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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신학논문은행에 대하여

2003/11/10 (23:01) from 80.139.172.244' of 80.139.172.244' Article Number : 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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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결과측정의 시민참여와 화이트헤드의 공재적 의사판단 구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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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결과측정(Technical Assessment/ Technikfolgen-Abschätzung)의 시민참여와
화이트헤드의 공재적(Togetherness) 의사판단 구조

이상하(고려대, 과학철학)
최종덕(상지대, 자연철학)


기술결과측정(이하 ‘TA’)이란, 그것의 다양한 의미에도 불구하고, 다음과 같이 정의될  수 있다: TA의 다양한 해석들에 관하여 C.F. Gethmann을 보라: “Technikfolgen-Abschätzung: Konzeptionen in Überblick”, Europäische Akademie zur Forschung von Folgen wissenschaftlich-technischer Entwicklung Bad Neuenahr-Ahrweiler GmbH, 1966.


TA는 하나의 (새로운) 기술의 적용이 사회에 어떤 결과들을 가져오는가를 측정하는 선택과정(a choice process) 이다.

인간의 과학기술이 불완전하지만, 생존을 위해 적용되는 한 TA는 미래지향적일 수밖에 없다. 오늘날 새로운 과학기술이 만들어낼 수 있는 기존의 가치관의 몰락 및 생존위협은 무시될 수 없으며, 실제 선진국들의 경우 TA에 관한 많은 연구소 및 자문기관들은 이미 TA의 제도화를 확립하고 있다. 독일의 경우 대표적인 기관은 다음을 들 수 있다: Europäische Akademie zur Forschung von Folgen wissenschaftlich-technischer Entwicklung Bad Neuenahr-Ahrweiler GmbH, Akademie für Technikfolgenabschätzung in Baden-Würtenberg.
새로운 과학기술의 적용에서 생길 수 있는 위험성과 관련하여 사회구성 주체인 시민들의 TA-참여는 그들이 철학적으로 수동적 계몽의 대상으로 혹은 적극적 참여의 대상으로 간주되든 관계없이 필수적이다. 과학기술 분야의 어떠한 전문가도 미래가 어떠할지 정확히 예측할 수 없으며, 오늘날 다원화된 사회에서는 한 과학기술의 정책의 실현은 형식적이든 아니면 실제적이든 시민들의 동의를 요구한다. 그러나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암묵적(implicit)으로 사용하는 개념들과 전문가들, 즉 물리학자, 유전공학자 혹은 윤리학자들이 사용하는 개념들 사이에는 커다란 간극이 있는 반면, 과학기술의 발달은 실제 우리의 생활방식을 변화시키며 복잡하게 만든다. 이 과정에서 책임귀속의 문제들이 발생한다. 이는 분명히 과학기술 정책의 현실화 과정에서 나타나는 부정적 측면들과 종종 관련되어 있다. 이 점은 TA의 시민참여는 결코 한 전문 이론의 결과로서 요청되는 것이 아니며 오늘날 현대인들의 상식적인 직감 속에서 공유되는 어떤 것임을 암시한다. 한 윤리학자가 TA에 관심을 두는 이유는 결코 과거의 이론들에 근거하기보다는 오히려 이 이론들이 예측하지 못한 많은 문제들을 해결해보려는데 있다. 즉 직업윤리(professional ethics), 경영윤리(business ethics) 그리고 기술윤리(engineering ethics)와 같은 ‘응용철학(applied philosophy)'의 분야는 기존의 이론들에 근거하여 현대 과학기술 문명을 설명하기보다는 오히려 과거에 경험하지 못했던 많은 문제들을 풀어 가는 과정에서 인간행위 및 사회의 새로운 규범을 만들어 보려는 실험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 이 점은 다음 책의 머리말에 잘 함축되어 있다. H. Lenk/ M. Maring(Ed.): Technikethik und Wirtschaftsethik, Leske+Budrich, Opladen 1998.
시민들이 단순히 전문가의 통계자료의 수동적인 실험 대상으로서 간주되든 아니면 자발적 참여의 대상으로서 간주되든, 시민의 참여 없는 응용철학 혹은 응용 윤리학은 무의미하다.
이 논문에서 TA의 시민참여에 관해 ‘결과주의 모델 (the consequentialistic model)’, ‘담화론적 모델(the discurs ethical model)’ 그리고 ‘일상적 모델(the common-sense model)’들이 간단히 다루어질 것이다. TA의 시민참여에 대한 하나의 철학적 모델은 다음을 뜻한다:

하나의 TA와 관련된 선택 c 및 행위 a가 어떤 조건 x를 만족하는 경우, c 또는 a는 (가능하면 모든 이에게) 좋을 것이다.

이 모델은 ‘어떤 조건 x’에 구체적인 내용을 부과하고 있다. 또 다른 말로는 ‘좋은’ 것이란 어떤 식으로 이해되어야 할 지를 따지고 있다. 이 글에서 TA와 관련될 수 있는 이론적 모델들을 도식적(schematically)으로 그려보고, 우리의 일상적 의사판단 구조에 있어서 화이트헤드의 고유 개념인 공재성(togetherness)의 설명력(explanatory power)이 어디까지 가능한지를 다루려 한다.

1. 결과주의적 모델 (The Consequentialistic Model; CQM)

오늘날 결과주의(consequentialism)는 크게 합리적 결과주의와 윤리적 결과주의로 나누어지며, 분배 및 개인의 권리 문제 등에 관하여 학자들 사이에 입장의 차이가 있다. 여기서 전개될 논의는 결과주의의 모태라 할 수 있는 소위 ‘프리퍼런스 공리주의(the preference utilitarism)’에 바탕을 둔 ‘최적의 결과주의(the optimal consequentialism)’에 국한한다. 프리퍼런스 공리주의에서 나타나는 프리퍼런스 구조(a preference system)는 근본적으로 그 구조 안에 있는 개인에 국한되며, 그 개인의 만족도는 그의 프리퍼런스 구조의 만족도로 나타난다. 그리고 개개인의 만족도의 합이 크면 클 수록 그 개인이 소속된 사회상태는 최적의 상태에 근접한다. 즉 사회상태의 최적도(the degree of optimality)를 결정하는 것은 구성원들의 만족도의 산술적 총량일 뿐, 만족하고 살고있는 구성원들의 내면적 측면들과는 무관하다. 최적의 결과주의에 근거한 행위의 척도는 그 행위의 결과들이 이러한 의미에서 최적인가 아닌가를 측정하는 것이다.
물론 오랜 논의의 역사를 가진 결과주의 안에서 미묘한 차이를 보이는 다양한 이론들이 있지만, 이 점은 앞으로 전개될 논의에 별다른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 왜냐하면 최적의 결과주의와 다른 종류의 결과주의들 또한 근본적으로 - 윤리학자라면 일반적으로 동의하는 - 다음과 같은 관점을 공유하며, 앞으로 전개될 논의의 목적은 바로 이점을 비판하는데 있기 때문이다: 다음 논문의 163과 164 쪽을 참조하라. F.v. Kutschera: “Values and Duties” in C. Fehige and U. Wessels(Ed.): Preferences, Berlin and New York: de Gruyter 1998.


