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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과 임종에 관한 의문과 해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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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챤아카데미
생명목회 콜로키움(3차)
2001.7.10

죽음과 임종에 관한 의문과 해답

김성환(전 세브란스  병원 원목)


1. 문제의 소재
 우리가 통상 [삶]에 대해서는 많이 생각하고 있지만 [죽음]에 대해서는 별로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죽음]에 대한 생각은 의식적으로라도 기피하는 경향이다. 우리가 그렇게 금기시하였던 [죽음]에 관한 주제를, 오늘 우리 생명목회 콜로키움에서는 왜 다루려하는가?
가) 우리 회중들의 일상생활 속에서 시시각각으로 만나게 되는 현실인 이 [죽음]문제에 대한 안내와 해답을 주어야 할 책임이 우리 목회자들에게 있기 때문이다.  
나) 또한 나 자신도 어쩔 수 없이 언젠가는 당면하게 될 문제이기 때문이다.
다) 우리 인생의 영원한 숙제이기 때문이다.
라) [죽음]에 대해서 의문을 갖는 것은 바로 '생명'을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하는 질문의 다른 측면이다. 생명목회 콜로키움은 바로 이 '생명을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에 대한 고민과 질문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이 문제를 다룬다해도 어떤 시원한 해답을 얻을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안다. 그래서 오늘은 [죽음] 자체의 본질적인 문제보다는 그것을 대하는 우리의 자세와 그것을 넘어서는 길에 대해서 한정적으로 생각해 보고자한다.

2. 죽음의 정체
 가. 죽음은 공포의 대상
 [죽음], 그것은 우리의 일상 생활, 여기 저기에서 일어나고 또 만나는 사건이다. 우리는 그 사건 속에서 날마다 살고 있다. 그런데 그것들은 우리에게 여러 가지 모습으로 만나고 경험되고 있다.
 우리는 대개 죽음을 두 가지 측면으로 경험한다.
  -객체화된 죽음(다른 사람의 죽음)
  -주관화된 죽음(나의 죽음)
 그런데 그 죽음은 분명 우리에게는 공포의 대상이다. 그 공포의 강도는 '죽음과의 거리'에 따라 비례한다. 그 거리는 시간적인 거리와 공간적인 거리를 포함한다. 그 거리가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공포의 농도는 짙게 느껴진다. 대개 [죽음]은 나이가 들어 수명을 다하면 죽는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젊었을 때는 '죽음 의식'이나 공포를 거의 가지지 않고 살고 있다. 또한 위에서 말한 두 모습의 죽음 경험 중에서도 [다른 사람의 죽음]을 경험할 때보다는 [나의 죽음]에 대해 생각해 보려고 하니 겁이 난다는 사실이다. 결국 죽음이 직접적으로 나 자신의 정면에서 도전해 올 때 [두려움]은 극대화된다. 그래서 우리는 잠재의식 속에서 [죽음] 생각을 회피하고 금기시하게 되어 왔던 것이다.

그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왜 생겨나는 것일까?
California주립대 정신과 교수 Pattison;
1)죽음은 미지(未知)이기에 두려움-죽음 후 구원/지옥?
2)고독에 대한 두려움 (Social death)
3)가족과 친지를 잃는다는 두려움
4)신체를 잃는다는 두려움(부패. 소멸)
5)자기 지배능력의 상실(자제력 상실)
6)고통에 대한 두려움(정신적인)
7)주체성 상실-흙으로 돌아 가야한다는 주체성의 말살/이런 보상으로 자기의 일부  를 세상에 남겨놔야 하겠다는 생각.(무덤 혹은 장기의 일부)
8)퇴행에 대한 두려움(여태까지는 어른으로서 인격체로서 잘 처신해 왔는데 죽어가 면서 어린애 같이 되고 모든 것을 남에게 의지해야만 하는 두려움.
이렇게 [죽음]은 불가사의하고 신비이기에 두렵고, 또한 명쾌한 해답이 없어서 답답하다.

  나. 주요 종교들의 죽음관
이 죽음의 공포를 극복하고 의연하게 죽음에 직면하는 길은 없을까?
결국 죽음의 문제는 종교가 그 해답을 주어야 할 분야이다.

