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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신학논문은행에 대하여

2003/05/18 (00:00) from 80.139.182.85' of 80.139.182.85' Article Number : 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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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이트헤드 또는 격류(激流)의 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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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이트헤드 또는 격류(激流)의 우주

{과정과 실재}를 읽기 위한 비판적인 길잡이




장-끌로드 뒤몽쎌 Jean-Claude Dumoncel (이지훈 옮김)


옮긴이의 말

알다시피 프랑스에서는 영미 사상에 대한 평가가 인색하다. 그럼에도 화이트헤드는 일종의 예외에 속한다. 가령 메를로-퐁티(Merleau-Ponty)나 들뢰즈(Deleuze)처럼 프랑스 전통에 충실한 사람도 유독 화이트헤드 만큼은 매우 높게 평가한다. 왜 그럴까? 화이트헤드의 사상에는 플라톤으로부터 내려오는 서양 형이상학의 오래된 전통이 고스란히 들어 있기 때문일까?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화이트헤드는 현대과학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더했다.
새로운 해석? 화이트헤드에 따르면, 과학자들조차도 현대과학의 참된 메시지를 깨닫지 못한 채로 있다. 그들은 우주를 아직도 거대한 기계로 본다. 반면에 화이트헤드가 볼 때 현대과학은 실제로 이런 기계론보다는 유기체 이론을 뒷받침한다; 실체보다 흐름, 고립보다 관계, 기계보다 생명의 승리를 뒷받침한다.
그러므로 화이트헤드의 사상은 유기체 사상이다. 그런데 바로 이 점에서 중국 과학사가 니담도 말했듯이, 그의 사상은 서양에서 비주류 담론이며, 오히려 동아시아 전통의 주류 담론과 닿아 있다. 그럼에도, 현대과학의 내용을 풍부하게 담고 있다. 해설을 너무 어지럽게 늘어놓았는가? 한 마디로 줄인다면, 동양과 서양, 인문정신과 과학정신을 소통시킬 접면(interface)에 화이트헤드가 서 있다는 것이다. 이런 까닭에 우리는 화이트헤드를 읽어볼 욕심을 낸다.
그러나 주저 {과정과 실재}를 열어본 사람은 누구라도 느낄 수 있다. 그의 장점은 모두 걸림돌로 변한다. 풍부한 과학의 예증은 이내 지나치게 '과학'적으로 느껴지며, 잘 알려지지 않은 서양 문헌의 구석에서 끌어낸 구절들은 지나치게 '인문'적으로 느껴진다. 그리고 새로운 해석을 위해서 덧붙인 새로운 낱말들!
이 글은 프랑스의 철학 학술지(Archive de Philosophie, 47, 1984, 48, 1985)에 실린 뒤몽쎌의 논문이다. 최고 걸작으로 알려져 있다. 화이트헤드의 사상이 거의 빠짐없이, 또 분명하고 간결하게 들어 있다. 그러나 어렵다. 워낙에 까다롭고 넓은 체계를 한 번에 가두기가 어떻게 쉬울 수 있을까? 그럼에도 정독하면, 잃는 시간보다는, 얻는 즐거움이 클 것이다. 또한 이 글은 비교(比較)철학의 관점으로 서술되었다. 특히 라이프니츠와 현대 프랑스 철학을 많이 얘기했으므로, 화이트헤드를 통해서 거꾸로 이들을 새롭게 이해할 수도 있다. 덤으로 얻는 즐거움이다.
옮긴 글에서 {과정와 실제}(이하 PR)의 쪽수는 영어 원판(1969)과 한글판(오영환 역, 민음사)을 함께 썼다. 그리고 본디 저자가 단 각주에는 원주라고 썼고, 옮긴이가 쓴 주에는 따로 역주라고 썼다. 다만 역주에서 PR의 쪽수는 한글판을 가리킨다. 그리고 옮긴이는 읽기를 돕는 뜻에서 [  ] 속에 보충되는 말을 넣었다. 일찍이 오영환, 안형관 그리고 문창옥 선생 등의 노력이 없었더라면 이 번역은 처음부터 시도되지도 않았다.
*        *        *
요약 : 화이트헤드의 유명한 '절충주의'를 여기서는 비교(比較) 철학에 알맞은 토양으로 삼았다. 세 가지 접근 방향으로부터 그의 체계를 재구성하여 제시했다 : 1) 라이프니츠(Leibniz), 베르그손(Bergson)과의 유사성 2) 분석철학의 수수께끼 같은 만남. 적어도 러쎌(Russell)이라는 인물 속에서. 3) 수학과 현대 물리학에 대한 친숙함과 관심.


Ⅰ. 범주의 도식

화이트헤드의 철학은 전체적으로 볼 때 두 개념과 두 관계로부터 구성된다. 현행 계기(actual occasion)와 영원한 대상(eternal object), 두 개념이며, 진입(ingression)과 파악(prehension), 두 관계이다. 이때 '계기'와 '영원한 대상'은 각각 더 일반적인 존재(entit )에 속한다 : 사건과 대상. 말하자면 '계기'와 '영원한 대상'은 사건과 대상의 두 가지 특수한 경우이다.
사건은 '결코 두 번 다시 볼 수 없는 것'으로 정의된다 : 나의 출생은 두 번 다시 일어날 수 없다. 대상은 반면에 다시 나타날 수 있다. 이 꽃은 이미 피었기에 다시 새로 피지 않을 테지만, 나는 똑같은 산사나무 꽃(aub pine) 울타리 앞을 다시 지나갈 수 있다. 나무들은 잎을 떨어뜨리고 시들어 가지만, 나무라는 관념, 그것은 변치 않는다 : 이것이 '영원한 대상'이다.
한 사건은 또한 분석될 수 있다. 말하자면 한 사건은 더 근본적인 사건들의 계열로 분해될 수 있다 ; 그런데 분석이 더 나아가지 못하고 멈춰 서야만 할 때가 있다. 우리는 이때 화이트헤드가 '현행 계기'로 부르는 것에 이른다. 계기란 따라서 사건의 최소 단위(minimum)이며, 구체적인 지속의 참된 원자이며, 형이상학적인 세포이다. '현행 계기'에서 '현행'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뜻으로 넓혀진다 : '현행'적인 것은 '현실태'로 존재하는 반면에, 잠재(potentiel)적인 것은 가능(puissance)태로 존재한다.
사람들은 '영원한 대상'에서 플라톤이 말했던 '보편적인 것'들을 떠올릴 것이다 : '진입' 관계는 먼저 거기서부터 설명된다. 진입 관계는 플라톤이 말하는 관여(participation) 관계를 뒤집은 것이다 : 오직  가  의 본성에 참여할 때야 비로소  는  로 진입한다. 가령 빛은 밝음으로 진입한다. 진입은 따라서 '영원한 대상'을 현행의 영역으로 연결해준다. 즉, 단순히 가능성으로 존재하는 영원한 대상들을 계기(더 일반적으로는 '현행 존재')들의 영역으로 연결해준다.
한편 파악의 관계는 무엇보다 현행 계기들을 서로 잇는다. 이것은 계기들을 궁극적인 방식으로 연구하도록 해준다. 궁극적인 까닭은 무엇인가? 계기들은, 현행성을 지니면서, 철학의 처음이자 마지막 대상을 드러내주기 때문이다. 그 대상은 바로 "있음"(존재)이다.
피치(Fitch)는 이 문제를 더 깊게 분석하면서, 진입과 파악의 관계는 서로 거꾸로 서 있을 뿐임을 보여주었다 : X가 Y에 진입한다는 말은 X가 Y의 한 '요소'(ingredient)라는 말이며, Y가 X를 파악한다는 것의 다른 말이다. 한 사건은 따라서(i) 그것이 참여하는 영원한 대상의 진입을 받는다. 그리고(ii) 과거 사건들의 진입을 받는다. 한 사건은 과거 사건들을 마치 우주 속에서 자신이 솟아오르기 위한 기틀(pierre d'attente)로 파악한다.
이항관계 xRy라는 일반 도식으로 볼 때, 화이트헤드의 존재론 형식은 다음 결론에 이른다.(1) 이 관계들[진입, 파악]을 위한 두 유형의 항(x 또는 y)을 얻는다 : 대상과 사건 ;(2) 이해될 수 있는 단일한 관계(R) 하나를 얻는다. x→y의 진입 또는 y→x의 파악.
화이트헤드는 전통 철학이 주어-술어 구조에 호응해 왔다고 보았고, 그 점을 탁월하게 비판한다. 그러면서, 근본적으로 관계의 형이상학을 펼친다. 그의 체계에서 진정한 존재(res vera)는 현행 계기이다. 이 현행 계기는 파악 관계로 분석된다. 파악 관계에서 볼 때, 현행 계기는 바로 파악의 주체(auteur)이다. 현상학에서 본다면, 의식이 세계하고 맺는 관계와 같다. 의식은, 현상학에 따르면, 결코 자신이 세계와 맺는 관계의 바깥에 있지 않다.
그런데 파악이란 무엇인가? 어떤 주체가 있어서, 일정한(invariant) 대상을 쳐다본다고 해보자. 대상이 일정하므로, 인식 속에서 이어지는 지각(perception)들은 똑같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베르그손(Bergson)이 지적했듯이, 어떤 순간 t2의 지각은 다른 순간 t1의 지각과 다르다. 한 대상을 처음 보는 것과 두 번째 보는 게 같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 주체가 베르그손이 말하는 기억을 가지고 있다고 해보자. 이 때 각 경험의 기억들은 저마다 고유한 새로움의 계수(coefficient)를 갖게 될 것이다. 경험들은 매번 다르므로, 어떤 기억도 배경에 있는 앞선 경험들과 동일한 과거와 더불어 얻어지지는 않을 터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계기는 나의 현재 경험인데, 이런 계기가 자신의 직접적인 과거를 파악한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즉각적인 과거를 통해서, 계기는 내 과거의 전체를 파악한다고 할 수 있다.
다른 얘기로 넘어 가서, 손가락으로 무엇을 누를 때 그 결과로 생기는 일시적인 지문 자국을 생각해 보자. 그 때 우리는 이렇게 말할 법하다. 한 원인이 있어서, 이 원인이 참으로 그 결과 위에 '자국'을 남겼다고 말이다. 즉, 그 결과는 결코 다른 유형의 사건이 낳은 결과가 될 수 없다고 말할 것이다. 이 경우에 지문은 손가락의 고유함을 파악한다. 그러므로 결과는 어떤 의미에서 원인의 '추억'(souvenir)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점은 모든 인과 관계에서, 많게 적게 완화된 수준으로, 늘 확인될 수 있다. 물체의 충돌에서 보자면, 한 충돌의 방향과 밀도는 저마다 끝없는 단계를 받아들일 수 있다. 또한 사람들은 충돌의 결과로 일어나는 운동 속에서 그 단계의 지표를 찾아낼 것이다. 모든 결과는 따라서 원인의 파악이다. 발머(Balmer)의 계열은 원자의 양자 상태들을 파악하는 자국이라고 할 수 있다. 기술의 영역에서 말하자면, LP 레코드는 콘서트를 파악한다.
지금까지 우리는 은유적인 뜻에서 기억을 얘기했다.(물론 은유가 아니라 말 그대로 기억인 경우에도 마찬가지 일이 일어난다. 어떤 기억을 촉발하는 것은 무엇이든 간에 기억된 사건을 파악한다.) 그럼에도, 은유의 역할은 중요하다. 은유는 심원한 유사성을 새기게 해준다. 조약돌을 연못에 던질 때 생기는 물결은 저마다 자기보다 앞선 물결들을 '파악'한다. 화이트헤드에 따르면(일상적인 뜻에서 사람의) 기억은 되풀이의 특수한 경우이다.
로이스(Royce)의 역설은 또한 이런 관점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이 역설은 '같은 원인들이 같은 결과들을 낳는지' 결정하는 문제이다. 이 문제를 알려면, 누군가의 발을 밟아 보라. 사과를 한 뒤에 결과를 지켜 보라. 그런 다음, 한 번 더 같은 발을 밟고, 사과한 뒤에 결과를 지켜 보라. 이제 두 결과를 비교해 보라. 이 증명이 보여주는 것은 통틀어서 [겉보기에] 똑같은 원인의 연쇄 속에서도 [실제로] '똑같은 원인'이란 없다는 것이다. 주어진 원인이 앞선 원인들을 파악하기 때문이다.
이런 예들로부터 다음 가설을 세울 수 있다. 계기  가 계기  를 파악한다(또는  가,  에 의해서,  의 대상이 된다)는 것은 다만 일정한 범위에서  가  의 함수일 때만 그러하다. 파악은 이처럼(준)함수적인 ―따라서 일정한 방향이 잡힌― 특성을 가진다. 그래서 화이트헤드는 파악을 일종의 벡터로 보았다.
파악 활동은 근원적인 양자택일 이항 함수 앞에 놓인다 : 파악은 긍정적일 수도 있고 부정적일 수도 있다. 이렇게 본다면, 우리는 앞에서 긍정적인 파악만을 얘기했던 셈이다. 느낌(feelings)으로 불리는 파악이었다. 부정적인 파악은 능동적인 은폐(occultation)를 이룬다. 우리는 망각이라는 현상을 통해서 이런 일에 익숙하다. 넓게 말해서, 망각은 부정적인 파악의 일반 형식이 될 법하다. 여기서 망각은 단순하게 '기억 없음'이 아니다. 이 점은 중요하다 ; 잊음은 기억만큼이나 '긍정'적인 활동이다.(잊음이란 말이 비록 부정적으로 들리지만 말이다) ; 잊음의 부정성은 다만 그 결과들 속에 있을 뿐이다. 말하자면, 잊음 뒤에 펼쳐지는 우주의 과정을 보면, '잊혀진 것'이 상대적으로 거기에 없을 터인데, 잊음의 부정성은 이런 결과 속에 있을 뿐이다.
잊음과 기억은 결합(conjonction)된다. 그래서 현행 계기로 하여금 선택이라는 특성을 가지게 한다. 그리고 파악은 이 때 계기의 선택 활동에서 안테나 구실을 한다. 그 덕분에 각 계기들은 우주와 하나되어 떨린다.
파악에서 우리는 '형상'과 '주어진 것'을 구분해야 한다. 한편으로 (a)형상(예컨대 지각하기, 기억하기, 잊기, 희망하기, 놀라기……)과 (b)주어진 여건(예컨대 지각된 것, 기억된 것, 잊혀진 것, 희망된 것, 놀라운 것)들을 구분해야 한다.
그런데 어떤 이는 여기서 이렇게 반대할 만하다. 화이트헤드는 계기를 파악의 묶음으로 정의하면서, 현실을 오직 관계들의 단순한 얼개로 환원해버리지 않았는가? 그러나 [이 물음에 대한 첫 번째 대답은] 긍정적인 파악은 어디에서나 필요하다는 점에서 한 현행 계기는 느낌의 느낌(feelings of feeling)이다. 화이트헤드의 우주가 관계들로 깨어져 흩어진다는 말은 따라서 별로 근거가 없다. 느낌이 관계(상대) 개념이라는 구실로, 현실을 고통의 지옥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처럼 근거 없는 일이다.
그러나 이런 대답은 어려운 문제를 피하려다가 우리를 새로운 어려움에 부딪히게 할 뿐이다. 현실을 이루는 소재 자체가 다만 느낌이나 정서(affection)라는 생각을 어떻게 지지할 것인가? 우리는 가장 터무니없는 범심론(panpsychisme)에 빠진 게 아닌가?
그러나 먼저 분명하게 해두어야 할 것이 있다. 아주 대부분의 경우, 계기의 수많은 특성들 가운데 [가령 인간처럼 고차원적인 정서로] 실현되는 것은 극히 적은 단계일 뿐이라는 점이다. 이런 뜻에서 미분학은, 라이프니츠에게 만큼이나, 화이트헤드의 우주에서도 본질적인 것으로 보인다. [인간의] 정신은 전체 현행 계기 속에서 볼 때 무한소의 분량에 지나지 않는다.
이렇게 초점을 맞추는 것은 결코 지나치지 않다. 아주 조그만 목마름이, 즉 우리의 현기증나는 우주의 한 모퉁이에서 길을 잃고, 뻗어 가는 빛살을 따라 일어나는 아주 조그만 욕구만 있어도 그것은 자연 철학의 스캔들 위에 세워진 윤리학에서의 스캔들이 일어나는 조건이 되기에 충분할 것이며, 형이상학적인 사변이 여태까지 쌓아온 체계 가운데 가장 교묘한 것마저 무너뜨리기에도 충분할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화이트헤드의 범심론은 결코 [인간이 가진 것과 같은] 의식이 우주 어디에서나 또는 우주의 모든 존재에게 있다(偏在)고 말하지는 않는다. 이 점을 이해해야 한다. 정신적이라는 말에서 [인간의] 의식이라는 뜻을 한 번 빼놓고 생각해보자. 그럴 때, 넓은 뜻에서 정신적인 삶(la vie mentale)의 구조들은 우주 사물들의 직조(織造)에 대해서 훨씬 정당한 이미지를 제공해준다. 우주를 정신적인 삶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얻는 우주의 이미지는 관성적인 자연(또는 어둡고 모호한 자연)이라는 이미지보다는 훨씬 정당한 것이다. 우리는 관성적인 자연이라는 이미지를 사실 우리에게 친숙한(일상적인) 물질 대상들에서 찾아볼 수 있다고 여기지만 말이다.
[우리에게 친숙한 일상 사물들에서 나온 자연의 이미지가 오히려 틀릴 수 있다는] 이런 역설에 기대어, 사람들은 미시 물리학의 역설적인 발견들을 인용할 수 있을 것이다. 파울리(Pauli)의 배타원리라든가, 파인먼(Feynman) 유형의 지그재그 운동 등을 말이다. 그러나 정신적인 삶과 인간 의식이 출현하는 근원을 보기 위해서 [굳이 우리에게] 가장 친숙한 [일상] 세계까지 올라갈 필요는 없다. 가장 친숙한 물리 세계까지 이르지 않더라도, '결과'들을 흩뿌리고, 이 결과들 속에서 정신적 삶이 출현할 것이라는 예견(anticipation)을 볼 수 있으며, 또한 인간의 의식이 흘러나오는 세계가 있다 : 메아리, 반영, 흔적, 프리즘 변형, 관점, 문턱, 주름, 기타 등등.
범심론은 한편 정신적 삶에 대한 자기제어(cybernetics)이론의 모의실험(simulation)을 즉각적으로 해석해 준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둘은 위상 동형적이다.
그러나 이런 다양한 호기심들을 늘어 놓는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 아니다. 만약 사변의 거대한 일반화가 여러 사변의 다양성을 포섭해서 없애버린다면 말이다. 우리가 보았듯이, 으뜸가는 개념은 여기서 기억이다. 가장 넓은 뜻으로 풀이된 기억 말이다.
유성이 떨어지면 큰 구멍을 만든다. 사람들은 그 구멍이 추락의 결과이며, 또한 추락의 '추억'이라고 말할 것이다. 이처럼 기억은 이를테면 통일의 이음줄이다.(물리적) 인과성과(정신적) 지향성의 통일 말이다 ; 이런 통일로부터 우리는 두 영역의 깊숙한 곳에 들어있는 유사성을 잡아낼 수 있다. 사실 기억은 인과 관계(흔적)인 동시에(겨냥된) 정신의 관계이다. 마찬가지로 심리적(psychique)인 삶의 토대인 지각에도 인과적인 통로(transit)가 있다. 정신적인 것은 이처럼 인과성 속에 닻을 내리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물론 그 반대도 또한 옳다 : 모든 인과성은 기억의 요소를 지닌다 : 인과성은 과거를 향한다.
이런 베르그손의 배경을 알면 화이트헤드가 구축한 이론을 깊게 이해할 수 있다. 화이트헤드는 기억보다 느낌(feelings)을 얘기했지만. 그가 인정했던 느낌의 일차성은 범심론의 정당화에 연결된다. 헤드(Head)의 실험은 표상(representation)하는 감성에 비해서 느끼는 감각이 더 앞선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느낌을 제일 앞에 놓는 것은 따라서 범심론을 덜 역설적으로 만드는 한 걸음을 내딛는 것이다.


