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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11/09 (11:38) from 80.139.147.106' of 80.139.147.106' Article Number : 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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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다머와 새로운 해석학
가다머와 새로운 해석학

박순영 / 한국 해석학회 회장(연세대 교수, 철학)





1. 가다머 사상의 현대 철학적 위상

지난해 4월에 102세로 타계한 20세기의 위대한 사상가 가다머H.G. Gadamer는 철학의 영역뿐만 아니라 인문, 사회과학 영역에 두루 영향을 끼쳤던 철학자였다. 세계의 철학자들이 그의 죽음을 애도하고 그의 업적을 기리고 있다. 캐나다의 철학자 찰스 테일러Charles Taylor는 가다머를 20세기의 철학에서 오래 기억되어야 할 철학자로 평가하였다.

그가 들고 있는 가다머의 업적은 과거로부터 내려온 서양 고대 사상의 결실들을 우리 시대에 의미와 연결시키는 작업을 잘 이루어 냈으며, 인간의 삶에서 갖는 언어의 중요성과 담화談話의 중요성을 일깨운 철학자로 보고 있다. 가다머의 제자였던 이탈리아의 철학자 바티모Vattimo는 헤겔의 말을 빌어서 자신의 “시대를 사유 속에서 파악”했던 인물이라고 보았다. 가다머는 하이데거를 따라서 존재를 言語에서 만나게 해 준 철학자였으며, 그는 실증주의적인 전통에서 절대적 진리를 고집하는 태도에 대항하여 理解이해와 對話대화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가르쳐 준 사상가였다고 평가하고 있다.

가다머는 실제로 과거와 현재 사이의 간격, 저자와 독자와의 간격과 그들 간의 지평의 차이를 극복하는 것에 관심을 두었다. 차이와 간격에 대한 성찰이 해석학解釋學이라는 학문의 핵심 과제이기도 했지만 그가 만든 용어 “지평융합地平融合, Horizontverschmelzung”은 해석학적인 연구작업에 아주 생산적인 개념에 속한다. 두 시인, 두 철학자, 두 문화, 두 시대를 특정한 방식에서 다가오도록 하는 과정을 서술하는 개념이 바로 지평융합이다.

이를 두고 미국의 철학자 로티R. Rorty는 가다머를 평가하여, 화합할 수 없는 차이를 그대로 두면서도 서로 간에 생산적인 이해가 되도록 하여 해석학적 화해의 능력을 보여 주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가다머는 하이데거를 우리에게 다른 위대한 철학자 중의 하나로 소개했으며 생동적인 담화의 의미를 가르친 철학자로 꼽고 있다.

오랜 기간 그를 추종했던 제자 부브너R. Bubner는 “가다머가 사망했다는 것을 믿기 힘들다. 늘 그는 살아있다고 믿어왔기 때문이다. 가다머는 철학이 자신의 삶의 형식이 되어버린 사람이다. 그는 철학과 예술에서 위대한 유럽 전통의 지킴이였으며 변호자였다. 담화의 이념, 그것이 바로 우리인데, 그것이 그의 해석학의 출발점이 된 것이다. 이것이 그를 하이데거로부터 구별시키는 특징이다.

열린 대화의 이념은 가다머에게서는 해석학적 상황의 패러다임이다. 하이데거M. Heidegger에서는 낯선 요소이긴 하지만 실제로 가다머는 하이데거로부터 영감을 얻은 것이다”라고 말한다. 가다머 해석학은 독일의 경계를 넘어서서 해석학적이라고 특징지어지는 학문이나 예술, 문예학에 영향을 주었고, 분석철학에도 영향을 주었다고 그의 업적을 기린다.

하버마스J. Habermas의 가다머에 대한 평가는 좀 특이하다. 그는 1967년 가다머와의 논쟁에서 그의 해석학을 보수주의적이며, 전통주의에 매여 있다고 비판한 바 있다. 하버마스는 가다머의 업적을 주로 反실증주의의 흐름인 니체의 두 번째 저서 《反시대적 고찰》에서 시작하여, 딜타이W. Dilthey와 요크 백작간의 서신교환을 거쳐서, 초기 하이데거에 걸쳐 있는 논의를 해명하는 데 주력했다고 평범하게 평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버마스는 가다머에게서 긍정적인 점을 찾아내고 있다.

가다머는 독일의 수많은 정치적인 격변을 거치면서도 교수직에 머물렀던 학자였고, 전쟁 후에도 잘못된 소리를 듣지 않은 사람에 속해있다고 한다. 가다머가 《진리와 방법》 2부에서 역사주의의 입장에서 진리내용의 책임 있는 힘을 손상시키지 않은 채 우리에게 전승을 전유(동화)할 수 있는 길을 제시한 것과 수많은 세대를 거치면서 끌어간 대화가 많은 사람들에게 다양한 관점을 획득하도록 자극했다는 의미에서 기여한 바 있다고 말한다.

이런 평가들은 가다머의 사상을 철학사에서 확고히 자리매김 시키는 긍정적인 평가들이다. 가다머는 당연히 20세기의 철학을 대표하는 사상가라고 부를 수 있다. 그는 지금 독일 철학에서 하버마스 다음으로 가장 많이 인용되고 있는 철학자로 꼽히고 있다. 그는 현대철학에서도 해석학, 미학, 언어학, 언어철학, 문예학, 번역이론 등에 중요한 이론을 내 놓았고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헤겔, 딜타이, 하이데거의 철학으로 가는 길을 밝혀준 훌륭한 철학자였다. 우리는 여기서 그가 해석학의 영역에서 이룬 업적들을 살펴보려 한다.


2. 가다머 철학의 사상적 배경―哲學的 解釋學

평생 가다머는 하이데거에 대한 매혹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가다머의 유일한 선생은 하이데거였다. 한 철학자가 위대한 스승을 만나는 것은 은총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제 가다머가 많은 철학자들과 다양한 분야의 학생들의 스승이 되었다. 가다머가 얻은 세계적 명성은 이미 하이데거의 명성을 넘어서고 있다. 이는 자신의 스승이 실현하지 못한 해석학의 실천적 적용을 수행했기 때문인데, 그게 바로 그가 60세에 내 놓은 주저主著 《진리와 방법》에서 완결되었다.