우리나라의 3대 종교들의 죽음에 대한 설명
 불교 ; 죽음에 대한 명쾌한 설명을 주지 않는다. 다만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해 이도(二道)라는 것으로서 설명한다. [이도]란 윤회와 해탈이다. '윤회'는 조상들의 영령들처럼 다시 이 세상으로 돌아오는 길이고(베다-Veda-인도의 종교, 철학, 문학의 뿌리). '해탈'은 완전한 수행자가 되어 이승으로 돌아오지 않고 해탈하는 것(우파니샤드-Upanisad). 불교는 윤회과정(輪廻過程)이 죽음설명의 열쇠인 듯하다. 시간적인 측면-시간이란 과거, 현재, 미래의 흐름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특히 불교에서는 무엇인가의 유(有)가 전제되어야 후속적인 유(有)가 존속된다는 논리의 근거를 가지고 윤회설을 주장하고 있는 듯하다. 따라서 인간이란 시간적으로 전생(前生)-금생(今生)-내생(來生)으로 이어지는 한 토막의 현재적 상황이라는 것이다. 이 삼시(三時-과거, 현재, 미래)개념이 삼생(三生-前生, 今生, 來生)개념으로 이어 지는 관계에서 인과응보(因果應報)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윤회과정을 통해서 자비와 덕을 쌓게 되면 해탈하게 되는 데 이것이 불자의 지고의 선이다.

 유교 ; 유교에서도 기본적으로 죽음과 그 이후의 세계에 대한 가르침이 없는 것이 특징이다. 유교의 중심은 효도(孝道) 정신이다. 그 효(孝) 개념에서 생(生)과 사(死)를 보고 있다. 인생은 사람의 한생-대자연속에서 조물주가 만든 한 생물이다. 천(天-하늘)의 명령으로 인하여 만들어 진 것. 하늘이 우리 조상을  탄생시켰고, 조상의 덕에 내가 생긴 것. (물질적으로나 과학적으로)  부모의 혈액 세포와 성격이 결합하여 내 몸이 되었다. 그러기에 얼굴도 체격도 성격과 정신도 부모 혹은 조상을 닮는다. 유전적인 내림을 말한다. 따라서 우리는 부모를 위하고 조상을 받들고 하늘을 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와 같은 이유로 효도하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효도((孝道)는 부모의 뜻을 잘 받들어 가정을 잘 다스리고 자손을 잘 교육시켜서 국가와 민족에게 봉사해서 공을 세우는 것이다.  그렇게될 때 '죽어도 죽지 않다'(死而不死) 즉 영생하는 것이라는 뜻이다.  즉 유교적인 죽음 개념은 현재의 삶 속에서 효도를 수행하는 것이 지상의 도리이고 그 도리를 잘 수행할 때 죽음도 극복할 수 있다는 사상이라고 요약된다.

 기독교 ; 기독교의 가르침 속에는 [영원한 생명]에 대한 것이 있다. 현세와 내세를 포괄한 전체적인 한 생명, 본래적인 생명을 의미하는 것이다. 따라서 어느 면 죽음은 현세의 삶의 끝이기는 해도 그것이 만사를 무(無)로 돌리는 종말은 아니다고 한다. 다만 새로운 세상으로 [옮겨 감]일 뿐이다. 그래서 영원한 생명에 대한 빛 아래서 오늘의 삶을 그리스도께서 가르쳐 주신 사랑을 사는 것이 우리의 지상 과제이다. 그 사랑은 죽음 보다 더 강해서 이 빛 같은 사랑에 응답하며 사는 것이 우리들의 몫일 뿐이다. 그러다가 우리의 "육신의 장막"이 무너지면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고린도 후서 5;1-3)이 있다고 했다.  "하늘에 속한 몸"과 "땅에 속한 몸"이 다르다고 한다.(고린도 전서 15;40, 49) 또한 부활 개념도 [신비한 몸으로의 부활](새로운 창조적 형태 변화)이다. 그것은 반드시 사후에 주어지는 생명으로써가 아니라 현세와 내세를 포괄한 전체적인 한 생명, 본래적인 생명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 본래적인 생명은 죽음이라는 통과제의(通過祭儀)를 통해 현세에서 내세로 옮겨가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기독교에서는 죽음 그 자체를 미화하지 않고 그대로 인정한다. 죽음은 슬픈 것이고 애처로운 것이란 말이다. 그러나 그 유한한 생명체가 죽음 이후에 어떤 형태로든지 새로운 삶을 허락 받은 것은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것이다. 이런 여유를 갖는 것은 어쩌면 이 세상에서의 삶에서의 사랑의 힘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요약 ; 여기에서 우리가 찾을 수 있는 공통점은 위의 종교들이 모두 삶과 죽음을 별개로 보지 않고 하나로 보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면서도 기독교에서는 유한한 생명체가 죽음 이후에 어떤 형태로든지 새로운 삶을 허락 받은 것은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것이다. 이런 여유를 갖는 것은 어쩌면 이 세상에서의 삶에서의 사랑의 힘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을 불교에서는 현세에서의 자비와 덕을 쌓는 것이 내세와 전생에서의 윤회과정을 결정하고 또 해탈의 길도 된다는 말과 맥이 통하는 듯하다. 그리고  유교에서도 '유전적인 내림'으로 인하여 곧 자기는 죽을지라도 훌륭한 자손으로 인하여  '죽어도 죽지 않다'(死而不死)고 한다. 즉 기독교의 영생이라는 개념과 통하는 주장을 한다. 결국 현재의 삶 속에서 효도를 수행하는 것이 지상의 도리이고 그 도리를 잘 수행할 때 자손들의 효도로 인하여 영원할 수 있다고 한다. 즉 위의 입장들의 공통점은 현세에서의 사랑, 자비, 효도들이 죽음이후의 문제들을 지배한다는 것으로 요약될 수 있겠다.

