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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신학논문은행에 대하여

2003/03/16 (04:02) from 80.139.161.61' of 80.139.161.61' Article Number : 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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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리주의 대 직관주의


논리주의 대 직관주의



집합론에서의 역리들의 발견과, 현존하는 고전수학에 있어서 아직 찾아내지는 못했지만 유사한 역리가 나타날지도 모른다는 사실의 인식은, 수학자들의 무모순성의 문제를 심각하게 받아들이게 된 원인이 되었다. 특히 선출공리(axiom of choice)를 자유로이 사용함으로써 제기된 수학에서의 존재성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는 문제도 역시 당면 과제가 되었다. 기초를 세우는 데와 새로운 분야를 창조하는 데 있어서 무한집합의 사용이 증대된 것은 실무한집합이 합당한 개념인가 하는 점에 관한 오래 된 의견차이를 표면화 시켰다. 19세기 말의 공리화 운동은 이런 일들을 다루지는 않았었다.
그러나 수학자들로 하여금 참된 기초에 관한 전체적인 주제를 검토하게 한 것은, 이러한 논점들과 앞 장에서 다룬 다른 문제들이 전부는 아니었다. 이 논점들은 연기만 나는 불을 논쟁의 백열 속에서 훨훨 타오르게 한 바람이었다. 몇 가지 새롭고 급진적인 수학에의 접근방식이 1900년대 초에 주창되고 약간 다듬어졌다. 그러나 그것들은 각광을 받지 못했고 대부분의 수학자들은 그것들을 심각하게 여기지 않았었다. 금세기의 첫 십 년 동안에 수학의 거인들은 기초의 새로운 접근 방식에 관하여 싸우러 나왔다. 그들은 반대되는 캠프로 분산되고 그들의 적에 대하여 선전포고를 하였다.
이들 사상적인 학파 중 첫째는 소위 논리학파(the logistic school)로 알려져있다. 이 학파의 주장을 우선 간단히 요약하면, 모든 수학은 논리학으로부터 유도될 수 있다는 것이다. 1900년대 초에 논리의 법칙들은 대부분 수학자들에게 진리의 실체로서 받아들여졌다. 그리하여 논리주의자들은 수학도 당연히 그와 같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진리는 무모순이므로, 수학도 무모순이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모든 혁신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많은 사람들이 이 학파의 주장이 명확한 형태와 광범위한 주목을 끌기 전에 공헌을 했다. 수학이 논리학으로부터 유도되어야만 한다는 주의는 라이프니츠로 거슬러 올라간다. 라이프니츠는 이성의 진리 또는 필연적 진리를 사실의 진리 또는 우연적 진리와 구분하였다.(8장) 자신의 친구 코스테(Coste)에게 보낸 편지에서 라이프니츠는 이 구분을 설명하였다. 진리가 필연적(necessary)이라는 것은 그 부정이 모순을 일으키는 것을 가리키고, 필연적이 아닌 진리를 우연적(contingent)진리라고 불렀다. 신은 존재한다, 모든 직각은 같다, 등은 필연적 진리이지만; 나 자신은 존재한다, 정확하게 90도의 각도를 가진 물체가 자연에 존재한다, 등은 우연적 진리이다. 우연적 진리들은 전 우주가 다른 식으로 되어 있을 수도 있으므로 참일 수도 있고 거짓일 수도 있다. 그리고 신은 무한개의 가능성 중에서 가장 적당하다고 판단한 것들을 선택하였다. 수학적 진리는 필연적이어야 하므로 그들은 마땅히 논리학으로부터 유도되어야 하는데, 논리의 원리들은 필연적이고 모든 가능한 세계에서도 참이라는 것이다.
라이프니츠는 논리학으로부터 수학을 이끌어내는 계획을 수행하지 못하였고, 같은 신념을 가지고 있다고 표명한 다른 사람들도 거의 200년 동안 그것을 하지 못했었다. 예를 들면, 데데킨테는 수는 공간과 시간의 직관으로부터 유도되는 것이 아니라 "순수한 사고의 법칙으로보터 즉각적으로 얻어지는 발산물" 이라고 굳게 확신하고 있었다. 수로부터 우리는 공간과 시간의 정확한 개념을 얻는다. 그는 이 이론을 발전시키려고 시작했으나 계속 추구하지는 않았다.
