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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신학논문은행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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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N. Whitehead의 상대성 원리와 범주도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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博士學位 請求論文


A. N. Whitehead의
相對性 原理와 範疇圖式


大邱가톨릭大學校 大學院

哲   學   科

李     太     浩





指導敎授  安   亨   寬

2001年  2月
A. N. Whitehead의
相對性 原理와 範疇圖式
大邱가톨릭大學校 大學院
哲   學   科
李     太     浩
이 論文을 博士學位 論文으로 提出함
指導敎授  安   亨   寬
2001年  2月
李太浩의 博士學位論文을 認准함
審査委員                    인
審査委員                    인
審査委員                    인
審査委員                    인
審査委員                    인
大邱가톨릭大學校 大學院
2001年  2月

감사의 글


조그마한 씨앗 하나가 만들어졌습니다. 그런데 이 씨앗 하나의 생성에도 전 우주의 참여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당연히 그 모든 참여에 대해서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습니다. 한편 그 많은 참여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우둔함으로 보잘 것 없는 씨앗이 되어 버린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이  듭니다.     


2000년  12월
이 태 호

--- 차    례 ---



영문 초록

원전 약호

Ⅰ. 들어가는 말 1

Ⅱ. 화이트헤드의 상대성 원리 5

  1. 절대성의 타파와 상대성의 수립 6
  2.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과 화이트헤드의 상대성 원리 21
  3. 화이트헤드의 상대성 원리와 범주도식 30

Ⅲ. 범주도식의 원리들과 상대성 원리 38

  1. 존재론적 원리와 상대성 원리 43
  2. 주관주의 원리와 상대성 원리 55
  3. 과정의 원리와 상대성 원리 76

Ⅳ. 범주도식에서의 상대성 원리 88

  1. 범주도식에서 사용되는 기본 용어들의 대응관계 88
    1.1 일자와 존재자 92
    1.2 다자와 있음 97
    1.3 창조성과 사물 105

  2. 궁극자의 범주에서 상대성 원리 114
    2.1 궁극자의 범주 개념 115
    2.2 주체로서 일자 120
    2.3 대상으로서 다자 124
    2.4 일자와 다자를 매개하는 창조성 127

  3. 존재의 범주에서 상대성 원리 135
    3.1 존재의 범주에 있어서 분류 135
    3.2 주체가 될 수 있는 존재의 범주 140
    3.3 대상이 될 수 있는 존재의 범주 156
    3.4 주체와 대상의 매개가 될 수 있는 존재의 범주 177
  
Ⅴ. 맺는 말 185

참고 문헌 190
WHITEHEAD'S PRINCIPLE OF RELATIVITY
AND CATEGOREAL SCHEME

Lee, Tae Ho

Department of Philosophy
The Graduate School, Catholic University of Daegu


(Supervised by Professor Ahn, Hyeong Gwan)


(Abstract)
The categoreal scheme of Whitehead is unique. The purpose of this dissertation is searching for the foundation of the establishment of this unique categoreal scheme on the viewpoint of the principle of relativity.
There are antecedent treatises the formation of the categoreal scheme by R.M. Martin on the standpoint of the logic and by John W. Lango on the standpoint of the synonty. Though they have illustrated the logicality and coherence, they have not illustrated the cause of the formation.
Whitehead's principle of relativity is that 'every entity is prehended by other entity.' 'every entity' which has cited in the proceeding sentence means the object, 'other entity' refers to the subject, and 'that which is being prehended' is the medium. Whitehead's categoreal scheme is constituted by the subject, the object, and the medium.  Under the Category of Ultimate, the 'one' functions as a subject, the 'many' as an object, and the 'creativity' as a medium. And in the Categories of Existence, actual entity and nexus become the subject and all the 8 categories become the object and the medium.
By investigating the probability of classifying Whitehead's categoreal scheme as a subject, an object, and a medium, the validness of the principle of relativity that 'every entity is prehended by other entity', can be proved. This also makes us understand why his categoreal scheme should be made up like that, when research on the viewpoint of the principle of relativity.
In conclusion, Whitehead's philosophy of organism represents 'the ultimate reality of the universe repeats becoming and being perished  over and over again as a organism.' The becoming means constituting (creativity) itself(one) by taking in various objects(many) around itself as a subject. The being perished represents that the subject is  constituting itself and losing its functions as a subject at once. The repeating represents the process that superject which losed the function as a subject functions as an object which serves to create  others, and the process in which the subject prehended the object and becomes the object by perishing proceeds.
Therefore, what depicts the active process of these organisms most generally is the Category of Ultimate composed of 'one', 'many', and 'creativity'. That "what"(the Categories of Existence) is operating on "how"(the Categories of Explanation), and "under some conditions" (Categoreal Obligations) concretely is showed by other categories. It is possible to depict the categoreal scheme like these forms because we watch it on the standpoint of the theory of relativity.
On the viewpoint of the theory of relativity, Whitehead's Categoreal Obligation which supports resolutely the reason why Whitehead's categoreal scheme should be like that―it also can be classified into the category related with subject(The Category of Subjective Unity, The Category of Subjective Harmony, and the Category of Subjective Intensity, and The Category of Freedom and Determination), the category related with object(The Category of Objective Identity, The Category of Objective Diversity), and the category related with medium(The Category of Conceptual Valuation, The Category of Conceptual Reversion, The Category of Transmuta -tion)―and the Category of Explanation have not been considered in this dissertation. Therefore, with these categories, there remains as a following task the research on the effect we can get when we apply his philosophy of organism to real life.

원전 약호


AI   Adventures of Ideas. A Free press paperback,  Macmillan           Publishing    Co., New York, 1967.
CN  The Concept of Nature. Cambridge University Press, Cambridge,     1971.  
ESP  Essays in Science and Philosophy. New York, Greenwood Press,     1968,
FR   The Function of Reason. Beacon Press, Boston, 1958.
MT  Modes of Thought. The Free Press, New York, 1968.
OT  The Organization of Thought. Greenwood Press, 1975.  
PNK  The Principle of Natural Knowledge. Cambridge at the University     Press, 1925.   
POR The Principle of Relativity. Cambridge University Press,            Cambridge, 1922.
PR   Process and Reality. Corrected Edition Edited  by David Ray       Griffin & Donald W. Sherburne (New York : The Free Press,       Division of Macmillan Co., 1978).
SB  Symbolism : Its Meaning and Effect. New York : Putnam's          Sons, 1959.   
SMW Science and the Modern World. A Free press paperback,          Macmillan  Publishing Co., New York, 1967.

Ⅰ. 들어가는 말


유기체의 철학philosophy of organism은 동양사상의 근저에 있어 왔던 것이다. 화이트헤드는 『과정과 실재』Process and Reality에서 "유기체의 철학은 서아시아나 유럽의 사상보다 인도나 중국의 사상 기조에 더 가까운 것으로 생각된다. 후자는 과정을 궁극자로 보고, 전자는 사실을 궁극자로 보고 있다"고 말한다. 이런 면에서 화이트헤드의 철학은 앞으로의 시대에 동서가교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화이트헤드가 말하는 과정은 유기체의 한 측면을 나타내는 것으로,  그의 형이상학에서는 과정의 원리로 정식화된다. 그리고 이 원리는 유기체의 다른 측면을 나타내는 존재론적 원리나 수정된 주관주의 원리와 함께, 이 논문에서 주로 다루는 상대성 원리로 표현된다.
서양철학에서도 유기체의 철학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고대에는 플라톤의 티마이오스 우주론에 유기체의 철학이 나타난다. 그리고 이 철학은 근대 우주론의 등장과 함께 쇠퇴해 버린다. 그러나 실체 철학에 한계를 느낀 철학자들 사이에서 유기체의 철학이 다시 나타나기 시작한다. 그 중 라이프니츠는 우주와 단절된 실체를 거부하고 우주와 연계된 유기체적인  단자론을 주장한다. 그렇지만 그의 단자들은 서로간에 유기적 관계를 하지 않으며 정신활동에 국한된다. 쇼펜하우어, 니이체, 베르그송 등의 생철학은 실체철학의 근거가 되는 이성적 사고의 모순을 지적해서 본능, 생의 의욕, 직관 등을 강조하면서 유기적인 생명체를 근원적인 것으로 언급하지만, 무생물에게까지 미치는 유기적 우주론을 구축하지는 않는다.
현대 자연과학의 성과는 자연의 가장 근원적인 것으로 간주되는 물질, 공간, 시간 등을 부정하도록 만들었으며, 그것들이 유기적 관련 속에 있음을 나타나게 했다. 화이트헤드의 상대성 원리는 이러한 현대 자연과학의 성과를 비판적으로 수용하고 있으며, 단절된 실체가 아닌 유기체를 보다 잘 표현할 수 있는 원리가 된다.
화이트헤드 유기체의 철학은 철학사에 나타난 많은 문제를 해결하고 있다. 해결법은 대개 그의 원리들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는데 그 원리 중에서도 특히 상대성 원리는 기존철학이 지금까지 절대적인 것으로 믿어왔던 것들을 상대화시키면서 독특하게 전개된다. 화이트헤드 철학이 난해하다고 느껴지는 것은 지금까지의 철학이 암암리에 혹은 분명하게 절대적인 측정기준으로 믿어왔던 부분을 거부하고 새롭게 정립해 가기 때문일 것이다.
화이트헤드 범주도식의 구성에 대한 선행연구로는 논리학적 관점에서고찰한 마르틴R.M. Martin의 연구와, 공존관계성synonty의 관점에서 고찰한 랭고John W. Lango의 연구가 있다. 논자는 이들과 달리 상대성 원리라는 관점에서 범주도식을 보고자 한다. 왜냐하면 이 원리를 통해 그의 범주도식을 조망했을 때, 범주도식의 구성이유가 보다 더 분명히 밝혀지기 때문이다.
이 논문의 목적은 화이트헤드 범주도식이 왜 그렇게 구성되지 않으면 안되는지를 알기 위해, 화이트헤드의 상대성 원리를 중심으로 그의 범주도식을 고찰하는 것이다. 이러한 고찰의 결과는 화이트헤드 유기체의 철학을 이해하는데 핵심이 될 수 있다.
본론의 시작인 Ⅱ부에서는 화이트헤드의 상대성 원리를 자연과학적 시각에서 접근한다. 자연과학의 발달 과정에서 절대성이 어떻게 타파되어 왔는가를 먼저 고찰하고,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과 차이점을 들어서 모든 존재자가 다른 존재자에게 파악된다는 화이트헤드의 보편적 상대성 원리를 밝힌다.
Ⅲ부에서는 화이트헤드의 상대성 원리를 상호보완적인 관계에 있는 다른 원리들과 비교 고찰한다. 이렇게 비교 고찰함으로써 그의 상대성 원리를 보다 깊이 있게 다룰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범주도식이 왜 그렇게 구성되지 않으면 안되는가에 대한 예비지식을 갖추게 된다.
그의 범주도식은 Ⅳ부에서 고찰되는데, 1장에서는 다른 범주들의 전제가 되는 일반적 원리로서 궁극자의 범주인 일자, 다자, 창조성과 존재자, 있음, 사물이 대응관계에 있음을 밝힌다. 이를 통해 화이트헤드 유기체의 철학에서 다루는 존재와 관계되는 용어들의 의미가 분명히 드러나게 된다. 이 분석 작업은 화이트헤드의 존재론을 고찰해갈 수 있는 기초가 될 것이다.
2장에서는 궁극자의 범주들을 상대성 원리에 따라 주체로서의 일자, 대상으로서의 다자, 매개로서의 창조성으로 구분해서 그 역할을 분석한다. 그리고 3장에서는 존재의 범주들 중 합생하는 주체로서의 일자가 될 수 있는 것은 어떤 것인지, 대상으로서의 다자와 그 다자 중 일자는 어떤 것인지, 또 그들이 매개의 역할을 담당할 수 있는지를 고찰한다.
이렇게 화이트헤드의 범주도식이 주체, 대상, 매개로 구분될 수 있다는 것을 밝힘으로써, 상대성 원리의 타당성이 입증될 뿐만 아니라 상대성 원리를 통해 그의 범주도식을 고찰하면 범주도식의 구성이유가 보다 더 분명해진다.



Ⅱ. 화이트헤드의 상대성 원리


상대성 원리의 핵심 용어인 상대성의 개념을 정확히 이해하기는 힘들다. 왜냐하면 인류의 인식 근저에 절대성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논자는 이 절대성이 인류의 인식 속에서 어떻게 타파되어 왔는가를 먼저 고찰한다. 첫째, 고대 희랍인들이 갖고 있던 공간방향 절대성을 타파한 아리스토텔레스의 공간방향 상대성을 고찰한다. 둘째, 아리스토텔레스의 인식 근저에 있었던 공간위치 절대성을 타파한 코페르니쿠스, 갈릴레오, 뉴턴 등의 공간위치 상대성을 고찰한다. 셋째, 뉴턴 등의 인식을 지배했던 시간과 공간에 대한 절대성을 타파한 아인슈타인의 시공간 상대성을 고찰한다. 넷째, 아인슈타인이 버리지 못한 물질(빛)과 중력의 절대성을 부인하는 화이트헤드의 보편적 상대성 원리를 고찰한다.
화이트헤드의 보편적 상대성 원리는 사건의 내적관계 이론을 존재론으로 확대 적용한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합생과정의 주체와 대상 사이의 내적관계인 과정의 원리와 비교되며, 모든 존재자가 현실태에 내재하기 위한 가능태로 될 수 있다는 원리이다. 달리 말하면 이것은 '대상들(모든 존재자)이 주체(다른 존재자)에게 파악(내재)된다'는 원리이다.




