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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04/03 (01:20) from 80.139.185.19' of 80.139.185.19' Article Number : 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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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이트헤드의 [과정과 실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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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 7. )
화이트헤드의 {과정과 실재}


                                                                문 창 옥


1.

 화이트헤드는 20세기 어느 유파에도 속하지 않았고 그에게 영향을 준 특정인을 지적하기도 어려운 철학자이다. 이것은 화이트헤드의 사상이 그 자체로 이해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기는 하지만 {관념의 모험}(Adventures of Ideas) 서두에 있는 당대의 주류철학에 대한 그의 비판적 평가는 그의 철학적 성향에 접근할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한다. 여기서 그는 당시를 둘러싸고 있던 상반된 두 진영의 철학, 논리실증주의가 구상한 합리주의와 니체와 베르그송 유의 비합리주의를 모두 비판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그의 이런 평가에서 우리는 그가 이들 어느 쪽에도 동참하기를 거부하고 있었음을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다. 말하자면 그는 인간 이성에 대한 독단적 확신도 독단적 불신도 모두 거부하고 있었던 셈이다.
 {과정과 실재}(Process and Reality)는 이처럼 화이트헤드가 이성에 대한 지나친 낙관이나 지나친 비관으로 경도됨이 없이, 전통의 철학을 해체하고 당대의 분위기 밖에서 체계로서의 철학을 실험하고 있는 현장으로 나타나 있다. 이 저술은 분명 지적 경계를 혁신했던 몇 안 되는 사례들 가운데 속할 것이다. 그것은 방대하면서도 독창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복잡한 신조어로 무장한 다양한 면모의 관념들을 엮어 놓고 있는 이 책은 일반인이 읽기에 부담스러운 것도 사실이다. 그렇기는 하지만 우리가 근대 철학에 대한 선이해를 조금 가지고 열린 마음으로 이 책을 읽는다면 그가 구사하는 특이하거나 낯선 용어들이 어째서 필요했는가를 아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들의 필요성에 공감하게 된다면 그만큼 우리는 화이트헤드 사상의 경계 안으로 들어서는 셈이 될 것이다.
 {과정과 실재}는 1927-28년 학기에 행했던 기포드 강의(Gifford Lectures) 내용을 기본 골격으로 하고 있다. 그것은 사변철학을 위한 강의였다. 그는 사변철학을, '우리의 경험의 모든 요소들을 해석해낼 수 있는 정합적이고 필연적인 일반관념들이 체계를 축조하려는 시도'라고 정의한다. 그는 자신의 이런 시도에서, 우리가 향유하고 지각하고 의지하고 생각하는 것으로 의식하는 모든 것들이 일반적인 체계적 도식의 특수한 사례임을 보여주고자 했다. 따라서 그의 체계는 일종의 해석학적 존재론이다. 다양한 영역과 층위의 경험에 의미를 부여하기 위한 존재기술인 것이다. 동시에 그는 무엇인가의 의미를 포착한다는 것, 곧 이해한다는 것은 그것들을 다른 것들과 함께 고찰하는 것이며 서로 필요로 하는 것으로 고찰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고립된 존재, 또 그런 것으로 의미를 확정할 수 있는 존재란 신화의 산물이다. 그것이 신이든 뉴턴 물리학의 물질입자이든 사람이든 사물이든. 모든 존재는 상호 연관적이다. 따라서 이들을 온전히 기술하는 체계 또한 그 본래적인 의미에서 정합적일 수밖에 없다.


2.

 {과정과 실재}는 다섯 부로 이루어져 있다. 제I부는 존재 기술을 위한 기본 범주들을 간략한 설명과 함께 열거하고 제II부에서는 이들 범주를 철학사의 다양한 논의를 배경으로 실험한다. 제III부와 제IV부는 그가 기장 궁극적인 단위 존재로 구상한 '현실적 존재'를 분석적으로 해명하고 제V부는 신의 문제를 다룬다. 우리는 대략 이 순서에 따라 화이트헤드가 {과정과 실재}에서 밟아간 여정을 개괄해 볼 것이다.