결과주의의 모든 이론들은 한 행위 및 선택이 주어진 상황에서 가능한 한 좋은 결과를 만들어 낼 때 윤리적 의미에서 혹은 합리적 의미에서 좋다고 여겨짐을 전제하고 있으며, 이 때 그 좋음의 척도는 그 행위 및 선택하는 주체의 내면적 측면들이 아닌 객관적으로 다루어질 수 있는 결과들에 의하여 결정된다.

이러한 점에서 어떠한 종류의 결과주의도 행위 및 그 결과들 자체에 관심을 두는 것이지 결코 행위자(agent)에 관심을 두는 것은 아니다. 최적의 결과주의에 근거한 TA에 대한 모델 CQM은 이제 다음과 같이 이해될 수 있다:

CQM이란 한 TA와 관련된 행위 a 또는 선택 c는, 그러한 결과들이 가능하면 모든 이에게 또는 한 사회에 대해 최적의 상태를 만들어 내면, 좋은 것이다.

CQM은 결과주의의 맥락에서 이해되어지는 한에서, 이론적으로 관계된 사회가 최적의 상태에 도달하기 위하여 개개인의 의도, 관심 그리고 감정 등이 무시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소위 ‘개인에 대해 중립적’(person-neutral)이다. 결과주의에서 개인의 중립성에 관해서는 다음을 보라. D. Parfit: Reasons and Persons, Oxford: Clarendon, 6. ed., 1992. M. Slote: Common-Sense-Morality and Consequentialism, London, Boston, Melbourne and Henley: Routledge & Kegan Paul, 1985.
간단히 말해 어떤 행위 a 또는 선택 c 가 좋은 지는 그것이 가져다주는 결과에 의해 결정되며, 한 개인의 만족도는 부수적이다. 이 점을 산술적으로 표현한다면 한 사회상태의 최적도 즉 구성원들의 만족도의 합이 0.9라고 가정하자. 그러나 그 사회의 최고지위에 있는 자의 만족도는 0.8이고 다수의 만족도의 합이 0.1에 불과 하더라도, 그 사회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0.8이라는 최적도를 갖는 사회보다 좋은 것이다.
예를 들어 어떤 의사는 새로운 의학기술이나 의약품을 임상적용하고자 한다고 하자. 이 때 CQM의 맥락에서 환자의 고통과 같은 개인적 측면을 고려하도록 반드시 강요받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그 기술이나 약품이 다수에게 더 좋은 치료 효과가 있다는 결과들 혹은 상태이며, 한 환자가 고통을 못 이겨 자살하더라도 그 의사에게 윤리적 책임을 부가하기 힘들다. 즉 목적 혹은 결과가 수단을 타당화할 수 있다는 비판을 피하기 힘들다. 이러한 비판은 다른 종류의 결과주의에도 해당된다.
더욱 더 문제가 되는 것은, 환자가 스스로 치료에 대한 의사결정을 할 수 없는 경우, 그의 ‘간섭적 치료(paternalistic therapy)’는 결과에 따라 항상 정당화 될 수 있다는 점이다. 환자가 자기스스로 의사결정을 할 수 없는 경우, 그의 보호자 혹은 의사에 의해 치료여부가 결정되는 것을 간섭적 치료라 한다. 아버지가 어린 아들을 대신해서 의사결정을 하는 것은 간섭적 행위의 대표적인 보기이다.

물론 많은 의학적 기술들과 의약품들의 사용은 이미 우리 생활세계 속에 정착되어 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우리가 원하는 치료결과들을 만들어 내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일상적 의미에서 ‘우리가 원하는 결과들’은 결코 CQM 맥락에서 ‘최적의 결과들’과 혼돈 되어서는 안 된다. 전자는 우리가 가진 일상적 책임감들을 반드시 전제하며, 후자는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예들 들어 어른들이 아이들의 해열을 위해 아스피린을 사용하는 것은 우선 자기 아이를 보호해야 한다는 책임감에 바탕을 두는 것이지 결코 아스피린의 과학적 해열기능을 우선적으로 전제하는 것은 아니다. 결국 일상적 의미에서 ‘우리가 원하는 결과들’이란 일상적 책임감들에 바탕을 두고 있는 ‘좋다’ 혹은 ‘나쁘다’는 가치판단을 전제한다.
CQM에 의하면 TA의 시민참여는 결코 단순히 능동적일 수 없다. 시민은 하나의 의미에서 (정치인을 포함한) 전문가 집단의 계몽대상일 뿐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정치가들과 전문가들은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몇 년간 참으면 지금 적용하는 기술정책은 좋은 결과들을 가져다준다.” “약간의 부작용이 따르더라도 현재의 기술정책은 반드시 실현 되야 한다.” 또는 “피임이 초기에는 윤리적 문제를 일으켰지만 오늘의 생활세계 속에 정착되어진 관례와 같이, 현재 논란이 일고 있는 유전공학적 기술의 적용에도 같은 방식으로 유효할 것이다.” CQM은 정치가들과 전문가 집단들의 권력구조의 논리에 쉽게 흡수될 수 있다. 이 점은 CQM이 다음과 같이 정의되는 과학주의(scienticism)에 의해 지지될 수 있다는 사실에서 명백하다.

오늘날 과학기술은 세계를 객관적으로 기술하는 데 불충분할 지라도, 이미 우리와 세계사이의 관계를 설명하는데 충분한 철학적 그리고 개념적 토대를 제공하고 있다.

과학주의는 많은 철학자들 특히 미국 분석철학자들의 저서들을 포함한 심리철학에 관한 저술들에서 암묵적으로 여겨 왔다. 그리고 TV 토론 등에서 어떤 과학자들은 그들이 습득한 지식이 마치 만물의 척도인 것처럼 주장한다. 과학주의가 과학발달을 촉진시키는가 아니면 오히려 방해하는가 하는 문제는 더 이상 여기에서 다루지 않는다. 그러나 CQM에서 과학주의의 비중이 큰 것은 분명하다.

2. 담화윤리적 모델 (The 'diskursethische' Model; DM)

화이트헤드와 하이데거 이후 문명론에서 과학기술의 문제를 서양 실천철학의 측면에서 심도 있게 다룬 철학자가 바로 하버마스 이다. 그의 담화윤리학(Diskursethik)은 진위 판별 및 좋고 나쁨의 가치판단을 단순히 언어와 세계 사이의 의미론적 분석에 바탕을 두는 것이 아니라, 생활세계를 배후로 한 상호주관성을 통한 상호이해를 산출하는 의사소통론에 바탕을 둔다. 그리고 합리적 의사소통은 생활세계 안에서 통용되는 과학기술의 비판적 통제수단으로 작용한다. 여기서 합리적 의사소통이 단순한 전문가 집단들의 과학기술의 대중적 전파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므로, TA의 시민참여는 담화윤리학의 하나의 당연한 논리적 귀결이다. 여기에 관계된 TA의 모델은 다음과 같이 여겨질 수 있다:   

DM이란 TA에 관련된 행위 a 또는 선택 c가, a와 c에 대한 사회적 동의(consent)가 합리적 담화 (합리적 의사소통)에 의해 이루어지는 경우에만, 좋은 것이다.