1. 절대성의 타파와 상대성의 수립


상대성 원리를 논의하기 전에 상대성 원리의 핵심이 되는 '상대성' 개념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필요하다. 이 장에서는 상대성 개념에 대한 이해를 위해서 상대성과 대비되는 절대성이 인류의 인식 속에서 어떻게 타파되어 왔는가를 먼저 검토하고자 한다.
상대성 이론으로 20세기 최대 과학자라고 불리는 아인슈타인은 등속운동과 관계되는 특수상대성 이론(1905년)과 가속운동까지 포함하는 일반 상대성 이론(1916년)을 발표했다. 이 발표는 영국의 일식 관측대에 의해 입증되었다.(1919년) 그 관측대는 중력장이 광선을 휘게 하는 것을 관측했다. 이것은 시·공간의 절대성을 부정하고 상대성을 주장한 아인슈타인의 주장을 뒷받침한 것이다. 그 이후 상대성 이론에 대해 관심을 갖는 사람은 상당히 많아졌다. 그러나 관심을 가진 사람이 많은 반면에 이 이론을 정확히 이해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 이유에 대해서 러셀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상대성 원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 조상 아마도 인류발생 이전부터 물려받아 왔던 것이며 우리가 어릴 적에 배운 심상의 변화가 필요한데, 우리는 이 변화 없이 [상대성 원리에 대한] 상상이 잘 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가 상대성 원리를 이해하기 힘든 것은 절대성 중에서 많은 부분이 타파되어 왔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사고가 아직까지 절대성을 바탕으로 한 원리에 지배되고 있는 부분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중국의 사하로프라고 불리는 팡리지(方勵之)는 『뉴턴 법칙에서 아인슈타인의 상대론까지』에서 "과학은 믿되 유아시절부터 품어 온 생각들은 버려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는 그 버려야 할 생각들이 절대성의 오류임을 암시하면서, 이 책을 통해 아리스토텔레스의 이전부터 인류가 생각해온 절대성의 오류들을 하나씩 타파해 가는 과정을 드러내고 있다.
절대성의 타파에 대한 예로서 아리스토텔레스의 공간방향 상대성을 들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공간방향 상대성은 다음과 같다. 고대인들은 지구가 평평한 물체(거북이 등과 같이)이며 반대편(거북이의 배)에는 사람이 살 수 없음을 당연하게 받아 들였다. 왜냐하면 그쪽에 있는 사람들은 끝없는 공간으로 떨어져 버리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리스토텔레스는 지구가 둥글며, 반대편에 있는 사람도 떨어지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이것은 위와 아래라는 공간방향이 절대적이라는 상식의 타파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생각한 공간방향은 상대적이며, 어떤 사람이든지 그가 서 있는 곳(기준이 되는 사람과 반대편에 있다고 하더라도)에서 머리 방향이 항상 위쪽이 된다. 즉 위와 아래라는 것이 어느 고정된 시각으로부터 절대적으로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서 있는 사람에 따라서(그 사람이 기준이 되어) 상대적으로 정해진다. 이것은 공간방향의 절대성에 지배되어 있는 사람들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이런 면에서 역시 아리스토텔레스는 열린 사고의 소유자였다.
공간방향이 어느 고정된 시각으로부터 절대적으로 정해져 있다는 식의 사고를 벗어난다는 것이 중요하다. '고정된 시각'을 절대화시켜 진리라 하고 이 시각 이외의 다른 시각을 진리가 될 수 없다고 사고하는 한, 공간방향에 대한 진리는 파묻히게 된다. 결국 공간방향에 대한 진리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고정된 시각이 있을 수 없다는 사고의 전환이 있어야 한다. 사고의 전환은 쉽지 않다.
그런데 왜 고정된 시각에 대한 믿음이 생겼는가? 이것은 두 가지 전제의 믿음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물론 이 두 가지는 잘못된 전제이며, 이 잘못된 전제인 두 가지 믿음은 신화에 대한 믿음과 객관화에 대한 믿음이다. 이러한 믿음의 잘못을 타파하지 않고는 화이트헤드 유기체의 철학에 접근할 수 없다. 이것의 잘못을 모르는 데서 오류가 발생하게 된다. 그래서 화이트헤드는 그 두 가지 믿음의 잘못은 결국 추상을 구체로 오해한데서 기인한 것으로 보고 '구체자로 전도된 오류'fallacy of misplaced concreteness라고 지적한다. 그리고 추상된 객관에 대해서는 수정된 주관주의 원리로 그 대안을 제시한다.
첫째, 신화에 대한 믿음은 인간보다는 강한 존재로서의 신에 대한 믿음이다. 이러한 믿음은 고대인들에게 있어서 자연스러운 것이다. 즉 그들은 자연의 거대한 힘 앞에 나약한 존재였기 때문에, 그 자연을 움직일 만큼 거대하고 큰 힘이 있는 존재를 믿어 의심치 않았다. 따라서 인식에 있어서도, 나약한 각 개인이 보는 시각보다 거대하고 큰 힘을 가진 존재가 보는 시각을 더 믿게 된 것이다. 이러한 믿음은 공간방향에 대한 사고에도 영향을 미치게 된다. 즉 공간방향에 대해서 불완전한 각 개인의 시각보다는 거대하고 큰 힘을 가진 존재의 시각을 더 믿는 것이다. 여기서 나는 이 거대하고 큰 힘을 가진 존재를 거인이라고 부르겠다. 왜냐하면 이 자는 거대하고 큰 힘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인간처럼 사고하는 힘을 가졌다고 사람들이 믿기 때문이다. 그래서 공간방향도 이 거인의 시각에서 보았을 때, 상하좌우는 고정되어서 불변이며 절대적인 것이다. 이 거인은 지구를 한 마리의 거북이처럼 작게 볼 정도로 크다. 그래서 거북이 등에는 인간이 살아갈 수 있지만, 거북이 배에는 인간이 살아갈 수 없다고 본다. 실제로는 있지도 않은 이러한 거인의 존재를 암암리에 믿고, 그 거인의 시각을 참된 것으로 여겨 고정시켜 놓은 데서 공간방향 절대성이 나타나게 되었다.
둘째, 객관화에 대한 믿음은 거인이 보는 시각에서 신화적인 요소를 뺀 것이다. 객관화는 거인이라는 신의 존재 대신에 평범한 인간 일반이라는 말로 대체된 것이다. 즉 모든 인간들이 그렇게 본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시각도 정확하게 거인이라는 객관자가 보는 것과 내용은 같다. 다만 거인으로서의 두려운 존재라는 부분을 생략하고 오직 그의 눈만 빌린 것이다. 그리고 그의 눈을 '객'이라 하고, 눈으로 보는 것을 '객관'이라고 이름 붙인 데 불과하다. 그렇게 명칭을 사용하면서 이번에는 그 '객'을 '거인의 눈'에서 '평범한 인간 일반의 눈'으로 바꾸어 그 권위는 유지되었다. 그 권위 때문에 사람들은 이 눈을 각 개인의 눈보다 더 정확한 것으로 신뢰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신뢰는 그 바탕부터 잘못되었다. 물론 잘못은 그러한 관찰자가 있다는 믿음에서 비롯되었다. 그런데도 이러한 객관화에 대한 믿음은 '과학적'이라는 명목으로 포장되어 계속 오류를 범하고 있다. 그래서 화이트헤드는 이러한 허구를 지적하고 주관주의 원리를 주장하게 된다. 여기에 대해 상세한 것은 Ⅲ부 2장에서 언급할 것이다.
공간방향의 상대성을 인정한 아리스토텔레스도 공간위치의 절대성을 벗어나지 못하였다. 여기서 말하는 공간위치의 절대성이란 지구를 우주의 중심으로 고정시켜서 지구에게 절대적인 중심 위치를 부여하는 것이다. 이 공간 위치의 절대성(지구 중심성)은 코페르니쿠스, 갈릴레오, 뉴턴 등의 상대성 원리가 나타남으로써 타파되었다. 이들의 상대성 원리는 공간 안에 있는 어떤 사물도 우주의 중심적 위치에 놓여질 수 없으며, 그런 면에서 모든 공간이 위치에 있어 균일하다는 것이다.
공간의 위치가 균일하다는 것은 공간을 중심과 주변으로 구분할 수 없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공간위치 상대성을 인정하게 되면, 공간을 중심공간과 주변공간으로 구분할 수 없다는 것이다. 반대로 공간 위치의 절대성을 인정하면, 절대 중심공간이 있게 된다. 이 때의 절대 중심공간에 위치한 사물은 우주의 중심에 놓여 있기 때문에 움직이지 않는다. 거기에 비해서 주변 공간에 위치한 사물들은 중심 공간에 위치한 사물을 중심으로 움직인다. 지구를 중심공간에 위치한 사물로 보고, 나머지 모든 사물이 이 지구를 중심으로 움직인다고 보는 것은 이러한 '공간 위치의 절대성'을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공간 위치의 절대성은 물체의 운동을 지배하는 모든 자연법칙의 영역에서, 공간 내의 특정의 위치가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고 믿는데서 생긴다." 여기서 말하는 '공간 내의 특정 위치가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는 것'은 바로 위에서 말한 중심 공간으로서의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특정 위치가 아닌 것은 그런 역할을 당연히 하지 못한다. 이렇게 특정 위치에다 절대성을 부여함으로써 상대적으로 다른 위치들은 그 특정 위치와 동등하지 못하게 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우주 공간을 두 부분으로 나누었는데, 그것은 '달 위'(달 보다 더 멀리 떨어진) 부분과 '달 아래'(달 보다 더 가까이에 있는) 부분이다. 태양, 달, 그리고 별과 같은 천체물의 자연적 위치는 천구(天球)의 각기 다른 층에 고정되어 있고, 천구가 원운동을 함에 따라 이들도 함께 원운동을 하게 된다. 지표면 근처에서의 모든 물체의 자연적 위치는 지구 중심이고, 이것이 물체가 지면을 향해 떨어지려는 경향을 설명해 준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우주 공간을 두 부분으로 나누고, 그 각 부분마다 중심으로서의 역할을 하는 자연적 위치가 있다고 한다. 그리고 주변의 모든 물체는 그 자연적 위치로 떨어지려는 경향을 가졌다고 한다. 그는 이 경향 때문에 운동이 발생된다고 말한다.

따라서 모든 물체가 각기 자연이 할당한 고유의 위치(자연적 위치)를 가지고 있으며, 장애물이 없다면 물체는 그 위치에 도달할 것이다. 물체가 운동을 하고 있는 이유는 그것이 아직 자연적 위치에 도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절대적인 중심 공간을 설정하여 운동의 원인을 설명함으로써 공간에서 각각의 위치는 균일하지 못하고 각기 다른 역할을 하게 된다고 보았다. 즉 위치에 따라 중심으로서의 역할과 주변으로서의 역할에 차이가 생기게 된다. 이 때 중심에 위치한 물체는 정지한 것으로 나타나고, 주변에 위치한 물체는 움직이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런데 문제는 공간 위치의 절대성을 인정했을 때, 정지한 물체와 움직이는 물체가 정해진다는 것이다. 이것 때문에 위치의 절대성을 가지는 지구는 움직이지 않고 지구 주변의 모든 물체는 움직인다는 가설이 진리로 받아들여진 것이다. 이것은 간단히 다음의 예에서도 살펴볼 수 있다.
플랫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이지만, 우리는 차 창가에 앉아서 옆의 기차가 움직이는 것을 본다. 그런데 조금 지나서 옆의 기차와 플랫폼은 그대로 있고 내가 탄 기차가 움직였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경우가 있다. 이것을 알게 된 것은 내가 탄 기차와 옆의 기차가 아닌 플랫폼이라는 제3의 광경을 내가 보았기 때문이다. 즉 옆의 기차와 플랫폼이 그대로 있고 내가 그들로부터 멀어지고 있음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에 플랫폼을 보지 못했다면 내가 탄 기차가 움직인다는 사실을 알 수가 없다.
위의 경우에 우리는 플랫폼이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을 미리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 움직이지 않는 플랫폼과 옆의 기차가 공간적으로 함께 묶여 있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내가 탄 기차가 움직인다고 판단한다. 그러나 플랫폼이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을 전제로 하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가? 그래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예상할 수 있다. 만약에 내가 탄 기차가 정지해 있고, 플랫폼과 옆의 기차가 함께 움직인다면 어떻게 판단해야 하는가? 내가 탄 기차가 움직인다고 판단해야 하는가, 플랫폼과 기차가 함께 움직인다고 판단해야 하는가? 그리고 반대로 플랫폼과 옆의 기차는 정지해 있고, 내가 탄 기차가 움직인다면 어떻게 판단해야 하는가? 내가 탄 기차가 움직인다고 판단해야 하는가, 플랫폼과 기차가 함께 움직인다고 판단해야 하는가?
앞에서는 플랫폼의 위치가 공간적으로 고정되어 있다고 가정했기 때문에 그것과 견주어 어느 쪽의 기차가 움직이는지를 알 수 있지만, 지금의 경우에는 알 길이 없다. 만약에 어느 쪽이 움직이는지 알려면 어떤 고정된 위치가 있어야 한다. 이렇게 어떤 특정의 위치가 공간적으로 고정되어 있음을 전제하는 것은 공간 위치 절대성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코페르니쿠스, 갈릴레오, 뉴턴 등은 이러한 절대성의 근거가 없다고 주장한다.
코페르니쿠스는 전체 우주의 중심으로서의 지구의 절대적 중요성을 반박했다. 갈릴레오는 상대성 원리를 명쾌히 주장했다. 뉴턴은 심지어 '달 위' 하늘과 '달 아래' 하늘이라는 구분을 거부했는데, 사과가 떨어지는 것과 달이 지구를 중심으로 원운동을 하는 것과 같은 원인 ― 그들의 '자연적 위치'로 돌아가려는 성질이 아닌 다른 원인[만유인력의 법칙] ― 에 의해 일어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뉴턴의 방정식에는, 어떤 위치도 우주의 중심이 되는 특권은 갖지 않는다. 즉 모든 시공점space-time point들은 동등하다. 물리법칙들은 어느 시공점에서 고찰하여도 동일하게 남는다. 이것이 시공간에 대한 새로운 개념에 있어서의 상대성이다.