Ⅱ. 화이트헤드의 모래시계

화이트헤드의 우주에서 길을 잃지 않고 제대로 방향을 잡으려면, 먼저 데카르트 좌표에 익숙해져야 한다. 이 지표에다 조금씩 벡터의 표현을 더해 가면, 마침내 중요한 도식 <그림 1>에 이르게 된다. 우리는 이 그림을 화이트헤드의 모래시계라고 불러 보겠다.
이 그림의 가운데를 보면 O로 예시된 현행 계기가 있다. 이 점에 대해서 아래 원뿔은 O에 인과적인 영향을 미치는 현행 계기들의 집합으로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아래 원뿔은 O의 과거를 이룬다고 할 수 있다. O로부터 위쪽으로 열린 위 원뿔은 O의 인과적인 영향을 받는 모든 현행 계기들로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위 원뿔이 O의 미래를 이룬다고 말할 수 있겠다. 도식의 나머지 부분들은 계기의 경험된 현재를 나타낸다.

<그림 1>





따라서 이 그림은 크게 두 쪽으로 나뉜다. 가로좌표(수직) 방향은 중심축이라고 할 수 있다. 세로좌표(수평) 방향은 횡단축이라고 할 수 있다. 민코프스키(H. Minkowski)의 상대성 이론 '모래시계'에서도 우리는 비슷한 대조를 볼 수 있다. OO'와 OO''의 대조이다. 전자는 '시간' 간격으로 불리며, 후자는 '공간' 간격으로 불린다. 이것이 보통 말하는 시간과 공간이라는 상식적인 구분을 대신한다.
베르그손에게도 마찬가지다. 시간과 공간이라는 보통 구별은 지속(Dur e)과 연장적 다수성(multiplicit  extensive)의 구별로 대체된다. 시간의 참된 본성을 말해주는 게 지속인 반면에, 시계의 '공간화된 시간'이 엄격한 뜻에서 공간과 결합되는 게 '연장된 여럿'이다. 이런 역설들의 토양 위에 화이트헤드의 모든 우주론은 조용하게 자리잡았다.
그러나 화이트헤드의 우주론에 대해서 모래시계가 주는 이미지를 제대로 잡아내려면, 다음 사실을 분명하게 해야 한다 : 미래의 원뿔은 다만 잠재적(virtuelle)인 존재일 뿐이다.(그래서 점선으로 그렸다.) 오직 현재와 과거만이 실현되어 있다. 현행 계기는 첨단에 서 있고, 여기서 존재는 늘 생생한 현재 속에서 솟아오르고 있다.
계기 O는 모래시계의 초점이라고 할 수 있다. 과거의 원뿔은 또한 후방(後方) 원뿔이라고 할 수 있다 ; 그것은 현실화된 우주를 나타낸다.(말하자면, 현재 또는 과거의 우주이다.) 사람들이 현실 세계(actual world)라고 부르는 우주 말이다. 마찬가지로 미래의 원뿔은 전방(前方) 원뿔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다음 사실을 덧붙여야 한다. 비록 모래시계가 '우주의 범위'를 갖는다 해도, 모래시계는 우주의 이미지가 아니다. 현행 계기들이 존재하는 만큼의 모래시계들이 존재한다. 따라서 각 모래시계는 저마다 과거의 ―말하자면 인과 연쇄를 통해서 현재 모래시계에 메시지를 보내는― 모든 모래시계들에 대한 저마다의(공간-시간적인) 관점을 그려놓은 것이다. 우주는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 모든 모래시계들의 결합체(nexus)이다. 우주는 따라서 영원한 구축의 과정 속에 있다.
이렇게 초점이 맞춰지면, 결정적으로 중요한 어휘들을 끌어들일 수 있다. 이러한 중심축(과거의 점선으로 줄여놓은)의 방향은 합생(concrescence)을 뒷받침한다. 즉, 인과 원뿔에서 출발하는 계기의 자기-건설이다. 한편, 횡단축은 공액(congredience) 관계를 뒷받침한다. 말하자면, 일단 구성된 계기의 내적인 경험이다. 계기의 이런 이중성은 <그림 2>에 그려져 있다.

<그림 2>




인간의 경험에서 합생(合生)과 공액(共 )은 파악의 두 양상에 상응한다. 화이트헤드는 두 양상을 인과적 효과성(causal efficacy)과 현존적 직접성(presentational immediacy)이라고 불렀다.
현존적 직접성은 '감각 데이터'(sens data)에 상응한다. 이를테면 빨강과 초록, 맛이 쓴 것과 달콤한 것 등이다. 일반적으로 데카르트의 사유 주체(Cogito)가 드러내는 사유 내용(cogitationes)의 문제이다.
인과적 효과(결과)는 마치 모호하고 흐물흐물한(ectoplasmique) '현존'들의 세계로 우주를 제시한다.(정확하게 누구인지는 몰라도, 누군가 앞에 있음을 느낄 때처럼 모호한 현존이다. 화이트헤드의 분석에 따르면, 그 누군가를 즉각적인 현존성의 양상으로 지각하지는 않았음에도, 그의 가까움이 우리에게 이미 '닿았다'는 상황이다.) 이런 현존에는 동시에 강한 느낌이 실려 있다. 예컨대, 요람 곁에 있으면 안심이 되거나 불안하다.
우리는 특히 우리의 신체를 느낀다. 그러나 신체를 지각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구체적으로 자기 팔을 바라볼 때면, 느낌에 덧붙여, 신체를 지각한다고 말할 수 있다.) 느낌 속에서 이런 것을 경험으로 만드는 것은 신체적 사건들의 인과적 효과이다.