마지막으로, 수리논리학의 발전에 크게 공헌했고(8장) 데데킨테의 영향을 받았던 프레게는 논리학파의 주장을 전개하기 시작했었다. 프레게는 수학의 법칙이란 분석적(analytic)이라 불리는 것이라고 믿었다. 수학의 법칙은 선험적으로 진리인 논리의 원리들에서 암암리에 나타나는 것에 불과한 것을 말해 준다. 수학적 정리와 그들의 증명은 무엇이 암암리에 나타나 있는가를 보여준다. 모든 수학은 물리적 세계에 모두 적용되는 것은 아니지만, 확실히 이성의 진리들로 구성되어 있다. 프레게는 그의 저서 < 개념 - 기술 > Concept - Writing (1879)에서 분명한 공리위에 논리학을 세운 뒤에, < 수학의 기초 > Foundations of Mathematics (1884)와 두 권으로 된 < 수학의 기본 법칙 > Fundamental Laws of Mathematics (1893, 1903) 에서 논리적 전제로부터 산수의 개념과 수의 정의와 법칙을 이끌어 내는 것을 계속하였다. 수의 법칙들로부터 대수학, 해석학, 기하학을 이끌어내는 것이 가능한데, 기하학까지도 가능한 이유는 해석기하학이 기하학의 개념과 성질을 대수적 방법으로 나타내 주기 때문이다. 불행히도 프레게의 기호법은 수학자들에게 매우 복잡하고 낯선 것들이었으므로 그는 당시의 사람들에게 거의 영향을 주지 못했다. 다소 아이러닉하기도 한 것은 다음과 같은 자주 거론되는 이야기다. 프레게는 저서 < 기본 법칙 > 의 제 2권을 1902년에 인쇄에 걸 때쯤에 러셀로부터 편지를 받았는데, 그 편지는 이 책속에 들어 있는 "집합들의 집합" 이라는 개념은 모순을 이끌 수 있는 것이라고 알려 주었다. 제 2권의 마지막에서 프레게는 "과학자에게 있어, 일이 끝남과 동시에 그 기초를 포기해야 하는 것보다 더 바람직하지 못한 것을 만날 수는 없다. 러셀씨로부터 받은 편지는 거의 인쇄가 끝나가는 이 순간에 나를 이런 상태로 만들었다."라고 썼다. 프레게는 이미 설명한 역리들을 책을 쓰는 동안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독립적으로, 러셀도 같은 계획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것을 진행하는 동안 프레게의 일과 부닥쳤다. 러셀은 그의 < 자서전 > Autobiography(1951)에서, 그가 1900년 제 2차 국제 수학자 대회에서 만난 페아노에게서도 영향을 받았다고 말하고 있다.

그 대회는 내 지적인 생활의 전환점이 되었다. 왜냐하면 거기서 나는 페아노를 만났기 때문이다. 나는 이미 그의 이름을 알고 있었으며, 그의 몇 가지 업적을 보았었다. ... 그의 기호법이 내가 수년 동안 찾고 있었던 해석학의 도구를 제공하며, 그를 공부함으로써 내가 오래동안 하기를 바라던 내 일에 새롭고 강력한 기술을 얻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는 그의 저서 < 수학의 원리 > Principles of Mathematics (초판 1903)에서 "모든 수학이 기초 논리학이라는 사실은 우리 시대의 최대의 발견중의 하나이다. ... "라고 덧붙였다.
1900년대 초에 러셀은 프레게와 마찬가지로, 수학의 기본법칙들이 논리로부터 유도될 수 있다면, 논리는 확실히 진리의 실체이므로, 이런 법칙들이 또한 진리이며, 무모순성의 문제는 해결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는 저서 < 나의 철학적 발전 > My philosophical Development (1959)에서, "의심할 여지가 없는 완벽화된 수학"에 도달하는 것을 추구했었다고 적고 있다.