이들은 이러한 공간 위치의 절대성을 부정하고 어떠한 위치도 운동의 구심점이 되는 특권이 없다고 주장한다. 이들은 이렇게 주장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첫째, 모든 공간 위치가 동등하다고 하면 운동을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공간을 중심공간과 주변공간의 두 공간으로 나누고, 주변 공간에 있는 물체는 중심 공간에 있는 물체 쪽으로 떨어지는(자연적 위치로 돌아가려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운동이 있는데, 이제 중심과 주변의 구분이 없다면 운동을 설명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뉴턴은 모든 물체는 서로간에 당기고 있다는 만유인력의 법칙을 주장하게 된다. 즉 중심 위치 쪽으로만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모든 물체들은 동등하게 서로 서로 당기고 있다는 것이다.
둘째, 공간 위치에서 중심을 차지하기 때문에 움직이지 않는다고 믿고 있는 지구도, 이렇게 움직이지 않는 위치가 있다는 절대성을 부정하면 상대적으로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이 된다. 즉 내 눈에는 해와 달 등 천체가 움직이고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내가 있는 지구도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이다. 만약에 이렇게 내가 타고 있는 지구가 움직인다면, 지구 위에 있는 사람은 왜 그것을 감지하지 못하는가에 대한 해명이 있어야 한다. 이 해명은 1632년에 갈릴레오가 출판한 『프톨레마이오스와 코페르니쿠스의 두 대우주 체계에 관한 대화』에 잘 나타나 있다. 여기에는 지동설 학파의 일원이던 살비아티Salviati가 큰 배의 예를 들어서 잘 해명하고 있는 대목이 있다.
이들의 사고 속에 이러한 공간위치의 상대성이 주어짐으로써 비로소 천동설과 대비된 지동설에 대한 상상이 가능하게 된다. 사람들이 공간 위치의 절대성에 사로 잡혀 있는 이상, 그들이 살고 있는 지구는 우주의 중심 위치를 차지하고서 정지해 있으며, 지구 주변의 별들은 지구를 중심으로 움직인다는 사고의 틀이 무너지지 않는다. 그런데 이러한 공간 위치의 절대성이라는 틀을 무너뜨리고 모든 공간 위치가 균일하다는 상대성을 받아들임으로써 지구가 움직이는지, 지구를 둘러싼 다른 별(태양)이 움직이는지 알 수 없다는 사고를 갖게 된다. 이 사고를 갖게됨으로써 비로소 지구가 움직일 수 있다는 발상이 가능해 진다. 그 다음은 천체의 운행을 양쪽 시각(천동설과 지동설)에서 관찰했을 때, 더 잘 맞아 들어가는 학설을 택하는 일만 남게 된다. 어쨌든 공간 위치의 상대성이 나타남으로써 천동설과 함께 지동설도 가능하게 되었고, 그 이후 천체에 대한 더욱 세부적인 관측을 통해서 드디어 지동설이 현실성을 띄고 나타나게 된다.
논자가 여기에서 주목하고 싶은 것은 공간 위치의 절대성을 무너뜨리지 않는 이상 지동설에 대한 상상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이다. 공간 위치의 상대성을 인정해야 천동설도 가능하고, 지동설도 가능해진다. 또는 천동설도 틀릴 수 있고, 지동설도 틀릴 수 있다. 마치 이것은 플랫폼이 정지(중심 공간으로 고정)되어 있다는 절대성을 무너뜨리고 상대성(플랫폼도 움직일 수 있다는)의 입장에 서게 되면, 내가 탄 기차가 움직이는지 옆의 기차와 플랫폼이 함께 움직이는지 알 수 없게 되는 것과 같다. 즉 지구가 움직일 수 있다는 발상에는 공간 위치의 상대성의 의미가 전제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상대성에 대한 전제는 또한 공간 위치의 절대성에 대한 의문에서 시작된다. 공간 위치의 절대성에 대한 의문을 할 수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역시 천재들의 발상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하나의 절대성을 무너뜨리면서 새로운 상대성을 이루어내는 이들의 발상도 그것이 나타나기까지는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한다.
그런데 공간 위치의 상대성까지 인정한 뉴턴도 여전히 시간과 공간이 절대적으로 균일하다는 관념에 지배되어 있다. 이러한 시공간은 어떤 외적 상황(사물)에도 영향을 받지 않고 균일하기 때문에 절대 시공간이라고 한다. 그러나 시간과 공간이 외적 상황(사물)에 영향을 받아서 균일하지 않다는 것이 아인슈타인에 의해 밝혀지게 된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내가 나타내고 싶었던 바는, 공간-시간은 물리적인 현실의 실제 대상물과는 무관한 별개의 존재가 아니라는 점이다. 물리적인 대상물은 공간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공간적으로 펼쳐져 있다.

그는 시공간의 절대성을 타파하고 시공간의 외적 상황(사물)에 대한 상대성을 주장한 것이다. 과연 공간은 절대적으로 균일한가? 여기서 공간이 균일하다는 것은 공간과 공간 사이가 바둑판처럼 반듯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휜 공간이 없다는 것이다. 만약에 휜 공간이 있게 되면 그 공간은 직선이 아니고 곡선이 된다. 또한 그 공간의 바둑판 중에는 보통의 칸보다 넓은 칸이 있거나 좁은 칸이 생기게 되면서 균일하지 않게 된다. 공간도 휠 수 있으며, 또한 수축되거나 늘어날 수 있다는 것을 아인슈타인은 상대성 이론에서 밝히게 된다.
시간은 과연 절대적으로 균일한가? 여기서 시간이 균일하다는 것은, 시간이 우주의 창시 때부터 우주가 소멸할 때까지 하나의 직선으로 이어져 있으며 그 간격도 일정하다는 것이다. 우주에 시간은 과연 하나밖에 없는가? 그리고 그 시간의 간격이 균일해서 짧아지거나 길어지지 않는가? 즉 관측자가 이동하거나 관측 대상이 이동할 때도 시간은 변하지 않고 균일할 수 있는가? 아인슈타인은 관측자나 관측 대상자가 이동할 때는 그 속도에 따라 시간이 변한다는 것을 밝혀내었다.
시간이 변한다든지 공간이 휜다는 것은 시간과 공간이 아무 관계없이 독립적으로 존재한다는 고전역학의 인식을 갖고 있는 한 이해하기 힘든 것이다. 이러한 인식을 타파하는데는 민코프스키의 '4차원' 세계에 대한 학설이 공헌했다. 이 때의 4차원 세계를 '4차원의 시공연속체'라고도 한다. 민코프스키의 이 학설이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과 일치되는 것은 당연하다. 아인슈타인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상대성 이론이 제시되기 전에는, 물리학에 있어서의 시간이 공간좌표와는 아무 관계가 없는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으로 인식되었기 때문에, 위와 같은[민코프스키가 언급한] 의미로 세계를 4차원이라고 하는 데 우리는 익숙지 못했던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우리는 시간을 하나의 독립된 연속체로 취급하는 관습에 젖어 있었다는 것이다. 고전역학에 따르면, 사실상 시간은 사건의 위치나 좌표계의 운동과는 무관한 절대적인 것이다. ······
'세계'를 4차원으로 생각한다는 것은 상대성 이론에 의하면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이다. 왜냐하면 상대성 이론에서는 시간의 독립성이 상실되기 때문이다.

고전역학에서는 시간이 사건의 위치나 좌표계의 운동과는 무관하다. 즉 시간은 그 자체로 주변의 상황과 무관하게 절대적인 것이다. 그리고 고전역학의 대표적인 뉴턴 물리학은 사물뿐만 아니라 공간과 시간도 독립적이고 실제적인 존재로 여긴다. 그러나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에서는 이러한 시간의 독립성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의 상대성 이론에서는 시간이 공간좌표와 무관하지 않으며, 공간이 사물과 무관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주장은 일찍이 데카르트가 하였다. 데카르트의 공간은 연장extention과 동일하다. 그리고 연장은 물체와 관련된다. 따라서 그에 의하면 물체가 없는 공간은 없으며, 공허한 공간이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데카르트가 이렇게 주장한 것은 누구나 직접적으로 경험할 수 없는 공간과 같은 사물에 실재를 귀결시켜서는 안된다는 느낌 때문이다. 데카르트의 주장은 뉴턴 등에 의해 부정되었지만 아인슈타인에 의해 다시 긍정되기에 이른다.
우리가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원리를 이해하기 힘든 것은 유아시절부터 품어온 시공간의 절대성을 쉽게 타파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것을 타파하기 위해서는 시간, 공간, 사물들에 대한 기본 개념과 그들의 관계에 대한 잘못된 사고를 고쳐야 한다. 이러한 잘못된 사고는 이들(시간, 공간, 사물과 그들의 관계)에 대해서 너무 단순하게 여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화이트헤드는 과학의 목적이 복잡한 것을 단순하게 설명하는데 있는 것은 인정하지만, 그 설명이 단순하다고 해서 사실들도 실제로 단순하게 되어 있다고 오해해서는 안되며, 그 단순한 설명을 의심해보는 것이 당연하다고 말한다.

과학의 목적은 복잡한 사실들에 대한 가장 단순한 설명을 찾는 것이다. 예의 문제의 목표가 단순성이라는 이유 때문에 사실들이 단순하다고 생각하는 오류에 빠지는 우려가 있다. 모든 자연철학자의 생활 신조는 단순성을 찾고 그것을 의심하는 것이 되어야 마땅하다는 것이다.

절대적으로 균일한 시간과 공간, 즉 절대 시공간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과, 물질은 단순히 시공간 속에서 어떤 영역을 점유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극도로 단순화된 이론이며 상식이다. 이것에 대해서 의심을 가져야 한다.
어떤 한 물질은 다른 물질과 관계없이 그 시간과 그 공간에 단순히 정해진 위치(공간의 어느 점과 시간의 어느 시점)를 차지하고 있는가? 화이트헤드는 절대 시공간이나 상대 시공간에 관계없이 물질이 단순히 일정한 시공간을 점유하고 있다는 것을 단순정위라고 한다.

단순정위란, 물질이 다른 여러 존재자들에 대해 단순히 그러한 위치 관계를 갖는 것으로 기술될 수 있으며, 그 다른 여러 존재자들에 대한 유사한 위치관계로 이루어지는 다른 여러 영역에 관련시켜서 설명될 필요가 없다고 하는 특성이다.

이렇게 물질은 자기가 속한 시공간과 관련되고 다른 시공간과는 관련이 없다고 주장하는 것을 화이트헤드는 단순정위의 오류fallacy of simple location라고 하면서 이것의 모순을 지적하고 있다. 단순정위를 인정한 시각에서 보면, "세계는 질료나 물질 ― 이보다 더 미세한 소재를 포함시킨다면 에테르와 같은 것 ― 의 순간적인 배치구조들의 계기가 된다." 이러한 순간적인 물질적 배치구조의 단순정위에 대해 베르그송은 '지성에 의한 실재의 공간화에 기인하는 자연의 왜곡이라고 지적한바 있다.

순간적인 물질적 배치구조의 단순정위는 그것이 구체적 자연의 근본적인 사실로 간주되는 한, 베르그송이 강력하게 비난했던 개념이다. 그는 그것을 지성에 의한 실재의 공간화에 기인하는 자연의 왜곡이라고 주장한다. 나는 베르그송의 비난에 동의한다. 그러나 나는 그러한 왜곡이 지성에 의한 자연 파악에 필연적으로 따르게 되는 해악이라고 본 점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나는 다음의 여러 장에서, 이러한 공간화란 보다 구체적인 사실을 매우 추상적인 논리적 구조물의 형태로 표현하는 데서 생겨나는 것임을 밝히려고 노력할 것이다.

화이트헤드는 단순정위에 대한 베르그송의 비난에 동의하지만, 이러한 단순정위가 베르그송이 주장하는 것처럼 지성에 의한 파악에 따르는 해악이 아니라, 이것은 구체적인 것을 추상적인 논리적 구조물의 형태로 표현하는 데서 일어난다고 주장한다. 다시 말하면, 단순정위란 추상적인 논리적 구조물에 불과한데, 이것을 구체적인 것으로 잘못 이해한 데서 오류가 발생한다는 것이다.
화이트헤드는 자연에 있어서 어떤 물질이라도 다른 물질에 내재한다는 이론을 주장한다. 이렇게 되면 물질은 당연히 단순정위되지 않는다. 즉 어떤 물질이라도 특정의 시공간적 영역에만 있다고 말할 수 없게 된다. 그리고 그는 단순정위의 개념은 시공간에 대한 절대론적 견해와 상대론적 견해와는 무관하게 성립되는데, 이 개념은 계속해서 비판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나의 물질이 단순정위 한다는 말은 다음과 같은 것을 의미한다. 즉 그 물질이 지니고 있는 여러 시공적 관계를 표현하려 할 때, 다른 공간의 영역과 다른 시간의 지속에 대해서 그 물질이 가지고 있는 본질적 관련을 떠나서 그 물질은 그것이 존재하고 있는 곳, 즉 공간의 어떤 유한한 특정 영역에, 그리고 시간의 어떤 유한한 특정한 지속 내부에 존재한다고 말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것이다. 또한 이 단순정위의 개념은 시간과 공간에 대한 절대론적 견해와 상대론적 견해 사이의 논쟁과 무관하다.
      
아인슈타인은 자연에 있어서 가장 기본이 되는 시간, 공간이 물질과의 관계에서 상대적이라는 것을 밝히고, 화이트헤드는 시공간의 상대성에 더하여 물질도 상호간에 내재함으로써 단순정위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밝힌다. 그는 물질이 단순정위되지 않는다는 것을 후기 형이상학 시기에 보편적 상대성 원리로 정착시킴으로써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과 구분 짓는다.

 2.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과 화이트헤드의 상대성 원리


이 장에서는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이 물리적 상황(물질, 시간, 공간)에만 적용되기 때문에 빛과 중력의 절대성이 유지되고 있는데 비해, 화이트헤드의 상대성 원리는 존재론에까지 확대하여, 그러한 절대성을 부인하고 있는 것에 관해 고찰하고자 한다. 그리고 이러한 고찰을 통하여 화이트헤드의 보편적 상대성 원리의 의미를 보다 뚜렷이 나타내고자 한다.
시공간의 상대성을 주장한 아인슈타인도 물체(중력장)의 절대성을 포기할 수 없었다. 아인슈타인은 『상대성 이론』의 부록 Ⅴ부에서 "장(場)이 없는 공간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과 "물리적 현실에서 장 법칙은 순수한 중력장에 대한 법칙의 일반화로 생각하게 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는 "물체의 개념 형성이 우리의 시간과 공간의 개념 형성에 앞서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래서 로버트 팔터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아인슈타인은 물질(또는 중력장)이 존재론적으로 시공간보다 우선이고, 사건은 단순히 입자들의 세계선(world line)의 교차점이라고 주장한다. 화이트헤드는 사건이 존재론적으로 시공간에 우선하고, 물질은 단순히 어떤 사건의 부수적인 특징이라고 주장한다.