 다. [죽음]에 대한 의학적인 정의
 동서양을 막론하고 오랜 옛날부터 의학적인 [죽음]은 심장박동정지, 동공산대, 광반사소실 등을 통해 심장, 폐, 뇌의 기능이 회복 불가능한 [불가역적정지](不可逆的停止)임을 확인한 후 사망선언을 해 왔다. 그 중에서도 심장박동정지를 사망으로 보아 왔다. 그 이유는 인체 각 기관, 세포에 피가 공급되지 못하면 그 기능들이 소멸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같은 죽음 결정은 지금까지의 관습 일뿐이며 어떤 실정법에 명시돼 있지 않다고 한다.
 심장박동이 정지되어 혈액 순환이 완전히 멎은 후에도 머리카락, 손톱, 일부 피하조직의 세포는 살아 있을 수 있고 적당한 보조 장치로 영양을 공급하면 부분적으로 독자적인 삶을 유지 할 수 있게 의술이 발달되어 있다고 한다. 또 오늘날의 첨단기술은 죽음이 확인된 후에도 동물의 장기나 난자를 채취, 수정시켜 새로운 생명체를 탄생시킬 수 있게 됐다고 한다.
이러한 상황의 변화로 [죽음의 시점]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일찍이 1959년 프랑스의 의학자 몰라레와 굴룽이 뇌사(腦死)를 사망 혼수로 세계의학계에 임상보고 함으로서 뇌사와 사망과의 관계에 대한 연구가 시작되었다고 한다. 68년에 시드니에서 모인 세계의학협회 제22년차 총회에서 [사망결정에 관한 성명]에서 사망시기를 뇌사로 하자는 제안을 하였다. 그 이래 여러 나라에서 이 문제를 활발히 연구하여 일부 선진국에서는 뇌사를 죽음으로 인정한 나라들이 있다.(알젠틴, 오스트렐리아, 오스트리아, 캐나다, 핀란드, 불란서, 이탈리아, 멕시코, 이탈리아, 스페인 등은 의학적으로 법률적으로 인정받고 있다. 그러나 부분적으로 인정받는 나라도 상당수 있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도 근래에 와서 의학적으로는 인정되어 있으나 법제화가 입법 예고되어 있는 상태이다.
 뇌사를 인정하게 되는 경우 몇 가지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뇌사와 식물인간의 식별문제이다. 물론 이것의 식별은 의학적으로 규명할 수 있는 기준이 분명히 있다고 한다. 그러나 양심의 문제, 착오의 문제 등에는 논의의 여지가 있는 이러한 문제점들이 있음에 불구하고 의학계에서 죽음의 시점을 뇌사로 공론화하고 법제화하려고 하는 데에는 분명한 의도가 있다. 그것은 장기 이식과 관련된 것으로서 결국 인간 생명의 연장, 양질의 삶에 그 초점을 두고 있다.

참고; 뇌사(뇌사)와 식물인간과의 구분;
뇌사-뇌에는 크게 대뇌(대뇌), 소뇌(소뇌), 뇌간(뇌간) 등이 있는데 이들 뇌 구조물의 조직 전부가 손상을 입어 회생 불가능한 상태를 말한다.
식물인간-뇌의 3부분의 구조물 가운데 대뇌와 소뇌의 기능은 죽었으나 뇌간(腦幹=생명유지를 시켜주는 延髓-숨골이 있는 곳)이 살아 있어서 인공호흡기를 부착하지 않고 영양공급만으로도 생체징후가 지속되는 경우이다.