이 책은 지속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그 이유는 아마 시대적인 상황에서 이해해야 할 것이다. 베이컨Bacon 이후 서양 지성사의 흐름은 경험주의, 과학주의, 실증주의가 우세한 경향으로 진행되어 왔다. 모든 과학과 심지어 철학까지도 자연과학적 방법의 모형을 쫓아서 지식 획득의 과정을 밟아가고 있었고, 자연과학의 방법 이외의 어떤 방법도 허용하지 않는 듯한 승리의 행진을 구가해 왔다. 이런 흐름에 종지부를 찍으려는 노력이 이미 니체Nietzsche에게서, 그리고 딜타이와 나중에 하이데거에게 이어졌다. 특히 방법적인 억압을 느끼고 있었던 분야는 정신과학과 문화과학이었다.

딜타이는 해석학Hermeneutik이란 이름으로 자연과학적 방법에 도전하였으나, 그 힘이 미미하여, 20세기의 철학자들은 철학을 포기하면서까지 자연과학적 방법을 열망하고 있었다. 비엔나 학단의 新실증주의는 국제적으로 확산시켜 자연과학과 정신과학에 두루 통용되는 방법론으로서의 통일 과학이론을 창안해 내었다. 포퍼K. R. Popper에 의해서 변형된 新실증주의, 즉 비판적 합리주의는 자유주의의 신조가 될 정도로 인정받게 되었다. 또한 英·美 언어분석 철학은 비트겐슈타인의 추종자들을 중심으로 개별질문들을 미세한 논리적 논증방법으로 해결하려고 했다.

그러나 철학자들이나 생각있는 일상인간이 그런 엄밀한 방법의 분위기 속에서 사유하며 살 수 있을까?
가다머가 과도하게 방법에 대해 부정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도 바로 이런 상황에서 나왔다는 것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가다머는 하이데거를 만나고 딜타이의 정신에서 해석학을 더욱 심화시켰다. 그는 《진리와 방법》의 서문에서 “이 연구에서 전개되는 해석학은 결코 정신과학의 방법론이 아니라, 그 방법적 자기의식을 넘어 정신과학이 진정 무엇이며, 또 정신과학을 우리의 세계 경험 전체와 결부시키는 것이 무엇인가를 이해하려는 시도이다”라고 밝히고 있다.

유일하게 해석학만이 자연과학의 지배로부터 도피처를 제공할 수 있다는 확신에서 가다머는 종래의 문헌학적 신학적 해석학의 전통을 새롭게 하고자 했다. 가다머는 여러 측면에서 후설Husserl의 현상학에서 영향을 받았고 하이데거, 헤겔의 변증법적 철학, 슐라이어마허, 딜타이 이후의 해석학적 전통을 그가 명명한 철학적 해석학에 연결시키려 했다. 해석학은 세계 경험의 이해를 중심 문제로 다루는 학문이다.

그러나 가다머의 철학적 해석학은 텍스트의 해석방법에 대한 전통적인 이해이론을 넘어서는 것이다. 슐라이어마허와 딜타이에게서 이해란 말은 종래의 인식이란 말의 자리를 차지한 것이었지만, 가다머에게서는 理解란 인간 존재를 위해서 근본적인 것이다. 인간은 이해하면서 존재한다. 하이데거의 말을 빌리면, 이해란 인간의 근원적인 존재방식이다. 인간은 자신의 이해지평을 통해서 세계를 이해한다. 이해란 자기이해이며, 모든 이해는 항상 자기 나름의 해석이다.

《진리와 방법》에서 가다머는 예술, 미학, 문예학, 역사에 대한 해석학적 경험의 의미를 해명하려 했다. 이에 따라 이해는 진리에 대한 경험으로 방향을 잡아간다. 이해는 모든 과학적 방법에 앞서는 것이다. 해석학적 이해는 언어를 통해서, 담화Gespra?h를 통해서 그리고 대화상황을 통해서 수행된다. 성공적인 의사소통이 이루어지려면 대화 당사자들간의 지평이 조정되어야 한다. 이렇게 해서 진정한 대화는 다른 사람에게 들어가는 것이다. 인간은 이해하는 존재, 즉 우선적으로 언어적인 존재이다. 왜냐하면 이해는 언어에 매여있기 때문이다.

가다머는 《진리와 방법》에서 “해석에 있어서 자신의 고유한 파악을 피하는 것이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그렇게 되면 분명히 반의미가 된다”고 말한다. 해석이란 자기 자신의 고유한 先파악Vorgriff, 즉 선입견이 역할을 수행하도록 하는 것이다. 텍스트가 우리에게 다가올 때 우리는 전혀 아무것도 미리 이해함이 없이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이미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이해의 지평, 즉 선입견을 통해서 서로 다른 두 지평간의 융합이 이루어지게 되어 있다. 이때 서로 다른 지평들의 차이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차이가 보존되면서 이해된다. 이런 입장은 그의 영향사 이론에서 밝혀지게 될 것이다.

가다머의 철학적 해석학은 객관주의적인 방법이념을 멀리하고 있다. 오히려 주관적 파악이 세계 경험의 진리를 개시해 준다는 것이다. 전통 해석학이 주관적인 이해개념을 내 놓고 이에 접근하는 방법으로 심리학을 끌어들였지만 결국 인식의 상대주의라는 비판을 비껴가기 힘들었다. 가다머의 철학적 해석학은 이런 비판에 맞서고 있다. 왜냐하면 이해의 본질이 역사적이기 때문에 결코 이해는 절대적이거나 객관적일 수 없다고 주장한다. 이런 태도는 하이데거로부터 나왔다. 가다머는 하이데거의 입장을 충실하게 따르고 있다.


3. 가다머의 생애―하이데거와의 만남

가다머는 독일의 브레스라우Breslau에서 1900년에 태어났다. 아버지는 대학의 생리학교수였다. 그는 처음 브레스라우 대학에 진학했다가 아버지의 직장을 따라 마부르크로 옮겨서 거기서 新칸트학파의 나토르프Paul Natorp의 지도아래 박사학위 논문 《플라톤의 변증법에서 쾌락快樂의 본질》을 제출했다. 가다머는 학위를 끝내고 프라이부르크에서 후설과 하이데거에게서 한 학기동안 공부를 계속했는데 그것은 그에게 완전히 새로운 시작과 같았다고 회고한다.