아인슈타인에게 있어서 사건은 입자(물질)들이 세계선에서 만나는 교차점에 불과하다. "세계선은 시공 4차원(공간 x,y,z와 시간 t)에서 나타나는 입자로서의 1점인 세계점들의 궤적을 말한다. 입자들은 이렇게 시공 4차원에서 세계점으로 나타나고, 이 점들은 궤적을 그리면서 세계선으로 나타난다." 그런데 아인슈타인에게 있어서 사건은 입자들의 만남이다. 따라서 사건은 세계선의 교차점이 된다. 그는 사건 개념의 한 예로서 '번개가 치고 있음'을 들고 있다. 이것은 아인슈타인의 사건이 어디까지나 사물들의 외적관계임을 나타낸다. 즉 아인슈타인에게 있어서 번개가 친다는 사건은 음전기를 띤 물체인 구름과 양전기를 띤 물체인 구름과의 만남(관계)에서 비롯된 것이다.
여기에 비해 화이트헤드는 사건 개념의 한 예로서, 이집트의 대피라밋을 들고 있다. 화이트헤드가 대피라밋을 사건이라고 할 때, 그 개념에는 두 가지가 전제되어 있다. 첫째, 화이트헤드는 그 대피라밋이 외부의 대상들을 수용해서 자기의 것으로 만들어 가고 있는 유기체와 같다고 보는 것이다. 즉 보통의 생물들이 생존하기 위해 무기물이나 유기물을 수용하는 것과 같이 대피라밋도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다는 것이다. 둘째, 화이트헤드는 이러한 사건을 가장 실재적인 존재자의 활동으로 보며, 이것보다 더 실재적인 것은 없다고 본다. 그래서 화이트헤드에게 있어서 자연철학 시기의 이러한 사건 개념은 형이상학 시기에 현실적 생기生起actual occasion 또는 현실적 존재자actual entity라는 개념으로 대치된다.
화이트헤드에게 있어서 현실적 존재자는 외부의 대상들을 자신의 내부구조로 끌어들인다. 이때의 주체인 현실적 존재자와 주체 앞에 놓여진 대상들은 내적관계를 갖는다고 말한다. 화이트헤드는 이렇게 주체인 현실적 존재자가 자신 앞에 놓여진 대상들을 자신의 내부구조로 끌어들여서 자신을 형성해 가는 것을 사건이라고 한다.
결국 아인슈타인과 화이트헤드는 사건을 시공간보다 존재론적으로 우선하는 것으로 본다. 그렇지만 아인슈타인은 물질을 우선하는 것으로 보고 화이트헤드는 사건을 우선하는 것으로 본다. 따라서 화이트헤드의 사건은 현실적 존재자의 내적관계로서 본질적이며 필연적 관계이고, 아인슈타인의 사건은 존재자인 물질들의 외적관계로서 부수적이며, 우연적 관계이다. 즉 '우연히 일어남'happening이다. 화이트헤드는 『상대성 원리』에서 아인슈타인과의 차이점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사건들의 의미관련significance은 더욱 더 복잡하다. 먼저 사건들은 서로 상호간에 의미관련되어 있는 것이다. 사건들의 일정한 의미관련은 그렇게 사건들의 일정한 시공간적 구조가 된다. 이러한 점에 있어서 우리는 이 구조를 우연적 관계로부터 발생하는 우발적인 이질성으로 가정하는 아인슈타인과 의견을 달리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사건들의 의미관련은, 대상이 식별하는 주체인 신체와의 내적관계를 가지는 사건 속에서 의미가 생긴다. 그런데 바로 그러한 내적관계를 가짐 자체가 사건이기 때문에 사건들은 상호간에 의미관련되어 있다. 그리고 대상과 주체와의 내적관계는 필연적 관계이다. 왜냐하면 이 관계를 하지 않으면 사건 자체가 성립되지 않기 때문이다. 화이트헤드에게 있어서 의미관계는 내적관계이며 필연적이다. 자신의 논문 「의미의 분석」에서 그것을 밝히고 있다.  

열 개의 손가락들과 수십 억의 별들, 그리고 무수한 원자들 사이에는 의미 있는 관계들이 있다. 개별적 사물 집단들의 특정 다수성들의 상호 관계들은 역사의 우유(偶有)들 사이의 의미 있는 관계들로 귀결되는 형이상학적 필연성에 대한 가장 명료한 예를 구성한다.

화이트헤드의 의미관련을 인식론적으로만 보아서는 안된다. 달리 말하면 의식을 가진 존재자에게 어떤 대상이 의미를 가지는 것으로 해석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의식적 차원이 아니다. 의식 이전의 문제이며 존재론적 차원까지도 포함한 것이다. 의미관련은 위에서 예를 든 손가락, 별, 원자 등이 자신의 존립을 위해서 타자들과 내적관계를 가짐을 말한다. 그들은 자신 앞에 놓여진 다수성(대상)을 주체로서 받아들여 의미 있게 만드는 것이다. 의미 있게 만든다는 것은 주체가 대상을 자신의 내적구조 속으로 받아들여 지금까지 없었던 새로운 자신을 창조하는(만드는) 것이다. 이것을 화이트헤드는 사건이라고 한다.
화이트헤드의 사건은 주체와 대상 사이에서 이루어진다. 즉 자신의 구조 속으로 대상을 수용하는 주체와 그 주체에게 수용되는 대상과의 내적관계이다. 따라서 사건들의 구조는 주체가 대상들을 관계항으로서 수용할 때 이루어진다. 이 때의 기본적인 관계항은 연장延長extention과 공액共 cogredience이다. 이 때의 연장은 공간성에 가까우며, 공액은 시간성에 가깝다. 그러나 연장의 개념 속에도 시간이 들어 있으며, 공액 속에도 공간이 들어 있다. 따라서 사건은 연장된 채로 연속된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화이트헤드는 관계의 일반적 도식으로서 연장적 연속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즉 기본적인 관계항으로서 공간성을 표현하는 연장과 시간성을 표현하는 연속체(위의 용어로는 공액)를 함께 표현한 것이다.
"공액은 그 지속 내에 있는 입각점의 해체되지 않은 특질의 보존이다."즉 현재 속에 들어 있는 과거의 특질이며, 미래까지 해체되지 않고 지속되는 특질의 보존이다. "사건을 식별하는데 있어서 우리는 역시 사건들의 구조 속에 있는 관계항으로서 그 사건의 의미관련을 인식한다. 이 사건들의 구조는 연장과 공액이라는 두 관계에 의해 관련된 사건들의 복합체이다."
아인슈타인은 물질들 사이의 외적관계인 사건들에서 시공간을 찾기 때문에 사건들 사이의 측정 문제에 있어서 절대성을 가진 빛 현상을 중심으로 상대성을 전개한다. 그리고 그는 이 상대성이 거시 물질들의 외적 상호관계를 다루는 중력의 공식과도 일치함을 밝히는데 주력한다.

시간과 공간을 관련시키는 색다른 공식의 형식으로 나타나는 상대성은 제일 먼저 빛 현상을 포함하는 전자기학과의 관련에서 전개되었다. 아인슈타인은 이때부터 그것이 중력의 공식과 관계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연구를 해왔었다.

그러나 화이트헤드는 이 점에 대해서 거부하는 입장을 분명히 한다.

(나와 아인슈타인과의) 주된 차이점은 다음과 같은 사실에서 기인한다. 즉 내가 아인슈타인의 일정하지 않는 공간 이론 혹은 빛신호의 특수한 기본적 특성에 대한 아인슈타인의 가정을 용인하지 않는다는 사실에서 기인한다.

화이트헤드는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이 전제하고 있는 측정에서의 근거인 빛의 절대성을 인정하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거시 물질들의 외적 상호관계에서 비롯되는 중력 법칙의 절대성도 인정하지 않는다.

아인슈타인의 기술방식은 수학적으로 매우 단순하며, 오직 하나의 중력법칙 만을 인정하고, 그 밖의 것들은 배척한다. 그러나 나로서는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동시성이나 공간배치에 관한 사실들을 그의 주장과 조화시킬 수가 없다.

이렇게 빛과 중력법칙의 절대성을 화이트헤드가 거부하는 것은 그의 사건 개념이 외적관계가 아닌 내적관계에 그 토대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화이트헤드는 이 점에 대해 『과학과 근대세계』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우리는 이제 여러 사건들 사이의 관계 이론에 도달하였는데, 이 이론은 하나의 사건이 갖는 관계란, 다른 관계항에 관해서는 반드시 그렇지 않다 해도 그 사건에 관한 한 모두 내적인 관계들이라는 학설에 기본적으로 그 토대를 두고 있다. ······ 앞서 말한 내적인 관계는, 어째서 하나의 사건이 바로 그것이 있는 장소에만, 그리고 그러한 존재 방식으로만 발견될 수 있는 것인가, 즉 일정한 조(組)의 관계에 있어서만 발견될 수 있는 것인가를 설명해 주는 근거가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각 관계가 그 사건의 본질에 들어가며, 그래서 그 관계를 떠날 때 그 사건은 더 이상 그 사건일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내적인 관계라는 개념의 의미이다. 과거에는 시공관계가 외적인 것이라고 흔히, 실로 보편적으로 생각했었다. 여기서 부정되고 있는 것은 바로 이러한 생각인 것이다.

화이트헤드가 토대로 하는 것은 모든 사건이 각각 자신에 관한 한 내적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며, 그가 부정하고 있는 것은 사건과 관련된 시공관계가 외적이라는 사고이다. 이렇게 화이트헤드가 토대로 하고 있는 내적관계는 사건이 두 가지 요소로 분석된다는 사실을 내포하고 있다.

내적관계라는 개념은 사건이 두 가지 요소로 분석된다는 사실을 내포하고 있다. 그 하나의 요소는 기저에 있으면서 개체화되는 실체적 활동력이며, 다른 하나는 이 개체화된 활동력에 의해 통일되는 여러 양상들의 복합체, 즉 한 사건의 본질 속에 들어가는 여러 관계들의 복합체이다. 바꾸어 말하자면, 내적관계라는 개념은 여러 관계를 종합하여 사건의 발현적 특성을 만들어 내는 활동력으로서의 실체라는 개념을 필요로 한다. 사건이 사건으로 성립하게 되는 까닭은 그것이 자신 속에 다수의 관계들을 통일하고 있다는 데 있다.

두 가지 요소 중 하나인 실체적 활동력은 주체의 활동력이며, 다른 하나인 양상들의 복합체는 주체에 의해 통일되는 대상들이다. 이 대상들은 관계들의 복합체이다. 이 복합체를 하나의 사건으로 만들어 내는 활동력인 주체 때문에 사건이 성립된다. 그래서 화이트헤드는, 사건이 사건으로 성립되는 까닭은 사건이 자신 속에 다수의 관계들을 통일하고 있다는데 있다고 말한다.
이 때의 사건은 현실적 존재자이고, 내적관계는 파악이 된다. 이 현실적 존재자와 파악은 화이트헤드의 범주도식에서 존재자entity이다. 이러한 존재자는 타자와 독립적으로 있는 것이 아니라 타자와 관계하고 있다. 화이트헤드는 이렇게 관계들을 떠나서 존재자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하나의 원리로 도입하고 있는데, 이것을 상대성 원리라고 한다. 이 원리는 물리적 상황에 적용된 상대성 이론을 존재 자체에까지 적용할 수 있도록 더욱 보편화시킨 것이다.
더욱 보편화된 화이트헤드의 상대성 원리는 아인슈타인도 이해하지 못했다. 이것은 아인슈타인이 자신도 모르게 가지고 있는 사실에 대한 절대성 때문이다. 화이트헤드는 『과정과 실재』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유기체의 철학이 서아시아나 유럽의 사상보다는 인도나 중국 사상의 기조에 더 가까운 것으로 생각된다. 후자 쪽에서는 과정을 궁극자로 보는데 비해, 전자 쪽은 사실을 궁극자로 보고 있다"

과정을 궁극자로 본다는 것은 존재자들이 내적관계를 갖는 과정 중에 있다는 것이며, 사실을 궁극자로 본다는 것은 존재자들의 외적관계를 궁극자로 본다는 것이다. 존재자들의 내적관계라는 과정을 떠나서 존재자가 성립되지 않는다는 불교의 연기(緣起)사상 등은 동양인에게는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지만 서양인에게는 신비로움으로 느껴지며, 학문의 장으로 끌어올 수 없다고 생각할 것이다. 이렇게 서양인들에게는 사실을 궁극자로 보는 뿌리 깊은 인식구조가 있다. 그런데 화이트헤드는 동양인들처럼 과정을 궁극자로 보고 있다. 이런 면에서 화이트헤드 철학이 동양과 서양 철학의 가교(架橋)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다.
과정을 궁극자로 본다고 할 때의 과정은 주체와 대상이 관계하고 있는 과정이며, 이 때의 관계는 바로 내적관계이다. 화이트헤드 상대성 원리의 모체가 되는 것은 내적관계 이론이다. 이 이론은 자연철학 시기에 나왔으나 형이상학 시기에는 파악이론으로 정교화되어 화이트헤드 유기체의 철학에서 핵심이 된다. 파악이론은 파악하는 주체와 파악하는 대상 사이의 관계이론이다.
화이트헤드의 이 느낌(파악 : 내적관계)이론을 위상적으로 해석한 헨리 키튼Henry C. S. Keeton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화이트헤드의 관념의 중요성은 현 20세기나 21세기에는 아마도 실현되지 않을 것이다. 그의 관념들은 이미 한계에 직면한 오늘날의 개념적 조건으로는 받아들이기가 어려우며, 25세기쯤 되어서야 날개를 펼칠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키튼도 느낌(파악 : 내적관계)이론을 분석하면서 이 이론이 이해되려면 몇 세기의 기간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왜냐하면 이것은 앞에서 우리가 살펴보았듯이 인류의 인식구조 속에 고정되어 있는 절대성이 타파되는데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3.화이트헤드의 상대성 원리와 범주도식


이 장에서는 존재론으로 확대한 화이트헤드의 보편적 상대성 원리가 화이트헤드의 범주도식의 한 원리로 정착되는 것을 고찰할 것이며, 그리고 역으로 이 보편적 상대성 원리에 입각해서 화이트헤드 범주도식의 큰 틀이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이유를 고찰해 보고자 한다. 화이트헤드의 범주 도식은 경험을 가장 잘 그려낼 수 있기 위해 도안된 구조이다. 그리고 경험은 대상-주체 구조를 갖고 있으며, 이 때의 대상과 주체는 상대적이다.
화이트헤드의 형이상학 3부작 중 하나인 『관념의 모험』은 4부로 되어 있다. 그 중 3부의 제목이 '철학적 관점에서' 이다. 이 3부 중 첫째 장의 제목이 대상과 주체이다. 이것은 화이트헤드 철학에서 대상과 주체라는 경험의 구조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나타낸다. 그 증거로 화이트헤드는 이 대상과 주체라는 장에서 1절인 머리말을 제외하면 실제적으로 첫째 절에 해당하는 2절의 제목을 '경험의 구조' 로 정하고, 이 경험의 구조가 대상-주체 구조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논자가 주체와 대상이라는 경험의 구조를 가지고 화이트헤드의 상대성 원리와 범주도식을 고찰하고자 하는 이유는 이 대상-주체 구조를 중심으로 그의 철학체계가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논자는 대상-주체 구조에 매개라는 중간 단계를 넣었다. 이것은 과정 자체를 중요하게 여기는 과정철학에서는 당연하다. 또 이 점이 화이트헤드 철학의 특징이기도 하다. 여기서 논자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대상-주체 관계가 경험의 기본적 구조의 패턴이라는 것이다."
"이 대상-주체 관계를 인식자와 인식되는 것과의 관계로 보아서는 안된다." 화이트헤드의 경험은 인간 같은 고등동물이 의식을 갖고 어떤 대상을 인식할 때의 인식자와 그 인식대상을 경험하는 것에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화이트헤드의 경험은 확장된 경험이다. 모든 존재(동물, 식물, 광물, 전자 등의 결합체와 이들의 근저에 놓여있는 현실적 존재자)가 외부 대상을 수용하는 것을 말한다.

경험의 생기(生起)는 하나의 활동이며, 그 생성과정을 연대적으로 구성하는 기능양태로 분석될 수 있다. 각 양태는 활동적 주체로서의 경험 전체와 그 특수활동과 관계되는 사물 내지 대상으로 분석될 수 있다. 이 사물은 하나의 여건, 즉 그 생기 속에 영입된 것과는 무관하게 기술될 수 있는 것이다. 대상이란, 문제되고 있는 생기의 어떤 특수한 활동성을 유발하는, 이러한 여건의 기능을 수행하는 그 무엇이다. 그러므로 주체와 대상은 상대적인 용어이다. 생기(生起)는 대상에 대한 특수활동성이라는 점에서 주체이다. 또한 그것이 무엇이건 간에, 주체 내의 특수한 활동성을 유발한다는 점에서 대상이다.