 {과정과 실재}의 기본 이념은 표제어 그대로 '실재는 과정이다'라는 언명으로 요약된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선행하는 과정의 결실에서 생겨나 새로운 요인을 구현함으로써 세계에 새로운 무엇인가를 첨가하는 자기실현의 과정이라는 것이다. 이 존재 과정의 밑바닥에는 새로운 종합을 끊임없이 산출하려는 힘인 영원한 활동성이 관통한다. 화이트헤드는 이를 '창조성'(creativity)이라 부른다. 우주는 이 창조성의 산물들 즉 그 개별적 구현체들로 구성되어 있다. 창조성은 그 다수(many)의 구현체들을 새로운 일자(one)로 종합하는 보편적 에너지이다. 화이트헤드의 범주적 도식에서 이들 세 관념 즉 창조성, 다, 일은 '궁극자의 범주'(category of the ultimate)로 나타나 있다. 이들은 그의 다른 모든 형이상학적 범주들에 전제되는 최고의 일반성을 지닌 궁극적 관념이라는 것이다. 그렇기에 이들은 별개로 놓아 각기 정의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들은 한정하는 보다 일반적인 개념이 없기 때문이다. 이들은 상호 연관 속에서 의미를 얻을 뿐이다. 요컨대 '다에서 일로의 창조적 전진'이 그것이다. 이 창조적 전진의 사태는 그밖의 어떤 것에 의해 설명될 수 없고 직접적인 직관적 경험에 의해 포착될 뿐이다.
 화이트헤드의 우주론에서 가장 구체적인 단위 존재로 등장하는 '현실적 존재'(actual entity, 또는 약간의 의미 차가 있기는 하지만 '현실적 계기'라고도 불린다)는 바로 이런 창조적 전진을 구현하는 기본 사례이다. 그것은 세계를 구성하는 궁극적인 실재적 사실이다. 보다 더 실재적인 것은 없다. 신도 현실적 존재요 우주 속의 하찮은 먼지도 현실적 존재이다. 그 중요성에서 차이가 있긴 하지만 적어도 원리적 측면에서 보자면 모두 동일한 지평에 있다. 그래서 화이트헤드의 체계에서 초월적·절대적 존재 지평은 사라진다.
 현실적 존재는 다수의 다른 존재들을 자기화하는 과정으로 존립한다. 그것은 다수의 타자를 자기의 것으로 만들어 가는 과정적 존재요 관계적 존재이다. 화이트헤드는 이 때의 자기화 활동을 '경험'이라 통칭한다. 그래서 존재는 경험의 구성체라고 할 수 있다. 실재가 경험 그 자체라는 학설은 윌리엄 제임스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제임스는 결코 이를 기초로 형이상학을 구상하지 않았다. 화이트헤드는 현실적 존재가 경험의 계기(occasion)이라는 형이상학적 특성을 갖고 있다는 가설을 채택하였다. 이런 존재 이해는 화이트헤드의 철학을 전통 철학의 문맥에서 급격히 일탈케 하였다. 철학사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실체, 자아, 모나드, 물질적 원자 등을 존재의 기본 단위로 실험해 왔다. 화이트헤드는 이제 전혀 다른 유형의 존재, 곧 경험을 통해 생성하는 존재를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화이트헤드가 경험의 계기를 현실적 존재로 택한 가장 중요한 이유는 그가 구체적인 직접 경험에 대해 갖고 있는 애착이다. 직접적 경험은 가장 완벽한 사실인 데 반해 다른 모든 것들은 창백한 추상이다. 물질적 존재나 영혼과 같은 어떤 정태적인 실체가 있고 이들은 이들이 겪는 순간 순간의 경험에서 어떤 역사적 특성들을 획득해 간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순간 순간의 경험이 궁극적 실재이며, 정태적 실체는 이 구체적 실재들로부터의 추상이다.