러셀은 물론 페아노가 자연수에 관한 공리로부터 실수 전체를 유도해낸 것을 알고 있었고, 힐버트가 실수계 전체에 관한 공리들의 집합을 제시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저서 < 수리 철학 시설 > Introduction to Mathematical Philosophy (1919)에서 데데킨트에 의한 유사한 전개에 관해 "우리가 원하는 것을 가정하는 방법은 많은 이점이 있다. 이것은 정직하게 고생하는 것에 대한 절도의 이점과 같은 것이다." 라고 말했다. 러셀의 실제관심은, 말하자면 수에 관한 열 개 내지 열 다섯 개의 공리를 가정하는 것이 그 공리들의 무모순성과 진리성을 보장해 주지는 못한다는 사실이었다. 그가 말한 바와 같이, 그것은 재산 대신에 불필요한 인질을 잡는 것과 같다. 1900년대 초에 러셀이 논리의 원리들은 진리이고 무모순이라고 확신하고 있는 동안에, 화이트헤드는 1907년에 "논리적 전제 자체의 무모순성의 형식적 증명은 있을 수 없다"라고 경고하였다.
여러 해 동안 러셀은 논리의 원리와 수학적 지식의 대상은 각자의 정신 속에 독립적으로 존재하고, 단지 정신에 의하여 감지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 지식은 객관적이고 불변이다. 이같은 입장을 분명히 진술한 것은 그의 1912년의 저서 < 철학의 문제 > The Problems of Philosophy 에서 이다.
러셀의 의도는 진리에 관한 한 프레게보다 훨씬 더 나아가는 데 있었다. 젊었을 때의 그는 수학이란 물리적 세계에 관한 진리를 제공하는 것이라고 믿었다. 유클리드와 비유클리드 기하학이 둘 다 물리적 세계에 적합한 기하학이라는 (4장) 대립 가운데서, 그는 어느 것이 진리인지 확신할 수 없었으나, 그의 < 기하학의 기초에 관한 시론 > Essay on the Foundation of Geometry (1898)에서, 물리적 공간은 균질적(어디에서나 같은 성질을 가지는)이라는 사실 -- 당시에 그는 이것을 물리적 진리라고 믿고 있었다. -- 과 같은 어떤 수학적 법칙을 찾으려 노력했다. 이와 대조적으로, 삼차원 공간은 경험적 사실이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그에 관하여 정밀한 지식을 얻을 수 있는 하나의 객관적 실세계는 존재하였다. 이리하여 러셀은 물리적으로도 역시 진리인 수학적 진리를 추구하였다. 이런 법칙들은 논리적 원리들로부터 유도되어야 한다.
그의 저서 < 수학의 원리 > (1903)에서 수학의 물리적 진리성에 관한 그의 입장을 부연하였으며, "우리가 알고 있는 공간과 같이 실제로 존재하는 것에 관한 모든 명제는 실험과학 또는 경험과학에 속하는 것이지 수학에 속하는 것은 아니다. 응용수학에 속하는 명제들은 순수수학의 명제의 하나 또는 여러 개의 변수에 적당한 상수 값을 줌으로써 얻어진다"라고 말했다. 비록 이런 관점에 있어서조차 그는 어떤 기본적인 물리적 진리가 논리로부터 유도된 수학에 포함될 수 있다고 계속 믿고 있었다. 절대적 진리는 없다고 주장한 회의론자에 대한 답으로써 그는 "수학은 그러한 회의론에 관한 영원한 질책이다. 왜냐하면 수학이란 진리의 체계를 의심하는 냉소주의의 모든 무기 앞에서 흔들림 없이 삭제됨이 없이 버티고 있다"라고 말했다.
러셀의 < 수학의 원리 > 에서 간략히 밝힌 아이디어는, 화이트헤드 Alfred North Whitehead (1861-1947)와 러셀에 의한 자세한 업적 < 수학 원리 > Principia Mathematica (3권; 초판 1910-13)에서 전개되었다. 수학원리는 논리학파의 입장을 명확히 밝힌 것이므로, 그 내용을 살펴보자.