가다머와 철학의 천재 하이데거와의 관계는 정신사에서 스승-제자의 특별한 관계를 형성했다. 그의 스승에 대해 어떤 인격적인 관계를 가졌는지에 대한 질문에 가다머는 “사람들 중에는 하이데거와 말을 잘 거는 사람도 있었는데, 나는 그런 사람에 속하지 않았다. 나는 하이데거로부터 오직 배우기만 했을 뿐”이라고 했다. 이 표현은 아주 특이하게 들린다. 담화를 철학함의 중요한 방식으로 생각한 가다머는 다른 사람에 대한 이해를 본질적인 계기로 간주하고 있었다. 담화는 듣는 것을 배우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가다머가 하이데거에 매혹되었음을 분명히 깨닫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가다머는 “내가 하이데거에게 매료된 것에 대해서 그 당시 나는 무슨 말을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것이 오늘에야 내게 떠오르고 있다. 그와의 만남으로 철학적 전통에서 사유하는 일이 생동적이게 되었다. 그런 사유는 진정한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이해되었다. 전통적 사유의 동기들이 갖고 있는 역사를 밝혀내는 일은 내게 질문이 불가피하다는 것을 일깨웠고 여기서 이해된 질문은 단순한 지식으로 획득될 것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의 질문이 되도록 만들었다”고 회고했다.

가다머가 하이데거를 만난 시점은 1차대전 후 정신적 해체의 시기, 즉 공백기였다. 그 당시 젊은이들은 도스토에프스키의 소설과 키에르케고르 저작의 독일어 번역판에서 정신적인 자극을 받고 있었다. 그 당시 널리 퍼진 관심들은 하이데거에게 쏠리고 있었다. 하이데거는 가다머보다 겨우 11살 위였다. 그런데 하이데거를 만나고 나서 가다머는 새로움에 직면한 것이다. 새로움은 기존 가치의 전도를 의미했다. 그렇지만 가다머의 신중한 성격은 이렇게 매혹적인 사이렌 소리에 마냥 추종하지 못하게 했다.

그는 일단 귀를 막고 다시 마부르크로 돌아가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고전문헌학古典文獻學을 계속 공부했다. 그리고 관념론적-낭만주의적인 전통에 몰입해 있었다. 특히 그는 딜타이적인 역사학의 모형에 접근하고 있었다. 마부르크에서 가다머는 고등학교 교사자격 국가시험을 치르고 나서 프라이부르크로 돌아와 하이데거에게서 교수자격논문을 쓰게 되었다.

그때 하이데거는 가다머가 지나치게 문헌학에 매여있음을 질타했다고 한다. 그러나 고전문헌학은 가다머에겐 최초의 자극이었으며 그 자극은 끝까지 남아 있었다. 그가 하이데거의 지도로 제출한 교수자격논문도 《플라톤의 변증법적 윤리학》이었으며, 마부르크 대학의 취임강연도 〈그리스 윤리학에서의 우정友情의 역할〉이었다. 가다머의 그리스철학에 대한 관심은 1949년 하이델베르크 교수가 되어서도 계속 진행되었다.

가다머는 마부르크 대학(1929∼1939), 라이프치히 대학(1939∼1947), 프랑크푸르트대학(1947∼1949)을 거쳐서 마지막으로 1949년 야스퍼스K. Jaspers의 후임으로 하이델베르크 대학교수로 초빙되었다. 그는 하이델베르크 대학의 초빙에 대해서 “나는 전혀 놀라지 않았다. 오랫동안 나는 하이데거와의 교류, 야스퍼스의 작품을 통해서 나 자신의 연구계획을 발전시키는 것을 배워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평상시에 당연한 것이었던 많을 것들을 따라잡아야 했다. 내가 속한 세대는 독일의 한계를 넘어가지 못한 세대이다. 내 선임자와 내가 좀 달랐지만 학생들과의 접촉에서는 어려울 게 없었다. 그 당시의 학생들은 내가 모든 답변의 끝에 ‘그건 내가 잘 모르는 것’이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열려진 질문에 대한 그런 생각이 지속적으로 철학에 이르는 바른 길이었다”고 솔직하게 말했다.

학생들은 가다머에게 암암리에 압력을 행사했다. 가다머가 큼직한 책을 한 권 쓰도록 하는 압력이었다고 가다머는 생각했다. 그래서 그가 1949년에 착수하여 1959년에 탈고하고 1960년에 출판되어 나온 책이 바로 《진리와 방법》이다. 만년의 나이인 60세에 주저를 낸 것이다. 원래 그는 “철학적 해석학의 근본특징”이란 제목을 달았고 그렇게 출판하기를 원했지만, 출판사는 해석학이라는 개념을 잘 알지 못했다고 한다. 그런 사정으로 붙인 책의 제목이 《진리와 방법》이고 부제가 철학적 해석학의 근본특징으로 되어 있다. 이 책이 나오게 되자 “해석학”이 일반에게 알려지게 되었다. 책을 내놓고 가다머는 걱정을 했다. 2판을 찍을 수 없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곧장 5천 부가 나갔고, 1965년에는 제2판이 나왔다. 그의 책은 세계적인 명성을 얻게 된 것이다.

1960년대 후반 독일 대학은 학생소요로 흔들리기 시작했다. 하이델베르크가 더욱 심했다. 학생들의 공격을 받았던 동료교수(Dr. van der Meulen)가 자살하는 상황으로 치달았다. 이런 어수선한 분위기에서 가다머는 1968년 대학에서 은퇴하였다. 가다머는 자신이 대학에서 많은 경험을 쌓았다고 생각했지만 실제로 그 당시 젊은 세대가 가진 경험에서 결하고 있는 것이 있었다. 그게 바로 다른 나라의 언어와 철학에 대한 경험이었다. 가다머는 그때부터 80년대까지 규칙적으로 가을학기마다 미국에 머물렀고, 4년간 캐나다(McMaster와 Toronto)에서 보냈다.

그는 프랑스어에 능했기 때문에, 자주 프랑스어가 통하는 유럽의 나라로 여행을 다녔다. 가다머는 1985년에 시작해서 10년이 걸려 간행된 《가다머 全集》 10권을 자기 손으로 직접 감수할 수 있는 기쁨을 누렸다. 그의 자전적 저작인 《철학적 수업시대》란 말을 그의 삶에 중요한 과제로 삼았다. 수업시대 즉 배움은 끝이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가다머는 부단히 자신을 개선하려고 노력했다. 그가 고령의 나이를 누리는 행운을 얻었던 만큼 그 행운을 다른 사람에게 전해 주는데도 인색하지 않았다.


4. 가다머의 해석학

철학의 한 분과 중에서 “해석학”이란 이름은 실제로 신학, 문헌학, 법률학보다 그 역사가 더 오래 되었다. 해석학이란 말은 헤르메스Hermes 神에서 유래한다. 헤르메스는 신들의 메시지를 인간에게 매개해 주는 신의 사자使者였다. 해석학의 전통은 신의 영감에 의해서 쓰여진 성서가 인간에게 어떻게 전달되어야 할 것인가를 탐구하는 과정에서 시작되었다. 성서해석학이 현대 해석학의 시초이다. 그러나 가다머의 철학적 해석학을 이해하기 위해서 먼저 슐라이어마허, 딜타이, 하이데거로 이어지는 해석학의 전통을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어떤 이유에서 하이데거와 가다머의 변형된 해석학이 나오게 되었는지를 이해해야 한다.