화이트헤드 철학에서는 실체처럼 주체가 지속되지는 않는다. 어떠한 주체도 대상을 수용해서 자신을 형성하고 나면 즉시 소멸한다. 소멸 후에는 다시 새로운 주체에게 대상이 된다. 이런 면에서 주체와 대상은 상대적이다. 대상을 자신의 생성 속에 영입하는 활동을 할 때는 주체이다. 그러나 이 주체도 자신의 생성이 완성된 후 주체로서의 활동성을 잃고, 다른 주체로 하여금 자신을 받아들이게끔 활동성을 유발하는 대상이 된다.
화이트헤드는 『과정과 실재』에서 "(나의) 형이상학적 체계의 기반인 상대성에 관한 학설에 따르면…"이라고 말하고, "나는 어떤 경우에도 상대성의 견해를 채택할 것이다."고 명시하고 있다. 이렇게 화이트헤드는 상대성 원리를 자연과학에 머물지 않고 존재론적으로 확대한다. 그는 존재론적으로 확대한 상대성 원리를 보편적 상대성 원리라고 명명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보편적 상대성 원리는 '실체는 다른 주체에 내재하지 않는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언명을 정면에서 파기한다. 그와는 반대로 이 원리에 따르면 현실적 존재자는 다른 현실적 존재자들에 내재한다. 사실 우리가 다양한 정도의 관련성 및 무시할 수 있는 관련성을 참작한다면 모든 현실적 존재자는 다른 모든 현실적 존재자에 내재한다고 보아야 한다. 유기체의 철학은 '다른 존재자에 내재한다'는 관념을 명확하게 밝히려는 작업에 주력하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실체는 사물의 궁극적 실재라는 면에서 화이트헤드의 현실적 존재자에 해당한다. 그러나 화이트헤드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실체개념을 그대로 사용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아리스토텔레스의 실체는 다른 주체에 내재하지 않는데 비해서, 화이트헤드의 현실적 존재자는 다른 주체에 내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화이트헤드는 모든 현실적 존재자가 관련성에 있어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모든 현실적 존재자에 내재한다고 본다. 그는 이것을 보편적 상대성 원리라고 하며, 이 원리를 밝히는 일을 그 자신 유기체의 철학에서 주력하고 있다.
화이트헤드는 보편적 상대성 원리를 자신의 범주도식에서 가능태들이 현실태로 되어가는 과정의 원리와 연결해서 설명을 하고 있다. 화이트헤드의 과정에는 합생과정과 이행과정이 있다. 합생과정은 현실적 존재자가 현실태가 되기 위해서 자신 앞에 놓여진 많은 가능태들을 수용하여 하나의 통일체를 생성하는 과정이다. 그리고 이행과정은 통일체로서 생성된 현실태(현실적 존재자)가 그 주체적 직접성을 상실하고 가능태가 되어 계기(繼起)하는(연이어 일어나는) 현실적 존재자의 여건이 되는 과정이다. 이 때의 가능태는 연이어 일어나는 현실적 존재자에게 작용인으로서 역할을 수행한다. 이러한 합생과 이행의 과정이 있기 위해서는 모든 존재가가 다른 존재자의 생성을 위한 가능태가 될 수 있어야 한다. 이렇게 모든 존재자가 가능태로 될 수 있어야 다른 주체(현실태인 현실적 존재자)에 내재할 수 있다. 따라서 화이트헤드의 상대성 원리는 모든 존재자가 다른 현실태에 내재하기 위한 가능태로 될 수 있다는 원리라고 할 수 있다. 화이트헤드는 설명의 범주 ⅳ)에서 상대성 원리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많은 존재자들이 한 현실태로의 실재적인 합생에 있어서 한 요소가 되기 위한 가능태는 모든 존재자들이, 현실적이든 비현실적이든, 갖고 있는 일반적인 형이상학적 특징이다. 그 우주 안에 들어있는 모든 항목들은 각각의 합생과 관련된다. 달리 말하면, 그 항목이 모든 생성을 위한 가능태라는 것은 있음의 본성에 속한다. 이것이 상대성 원리이다.

여기서 화이트헤드는 모든 존재자들이 합생의 한 요소가 되기 위한 가능태가 된다고 했는데, 이 때 가능태로 있는 것을 지칭할 때 있음being이라고 한다. 즉 '있음'은 합생하는 주체에게 합생되기 위한 대상으로 있다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화이트헤드 철학에 있어서 '있음'being, 즉 '무엇인가 있다고 하는 것'은 모든 생성을 위한 가능성, 즉 새로운 존재자를 생성시키기 위한 재료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말은, 어떤 상태로 있든지 '있음'은 홀로 있지 않고 어떤 생성과 관계되기 위해서 있다는 말로 바꾸어도 될 것이다. 따라서 화이트헤드에게 있어서 다른 무엇과도 어울리지 않고 고립된 상태로 있는 것은 없다. 만약에 있다면 그것은 추상에 불과하다.

설명의 범주 ⅳ)에서 〈완전한 추상〉complete abstraction이란 관념은 자기모순이 된다는 결론이 나온다. 왜냐하면 현실적인 것이든 비현실적인 것이든 간에 그 어떤 존재를 완전히 고립된 상태에서 고찰하기 위해 그 존재로부터 우주를 사상(捨象)해 버릴 수는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어떤 존재자에 대해 생각할 때면 언제나 우리는 그것이 무엇과 어울리는지를 묻고 있는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모든 존재자는 저마다 세계 전체에 널리 스며들고 있다.

이렇게 진정한 실재는 모두 서로 관계하고 있다. 그래서 이 관계성을 실재에서 빼버린 추상은 실재가 아니다. 모든 존재자는 서로 관계하고 있기 때문에 완전한 추상은 불가능하다. 즉 관계하고 있는 것을 끊어내어 분리시킬 수가 없다는 것이다. 물론 관념으로는 추상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이해를 돕기 위한 편의상의 분석에 불과하다. 추상은 이해를 돕기 위한 편의상의 분석이지만, 화이트헤드도 그 이해를 돕기 위해서 진정한 실재를 주체와 대상으로 구분하고, 그것들이 관계하는 과정을 분석한다. 그리고 화이트헤드는 이 설명의 범주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덧붙인다.

네 번째 범주(설명의 범주 ⅳ)는 이 학설을 '존재자'entity라는 바로 그 개념에 적용한다. '존재자'라는 개념이 생성의 과정에 기여하는 요소를 의미한다는 것은 이 범주에서 주장된다. 우리는 이 범주 속에서 '상대성' 개념에 대한 극도의 일반화를 발견한다.

물론 네 번째 설명의 범주는 존재론적으로 확대한 보편적 상대성 원리에 대한 설명이다. 존재론적으로 확대되었기 때문에 화이트헤드는 상대성 원리를 존재자의 개념에 적용한다고 말한다. 존재자는 생성의 과정에 기여하는 요소이다. 그런데 위에서 인용한 네 번째 설명의 범주에 따르면, 모든 존재자가 생성의 과정에 기여할 수 있음을 상대성 원리라고 한다. 이것은 화이트헤드가 상대성 개념을 극도로 일반화시킨 것이다.
아인슈타인은 물질, 시간, 공간에 상대성 이론을 적용시켰지만, 화이트헤드는 모든 존재자에게 적용할 수 있도록 일반화시켜서 그의 범주도식 속에 있는 하나의 원리로 정착시켰다. 범주도식 속에 정착된 상대성 원리는 '모든 존재자는 다른 존재자에 내재한다'는 원리이다. 달리 말하면 대상들(모든 존재자)이 주체(다른 존재자)에게 파악(내재)된다는 원리이다. 물론 이 때의 내재한다, 혹은 파악된다는 것은 인식론적 차원일 뿐만 아니라, 대상들을 주체가 파악해서 내적으로 구조화하지 않으면 주체의 존립 자체가 안된다는 존재론적 차원까지도 포함한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러면 이제 화이트헤드 형이상학에서 상대성 원리가 그의 범주도식 안에서 어떻게 적용되는지를 살펴보겠다.
화이트헤드에게 있어서 범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범주처럼 최상류의 개념을 말한다. 그리고 그는 이 최상류의 개념을 구체화하려는 목적으로 범주를 나타냈다. 그래서 화이트헤드는 『과정과 실재』의 범주도식을 시작하는 구절에서 "우리의 반성적인 경험 가운데 불가피하게 전제되어 있는 ― 전제되고는 있지만 좀처럼 표현되어 드러나지 않는 ― 유적 개념을 구체화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 목적과 더불어 "화이트헤드는 범주를 통해서 유기체의 철학을 구성하는 근본 개념들에 대한 예비적 개요를 드러내고자 하는 목적도 가지고 있다."
이러한 두 가지 목적을 충족시키기 위해서 화이트헤드의 범주는 네 가지 형태로 나타난다. 그것들은 궁극자의 범주The Category of the Ultimate, 존재의 범주Categories of Existence, 설명의 범주Categories of Explanation, 범주적 의무Categoreal Obligations이다. 이러한 형태의 범주들에 대해 화이트헤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모든 존재자entity는 존재existence의 어느 한 범주의 특수 사례이어야 하고, 모든 설명은 설명의 범주들 중에 한 특수 사례이어야 하고, 모든 의무는 범주적 의무들 중에 한 특수 사례이어야 한다. 궁극자의 범주는 이 세 가지 보다 더 특수한 범주들에 전제되어 있는 일반적 원리를 표현하고 있다.

우선 화이트헤드는 궁극자의 범주와 다른 세 가지 범주를 구분하고 있다. 궁극자의 범주는 세 가지 특수한 범주들에 전제되어 있는 일반적 원리이다. 이 원리는 우주의 창조적 진전을 표현하고 있다. 유기체의 철학 혹은 과정 철학이라고 불리는 화이트헤드의 철학은 정적인 실체를 궁극적인 것으로 보지 않는다. 과정을 궁극적인 것으로 보고 있다. 이 과정 속에서 구체적으로 무엇이(존재의 범주), 어떻게(설명의 범주), 어떤 조건아래(범주적 의무) 작용하는가에 대해서는 다른 세 가지 범주들을 통해 알 수 있다. 이 범주들에 비해 궁극자의 범주는 바로 이들이 전제하고 있는 근거(이유)인 일반적인 원리이다.



Ⅲ. 범주도식의 원리들과 상대성 원리


화이트헤드는 유기체의 철학을 설명하기 위해서 여러 원리를 들고 있으며, 그 중에서도 과정의 원리, 존재론적 원리, 주관주의 원리, 상대성 원리의 네 가지는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이 원리들은 서로가 서로를 전제하기 때문에, 어느 한 원리를 택해도 나머지 원리들과 연관된다. 다만 이 원리들은 유기체의 철학을 여러 각도에서 조명하여 보다 잘 설명하기 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중에서 과정의 원리는 부동(不動)을 근원적인 것으로 보는 철학에 대한 경계에서 나온 원리이다. 존재론적 원리는 현실적 존재자에서 근거를 찾지 않고, 추상적인 것에서 근거를 찾는 철학에 대한 경계에서 나온 원리이다. 주관주의 원리는 기존철학에서 이미 사용했던 원리이다. 그러나 화이트헤드는 유아론을 극복하기 위해, 감각주의와 결별하고 주체가 우주 전체를 경험한다는 이론으로 확대 수정한다. 따라서 수정된 주관주의 원리는 주체의 경험을 감각적인 것에 한정하고, 이 한정된 경험을 넘어서 객관적인 실재가 있다고 주장하는 철학에 대한 경계에서 나온 원리이다. 상대성 원리는 모든 것이 생성을 위한 가능태, 즉 생성을 위한 여건 혹은 대상이 된다는 원리이다. 따라서 이 원리는 타자의 여건이 되지 않는 절대자 혹은 실체를 인정하는 철학에 대한 경계에서 나온 원리이다. 화이트헤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설명의 범주 1), 4), 18), 27)은 전적으로 동일한 일반적인 형이상학적 진리의 상이한 측면들을 진술하고 있다. 범주 1)은 모든 궁극적 현실태가 그 자신의 본질에 있어서, 알렉산더가 불안정의 원리a principle of unrest라 불렀던 것, 즉 그 생성을 구현하고 있다는 학설을 일반적인 방식으로 진술한 것이다. 범주 4)는 이 학설을 존재자라는 개념 그 자체에 적용하고 있다. 그래서 이 존재자라는 개념은 생성의 과정에 기여하는 요소를 의미한다고 주장한다. 우리는 이 범주에서 상대성 개념에 대한 최고의 일반화를 확보하게 된다. 범주 18)은 모든 특정한 각 현실적 존재자의 생성에 부과되는 의무가 다른 현실적 존재자의 구조 속에서 생겨난다고 주장한다.

설명의 범주 1)은 과정의 원리를 설명한 것이다. "ⅰ) 현실 세계는 과정이라는 것, 그리고 과정은 현실적 존재자의 생성이라는 것. 따라서 현실적 존재자는 피조물이며, 현실적 생기라고도 불린다." 과정의 원리를 불안정의 원리라고 한 것은 현실세계를 구성하는 궁극적 현실태가 부동상태로 안정되어 있지 않고 생성되는 과정 중에 있기 때문에 불안정하다는 것이다. 이것은 유기체의 철학이 안정되어 있는 부동자를 근원적인 것으로 보지 않는다는 것을 시사하고 있다. 그리고 설명의 범주 4)는 상대성 원리를 설명한 것이다. "ⅳ) 있음의 본성에는 모든 생성을 위한 가능성이 속해 있다는 것, 이것은 상대성 원리이다." 상대성 원리는 현실태가 생성되는 과정에 있기 위해서는 생성과정에 기여하는 요소로서의 존재자가 필요한데, 이 때 생성과정에 기여하지 않는 존재자는 없다는 것이다. 이 때의 존재자는 현실적이든 비현실적이든 관계없다. 어떤 상태로 있든지 그것이 있다면 생성과정에 기여하는 요소로 있다는 것이 상대성 원리이다. 이것은 모든 존재자에게 확대 적용한 원리이다. 그래서 화이트헤드는 최고로 일반화를 확보했다고 말한다. 이것을 달리 말하면, 현실세계는 생성과정에 기여하는 요소들(모든 존재자들)이 현실태를 형성하는 과정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유기체의 철학이 생성과정에 기여하지 않는 요소인 절대자나 실체를 존재자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점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존재자로 인정하는 것은 무엇인가? 이 문제에 대해서 상대성 원리가 대답을 하기 때문에, 화이트헤드는 상대성 원리를 존재자라는 개념 그 자체에 적용한다고 말한다. 논자는 이 존재자라는 개념에 대해서 4부 1장 1절에서 상세히 논할 것이다. 이 원리에 따른다면 현실 세계에는 생성 과정에 있는 현실태와 그 현실태의 생성과정에 기여하는 요소로 구분된다. 이 두 가지가 상대적으로 있으면서 관계하는 과정을 떠나서는 아무 것도 없다. 물론 이 때 생성과정에 있는 현실태를 주체라 하고, 생성과정에 기여하는 요소를 대상이라고 한다. 따라서 화이트헤드의 범주는 이 때의 주체와 대상이 무엇이며, 이들이 어떻게 관계하는가를 나타내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궁극자의 범주가 일자(주체), 다자(대상), 창조성(관계시키는 힘)이고, 존재의 범주에 속하는 범주들은 주체, 대상, 매개로서의 존재자이거나 그들의 집합이다. 범주적 의무도 주체, 대상, 매개에 따르는 의무로 구분할 수 있다.
설명의 범주 18)은 존재론적 원리를 설명한 것이다.