 물론 이 존재 일반의 경험은 의식을 전제로 하지 않는다. 의식은 고등 유기체가 그 자신의 세계 가운데 어떤 부분을 조명하는 가변적인 요소이다. 우리 인간조차도 의식하기에 앞서 우주를 '경험'하며 우리는 의식에서 우주의 세부 사실들을 선택 수용할 뿐이다. 따라서 화이트헤드에게 의식은 기본적인 범주가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인간의 경험에서조차도 항상 내재하는 것이 아닐 정도로 우주 내의 모든 경험의 방울에 본질적인 것이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 사유나 지각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할 수 있다. 경험 개념에 대한 이런 확대된 이해는 화이트헤드 철학에서 무엇보다도 먼저 주목해야 할, 근대 인식론 철학과의 차이로 자리해 있다.
 그런데 현실적 존재가 경험의 계기라고 하는 것은 그것이 일정 부분 타자 의존적인 것이라는 점을 함축한다. 그것은 이미 생성한 존재들을 경험의 객체로서 필요로 한다. 그것의 생성 과정은 이 다수의 타자들에 대한 경험을 통합하여 하나의 경험으로 통일시키는 과정이다. 타자 각각을 통일된 향유 속으로 이끌어들이는 경험의 사유화(私有化) 작용은 '느낌'(feeilng) 또는 '파악'(prehension)이라 부른다. 이들 파악을 하나의 복잡한 파악으로 통일시키는 현실적 존재의 내적이고 미시적인 과정은 '합생'(concrescence)이라 부른다. 그래서 말하자면 현실적 존재의 합생 과정은 그 과정이 시작되기 전에 존재하는 여건들(data), 즉 경험의 객체들을 통합하여 일자인 경험의 주체 자신을 만들어가는 과정인 셈이다. 그래서 또한 주체-객체 관계는 경험의 가장 근본적인 구조적 패턴이라고 할 수 있다.
 인식론 철학에서 주체-객체 관계는 의식적 정신과 인식되는 대상 사이의 관계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현실적 존재의 경험 일반을 범주화한 파악이라는 개념은 훨씬 더 넓고 근본적인 존재론적 관계이다. 그것은 존재가 다른 존재와 맺는 정서적(emotional) 관계이다. 모든 파악은 그 본질적인 요소로 그것의 '주체적 형식'(subjective form)을 동반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그 주체가 그 대상을 경험하는 방식, 곧 정서적 색조이다. 주체는 이런 저런 가능태로서의 객체를 중요한 것, 사소한 것, 또는 관계없는 것, 바람직하지 않은 것 등으로 느낀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화이트헤드는 파악의 주체적 형식을 가치평가라고 말한다. 화이트헤드는 중립적인 대상에 대한 가치 중립적인 경험이 아니라 정서적 느낌이 기본적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수학적 패턴을 제외하고는 여건은 결코 중립적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예컨대 빨간 색은 따뜻함으로, 파란색은 차가움으로 다가온다.
 또한 이미 짐작할 수 있는 사실이겠지만 파악은 논리적·정태적 관계가 아니라 객체를 주체의 구성 속에 이끌어들이는 관계활동, 또는 이행(transition)이다. 그것은 정태적인 사태가 아니라 '벡터'(vector)이다. 그것은 저기에 있는 것을 느끼고 그것을 여기에 있는 것으로 변형시키기 때문이다. 파악은 벡터와 마찬가지로 화살표로 상징될 수 있다. 이때 화살은 저기-과거에서 여기-현재로 달린다. 그래서 그것은 시공간적 연장을 동반하는 관계이다. "저기"는 아무리 미소한 시간차라 하더라도 시간에 있어 지금 이전에 있고, 공간에 있어 "여기" 밖에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화이트헤드가 품고 있는 실재론을 대변한다. 화이트헤드는 칸트와 반대로 어떻게 주체적 경험이 객체적 세계로부터 출현하는가를 문제삼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적 존재는 우주를 구성하는 미시적 존재로, 우리가 일상적 외적인 감각경험에서 현실적 존재들의 어떤 명확한 원형적 사례를 발견하기는 어렵다. 대개의 경우 우리의 눈에 들어오는 것은 다수의 현실적 존재들 간의 상호 파악에 의해 결합된 하나의 전체로서의 거시적 존재들이다. 화이트헤드는 이들을 '결합체'(nexus)라 부른다. 우리가 경험하는 일상의 사물들은 물론이요 우리가 보다 가까이 직접적으로 경험한다고 할 수 있는 우리의 신체도 결합체이다. 그래서 화이트헤드는 직접적인 경험의 궁극적 사실은 기본적으로 현실적 존재, 파악, 결합체뿐이라고 말한다. 우리의 경험에 있어 그밖의 모든 것은 파생적인 추상들이다.