Ⅲ. 현행 계기, 원자와 소우주

1. 두 얼굴의 원자와 창조성

화이트헤드에게 우주를 구성하는 원자인 현행 계기는 일종의 야누스의 양면을 하고 있다. 현행 계기는 과거와 미래 두 방향을 동시에 쳐다본다.(모래시계의 후방 원뿔과 미래 쪽 모래시계들을 향해서.)
(i) 사실 현행 계기는 모든 과거 사건들의 파악이다. 더구나 화이트헤드는 여기서 상대성 이론의 역설 가운데 하나를 통합한다. 동시성의 탈골(와해) : 이 역설에 따르면,(막연하고 보편적인) 시간 t의 우주는 없다. 에딩턴(Eddington)의 표현으로는, '세계처럼 광대한 순간'의 우주는 없다. 오직 국지적인 현재, 말하자면 각 사건에 관계하는 현재의 우주가 있을 뿐이다. 그래서 오직 특정한 하나의 계기에 대해서만, 과거와 미래를 얘기할 수 있다.
가령 한 계기 O의 과거는 후방 원뿔로 표현된다. 계기 O가 과거 계기들의 전체를 파악한다는 점에서, 현행 계기는 그 다수성의 통일이다. 모든 과거는 거기에 기입된다. 마치 조그만 거울 속의 거대한 전경(panorama)처럼, 또는 단순한 밀어내기 한 번 속에 모여 있는 수많은 노력들처럼 기입된다.
(ii)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각 현행 계기는 다시 자신의 뒤를 잇는 계기들에게 파악의 대상이 된다. 현행 계기는 따라서 저마다 하나의 잠재성을 이루며, 수많은 기틀 가운데 하나가 된다. 현행 계기의 이런 잠재성과 기틀을 딛고 새로운 파악이 일어나며, 이 파악에 의해서 미래 계기들이 구성된다.
첫째 얼굴을 통해서 현행 계기는 하나(unit )가 된다. 이 하나는 계기들의 '다수성'으로부터 솟아오른다. 현행 계기는 이 '다수성'을 계기 자신에게 현실적으로 '주어진 것'으로 여긴다. 둘째 얼굴을 통해서도 현행 계기는 또한 하나가 된다. 그러나 이번에는 다른 계기들의 바다 같은 다양성 속에 파묻혀 버린다. 이 '바다 같은 다양성'은, 자신과 더불어, 또 다른 미래의 통일을 위해서 '주어진 것'이 될 것이다.
첫째 얼굴은 계기의 형상적 현실로 불린다. 결과로서의 계기이다. 둘째 얼굴은 대상적 현실로 불린다. 원인으로서의 계기이다.
현행 계기의 이중성은 대상화 관계의 두 항[형상/대상, 결과/원인]이 서로 맞선다는 점과 연결된다. 물론 두 항의 자리를 채우는 것은 오직 하나의 현행 계기이다. 그럼에도, 두 항은 서로 맞선다. 대상화 관계를 xRy 형식으로 나타내고, "x는 y의 대상이 된다"로 풀어보자. 그렇다면 이 관계는, 처음부터 관계 이론으로 말하자면, '여럿에서 하나로'(many-one)의 관계임이 드러난다.  
이런 뜻에서 볼 때 합생이 나아가는 축은 바로 화이트헤드가 자기 체계의 꼭대기에 궁극 원리로 놓았으며, 창조성(Creativity)이라고 불렀던 원리의 적용이다. 이 원리는 '하나와 여럿'이라는 관념을 실마리로 해서 이해될 수 있다.
화이트헤드는 플로티누스(Plotinus)의 '하나'(一者) 개념을 절충해서 자신의 '하나'로 바꾸었는데, 플로티누스의 하나는 알다시피 플라톤이 '파르메니데스'(Parmenides)편에서 보여 주었던 유희적인 사유들로부터 나온 것이다.
'여럿'의 개념에 대해서는 화이트헤드가 베르그손과 가깝다는 점이 흥미롭다. 그리고 '여럿'에 대한 베르그손의 문제틀은, 들뢰즈가 지적했듯이, 리만(Riemann)의 구분이 남긴 흔적 속에 새겨져 있다.
하나와 여럿이라는 두 전제 위에서 창조성은 다음과 같이 정의될 수 있다. 창조성은 말하자면 '여럿'을 편각으로 하고, '하나'를 값으로 취하는 함수이다. 화이트헤드는 이처럼 '하나와 여럿'의 오래된 문제를 베르그손 식으로 풀었던 것이다 : 하나와 여럿은 벽난로 위에서 어우러지는 도자기 개 두 마리가 아니다. 둘은 통시적으로 연쇄된다.
우리는 이 연쇄[여럿→하나]가 현행 계기의 양면성을 뒷받침한다는 것을 이미 보았다. 계기는 단번에 여럿에서 솟아오르는 하나인 동시에, 하나로 될 여럿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이다. 후자의 경우에 하나 됨(unification)은 곧 창조성이다. 이 '하나 됨', 그리고 점점 높아 가는 대비(대비들의 대비,……)를 통한 강화(intensification)는 나란히 간다.
화이트헤드에게 '대비'는 꽤 여러 뜻으로 쓰인다. 여기서 우리는 화이트헤드의 대비를 소쉬르의 통합체(syntagme)에 가까운 뜻으로 놓을 수 있다. 전형적으로, 멜로디는 하나의 대비이다. 리듬은(강/약 박자) 대비로 이루어진다 ; 이로부터 우리는 어떤 것의 미학적인 면을 생각할 때마다 화이트헤드가 대비 개념을 쓰는 까닭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이때 그는 대비에게 전능한 기능을 부여한다.
화이트헤드에게 우주의 대비는 예술작품에서 대비와 같다 : 여럿(다수성)과 다양함을 배제하지 않는 통일성. 여럿과 다양성을 넘어서면서 하나가 되기 위해, 이들을 필요로 하는 통일성. 또한 자연은 하나의 작품이다. 사람들은 자연에게 과중한 짐을 지우지 않고, 그 위에 새로운 터치를 더할 수 있다(이때 점점 더 깊어지는 대비는 새로운 합생을 낳을 수 있다) : 사실상 놀랍도록 '좋은 형상'이 언제나 여기서 나온다. '오메가 점'은 없다.

2. 양극성의 소우주

현행 계기의 양면성을 양극성(兩極性)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 이 새로운 이중성은 흔히 말하는 '몸과 마음'의 대립에 상응한다. 화이트헤드에 따르면 '몸과 마음'은 현행 계기라는 한 실재의 두 극(pole)일 뿐이다. 모든 계기는 물리적인 극과 정신적인 극을 가진다.(후자는 매우 적게 펼쳐지므로, 대개 알아채지 못한 채 지나간다.)
물리 극은 물리적인 파악의 묶음으로 이루어진다. 물리적인 파악은 다른 현행 계기를 대상으로 삼는다. 이때 계기는 물리적인 파악의 원천이 된다고 할 수 있다. 정신 극은 개념적인 파악의 총합으로 이루어진다. 말하자면 영원한 대상에 적용되는 파악들로 이루어진다. 간단한 대조를 통해서 두 극의 차이를 설명해볼 수 있다.
한편으로 모든 현실화된 계기들의 파악이 있다 ; 다른 한편으로, 이 모든 현실화된 계기들은 다만 어떤 영원한 대상들로서만 파악될 뿐이다.
따라서 물리 극을 통해서 현행 계기는 현실 세계의 향유이며, 그 현실 세계 속에서 나타난다. 반면에 정신 극은 욕구(appetition)의 중심, 참된 노력(conatus)의 중심을 이룬다 ; 정신 극은 계기의 고유한 주도권(initiative)이 차지하는 장소이다. 계기의 대뇌이다. 한편, 우리는 거기[정신 극에서 일어나는 일(=개념적 파악)]에서 두 수준을 구별할 수 있다.
첫째 수준은 화이트헤드가 개념적 가치평가(conceptual valuation)로 불렀던 수준인데, 정신 극은 여기서 물리극이 파악한 내용을 단순하게 기록하는 표면이 된다. 정신 극은 다만 자신의 표상-경험을 통해서 추상(abstraction)할 수 있었던 개념들을 사유를 위해서 배열해줄 뿐이다.
다음 수준은 화이트헤드가 개념적 역전(conceptual reversion)으로 불렀던 수준인데, 정신 극의 기능은 여기서 대비(contrast)에 있다. 첫째 수준에서는 영원한 대상들이 추상되었다. 이 영원한 대상들은 이제 자신에게 대립되는 것들로 이루어진 계합체(paradigme) 속으로 들어온다. 정신 극은 따라서 이 계합체를 완성할 수 있다. 흄(Hume)이 들었던 예처럼, 의식은 자신이 경험한 색채들의 배열에서 빠진 공백들을 메울 수 있게 된다. 이처럼 새로움이 세계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오는 것은 바로 계기들의 정신 극에 의한 것이다.
정신 극에 의해서, 경험을 초월하는 것을 잡아낼 수 있다. 그런데 이 점은 신적인 비전(vision en Dieu)에서만 완전하게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신은 모든 영원한 대상들을 껴안기 때문이다.
모든 계기는 물리 극에 의해서 시간 속에 있으며, 정신 극에 의해서 시간 바깥에 있다.
정신 극은 실제로 무시해도 좋을 만큼 낮은 단계로부터 출발해서 다양해질 수 있다고 우리는 규정했다. 그 결과로 우리는 계기의 감응(반응) 능력 속에서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수준을 얻게 된다. 이렇게 해서 해바라기는 햇빛의 혜택을 느낄 뿐만 아니라 해 쪽을 바라본다.
정신 극을 통해서 파악된 것은 심리(psychisme)의 다양한 단계들을 결정할 것이다. 처음 단계에서는 오직 근원적인 감정 태도의 양자택일적인 한 쌍만이 있을 뿐이다 : 미움(aversion)과 그 반대로서, 후자를 우리는 화이트헤드를 따라서 역작용(adversion)으로 부른다. 두 번째 단계에서는 긍정과 부정의 대비가 나타난다.
그런데 놀라운 일은 이 두 가지 단계가 정확하게도 브렌타노(Brentano)가 심리 현상의 분류에서 나누었던 두 '기초 집합'에 해당한다는 점이다. 화이트헤드가 우주 질서 속에서 두 단계를 제시했다는 사실 때문에 지나치게 당황할 필요는 없다. 그의 목표가 발생을 밝히는 것이라면, 브렌타노는 다만 '형상'의 관계들을 고민하기 때문이다.
브렌타노가 구별했던 세 번째 기초 집합은 표상들의 집합이다. 엄격하게 말해서, 의식이 있을 때만 표상이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우리는 세 번째 단계를 얻게 된다. 이 단계는 화이트헤드의 체계와 완벽하게 조화를 이룬다 : 의식을 허용하면서, 표상은 심리의 가장 높은 단계를 이룬다.

3. 흐름의 이중성

화이트헤드에 따르면, '모든 것은 흐른다'는 헤라클레이토스의 학설이나 '흐름'(Flux)이라는 베르그손의 학설은 문제를 신비스럽게 만들었다. 오직 로크(Lock)만이 흐름에는 두 종류가 있다는 사실을 흘낏 볼 수 있었다 : 첫째는 한 계기로부터 다른 계기로의 이행(transition)이다. 둘째는 합생 또는 계기의 내적인 구성이다. 앞에서 본 계기의 양면성으로부터 우리는 이 이중성을 이해할 수 있다.
합생은 내면적(retrospective)인 생성이다. 이 생성 과정에서 한 계기는 현실 세계(후방 원뿔)의 파악을 통해서 한 계기가 된다. 이행은 예기적(prospective)인 생성이다. 이행 속에서 현재 계기는 다른 계기들을 위해서 자신을 바친다. 이 다른 계기들은 미래 세계(전방 원뿔이 다발로 뻗는 방향)를 구성하기 위한 과정 속에서 그 계기를 대상으로 만든다. 이행은 계기들 사이에 작용하는 작용(효과) 원인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 합생은 각 계기들에게 고유한 목적 원인으로 움직인다.
계기의 역리, 즉 단자(Monade)인 동시에 쪼개진다는 역리는 이렇게 해서 사라진다. 한편으로 계기는 이행의 [더 쪼개지지 않는] 원자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합생의 다른 기(期)라는 측면에서 보면 나뉘어진다.
코스모스(Cosmos)는 하나의 유기체이다. 언제나 미완의 것이며, 그 성장은 우주(univers)의 공간-시간적인 확장이다. 우주의 계기들은 세포이다. 각 세포는 자신의 구조와 생성을 가진다. 구조, 원심(遠心)적인 것은 공액(congredience)이다 ; 생성은 합생이며, 구심(求心)적인 과정 속에 있다(그림 2). 화이트헤드에 따르면, 구조보다는 생성이 으뜸이다 ; 공액은 [일단 마무리된] 합생이 꾸는 꿈이다. 물론 이런 생각으로부터 역사가 구조보다 으뜸이라는 테제를 이끌어낼 수는 없다. 둘은 다른 테제이다. 역사는 반복되지 않는다 ; [그러나] 생성은 생성(generation)이 있을 때마다 거듭된다.


Ⅳ. 화이트헤드와 철학의 전통 : 현행 계기의 연도(連禱)

화이트헤드의 철학은 역설을 두려워하지 않을 뿐더러, 그 역설에서 비롯되는 모호함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이런 관점에 따르면, 형이상학 체계의 기능이란 우리에게 하나의 특이한(unique)한 열쇠를 준다. 우리는 이 열쇠 덕분에 경험의 총체, 앎과 문화의 총체, 또는 정확하게 말해서 실재의 전체를 해석할 수 있게 된다. 이 열쇠가 없다면 실재는 우리에게 이런 중개[경험, 앎, 문화]를 통해서 자신의 몇 가지 측면을 보여줄 뿐이다. 그런데 이처럼 야심만만한 [형이상학의] 체계도 처음에는 근원적인 역설로 제시될 수밖에 없다. 그것은 낯설고, [이 낯설음에서 비롯된] 모호함과 더불어 나타날 수밖에 없다.
물론 [철학에 익숙하지 않은] 보통 사람들에게, 역설이 만들어진 원천이나 계보를 보여준다 해도, 역설의 모호함을 사라지게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직업(porfessionel) 철학자에게는 경우가 다르리라 기대할 수 있다. 이들은 곧잘 기이하게 보이는 사변의 오랜 전통에 익숙하기 때문이다. 사실 역설은 세월이 흐름에 따라 사람들에게 친숙해질 수 있다. 착실하게 만들어졌거나 아니면 오직 기발한 착상으로 만들어졌던 간에, 시간이 흐르면 역설은 '많이 듣던 얘기'라는 식의 친근함을 얻을 수 있다. 다소 기만적일지는 몰라도 잠정적으로 유용한, 바로 이런 종류의 친근함을 얻기 위해서, 우리는 화이트헤드라는 건축물의 기본 재료가 차지하는 위치를 확인하려 한다. 그 기본 재료란 물론 현행 계기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현행 계기라는 개념 속에 어떤 [역사적으로 정체가] '확인된 철학요소'(philosoph mes identifi s)가 들어있는지 체계적으로 연구하려는 것이다. 물론 그 요소는 종종 단순한 흔적의 상태이거나 또는 이교(異敎)적인 유사물의 상태로 있겠지만 말이다.