ⅹⅷ) 생성과정이 임의의 특정 순간에 순응하고 있는 모든 조건은 그 근거를 그 합생의 현실 세계 속에 있는 어떤 현실적 존재자의 성격에 두고 있거나 아니면 합생의 과정에 있는 그 주체의 성격 속에 두고 있다. 이것이 존재론적 원리ontological principle이다. 그것은 작용인 및 목적인의 원리principle of efficient, and final causation라고 할 수도 있다. 이 존재론적 원리가 의미하는 바는 현실적 존재자만이 근거가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근거를 탐색한다는 것은 하나 내지 그 이상의 현실적 존재자를 탐색한다는 것을 말한다. 그 결과, 과정에 있는 하나의 현실적 존재자에 의해서 충족되어야 하는 조건들은 모두, 다른 현실적 존재자의 실재적인 내적구조real internal constitution에 관한 사실이나, 그 과정을 제약하고 있는 주체적 목적subject aim에 관한 사실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 된다.

과정의 원리에 따라 현실세계는 생성과정이고, 상대성 원리에 따라 생성과정에 속하는 것은 모두 존재자이며, 존재론적 원리에 따라 현실적 존재자만이 근거가 된다. 현실적 존재자가 근거가 된다는 것은 현실적 존재자 이외의 다른 존재자나 집합(다수성)은 현실적 존재자와의 관계를 통해서 자신의 장소를 가진다는 것이다. 만약에 이 관계를 떠나서는 존재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다. 이 원리를 작용인 및 목적인의 원리라고 할 때, 작용인은 대상이 되는 존재자들이 주체에게 작용함으로써 그 존재의 근거를 가지게 하는 원인이며, 그것은 대상이 되는 현실적 존재자의 내적구조를 분석하면 알 수 있다. 그리고 목적인은 주체가 대상을 어떻게 받아들여서 새로운 자신을 만들어 갈 것인가를 결정하는 주체적 목적으로서의 원인을 말한다.
생성과정의 주체인 현실적 존재자는 목적인을 갖고서 영향력을 발휘하고, 생성과정의 대상인 현실적 존재자는 작용인을 갖고서 영향력을 발휘해 간다. 이 이외의 존재자는 그것이 단일체이든 집합체이든 혹은 현실적이든 비현실적이든 모두 이 현실적 존재자와의 관계를 통해 자신의 장소를 확보한다. 그래서 결국 현실 세계는 새로운 현실적 존재자의 생성과정에 있다고 할 수 있다. 화이트헤드 철학은 이렇게 영향력을 발휘하는 현실적 존재자가 모든 조건의 근거이기 때문에 유기체의 철학인 것이다.  
설명의 범주 27)에 대해서는 여기서 화이트헤드가 구체적인 언급을 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 범주를 살펴보면, 파악prehension이라는 개념을 통해서 동일한 원리를 설명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ⅹⅹⅶ) 합생의 과정에는 계속되는 일련의 국면에 있어서, 선행하는 국면에서의 파악들을 통합함으로써 새로운 파악이 생겨난다. 이 통합에 있어 느낌은 자신의 주체적 형식과 여건data을 제공함으로써 새로운 통합적 파악의 형성에 이바지한다. 그러나 부정적 파악은 단지 그 주체적 형식을 제공함으로써 이바지할 뿐이다. 이 과정은 모든 파악들이 하나의 결정적인 통합적 만족의 구성요소가 될 때까지 계속된다.

이것은 과정을 발생적으로 상세히 분석한 것이다. 과정을 발생적으로 분석하면 각 국면은 파악으로 나타난다. 새로운 파악은 선행하는 국면에서의 파악들을 통합하면서 나타난다. 이 때 새로운 파악은 선행하는 파악들의 통합에서의 느낌으로부터 주체적 형식을 이어받는다. 다시 말해, 파악하는 주체가 선행하는 파악들을 대상으로 느끼는 데, 이 때 주체가 대상을 느끼는 방식인 주체적 형식도 상대성 원리에 따라 대상으로부터 주체에게 주어진다는 것이다.



1. 존재론적 원리와 상대성 원리

존재론적 원리는, 존재하는 모든 사물은 현실적 존재자 혹은 현실적 생기이거나 이로부터 추상되어 파생된 것으로 보는 것이다. "존재론적 원리에 의하자면, 존재existence의 어떤 의미에서건 존재하는 모든 사물은 현실적 생기들로부터 추상되어 파생된 것이다." 따라서 현실적 존재자(현실적 생기)가 모든 존재의 근거가 된다. 철학사에서 살펴보면, 존재론적 원리는 현실적인 것을 존재의 근원으로 보는 원리이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와 데카르트의 일반원리가 수용된다.

현실적인 것을 떠나서는 아무 것도 ― 사실에 있어서든 효과에 있어서든 ― 존재하지 않는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일반원리가 보존된다. 이는 데카르트의 다음과 같은 언명, 즉 "이러한 이유 때문에 어떤 속성이 지각된다면 이로부터 우리는 그 속성이 귀속될 수 있는 어떤 사물 내지 실체가 반드시 존재한다고 결론짓는다"는 언명의 기초가 되기도 하는 진정한 일반원리이다. 그리고 또 그는 "왜냐하면 모든 명석 판명한 지각은 의심할 나위도 없이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어떤 것이고, 따라서 무로부터 나온 것일 수 없기에···"라고도 말하고 있다. 이 일반원리는 존재론적 원리라 불리게 될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위 인용문에서 지적한 것처럼, 일반원리로서 '현실적인 것을 떠나서는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물론 이점에 있어서는 화이트헤드가 플라톤보다는 아리스토텔레스와 입장을 같이한다. 이것은 화이트헤드가 현실적인 것을 떠나서 이데아가 홀로 어떤 장소를 갖고 존재한다는 플라톤의 입장을 분명히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플라톤의 이데아에 해당하는 것은 화이트헤드에게 있어서 영원한 대상이다. 따라서 화이트헤드의 영원한 대상은 홀로 존재할 수 없다. 반드시 현실적 존재자에 의존해서 존재해야 한다.
그리고 현실적인 것을 강조하는 면에서 화이트헤드는 데카르트의 입장과도 맥을 같이한다. 데카르트는 '속성이 지각된다면 그 속성이 귀속될 수 있는 사물이나 실체가 반드시 존재한다'고 했고, 이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실체-속성 이론을 데카르트가 받아들인 결과이다. 물론 화이트헤드에게 있어서 이 때의 실체는 현실적 존재자이며, 속성은 영원한 대상이다. 의심할 수 없는 명백한 연역체계를 구축하고자 했던 데카르트는 '모든 명석 판명한 지각이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어떤 것으로부터 나온다'고 말했다.
결국 아리스토텔레스와 데카르트처럼 화이트헤드도 현실적인 것에서 존재근거를 찾는다. 현실적인 것에서 존재근거를 찾는 존재론적 원리는 이 두 사람과 맥을 같이하지만, 보다 정확하게는 존 로크의 힘에 대한 일반적 원리를 화이트헤드가 확대해서 변형시킨 것이다.

존재론적 원리는 존 로크가 『인간 오성론』(제2권, 제23장, 제7절)에서, 힘은 실체에 관한 우리의 복합 관념의 대부분을 이룬다는 주장을 통해 설정했던 일반적 원리를 확장 확대시킨다. 실체의 개념은 현실적 존재자라는 개념으로 변형되고, 힘의 개념은 다음과 같은 원리, 즉 사물의 근거는 언제나 특정한 현실적 존재자의 합성적 본성 속에서 ― 최고도의 추상성의 근거는 신의 본성 속에서, 특수한 환경과 관계되는 근거는 특정한 시간적인 현실적 존재자의 본성 속에서 ― 발견되어야 한다는 원리로 변형되고 있다. 존재론적 원리는 현실적 존재자가 없으면 근거도 없다는 명제로 요약될 수 있다.

이 때 로크의 지각은 화이트헤드의 파악에 해당한다. 화이트헤드의 파악이 백터의 성격을 띄고 있기 때문에 힘의 이동이 있다. 로크도 힘은 실체에 관한 복합관념을 이룬다고 주장한다. 즉 우리의 지각에 나타나는 복합관념이 실체가 가지고 있는 힘을 느끼기 때문이라고 로크는 본다. 물론 로크의 실체는 화이트헤드의 현실적 존재자에 대비되지만, 그대로 대응되지는 않는다. 그 근본적인 차이는 지속에 있다. 로크의 실체는 속성들을 받치면서 지속되지만, 화이트헤드의 현실적 존재자는 지속되지 않고 생성된 후 곧 소멸한다. 이런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공통점은 현실적이라는 것과 현실적이기 때문에 힘을 발휘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화이트헤드는 그대로 대응하지 않고 변형되었다고 표현한다.
로크는 복합관념이라는 정신성이 어떤 힘에 의해 이루어진다고 주장한다. 이 때의 어떤 힘은 물론 실체의 힘이고, 화이트헤드에 있어서는 현실적 존재자의 힘이다. 화이트헤드는 현실적 존재자를 복잡하고도 상호의존적인 경험의 방울들이라고 한다. 이 경험의 방울들 중에는 최고의 추상성인 정신성의 근거가 되는 신과, 특수한 환경인 물리성의 근거가 되는 현실적 존재자 즉 현실적 생기가 있다.
로크는 힘의 개념에서 두 가지 원리를 함께 설명한다. 하나는 현실적 존재자가 자신 앞에 놓여진 대상들을 수용하는 힘이고, 또 하나는 현실적 존재자가 대상화되어 다른 현실적 존재자의 구조 속에 들어가는 힘이다. 전자를 표현하는 원리를 존재론적 원리라 하고, 후자를 표현하는 원리를 상대성 원리라 한다.

이 힘의 개념에서 로크는 존재론적 원리와, 한 현실적 존재자가 다른 현실적 존재자에 작용하는 힘이란 단지 전자가 후자의 구조 속에서 대상화되는 방식에 지나지 않는다는 원리의 윤곽을 예시해 주고 있다.

위의 인용문에서 한 현실적 존재자가 다른 현실적 존재자의 구조 속에서 대상화되는 방식에 지나지 않는다는 원리는 물론 상대성 원리이다. 따라서 존재론적 원리는 상대성 원리와 별개의 것이 아니다. 이 두 원리는 로크의 관념에 대한 학설을 수용한 것이다. 로크의 관념은 두 가지로 구분된다. 로크가 처음에 사용한 관념은 영원한 대상이 현실적 존재자에게 진입하는 것을 표현하고, 나중에 사용한 관념은 현실적 존재자가 대상화되는 것을 표현하고 있다. 이 때 영원한 대상이 현실적 존재자에게 진입해 있어야만 된다는 원리가 존재론적 원리이다. 그리고 현실적 존재자가 대상화되어 관념이 형성된 것이라는 원리는 상대성 원리이다.

유기체의 철학에 있어 로크가 처음에 사용한 관념이라는 용어는 현실적 존재자로의 영원한 대상의 진입에 관한 학설로 수용되고 있으며, 그가 나중에 사용한 그 용어는 현실적 존재자의 대상화에 관한 학설로 수용되고 있다. 이 두 학설은 각기 별개의 것으로는 설명될 수 없다. 그것들은 두 개의 기본적 원리 ― 존재론적 원리와 상대성 원리 ― 에 대한 골격을 이루고 있다.

화이트헤드는 『과정과 실재』의 서문에서 '유기체의 철학을 가장 완벽하게 앞질러 표현했던 철학자는 『인간 오성론』의 저자인 존 로크, 특히 그 후반부의 존 로크이다'고 했다. 로크는 전반부에서 벌써 존재론적 원리를 표현하고 있었고, 후반부에 와서 상대성 원리도 표현하고 있다. 존재론적 원리는 생성하는 주체 쪽에 무게를 둔 것이고, 상대성 원리는 생성을 위해 요구되는 대상 쪽에 무게를 둔 것이다.
그러나 로크는 "그의 문제가, 실제로 그가 행했던 것보다 전통적 범주의 더 철저한 수정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모호한 진술을 하게 되었고, 또 일관성이 결여된 요소도 이끌어들이게 되었던 것이다."
주체를 강조하는 존재론적 원리에서 보면 모든 대상을 자신의 구조 속에 수용한다고 볼 수 있다. 이에 따라 주체 자신의 구조를 분석하면 그 주체를 형성하는데 기여한 세계를 알 수 있다. 그런데 이 세계는 하나의 현실적 존재자에게만 대상이 되는 것이 아니라, 여러 현실적 존재자에게 대상이 된다. 이로부터 각 현실적 존재자의 구조 속에 공통세계라는 관념이 예증되어 있음을 유추할 수 있다.
  
모든 명제는 저마다 어떤 하나의 현실적 존재자의 구조 속에, 또는 여러 현실적 존재자들의 구조 속에 자리잡고 있다. 이는 존재론적 원리를 달리 말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렇게 해석된 존재론적 원리로부터 다음과 같은 결론이 나온다. 즉 공통세계라는 관념은 분석을 위해 그 자체만을 취한 각 현실적 존재자의 구조 속에 예증되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현실적 존재자는 공통세계가 그 존재 자신의 구조의 구성요소가 되고 있다는 의미에서만 그 공통세계의 일원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로부터 다른 모든 현실적 존재자를 포함하여 우주의 온갖 사항들이 임의의 한 현실적 존재자의 구조 속에 들어 있는 구성요소가 되고 있다는 결론이 나온다.