독일 관념론과 낭만주의 사이의 시기에 속해 있었던 슐라이어마허는 자신의 실천적 관심 영역이었던 플라톤 저작의 독일어 번역과 성서연구에서 해석학적인 문제의식에 착안하게 되었다. 어떻게 플라톤의 사상과 성서의 본래적인 의미를 전달할 수 있을까 하는 해석기술을 두고 고민하였다. 성서나 플라톤의 저작이 쓰여진 시대와는 다른 상황에서 원저자의 본래의 의미를 되살리는 일은 일반 번역가나 성서 해석가와 달리 철학자에겐 진지한 질문으로 다가온다.

성서해석가들은 성서의 글자에 매이지 않는 영적 해석을 시도하였지만 해석가의 임의성에서 객관성을 유지해 주지 못했고, 그 당시의 문헌 해석가들이 작품이해를 위해서 작가의 정신과 시대정신을 고려해서 해석해야 한다고 말했지만 작품정신과 작가의 내면세계로 접근하는 방법론이 결여되어 있었다. 슐라이어마허는 우선 심리학을 토대로 작가의 내면세계로 들어가는 길을 열어 줄려고 했다. 그는 해석의 기술을 문법적 이해와 심리적 이해의 방법론으로 구분하여 이해의 기술론으로 발전시켰다. 그리고 그는 해석에 개입하는 언어의 역할을 강조하기도 했다.

그러나 심리적 이해는 결국 작품이해를 위해서 독자가 원작자의 내면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지나친 요구가 나오게 된다. 말하자면 시이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시이저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가다머는 《진리와 방법》에서 슐라이어마허의 심리적 감정이입과 같은 방식을 비판한다. 이해한다는 것은 결코 원래의 것을 재생산하는 것이 아니라―실제로 그것이 불가능하기도 하지만―독자의 이해의 지평에서 달리 이해한다는 것이라고 말한다.
딜타이는 자연과학의 방법론에 대립한 정신과학의 방법론을 근거지우기 위해서 해석학을 끌어들였다.

“자연은 설명하고 정신은 이해한다”는 그의 슬로건은 자연과학적 방법에 의해서 평준화되어버린 경험의 왜곡을 비판하였고, 인간의 이해는 역사적인 조건, 즉 역사, 문화, 객관화의 산물인 법률, 관습, 언어 등에 의존해 있다고 보았다. 그는 체험, 표현, 이해는 순환적인 구조를 밝혀 내었다. 여기서 말하는 순환구조란, 아무것도 체험되지 않은 상태에서는 이해란 불가능하다. 그래서 체험한 것을 표현하고 표현된 것을 이해한다. 그리고 다시 순환적으로 이해는 이미 체험한 것에서 다시 시작한다는 해석학적 순환의 이론을 내 놓았다.

딜타이의 해석학적 순환이 하이데거에게서는 이해의 先구조Vorstruktur의 개념으로 구체화되고, 이것이 가다머의 先판단Vorurteil 또는 선입견 개념으로 넘어간다. 이런 과정에서 가다머는 선판단(선입견)의 복원을 정당하게 요청할 근거를 찾게 된다. 딜타이는 그 당시 심하게 몰아 부치는 자연과학의 방법 억압에 대항하는 데 최우선의 관심을 두었기 때문에 해석학을 자연과학적 방법에 비견할 수 있는 정신과학의 방법론으로 구성하려고 했다. 가다머는 딜타이의 역사주의적 해석학에 영감을 받았지만 딜타이가 바로 이런 자연과학에 유사한 방법론에 치중해 있음을 비판하고 있다. 가다머의 이런 입장이 《진리와 방법》에서나 하버마스와의 논쟁에서도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하이데거는 가다머와 함께 읽은 딜타이와 요크 백작 간의 서신교환에서 감동을 받았고 《존재와 시간》에서 존재이해를 위한 접근방식을 해석학적 현상학이라는 이름까지 붙였다. 그는 딜타이와 달리 자연과학의 방법론에 정면으로 대결하였다. 즉 이해가 인간의 근본적인 존재방식이라는 것이다. 오히려 자연과학의 방법론은 이해의 변종變種, abart이며, 이해에 비해 부차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이렇게 해서 이해란 말이 하나의 인식론에서 존재론存在論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즉 인간의 삶은 이해를 토대로 해서만 가능하다고 하는 것이다. 이해는 방법론적으로 확증되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인 자기 확실성이고 세계 속에서 현존재의 유일한 명증 체험이라고 한다. 인간은 삶 속에서 존재에 대한 이해를 미리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미리Vor란 말의 세 가지 구조를 제시한다. 미리 이해한 것을 가지고 있다는 미리-가짐Vorhabe, 무엇이 질문될 것인가를 미리-봄Vorsicht, 어떤 특정한 파악을 하고 나서 이해하기 때문에 미리-잡음Vorgriff을 그는 미리의 구조Vorstruktur, 또는 先구조라 부른다. 이를 신학자 불트만Bultman은 자신의 해석학적 신학에 先-이해Vorverstehen란 말로 구조화시키고 있다.

가다머는 하이데거의 해석학 이해에서 출발하고 있다. 그는 《진리와 방법》에서 자신의 작업은 과학의 방법론적인 이상을 실현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리고 해석학의 문제는 근원적으로 방법의 문제가 아니라고 한다. 해석학은 어떤 텍스트나 경험적인 대상이 과학적 인식의 방법 아래서 다루어지는 것처럼 이해의 방법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란 말이다.

그러므로 자신의 관심인 철학의 진리는 모든 경험과학의 방식처럼 모두 증명되어질 수 없다는 입장이다. 방법보다는 진리경험이 더 중요하다. 진리에 대한 경험은 과학적 방법의 통제영역을 넘어서는 것이며 진리의 경험은 어디서나 할 수 있다. 이런 뜻에서 그는 해석학적 경험이 보편적이라고 한다. 그가 말하는 진리의 경험은 철학의 경험뿐만 아니라 예술의 경험, 역사의 경험 등에 걸쳐 있다. 이 경험들은 모두 자기 나름으로의 진리를 매개해 준다. 그리고 모든 과학에는 이미 해석학적인 요소를 포함하고 있다고 보았다. 이것은 해석학적 문제의 보편성을 말해주고 있다.