1. 단자(單子), 원자 그리고 거울

현행 계기는 참으로 라이프니츠의 단자(monade)이다. (물론 실체가 아니라 관계의 과정으로 단자를 볼 때 그렇다.) 현행 계기는 적어도 두 가지 측면에서 단자이다.
(i) 우리는 현행 계기가 참된 '사건의 원자'임을 보았다. 그래서 시간은 알갱이(granule) 구조를 가진다. 또는 차펙(Mili   apek)의 표현을 따른다면 박동(pulsation) 구조를 갖는다. 정확하게 수학적인 [點과 같은] 순간에는 물리적인 현실성도 형이상학적인 현실성도 없다. '특별한 현재'라는 표현은, 그 자체로 볼 때, 순간의 연장성(extensity) 속에서 [시간이 순간=點으로 이어졌다는] 환상을 일으킨다는 점에서 그릇되었다 ; 차라리 들뢰즈가 그랬듯이 '살아있는 현재'라고 말해야 한다.
(ii) 현행 계기는 하나의 거울이다. 온 우주, 또는 정확하게 말해서, 온 우주에 영원하게 주어진 것을 비춘다. 이른바 현실화된 우주(국지적인 과거)를 비춘다.
말하자면 각 계기는 현실화된 다른 모든 계기들과 내적인 관계를 맺는다. 이 점은 오직 러셀(Russell)의 입장과 비교될 때 비로소 뚜렷해진다. 사실 내적 관계의 학설은 러셀로부터 결정적인 비판을 받았다. 가령 어떤 선원이 지구의 대척점에 있는 아내에게 편지를 썼다 해도, 아내는 그것을 즉각 느낄 수 없다. 만약 모든 존재들이 내적 관계 속에 있다면 결코 그렇지 않을 텐데 말이다. 따라서 러셀은 내적인 관계 이론을 반대하면서, 이 이론이 가진 잘못된 전제를 보였다 : "X는 Y의 아내이다"와 같은 관계의 판단[명제]은 주어-술어 형식에 다다르며, 그 결과 Y는 주어 X의 본성을 이루는 내적인 구성물이 된다. X의 술어인 Y의 아내 속에 들어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Y가 하는 모든 일은 X에 영향을 미칠 것이다.
그러나 러셀의 비판은 오직 실체들 사이에 있는 내적 관계에 대해서만 가치가 있다. 그의 비판은 사건들 사이에 내적 관계가 있을 가능성에 대해서는 적용되지 않는다. 따라서 나의 현재는 더 먼 과거와 내적 관계를 맺고 있고, 모든 사건은 과거로 끝없이 깊게 이어지는 인과 연쇄의 다발과 내적 관계를 맺는 것이다. 기억은 지나간 일화의 반영이다. 젖은 모래 위를 지나갈 때 남긴 동물의 발자국은 그 동물의 발걸음을 반영한다. 사건들 사이 내적인 관계를 부정하면, 멜로디라는 존재를 이해할 수 없게 된다. 한 멜로디의 첫 음표는 마지막까지 계속 울린다. [첫 음표의 울림은 끝 음표의 울림과 내적으로 이어진다.]
한편 계기들의 이런 '공조'(conspiration)에는 여러 단계들이 있을 수 있다는 점을 분명히 해야겠다. 실현된 모든 계기들은 새로운 계기 속으로 구성되어 들어가되, 규정된 강도(intensit )를 갖고 들어간다. 화이트헤드에 따르면, 이곳에서야말로 흄(Hume)이 말하는 '힘'(force)과 '생기'(vivacity) 개념의 영역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베르그송과 화이트헤드는 모든 과거가 현재 속에 보존된다고 했고, 또 라이프니츠는 모든 것이 공존한다고 했다. 그런데 이들은 [한 덩어리가 되어] 분화(分化)되지 않은 탓에, 놀랍게도 활기 없는 우주의 이미지를 제시하지 않는가 하는 물음이 있을 수 있다. [사실] 보편적인 상호작용은 보편적인 관성과 동등하다. 자율적이고 상이(相異)한 힘의 중심들로 움직이는 화려한 우주를 우리에게 넘겨주는 것은 '경험'이지만, 경험은 정작 그런 우주의 이미지를 결정적으로 부정해 버린다. 차펙은 여기서 윌리엄 제임스의 다원론을 베르그송과 화이트헤드의 일원론보다 선호해야 한다고 옳게 지적했다. 바슐라르도 이와 비슷한 결론에 이르렀다. 활동하는 양자(quantum)의 유한한 특성을 생각한다면, 한 사물의 활동이 마치 우주 끝까지 [하나로 이어져] 펼쳐지는 것처럼 말할 수는 없다고 말이다.
만약 이런 유보들을 받아들인다면, [모든 과거 사건이 현재 사건과 내적으로 이어진다는] 화이트헤드의 도식을 유지하면서도, 흄의 "강도"는 거기[인과적 영향을 미치기 어려운 곳]에서 제로 수준에 이르게 될 것이라고 규정할 수 있다.

2. 본체(noum nes) 나라의 칸트

현행 계기는 참으로 칸트와 '칸트 이후'의 선험적 주체이다. 화이트헤드는 칸트를 [경험에] '주어진 것이 늘 구성된 것'임을 이해했던 철학자로 인정했다. 계기란, 화이트헤드가 말하기를, <사(私)적인 종합>이다. 따라서 칸트의 생각처럼 어떤 <숨은 기술>이 있다 : 이 기술 덕분에 현행 계기는, 자신의 파악에 고유하게 주어진 다양한 '여럿'으로부터, 계기 스스로 구성하는 새로운 '하나'를 만들 수 있다.
라이프니츠는 단자가 온 우주를 지각한다고 했다. 그러나 어떻게 온 우주를 지각하는가? 추상적인 생각에 파묻히면, 이 물음에 잘못 대답하게 된다. 이런 잘못을 저지르지 않으려고 화이트헤드가 끌어들이는 것은 바로 칸트식 선험적 논제의 병합이다 : 현행 계기는 선험적 주체가 하는 방식으로 사물들을 지각한다.
현행 계기는 온 우주의 하나됨에 맞추어 진동한다. 그러나 한 계기가 이루어지려면, [여기에 통합되는] 다른 존재들은 이 계기가 표현하는 기막힌 주도권에 맞추어 조정되어야 한다. 만약 현행 계기가 주위 세계를 파악한다면, 늘 <선천적인 형식>을 통한다. 현행 계기는 자기 존재 자체를 통해서 선천적 형식을 설정한다. 그 결과 우리는 칸트의 선험적 범주 도식을 다시 풀이해서, 계기가 다양하게 활동하는 테두리라고 말할 수 있다.
'선험' 논제는 화이트헤드의 체계에 이질적이다. 그럼에도, 이 논제를 받아들인 것은 화이트헤드 '범심론'의 비밀 가운데 하나이다. 그의 범심론은 사실 지각(percipere)의 편재(遍在)가 아니라, 선험적 구성의 편재를 긍정한다. 그리고 우리가 보았듯이 선험적 자아(ego)의 기능을 맡는 주체는, 라이프니츠의 단자처럼, 대부분 무의식적이다. 말하자면 여기서 표상은 '나는 생각한다'를 반드시 수반하지는 않는다. 심리학적 주체는 더 뒤에 가서야 출현한다. 바로 선험적인 주체이다. 의식에 빗댈만한 것을 찾는다면, 시끌벅적한 소리로 온 우주를 멍멍하게 만드는, 선험적 구성의 맹목적인 메커니즘을 들 수 있을까? 그렇다면 의식의 가장 작은 섬광 [즉 인간의 고등한 의식]은 흔들거리며 불안정한 불꽃, 한없이 소중하고 귀한 산물에 빗댈만하다.
화이트헤드는 이처럼 칸트가 더 이상 감히 바랄 수 없었던 참된 약속의 땅을 [칸트에게] 열어주었다 : 관념론이 없는 선험 철학의 전망! 이 철학에서는 더 이상 대상이 존재론적으로 주체에 의존하지 않는다. 이제 선험적 구성은 다만 대상들로부터 새로운 주체가 자기-구성된다는 점을 뜻할 뿐이기 때문이다. 화이트헤드가 볼 때 표준적인 선험 주체는, 대상과 동등하게, 물리적인 존재이다. 한편 칸트의 <물(物) 자체>는 추방될 수 없는 것으로 남아있다. 이제 데이터를 나타내기 때문이다. 계기는 이 데이터를 파악의 다양한 대상들로 여기며, [거꾸로] 계기를 일차적으로 결정하는 것은 바로 데이터이다.
[선험적] 범주의 표를 작성하기란, [가식적인 판에 박힌] 아카데미즘의 무익한 유희였으며 신칸트학파는 그 속에 매몰되기도 했다. 하지만 이제는 다시 심각하고도 열린 물음으로 거듭 태어나게 되었다.
이처럼 선험 자아의 기능을 현행 계기가 맡는다. 그렇다면 선험 철학은 일종의 미시형이상학이 된다. 사람들이 <미시물리학>을 말하듯이. 친근한 물리적 사건 하나에는 밤하늘의 별보다 많은 선험 주체들이 관여한다.
[관념론 없는 선험철학이라는] 전적으로 실재론적인 전망 속에서, 우리는 변형된 선험적 프로그램의 두 차원을 구별할 필요가 있다 :
(a) 신체를 선험 주체로 만드는 학설들 : 스펜서, 니체, 베르그송, 피아제. 그리고 촘스키가 [언어]능력(competence)을 신경(神經)학적으로 해석할 때 ; 여기에는 거시적인 주체의 문제가 있다.
(b) 미시적인 선험적 구성을 기술하려는 학설들 : 화이트헤드, 들뢰즈.
다르긴 해도, 둘이 결코 양립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화이트헤드의 관점에서 보면 (a) 유형의 선험적 주체는 종합의 거시적 결과이다. 이 종합은, 계속해서 갱신(更新)하는 한 계기의 지도 아래, 수많은 미시적 선험 주체의 조화에 이른다. 이럴 때 '주체를 통한 주위 세계의 구축'이란 말은 가깝게 다가오며, 적절하게 바꾼다면(mutatis mutandis) 칸트뿐 아니라 엑스퀼을 이해하기에도 좋다. 우리가 미시물리 우주와 마주칠 때 느끼는 '낯설음'에 대조한다면 [훨씬] 친근하게 들린다.

3. 사(私)적인 이상

현행 계기는 베르그송의 [창조적] 질서로 향하는 칸트의 목적성을 부여받은 라이프니츠의 유기체이다. 각 계기는 자신의 이상을 가진다. 플라톤의 테제가 되돌아 왔음을 느낄 수 있다 : 모든 존재는 자신의 이상과 결혼하기를 열망하는 존재이다. 플라톤의 이데아는 어떤 본질일 뿐만 아니라 이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서 본질은 하나의 구체적인 본질(ipseite)이다. [그래서] 계기의 이상은 사적인 이상이다. 이런 이상적인 목적 원인을 두고 화이트헤드는 계기의 만족(satisfaction)이라고 불렀다. 한편, 사적인 이상은 미리 결정되지 않으며, 진행 과정 속에 형성된다.
마치 형태(Gestalt)가 '좋은 형태'로 향하듯이, 현행 계기는 이상을 향한다.
그러나 화이트헤드는 분명히 하기를, 어떤 계기도 자신에게 고유한 만족을 의식할 수 없다고 했다. 따라서 만족이 이루는 진보는 오직 바깥에서 볼 때, 만족이 만들어 세우는 유용성을 통해서만 현실성을 얻는다. 그리고 내적인 목적은 외적인 목적으로 전환된다.
이처럼 계기는 하나의 유혹(lure)이 된다. 유혹의 물리적인 형태 가운데 가장 잘 알려진 것은 전위차(電位差)이다. 윙크, "뱀 비타(Vita)의 뱃속을 밝히는 황금의 번쩍임"(니체), "먹거리 위에 눕는 영광"(Muselli)은 계기의 유혹에 대한 예가 된다. (한 계기는 또한 다른 계기에게 유혹이 된다는 점에 주목하자. 그래서 어떤 접시에 담긴 음식 향기는 시간 t1에서 X의 입맛을 돋구지만, 동일한 X1이 t2에서 입맛을 잃게 할 수도 있다.)