 추상적 유형의 존재들 가운데 가장 단순한 유형의 존재는 무규정적 창조성과 대별되는 규정자인 영원한 객체들(eternal objects)이다. 이들 존재는 플라톤의 형상을 번역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은 현실적 사태를 규정하는 가능적 형식이다. 이들은 감각적 특성, 기하학적 및 수적 특성, 정서적·의지적 특성 등을 이루는 패턴들이다. 생성의 과정에 있는 모든 현실적 존재는 무수한 가능성들로서의 이들 특성 가운데 일부를 선택하여 파악함으로써 그 자신을 한정한다. 화이트헤드는 선행하는 현실적 존재에 대한 파악인 물리적 느낌(physical feeling)과 구별하여 이들 영원한 객체에 대한 파악을 개념적 느낌(conceptual feeling)이라 부른다.
 그리고 물리적 느낌으로 이루어지는 현실적 존재의 측면을 물리적 극(physical pole)이라 부르고 개념적 느낌으로 이루어지는 현실적 존재의 측면을 정신적 극(mental pole)이라 부른다. 이를 통해 화이트헤드는 정신과 신체가 구별되는 별개의 존재라는 학설을 거부한다. 그에게 있어 정신과 신체의 문제는 일종의 사이비 문제이다. 왜냐하면 이와 관련한 모든 논란은 현실적 계기 벌이는 두 가지 활동 양태의 어떤 대비로부터 추상된 것을 가지고 씨름하고 있는 데 불과하기 때문이다. 현실적 계기는 경험의 계기라 했다. 그렇기에 그것의 물리적 극은 불변하는 실체라는 의미의 물질로 구성된 것일 수 없다. 각 계기의 물리적 활동은 과거의 현실적 존재를 순응적으로 수용하는 측면이다. 그래서 비교적 안정적이다. 이에 반해 정신적 극은 계기가 새로운 가능성을 이끌어 들인다는 점에서 계기가 벌이는 창조적 활동의 측면이다. 정신성의 정점에 놓인 의식은 이런 창조적 활동의 극단을 구현한다. 그래서 의식 중추를 이루는 현실적 계기들은 과거에 대한 순응보다는 그로부터의 일탈을 특징으로 지니게 된다. 모든 현실적 계기는, 비록 그 정도에서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이 두 극의 통합된 활동의 산물이다.