화이트헤드는 각 현실적 존재자의 구조 속에 공통세계가 들어 있어야 하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들고 있다. '현실적 존재자는 공통세계가 그 존재 자신의 구조의 구성요소가 되고 있다는 의미에서만 그 공통세계의 일원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언뜻 보면 모순인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현실적 존재자는 미시세계인데 비해 공통세계는 거시세계이며, 이 말대로 한다면 거시세계가 미시세계 안에 들어가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이 문제에 대해서 레클레어는 그의 『화이트헤드의 형이상학』18절에서 상대성 원리에 포함된 주장 중 두 번째 문제로 다루고 있다. 레클레어가 다루고 있는 첫 번째 주장은 상대성 원리의 기초적인 것으로서, '모든 존재자가 가능적이라는 것은 모든 존재자의 일반적인 형이상학적 특징이다'라고 말한 것에 대한 것이다. 이 주장에 대해서는 4부 2장 1절에서 상세히 다룰 것이다. 여기서 언급하고자 하는 것은 두 번째 주장으로 첫 번째 주장과 관련된 주장이다. 이것은 '모든 존재자가 현실태를 위한 가능적인 것이기 때문에, 모든 현실태는 자신의 우주 안에서 그 가능적인 것들, 즉 주어진 그것들을 받아야만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의 주어진 그것들이 바로 우리가 위에서 언급한 공통세계이다. 그리고 현실태는 현실적 존재자를 말한다. 즉 현실적 존재자는 자기 앞에 주어진 공통세계를 수용해야만 한다는 원리가, 상대성 원리의 첫 번째 주장과 관련된 두 번째 주장인 것이다. 그리고 유기체의 철학에서 주어진 공통세계는 현실성을 상실했기 때문에, 자신의 존립을 위해서는 현실적 존재자에게 귀속되어야 한다는 면에서 바로 존재론적 원리가 된다.
[이 때의] 가능성은 소여성을 포함한다. 그리고 소여성은 수용을 포함한다. 소여성이 반드시 수용을 포함하지는 않는다고 말하거나, 수용 없이 주어지는 것이 있을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이것에 쓸모 없는 반론일 것이다. 왜냐하면, 만약 비-수용들이 있다면, 그것은 거부를 뜻하거나, 바로 전혀 관계없음을 뜻하기 때문이다. 만약에 전자라면, 그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종류의 수용을 함의한다 ; 왜냐하면, 거부하기 위하여 거부라는 어떤 형식이 있어야 되기 때문이다 ; 그것에 대한 결단이 가능하도록 하기 위해서, 그리고 따라서 거부가 야기되도록 하기 위해서 거부라는 어떤 형식이 있음에 틀림없다. 만약 후자가 그 경우라면, 그때 문제의 그 존재자는 그 개별적 현실태의 우주 안에 있지 않다.

레클레어는 어떤 존재자이든 현실태 앞에 일단 주어지면 수용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수용되지 않는 경우도 있다. 그렇지만 그 경우에도 그는 거부라는 어떤 형식은 필요하기 때문에 일종의 수용이라고 주장한다. 물론 이것은 화이트헤드의 용어로 '부정적 파악에도 주체적 형식은 있다'는 말에 해당한다. 그리고 그는 수용 없이 주어지는 어떤 것이 있다고 한다면, 상대성 원리의 첫 번째 주장에 따라 그 존재자는 그 개별적 현실태의 우주 안에는 없다고 주장한다. 계속해서 그는 『사고의 양태』에 나오는 글을 인용하여 두 번째 주장이 다음을 함의한다고 말한다.

현실태의 박동 하나 하나에 제공되는 여건들은 그 박동과의 관련 속에 존재하는 것으로의 선행하는 우주 전체로 이루어지고 있다. 여건으로서의 이 우주는 그것에 속한 다수의 세부 사실들로 파악된 것이다. 여기서의 다수성은 선행하는 박동들의 다수성이다. 또한 사물들의 본성 속에는 다양한 형식들이 실현된 형식으로서 이건 실현될 가능태로서 이건 간에 내재해 있다. 따라서 여건들은 있었던 것, 있을 수 있었던 것, 그리고 있을 수 있는 것 속에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있다라는 동사는 역사적인 현실태와 어떤 방식으로 관련을 맺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의 현실태는 생성 중인 주체이다. 이 주체에게 제공되는 여건인 대상들은 선행하는 우주전체로서 다수성이다. 그리고 이 여건은 형식면에서 보면 과거에 있었던 것, 지금은 비록 없지만 있을 수 있었던 것, 미래에 있을 수 있는 것 등이 포함된다. 이렇게 모든 우주가 현실태와 어떤 방식으로든 관련을 맺고 있다.
미시세계인 현실태 속에 거시세계인 전 우주가 포함된다는 이 이론은 화이트헤드에게 있어서는 존재론적 원리인 동시에 상대성 원리이다. 거시세계인 전 우주는 선행하는 우주 전체이기 때문에 주체일 수 없으며 주체적 직접성을 상실한 대상이다. 대상이라면 가능태이다. 가능태는 현실태와의 관계를 떠나서는 홀로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 존재론적 원리이다. 그리고 주체적 직접성을 잃어버린 모든 현실태는 완전히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다음의 생성하는 현실태에게 여건이 되기 위해 가능태로 있다는 것이 상대성 원리이다.
미시세계는 합생과정을 나타내고, 거시세계는 이행과정을 나타낸다. 이런 면에서는 과정의 원리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과정의 원리와 상대성 원리에 대해서는 다음 장에서 상세히 다룰 것이다. 다만 화이트헤드에게 있어서 미시세계인 현실태 속에 거시세계인 전 우주를 포함하는 행위를 위의 인용문에서는 박동으로 표현하고 있다는 점만 밝혀두고, 이 박동 속에 두 가지 세계가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자 한다. 미시세계는 현실적 생기의 형상적 구조와 관계되고, 거시세계는 소여성과 관계된다.

유기체의 철학에 있어 유기체란 개념은, 서로 연결되어 있지만 이해의 차원에서는 분리될 수 있는 두 가지 의미, 즉 미시적 의미와 거시적 의미를 갖고 있는 것으로 간주된다. 미시적 의미는, 경험의 개체적 통일성을 실현하는 과정으로서 고찰된 현실적 생기의 형상적 구조와 관계된다. 거시적 의미는, 이 현실적 생기를 위해 기회를 제공하는 동시에 제한하기도 하는, 굽힐 수 없는 엄연한 사실로서 고찰된 현실 세계의 소여성과 관계된다.

여기서 말하는 현실적 생기의 형상적 구조는 현실적 존재자가 대상들인 다자를 수용하여 자신의 내적구조를 형성시켜 가는 것이다. 이 때 현실적 존재자는 통일성을 획득하여 일자가 된다. 이렇게 다자가 일자로 되어 가는 과정을 미시적 과정이라 한다. 그리고 미시적 과정을 겪는 현실적 존재자인 유기체는 미시적 의미를 지닌 것이다. 여기에 비해 미시적 과정을 끝낸 현실적 존재자가 미시적 과정 중에 있는 현실적 존재자에게 대상이 되어 가는(소여성) 과정을 거시적 과정이라고 한다. 그리고 거시적 과정을 겪는 현실적 존재자인 유기체는 거시적 의미를 지닌 것이다.
이제 '현실적 존재자는 공통세계가 그 존재 자신의 구조의 구성요소가 되고 있다는 의미에서만 그 공통세계의 일원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고 화이트헤드가 말한 것에 대해서 언급할 수 있겠다. 여기서의 현실적 존재자는 생성 중인 주체이고, 공통세계는 선행하는 우주 전체인 대상이다. 존재론적 원리에 따라, 대상으로서 가능태인 공통세계는 그 근거를 현실태인 현실적 존재자에게서 찾아야 한다. 그래서 현실적 존재자의 내적 구조의 구성요소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상대성 원리에 따라, 그 현실적 존재자도 주체적 직접성을 상실한 후 다음의 현실적 존재자가 생성하는 데 필요한 대상이 되어야 한다. 이 때는 다음의 현실적 존재자의 여건으로서의 다수성 중의 하나에 속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생성을 마친 현실적 존재자는 그 공통세계의 일원이 된다. 이것이 어떤 한 세계에 새로움이 도입되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로 그 세계가 지속 가능한 이유가 된다.
        
이 상대성 원리는 존재론적 원리가 극단적인 일원론으로 귀결되는 것을 방지하는 공리이다. 흄은 이 원리를 반복이라는 관념으로 어렴풋이 예시하고 있다.

만약에 존재론적 원리밖에 없다면, 모든 세계가 현실적 존재자에게 수용되어 버려 일원론으로 귀결되어 버린다. 그러나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상대성 원리로 인해, 일원론으로 귀결되는 것을 막을 수 있으며, 세계의 생성 속의 지속을 설명할 수 있다. 흄은 이러한 원리를 어렴풋이 알고서 반복이라는 관념으로 표현하고 있었음을 화이트헤드는 발견했다.
그런데 알스톤William P. Alston은 「화이트헤드에 있어서 내적관계성과 다원주의」라는 논문에서, 화이트헤드의 내적관계성 이론은 일원론을 벗어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렇게 주장하면서도 그는 내적관계성 이론이 상대성 원리를 기술하고 있다고 한다. 이것은 화이트헤드의 상대성 원리가 일원론으로 귀결되는 것을 방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했음을 의미한다.
화이트헤드의 내적관계성 이론을 '모든 존재자가 하나의 현실적 존재자의 내적구조를 이룬다'는 사실로만 이해하면, 결국 알스톤이 이해한 것처럼 일원론으로 귀결된다. 왜냐하면 "모든 유한 경험들을 포함하는 적어도 하나의 직접적인 통일체가 있다고 하는 결론"에 도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결론은 주체의 통일성에 주목한 것이다. 주체의 통일 쪽에 주목한 것은 존재론적 원리이다. 그래서 이것은 알스톤이 주장한 것처럼 일원론으로 귀결되는 것을 피할 수가 없다. 화이트헤드가 내적관계성에서 주목하고 있는 것은 대상의 다양성이다. 그래서 '모든 존재자가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원리'가 내적 관계성 이론이라고도 불리는 상대성 원리이다. 이것 때문에 상대성 원리가 일원론으로 귀결되는 것을 막을 수 있다.
존재론적 원리와 상대성 원리의 조화는 철학사에서 논의되어 온 보편자와 개별자의 이분법을 극복하게 한다. 전통 철학에서 속성인 보편자와 실체인 개별자를 구분할 때의 그 기준은, 보편자는 모든 개별자의 기술 속에 들어가지만, 개별자는 다른 개별자의 기술 속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화이트헤드 유기체의 철학은 개별자도 다른 개별자의 기술 속에 들어간다. 물론 이것은 상대성 원리 때문이다. 그리고 보편자도 각자의 개별성을 갖고 있는 존재자이기 때문에 개별자이다. 즉 현실적 존재자의 생성과정에 개입하기 위한 다수성 중의 하나로서의 개별자이다. 이것은 존재론적 원리 때문이다.

존재론적 원리와 현재의 형이상학적 논의가 기초하고 있는 보편적 상대성에 관한 보다 광범한 학설은 보편적인 것과 개별적인 것 사이의 예리한 구별을 모호하게 만든다. 보편자라는 개념은 많은 개별자의 기술 속에 들어갈 수 있는 개념인 반면, 개별자라는 개념은 그것이 보편자에 의해 기술되지만, 그 자신은 다른 어떤 개별자의 기술에도 들어가지 않는 개념이다. 이 강의에서 형이상학적 체계의 기반인 상대성에 관한 학설에 따르면, 이 두 개념은 그릇된 생각을 내포하고 있다. 현실적 존재자는 보편자에 의해서는 불충분하게 조차도 기술될 수 없다. 왜냐하면 어떠한 현실적 존재자의 기술에도 다른 현실적 존재자들이 개입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른바 보편적인 것이란 모두, 그것은 그것 자체일 뿐 그 밖의 다른 모든 것과 구별된다는 의미에서 개별적인 것이며, 이른바 모든 개별적인 것이 다른 현실적 존재자의 구성에 개입한다는 의미에서 보편적인 것이다.


2. 주관주의 원리와 상대성 원리


주관주의 원리는 주체의 경험을 떠나서는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화이트헤드는 "주체의 경험을 떠나서는 아무 것도, 아무 것도, 아무 것도 없다, 단지 무가 있을 뿐이다."고 말한다. 이 원리는 흄의 학설을 수용한 것이며, 화이트헤드에게 있어서는 존재론적 원리로 표현되기도 한다. "주관적 경험의 요소로서 발견될 수 없는 것은 어떠한 것도 철학적 도식 속에 받아들이지 말아야 한다는 흄의 학설을 수용한다. 이것은 존재론적 원리이다." 이것을 존재론적 원리로 표현할 수 있는 이유는, 주관적 경험이야말로 현실태이며, 이 현실태의 구성요소로 들어갈 수 없는 것은 존재가 아니라는 원리가 존재론적 원리이기 때문이다. 존재론적 원리가 경험하는 주체로서 현실태에 강조점을 두는 반면에, 주관주의 원리는 주체의 경험 즉 주관적 경험에 강조점을 둔다. 그래서 "우주 전체는 주체의 경험에 대한 분석에서 드러나는 요소들로 이루어져 있다고 보는 것이 주관주의적 원리이다."
그런데 흄의 학설은 주관주의 원리보다는 흔히 감각주의 학설로 불린다. 이렇게 불리는 이유는, "주관주의 원리를 받아들일 경우에 감각주의 원리가 압도적인 중요성을 띠기 때문이다." 주관주의 원리에서 주관이라는 말은 주체가 본다는 의미로 쓰인 것이다. 이 때 본다는 말은 시각을 뜻하지만, 보통은 조금 넓게 사용하여 모든 감각을 통하여 느낀다는 뜻으로 사용한다. 그래서 주관주의의 원리는 감각으로 느낀다는 의미가 암암리에 포함되어 있다. 그런데 감각주의 원리가 결부되면서 심각한 문제가 야기된다. 감각주의 원리가 어떤 문제를 일으키는지 살펴보기 전에 감각주의 원리가 무엇인지를 좀 더 명확히 할 필요가 있겠다.

감각주의적 원리란, 경험 행위에서 최초의 활동은 수용reception의 어떠한 주체적 형식도 없는 여건의 순수한 주관적 향유bare subjective entertainment라는 것이다. 이것은 단순한 감각mere sensation의 학설이다.