여기서 주의할 점은 윤리적 규범이 궁극적으로는 객관적으로 정당화될 수 있다고 믿는 하버마스에서 결코 특정상황이나 콘텍스트에 지배받는 동의 자체가 가치 판단의 절대적 기준이 될 수 없다는 점이다. 이점에서 담화윤리학은 하나의 윤리적 객관주의로서 도덕적 규범 및 믿음들은 객관적 의미에서 정당화될 수 있다는 윤리적 인지주의(cognitivism)에 속한다. 오늘날 윤리적 객관주의는 반드시 윤리적 사실들(ethical facts)를 가정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윤리적 실재주의(ethical realism)와 구별되며 대표적인 실례는 바로 하버마스의 담화윤리학이다.
따라서 하버마스는 특정 상황이나 콘텍스트에 지배받지 않는 형식적 ‘담화이성(Diskursvernunft)’을 전제한다. 이 개념은 칸트의 순수이성의 주체 중심에서 상호 주관성(intersubjective)으로 대치되는 것과 비슷하다. 왜냐하면 칸트의 한 개인의 준칙들(Maximen)이 타인에 대해 유효한가 하는 실험(Maximentest)은 상호주관적 의사소통 속에서의 도덕성 발견이라는 하버마스의 논제에 대응하기 때문이다.
민주주의의 지지자인 하버마스에 의하면, 담화이성을 가진 시민들은 민주주의적 이상형을 그릴 수 있고 현실을 그 이상형과 비교할 수 있고 합리적 의사소통을 통하여 문제를 해결하여 나가는 과정에서, 시민들이 그들 자신과 사회를 동일시하는 이상적 상태가 현실화된다.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 질문을 던져야 한다:

첫째 그러한 형식적 담화이성이 특정상황 및 콘텍스트에 종속될 수밖에 없는 TA에서 실제적 역할을 갖는가?
둘째 일상적 의사소통이 그러한 추상적인 담화이성을 전제하고 있는가?

이 글에서 첫째 질문은 다루지 않으며 주로 둘째 질문을 다룬다. 물론 둘째 질문이 긍정적으로 다루어 질 수 없다면, 당연히 첫째 질문에 대해 우리는 부정적인 태도를 가질 수밖에 없다. 실제 우리는 일상적인 행위 및 가치판단에서 많은 합리적 측면을 발견한다. 이와 함께 생각 및 판단과정에서 어떤 능력 및 그와 관계된 도덕적 감성들을 가정하는 것은 상식적이다. 일상의 의미에서 합리성과 관계하여 그러한 능력 및 감성들을 ‘합리적 측면에 대한 인지적 총체’ 라고 할 때, 이러한 인지적 총체가 추상적인 담화이론에 의해 반드시 대치되어야만 하는가를 검토해야 한다. 일상의 대화에서 이성이라는 개념은 실제 사용되지 않는다.
예를 들어 동양적 윤리관에서는 언급된 합리적 측면에 대한 인지적 총체는 타고난 본성 또는 어떤 자연적인 것을 의미할 수도 있다. 만약 합리적 측면에 대한 인지적 총체라는 개념이 하버마스의 담화 이성이라는 개념에 의해 대치될 수 있다면, 우리는 언어 능력이 없는 그렇지만 분명히 도덕 감성을 가진 금치산자들에게 쉽게 도덕성을 부가할 수 없다. 왜냐하면 담화이성은 상호주관적 의사소통 속에서만 내재하고 합리적 의사소통에 의해서만 도덕성이 발견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이들과 금치산자들의 시민권이란 우리와 같은 인간이라는 점에서 직접적으로 획득되는 것이 아닌, 합리적 담론에 참가할 수 있는 자들의 관용(tolerance)에 의해 간접적으로 획득되는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다. 또한 정치적 불신감 때문에 사회 참여를 거부하는 태도는 담화 윤리학에 따르면 결코 합리적일 수 없다. 그러나 일상적 의미에서 그러한 태도가 객관적으로 옳은 것은 아니지만, 결코 비합리적이라고 간주 될 수 없다. 하버마스의 관점에 의하면, 민주화된 사회의 시민들은 분명히 그렇지못한 사회의 시민들보다 우월하고 독일인들의 의식은 세계 2차 대전 이후 급격히 변화된 것으로 보아야한다. 사회변화를 서로다른 흥미들을 가지는 하부구조들의 자기보존적 성향 및 역할분담의 변화에 의거하여 설명하는 루만의 시스템이론은 실제 독일 시민들의 의식은 대전 이후 별다른 변화가 없음을 함축한다. 사회를 거대한 자동제어 기계로 취급하는 시스템이론은 시민들의 개체성과 주체성을 거부함으로서 왜 하부구조들이 바로 그러한 흥미들을 가지는지 충분히 설명할 수 없는 약점을 가지지만, 실제 법률 정책가로 활동했던 루만은 하머마스의 담화윤리학의 추상성과 일반인들의 무관심을 간과하지 않았다. D. Horster: “Gesellschaftsanalyse oder Gesellschaftsveränderung? Die Habermas-Luhmann-Kontroverse", Frankfurter Hefte Mai 1999, pp. 432-35.

물론 담화 윤리학을 옹호하는 이들은 다음과 같이 주장할 수 있다. 즉 합리적 측면에 대한 인지적 총체와 이미 합리적 의사소통에 필수적으로 전제되어 있는 담화 이성의 개념은 결코 서로 충돌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렇게 주장하기 위해서 하버마스의 담화이성의 개념이 없을 때, 과연 그가 펼친 많은 일상적 논의들도 따라서 성립될 수 없는 지에 대한 문제를 심각히 고려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동서양의 윤리관의 차이에서 오는 문제방식의 접근태도도 고려되어야 한다. 이성이란 도덕성을 포함한 인간의 합리적 측면에 대한 인식론적 정당화(the epistemic justification) 문제를 다루는 철학적 전통 속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반면에 유교적 전통의 도덕성에 대한 객관주의는 그러한 문제와는 무관할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3. 일상적 모델(The Common-Sense Model; CSM)