 그런데 한정의 형식으로서의 영원한 객체는 한 계기에 실현된 후, 후속하는 계기에 의해 계속해서 재차 파악됨으로써 반복 실현될 수 있다. 여러 현실적 계기들로 구성된 결합체 가운데 특정의  영원한 개체들을 이렇게 반복해서 파악하고 있는 결합체를 화이트헤드는 '사회'(society)라 부른다. 그리고 이렇게 파악되는 영원한 객체는 그 사회의 한정자 즉 '한정 특성'(defining characteristics)을 이룬다. 이 범주를 통해 생성 소멸의 철학은 실체 철학의 근간이 되었던 사태를 설명한다. 사회와 한정특성에 대한 논의는 화이트헤드의 철학이 변화의 철학이긴 하지만 우주의 모든 존재가 극단적으로 유동하고 있는 것으로만 보고 있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적어도 사회처럼 역사성을 가지는 존재는 어떤 일정한 한계 내에서 반복에 기초한 동일성을 유지한다. 그렇기에 또한 그것은, 생성 소멸할 뿐 변화한다고 말할 수 없는 현실적 계기와 달리 '변화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변화 속에서 어떤 동일성을 띠고 나타나는 것은 밑바탕에 있는 실체 때문이 아니라 한정특성을 구성하는 그 형상 때문이다. 그래서 그것은 물리과학이 다루는 물리적 사물과 인격적인 동일성을 뒷받침한다. 물론 이들은 더 이상 형이상학적 절대자가 아니라 가변적인 복합체이다. 모든 사회는 생멸의 운명 아래 있다. 화이트헤드의 우주는 이렇게 생멸하는 사회들의 중층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그것은 보다 큰 사회 속에서 생겨나고 소멸하는 사회들로 구성되어 있는 것이다. 우주  그 자체도 하나의 사회이다. 자연과학이 논하는 자연법칙은 이 우주시대를 규정하고 있는 한정 특성의 일부를 반영한다. 따라서 그것도 형이상학적 보편성을 지니는 것일 수 없다. 물리적 우주의 쇠퇴는 지금 지배적인 파악들이 보여주는 패턴의 쇠퇴로 해석될 수 있다. 새로운 질서에 의해 한정되는 새로운 사회들이 다른 우주시대에 등장할 것이다. 우리의 우주 자체가 새로움을 향해 돌진하고 있는 셈이다.


3.

 지금까지는 현실적 존재의 체계 내적 지위와 이를 둘러싸고 있는 몇 가지 기본 범주들을 중심의 화이트헤드의 존재 이해와 우주론을 요약해 보았다. 이제 현실적 존재 자체에 대한 분석적 기술을 간략히 살펴보자. 화이트헤드는 현실적 존재의 내부에 대한 기술에서 인간의 온갖 활동과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세계의 기본 구조를 설명하고 있다. 그만큼 대단히 복잡하고 난해하다. 우리는 기본 골격만을 추려볼 것이다. 화이트헤드는 현실적 존재를 두 가지로 분석한다. 발생론적 분석과 형태론적 분석이 그것이다. 이들 두 분석 방식은 각각 {과정과 실재}의 제III부와 제IV부의 논의를 구성한다.
 발생론적 분석은 경험하는 주체의 자기 창조 과정인 합생에 대한 분석이다. 그 발생의 첫 위상(phase)에서 현실적 계기는 단순히 통합을 위한 여건으로서의 선행하는 현실적 존재들을 파악한다. 물리적 느낌을 위한 여건은 그 현실세계 내의 현실적 계기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이들 계기를 구성하고 있는 느낌들이다. 이 위상에서 이들 느낌은 순응적으로, 즉 공감의 형식으로 파악된다. 이런 점에서 계기의 첫 위상은 과거 계기들의 작용인의 산물이다. 그러나 합생의 중간 위상으로 넘어가면서 현실적 존재는 자신이 구하는 이상(목적)에 비추어 이들 여건에 자신의 색채를 부여하는 보다 주체적인 과정을 진행시킨다. 그래서 합생은 목적론적 과정이 된다. 우선 그것은 첫 위상의 물리적 느낌에서 파생되는 개념적 느낌에 의해 질적인 평가를 수행한다. 그리고 이들 두 유형의 느낌들은 통합과 재통합을 거쳐 합생의 끝에 놓인 '만족'(satisfaction)의 위상에 이르면 하나의 복잡한 느낌으로 결정된다. 이 최종의 위상인 만족은 사실상 그 첫 위상에서 그 계기가 품었던 이상의 실현이다. 이 최종의 위상에서 현실적 존재는 미래의 존재가 느껴야 할 자신에 대한 예기적(anticipatory) 느낌을 포함한다. 이것은 생성의 완결로서, 후속하는 계기들에게 주어질 여건, 따라서 미래의 창조성을 제약하는 작용인의 역할을 하게 될 실재적 가능태로서의 자기 자신에 대한 느낌이다. 이렇게 현실적 존재의 합생 과정은 새로운 전망 속에 통일되기를 기다리는 환경 속에 객체들로부터 시작되어 계기가 구상하는 이상적인 자기 모습의 달성에서 종결되고 이어서 후속하는 생성의 새로운 주체들에 객체로 주어진다.