가다머는 딜타이가 고민했던 역사성의 문제를 간단하게 해결한다. 딜타이는 인간의 이해가 갖고 있는 유일회성과 우연성을 강조하지만 그것이 자칫 상대주의로 빠질 수 있으며 이런 이해의 방식에 어떤 객관적인 근거를 설정할 수 있을 것인가를 두고 고민했다. 그러나 가다머는 그런 고민을 하지 않는다. 우연성은 인간 인식의 선입견을 형성할 수 있기 때문인데, 가다머는 그런 선입견(선판단)은 결함이 아니라 오히려 理解의 발판이라고 보았다. 이해가 역사적인 제약을 받고 있기 때문에 더욱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가다머는 의식의 역사성과 역사성의 의식을 부각시킨다. 이해작용과 관련된 가다머의 선입견은 영향사적인 연관 속에서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해석학적인 경험은 전통과 역사의 위력을 완전히 포기하지 않는다. 만약 역사가 늘 이해에 작용하고 있다면 이 이해 자체에 역사성이 개입되어 있다는 사실을 지시하게된다. 이해에 작용하는 선입견으로서의 역사를 가다머는 영향사Wirkungsgeschichte라고 부른다. 선입견은 이해를 위해서 긍정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이것이 참된 선입견의 복권이다. 이해의 과정에는 우리가 의식하든 의식하지 못하든 간에 영향사가 작용하고 있다. 영향사는 우리를 포괄하고 있는 진리사건이다. 우리가 영향사를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영향사가 우리를 품고 있다.

영향사에 대한 이해를 위해서 가다머는 칸트의 텍스트를 사례로 든다. 칸트의 저작 《순수이성비판》은 자연과학의 영향 아래서 철학적 인식의 보편 타당성에 대한 가능성을 탐색한 책이다. 그러나 칸트의 저작을 어떻게 이해하느냐는 영향사라는 특정한 역사적인 이해방식에 매여있다. 자연과학이 극도로 발전하였을 때, 또는 이에 대립하는 사조(즉, 영향사)가 비등했을 때 칸트는 자연과학적으로, 또는 문화이론이나 가치론의 의미로 읽히고 이해된다. 또 다른 역사적 상황에서는 우리가 어떤 영향사의 영향으로 칸트를 달리 이해하게 될는지 모른다. 이것은 오히려 쿤Kuhn의 패러다임 이론에서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가다머의 지평개념이 등장한다.

어떤 작품은 작자의 자기 나름의 세계경험을 지평으로 담고 있다. 그러나 시대가 지난 후 독자는 자신의 이해의 지평에서 그 작품을 읽고 이해한다. 이때 두 지평이 서로 대립하게 된다. 이것을 가다머는 시간간격이라고 부른다. 슐라이어마허에 의하면 독자의 지평을 제거하고 오직 작자의 지평으로 몰입함으로써 이해가 완결된다. 가다머는 그 가능성도 부정하지만 그것 자체가 무의미하다고 말한다. 다시 말하면 이해란 바로 이 두 지평간의 만남이며 이 두 지평간의 융합이라고 한다. 지평융합을 통해서 원래의 작품은 더 생산적인 의미를 산출해 낸다. 반드시 작자의 의도가 원래대로 되살려내어지는 것은 아니다.

이미 해석학의 시작에서 암시되었듯이, 헤르메스 神은 신과 인간의 차이를 인정한다. 그리고 그는 두 개의 지평사이를 매개한다. 그래서 처음부터 해석학은 대립적인 표현 속에, 차이와 긴장 관계의 표현 속에, 또는 시대의 거리, 문자 인쇄를 통해서 생긴 말과 글 사이의 긴장이 드러난 곳에, 그리고 민족언어와 문화들 사이에, 자연과학과 정신과학사이의 거리와 차이에 해석학의 고유한 과제가 놓여 있다는 것이다. 해석학은 이 차이를 제거하지 않고 그 차이를 이해하기 위해서 차이를 보존하는 것이다.

누구든 자신이 사용하는 방법이 객관성을 보증해 주는 것이며 자기 자신은 어떤 선입견으로부터도 자유롭다고 말하지만, 그는 자신의 역사적 제약성을 부인하는 것이며 자신을 통제할 수 없이 지배하는 선입견의 폭력에 내 던진 셈이 될 것이다. 만약 내가 어떤 역사 속에 있는가를 알게되면, 달리 말해서 내가 어떤 영향사에 포섭되어 있는가를 알게되면, 나는 나도 모르게 어떤 선입견에 붙잡혀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영향사 의식에 의해서만 우리는 이해의 선입견 구조를 투시할 수 있다.

자신이 속한 선입견, 즉 영향사를 인지하는 것은 부단히 자신이 선 자리를 떠나 다른 이해의 방식으로 교정할 수 있는 열린 태도를 획득할 수 있을 것이다. 정신과학적 인식, 즉 이해의 진리요청을 현대의 과학적 방법사고에 귀속시킬 수 없다는 가다머의 근본적인 입장은 언어와 이해와 진리의 성격이 과학적인 인식의 대상과 같지 않음을 천명하는 데 있다. 이 문제는 다시 하버마스와의 논쟁에서 재론된다.

5. 해석학과 이데올로기비판―하버마스와의 논쟁

가다머의 《진리와 방법》은 신학을 제외한 전 영역인 사회과학과 인문과학에 폭넓게 수용되었다. 그런데 1967년 하버마스가 철학서적 서평잡지인 《철학평론Philosophische Rundschau》에 《진리와 방법》에 대한 서평을 쓰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이 무렵은 학생운동을 계기로 비판이론(프랑크푸르트학파)에 많은 사람들이 주목하고 있었으며, 마르크시즘의 이론이 사회과학의 방법론에 강한 영향을 주고 있을 때였다. 이 논쟁은 해석학과 새로운 비판이론에 대한 관심을 고조시켰다.

이 논쟁의 결과는 1970년 초 독일의 사회과학과 과학이론에 적잖은 영향을 주었고 새로운 해석학에 대한 이해를 가져다주기도 했다. 60년 말에 비판이론은 언어적 전회轉回를 수행했다. 언어의 의사소통이론적으로 전환된 이데올로기 비판은 하버마스의 비판이론의 방향전환이었다. 가다머에 대한 하버마스의 비판은 첫째로, 초기 비판이론의 아도르노Adorno가 실증주의를 비판하면서 객관주의에 대립할 만한 주관적 경험에 대한 변호가 만족스럽지 못하다고 생각하여, 그는 분석철학과 철학적 해석학을 통해서 그 길을 뚫어보려고 했다.