하버마스의 담화윤리학을 굳이 방법론적으로 분류한다면 하향식 방법론(the top-down method)이다. 그는 자신의 담화윤리학으로 과학기술 지식의 매개를 통한 생활세계의 역동성과 가치문제를 이론적으로 설명하려고 하는 것이지, 결코 우리 생활세계에서 당연시 여겨지는 요소들을 철학적 분석의 대상으로 삼은 것은 아니다. 생활세계 안에서 문화적 관점의 차이를 제거할 수 없다면 우리는 우선 그 세계 내에서 당연시하는 요소들의 상호작용을 기술하려는 상향식 방법론(the bottom-up method)을 시도해 보아야 한다. TA의 시민참여에 관해 논의될 일상적 모델이란 상향식 방법론에 근거한다. 그러나 실천철학 혹은 이론철학의 영역에 관계없이 기존의 철학사의 흐름 속에서 이 방법론이 진지하게 다루어 진 적은 없다. 따라서 우선은 도덕적으로 허용된 행위의 일상적 조건이 무엇인가 하는 점에 대해서만 간단히 다루고자 한다.
이미 언급했듯이 일상적 의미에서 원하는 결과는 CQM의 맥락과 달리 가치판단과 분리할 수 없다. 일상적 가치판단은 우리의 일상적 책임들을 전제한다. 예를 들어 자기 자식을 보호해야 한다거나 어려운 사람들을 가급적이면 도와야 한다는 등의 책임의식은 가치판단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러한 일상적 책임들은 인습적 또는 법적으로 주어진 책임들, 즉 의무들과 구분된다.
만약 어떤 과학기술의 적용이 우리의 일상적 책임들에 반하여 행위 하도록 우리를 강요한다면, 우리는 그것을 쉽게 납득하거나 수용할 수 없다. 따라서 일상적 모델 CSM은 우선 다음과 같이 정의 될 수 있다.      

CSM: 하나의 TA에 관련된 행위 a 또는 선택 c는, a 또는 c가 일상적 책임들에 크게 반하는 경우, 좋다고 여겨질 수 없다.

여기서 주의할 점은 그러한 행위 a 또는 선택 c가 반드시 일반적인 의미에서 도덕적으로 허용된 행위 또는 선택이 아니다. 예를 들어 법정에서 아들을 위해 거짓말을 한 아버지의 행위를 인간적으로는 이해 할 수 있지만, 우리는 그 행위를 결코 도덕적 일반론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 점과 함께 결과주의자들은 일상적 책임감들에 바탕을 둔 도덕성은 ‘자기주위를 우선시하는(prerogative)’ 성향 때문에 자기 모순(self-defeating)일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이점은 오늘날 대표적으로 D. Parfit(Reasons and Persons)에 의해 주장되었다. 그는 일상적도덕성(common-sense morality)의 작기주위를 우선시하는 성향을 결과주의론적 테두리 안에서 해결하려한다. 반면에 독일의 G. Patzig는 일상적도덕성의 자기주위를 우선시하는 그리고 의무론적(deontological) 양 성향들을 지적하면서 공리주의와 칸트의 의무론을 결합하려고 시도했다: Ethik ohne Metaphysik, Göttingen, 1971.
그러나 이 주장은 분명히 잘못되었다. 실제 우리는 소위 못 배운 사람들의 행위 속에서 오히려 많은 이타주의적(altruistic) 심지어 자기희생적(supererogative) 성향을 발견한다. 여기서 이타주의란 자기주위에 속하지 않은 사람들까지 포함한다는 의미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위의 보기에서 그 아버지가 이타적 의미에서 도덕적이려면 거짓말을 할 경우 피해를 받을 사람을 고려했어야 한다.
뿐만 아니라 자기주위를 우선 하는 행위가 항상 비도덕적인 것은 아니다. 일상적 도덕성(common-sense morality)은 행위에서 하나의 일상적 책임감이 다른 일상적 책임감보다 우선 일 수 있다는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는다. 즉 도덕적 행위는 결코 행위상황과 무관하지 않다. 예를 들어 아들이 어머니에 대한 걱정, 즉 일종의 책임감 때문에 어머니의 병은 생명에 지장이 없다고 거짓말을 했더라도, 우리는 일상적 의미에서 그를 비도덕적인 사람이라고 여기지 않는다. 일상적 책임감은 결코 칸트가 말하는 정언명법은 아니다. 이러한 일상적 도덕성에 관한 보기들은 다음과 같이 정의되는 ‘일상적 의미에서 허용된 행위’ 와 ‘일상적 의미에서 허용된 도덕적 행위’의 두 측면의 구별 및 그들이 결코 생활 세계에서 서로 모순된 관계에 서 있지 않다는 것을 분명히 해준다:

일상적 의미에서 허용된 행위: 한 행위 a는, a가 일상적 책임감에 근거한 경우, 일상적 의미에서 납득할 만한 허용된 행위이다;
일상적 의미에서 허용된 도덕적 행위: 그러한 행위 a는, a의 주체의 내면적인 측면들(의도, 희망, 관심 그리고 목적들)이 지나치게 자기중심적(egoistic)이면 일수록, 도덕적 의미에서 허용되는 것은 아니다. 자기주위를 우선시하는 행위는 자기중심적 성향이 강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아버지에 대한 책임감에 바탕을 둔 아들의 행위가 또한 유산상속과 관련되어 있는 경우는 그렇지 않은 경우보다 자기중심적이다.