그 접근 방식은 논리학 자체의 전개로 시작된다. 논리의 공리는 조심스럽게 전술되어 있는데, 그것으로부터 그의 추론에 사용될 정리들이 연역된다. 그 전개는 모든 공리적 이론이 그러하듯이 (8장) 무정의용어로부터 시작된다. 이들 무정의용어 중 몇가지는 기본 명제의 개념, 기본 명제가 참이라는 주장, 명제의 부정, 두 명제의 합접(conjunction)과 이접(disjunction), 명제함수의 개념이다.
러셀과 화이트헤드는 이 개념들을 설명했지만, 그들이 지적한 것처럼 이 설명은 논리적 전개의 일부가 아니었다. 명제와 명제함수는 피어스 Peirce가 이미 도입한 것과 같은 뜻으로 썼다. 그리하여 "존은 남자이다"라는 것은 명제인 반면에 "x는 남자이다"라는 것은 명제함수이다. 명제의 부정은, 명제가 성립하느 것이 참이 아님을 뜻한다. 즉 P가 "존은 남자이다"라는 명제이면 ~P로 표시되는 P의 부정은 "존은 남자이다라는 것은 참이 아니다" 또는 "존은 남자가 아니다" 를 뜻한다. 두 명제 P 와 Q의 합접은 P.Q (오늘날의 P∧Q)로 표시되는데, P와 Q 두 명제 모두가 참임을 의미한다. 두 명제 P와 Q의 이접은 P∨Q 로 표시되는데, P 또는 Q를 뜻한다. 여기에서의 "또는"의 의미는 "남자 또는 여자가 지원해도 좋다"라는 문장에 나오는 것과 같은 뜻이다. 즉, 남자가 지원해도 좋다, 여자가 지원해도 좋다, 둘 다 지원해도 좋다는 것이다." 그 사람은 남자 또는 여자이다"라는 문장에서의 "또는"은, 둘 중에 한 가지가 되어야하며, 둘 모두 될 수는 없는 보다 통상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 수학에서의 "또는"의 의미는 첫번째의 의미로 쓰이지만, 때로는 두번째 의미처럼 오직 한가직 가능성밖에 없는 경우도 있다. 예를 들면 "그 삼각형은 이등병삼각형이거나 또는 그 사각형은 평행사변형이다"는 문장은 첫째 의미의 보기이다. 우리는 또 모든 0이 아닌 실수는 양수 또는 음수이다라고 말한다. 여기서 양수와 음수에 관한 또다른 사실은 두 가지 모두가 참이 될 수는 없음을 말해준다. 이리하여 < 수학원리 > 에서 P 또는 Q라는 주장은 P와 Q 둘다 참이거나, P는 거짓이고 Q는 참이거나, P가 참이고 Q는 거짓임을 의미한다.
명제들 사이의 가장 중요한 관계의 하나는 함의 (implication), 즉 한 명제가 참이라면 다른 명제도 참이 되게 하는 것이다. < 수학원리 > 에는 함의가 정의되어 있고, ⊂로 표시되고 있다. 이것은 프레게가 실질함의라고 불렀던(8장)것과 같은 뜻이다. 즉 P가 Q를 함의한다(의미한다)는 것은, P가 참이면 Q도 반드시 참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P가 거짓이면 Q가 참이냐 거짓이냐에 관계없이 P가 Q를 함의한다. 즉 거짓 명제는 임의의 명제를 함의한다. 함의의 의미를 위와 같이 정한 것은 어떤 상황에서도 적어도 무모순이다. a가 짝수이다가 참이면 2a는 반드시 짝수이다. 그러나 a가 짝수이다가 거짓이면, 2a는 짝수일 수도 있거나(a가 분수라면) 2a는 짝수가 아닐 수도 있다. a가 짝수이다라는 명제가 거짓이면, 어느 쪽 결론도 이끌어낼 수 있다.
물론, 정리를 이끌어내기 위해서는 논리의 공리들이 있어야 한다. 이제 공리 몇 가지를 적어 보면,
A. 참인 기본 명제로부터 함의되는 것은 모두 참이다.
B. P는 참이거나 또는 P는 참이면 P는 참이다.
C. Q가 참이면 P 또는 Q가 참이다.
D. P 또는 Q는 Q 또는 P를 함의한다.
E. P 또는 'Q 또는 R'이 참이면 'P 또는 Q' 또는 R이 참이다.
F. 주장 P와 주장 P⊃Q 는 주장 Q를 뜻한다.
이런 공리들로부터 저자들은 논리의 정리들을 이끌어내는 것을 진행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보통 삼단논법(syllogism)들은 정리로 나타난다.