둘째로, 실증주의적 합리주의, 특히 포퍼의 탐구논리에 대항하여 비판이론을 방법론적으로, 과학이론적으로 강화시키기 위해서 해석학에서 그 대안을 찾으려는 의도였다. 결국 가다머와 하버마스 간의 논쟁은 해석학을 과학 방법론으로 정립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와 해석학이 반드시 이데올로기비판으로 이행해야 하는가가 핵심문제로 제기된다.

첫 번째의 문제는 해석학의 방법론에 관한 논의이다. 하버마스가 요청한 변형된 해석학적 방법론에 대해서 가다머는 자신의 철학적 해석학이 방법에 무관심한 철학적 성찰이라는 것으로 대응했다. 가다머는 자주 해석학이 방법이 아님을 천명한다. 그래서 가다머는 자신의 “연구는 근대의 학문 내부에서 과학적 방법론의 보편적 요구에 대처하는 이러한 저항에 연결된다.

이 연구의 관심사는 과학적 방법론의 지배 영역을 넘어서는 진리의 경험을 도처에서 찾아내어 그 외적인 정당성을 물으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정신과학은 과학 외적인 경험방식들, 즉 철학의 경험, 예술의 경험 그리고 역사 자체의 경험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진리와 방법》, 서문 XXVII) 가다머는 이 입장을 1965년 《진리와 방법》 2판 서문에서 한번 더 강조하는데, 이해의 기술론은 관심 밖이며, 정신과학의 방법적인 절차를 기술하거나 그것을 끌어갈 기술규칙에 대한 체계를 발전시키려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하버마스는 가다머와 달리 사회과학의 탐구논리 안에서 해석학의 중요한 역할을 기대하고 있었다. 하버마스는 가다머가 구성했던 해석학적 경험과 방법적 인식의 이원론을 거부한다. 가다머는 해석학적 경험을 방법적 인식자체와 추상적으로 대립시키는 ‘진리’와 ‘방법’의 대결을 오도시켰다는 것이다. 그러나 인문학을 과학의 세력권에서 완전히 분리시키는 것이 설령 가능하다 해도 행위과학(사회과학)은 경험적-분석적 작업방식과 해석학적 작업방식의 결합을 무시할 수 없다고 말하면서 하버마스는 해석학에서 방법론을 개발할 수 있는 가능성을 시사한다.

(《사회과학의 논리》 281) 가다머가 경험과학의 방법적 절대주의에 대항해서 해석학을 정당화시키고 있는데, 그렇다고 해석학은 결코 방법론을 가져서는 안 된다는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될 것이다. 가다머가 전통 해석학이 지나치게 방법에 매여 있다고 하는 것은 해석학을 유사 실증주의로 평가절하시키는 것이라고 하버마스는 지적한다. 이렇게 되면 해석학은 前과학적인 영역의 발견학Heuristik으로 격하시키는 것이 된다.

이런 비판에 대해서 가다머는 자신의 《진리와 방법》이 제시하는 해석학의 역할은 개별과학에서의 문제로 다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연과학과 정신과학의 관계를 문제삼고 있다고 대응한다. 즉 엄밀한 자연과학적인 방법이 정신과학이나 철학에 개입하고 모든 경험을 자연과학적인 대상의 경험으로 평준화시키는 것에 이의를 제기하는 것이다. 해석학의 본래적인 의도는 인간의 이해가 가진 생활세계의 前과학적인 전제들이 규칙적인 과학의 방법으로 인해 은폐되거나 약화되는 것을 막는 데 있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은 이미 후설이 생활세계를 거론할 때 생활세계가 주제화되면(이론적으로 체계화되면) 이미 생활세계가 아니란 말과 일치한다. 해석학적 반성은 모든 방법론의 한계를 주목하려는 데 그 의미가 있다. 가다머가 “해석”을 설명하는 것을 보면, 그가 방법을 내세울 수 없는 이유를 알게 된다. “해석은 주어진 사실에 대한 접근이며, 믿을 만하고 의미 있는 시도이며 분명하게 그것이 완결되는 것이 아님을 전제하고 있다. 완결된 해석은 그 자체 모순이다. 해석은 언제나 도중에 있다.” 해석은 완결된 설명이 아니다. 그 이유는 인간존재와 인간지식의 유한성을 의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두 번째 문제는 전통과 선입견의 문제이다. 가다머가 지나치게 전통과 영향사의 우위를 주장하는 데 대해서 하버마스는 오히려 비판 의식의 힘을 강조한다. 하버마스는 전통의 계승과 변화 속에는 권위만 있는 것이 아니고, 이해 안에 전통의 전유專有만 있는 것이 아니라 반성의 힘도 있다고 반박한다. 가다머는 이런 반성의 힘을 간과하고 있다는 것이다. 반성은 절대성의 가상에 현혹되지 않는다고 보았다. 동시에 하버마스는 가다머가 선입견의 복권을 말하고 있는 부분에 대해서 반박한다. 가다머는 이해의 선입견 구조에 대한 통찰을 선입견 자체의 복권으로 이행시킨다. 그리고 정당한 선입견을 변호한다.

그러나 해석학적 미리-잡음Vorgriff의 불가피성에서 곧바로 정당한 선입견이 존재한다는 결론이 나오는가? 이 질문과 함께 하버마스는 가다머의 근본적인 입장을 의심한다. “가다머는 저 최초 세대의 보수주의로 향하고 있다. 즉 18세기의 합리주의에 대해 행해진 버크와 같은 충동, 즉 참된 권위는 반드시 권위적인 모습을 가질 필요가 없다는 확신에 의해서 인도되고 있다.”(하버마스, 《사회과학의 논리》 283)
가다머가 간과하고 있는 부분은 바로 반성反省의 힘이다. 여기에 대해서 하버마스의 입장은 단호하다.

이런 반성의 힘은 전통의 주장을 거절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반성은 독단적 폭력을 단순히 입증할 뿐만 아니라 파괴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권위와 인식은 서로 화합할 수 없다. 인식이 사실의 전승傳承에 뿌리박고 있는 데 반하여, 반성은 전승된 규범을 회고적으로 작용하여 비판적인 힘을 발휘한다. 그래서 규칙을 단적으로 지배했던 권위는 폭로되고 합리적인 결정의 비폭력적 설득으로 해소될 수 있다는 것이 하버마스의 비판이다. 그러므로 가다머가 전통의 권위나 선입견의 복권을 주장하는 것은 철저히 보수적인 발상이라고 보았다. 이렇게 논의는 자연스럽게 이데올로기 비판으로 넘어간다.