만약 이렇게 구별되는 두 가지가 서로 모순된다면 일상적 책임감에 근거하지만 자기주위를 우선시하는 행위는 비도덕적 이어야한다. 그러나 항상 그렇지 않음을 이미 보았다. 일상적 도덕성의 두 번째  측면은 다만 우리가 이타적 행위를 도덕적으로 여기는 경향이 강하다는 점을 함축한다. 반면에 일반적 도덕성의 첫 번째 측면은 자기보존이라는 책임감이외에 오로지 자기이익만을 추구하는 자기중심적 행위는 상호주관적 의미에서 쉽게 납득되지 않음을 함축한다. 이러한 행위는 실제 도덕적으로 여겨지지 않는다. 밤에 길을 가다가 피를 흘리고 쓰러진 사람을 발견하고도 자기옷을 버리기 싫어서 못본체하고 지나간 행위를 도덕적이라고 여기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점은 일반적인 입장이기도 하다. 따라서 일상적 의미에서 허용된 그리고 도덕적 행위의 구별은 이러한 일반적인 입장과도 마찰하지 않는다.
CSM은 위의 일상적 도덕성에 관한 두 가지 측면과 함께 두 가지 중요한 점을 시사한다. 첫째 생활세계에서 정착된 오늘날의 과학지식 및 기술은 결코 모든 일상적 책임들과 모순관계에 서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지나친 경쟁만을 강요하는 현대 물질문명의 노도 속에서 행위의 자기중심적 측면이 강해지는 것이 사실이다. 다른 말로 해서, 현대 물질문명의 편의성과 관계된 우리의 행위들이 일상적 의미에서는 허용되지만, 결코 이타적 의미에서 일반적인 도덕성을 가진 것은 아니다. 이 점은 CSM의 맥락에서 오늘날 물질문명에 의해 위협받는 일상적 가치관의 흔들림으로 해석된다. 둘째 CSM 자체는 TA의 진정한 시민참여에 대해 구체적인 조건들을 언급하지 않는다. 담화윤리학과는 달리 CSM으로부터 TA의 시민참여가 이론적으로 유출되는 것도 아니다. 17세기 과학혁명이래 오늘날 우리가 격고 있는 물질문명에 의한 인류생존의 위협 및 일상적 가치관의 혼돈에 대한 상식적 공감대로부터 TA의 시민참여는 미래의 불확실성에서 오는 위협을 피하려는 하나의 합리적 선택으로 요청될 뿐이다. 시민들이 그러한 공감대를 가진다 해도 CSM의 입장은 TA에 불참한다고 하여 그들을 비합리적이라고 비난할 수 없다.
TA의 긍정적 현실화에서 CSM이 적어도 최소한의 조건으로 작용하기 위해서 우선 요구되는 것은 거대한 철학 담론이 아니라 적당한 제도적 장치이며 특히 진정한 의미에서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의 공동협력이다. 또한 일상적 책임감들은 우리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 사람들도 공유하지만 그것들의 인습화 그리고 사회화 과정에서 문화적 차이를 평범한 사실로 인정한다면, 그러한 TA를 제도화하는 과정에서 그러한 문화적 차이를 신중히 고려해야 한다. 예를 들어 TA에서 중요한 쟁점 중에 하나인 안락사에서 뇌사기준 또는 장기이식은 한의학에 담겨진 동양적 생명관에서는 쉽게 받아들여질 수 없다. 이 점으로부터 TA가 하나의 좁은 의미에서 문명론에 속한다면 오늘날 지나칠 만큼 경쟁적인 신자유주의 경제논리가 지배하는 세계화 과정에서 요구되는 것은 타문화에 대한 이해와 포용이지 결코 한국문화의 특성을 쉽게 포기하거나 혹은 한국적인 것의 성벽쌓기가 아니라는 것을 간접적으로 시사한다.
살펴본 바와 같이 CSM은 우리의 다양한 일상적 책임들을 가정한다. 이러한 책임들은 우리의 생활세계가 지니는 내적 가치이며, 이 가치들은 문화의 차이 및 인습 등에 의하여 다양하게 구체화되는 것이다. 즉 우리의 일상적 의사소통의 구조는 다양하게 펼쳐지면서 동시에 내적 가치를 수반한다. 이 점은 일상적 의미에서 허용된 그리고 도덕적인 행위들이 결코 모순된 관계에 있지 않다는 사실과 함께 우리가 인정해야 하는 이성개념이란 결코 형식적 담화이성의 구조로 설명될 수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콘텍스트, 문화 그리고 시대적 상황과 무관하지 않는 즉, 실제 생활 속에서 기능하는 순응적 이성개념을 요청한다. 이러한 이성개념이 이론적으로 어떻게 구성되어야 하는지는 여기서 다루지 않는다. 또한 CSM이 개인의 상황과 내적 측면들을 무시하지 않는 이유로, 행위의 결과들은 윤리적 계산주의 학자가 말하는 객관성, 즉 개인에 대한 가치중립적 확률계산에 의하여 정량화 될 수 없다.
그렇다고 해서 이러한 이유 때문에 CSM이 과학적 통계방식을 무시한다고 도마 위에 올려놓는 것은 아주 조야한 비판이다. 실례로 실제 행해지는 설문조사들은 시민들이 어떠한 식으로 생각하고 과학적으로 예측된 혹은 가정된 기대감을 파악하기 위한 통계자료이며, 이러한 통계자료들은 실용적(pragmatic)의미를 갖는 것이다. CSM은 결코 이러한 실용적 그리고 과학적 통계방식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고 관계된 자료들을 가지고 추측된 결과들의 유용성을 거부하는 것도 아니다. CSM이 거부하는 것은 관계된 결과들이 행위자의 내면적 측면들과 무관하게 완전히 객관적으로 정량화 된다고 여기는 결과주의자 혹은 윤리적 계산주의자의 관점을 거부하는 것이다. 불필요한 혼돈을 피하기 위하여, 5절에서 볼 화이트헤드의 확률에 대한 비판은 바로 윤리적 계산주의자들의 개인에 대한 중립적 혹은 절대적인 유토피아적 정량화 관점을 향한 것이지 결코 실용적 의미에서의 통계방식을 거부하는 것이 아님을 미리 밝혀둔다.
우리의 일상적 의사소통의 구조가 다양하게 펼쳐지면서도 동시에 내적 가치를 수반한다는 점은 사회의 전체 패턴이 일률적으로 진화한다는(evolving)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는 오히려 개인의 만족도가 사회 전체의 내적 만족도와 불일치할 수 도 있음을 함축한다. 그러나 바로 이러한 불일치 때문에 진보라는 개념은 정당성을 얻게 되며, 진보와 뒤에서 논의할 비평형의 대립 속에서도 수반되는 내적 가치는 일상적 책임감을 갖는 주체, 즉 사회를 유기적으로 구성하는 단위로서의 구성원들과 분리되어 여겨질 수 없다는 점은 유기체 철학을 이해하는 중요한 개념 중의 하나인 화이트헤드의 공재성이라는 개념의 분석을 통하여 적어도 이론적으로 설명될 수 있다.