3. 사후의 문제
 [死後 生](On Life After Death)의 저자 Elisabeth Kubler-Ross는 Chicago 대학병원 부원장을 역임한 정신과 교수로서 1960년대에 신학생들과 함께 약 2년반 동안 임종환자들의 심리변화에 대해 연구하였다. 그 연구결과를 1969년에 [On Death and Dying](초판)이란 책으로 출간하여 많은 의료인, 간호사, 성직자 그리고 임종환자를 돌보는 사람들에게는 고전적 의미를 지닌 가르침을 주신 분이다. 그녀는 그 이후도 계속 임종환자들을 돌보는 가운데 사후에 관한 관심을 갖게 되었다. 약 20여년 동안 임종환자들을 만나는 과정에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사람, 약 2만 케이스를 만나게 되었다. 그 동안 그녀 자신도 직접 육체이탈(肉體離脫) 체험을 하게 되어 본격적으로 연구하여 얻은 책이 [사후 생](死後 生)이다. 그리고 그녀는 임종환자가 사후에 벌어질 세계에 대한 확실한 신념이 있다면 죽음을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라 친근감을 가지고 마지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그녀는 자신의 이렇게 터득한 바를 미국 전역으로 돌아다니며 강연하였고 그 내용들을 책으로 펴냈다.
 [사후 생]은 제목 자체가 말해 주듯이 임사(臨死) 체험자들의 증언을 종합해서 죽음 후에  새롭게 전개될 세계에 대한 지식을 우리에게 알려 주고 있다.
 이 책을 대략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즉 "죽음의 경험은 출생의 경험과 거의 동일하다"는 전제하에 3단계의 죽음 후의 경험을 소개한다. 첫째 단계는 지금까지 의지해 왔던 육체에 공급되는 에너지가 소멸된 상태이다. 마치 나비의 고치가 더 이상 기능하지 못하게 될 때 고치를 벗어나게 되는 것과 같다. 나비는 이제 공중에서 그 동안 자기가 몸담고 있었던 고치를 공중에서 내려다 볼 수 있는 것처럼 자기 자신의 변신을 새로운 인식으로 받아 드리게 된다. 이것은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가 없다. 죽으면 뇌 작용이 정지되는 것이고 그런 상태에서 자신을 객관화해서 볼 수 있다는 것은 이해가 불가능한 부분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분명히 뇌는 정지상태인데도 실제 그런 일이 벌어졌다는 것으로 죽음 후에 삶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두 번째 단계는 죽은 사람은 자신이 완전하게 변화되어 있음을 의식한다. 이것을 에테르체(ethereal body)라고 부른다. 이생에서의 신체적 장애가 완전하게 회복된 상태로, 지금까지의 제한적인 시간과 공간개념이 전혀 다른, 완벽한 시간과 공간 속에서 살고 있다 것을 깨닫는다. 또한 모든 사람에게는 태어나면서부터 영적 보호자 혹은 놀이 친구가 있다고 한다. 그런데 성장 과정에서 얼마 동안 영적 보호자를 잊어버리고 살아간다. 그러다가 임종이 가까운 시점에서 자기를 극진히 아껴주던 누군가가 자기를 어떤 좋은 곳으로 오라고 하면 즐거움에 찬 모습으로 그곳으로 가게 된다고 한다. 자기를 아껴 주던 그는 태어날 때부터 지켜 주었던 영적 보호자이다. 그분은 아주 가까운 가족일 수도 있고, 개인적인 수호천사, 예수 혹은 다른 종교의 영향력 있는 존재일 수 있다. 이렇게 변형되는 과정에서 긴 터널을 통과한다던가, 문 혹은 다리를 건너는 것과 같은 경험을 하게 된다. 그리고 나면 흰색보다도 더 밝은 빛을 만나게 된다. 너무 장엄해서 감히 다가 설 수 없는 밝은 빛이다. 이 빛을 보고 난 후에는 몸으로 되돌아 와야하는데 이때가 지나가면 영원히 몸으로 돌아 올 기회를 놓치게 된다. 그런데 대부분의 경우 그 빛을 본 후에는 되돌아오기를 원하지 않는다고 한다. 죽음이란 이생에서의 일정한 교육 과정을 성실하게 마치고 더 이상의 수업이 필요치 않는 경우 졸업하는 것과 같다고 한다.
 세 번째 단계는 그 밝은 빛과 더불어 자기의 지나간 일생을 되돌아보게 된다. 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에 있었던 모든 삶(생각, 기억, 행동 등)을 반성한다. 자기의 잘, 잘못을 반성하게 되는데 다행한 것은 그 밝은 빛은 무조건적인 사랑이기 때문에 잘못한 부분이 있더라도 사랑으로 감싼다는 것이다. 결국 자기의 과거와 운명은 신의 탓이 아니라 성숙할 수 있는 많은 기회를 무시해 버린 우리 자신이였음을 알게 된다. 또한 여기에서 우리는 지난날에 대한 심판을 신으로부터 받는 것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가 자기를 심판하게 된다. 그때 강한 빛과 더불어 느끼게 되는 것은 이 세상에 와서 해야 할 일은 어떻게 다른 사람을 사랑하며 사느냐 하는 것이다. 그 기준을 따라 우리 자신이 지옥을 만들거나 천국을 만든다고 한다. 결국 잘 산다는 것은 사랑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4. 죽음의 준비-Hospice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최근에 우리나라에도 폭발적 관심으로 소개된 분야가 있는데 바로 죽음준비교육(Death Education) 혹은 호스피스(Hospice)라는 것이다. 그것의 중심 목표는 '누구에게나 언젠가 다가오는 죽음을 존엄하고 품위 있게 마지 할 수 있게 하는 준비교육'이다.