세 번째 문제는 해석학과 이데올로기비판의 논쟁이다. 이제 하버마스가 주장하는 최종적인 지점에 도달했다. 즉 해석학적 경험은 이데올로기 비판으로 넘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하버마스가 보기엔 가다머가 말하는 전승傳承이라는 사건의 객관성은 완전히 객관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해석학은 내부로부터 전통 연관聯關의 벽에 부딪치게 되었다. 즉 해석학이 이 한계를 경험하고 인식하는 순간 해석학은 문화적 전승을 더 이상 절대적인 것으로 정립할 수 없게 된다. 언어를 모든 사회제도가 의존하는 일종의 메타meta제도로 파악하는 것은 일리가 있다. 사회적 행위는 오직 일상 언어적 의사소통에서만 구성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통으로서의 언어라는 이 메타제도는 분명히 그 자체가 규범적 연관에로 환원될 수 없는 사회적 과정에 의존한다고 하면서 하버마스는 “언어는 지배와 사회적 권력의 매체이기도 하다. 언어는 조직화된 권력관계의 정당화에 봉사한다. 이 정당화가 권력관계를(이 정당화는 이 권력관계의 제도화를 가능케 한다) 분명하게 말하지 않는 한 그리고 권력관계가 단지 정당화에서 표현되기만 하는 한 언어도 역시 이데올로기적이다. 이 경우 중요한 것은 한 언어 안에서의 기만이 아니라 언어자체에 대한 기만이다. 기호적 연관이 사실적 관계에 이처럼 의존한다는 것에 직면한 해석학적 경험은 이데올로기 비판으로 이행한다.”(하버마스, 《사회과학의 논리》 287)고 말한다. 하버마스에 의하면 바로 이런 이유에서 해석학이 이데올로기비판으로 넘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가다머는 하버마스가 자신을 보수주의자로 평가하는 것에 대해서 반박한다. 그리고 허위의식을 폭로하는 것은 이데올로기비판의 목표일뿐만 아니라 새로운 이해를 근거 지우는 해석학의 역할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이해의 보편성이(거기서 내가 출발하고 있으며 내가 그것을 변호하려고 애쓰는 것인데) 사회적인 세계에 대해 영합하는 것이거나 보수적인 태도라고 생각한다면 아주 중대한 실수를 범한 것이다. 우리는 우리 세계의 연결조직과 질서를 ‘이해한다’.

우리 서로가 이 세계 안에서 이해한다는 것은 마치 기존하는 질서의 안정이나 변호처럼 굳어진 것이기도 하지만, 낯설게 되어버린 것에 대한 비판이면서 싸움을 전제하기도 한다.”(가다머, 〈언어와 이해〉 24)고 말하여 해석학적 이해도 비판적인 역할을 수행하고 있음을 가다머는 제시한다. 인간들 사이의 의사소통에서 발생하는 신경증적 병리적 현상에 정신치료가 개입하듯이, “사회의 의사소통 공동체에 병이 들었을 때 다시 치유하려면 허위의식을 교정하고 이로써 새로운 이해를 세우는 이데올로기비판 자체에 의미가 있다.”(같은 논문 25) 가다머는 새로운 이해를 세우는 행위가 바로 이데올로기 비판의 기능이라고 본다.

가다머는 새로운 이해에 영향사가 개입한다는 것은 우리가 소박하게 전통의 요청을 긍정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하버마스는 가다머의 《진리와 방법》 초판 머리말에 나온 말을 이해했어야 할 것이다. 거기서 가다머가 “전통의 본질에 속하는 것은 단순히 동화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이것은 또한 인간의 본질에도 속하는 것인데, 전통을 단절시키고 비판하고 해체할 수도 있는 것이다”라고 말하는 부분을 참작해야 할 것이다.

가다머가 하버마스의 오해와 관련하여 직접적으로 반론을 제시했는데 가다머는 이데올로기비판의 정당성요청을 해석학적으로 상대화시키려 했다. 거기서 그는 이데올로기 비판이 진정 선입견을 벗어나 있는가를 문제삼는다. 가다머는 전승을 이데올로기 비판적으로 동화시키는 것이 오히려 자신이 비판하려고 하고 벗어나려고 하는 전통 연관에 스스로 매여있다는 사실을 환기시킨다. “비판 역시 그들이 성찰하고 있는 전통연관에 매여 있다”고 하면서 하버마스는 가다머의 비판을 수용하고 있다. 결국은 해석학적 전통의 전유와 이데올로기적 전통의 전유사이의 대립, 해석학과 이데올로기비판 사이, 가다머와 하버마스 사이의 대결은 첫눈에 인식되었던 것과는 달리 서로 타협할 수 있는 것으로 보인다.


6. 해석학과 해체주의―데리다와의 논쟁

해석학의 전통이 딜타이에게서 시작한다면 프랑스의 해체주의적 전통은 니체의 철학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런데 해석학의 전통과 해체주의의 전통을 공유하고 있는 철학자가 하이데거이다. 해석학과 해체주의 간의 논쟁은 바로 하이데거가 전통 철학과 니체의 기획 사이에서 어떤 위치를 점하고 있는가를 두고 논쟁을 벌인 것이다. 현대 해석학의 노장老將 가다머는 하이데거가 니체의 기획을 충실하게 수행한 철학자이며 해석학과 해체 정신을 잘 담고 있다고 보는 데 반하여 해체주의의 대변자인 데리다Derrida는 니체의 기획을 하이데거는 잘 수행하지 못하고 니체가 비판하고 있는 전통 철학의 함정에 하이데거 자신도 빠져 있다는 입장이다.

1981년 4월 파리의 독일문화원에서 독일 철학자와 프랑스 철학자 간의 진지한 대화의 장이 마련되었다. 두 경향의 주도적인 인물 사이의 서로 상이한 관점의 상호 교류가 있었다. 즉 가다머와 데리다 간의 논쟁이었다. 이들의 의견 교환은 진지한 대화의 형식이라기보다는 자신의 고정된 논변論辨을 주고받는 정도에서 그쳤다. 이들은 각자 자신의 입장에서 문제를 펼쳐 보이긴 했지만 실제로는 몇 가지 문제에 국한된 교환이었다.