논리자체가 어떻게 형식화되고 연역적으로 구성되는가를 보기 위하여 < 수학원리 >의 앞 부분에 나오는 몇 가지 정리를 살펴보자. 하나의 정리는, P의 가정이 P가 거짓임을 함의하면 P는 거짓이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이것이 귀류법 (reductio ad absurdum)의 원리이다. 또 다른 정리는, Q가 R을 함의할 때 P가 Q를 함의하면 P는 Q을 함의한다고 적고 있다(이것은 아리스토첼레스의 삼단논법의 한 형태이다). 즉 임의의 명제P는 참이거나 거짓이다.
명제의 논리를 세운 뒤에, 저자들은 명제함수로 계속해 나아간다. 명제함수는 실제로 모임들이 지녀야할 성질을 기술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명제함수 "X는 붉은 것이다"는 모든 붉은 대상들의 집합을 표시한다. 한 모임을 정의하는 이 방법은 유한개의 모임뿐만 아니라 무한 모임도 정의할 수 있게 해준다. 이와 같이하는 것을, 모임의 원소를 열거하는 외연적 정의에 대하여, 내포적 정의라고 부른다.
물론 러셀과 화이트헤드는, 사물들의 모임이 자신을 원소로 포함하도록 정의될 때 일어나는 역리들을 피하려고 했다. 이 난점에 대한 그들의 해결은 "모임의 모든 원소에 관련된 것은 무엇이든지, 그 모임 자신을 원소로 가져서는 안된다"는 것을 요구한 것이었다. < 수학원리 > 에서 이런 제한을 시행하기 위하여 그들은 유형론(theory of types)을 도입했다.
유형론은 다소 복잡하다. 그러나 그 아이디어는 간단하다. 존 또는 어떤 특정한 책같은 각 개체는 0형(type 0)이다. 게체들의 성질에 관한 한 주장은 1형(type 1)이다. 개체들의 성질에 관한 것이거나 관련된 명제는 2형(type 2)이다. 모든 주장의 형은 그것이 어떤 낮은 형에 관하여 주장하는 것보다 높은 형이 된다. 집합이라는 말을 써서 표현하면, 유형론은 각 개체는 0형; 개체들의 집합은 1형; 개체들의 집합의 집합은 2형등으로 한다는 것이다. 이리하여 a가 b에 속한다면, b는 a보다 더 높은 형이 되어야만 한다. 또 이렇게 하면 자기자신에 속하는 집합을 말할 수는 없다. 유형론은 명제함수에 적용되었을 때는 실제로 약간 더 복잡해진다. 명제함수를 자신을 써서 정의된 어떤 것이든지 자신의 성분(argument, 변수의 어떤 값)으로 가질 수 없다. 그리고 명제함수는 변수들의 형보다 더 높은 형을 가진다.이 이론을 근거로하여, 저자들은 현재의 역리들을 검토하여 이 역리들이 제거됨을 보였다.
유형론을 써서 모순을 회피하는 것은 비수학적인 예를 보면 훨씬 분명하다. "모든 법칙은 예외를 가진다"라는 진술에서 제기되는 모순을 생각해 보자(9장). 이 진술은 "모든 책에는 오식이 있다"와 같은 특정한 법칙에 관한 것이다. 모든 법칙에 관한 그 진술이 흔히 그 자신에도 적용되는 것으로 해석되어, 예외 없는 법칙도 있다는 모순을 이끄는 반면에, 유형론에서는 일반적인 법칙은 더 높은 형이므로 특정한 법칙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은 그 자신에 적용될 수 없다. 따라서 일반적 법칙은 예외를 가질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이논리적인 역리 -- 자기 자신에게 적용되지 않는 단어를 이논리적 단어라 정의할 때의 역리 -- 는 모든 이논리적 단어의 정의이고, 따라서 어떤 이논리적 단어보나 높은 형이된다. 그러므로, 이논리적이라는 단어자신이 이논리적인지 아닌지의 문제는 제기할 수 없다. 어떤 특정한단어, 가령 짧다(short)가 이논리적인가 아닌가하는 것은 물을 수 있다.