4. 참된 '자기 원인'(causa sui)

현행 계기는, 제한된 뜻에서, 로츠와 브론스키의 참된 실체이다. 사실 그것은 부분적으로 자기 원인이다. 말하자면 자기 원인들 가운데 하나이다. 모든 현행 계기에는 자연=能産자연(     =natura naturans)의 요소가 있다. (스피노자는 다만 신에게만 있는 것으로 보았다.)
한 때 베르그송과 타르드라는 두 친구가 있었다. 베르그송은 예측할 수 없는 '창조'의 철학자로 유명한 반면에, 타르드는 편재(遍在)하는 '반복'의 철학자였다 : 물리의 파동, 생물의 유전, 사회의 모방. 화이트헤드는 타르드를 알지 못했던 것 같지만, [베르그송과 타르드라는] 두 프랑스 사상가를 종합해내었다. 화이트헤드의 세계는 반복적인 동시에 변형적(m tamorphique)이다.
현행 계기를 결정하는 것은 자신의 과거이다. 그러나 과거는 늘 어떤 여백을 고유한 주도권에게 넘긴다. 이 점을 강조하면서, 대개 여백은 매우 제한되어 있지만, 화이트헤드는 자연의 비(非)결정성에 대한 이념을 통합한다.
따라서 모든 계기는 우선 '주어진 것'들의 되풀이이다 ; 그 다음, 일정한 변이(variation)의 한계 속에서, 차이가 있다. 처음 주어진 환경과 변화된 환경 사이에 있는 차이 말이다.
한 계기가 자기 원인임을 알려주는 척도는 계기의 양극(兩極)성으로 설명된다. 물리 극에서, 계기는 현실화된 우주를 파악한다. 말하자면, (상대적으로) 과거에 일어난 계기들의 총체를 파악한다. 이때 과거는 미래를 짓누르지만, 미래를 결코 완전하게 결정하지는 않는다. 각 계기는 이런 식으로 결정해야 한다 : [그렇지 않다면] 이미 다 만들어진 세계로부터 무엇을 [새롭게] 결정할 수 있단 말인가.
계기는 어떤 상태에서 세계를 미래로 옮기는가? [물리적] 파악은 '현행'적인 것의 일차 현실을 이루는데, 만약 계기가 이 현행을 초월한다면, 그것은 개념적 파악 덕분이다. 말하자면 '영원한 대상'을 호출함으로써 이루어진다. 세계 속에 있는 새로움은 그렇게 만들어진다. 즉 새로움의 기원은, 늘 [미래를] 잉태하는 이 세계에 주어지는, 영원한 대상의 지속적인 보살핌 속에 있다. 우리는 각 계기 그리고 (계기가 요약하는) 과거 세계를 '영원한 대상'들이 제공하는 가능성의 장(場)에 빗댈 수 있다. 아니면 적어도 유한한 지성이 접근할 수 있는 장과 비교할 수 있다. 계기는 그렇게 '자기비판'을 하며, 이 위에서 새로운 방향을 잡고 '우주'의 역사로 향할 수 있다. 정신 극은 따라서 결정의 중심을 이룬다. 계기는 이 결정에 의해서, 일시적이지만 전격(電擊)적인 결단(fiat)으로, 스스로 태어난다.
대체로 계기의 주도권은 화살 모양으로 환원된다. 이 화살은 무척 빨리 사라지며, 현실의 대부분을 이루는 반복의 격류 속에 휩쓸려 버린다. 한편, 거의 순수하게 반복적인 파악을 생각한다면, 가장 흔한 예로 파동을 들 수 있다. 각 파동은 앞선 파동을 반복하면서 파동 흐름을 옮겨 놓는다. 이런 뜻에서 파동은, 타르드가 제기했듯이, 물리세계의 거대한 반복 법칙이다.
자세하게 들여다본다면, 우리는 진동(vibration)에서 두 가지를 구분해야 한다.
(a) 반복 : 수동성과 관성의 표현.
(b) 대비(contrast) : 최초 충동을 주는 것 ; 예컨대 사인(sinus) 곡선은 먼저 아래로부터 위로 움직이지만, 코사인의 경향은 반대이다.
이처럼 타르드의 위대한 반복은 원리적으로 볼 때 차이의 반복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활기 없고 밋밋한 이항(二項)의 차이가 문제이다 : 헤라클레이토스의 불화(不和), 음양, 정립에 대한 반(反)정립 등 ; 이들은 반복을 위해 만들어진 차이이다. 얼른 보면 사인 곡선이 '똑딱똑딱'인지 '딱똑딱똑'인지 알 수가 없다.


Ⅴ. 소우주에서 대우주로

과정의 형이상학으로 가는 여정은 화이트헤드 사상을 대표하는 표지판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과정이란 말을 쓴다고 해서, 과정 형이상학이 모든 '실체' 이론을 형식적으로 비난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실체[로 이루어졌다고 얘기되는] 현실에서 화이트헤드는 다만 파생된 표면의 효과, 깊은 흐름 위에 놓인 허약한 구축물들, 그리고 끝없는 떨림(vibration)과 폭발만을 보았다. 그가 볼 때, 세계를 몇몇 실체들로 쪼개는 것은 가능한 일이지만, 형이상학의 관점에서 적합한 일은 아니다. [세계 실상의] 아주 깊은 곳으로 들어가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촘스키 이론으로 말하자면, 심층문법을 덮은 표층구조와 조금 비슷하다.
따라서 '사건' 원자적인 최종 현실이, 대관절 어떤 변형을 거쳐, 우리에게 친숙한 대상들과 실체의 겉모습으로 이행하는지를 설명해야 한다. 그것은 여러 단계에 걸쳐 이루어진다.
최초의 '분자'(分子) 존재를 화이트헤드는 결합체(nexus)라고 불렀다. 결합체는 파악을 통해서 연결된 현행 계기들의 집합이다. (결합체의 연결이 꼭 단선적일 필요는 없다. 사건 a, b가 모두 사건 c의 원인이 된다면, a와 b는 결합체를 이룬다. c가 둘을 모두 파악했기 때문이다.) 결합체 개념을 구체적으로 밝힌다면 악당 소설(picaresque)에 나오는 영웅의 베르그송식 지속을 상상할 수 있을 터이다. (여기서 루이스 캐롤의 앨리스가 전형적인 영웅임을 덧붙여야겠다. 또는 이런 영웅을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전자, 광자, 분자, DNA로 될 수 있는 앨리스가 필요하다.)
둘째 단계는 사회 개념으로 표현된다. 사회학자들의 사회 개념에 비해, 매우 확장한 뜻이다. 화이트헤드의 '사회'는 규칙적인 결합체, 즉 법칙을 부여받은 결합체이다. 이런 이름이 붙은 데는, 법칙이 다만 통계적인 뜻을 가진다는 생각이 놓여있다. 법은 사실 기초 현상들의 많고 적은 무정부 상태를 덮는 표면의 효과이다. 법은 다만 총체(ensemble)로 정의될 수 있을 뿐이다. 사회로 불리는 것은 바로 이 총체이다. 사회 개념은 통계적인 규칙성, 따라서 반복이라는 생각을 함축하기 때문에, 사회는 또한 역사라고 말할 수 있다.
셋째 단계는 경로(route) 개념과 함께 도달한다. 경로란 선형적인 사회이다. 거울 놀이에서 빛을 전형적인 예로 들 수 있다.
넷째 단계는 인격성(person) 개념으로 이루어진다. 이 개념은 근원적으로 연극적인 의미로 되돌아간 것이다. 페르소나는 고대 연극에서 가면을 쓴 사람이다. 화이트헤드의 '인격'은 따라서 [등장]인물의 성격(personnage)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때 가면을 주는 것은 바로 [특정 시기] 역사적 결합체의 특징적인 형상이다. 즉, 거기에 '진입'하는 '영원한 대상'이다. 이렇게 볼 때, 한 '성격'은 연속적인 일련의 사회이다. 따라서 광자(photon)를 일종의 '가면', 빛의 파동이 이루는 형상(figure)이라고 부를 수 있다. 변화하는 사물은 이를테면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여러 대립물을 가면으로 삼아서 연속적으로 써본다.
끝으로 다섯째 단계에서 입자 사회(corpuscular society)는 인격성의 새끼줄로 정의된다. 다소간에 친숙한 사물들은 입자 사회와 결합될 수 있다 : 분자, 세포, 조직, 기관, 유기체. 가령 분자는 그 속에 전자, 양성자(proton) 등 원자의 부분들이 함께 살고 있는 하나의 입자 사회이다. (화이트헤드는 원자를 말하지는 않는다 ; 원자는 추상적이며, 구체적으로 볼 때는 다만 분자만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새끼줄'에서 중요한 것은 어떤 가닥도 끝까지 이어질 필요는 없다는 점이다. 가령 사회 속에서 어떤 사람은 죽고 어떤 사람은 태어나지만, 그럼에도, 사회는 유지된다.


Ⅵ. 창조와 구조 (1) : 창조(합생의 이론)

1. 파악의 벡터

20세기 철학의 주된 흐름이 벡터 개념의 변이 속에 존재한다고 말한다면 다만 엉뚱하고 극단적인 생각으로 비칠 수 있다. 그러나 [현대철학이] 벡터 개념으로 수렴한다는 사실은 매우 놀랍다.
먼저 러셀을 보자. 그는 화이트헤드와 더불어 당시 수리 논리학의 영역에서 가장 위대한 저작을 썼을 뿐만 아니라, 분석 철학의 시조 가운데 하나이며, 이 [분석 철학의] 영역에서 가장 으뜸가는 학파를 이루었던 논리 실증주의와 논리 경험주의의 선구자이기도 하다. 이런 러셀이 스스로를 돌이켜 보면서 말했다. 자신이 물리학으로부터 형이상학으로 이행할 수 있었던 것은 힘들의 평행사변형에 대한 명상 때문이었다고 말이다.
한편 '대륙 철학'을 놓고 보자. 사람들은 흔히 분석 철학에 대립시키지만, 우리는 여기서도 두드러진 사상가를 하나 찾아낼 수 있다. 한편으로 브렌타노(Brentano)와 프레게(Frege)로부터 추진력을 받았으며, 또 다른 한편으로 인가르덴(Ingarden)과 셸러(M. Scheler), 하이데거 또 사르트르에게 추진력을 주었던 인물, 바로 후설(Husserl)이다. 그런데 (분석철학으로 이어지는) 프레게와 후설의 관점을 대뜸 나누는 것은 바로 지향성(Intentionalit t) 개념에게 맡긴 역할이다. 그리고 후설은 지향성을 곧잘 벡터로 표현했다. 화이트헤드의 경우에 벡터는 대상(성)으로부터 주관적 통일성으로 뻗는다. 반면, 지향성의 경우에 벡터는 주체로부터 대상으로 뻗는다. [그러나] 이런 차이 때문에 우리가 주저할 필요는 없다. 모든 관계에는 저마다 역(converse)이 있다는 점. 그리고 벡터가 스칼라와 다른 까닭은 방향(orientation)을 가진다는 데 있는데, 역 방향이란 언제나 반대 방향이라는 점 : 따라서 화이트헤드와 후설은 같은 길을 반대 방향으로 달려간 셈이다.
후설 만큼이나 무게 있는 사상가로서 베르그송을 들 수 있다. 언뜻 보기에 그와 벡터 개념은 어울리지 않은 듯하지만, 그건 다만 겉보기에 지나지 않는다. 사실 베르그송이 말했던 '기억'이야말로 화이트헤드가 벡터 이미지로 구체화시켰던 '파악'의 내적 본질을 이룬다. 그리고 미예(Millet)의 최근 연구에 따르면, 청년 시기 베르그송은 러셀로 하여금 과학적 호기심으로부터 철학적 물음으로 넘어가게 만들었던 것과 별로 다를 바 없는 질문들에 몰두했었다 : 러셀과 베르그송은 모두 물리학의 근본 개념을 밝히는 문제에 빠져 있었다.
화이트헤드에게 참된 존재(res vera)란 현행 계기이다. 그러나 현행 계기는 '파악'으로 분석되며, 파악은 각각 구체적인 벡터이다.
대개의 경우, 파악의 '벡터'적 특성은 물리세계 속에서 에너지 흐름이라는 현상과 뒤섞인다. 화이트헤드는 이제 헤라클레이토스의 "만물유전"(萬物流轉)을 "만물은 벡터"로 고쳐 써야 한다고 제안하는 것이다. (그는 심지어 "벡터의 흐름"을 얘기하기도 했다.)
열(熱)은 언뜻 보기에 스칼라 양인 것 같다. 그러나 한 물체가 뜨거워진다는 것은 곧 분자들의 활동이 높아진다는 뜻이며, 결코 '열소'(熱素, calorique)의 양이 많아졌음을 뜻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따라서 활동 속에 있는 지향성의 벡터를 생각하게 된다. 온도란 [열이 도달한] 열의 진리[값]이다.

2. 합생의 기(期)

합생에 상응하는 것은 현행 계기의 구성적 생성이라는 '내적인 흐름'이다. 이 흐름에는 네 기(phase)의 역사가 있다 : 시원(始原), 창조의 국면, 만족, 그리고 대상적 불멸성.
합생은 파악들의 총체가 융합(fusion)되는 과정이다. 각 기는 이 총체를 이루는 하위-총체들의 융합이라고 할 수 있다.
(i) 한 계기 O의 시원(Origin)은 모든 물리적 긍정 파악의 융합이다. 말하자면, 자기 주변 세계(후방 원뿔)에 대한 계기 O(점 O)가 실행하는 물리적 긍정 파악의 융합이다.
(ii) 창조의 국면은 정신 극의 개입이라는 특징을 갖는다. 정신 극이 (영원한 대상을 참조하면서) 취하는 모든 결정(decision)들의 융합이 될 터이다. 더 도식적으로 말하자면, 계기 O가 실행하는 모든 개념적 긍정 파악의 융합이다.
(iii) 만족은 앞선 두 기[시초, 창조]에서 저마다 융합된 파악의 두 집합이 통일되는 것이다.
(iv) 계기의 불멸성은 [이렇게 얻어진 계기의 융합이] 미래 계기들의 합생에게 하나의 '주어진 것'으로 되는 것이다. 계기의 불멸성은 여전히 자신의 합생에 속한다. 일종의 고유한 열개(裂開, dehiscence)를 통한 합생이다.