 가. 죽음 준비에 대한 과거와 현재
              과 거                                    오늘날

                                                    의 학
         의 학       종 교                         
                                                               종 교



 나. 죽음과 임종
 과거에는 환자에게 죽음 진단이 내려지면 의학적으로는 속수 무책, 죽음으로 직행할 수밖에 없었다. 의학은 더 이상 무력한 존재였던 것이다. 그래서 곧바로 그 환자는 종교적 영역으로 그 바통이 넘겨졌다.
 그런데 현대에 와서는 의술의 발달로 인하여 임종의 시간이 연장되었다. 그래서  [죽어 가는 환자](dying patient)라는 새로운 환자군(患者群)이 생겨나게 되었다. 그들도 생명이 붙어 있는 동안만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그분의 사랑을 받아야 할 존재이다. 그들도 그들에게 주어진 삶에 대해 양질의 삶(Quality of Life)을 누릴 권리가 주어져 있다. 그리고 조만간에 몰아 닥칠 죽음에 대한 공포를 극복하고 '아름답고 품위있는 죽음'을 맞이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한 하나님의 선한 뜻을 따라 살기에 자력으로는 어려우니 옆에서 누군가가 보살펴 주어야 한다는 취지에서 호스피스 프로그램이 개발되었다.
 이러한 임종을 앞둔 환자들 주변에서 끝까지 지켜보는 사람들은 의료인들, 환자가족들, 종교인 그리고 자원 봉사자들이다. 이분들에게는 우선 임종환자들을 돌보는데 필요한 기본적인 것들, 즉 봉사자의 자세, 죽음에 관련된 자료 그리고 방법 등이 포함된 호스피스 교육을 시켜야 했다. 그래서 이와 같은 새로운 상황을 만나게 되면서 이 분야에 대한 새로운 관심과 연구가 구체적이고 조직적으로 진행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다. 임종환자의 심리
E. Kubler-Ross의 임종환자의 5단계 심리변화
(On Death And Dying, Macmillan Pub. Co., Inc. 1969, 인간의 죽음, 성염 역,)
 1단계-부정(Denial),      
 2단계-분노(Anger),      
 3단계-타협(Bargaining),
 4단계-우울(Depression),  
 5단계-수용(Acceptance)  

 죽음준비(Hospice)에 있어서의 최후의 목표는 수용(Acceptance) 이다. 수용에는 두 측면이 있다. 자포자기(giving up)와 항복(surrender)이다.  Hospice가 추구하는 수용은 임종해 가는 환자가 자기에게 다가오는 죽음을 받아들이고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일하심(죽음의 섭리)앞에 두 손들고 항복하는 것을 뜻한다. 즉 생명을 다스리는 하나님의 우주적인 섭리 앞에서 [아멘]하는 자세를 말한다. 이것을 [신앙]이라고 한다.(후에 추가 설명을 하겠다)