4. 화이트헤드의 공재성(Togetherness)과 CSM의 연관성

CSM에서 말하는 일상성이란 그 사회가 지니는 내적 가치를 동반한다. 그러한 내적 가치를 사회 속의 한 개인이 공유하고 있다하여도, 그것은 계량화 될 수 없는 성격을 지니기 때문에 TA의 정량적 판단기준을 제시해 주지 못한다. 어떤 사회가 담지하고 있는 내적 가치는 폴리니가 말하는 다중심적 과제(policentric tasks)의 성향을 지니고 있다. 마이클 폴라니(이은봉 역), 과학, 신념, 사회, 범양사, 146쪽.
다중심적 과제란 개인의 상호협동적인 활동 속에서 자연발생적으로 이루어지는 유기체적 질서화를 뜻한다. 다중심적 과제는 일정한 가치를 설정하고 그 가치에 부합되는 판단가치와 의사결정 구조만을 인정하는 경화된 합리성의 가치구조를 거부한다. 다중심적 과제는 폴라니의 핵심개념인 암묵적 지식의 결과론적 가치를 중시한다. 암묵지는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알고 있다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이것이 바로 CSM에서 의도하는 일상성에 내포된 뜻이다. 따라서 일상성이란 무작위의 흔들거리는 가치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질서화 되어 있지만 단지 숨겨져 있기 때문에 계량화 할 수 없는 그런 암묵지의 결합체(nexus)이다.
일상성을 암묵지의 결합체로 보는 입장은 의사결정 집단의 종적인 권력을 거부한다. 의사결정 집단의 권력유지는 의도된 가치판단과 의사결정을 위하여 일상성의 비합리성을 강조하고 자기 우선성이 개입된다. 다시 말해서 CSM에 대한 비판 중에서 하나는 CSM의 의사결정 과정이 개인의 자기중심주의의 주관적 판단에 치우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비판은 여전히 CQM에도 적용될 수 있다. 이에 대한 과학사적 근거와 논쟁은 다음의 책에서 자세히 볼 수 있다. 데이비드 린드버그(이정배, 박우석 역), 신과 자연(상), 이대 출판부, 1998.
암묵지의 결합체는 계량적이지는 않으나 분명히 커뮤니티의 객관적인 판단질서를 유지하고 있다. 따라서 일상성에 따른 가치판단과 의사결정은 무지에 의하거나 혹은 편협적인 결과를 산출하는 것으로만 보는 것은 다른 숨겨진 의도가 있다.
일상성은 화이트헤드가 말하는 현존(existence)의 범주를 추상성의 차원에서 구체성의 차원으로 인식하도록 하는 실질적인 결합체의 실례이다. 존재의 방식을 다수성(multiplicities)의 눈으로 볼 때, 비로소 일상성 그 안에서 이루어지는 인식의 양상을 이해할 수 있다. 다수성의 단위는 현실적 존재(actual entities)이며, 현실적 존재에서 다수성의 결합체로 나아가는 안내책자가 바로 화이트헤드의 공재성(togetherness)이다. 화이트헤드는 공재성의 뜻을 다음과 같이 해명한다. 과정과 실재(오영환 역), 78쪽


공재적이란 여러 종류의 존재가 임의의 한 현실적 계기 속에 <공재>하는 여러 특수한 방식을 포괄적으로 가리키는 일반적 술어이다. 따라서 <공재적>이란 개념은 <창조성>, <다자>, <일자>, <동일성>, <다양성>diversity 의 개념들을 전재하고 있다. 궁극적인 형이상학적 원리는 이접적으로 주어진 존재들과 다른 또 하나의 새로운 존재를 창출해내는, 이접에서 연접으로의 전진이다. 이 새로운 존재는 그것이 찾아내는 <다자>의 <공재성>인 동시에, 또한 그것이 뒤에 남겨놓는 이접적인 <다자> 속의 일자이기도 하다. 즉 그것은, 그 자신이 종합하는 많은 존재들 가운데 이접적으로 자리하게 되는 새로운 존재인 것이다.

일상성은 겉으로 보기에 존재의 이접적 세계로 간주될 수 있다. 이렇게 간주되었기 때문에 CSM이 비난의 도마 위에 올랐던 것이다. CSM이 정식으로 철학적 논의 구조 안으로 들어 온 것이 최근에 와서야 비로소 가능했던 사실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연접세계의 창조성이 이미 알려진 공리주의적 유용성이나(CQM) 유일한 합리적 기준으로 간주되는(DM) 기준축(reference)으로부터 이 세계를 다시 살아나게 하는 중요한 존재의 원동력임을 인식하게 되었다. 그리고 연접의 실질적인 추진력인 공재성이 바로 일상성을 파악하는 핵심으로 볼 수 있다.
결국 공재적 사회의 커뮤니케이션은 일의적인 기하학의 결론을 과/실 204
추종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살아있는 세포 속의 분자단위의 분자적 사회에서는 개체분자의 행위작용(화학작용 및 기타)이 독자적이거나 개체의 목적을 수행하는 과정으로 볼 수 없으며 여타 분자들의 행위작용 밑에서 수행되는 질서부합적 과정으로 나타난다. 이를 화이트헤드는 종속적 사회의 특징이라고 말한다. 과/실 208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종속성이란 하부개체가 상부개체에 의존적이라는 단순한 명제적 느낌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공재성을 이해하는 중요한 접근방식 중의 하나로서 화이트헤드 철학개념의 기초인 사건과 사물 사이의 차이를 상기하는 일이다. 공재성 특히 경험적 공재성이란 정적인 사물 사이의 관계를 평면적으로 혼성hybrid시키고 마는 것이 아니다. 공재성은 구조와 구조 사이를 연결하는 복합성의 중첩을 의미한다. 따라서 공재된 상위 구조의 패턴은 구성인자의 자기목적적 인식의 눈으로는 파악되지 않는다. 쉽게 이야기한다면 구성인자의 자기만족도와 전체 패턴이 보여주는 내재적 만족도는 상이할 수 있다. 이 점은 - 화이트헤드의 ‘사회’라는 개념을 일상적 의미에서의 인간사회로 국한시킬 경우 - 공재된 상위구조의 패턴, 즉 ‘사회적으로 공조된 구조(socially coordinated structure)’와 구성인자들, 즉 시민들의 자기만족도의 완전한 일치는 죽은(더 이상 진화할 수 없는) 사회임을 함축한다. 따라서 일상적 판단 및 의사소통은 결코 정해진 한정된 구조를 가질 수 없으며, 이 점은 3절의 CSM의 정의에 이미 암시되어 있다. 왜냐하면 CSM은 한 행위 혹은 선택이 일상적 책임들에 크게 반할 때 좋게 여겨질 수 없음을 함축하는 것이지 결코 이러이러한 정해진 규칙 혹은 조건에 절차적으로 따라야함을 강요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더욱이 CSM의 실제 적용에 있어서 공재화된 사회구조의 패턴의 다양성에 근거하는 하나의 차이로서 문화적 차이가 무시될 수 없다면, CSM에 근거한 선택이 일률적일 수 없음은 당연한 귀결이다. 이와 관계하여 파슨스(T. Parsons)의 다중차원적(multidimensional) 사회이론은 화이트헤드의 철학에 의하여 자극되었음은 다음을 보라. J.A. Alexander: The Modern Reconstruction of Classical Thought: Talcott Parsons, Berkeley: University of California 1983, p. 10.