3. 긍정과 부정의 이중성

합생 과정에서 여러 긍정 파악들은 그들의 형상과 소여(所與)를 통해서 한 줄기로 흘러간다. 반면에, 부정 파악들은 오직 형상을 통해서만 들어온다. 부정 파악들이 왜 이런 식으로 개입하는지 설명해보자.
바다 위로 해가 지는 장면을 바라보는 사람이 있다고 하자. 그는 하나의 계기 O에서, 태양이 진다는 사건 S와 이 사건의 반영 [즉 일몰이 바다에 비치는 장면] R을 지각할 터이다. 그런데 태양의 반영은 이미 태양의 파악이다. 그래서 인식 주체는 한 계기 S에서, 태양의 가시(可視) 표면을 가리키는 경우, 적어도 두 가지 파악을 갖는 셈이다. 한편으로 S-O, 말하자면 직접 파악이 있다. 이것은 햇빛을 구성하는 모든 계기의 행렬에 미치는 파악임에도, 직접적이다 ; 다른 한편으로 S-R-O, 말하자면 간접 파악이 있다. 부정 파악이 개입하는 것은 바로 이런 간접 파악이 있기 때문이다. 사실 동일한 계기 D1이 직접 파악되거나, 또는 (계기 D2를 통해서) 간접 파악될 때, D1의 형상 현실을 구성하는 어떤 파악들은 대상 현실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은폐되어야 한다. 그 결과 D1의 간접 파악은 이를테면 직접 파악과 화합하게 된다. 긍정 파악은 이렇게 부정 파악의 후광으로 둘러싸인다. 각 긍정 파악은 자신의 벡터 진로를 개척하기 위해서 주변 세계의 한 부분에 대해서 눈을 감아버리는 셈이다 ; 이런 '눈감음'은 일종의 부정 파악이다. 어떤 헤겔'주의'에서 말하는 '모순'은 여기서 실재의 부재에 지나지 않는다. 은밀한 주의(注意)에 의해서 실재로부터 제거된 것이기 때문이다. (어떤 라이프니츠'주의'는 모순이 이미 가능성으로부터 제거되었다고 답할 터이다. 이를테면 영원한 대상들 사이에 있는 통사론적 관계의 수준에서 제거되었다고 말이다.)
부정 파악은 여기서 긍정 파악을 위한 푸근하고 유리한 환경을 구성할 뿐이다. 부정 파악이 제공하는 환경은 긍정 파악에 종속된다고 할 수 있다. '레테의 강'은 다만 베르그송의 '기억'이 전개될 수 있도록 제공된 마당을 어른거리게 만드는, 역류하는 샛강의 그물에 지나지 않는다.


Ⅶ. 창조와 구조(2) : 구조(공액 이론)

1. 한 방울 한 방울

화이트헤드의 범심론이 의식의 편재(遍在)를 함축한다면, 공액(cogredience)을 현행 계기의 '의식'이 활동하는 장으로 정의할 수 있겠다. 그러나 범심론이 나온 데는 [의식을 다만 작은 부분으로 고려하는] 제한이 있으므로, 우리는 더 새로운 공식을 택해야만 한다. 바로 '심리적 장'이다. 사실 현행 계기란, 라이프니츠의 단자와 정반대로, 문이며 창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 '심리적 장'은 또한 주위 세계로부터 (의식되든 안 되든 간에) 현행 계기가 만드는 표상이다. 공액은 이런 현행 계기의 인식 내용(cogitatio)이다. 문자 그대로 볼 때 공액은 동일한 경험 또는 동일한 '특별한 현재'의 모든 부분들을 하나로 통일하는 관계이다. 공액은 다른 한편 합생[과 일정한 관계를 맺는]의 함수(fonction)이다.
이때 우리는 앞에서 본 '모래시계' 모델을 점적기(點滴器)로 바꿀 수 있다. 각 합생의 박동이 물리적 지속의 알갱이를 낳는다면, 공액 관계는 전체의 모든 부분들을 포괄한다. 차츰 오동통하게 커진다는 점에서, 파이프에 매달렸다 떨어지는 물방울이나 생물의 세포에 비교될 수 있는 '전체의 부분들' 말이다. 한편 합생과 공액의 계열 사이에는 일종의 상응 관계가 있다. 모래시계에서 합생의 알갱이는 각각 공액의 물방울과 상응한다. (cf. 그림 2)
모래 시계에서 횡단축을 가로지른다는 특성이 있음에도, 공액을 결코 그 자체로 공간 차원으로 환원할 수는 없다. 베르그송의 표현을 빌면 공액은 [오히려] 공간화(spatialisation)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중심축이라는 특성이 있음에도, 합생을 결코 엄밀한 뜻에서 시간적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현행 계기는 지속의 원자이다 : 합생 과정의 여러 기(期)들은 [시간 흐름 속에서] 차례대로 나열되지 않으며, 하나의 알갱이 '점' 위에 죄다 투사(投射)된다. 마치 탄젠트 벡터의 부분들이 한 점에 투사되듯이 말이다. 합생의 각 박동은 한편 지속의 양자(quantum)를 [한 덩어리로] 분할 불가능하게 점유한다. 그 지속은 구체적이며, 이에 상응하는 공액의 연장(extension)에 의해서 결정된다 : '알갱이'는 '물방울'을 점유한다.
공액은 시-공(4차원)적인 연장을 갖는다. 만약 이 모든 시-공 물방울들을 더해간다면, 물방울들은 서로 뒤섞일 것이며, 그 결과 등질적인 전체 속에서 시간-공간 연속체를 이루게 된다.
양자, 연장 등을 말하는 것은 가분(可分)성을 말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렇게 말한다: 백(白) 하나가 흑(黑) 둘보다 낫다. [이때 흑백을] 분할해주는 것은 무엇인가? 이를 알려면, 계기를 매개로 해서, 합생으로 되돌아가야 한다. 계기란 파악의 다발이다. 따라서 완성되고 공액을 거친 계기의 분석은 파악, 즉 합생의 요소들을 찾아야 한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합생의 요소들이란 느낌(feelings)들이다. 합생에 다가가는 것은 오직 긍정 파악이기 때문이다. 시각의 장에서 예를 들자면, 각 점은 어떤 인과 연쇄의 종결점이다. (형태 심리학에서 거부한 '항상성 가설'을 함축하지는 않는다.)
정교한 존재들에서는 정신 극이 감각의 역할을 맡는데, 분할은 여기서 분할된 사물에게 폭력을 행사한다. 그러나 단순한 존재들에서는 [정신 극의] 주도권이 미미하며, 분할의 결과는 여전히[분할되기 이전의 분할대상, 즉] 자기를 추출한 것과 꼭 닮아 있다. 화음과 불협화음을 분석해서 비교해 보라.
다른 한편 합생과 공액 사이에는 새로운 비(非)대칭이 있다. 합생은 계기의 원자 단계에 있다. [원자 이후의, 원자보다 큰 단계의] 파생된 존재의 합생을 놓고 말한다면, 그것은 다만 기초 합생의 결합체일 뿐이다. 반면에 공액은 모호한 종합의 현상이다. '특별한 현재'처럼 흐릿하며, 형이상학적 복잡성의 모든 수준으로 전개될 수 있는 종합이다: 계기뿐만 아니라, 결합체, 인격성, 사회 등은 저마다 공액의 주변 세계(Umwelt)를 갖는다. 전형적인 예는 데카르트가 말하는 코기토(Cogito)의 순간, 또는 베르그송의 '경험된 현재'이다.

2. 연장적 결합(extensive connection)

헤라클레이토스가 말하기를, 자연은 숨기를 좋아한다. 그러나 자연에는 측정될 수 있다는 허점이 있다 : 자연은 '연장'의 성격을 띠게 되며, 이 덕분에 우리의 지각은 자연을 붙들 수 있다. 데카르트로부터 바슐라르에 이르기까지, 과학은 즉각적인 지각에 거스르는 측정을 한다고 생각되었다. 베르그송은 다른 한편 지각과 측정이 동일한 공간화를 일으킨다는 점을 보이려 했다. 생성을 움직이지 못하게 만듦(immobilisation)으로써 공간화를 일으킨다는 것이다. 이로부터 {과정과 실재}의 시학(詩學)적인 부분 속에 들어있는 수학적 종기(腫氣)가 나온다 : 연장적 결합의 이론.
화이트헤드의 연장적 추상 방법을 바탕으로 테오도르 드 라구나(Th odore de Laguna)가 만든 이 수학이론은 외적으로 결합(partes extra partes)된 다수성(multiplicity)에 대한 것이다. 즉 지각 표상에 공통되고, 물리학자들이 기술(記述)하는 측정 가능한 우주에 공통되는 다수성에 대한 이론이다. 여기에는 순수한 위상수학의 문제가 들어있다. 전체와 부분, 포함, 겹침의 관계가 모든 양(量) 또는 측정과 독립적으로 다루어진다.
연장적 결합 이론의 틀은 점, 선, 면의 정의를 제공한다. 러시아 인형의 '심연'과 같은 무한의 극한(limit)으로 정의된다. '심연'의 구성에서 일어나는 수렴의 유형을 따른다. 전형적인 예로서 점의 정의를 묘사해보자. (그림 3). 정육면체로부터 시작해서, 이 안에 구를 그려 넣을 수 있고, 그 안에 다시 육면체를 그려 넣을 수 있다. 이런 식으로 계속한다. 매번 앞선 도형 속에 그려진 도형들의 변형을 통해서 이루어진 무한 계열은 한 점으로 수렴할 것이다. 따라서 점은 이런 원리 위에 세워진 모든 계열의 수렴으로 정의된다.

(그림 3)



여기서 정의된 점, 선, 면 등이 파생의 연속단계(cascade)에 상응한다는 점이 눈에 띌 것이다 : 점은 선으로부터 갈라져 나왔고, 선은 또한 면으로부터 갈라져 나왔다. 마찬가지로 벡터 계산은 합생의 수학적 뼈대이며, 합생은 다수성이 나오게 만든다. (미분 계산은 이 다수성에 대해서 실행된다.)
연장적 추상 이론은 공액의 이론과 접목된다. (후자는 연장의 이론으로 불리기도 한다.) 모든 연장은 본성 상 공액이다. 베르그송의 용어를 따르면, 지속의 공간화이다. 보통 연장적 다수성(순수 공간, 시계의 시간, 이 둘의 무한)은 오직 공액의 시공 세포로부터 출발한 추상을 통해서만 발견된다. 이때 공액은 언제나 제한되어 있다. 비록 우리 시각 장의 경계처럼, 흐릿한 경계로 제한되지만 말이다. 연장적 다수성과 공액을 잇는 게 바로 연장적 추상 이론이다.

3. 초월적 미학

화이트헤드 우주론의 특색 가운데 하나는, 처음부터 또 여기저기서, 미학적인 성격을 띤다는 데 있다. 조화와 부조화는 자연의 기술(記述)에서 빼놓을 수 없는 요소가 된다. 화이트헤드는 확실히 '우주적 복잡성의 음미', 말하자면 알렉산더의 향유(enjoyment)를 고려했던 몇 안 되는 철학자 가운데 하나이다.
형태(Gestalt) 심리학은 '좋은 형태'가 나타나는 과정을 말한다. 화이트헤드의 관점에서 보자면, 여기에는 노력(Conatus)의 결과라는 문제가 있다. 이를테면 모든 현행 계기를 만족으로 이끄는 노력의 특별하고도 큰 효과가 있다. 합생의 3기에서 만족은 자신의 '사적인 이상'을 구성한다. 그러나 '좋은 형태'는 오직 [특정한] 전망(perspective) 덕분에 가능하다. (가령 알베르틴의 얼굴을 너무 가까이 보았을 때를 상상해 보라.) 따라서 어떤 주관성의 관점, 종합덕택에 '좋은 형태'가 있다. 이어지는 음표들은 '특별한 현재'를 위한 멜로디가 될 것이며, 이 멜로디는 음표들 낱낱보다 더 이해되기 쉽다 ; 고대 로마의 도로는 오직 비행기에서 내려다 볼 때 찾아낼 수 있다. 이처럼 미학은 공액의 결과이다.
미학의 관점은 대비(contrast) 개념을 이끈다. 화이트헤드의 대비는 일반적으로 소쉬르의 차이(diff rence)에 대단히 가깝다. 또한 두 종류의 대비가 있다. 첫째는 통합체(syntagme)적이라고 할 수 있으며, 결합체(nexus) 속에서 실현되거나 (합생의 기들 사이, 또는 공액을 통해 통일된 요소들 사이에 있는) 계기 속에서 실현된다. 둘째는 계합체(paradigme)적이라고 할 수 있으며, 영원한 대상들 사이에서 활동한다. 통합체적 대비 가운데 다시 두 가지를 나눠볼 수 있다. 하나는 연쇄 대비이다. 그림 2에서 합생의 다발이 모으는 AO 유형의 인과 연쇄에 해당한다. 다른 하나는 씨실(tram) 대비이다. 합생의 원뿔에서 AB 유형에 해당한다. 씨실의 통합체적 대비 속에서 대비되는 것들은 서로를 강화한다. 예컨대 나란히 놓인 두 색채는 저마다 새로운 가치를 갖게 된다. 두 색채는 저마다 계합체 대비를 통해서, 각자에게 진입한 영원한 대상이 원래 갖지 못했던 가치를 얻게 된다.
그럼에도, 대비는 미학의 수단일 뿐이다. 미학의 목적은 조화를 향한 경향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화이트헤드는 조화를 두 과잉 사이에 있는 적절한 중용으로 정의했다. 두 과잉이란 혼돈(차이의 과잉)과 모호함(같음의 과잉)이다. 조화는 한 번만에 이 둘을 배경으로 얻는다.
니체의 미학에 맞대면 분명해질 듯하다. {비극의 탄생}에서 니체는 '디오니소스'라는 범주를 내세웠다. 사실 화이트헤드식 조화는 '아폴로'적인데, 디오니소스는 [중용의 조화를 택하지 않고] 조화 내부의 두 과잉을 융합했다. 디오니소스는 혼돈인 동시에 미분화(未分化)이다. 찢어진 사지(四肢)의 혼돈이며, 우주의 기원에 있는 단일한 심연과 도취에 침잠한 지평의 미분화이다. 이 점에서 니체의 생각은 카르노의 생각과 통한다. 엔트로피는 무질서인 동시에 미분화이기 때문이다.