 라. Hospice어원과 역사
 Hospice는 Latin어 Hospitium에서 유래된 말인데, 이 말은 영어의 Hospital의 어원이기도 하다. 그래서 중세기 전반에는 hospital, hostel, hospice란 용어들을 혼용했다고 한다. 순례자나 여행자가 그들이 피곤한 여로에서 쉬어 갈 수 있는 장소를 수도원에 마련한 것이 발단이 되어 십자군 원정 때에는 여행자들을 위한 피난처(place of shelter)로서 음식, 옷 등을 제공하기도 했다. 그 당시에는 성지 순례도중 죽어 가는 사람들에 대해 세심한 간호를 제공하며,
천국 문이 크게 열려 있음을 믿게 해주는 일을 하였다.
 이런 돌봄은 1815년 Ireland 수도 더불린의 자선수녀회가 최초로 시작하게 되었고, 그 후 영국 런던에 St. Joseph's 병원에서 오갈 데 없는 어려운 임종환자들을 위하여 돌봄의 활동을 펴왔다. 그러던 중 영국 여의사인 Dr. Cicely Saunders가 그 요양소에서 Hospice에 대한 아이디어와 원칙을 만들어 1967년 런던에 St. Christopher's Hospice를 설립한 것이 시작이 되었다. 그후 미국으로 소개되어 오늘날 1,500개소 이상의 Hospice Center가 활동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 1981년 카톨릭 의대와 성모병원에서 시작되었고 신촌 세브란스병원 암센터, [삶과 죽음을 생각하는 회] 등에서 본격적으로 이 프로그램을 위해서 크게 공여하고 있다. 현재는 전국적으로 수 십개의 호스피스 센터가 운영되고 있다.

 마. Hospice목적
 의학적인 도움이 한계에 이르렀다고 판단될 때, 말기환자에 대한 남은 삶의 기간동안을 보다 평온하고, 고통스럽지 않고, 하루하루를 의미 있고 풍성한 삶을 살고, 또한 아름답고 존엄한 죽음을 마지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그 질병에 수반되는 통증관리와 그 외의 신체적 증상 조절과 정서적  그리고 영적 지지를 하여 주는 것이다. 그렇게 하여 그들의 생명이 붙어 있는 동안 양질의 삶(Qaulity of Life)을 살아가도록 돌보는 것이다. 아울러 사별한 가족을 위로하고 격려하여 그 슬픔의 수렁에서 하루 빨리 헤어 나와 그들의 일상으로 복귀할 수 있도록 돌본다.

   바. Hospice Team 구성
 의사; 호스피스 대상자를 선정하고, 환자의 통증 치료를 비롯하여 Hospice Team운영을           조직적으로 할 수 있도록 한다.
 간호사; 환자와 가족들에게 기본적인 신체적 간호를 제공하고, 병상생활 중에 투병의 자           세 및 감정적인 변화 등을 관찰하여 투병에 좋은 조건을 제시하는 일을 한다.        원목; 환자의 영적인 측면, 죽음의 의미와 부활신앙을 심어 주어서, 죽음에 대한 공포에           사로잡히지 않고 담대하고 존엄한 죽음을 마지 할 수 있게끔 돌봐 준다.
 사회사업사; 때때로 환자의 고통과 불안이 가족문제에서 비롯되는 경우도 많고, 그밖에            법적인 문제, 보험관계 등의 문제에 기인되는 경우, 이를 도와준다.
 영양사; 환자들의 영양에 대한 요구를 보조하며 식욕감퇴의 상황을 미리 알아서 적절한
         영양섭취를 돕는다.
 물리치료사: 환자의 신체적 활동제한에 적응할 수 있도록 환자의 자세변형이나 운동을
         통해서 통증이나 불편을 경감시켜 준다.
 자원봉사자; 간호사의 일이나 사무적인 일을 도울 수도 있다. 그러나 주로 환자의 곁에            함께 있어 주면서 환자의 이야기 상대역이 되어 그의 마음을 편하게 해 준다.

 사. Team Member로서의 목회자의 역할
 임종환자들은 예외 없이 그들의 인생의 마지막 돌아가는 골목길에서 '평안한 생의 마감'을 원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을 방해하는 여러 가지 장해 요인이 있다. 그 장해 요인들은 무엇인가. 통계에 의하면 '두려움'이 70%로서 최다를 차지하고 있다고 한다(전우택, '죽음의 과정 및 임종, 중병환자 상담', 삶과 죽음, 삶과 죽음을 생각하는 회, 간행물. p.4-5). '두려움'의 내용은 '미지에 대한 두려움', '단절', '가족', '친구들과 헤어짐', '신체를 잃음', '신체의 고통', '주체성 상실', '과거에 대한 죄책감' 등이라고 한다.
 환자의 이러한 '두려움'의 문제들이 해결이 될 수만 있다면 그들의 가장 큰 '두려움'의 대상인 '죽음'도 자연스럽게 수용할 수 있게 된다.
이러한 문제들에 대한 영적 돌봄은 대략 아래와 같은 내용이 될 것이다.