여기서 이러한 상이성에도 불구하고 일상성, 즉 일상적 판단 및 의사소통이 어떻게 그 사회가 지니는 내적가치를 동반할 수 있는가 반문할 지 모른다. CSM의 맥락에서 그러한 내적가치는 이미 우리의 일상적 책임들에 근거하고 있고 ‘일상적 의미에서 허용된 행위’와 ‘일상적 의미에서 도덕적으로 허용된 행위’의 개념적 무모순의 관계는 오히려 사회 구성인자들의 그러한 책임들의 선호관계의 구조와 상황에 따라 이상적으로 요구되는 그러한 책임들의 중첩된 사회적 혹은 상호주관적 패턴화에는 차이점이 있을 수 있음을 함축한다. 만약 그러한 차이점이 현실적으로 존재할 수 없는 것이라면, ‘일상적 의미에서 허용된 행위’와 ‘일상적 의미에서 도덕적으로 허용된 행위’는 논리적으로 서로 모순되거나 아니면 완전히 일치하여야 하는 것이다. 바로 그렇지 않기 때문에 일상적 책임들은 우리의 생활세계가 지니는 내적가치와 관계하며, 이 가치들은 문화의 차이 및 인습등에 의하여 다양하게 구조화되는 것이다.
물론 일상적 책임감들에 근거하여 우리의 의사판단 구조가 어떻게 형성되는가 하는 문제에 대한 구체적인 대답을 화이트헤드에서 찾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그의 ‘판단’개념은 가치중립적이지 않다: “그것은 하나의 가치로서 그 주체의 만족 속으로 들어간다”. 과/실 357
이 점은 일상적 판단이 일상적 책임감들에 반하도록 작용하지 않는 경우에만, 그것은 판단주체의 만족 속으로 들어간다고 CSM의 맥락에서 해석될 수 있다. 간단히 말해 어른들이 아이들의 해열을 위하여 아스피린 사용을 판단 혹은 결정하며, 이 는 자기 아이들을 보호해야 한다는 책임감에 바탕을 둔다. 즉 2절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우리가 원하는 혹은 만족하는 결과’는 CQM의 맥락에서 ‘최적의 결과’와 혼돈되어서는 않된다. 여기서 또한 간과되어서는 않되는 점은 화이트헤드의 사변철학의 특수한 성격이다. 이 성격은 마르크스나 하버마스와 달리 우리 생활세계 및 의식을 변화 혹은 개혁하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현실적 경험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실재 세계에 관한 철학적 개념들을 일상 경험의 세계와 화해’시키는 것이다. 과/실 300
바로 이 점 때문에 화이트헤드의 철학에는 분석 형이상학의 대표자인 스트로슨의 기술적 형이상학(descriptive metaphysics)과는 달리 기술(description)과 사변(speculation)의 극단적 양분 그리고 일상적 개념들과 이론적 개념들의 역할 분담론은 허용되지 않는다. 스트로슨의 기술적 형이상학에 대해서는 다음을 보라. P.F. Strawson: Individuals, London: Methuen 1987(8판), p. 9.
일상적 책임감들과 판단에 있어서 화이트헤드의 ‘만족’개념을 연결시키는 것은 철학적 개념들을 일상 경험과 화해시키려는 그의 전체적 구도에 위배되는 것은 아니다.
사회구조의 전체 패턴과 시민 혹은 구성원들의 갈등(conflict)이 피할 수 없는 현실인 한에서, TA에서 시민들의 자발적 참여는 그러한 갈등을 좁히기 위해서는 당연히 요구된다. 그러한 갈등이 사회진화의 필수적인 조건인 이유로, 요구되는 이성개념은 형식적이고 보편적으로 주어진 어떤 것이 아니라 바로 삶에서 기능하는 어떤 것이어야 한다. 이 점은 이미 화이트헤드의 ꡔ이성의 기능ꡕ에 암시되어 있으며 여기서는 더 이상 다루지 않는다. 이미 3절에서 언급된 바와 같이 CSM 또한 콘텍스트, 문화 그리고 시대적 상황과 무관하지 않는, 즉 실제 생활 속에서 기능하고 잇는 순응적 이성개념을 요구한다. 더욱이 사회구조의 전체적 패턴 혹은 공재된 상위 구조의 패턴, 실례로 여러 가지 사회 제도들이 구성인자들, 즉 개인들을 위협하는 경우, 이 에 대한 반발작용으로서 ‘적극적으로 자기의 주위환경에 눈을 돌리는’ 시민참여 아니면 시민의 ‘이성에 대한 피곤’으로서 무력감과 무관심은 객체와 전체 양자를 아우르는 화이트헤드의 유기체적 세계관에서는 단순히 자동제어적(cybernetic) 세계 아니면 제도들에 의한 무의식적 소외(alienation/ Entfremdung)개념으로 환원될 수 없다. CSM의 맥락에서 사회에 대한 개인적 무관심 또한 하나의 현실로 인정되고 신중히 고려되어야 한다.
구성인자의 자기만족도와 전체 패턴이 보여주는 내재적 만족도의 상이성으로 인해서 하버마스의 입장에서는 일상성의 귀결이 비합리적 판단으로 간주될 수 있으며, 결과주의자 특히 베이즈주의 이후 가장 많이 논의되는 확률적 윤리계산주의자에게는 반 규범적으로 간주될 수도 있다. 그들이 보기에 CSM은 한정되지 않은 불안정 구조의 결과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CSM는 그 구조가 한정되지 않았기 때문에 오히려 구성인자의 궁극적인 만족도를 높일 수 있다고 본다. 세포 사회의 한정성은 오히려 그 세포사회의 죽음을 뜻한다. 거시 사회 즉 결합체의 중요한 특징은 그것이 한정성을 거부한다는 점이다. 한정되어 특수성을 획득한 사회는 이미 바둑알집에 들어있는 바둑알에 지나지 않는다. 한정성을 거부한 바둑알만이 바둑판 위에서 유기체 게임을 지금 하고 있는 것이다. 그 바둑알은 살아있는 계기들living occasions이다.
공재성은 알집 안의 바둑알의 모임이 아니며 바둑판 위에 놓여진 한 컷으로 촬영된 바둑알들의 모습이 아니다. 공재성은 바둑알들이 놓이게 되는 사유의 패턴이 보여주는 시간적 연결성을 현재 속에 머금고 있다. 바로 일상적 판단이란 패턴들의 공재적 강물 위에서 이루어지는 자기초월체superject의 일상적 호흡일 뿐이다. 그러한 판단은 귀납추론이 아니고, 명제 안에서 논리적 주어의 미래를 확실하게 보장해 주지도 않는다. 그러나 공재된 일상성은 가장 분명한 질서구조를 갖고 있다. 그 질서구조는 서로 엉켜있는 패턴the patterned interwining이기 때문에 겉으로는 물리적 기하학의 사회에서 합의된 정량적 결과치를 생산할 수 없는 듯 보이지만, 실제로는 객체화의 표본이 된다. 과/실, 9장 7절


5. PR 9장 5절(귀납법, 확률)의 적용

우리가 판단을 하는 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환경적 여건에 대한 반작용으로 일어난다. 판단을 하기 위한 다양한 증거들을 수집하고 그 증거사례들을 분류하고 나에게 이로운 것과 불리한 것을 구분하여 그 정량적인 나누임에 따라서 나의 판단을 정하게 된다. 이러한 판단을 우리는 보통 확률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판단은 기존의 주어진 증거들 외에 예상치 못한 새로운 증거가 나타나거나 증거가 무한일 수 있다는 직접적 환경이 주어졌을 때 무의미해진다. 이러한 사례를 9장 5절에서 버몬트의 철도 열차운행 시간표의 에를 들면서 자세히 썼다.