Ⅷ. 공리의 요소들

"대략 2천 3백년 전에 유명한 강좌가 하나 있었다. 뛰어난 청중들이 가르침을 들었는데, 거기에는 아리스토텔레스와 크세노폰도 있었다. 주제는 좋음(善)의 이데아였고, 스승은 이 주제에 정통한 분이었다. [우리는 지금] 플라톤 얘기를 하고 있다." 그런데 화이트헤드는 플라톤의 가르침이 실패했다고 한다. 플라톤은 자기 작업 가설의 제 값을 제대로 매기지 못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작업 가설이란 말하자면 수학으로 윤리학의 기초를 밝힌다는 것이다.
화이트헤드는 플라톤이 남긴 자취를 좇아 완성하려했는데, 이 시도를 이해하려면 합생의 도식(그림 4)으로부터 다시 출발해야 한다.

(그림 4)



거듭 보았듯이, 합생은 창조성을 통해 주어진다. 즉 '여럿이 하나 되는 과정'을 통해서 합생은 이루어진다. 그런데 고대 그리스에서 무한(infini)과 유한(fini)의 뜻을 되새긴다면, 무한은 무한정(indetermine)이었으며, 유한은 한 사물의 자기 완성이었다. 그렇다면 합생은 또한 '무한으로부터 유한'으로 되는 과정이 될 법하다. 화이트헤드가 놓은 근본 공리 둘은 바로 이런 측면에서 풀이되어야 한다.
첫째 공리는 단자(Monade)적 원소의 라이프니츠(Leibniz)적 탁월함이다. 이 원리에 따르면 [합생의] 값은 유한(finitude) 함수이다. 합생을 통해서 [하나로] 실현된 주체적 통일성은 창조 활동의 조건이다.
그러나 (형태주의 심리학이 말하듯이) 바탕이 없는 형태란 없다. 한정된 형태는 언제나 그보다 더 넓은 바탕 위에서 나타난다. 한 환경으로부터 다른 환경으로, 총체로서의 온 우주로 나아간다. 여기서 둘째 원리가 나오는데, 그것을 우리는 무한 우주적 실체에 대한 스피노자(Spinoza)적 원리라고 부를 수 있겠다. 이 원리는 형태와 바탕의 대조라는 최소 구조를 고려한다.
두 원리에 공통된 것은 [합생의] 값이 구조들의 생성에 이어진다는 생각이다. 구조를 연구하는 수학의 분야는 대수학으로서, 공리(연역)체계의 뿌리를 이룬다. 그러나 구조를 고려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화가는 서로 어울리지 않는 색깔들로부터 훌륭한 그림을 그려낼 수 있다. 또 색깔을 저마다 때놓고 본다면, 가치(값)가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다. (색깔의 광채나 온도 등에 따라서 말이다.)  
이렇게 본다면, 화이트헤드의 공리는 소묘 단계에 머물러 있다. 이점에서 화이트헤드 철학은 그 자체로 셸러(Scheler)의 심원한 연구가 전개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거꾸로, 셸러가 제대로 깨닫지 못했던 공리의 배후는 화이트헤드에게서 발견된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Ⅸ. 신(神)

화이트헤드의 신학 사상은 두 축을 따라서 펼쳐진다 : 1) 자연 신학을 통해서 형이상학 도식을 완성하기 ; 2) 체험으로 얻은 종교적 관념들을 비판적으로 평가하기. 따라서 성서 해석. 요컨대 화이트헤드의 신학 사상은 자연 신학과 성서 주석의 통합으로 이루어진다.

1. 철학자의 신과 과학자의 신

화이트헤드에 따르면, 신에 대한 생각이 결코 형이상학적 원리들을 벗어나는 예외가 되어서는 안 된다. 신은 오히려 형이상학 원리들의 으뜸가는 예시(例示)가 되어야 한다. 따라서 모든 현행 존재들처럼 신은 또한 이중성을 갖는다. 말하자면 지성 극과 물리 극을 가진다.  
화이트헤드의 자연 신학은 그래서 두 부분으로 나뉘는데, 그 둘의 결합을 (그림 5)에서 볼 수 있을 터이다.

(그림 5)


첫 부분은 신의 시원(始原) 본성을 연구한다. 말하자면 창조 '앞'에 있는 신을 연구한다. 둘째 부분은 신의 결과(consequent) 본성, 즉 섭리에 주어진다. 말하자면 신이 자기 창조물과 맺는 관계들의 총체로서 섭리를 연구한다. 이때 '시원'적인 것과 '결과'적인 것은 세계와 관련해서 풀이되어야 한다. 신은 알파요 오메가인 것이다.
신의 시원성은 지성 극에 있으면서 모든 영원 대상들의 파악 속에 존재한다. (라이프니츠 사상의 변형 : 모든 가능 세계들의 파악) 시원성은 따라서 창조성의 첫째 예시이다. 창조성 속에서 또 창조성을 통해서, 다수로부터 통일로 넘어갈 수 있다. 즉 영원 대상들의 조화롭지 못한 '여럿'으로부터 신성한 계획의 '하나'로 넘어간다. 이때 창조성을 이루는 파악들은 중립적이지 않다. 창조의 관점에서, 영원 대상들 가운데 적합한 질서를 결정하는 가치 평가들이다.
신은 이 시원 본성 때문에 모든 욕망과 노력(conatus)의 참된 대상(목표)이 된다. 자기-생성을 할 때 모든 현행 계기는 먼저 신의 영원한 법령을 참조하는데, 이 법령(시행령)은 [자기-생성이 어긋나지 않게 길을 잡아주는] 최고의 보호(Egide)가 된다. 이런 방식으로 신은 모든 합생과 더불어 동조(同調)한다.
시원 본성이 파악하는 [영원한] 대상들과 마찬가지로, 신의 시원 본성에는 '영원성'과 더불어 '무한정'이라는 특징이 있다. (프레게가 명제 함수의 불포화(unsaturated) 특성이라고 불렀던 무한정 말이다.) 영원 대상들의 세계는 술어들을 찾는 주어들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신의 결과 본성은 창조자 속에 있는 피조물들의 메아리이다. 세계를 신 안에서 객관화하는 것이다. 또한 세계에 대한 신의 영속적인 판단(심판)이라고 할 수도 있다. 마르셀 주안도(Marcel Jouhandeau)는 이것을 두고 "신은 세계의 기억"이라고 했으며 화이트헤드는 "어떤 것도 버림받지 않는 부드러운 보살핌"(a tender care that nothing be lost)라고 했다. 베르그송의 '순수 기억'은 천국에 기입된다. 여기에 한 데 모인 파악들은 따라서 물리적 파악이며, 이것은 신성의 물리 극을 이룬다.
결과 본성은 시원 본성에 대조적으로 결정된다. 결과 본성은 구체적인 존재들에 대한 관계이다. 또한 시간에 대한 영원성의 열림이며 영원 속에서 시간의 입구이다. 이것은 '세계의 신격화'이다. 제 아무리 작은 사건이라도 신의 기억 속에 '영원토록' 살아남는다는 말인데, 이 말은 결국 한 사건은 [한번 발생하기만 하면] 영원토록 발생한다는 뜻이 된다.
계기들에게는 물리 극이 먼저 오고 정신 극이 그 다음에 개입한다. 그러나 창조자의 창조로 거슬러 올라가면 이 순서는 뒤집힌다. 신에게는 영원한 잠재성의 파악이 논리적으로 섭리라는 극적 사건(drame)에 앞선다.  

2. 복음의 신

화이트헤드에 따르면, 신학은 다음 세 가지 오류 때문에 잘못 전개되었다. 1) 영원한 우상 숭배. 케사르나 파라오 같은 지상 군주의 투영으로서 신을 생각하기. (로마 제국의 신) ; 2) 판관(심판자)으로서의 신이라는 관념 (예언자들의 신) ; 3) 형이상학적 궁극 원리로서의 신이라는 관념 (아리스토넬레스의 신). (화이트헤드가 여기서 거부하는 신은 마치 근본 원리가 자신의 결과들에 의존하지 않는 것처럼, 자신이 낳은 존재들로부터 어떤 영향도 받지 않는다는 신이다.)
이런 셋에 반대하면서 아마도 화이트헤드의 모든 신학은 성 요한의 말씀을 철학적으로 받아들이려는 시도라고 생각될 수 있을 터이다 : "신은 사랑이다."
만약 신이 사랑이라면 신이라는 관념은 특히 [모든 관계를 초월한] 절대자의 관념과 분리되어야 할 것이다. 사실 사랑은 본질적으로 관계이다. 따라서 신은 본질적으로 자신이 사랑하는 존재와 관계를 맺는다.
 
3. 신과 세계

그림 1의 원뿔 내부 관계와 마찬가지로 그림 5에서 '원뿔들 사이' 관계들은 내적인 관계이다. 이들은 저마다 본성의 부분이 된다. 그러므로 신과 다른 존재들 사이 관계들은 신의 본성이라는 전체의 부분이 된다. 따라서 모든 존재는 신의 본성을 이루는 내적인 구성 속에 포함된다. 신은 '결과 본성'을 통해서 우주의 총체를 포함한다. 이처럼 화이트헤드는 범신론과 신의 초월성을 화해하는 데 이르고 있다. 사도 바울이 말하듯이 우리는 신 안에서 살아 움직이지만, 그때 신은 '시원 본성'에 의해서 초월의 수준에 자리잡는다. [세계 내 존재들의] 성질들이 여전히 존속하려 애쓰면서 존재하는 수준만큼이나 초월의 수준에 있을 것이며, 심지어 세상에 있는 것이 하나도 없다해도. 초월의 단계에 자리잡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영원 대상들은 존재론적인 일차성을 기껏해야 추상이라는 형태로 어색하게 누릴 뿐이지만, 신은 그 존재론적 일차성을 충만한 구체성 속에서 향유한다.   
이런 까닭에 신의 시원 본성을 능연(nature naturante)이라고 부를 수 있을 법하다. 또 신의 결과 본성을 소연(nature natur e) 또는 우주,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해서 현실화된 우주라고 부를 수 있을 터이다. 즉 불멸의 과거 말이다. (이 불멸의 과거는 신의 기억 속에 있는데, 신의 기억이란 세계의 순수 기억이다.)
세계에 대한 신의 내재에 따르면 순수한 혼돈이란 있을 수 없다. 각 합생은 저마다 현실화된 세계의 총체를 통째로 감싼다. 합생은 따라서 신의 파악이기도 하다. 우주는 이처럼 역사에서 매 (국지적) 순간마다 신의 계획을 참조한다. 각 계기의 정신 극을 통해서 실행되는 개념적 파악들은 사실 '신 안에서의 비전'(vision)이다 : 개념적 파악들이 얻을 수 있는 영원 대상들은 오직 신의 섭리가 가치를 인정(평가)해준 영원 대상들뿐이다.   
화이트헤드가 악의 문제에 접근하는 방식은 바로 이런 전망 속에 들어있다. 그가 내놓는 해법은 구원(救援) 개념의 일반화이다. 거듭 되새기자면, 모든 합생은 신의 시원(일차)적 가치 평가를 참조한다 ; 또 신의 결과 심판(판단)은 각 합생에게 행사된다. 그러므로 무한 예기(豫期)적인 시원 판단을 지속적으로 참조하는 세계의 진행은 이런 우회를 통해서 조정된다. 즉 세계의 운행은 이후 단계에 대한 결과 판단의 판결에 맞추어 조율된다. 세계에 대한 신의 내재를 이런 영속적인 섭리로 번역해서 볼 수 있다. 태어나는 모든 것을 구원하며, 불공정한 고통과 더불어 나쁜 즐거움을 구원하는 섭리라고 풀이할 수 있다. 천국은 우리 가운데 있다. 그리고 신은 모든 악에 상심하며, 스스로 금욕적이다. 금욕적일 수 없는 존재들을 대신해서 말이다. (화이트헤드는 신이 무한한 인내를 가졌음을 상기시킨다.) 아이의 흐느낌이 엄마의 흐느낌 속에서 사라지듯이, 고난의 신음은 신의 신음 속에 빠져든다.  
이때 중요한 것은 라이프니츠 식의 [예정]조화를 단순히 반복하는 문제가 아님에 주목하자. 비록 화이트헤드가 일반화하기는 했지만, 라이프니츠의 조화 개념은 볼테르(Voltaire)의 빈축을 샀었다. (화이트헤드는, 일반화된 형태에서, 부조화의 미학적 역할이 중요한 문제임을 분명히 했다.) 새로운 것은 아마도 베르그송의 요소이겠다 : 지난 불행을 지금 행복의 단순한 구성물로 바꾸는 시간 또는 기억. 이때 세계의 모든 불행은 우주 차원의 영속적인 산고(産苦)이다.

4. 신과 창조성

하이데거, 토마스 아퀴나스 또는 콰인(Quine)을 따르는 사람이라면 화이트헤드 사상을 이렇게 접근할 수 있을 터이다. 베르그송의 이론처럼 생성에 의한 총 망각은 이른바 존재의 결핍이다. 사람들은 거기에다 어떻게 존재 양화어를 적용할지 모른다 : 가령 양화어가 계기들뿐만 아니라 영원 대상에 적용될 수 있는지는 어떻게 결정할 것인가?
그러나 이 결여에 대한 의식은 다른 쪽에서 비롯된 어려움을 풀어준다. 화이트헤드는 신이 '피조물'이라고 했다. 이 말은 언뜻 듣기에 신의 [초월적] 본질을 순수하고 단순하게 부정한 듯하지만, 적절한 철학 개념으로 풀이될 필요가 있다. 화이트헤드에게 '피조물'은 이론 용어로서, 신학자들이 말하는 창조에 이어지는 게 아니라, 모든 체계를 꿰뚫는 창조성 범주에 이어진다. (창조성은 여럿의 하나되기 과정임을 상기하자.)
화이트헤드는 창조성과 존재 자체를 동등하게 만들었다. 모든 개별 존재(현행 존재)가 창조성인 한에서 말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외연과 내포의 혼동이 있다. 존재와 창조성이라는 두 개념은 같은 외연을 갖지만, 이로부터 창조성이 곧 존재의 본질이라는 결론을 이끌어낼 수는 없다. 이제 창조성 자리에 [창조성 대신에], 체계에서 빠진 것, 즉 존재를 놓아보자. 그렇게 하면 신이 피조물이라는 테제는 단순히 신이 있다는 테제가 되어버린다. 또한 신이 있다면 구더기, 먼지, 태양과 더불어 존재(esse)를 공유해야 함이 당연하게 된다.   