어쩌면 독일 철학과 프랑스 철학간의 간격을 표현해 주었던 것이라 생각된다. 그 당시 가다머는 81세의 노장이었고 데리다는 51세의 활기찬 철학자였다. 이 토론에서 두드러지게 드러난 입장은 의미에 대한 분석이 해석적 대화의 방법으로 수행해야 할 것인가, 아니면 해체의 방법으로 수행해야 할 것인가를 두고 서로의 입장이 갈리게 되었다. 이것은 또한 현대 철학의 중요한 주제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논의였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었다. 이 토론장에서 먼저 가다머가 발표를 하였다.

가다머는 해석학의 출발점을 인간적 삶의 표현에 대한 이해에다 두고, 이해는 언어와 대화라는 기초적인 토대를 가정해야만 할 것이라고 전제한다. 언어를 통해서 세계 경험의 통로가 열리며 이해가 성취된다는 것이다. 가다머는 과학적 방법이 삶의 경험을 왜곡하고 있었던 시대에 하이데거를 만나게 되었고, 그에게서 종래의 철학이 가지고 있었던 주객主客 분열의 문제, 해석학적인 근본 경험의 토대로서의 이해의 개념을 획득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언어가 가진 문화적 특질은 전통 의존성이라는 보수성에 대한 비판을 면치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석학적인 비판 의식은 언어적인 선입견을 대화의 방법을 통해서 극복할 수 있다고 가다머는 주장한다. 누구든 진정으로 대화하려고 하고 서로 합의하려고 애쓴다면 어떤 편견이나 부당한 선입관도 극복할 수 있는 것이며 참된 진리를 대화의 과정에서 획득할 수 있다는 것이다. 대화하고 있다는 것은 자신을 넘어서 있다는 것, 타자他者와 함께 생각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말하자면 데리다가 주장하는 해체의 정신과 대화의 방법은 동등한 의미를 가진다고 보았다.

데리다는 가다머의 대화의 해석학에 대한 입장을 세 가지 질문을 통해서 비판하고 있다. 이 세 가지 질문을 요약하면, 대화에 임하는 대화자 상호간의 선한 의지good will에의 호소하는 것과 대화 상황에서 상호 이해와 합의를 추구하는 욕구를 호소하는 부분이 문제가 된다는 것이다. 대화에 전제된 선의지善意志는 오히려 형이상학적인 조건이 아닌가고 질문한다. 특히 선의지가 그 하부구조로 갖고 있는 이해의 방해 상황, 오해, 이해의 중단 등에 대한 것을 가다머가 고려하지 않고 있음을 질문한다.

데리다는 가다머가 말하는 상호간에 완전히 이해되는 그런 경험을 우리가 가질 수 없다고 잘라 말한다. 가다머의 반박은 자신의 선한 의지는 칸트의 형이상학적인 선의지와 아무런 상관이 없으며, 자신의 선한 의지는 오히려 상대방의 약점을 찾는 것이 아니라, 플라톤의 대화 정신에 따라서 타자의 관점을 충분히 이해하여 타자의 입장을 밝히는 데 있다고 하면서 이를 통해서 잘못된 일치, 오해, 잘못된 해석을 제거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서로를 이해하지 못한다고 말하는 데리다가 오히려 형이상학에 빠져 있는 것이 아닌가고 반문한다.

파리에서의 토론 이후 가다머는 고령에도 불구하고 데리다에 대항하여, 85세에 〈파괴와 해체〉(1985년)를, 87세에 〈해석학과 로고스 중심주의〉(1987년)를 발표했다. 거기서 가다머는 데리다의 해체적 방법이 이미 소크라테스로부터 이어지는 자신의 대화적 방법에 포섭되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분명히 말하기를, “나는 데리다가 나처럼 하이데거의 길을 따라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의 도정道程은 그의 언어관에 포함되어 있는 의미론적인 출발점 위에 존재론이 불명료하게 의존해 있다. 여기에서 바로 해석학적인 출발점을 피할 수 없게 된다. 이 출발점이 나와 데리다 간의 대립의 주제이다. … 차이는 동일성 내에 있다. 그렇지 않으면 동일성은 동일성이 아닐 것이다. 사유는 연기延期와 거리를 포함한다. 그렇지 않으면 사유는 사유가 아닐 것이다”라고 말한다.

가다머와 데리다 간의 논쟁은 플라톤 이후 서양 철학의 전통에서 벗어나지 않으면서도 해체의 방법을 수용하려는 가다머의 입장과 脫서양을 지향하면서도 서양의 전통에서 벗어나는 것이 불가능함을 자인해야 하는 데리다 간의 아이러니를 표출한 논쟁이다. 이 논쟁에서 우리는 현대 포스트모더니즘의 철학적 의미와 한계를 읽을 수 있다. 결국 해체의 주제는 解釋學의 영역에 포함되는 것이 아닌가하고 생각한다. 마찬가지로 이데올로기 비판 역시 해석학적 영역에 포함되는 기능이라고 생각된다. 그런 의미에서 가다머의 말대로 해석학적 문제는 보편적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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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다머는 한 세기의 증인이 되었다. 그는 브레스라우에서 프로이센 제국의 영광과 비극을 보았다. 몰락해 가는 유럽, 세계 1차 대전, 기독교 시대의 침몰, 바이마르 공화국의 성립, 공화국 시기의 내전, 나치의 등장, 독일 대학의 이데올로기화, 유태인 친구와 동료들의 사직, 세계 2차 대전, 폭탄이 터지는 밤, 전쟁의 종결, 東西갈등과 긴장해소 그리고 독일통일 등 수많은 역사적 정치적인 사건들을 넘어가야만 했다. 그는 바로 이런 고통을 놀이로 변형시킬 수 있었던 삶의 예술가에 속했던 사람이다. 오히려 그는 은퇴와 함께 철학자로서 공적인 각광을 받았다. 은퇴 후의 유일한 작업은 지적인 개방성開放性과 변화에 대한 준비태도였다.

가다머는 81세에, 젊은 데리다에게 논쟁을 걸었고, 99세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이탈리아에서 학술강연을 실시했으며, 100세에 스스로 새로운 과제를 하나 만들어 내었다. 그것은 대학으로 진학하는 학생들을 위한 교양교육이었다. 그는 자라나는 세대의 관심을 일깨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것은 학생들에게 지식을 전달하는 문제가 아니라, 대학에서 학문연구를 위해서 반드시 갖추어야 할 배움에 대한 즐거움Freude am Lernen을 가르치는 것이었다. 그는 마지막까지 자신의 선생 하이데거와 자신의 제자들 사이의 다리를 놓는 역할에 게으르지 않았다. 이제 가다머는 누구든, 자신의 삶을 위해서 자신에게 시간을 허용해 주는 것에 가치를 두는 사람에게 희망의 징표가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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