확률을 지시하는 명제는 존재와 일치하거나 아니면 일치하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명제 차원에서 확률은 판단의 가장 중요한 논거가 될 수 있다. 이러한 확률에 대한 신념은 사례를 분류한 통계치를 의사결정 구조에 직접 사용할 수 있다는 신념으로 이어진다. 이러한 신념은 사례를 분류한 통계치를 의사결정 구조에 직접 사용할 수 있다는 신념으로 이어진다. 이러한 신념에 차있는 것이 바로 결과주의의 전형이다. 그러나 주어진 사례근거는 한정된 눈을 갖고 있는 인간에게 아주 제한된 여건일 뿐이다. 그러한 한정된 표본추출을 인정하지 않는 경우, 확률은 그 자체로 확률적이라 해도 확률의 근거는 굳건해야 하는데, 확률이 확률적이고 확률의 근거조차도 확률적이 되는 불행한 사태에 이르게 된다.
화이트헤드는 확률적 통계의 난점들을 다음과 같은 네 가지 경우를 들어 말하고 있다. 과/실 372-3


1) 확률은 주어진 증거에 비례할 뿐이다. 엄밀하게 말해서 선택된 증거에만 의존한다는 것이다. 선택되지 않은 다른 증거들이 왜 선택되지 않았는지에 대한 질문을 확률론자들은 전혀 던지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확률을 여전히 존속시키려면 확률은 궁극적인 증거(ground)까지를 마련해야 하며, 그 궁극적인 증거가 자의적인 것arbitrariness이 아니라는 것을 밝혀야 한다.
2) 통계적 확률을 근거하는 사례들이 확률적인 요소를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확률은 그 확률의 결과를 지지하든지 아니면 지지하지 않든지 관계없이, 근거로서의 사례들은 똑같은 확률을 지녀야 한다. 즉 근거가 되는 사례들은 모두 확률에 호소함이 없이 직접적으로 인식되어야 한다.
3) 확률은 근거를 이루는 사례의 수가 반드시 유한해야 한다는 가정을 이미 하고 있다는 점이다. 즉 통계적 확률이 의거하고 있는 사례의 수가 무한할 때 확률이론 전체가 붕괴되고 만다.
4) 확률을 근거하는 사례들은 앞으로도 유사한 카테고리의 유형을 가질 것이라는 전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새로운 근거나 새로운 사례가 발생하는 경우, 통계의 의미는 사라지고 만다.

이러한 화이트헤드의 지적은 CQM의 논리의 허점을 직접 드러내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확률의 근거는 관찰자가 피관찰자를 만날 때마다 새로운 근거로 될 수 있는 가능한 환경적 요인이다. 하버마스는 이러한 확률근거의 특징을 간파하였다. 그래서 DM은 귀납과 확률의 기하학적 택시를 버리고, 구성원의 담화를 통한 사회의 합의가 이루어지는 지점에서 의사결정과 개인판단의 버스정류장을 설치하였다. 그러한 의사판단의 구조가 여전히 규범적이라는 점이다. 다시 말해서 앞에서 말했듯이 하향식top-down 예측방법론에서 벗어날 수 없다. 이러한 예측구조는 매우 합리적인 결과를 유추해 볼 수 있지만, 그 합리적 구조란 결과예측 당사자와 예측되어지는 세계 사이의 존재론적 관계를 상실한 또 하나의 ‘잘못 놓여진 구체성’의 결과만을 낳을 수 있다.
통계적 결과예측과 추상적 합리성에 의한 결과예측의 모순을 피하기 위하여 우리는 예측의 주체가 예측되어지는 세계와 직접 만나면서 동시에 공재성의 세계를 호흡하는 공액의 의사결정구조 속에서 사태들을 판단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일상성이다. 일상성은 암묵적인 것이 비록 숨겨져 있지만 외형적인 판단의 매 순간마다 그 판단의 결정적 배후가 되는, 말 그대로 일상적인 것이다. 그래서 일상적 “판단은 그 주체를 통하여 우주와 관계한다”. 과/실 371


6. 결론

우리는 TA에 관한 세 가지 모델을 살펴봄으로써 결과주의를 비판하고 담화윤리학적 모델의 추상성을 거부하는 가운데 CSM을 도식적으로 그려보았다. 그리고 CSM에서 거부될 수 없는 행위의 주체자로서 구성원들과 그들의 유기적 결합체로서의 사회는 긴장관계 속에서도 내적 가치를 동반한다는 사실을 화이트헤드의 공재성이라는 개념의 분석을 통하여 이론적으로 정당화 해보려고 하였다. 문제는 CSM 자체 그리고 화이트헤드 철학에 담긴 더불어 공존한다는 사실의 현실화는 때에 맞고 올바른 제도 및 전문가들과 비전문가들의 커뮤니케이션을 요구한다. 이미 언급하였듯이 CSM은 윤리 계산주의자 혹은 결과주의자들이 말하는 개인에 대한 가치중립의 객관적 확률을 거부하는 것이지 실용적 의미에서의 확률적용 혹은 통계 그리고 미래 그리고 결과에 대한 기대감을 거부하는 것은 아니다. CSM은 최소한 실용적 통계자료들이 우리가 가진 일상적 책임감들에 반하여 행동할 수밖에 없는 그러한 사태를 줄이기 위해 사용되기를 이론적으로 요청하며, 이를 위해 시민참여가 권장되는 것이다. 내적 가치인 일상적 책임감들의 우선 관계가 문화와 인습에 따라 다원적인 구조를 갖는 이유 때문에, CSM은 또한 현재 한반도에 사는 우리들의 가치관의 구조에 대한 기술적(descriptive)이고 경험적인 연구를 요구하는 것이다. 즉 한 기술정책이 실현될 때 부작용을 최소화시키려면, 관계된 요소들(기대효과, 국제 경쟁력, 사회의 안정성, 비용절감)에 실제적인 점수 매기기에 있어서 우리의 내적 가치 및 문화적 특성 또한 고려되어야함이 요구된다. 실제 환경문제와 같은 구체적 사례의 분석을 통하여 이론적으로 체계화된 CSM, 기술측정에 대한 정책적 방법론을 보여주는 것 그리고 결코 간과할 수 없는 문명론적 위기에 대한 화이트헤드적 대안을 그려보는 것은 저자들의 다음 숙제로 남겨둔다. 그 곳에서 3절에서 언급된 상향식 철학적 방법론에 의거하여 일상적 의사판단 구조를 실제적으로 기술해보려고 노력할 것이며, 과연 화이트헤드의 철학이 그 기술을 완벽히 설명해 낼 수 있는가를 조심스럽게 타진해 볼 것이다. 필자들은 과학적 그리고 이론적 세계와 일상성을 분리하지 않는 화이트헤드적 사유틀을 인정하면서 구체적인 문제를 가지고 그의 철학을 수정 보완해 나가는 것이 진정한 의미에서 화이트헤드 철학하기라고 믿기 때문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이 글이 평가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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