5. 신학적 틈새

화이트헤드의 신학은 물론 오늘날 신학에 대해 가장 유연하고도 함축하는 바가 많은 틀을 제공한다. 그럼에도, 그의 신학은 깊은 반대에 부딪힐 수밖에 없다. 이 신학은 신의 생명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다. 시원 본성과 결과 본성 사이에는 아무 것도 없다. 말하자면 세계 창조라는 관점에서 보편적인 것의 앎(파악)에 지나지 않는 시원 본성, 그리고 이 창조를 영원한 평강(平康) 속에서 반향(反響)하는 데 지나지 않는 후자 사이에는 아무 것도 없다. 전통적으로 인격(위격)적 삼위일체 관계로 생각했던 신의 친근함을 벗어나 버린 듯하다. 또한 끝까지 밀어붙일 때, 그의 신은 플라톤의 데미우르고스로 줄어든다. 윌리엄 제임스가 되새기며 교정했던 데미우르고스 말이다. 화이트헤드는 다른 곳에서 분명히 말하기를, "그[신]는 세계를 창조하는 게 아니라, 구원한다." 어떤 뜻에서 거기에는 하나의 변덕스런 재치가 있을 뿐이다. 왜냐하면 화이트헤드는 신의 내재와 더불어 신의 초월을 유지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관점에서 볼 때 그것은 악의 문제 앞에서 무기력한 고백이다 : 신은 악에 대한 책임이 없다. 만약 그가 창조주가 아니라면.
화이트헤드의 신학이 이처럼 커다란 틈새를 내놓는다 해도, 사람들이 틈새를 간파했던 바로 그 범주 도식을 통해서 이 틈새가 제한될 수도, 소멸될 수도 있음을 알 필요가 있다.
그에 따르면 사실 신은 범주 도식의 예외가 아니다. 신은 [오히려] 실재의 가장 깊은 형이상학적 윤곽을 전형적으로 예시하는 것이라야 한다. 그런데 그의 신학이 정작 보여준 것은 다만 신의 합생 이론을 이룰 뿐이다. 따라서 공액에 상응하는 이론이 빠져 있다. 그가 잊었던 신의 친밀함은 바로 이 공액 개념에서 다루어져야 한다. 다른 한편, 신의 합생 이론 속에서 양극성은 거의 비어있는 틀이다. 합생의 정지 이론이 그 공백을 메워줄 것이다. 현행 계기에게 합생의 내적인 기(期) 이론이 모래 시계 개념을 보충해주었듯이.


Ⅹ. 별자리(Pl iades) : 화이트헤드의 위치

장 발을 난처하게 만들었던 골칫거리부터 얘기해보자. {수학의 원리}는 논리학의 기념비적 작품으로서, 화이트헤드와 러셀, 친구이자 사제(師弟)가 쓴 책이었다. 게다가 그들은 저마다 철학자였다. 그런데 러셀은 논리 실증주의를 내세웠고, 화이트헤드는 베르그송의 자취 위를 걸었던 것을 보면, 그들 철학에는 어떤 근친성도 없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더 가까이 들여다보자.
러셀은 형식 논리와 철학이 맺은 관계가 수학과 물리학이 맺은 관계와 같다고 말했다. 화이트헤드는 더 멀리 나아갔다. 러셀이 [철학에 대한] 논리학의 역할을 말한 것은 [철학에 대한] 수학의 역할로 또한 확장되어야 한다고 말이다. 그러나 오해해서는 안 된다. 화이트헤드는 사실 칸트처럼 수학 모델을 철학에 심는다는 생각에 동의하지 않은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때 문제되는 것은 [즉 철학에 심을 수 없는 수학 모델은] 순수한 형식, 이른바 연역 방법으로서만 본 수학이다. 게다가 공리체계를 놓고 볼 때, 고대인들처럼 공리를 일차적 자명성(自明)을 가진 것으로 고려하는 데는 동의하지 않았다. 반면에 화이트헤드에게 형이상학 원리는 물리 이론이 명증한 방식으로 명증하다. (심지어 관성 원리처럼 일차 명증성에 거스를 수도 있다.) ; 물리 이론처럼 형이상학 원리는 자신의 결과, 말하자면 경험을 해석할 수 있는 능력에 의해서 정당화된다. 따라서 형이상학에서 한 몫을 할 수 있는 것은 수학의 내용 자체이다. 철학과 물리학에서 일정한 역할을 맡는 것은 바로 수학의 내용이다. 연장적 추상 방법은 화이트헤드의 자연 철학에서 중심을 차지하는데, 이 방법은 데데킨트(Dedekind)의 '절단' 방법을 옮겨 놓은 것이다. 뉴턴과 라이프니츠의 미분 계산이 코시(Cauchy)와 바이어스트라스(Weierstrass)의 정제된 방법으로 나타났듯이, {과정과 실재}는 아마도 미래의 철학으로 나타날 것이다. 그리고 데모크리토스의 원자론적 직관이 뉴턴에서 톰슨, 러더포드(Rutherford), 또 보어(Bohr)에 이르기까지 근대 물리학에 이어진 것처럼, 과정의 직관은 아마도 미래의 형이상학으로서 이어질 것이다. 이처럼 철학에서 가장 오래된 전통인 보편 수학(mathesis universalis)과 더불어 플라톤과 라이프니츠가 기획했던 기하학적 철학의 전통은 칸트 식의 단절을 넘어서 새롭게 나타난다.
화이트헤드에게 가장 눈에 띄는 영향을 미친 이는 베르그송이다. 그리고 독설가들은 말하기를 러셀은 결코 베르그송을 용서하지 않았다고들 한다. 그가 볼 때 걷잡을 수 없는 신비주의를 향해서 화이트헤드를 유혹했다는 점에서 말이다. 그러나 러셀 또한 비트겐쉬타인의 스승이자 벗이며 제자였고, 비트겐쉬타인의 철학 {논고}는 크게 볼 때 {수학 원리}의 철학을 제공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놓고 보면, 사실 화이트헤드의 철학은 대체로 베르그송과 {논고}의 종합이라고 얘기될 수 있다. 우주적 유출( coulement)에 대한 베르그송의 입장은 영원함에 대한 비트겐쉬타인의 입장을 통해서 평형을 이룬다고 말이다. 화이트헤드의 우주는 대체로 {논고}의 불변 구조 속에서 굽이치는 베르그송적 흐름이다.
한편 고전 체계에서 화이트헤드와 가장 가까운 이를 찾는다면 두 말할 필요도 없이 라이프니츠이다. (비록 라이프니츠는 화이트헤드가 가장 적게 언급했던 철학자 가운데 하나이지만.) 화이트헤드는 {단자론}이 실체 이론에 구속된 유기체의 철학이라고 말했다. 그래서 러셀이 라이프니츠에 대한 향수와 작별하고자 자신의 철학사를 썼다면, 화이트헤드의 철학은 마치 단자론을 구원하려는 기획으로 풀이될 수도 있다. [실체 이론에 구속된] 단자론을 퍼스(Peirce)와 러셀에게 힘입은 관계 이론을 통해서 건져내려 했다고 말이다.
한편 화이트헤드와 존 카우퍼 포위스(John Cowper Powys)의 만남을 빼놓을 수 없다. 이 '목사의 아들'들은 모두 셔번(Sherborn)에서 학업을 시작했고, 캠브리지에서 화이트헤드가 트리니티 컬리지(Trinity College)에 있는 동안 포위는 코퍼스 크리스티(Corpus Christi)에 있었다. (영국에서 미국으로 건너갔다는) 경력이 닮았음을 떠나서, 둘은 같은 해양(海洋) 기질을 공유했다. (같은 거품과 물보라와 저작을 감싸는 해양기질) 둘은 모두 호메로스와 더불어 바다가 모든 것의 아버지이며, 최초의 철학자 [탈레스]와 더불어 모든 것은 신들로 충만해 있다고 생각했다.
화이트헤드는 흔히 절충주의라는 비난을 듣기도 한다. 물론 그의 '유기체 철학' 속에는 [어려운 대목을 빠져나가는] 노아의 방주가 있는 게 사실이다. 그러나 절충주의라는 혐의를 두는 것은 그 자체로 볼 때 어떤 이의를 제기한 것은 아니다. 사실 좋은 절충주의가 있고 나쁜 절충주의가 있다. 나쁜 절충주의는 결코 한 데 더해질 수 없는 조각들을 고집스럽게 늘어놓을 뿐이다. 반면에 라이프니츠가 원형을 제시하는 멋진 절충주의는 뛰어난 지적 욕구를 보여주는 징표이다. 빌어온 것들은 거기서 [누구의 말인지] 알아볼 수 없게 되며, 주도적인 직관의 보호 아래 뒤섞인다. (라이프니츠에게서 주도적 직관은 수학에서 비롯된 듯하다.) 그래서 절충이 다양한 만큼 많이 들어있는 낯선 요소들의 개수는, 체계를 무너뜨리는 게 아니라, [다른 요소들을 서로] 동화(同化)하는 힘을 재는 척도가 된다. 그런데 화이트헤드에게는 라이프니츠[의 절충주의]를 성공하게 만들기도 했던 두 가지 요인이 있다 : 수학적 관점의 깊이 (수학은 여기서, 늘 그렇듯이, 여럿을 통일하는 역할을 한다) ; 오래된 동시에 새로운 주제의 우세 : 그것은 편재하는 벡터가 상징하는 '여럿이 하나되기'의 과정이다.
화이트헤드의 철학을, 카프카(Kafka)에게 중국의 성벽이 가졌던 의미와 같은, 작업 현장에 빗댈 수 있다. 너무 과도한 작업이기에, 작업 감독이 [세세한 것은 포기하고] 다만 전체 계획이 수행되었는지를 확인할 수밖에 없는 그런 작업 현장이다. 말하자면 화이트헤드의 철학은 전체적으로 하나의 도식으로 고려될 수 있다. 이것이 뜻하는 바는 :
1) 각 영역, 각 존재의 세부를 끝없이 보충하는 철학 ;
2) 하나의 소묘로서, 교정-개정될 수 있는 철학 (떼내고 나면 화이트헤드 철학이 무너지는 요소를 들자면, 무엇보다도 궁극적인 범주인 '창조성'이다. 이른바 하나/여럿 테마의 우주 발생론적인 운용으로서, 모래 시계 이미지에 압축되어 있다.)
이렇게 볼 때, 화이트헤드의 유기체 철학은 하나의 밑그림이다. 그 위에는 [현대 영미] 분석철학의 매력적인 세부 논의조차도, 그리 넓진 않겠지만, 할당된 자리에 놓일 수 있을 법하다. (몬타그 Montague와 힌티카 Hintikka의 '가능세계 의미론'으로부터 한 번 결합된 적도 있다.)  


⊙ 화이트헤드의 저작

그의 활동을 세 시기로 나누는 것은 이제 고전적인 분류가 되었다. 첫째 시기는 수학 또는 논리-수학적인 저작의 시기이다. 1898년 {보편 대수학 논고}(Treatise on Universal Algebra)로부터 시작되었다가, 러셀과 함께 썼고 1913년에 출판된 {수학 원리}에서 정점에 이른다. 덧붙이자면, [물질 세계의 수학적 개념에 대하여]라는 소책자(1905)와 [공간의 관계 이론]이라는 논문(1914)이 있다. 이 두 논문은 기하학의 기초에 대한 것으로서, 결국 저술되지 못했던 {원리}의 4번째 목표에 해당하는 주제를 다루었다. 따라서 이 시기에 화이트헤드는 1) 대수학 2) (산술에 바탕을 둔 수리 논리와 더불어) 수리 논리 3) 기하학을 연구했다.
둘째 시기는 자연의 철학에 바쳤다. 수학의 기초로부터 물리학의 기초로 넘어가면서, 자연의 철학에 도달했다. {자연 인식의 원리 연구}(an Inquiry concerning the Principles of Natural Knowledge) (1919), 1919년의 강의를 담은 {자연의 개념}, 그리고 아인쉬타인의 이론을 검토한 {상대성의 원리}(1922)가 있다.
셋째 시기는 형이상학의 시기로서 크게 세 권의 책으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 로웰(Lowell) 연구소의 1925년 강의를 바탕으로 한 {과학과 근대세계}, 1927∼28년 지퍼드(Gifford) 강의를 중심으로 한 {과정과 실재}, 그리고 {관념의 모험}(Adventures of Ideas)이 있다. 화이트헤드 철학의 과학적 서술은 역시 {과정과 실재}에서 찾을 수 있다. 이 논문은 다만 {과정과 실재}를 읽기 위한 길잡이가 될 수 있을 뿐이다. {과학과 근대세계}는 이에 대한 간략한 스케치라고 볼 수 있으며, {관념의 모험}은 보다 섬세한 물음들을 해결하려는 마지막 정점이라고 할 수 있다.
첫째 시기는 이미 철학적이었다. 러셀과 함께 쓴 저작은 사실 수학의 기초를 밝히려는 시도였다. 물론 셋째 시기의 과도한 사변에 비할 때, 그 책은 거의 순수하게 과학 서적으로 보이지만 말이다. 둘째 시기는 따라서 하나의 전환기라고 할 수 있다. 사실 이때 물리학의 기초에 대한 명상을 통해서 그는, 베르그송과 마찬가지로, 형이상학으로 나아갔다. (완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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