 여기에서 영적 돌봄이란 무엇이냐? 그 환자들의 바람이 성취될 수 있는 길은 환자 자신이 '오직 하나님 안에 있음을 발견케 하고 그분과 함께 임종의 시간들을 살도록 돕는 일'이다. 왜냐하면 '하나님 안에 있는 사람은 두려움이 없다'는 사실 때문이다.(요한 1서 4;18,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쫓나니...") 그분 안에 있으면 모든 두려움을 내어쫓기 때문에 죽음이 다가와도 아무런 두려움 없이 그것을 수용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을 우리는 신앙이라고 한다.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 안에 있다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손에 잡히지 않는 말이다. 일반인들에게는 더욱 그렇다. 이 말을 우리에게 실감나게 설명해주는 분이 있다. 미국 서남침례교신학대학 목회상담학 교수인 브리스터 박사는 말하길 "기독교 신앙은 삶의 스타일(life-style)이며 실존적 자세이지 단순한 신조 체계(belief -system)가 아니다"(C.W.Brister, The promise of the pastoral counseling, Harper & Row, 1978,  p.12)고
      삶의 스타일-긍정적인 삶의 스타일(positive life-style);신앙
                 -부정적인 삶의 스타일(negative life-style);불신앙
                
 여기에서 신앙은 긍정적인 삶의 스타일을 말한다. 따라서 영적 돌봄의 시작은 바로 불신앙의 상태인 부정적인 삶의 스타일을 신앙의 상태인 긍정적인 삶의 스타일로 바꾸어 놓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환자들은 부정적인 마음 밭의 상태이다. 그래서 그들은 우선 자기 질환에 대해 절망, 좌절하며 과거 건강했을 때를 회상하며 발병의 책임을 조상탓, 혹은 다른 사람의 잘못으로 돌리고 짜증과 불평 불만, 그래서 어떤 경우에는 치료거부 상태로까지 간다.  
 그리고 통증을 느끼는 감각에 있어서도 삶의 스타일에 따라 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다. 객관적으로 측정된 동일한 통증이지만 긍정적 스타일의 사람에게는 덜 고통스럽게 느껴지고,  반면 부정적 스타일의 사람에게는 큰 고통으로 느껴진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부정적(불신앙)인 마음 밭을 긍정적(신앙)인 스타일로 바꾸어 놓는 작업은 영적 돌봄의 결정적인 분야라고 할 수 있다.  

아. 영적 돌봄의 전략과 지침
 영적 돌봄의 자세는 먼저 신앙적으로 무장이 되어 있어야 한다. 자신의 전 존재가 하나님 안에 거하고 있음을 자원 자신이 스스로 확인하고 그 확신이 자신의 몸에 베어 있어야 한다. 그러한 자신의 신앙적인 삶이 환자에게 전달되어야 한다. 그것의 표현 방법은 영적 돌봄의 제공자가 '하고자 하는 바'를 '말'로서가 아니라 '자신이 몸으로 풍겨 낼 수 있어야' 한다. 자기의 믿는 바를 몸으로 풍겨내야 하고, 하고자하는 의견을 '몸 말'로 표현되어야 하고, 사랑과 용서와 용기 등 종교가 가지고 있는 기능을 영적 돌봄 제공자 자신이 몸으로 살아 내야한다. 좀더 구체적으로는 말하자면 첫째 그는 환자 곁에 가능한 한 늘 함께 있어 주는 분이라는 인상을 심어 주어야한다. 그래서 죽음으로 예상되는 '관계의 단절', 즉 '이별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는 환자 곁에 그가  '함께 있어 줌'으로서 위로와 격려를 주는 것이다. 이것이 임종 환자의 장해 요인을 제거해 주는 일 중에 하나이다. 둘째는 순례 길의 동반자가 되어 주는 것이다. 순례길이란 주님께서 정하시고 걸어가신 목표 즉 십자가를 향해 가신 여정을 뜻한다. 우리 크리스챤들은 그 고난의 길을 명상하며 그분과 함께 동행하는 순례의 길 위에 있다. 환자는 지금 고통과 죽음의 위협을 받으며 순례의 길을 가고 있다. 그 앞에서 그들은 삶의 방향을 잃고 실의에 빠질 때도 있을 것이다. 이때 그는 그들의 순례 길을 함께 가는 동반자이다. 환자의 방황과 좌절의 고통을 함께 짊어지고 주께서 세우신 목표 지점을 눈을 들어 바라보도록 돕고 그 목표를 향한 순례 길을 계속하도록 격려하는 것이다. 셋째는 영적 관심이다. 환자가 질병으로 인해 갖고 있는 고통과 갈등에 대해 구속사역에 비추어 이해하고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아픔들을 받아들이고 대처해 나가도록 돕는다. 또한 영적 돌봄은 죽음과 고통의 의미를 발견하고 그것을 받아들이고 극복해 나가게 하는 것이다.
이상의 것들을 말로서가 아니라 몸으로 말하는 일이 매우 중요한 것이다.
 이러한 '몸 말'은 곧 자신의 삶의 자세에서 표현되는 것이며, 그것은 환자 자신의 삶의 자세와 삶의 스타일 형성에 결정적 계기가 될 것이다. 이것은 바로 신앙의 문제에 직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돌봄은 어떤 특정종교인이 자기가 믿는 종교의 교리를 열심히 설명하여 전도하려는 정열과 전혀 다르다. 교리를 잘 익혀서 '죽어서 천국 가게 하려는 노력'은 무익하다. 다만 환자의 삶이 그 기본 자세에서부터 변화하여야 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임종환자가 가지고 괴로워하는 문제들을 해결할 수도 없다.
 삶의 변화 곧 부정적인 마음이 긍정적인 삶으로 변화 될 때에만 임종환자가 가지고 있는 문제들 즉 "육체적인 통증"과 "관계들의 깨어짐에 대한 불안감"과 "죽음 혹은 그 이후에 대한 두려움" 등은 사라지게 된다. 그래서 환자는 평온을 찾을 수 있고 죽음을 향한 당당한 발걸음을 옮길 수 있을 것이다. 더 나아가 자기 스스로의 마음속에 이미 자생적인 치유력을 강화한 상태가 되어 있음으로 인해서 치유 혹은 투병에 속도가 붙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투병 속에서 일어 날 수 있는 임종환자의 제반 문제들을 대부분 완화시킬 수 있다. 따라서 생명이 붙어 있는 동안 [양질의 삶], [평온하고 존엄한 죽음 맞이]를 할 수 있을 것이다.  