거짓말쟁이의 역리 역시 유형론으로 해결된다. 러셀이 말한 바와 같이, "나는 거짓말을 하고있다"라는 진술은 "내가 주장하는 명제가 있는데, 그것은 거짓이다"임을 의미한다. 즉, "나는 한 명제 P를 주장하는데, P는 거짓이다"라는 뜻을 나타낸다. 만약 P가 n차의 형이면 P에 관한 주장은 그보다 높은 형이다. 그러므로 P에 관한 주장이 참이면 P자신은 거짓이고 P에 관한 주장이 거짓이면 P는 참이다. 그러나 거기에는 아무런 모순이 없다. 마찬가지 용법으로, 유형론은 리샤르의 역리를 해결한다. 모두가 낮은 형의 진술에 관한 높은 형의 진술에 관련된 것이다.
분명히 유형론은 진술들이 형에 따라 조심스럽게 구분되어져야 함을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유형론에 따라 수학을 건설하려 시도한다면 그 전개는 터무니없이 복잡해진다. 예를 들면, < 수학원리 > 에서 두 대상 b와 a가 같다는 것은, a에 적용되거나 또는 a에 관하여 성립하는 모든 명제함수는 b에 적용되거나 b에 관하여도 성립하고, 또 그 역도 성립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이들 여러 가지 주장들은 서로 다른 형들이다. 결과적으로, 같다는 개념은 다소 복잡하다. 마찬가지로, 무리수는 유리수를 써서 정의되고, 유리수보다 높은 형이고, 유리수는 자연수보다 높은 형이다. 그러므로 실수계는 서로 다른 형의 수들로 구성되어 있다. 따라서 실수 전체에 대한 정의를 주장할 수는 없으며, 각 형에 따라 따로따로 주장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어떤 형에 적용되는 정리는 다른 형에 자동적으로 적용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유형론은 실수들의 유계집합(bounded set)의 최소상계(least upper bound)의 개념에 관하여도 역시 복잡성을 도입한다(9장). 최소상계는 상계들 중 가장 작은 값으로 정의된다. 따라서, 최소상계는 실수의 집합에 의하여 정의된다. 그러므로, 그것은 실수들보다 더 높은 형이 되어야 하므로 그 자신은 실수일 수 없다.
이런 복잡성을 피하기 위하여 러셀과 화이트헤드는 약간 미묘한 환원공리(axiom of reducibility)를 도입하였다. 명제에 관한 환원공리는, 높은 형의 임의의 명제는 1형의 한 명제와 동등하다는 것을 주장한다. 명제함수에 관한 환원공리는, 1변수 또는 2변수의 임의의 함수는, 변수의 형에 관계없이 같은 개수의 변수를 가지는 1형의 함수와 같은 확장을 가진다는 것을 말한다. 이 공리는 < 수학원리 >에서 사용된 수학적 귀납법을 지지하는 데에도 필요했던 것이다.
명제함수를 다루고 난 다음에 저자들은 관계의 이론(theory of relations)을 다루었다. 관계는 두 개 이상의 변수를 가진 명제함수를 써서 표시된다. 이리하여 "x는 y를 사랑한다"는 한 관계를 표시한다. 관계의 이론을 따르면, 명제함수를 써서 정의된 모임이나 집합의 분명한 이론이 나온다. 이런 기초 위에서 저자들은 자연수의 개념의 도입을 준비하였다.