 여기서 유의해야 할 것은 화이트헤드에게 있어 경험의 주체는 경험에 앞서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외적 요인에 의해 창조된 것도 아니라는 점이다. 그것은 스스로 생성하는 주체, 생성하는 존재이다. 이 말은 완전히 결정되지 않은 과정의 상태에 있는 현실적 존재가 그 자신의 궁극적인 한정성을 결정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화이트헤드가 도덕적 책임의 문제를 논하는 것은 이 문맥에서이다. 다른 한편 그것은 화이트헤드가 현실적 존재에 유기체라는 기술적(descriptive term)용어를 적용하고 자신의 철학을 그렇게 부르는 중요 이유이기도 하다. 그는 유기체가 특정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환경적 요인들을 자신의 요소로 만든다는 사실에서 이를 유비적으로 추론해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처럼 현실적 존재가 작용인뿐만 아니라 목적인을 통해 이해되어야 한다는 화이트헤드의 발상은 고전적 사유를 이끌었던 목적인과 근대적 사유의 지배자였던 작용인을 화해시키고 있다.  
 나아가 현실적 존재가 첫째 위상에서 느끼는 작용인으로서의 우주와 마지막 위상에서 주체적으로 느끼는 우주의 차이는 그것이 발견한 다수의 공적인 실재와, 그것이 자신의 것으로 변형시켜 사적으로 경험한 현상 사이의 차이로 나타난다. 이 차이는 목적인에 따른 개념적 가치평가의 결과, 즉 정신적 극의 산물이다. 이것은 화이트헤드가 정신성은 통일하고 변형시키는 작인이라는 근대적 학설을 일반화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는 정신성이 단순화의 작인이라고 역설한다. 강력한 개념적 느낌을 가지는 현실적 존재는 그의 직접적인 환경 속에 있는 다수의 계기들에 공통된 성질들을 하나의 지배적인 인상으로 통합시켜 단순화한다. 그래서 여건들 사이의 세부적인 차이가 지워진다. 이것은 우리가 고도의 정신적 경험인 의식적 인식에서 다수의 생성의 원자들을 식별하지 못하고 거시적인 대상들만을 보게 되는 이유이다.
 그렇기는 하지만 인간의 온전한 지각 경험은 단순한 현상만을 포착하지 않는다. 그것은 실재와 현상간의 어떤 결합을 포착한다. 화이트헤드에 따르면 인간의 지각 경험은 과거의 환경에 대한 물리적 느낌과 이를 계승하는 신체의 물리적 느낌에서 출발한다. 이런 물리적 느낌을 화이트헤드는 '인과적 효과성(causal efficacy)의 지각'이라 부른다. 이들 느낌을 통해 외부의 인과적 작인은 희미한 정서적 박동의 형식으로 수용된다. 인간 신체의 여러 기관을 구성하는 현실적 존재들은 선택적 증폭기의 역할을 한다. 특히 대뇌의 의식 중추를 구성하는 현실적 존재들은 이들 인과적 느낌들을 끌어 모아 변환·강화시켜 특정한 색채나 냄새 등의 감각여건으로 바꾸어 놓는다. 이 과정에서 최초의 물리적인 인과적 느낌들은 개념적 느낌 아래로 가라앉는다. 이것을 화이트헤드는 '현시적 직접성(presentational immediacy)의 지각'이라 부른다. 전통 철학은 인과적 효과성을 도외시하고 현시적 직접성에 주목해왔다. 무엇보다도 후자가 명확하고 명료하여 삶에 유용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화이트헤드는 실천적 유용성에 의해 철학적 사변이 왜곡되는 것을 경계한다. 대표적으로 근대 인식론은 명석 판명성의 유용성에 현혹되어 현시적 직접성의 지각에만 매달린 결과 유아론적 상황으로 빠져들었다. 화이트헤드는 인간의 지각이 현실적 직접성의 지각 내용을 통해 인과적 효과성의 지각내용을 해석하는 작용으로 이루어진다고 주장한다. 우리의 일상적인 지각은 두 양태의 지각, 즉 실재에 대한 지각과 현상에 대한 지각이 상호 연관되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화이트헤드는 이런 지각 양태를 '상징적 연관'(symbolic reference)이라 부른다. 이것은 근대 인식론 철학을 비판하면서 화이트헤드가 구상한 감각지각의 인식론이다.
