 시인은 마침내 그 현실고난의 의미와 신비를 종교적으로 끝까지 파고 든다.
우리가 위에서 인용한 두 개의 시 문단을 읽은 사람은 그 시 문단의 시적 영상은 창세기 제 1장 창조설화의 이야기에서 이끌어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땅이 혼돈하고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물 위에 운행하시니라. (창세기 1장 1-2절)

시인은 삶 속에 고난이 있는 것은 생명의 출현, 창조 세계의 출현 때문인데 그러므로 고난, 비극, 생명의 통증은 고요한 정지가 아닌 역동적 창조운동이 치르어야 하는 피할 수 없는 비싼 댓가라는 것이다. 함석헌이 "고난은 생명의 원리"라는 말이 그 말이다. 생명의 창조, 창조의 운동, 빛의 운동, 새로운 것을 나오게 하려는 생명 운동이 있자마자 아픔, 고난, 통증은 거기에 따라 붙는다는 것이다.
오해해서는 아니 될 점은 시인은 결코 역사 속에 엄존하는 인간의 고난과 죄의 문제를 운명론이나 역사 필연론으로 돌리려는 그 런 천박한 발상이 아니라는 점이다. 역사적 숙명론이거나 선악 이원론적 투쟁론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고난 속에서 절망하고 역사의 비극 속에서 삶의 무의미성과 변덕스러움 때문에 고통 당해야 하는 수많은 이 땅의 민초(民草)들에게 "고난에 의미 있다"고 시인은 힘주어 말함으로써, 도리어 고난을 이기고 고난을 새생명창조의 기회로 승화시키자고 울부짖고 있는 것이다.
그 뿐만 아니라, 역사의 범죄자들, 전범자와 무기제조업자와 군수상들, 뇌물과 수탈로서 민초를 가난과 굶주림에 몰고간 자들, 이 땅의 어린 딸들을 정신대로 끌고가서 동물처럼 욕을 보인 자들, 동족을 팔고 국토를 팔아 호화호식 부귀영화를 누린 자들에게 준엄한 심판과 도덕적 책임을 묻는 일에 흐지부지 하자는 말이 절대 아니다. 역사와 사회의 기강을 바로 세우기 위해서 우리는 그 일을 분명하게 가려야 한다. 그러나 지금 시인이 문제 삼는 시의 테마는 그런 역사적 심판 행위까지를 포함한 일체의 땅위에서 일어나는 삶, 그 자체 속에 스며든 고난의 비애가 뉘 탓으로 시작되었는가를 묻고 있는 것이다.
오로지 절대 고요, 절대 부동, 절대 평정 속에 만유가 있을 때는 하나님만 존재하고 만물은 단지 가능태(可能態)로서만 어둠 속에 있을 뿐이다. 그러나 한번 창조의 운동을 일으키려는, 생명의 세계를 나오게 하려는 거룩하고 신비로운 한 뜻이 움직이는 순간 거기엔 빛과 어두움, 생명과 죽음, 질서와 혼돈, 생명 살리기와 생명 죽이기의 싸움이 시작되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사와 인류 역사 속에 고난과 아픔이 있는 것은 "영원한 생명의 층계"를 올라가려는 생명의 과정 속에서 피할 수 없는 것이다. 우리는 이 생명의 싸움을 방관해서도 포기해서도 체념해서도 않되고, 고난의 풀무불을 열기 삼아 정진해야 한다고 확신하는 것이다. 고난의 아픈 가시가 인생 속에 있는 것은 뉘 탓인가. 그것은 자유한 생명의 탄생을 위하여 사랑하는 딸의 산고와 진통을 함께 고통하는 아버지의 탓이라고 시인은 보는 것이며, 아내에게 아기를 잉태하도록 원인 제공을 한 아들의 탓이라고 보는 것이다.
우리는 이 시 속에서 고난의 철학이 가장 깊은 경지를 시인과 함께 생각하면서, 현실의 고난을 뚫고 삶을 다시 한번 크게 대긍정하는 생명의 철학, 생명 외경의 철학을 지니게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아들이란 우리들의 생명 속에 있는 빛의 로고스, 사랑의 열정, 생명에 대한 연민의 마음 바로 그것이기 때문이다.

http://university.unitel.co.kr/special/seoul/edupense/search/horizon/horizon1.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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