물론, 자연수의 정의는 상당히 흥미있다. 이것은 모임들 사이의 일대일 대응이라는 앞에서 도입된 관계에 의존하고 있다. 만약 그 모임이 일대일 대응이 되면, 그들은 닮았다(상사, similar)고 말한다. 모든 닮은 모임들은 공통성, 즉 그들의 수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많은 모임들은 또 다른 이같은 공통성을 가질는지도 모른다. 러셀과 화이트헤드는 프레게가 한 것처럼, 모임의 수(집합수,기수)를 주어진 모임과 닮은 모임들 전체의 모임으로 정의함으로써 그것을 피하였다. 이리하여 3이란 수는 세 개의 원소를 가진 모든 모임들의 모임이며, 세 원소로 된 모임을 모두 x≠y≠z인 (x, y, z)로 표시하였다. 수의 정의는 일대일 대응의 개념을 미리 가정하므로, 그 정의는 순환적이라 보일는지 모른다. 그러나, 저자들은 관계가 일대일 이라는 것은, x와 x'이 y와 관계가 있을 때 x와 x'는 동일하고, x가 y와 y'과 관계가 있을 때 y와 y'은 동일하다라는 의미임을 지적하였다. 그러므로, 일대일 대응의 개념은 "일"이라는 말로 표현하였지만, 수 1에 관련된 것은 아니다.
자연수를 구성한 뒤에는 실수와 복소수의 체계, 함수, 해석학 전체를 세우는 것은 가능하다. 기하학은 좌표와 곡선의 방정식을 사용함으로써 수에 관한 수학을 통하여 도입할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하여 러셀과 화이트헤드는 두 개의 공리를 더 도입하였다. 명제함수를 써서 우선 자연수를 정의하고 더 복잡한 유리수와 무리수를 정의한 뒤에, 초한수마저 도입하는 과정을 수행하기 위하여 러셀과 화이트헤드는 무한모임 (논리의 용어를 써서 알맞게 정의된 모임)이 존재한다는 무한공리(axiom of infinity)와 선출공리(4장)를 도입하였는데, 이것은 유형론에서 필요하다.
지금까지 말해온 것이 논리학파의 거대한 프로그램이다. 이 학파가 논리 자체에 관하여는 무엇을 하였는가 하는 것은 이야기가 길어지지만, 여기서는 아주 간략하게 줄인다. 우리가 강조하여야만 할 것은, 논리학파가 수학을 위해서 한 일은 논리 위에 수학의 기초를 세우려는 것이었다. 수학은 논리학의 법칙과 주제를 자연스럽게 확장한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었다.
수학에 대한 논리학파의 접근 방식은 많은 비판을 받았다. 환원공리는 많은 사람들에게 매우 임의적인 것으로 보였기 때문에, 많은 반대를 불러일으켰다. 이 공리가 거짓이라는 증명도 없지만, 그것이 옳다는 증거 또한 부족하다. 어떤 사람은 이 공리를 다행스런 사고이지만 논리적 필요는 아니라고 말하였다. 램지 Frank Plumpton Ramsey는 논리학파의 이론에 공감하고는 있었지만 "그런 공리는 수학에서 설 자리가 없다. 그리고, 그것을 사용하지 않으면 증명할 수 없는 것은 증명되었다고 전혀 볼 수 없다"라는 말로 그 공리를 비판했다. 또 다른 사람들은 이것을 지성의 희생물이라 불렀다. 바일 Herrmann Weyl은 솔직하게 이 공리를 선언하였다. 아마도 가장 심각한 의문은, 그것이 논리의 공리인가 하는 점과, 따라서 수학이 논리 위에 세워진 것이라는 주장이 실제로 구체화되었는가 하는 문제이었다.
프앙카레 Henri Poincare (1854-1912) 는 1909년에 환원공리는 실제로 그 공리로 증명되는 수학적 귀납법의 원리보다 더 문제성이 있고 덜 분명하다라고 말했다. 이 공리는 수학적 귀납법의 변장된 꼴이다. 그러나 수학적 귀납법은 수학의 한 부분이고, 수학을 세우는 데 필요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모순성을 증명할 수 없다는 것이다.
러셀과 화이트헤드가 < 수학원리 > (1910)의 초판에서 그 공리에게 부여한 정당화는 이것이 어떤 결과들에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그것을 사용하는 데 관하여 분명히 편안하지는 않았다. 그 책에서 그것을 변호하기 위하여 저자들은 다음과 같이 썼다.