 나아가 현상에 대한 이론에서 화이트헤드는 진리관계, 의식적 판단과 인식 등이 어떻게 파악과 이들의 통합에 관한 그의 일반 이론이 제공하는 문맥에서 설명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진리관계는 현상과 실재의 대응으로 이해된다. 의식적 판단 내지 인식은 주어진 사실로서의 결합체에 대한 느낌과, 가능한 사실로서의 그 결합체, 즉 명제에 대한 느낌(요컨대 명제적 느낌,)과의 결합으로 이루어진다. 말하자면 의식은 '사실'과 '사실일 수 있는 것' 사이의 대비를 느끼는 방식이다. 대비가 명확한 만큼 의식도 명확해진다. 이런 대비는 부정적 지각에서 특히 부각된다. 즉 회색으로서의 돌에 대한 지각이 집중된 의식을 동반하지 않고 흔히 일어나는 반면 회색이 아닌 것으로서의 돌에 대한 지각은 명확한 의식을 동반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화이트헤드가 "부정적 지각은 의식의 월계관"이라고 말하는 것은 이런 맥락에서이다. 부정적 지각은 자유로운 상상과 일맥상통한다. 허위 인식도 유사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부정과 상상에 힘입어 우주에 여건으로 주어지지 않은 새로운 것이 우리의 경험에 도입된다. 상상적 예술과 문학의 가치도 궁극적으로 여기에 있다. 이들은 고도 의식의 산물이자 창조적 전진으로서의 경험을 가능케 하는 대표적인 작인이다.


4.

 현실적 존재에 대한 형태론적 분석은 그 자신의 생성을 끝낸 완결된 현실적 존재에 대한 분석이다. 이 때의 현실적 존재는 후속하는 모든 생성의 주체에 주어진 객체이다. 그것은 주체로서 소멸한 존재이다. 이는 그것이 더 이상 현실태가 아니라 후속하는 생성을 제약할 가능태라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의미에서 우주의 창조적 전진은 연속적인 것이 아니라 단속적인 창조적 행위들로 이루어진다. 자기구성 중에 있는 현실태로서의 현실적 존재는 원자적인 것으로 분할 불가능하다. 분할할 경우 그 현실성이 사라진다는 것이다. 그러나 자기 구성을 마친 가능태로서의 현실적 존재는 무한히 가분적이다. 그것이 가지는 이 가분성은 시공간이론의 기초가 되는 '연장적 연속체'(extensive continuum)의 기본 속성에 속한다.
 연장적 연속체는 연장성과 가분성에 기초한 소수의 관계적 특성만을 지닌다. 우리가 익숙해 있는 시공간의 차원적 성격과 계량적 성격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특정한 우주의 국지적인 특성에 불과하다. 이들은 연장적 연속체를 이 우주가 특화하여 구현하고 있는 우연적 요소들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형이상학적인 연장적 연속체는 그 관계항으로 현실적 계기들이 점유하는(또는 점유하게 될) 영역들을 관계항으로 하여 구성되는 가능적 네트워크이다. 각 현실적 계기는 그 과거의 현실세계가 현실화한 이런 가능적 관계성의 네트워크를  계승하고 그 관계항을 이루는 특정 영역을 파악, 점유함으로써 자신의 시공간 양자를 현실화시킨다. 흔히 연속적인 것으로 간주되는 시공 연속체는 이들 생성의 계기(succession)와 병치 관계로 현실화한다. 따라서 현실적 존재는 시공간에 존재론적으로 선행한다. 그리고 시공간은 원자적 생성 과정에 선행하는 현실태가 아니라 원자적 생성에 힘입어 비로소 현실화되는 가능태이다. 그것은 가능적 연속체이다. 시간과 공간은 현실적 계기들의 생성을 떠나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5.