추천된 참고 문헌 중에는 [죽음과 임종에 관한 의문과 해답]( Questions and Answers on Death and dying, 이인복 역, 홍익제, 서울, 1983,)이 있다. 그녀는 [On Death and Dying] 출판 이후 미국 전역을 두루 다니며 임종환자를 돌보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강연과 쎄미나를 진행하였다. 거기에서 제기된 죽음과 임종에 관한 질문들 349개 항목에 대해 답변을 해 주고 그 내용을 책으로 엮은 것이다.  이 책은 [죽음]에 대한 본질적인 문제를 다루었다기 보다는 [죽음을 어떻게 맞이하게 도울 것인가? 어떻게 하면 두려움의 대상인 죽음을 회피하거나 비굴하지 않고 정면으로 당당하게 도전하며 맞이할 것인가? 또 사별 가족들을 어떻게 위로하고 그 비탄의 경지에서 헤어 나와 일상 생활로 조속히 복귀할 수 있게 할 것인가? 하는 등에 초점을 맞춘 것이다. 따라서 임종환자 돌봄 중에 제기되었던 실제적인 의문과 그것의 답변들을 케이스별로 일문일답 형식으로 편집되었다. 따라서 이 책은 호스피스 봉사자들에게 있어서는 [Hospice Manuel]과 같이 활용될 수 있는 성격의 내용이다. 그러므로 그 책 내용을 오늘 이 자리에 소개하기는 다소 무리가 된다고 판단된다.  

5. 결론
죽음에 대한 종합적인 입장 정리
 "죽음이라는 엄숙한 현상을 사실 그대로 받아들이는 자세가 우선 우리에게 있어야 하는데, 죽음 이후의 세계를 너무나 자명하게 인정하고 들어가는 때, 죽음의 심각도도 살아지고 삶의 진지성도 약해질 위험이 있다. 반대로 죽음이 모든 인생의 마지막이고 끝이다, 그 이후엔 개인적인 생명으로서의 아무것도 없는 허무가 있을 뿐이다라고 강조해도 삶의 진지성과 신비로움이 손상당한다. 그러므로 종교적으로는 그것을 '역설'이라고 부르는데 특히 기독교 입장에서는 죽음을 먼저 진지하게 받아드릴 것을 요청한다.......기독교는 죽음 자체를 미화하지 않는다. 죽음은 슬픈 것이고 애처로운 것이다. 기독교에서는 거듭 말하지만, 인간으로서는 죽음이 끝이다. 그 유한한 생명체가 죽음 이후에 어떤 형태로든지 새로운 삶을 지속하는 것은 또 다른 하나의 선물이고, 하나님의 창조행위에 의해서 가능하다고 고백한다."(사후 생 p.125-6, 김경재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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