환원공리의 경우에는, 그것을 지지해 주는 직관적인 증거가 매우 강하다. 왜냐하면, 그것을 허용하는 추론과 그것으로부터 얻어지는 결과들을 나타난 바와 같이 모두 옳다. 그러나 비록 공리가 거짓이 되어야만 한다는 것은 결코 증명할 수 없을 것으로 보이지만, 그것이 다른 보다 기본적이고 보다 명백한 어떤 공리로부터 연역되어 나온다는 것이 발견될 수 있으리라는 것은 결코 증명할 수 없을 것이다.
후에 러셀 자신은 환원공리의 사용에 관하여 더 깊은 관심을 가졌다. 그의 저서 < 수리 철학 서설 > (1919)에서 말하기를
이 엄밀한 논리적 견지에서 보면 환원공리는 논리적으로 필요한 것이라고, 즉 모든 가능한 세계에서 참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은 의미에서, 믿을 어떤 이유도 없다. 그러므로 가령 이 공리가 경험적으로는 참이라 하더라도 이것을 논리학의 체계에 받아들이는 것은 논리학의 큰 결함이다.
< 수학 원리 > 제 2판 (1926)에서 러셀은 환원공리를 고쳤었다. 그러나 이것은, 고도의 무한을 허용하지 않는 것, 최소상계의 정리를 제거하는 것, 수학적 귀납법의 사용을 복잡하게 하는 것등의 여러 가지 곤란성을 만들어내었다. 러셀은 다시 환원공리는 더 명백한 공리로부터 이끌어내어질 수 있기를 희망한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그는 다시 이 공리에 논리적 결점이 있음을 시인하였다. 러셀과 화이트헤드는 < 수학원리 > 제 2판에서 다음과 같이 동의했다. "이 공리는 순전히 실용적인 정당성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바라는 결과 이외는 아무것도 이끌어내지 않는다. 그러나 분명히 우리가 만족할 수 있는 종류의 공리는 아니다" 그들은 그것이 올바른 결론으로 이끈다는 사실이 남을 수긍케하는 논법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환원공리를 사용하지 않는 논리학으로 수학을 환원시키려는 많은 시도가 행해졌으나, 아무도 깊이 있게 추구하지는 못했고, 그들 중 일부는 그릇된 증명을 만들어 냈다는 근거로 비난을 답았다.
논리학과 기초론에 관한 또 다른 비판은 무한공리를 반대하는 방향의 것이었다. 이 공리에 대한 믿음은 산수의 전체 구조가 본질적으로 이 공리가 참이라는 데 달려있다는 사실에 있는 반면, 이것이 참임을 믿을 만한 약간의 이유도 없으며, 더 좋지 않은 것은 이것이 참이라는 것을 결정하는 데 이르는 방법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더욱이 이 공리가 논리의 공리인가 하는 의문이 있다.
러셀과 화이트헤드에게 공정하게 말해서, 그들이 무한공리를 논리의 한 공리로 받아들이는데 주저했다는 것은 마땅히 지적되어야 한다. 그들은 그 공리의 내용이 "실제로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factial look)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당황하였다. 그것의 논리성뿐만 아니라 그것이 진리라는 것까지도 그들은 괴롭혔다. < 수학 원리 >에서 "개체"(individual)라는 용어에 관하여 제안된 해석 중의 하나는, 궁극적인 입자 즉 우주를 구성하는 원소들이라는 것이었다. 이리하여 무한공리는 논리적인 용어 속에 들어 있으면서도, 우주가 유한 또는 무한개의 궁극적 입자들로 구성되어지느냐 하는 문제를 제기한 것처럼 보인다. 이 문제는 아마도 물리학에서 해답이 얻어질 수 있을 것이지만. 확실히 논리학으로는 해답이 얻어지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한집합이 도입되어져야만 한다면, 또 무한공리를 사용함으로써 얻어지는 수학의 정리들이 논리학의 정리들임을 증명하려 한다면, 이 공리를 논리학의 공리로 받아들이는 것이 필요한 것처럼 보인다. 요약하면 수학이 논리학으로 "환원"되려면, 논리학은 무한공리를 포함해야 되는 것으로 보여진다.



http://www.postech.ac.kr/dept/math/study/read/read017-foundation.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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