 {과정과 실재}는 새로운 형이상학적 신학에서 정점에 이른다. 화이트헤드는 그의 우주론에 종교의 섬세한 직관을 끌어들이고자 했다. 그는 인류가 다양한 방식으로 향유해온 종교적 직관이 유동과 대비되는 영속성의 요소를 제공한다고 생각한다. 그가 신을 말하는 이유는 이런 유의 경험에 의미를 주기 위해서이다. 그에 따르면 신은 현실적 존재이다. 다른 시간적 계기들과 마찬가지로 그것은 양극성을 갖는다. 정신적 극을 이루는 '원초적 본성'(primordial nature)과 물리적 극을 이루는 '결과적 본성'(consequent nature)이 그것이다. 전자는 영원한 객체들 전체를 질서지어 파악한다. 이 파악에서 신은 초월성과 영속성을 얻는다. 그리고 순수한 가능태로서의 영원한 객체들은 신에 의해 파악됨으로써 현실적 근거를 마련한다. 현실적 계기들은 그들의 한정자, 즉 이상을 신의 이러한 파악에서 얻는다. 역으로 말해서 신은 합생의 시초에 그것에 이상을 제공하는 자로서 현실세계에 관여한다는 것이다. 이런 관여에 의해 이상적인 것들이 시간적 세계에 작동되고 질서의 형식이 생겨난다. 이것은 화이트헤드가 사물의 기초에는 개념적 느낌의 무제약적 현실태 즉 신이 있다고 말할 때 의미하는 것이다. 하지만 신의 관여는 강요가 아니라 설득으로 이루어진다. 따라서 신의 기획은 시간적 세계에서 실패할 수 있다. 이것은 화이트헤드가 신에게서 전능의 관념을 배제하는 논리이다. 전능한 신은 시간적 세계에 자유와 새로움을 박탈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또한 신은 전통적 의미의 창조자가 아니다. 오히려 신이 창조성의 피조물이리고 말하는 것이 더 진실에 가깝다. 신은 '창조적 전진'의 근원적 사례로서, 다자로서의 영원한 객체들을 일자로 통일시키면서 탄생(이것은 논리적 의미이다)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신은 창조에 선행하지 않으며 다만 영속하는 원초적 본성을 통해 시간적 세계의 자기 창조에 관여하고 있다는 의미에서 창조자일 뿐이다.
 그러나 신의 원초적 본성은 신의 일부 특성이다. 존재-신학적 논의가 시도해왔던 것처럼 영속하는 초월적 실재와 일시적인 시간적 실재를 대비시키는 것은 후자를 부질없는 착각으로 만들기 십상이다. 화이트헤드는 유동하는 세계가 구현하는 새로움(novelty)과 무관한 영속성은 죽은 영속성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신을 현실적 존재라고 했을 때 이미 시사되었던 사실이다. 다른 시간적 존재와 마찬가지로 신은 유동하는 세계를 물리적으로 파악한다. 이런 파악으로 구성되는 신의 측면이 결과적 본성이다. 이 측면에서 신은 세계와 더불어 끊임없이 생성한다. 신 자신이 유동의 한 가운데 들어간다. 여기서 신은 현실적 존재를 규정하는 기본적인 범주적 조건, 즉 경험을 통해 자기를 구성하고 있는 존재라는 조건을 충족시킨다. 신은 유동하는 시간적 세계를 파악하는 가운데, 원초적 본성이 제공하는 초월성을 넘어 그 완전한 현실성을 확보한다. 결국 영속하는 현실태는 그 완결을 위해 유동을 필요로 하고, 생멸하는 현실태는 그 이상을 위해 영속하는 현실태를 필요로 한다는 것, 이것은 화이트헤드가 신은 세계를 창조하고 세계는 신을 창조한다고 말하면서 역설하는 신과 세계의 상호 의존성이다. 고립된 존재는 신화이다. 신이든 세계이든 인간이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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