경험의 행위에서 최초의 활동은 감각으로 느낀다는 것인데, 이 때 여건을 변형 없이 있는 그대로 향유하는 것이다. 그래서 화이트헤드는 "외계에 대한 모든 지식은 사적인 감각의 매개에 의해 생겨난다는 감각주의"라는 말을 하면서, 이 감각주의 원리가 문제임을 지적한다. 여기에는 두 가지 잘못된 가정이 들어 있다. 첫째, 감각에 의해 느껴진 것이 경험 행위에 있어 최초가 아닌데 최초인 것으로 가정하는 것이다. 둘째, 감각에 의해 느껴진 것은 주체적 형식에 의해 이미 변형되어 버렸는데도 여건을 있는 그대로 주관에 품는다고 가정한 것이다.
흄이 위의 두 가지 가정이 들어 있는 감각주의 학설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난점에 빠진 것은 당연하다. 왜냐하면 감각에 의해 포착된 것은 현재 순간의 왜곡된 단면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외부 세계를 감각으로 느끼는 경우, 감각에 의해 포착된 느낌은 많은 부분이 추상되면서 단순화된다. 예를 들어 음식 냄새를 맡는다고 하자. 그 냄새를 일으키는 여건은 상당히 복합적이다. 코가 아주 예민한 사람이나 동물이라도 그 본래의 여건 중 1/100 ∼ 1/1000 이라도 느낄 수 있을지 모르겠다. 혀로 느끼는 맛도 마찬가지다. 혀의 감각기능을 발달시킨 식도락가는 보통의 사람보다는 10배 이상 정확히 느낄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도 본래의 여건에 비하면 많은 부분이 추상된 것이다.
시각의 경우, 흔히 있는 그대로 느낀다고 한다. 그러나 시각도 기하학적 도형이나 색깔을 느낌에 있어 상당히 많은 부분이 추상된다. 우리들이 책을 도형부분에 주목해서 바라볼 때, 대부분의 책이 직육면체이고, 직육면체는 12개의 직선들이 8개의 직각을 이룬 상태에서 만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책의 도형에 있어 대부분을 차지하는 직선과 직각은 우리의 시각에 의해 변형된 것이다. 즉 추상화를 거쳐 단순화된 것이다. 실제로는 직선이 아니라 곡선이며, 직각이 아니라 둔각이나 예각이다. 그 대상인 책을 보다 정밀히 살펴보면, 너무나 울퉁불퉁해서 직선이니, 직각이니 라고 말할 수 없다. 색깔도 또한 마찬가지다. 눈앞에 있는 그 책의 실제 색깔은 여러 색깔이 섞여 있어서 상당히 복잡하다. 그러나 우리의 시각에 포착된 것은 추상을 거쳐 단순화 된 단색이나 몇 가지 색 뿐이다.
그러면 상당히 복잡한 그대로를 느끼는 최초의 느낌은 무엇인가? 이 느낌은 의식이라는 주체적 형식이 활동하기 이전의 느낌이다. 즉 감각에 의해 포착되기 이전의 느낌이다. 화이트헤드는 이 느낌을 순응적 느낌이라고 한다. 순응적 느낌은 외부의 세계를 있는 그대로 순응해서 느끼며, 주체에 의해 변형되지 않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그리고 이때 외부세계라는 대상이 원인이 되고, 받아들이는 주체는 결과가 되기 때문에 인과적 느낌이라고도 한다. 이렇게 지각된 것은 대상이 주체에게 다르게 느끼지 못하도록 영향력을 발휘하기 때문에 인과적 유효성의 지각양태라고 한다.
여기에 비해서 감각에 의해 포착된 지각은, 주체가 대상을 단순화시켰기 때문에 변형된 것이다. 또한 이것은 주체의 감각기관이 주체적 형식을 갖고 그 대상의 현재 순간인 횡단면을 포착한 것이다. 이렇게 지각된 것을 화이트헤드는 제시적 직접성提示的 直接性presentational immediacy의  지각양태라고 한다. 여기서 제시적(提示的)이란 현시적(顯示的)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감각기관 앞에 대상이 횡단면으로 제시되거나(제시적) 혹은 나타나(현시적) 보인다는 뜻이다. 그리고 직접성이라고 한 것은, 그 대상을 주체가 직접성을 갖고 포착한다는(화이트헤드의 용어로는 파악한다는) 것이다. 화이트헤드에게 있어서 주체의 직접성은 주체인 현실태의 능동적인 활동을 뜻하기 때문에 대상 그대로를 받아들이지 않고 주체의 방식(주체적 형식)대로 받아들여서 변형이 된다. 인과적 유효성의 지각에 의한 순응적 느낌은 대상에 대해 반복이지만, 제시적 직접성의 지각에 의한 느낌은 그 주체적 형식이 반복을 압도하면서 대상을 변형시킨다.

직접성이라는 개념은 느낌과 연관될 때 의미를 갖는다. 영원한 대상에 의한 현실적 존재자의 단순한 대상화는 직접성이 결여되어 있다. 그것은 반복이며, 이는 직접성과 반대이다. 그러나 과정은 느낌들의 돌진이며, 이에 힘입어 간접적인 것이 주체적 직접성을 달성한다. 이렇게 하여 주체적 형식은 반복을 압도하면서, 그것을 직접적으로 느껴진 만족으로 변형시킨다.

흄이 지각에 있어 가장 원초적인 것으로 보는 것은 인상이다. 이 때의 인상은 생생하고 직접적으로 감각에 찍혀진 것이다. 화이트헤드의 지각론에서 보면 이것은 제시적 직접성의 지각에 의해 나타난 것이다. 그런데 이 지각으로는 인과성을 느낄 수 없다. 왜냐하면 인과관계는 시각, 청각, 후각 등 어떠한 감각지각으로도 포착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대상과 주체 사이의 인과관계를 증명할 수 없으면 유아론(唯我論)에 빠지게 된다. 그래서 흄은 감각주의 원리와 결합된 주관주의 원리를 주장했기 때문에 객관성과의 형평을 놓쳐 버려 회의론에 빠진다.
이러한 흄의 난점은 감각 지각이 최초의 지각이라는 것을 그대로 받아들인 데 기인한다. 이 가정은 수정되어야 한다. 그래서 이제는 대상을 변형시키지 않은 채 느끼는 것으로 감각지각보다 더 원초적인 지각이 있어야 한다. 이러한 원초적인 지각을 화이트헤드는 인과적 유효성의 지각이라고 하며, 이 지각에 의한 느낌을 순응적 느낌이라고 한다. 순응적 느낌은 존재론적 원리가 그 근거로 삼고 있는 현실적 존재자를 느끼는 물리적 느낌을 기초로 하고 있다. 물론 이 물리적 느낌은 의식 이전의 느낌이며, 감각에 포착되기 전의 정서적인 신체적 느낌이다.

신체적 경험의 근원적 형태는 정서적 ― 맹목적 정서 ― 이다. 그것은 다른 어떤 생기occasion에서 느껴졌던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또 주체적 정감으로서 순응적으로 자기화된appropriated 것이다. 경험의 보다 고차적인 단계에 알맞는 언어로 말하자면, 근원적 요소는 공감, 즉 타자에 있어서의 느낌을 느끼는 것이요, 타자와 더불어 순응적으로 느끼는 것이다. ······ 따라서 근원적 경험은 저편의 세계와의 관련성 속에서 느껴지는 정서적 느낌이다. 이 느낌은 맹목적이며, 그 관련성은 모호하다.

경험에 있어 근원적인 신체적 경험은 정서적 느낌으로 맹목적이며, 그 관련성이 모호한데 비해서, 제시적 직접성의 지각은 생생하며 명석하다. 그런데 경험론자들의 대부분은 근원적인 경험을 맹목적이고 모호한 느낌이라고 하지 않으며, 생생하고 명석한 제시적 직접성의 지각양태에 있어서의 느낌이라고 한다. 화이트헤드는 여기에서 철학상 난제의 대부분이 발생한다고 말한다.

제시적 직접성의 양태에 있어서의 파악은 우리가 가장 생생하게 의식하면서 향유하는 파악들 가운데 하나이다. 이런 파악은 경험 주체의 합생에 있어서의 후기의 파생물이다. 이처럼 후기의 파생적 요소가 근원적인 요소보다 더욱 명석하게 의식에 의해 조명된다고 하는 법칙을 무시한 결과, 경험하는 생기를 적절히 분석하려는 작업은 치명적인 손상을 입었다. 사실상 철학상의 난제들 가운데 대다수가 여기에 기인하고 있다. 지금까지 경험은 완전히 처음과 끝이 뒤바뀐 채 잘못 설명되어 왔다.

예를 들면 내 몸 가까이에 고양이가 있다고 하자. 이 녀석이 너무나 조용히 다가왔기 때문에, 나는 청각이나 시각, 후각 등으로 느끼지를 못했고 게다가 그 녀석이 가까이 다가왔는지 조차 나는 몰랐다. 그러나 내 몸은 이미 그 녀석을 느끼고 있다. 다만 내 몸이 그 녀석을 느끼고 있다는 것을 나는 의식하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만약에 나의 눈에 띄어 시각에 포착되었다면 의식했을 것이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해서, 나의 눈을 고양이가 있는 쪽으로 돌렸다고 하더라도 내가 그 고양이에게 초점을 맞추어야만 알아챘을 것이다. 여기서 초점을 맞춘다는 것은 초점적 영역 안에 고양이가 들어왔다는 것이고, 초점적 영역이 생겼다는 것은 의식이 그 쪽으로 향해져 있다는 뜻이다.
이것은 청각이나 후각 등 모든 감각기관에 통하는 이치이다. 우리가 감각기관을 통해서 외부세계를 느낀다는 것은 그 느끼는 곳에 초점적 영역이 생겼다는 것이고, 이 영역에서 의식이라는 주체적 형식으로 그 대상을 느낀다는 것이다. 우리가 잠을 자고 있는 동안에는 외부세계를 느끼지 못한다. 왜냐하면 잠자고 있는 동안 그 주체는 주변의 방에 대해 초점을 맞추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잠자고 있는 동안에도 몸은 그 주변의 습기나 온도 등 많은 부분을 느끼고 있다.
중요한 것은 몸으로 느낀 것들 중에서, 의식이라는 주체적 형식을 통해서 느낄 때는 이미 상당히 많은 부분이 추상되어 단순화와 왜곡을 거친 후에야 가능하다는 것이다. 화이트헤드는 이 점을 여러 곳에서 거듭 강조한다. 그리고 의식이라는 것은 느낌 중에서도 상당히 후반부에 나타나는 것으로 그것도 고등 생물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화이트헤드의 경험(파악)이론은 생물뿐만 아니라 무생물까지 확대해서 모든 현실적 존재(현실적 존재자와 현실적 결합체)에까지 미치고 있다. 이렇게 모든 현실적 존재가 그 자신을 둘러싼 외부세계를 내부로 받아들여서(느껴서) 자신을 형성해 간다는 학설이 유기체의 이론이다.
이렇게 확대된 경험이론에서 보았을 때, 감각주의 원리는 당연히 편협한 이론이다. 그래서 화이트헤드는 주관주의 원리를 주장하면서도 감각주의 원리는 거부한다. 사람을 비롯해 고등동물에게는 감각에 의한 느낌 대신 그 자리에 신체적 느낌을 둔다. 그리고 저급동물이나 식물 나아가 광물까지 확대했을 때는 감각에 의한 느낌 대신에 물리적 느낌으로 일반화한다. 어쨌든 화이트헤드의 수정된 주관주의 원리는 이렇게 감각주의 원리를 거부한다.
화이트헤드가 주관주의 원리를 받아들이면서 유아론에 빠지지 않는 것은 그의 지각론에 물리적 느낌이 있기 때문이다. 이 물리적 느낌은 최초의 대상에 대한 순응적 느낌이기 때문에 대상을 왜곡시키지 않고 있는 그대로 자신의 내부구조로 수용하는 느낌이다. 따라서 이 느낌은 주관성과 함께 객관성을 확보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하게 된다. 그러나 객관성에 따른 보다 정확한 세부사항은, 모든 주체들과 그들이 함께 파악하는 공통세계 사이의 관계도식인 연장적 연속체에 대한 언급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화이트헤드는 "연장적 연속체라든지 제시적 직접성이라는 개념이 모든 관점으로부터 세심하게 논의되어야 할 필요가 있게 되는 것이다"고 말한다. 그러나 여기서는 논의의 한계를 넘어가기 때문에 더 이상 언급하지 않겠다.
결국 주관주의 원리는 유아론을 극복해야 한다. 유아론을 극복하는 방법으로는 주체가 대상을 최초로 만나는 지점에서 대상이 그대로 재연된다고 주장해야 한다. 그런데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그 지점을 감각이라고 하는 감각주의 원리는 실패하고 만다. 이러한 실패를 흄 자신도 지적했지만, 흄은 대안을 제시하지 못했다. 그 이유는 감각이전에 주체와 대상이 만나는 장소가 있다고는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는 감각보다 더 원초적인 신체적 느낌이 있다는 것에 주목하지 않았다. 이것은 화이트헤드가 찾아낸 큰 성과이며,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독특한 그의 해법이다. 감각이 최초의 경험으로서 외부의 대상을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감각주의 원리를 거부하는 것만으로 유아론이 극복되는 것은 아니다. 유아론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주관주의 원리가 전제하고 있는 문제점들을 제거해야만 한다.
이제 주관주의 원리가 무엇인지에 대해 보다 정확히 알아볼 단계에 와 있는 것 같다. "주관주의적 원리란, 경험의 작용에서의 여건은 보편적인 것들만으로 충분히 분석될 수 있다는 것을 말한다." 이 때 보편적인 것들이란 실체에 내속되는 속성들을 말한다. 주체가 대상을 느낄(경험할) 때, 하나 하나를 느끼는 것이 아니고, 그들의 속성인 보편자를 느낀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보편자들을 분석하면 주관이 받아들인 모든 것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화이트헤드 이전의 주관주의 원리에는 몇가지 전제가 들어 있다.

주관주의적 원리는 다음의 세 가지 전제로부터 귀결된다. i) (실체-성질) 개념을 궁극적인 존재론적 원리를 표현하는 것으로 받아들일 것. ii) 실체는 항상 주어가 될 뿐, 결코 술어가 될 수 없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제1실체에 대한 정의를 받아들일 것, iii) 경험하는 주체는 제1실체라고 가정할 것.

화이트헤드는 이 세 가지 전제에 대해 다음과 같이 해설하고 있다.

첫 번째 전제는, 최종적인 형이상학적 사실은 실체에 내재하는 하나의 성질로서 언제나 표현될 수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두 번째 전제는, 속성과 제1실체를 서로 배타적인 두 부류로 나누어 놓는다. 이 두 전제는 공히 보편자와 개별자에 관한 전통적인 구별의 기초가 되고 있다. 유기체의 철학은 이 구별이 근거하고 있는 전제들을 인정하지 않는다. 유기체의 철학은 서로 배타적이고 궁극적인 두 부류의 존재를 인정한다. 그 중의 한 부류는 현실적 존재자들actual entities인데, 전통적인 철학에서는 이들을 개별자들particulars로 잘못 기술해 왔다. 그리고 다른 한 부류는 여기에서 영원한 대상이라고 이름한 한정성의 형식들forms of definiteness인데, 이것들 또한 현실적 존재자와의 대비에서 보편자들universals이라고 잘못 기술되어 왔다.

제1실체와 속성을 개별자와 보편자로 구분하는 전통적인 입장을 화이트헤드는 거부한다. 화이트헤드에게 있어서 제1실체에 해당하는 것은 현실적 존재자인데, 이 현실적 존재자는 상대성 원리에 따라 다른 현실적 존재자의 내적구조 속으로 들어가기 때문에 보편자이다. 그리고 속성에 해당하는 것은 영원한 대상인데, 이 영원한 대상도 상대성 원리에 따라 다른 존재자를 한정하는 형식으로 진입하기 때문에 개별자로 나타난다.
화이트헤드는 주관주의 원리를 주장하지만, 전통적으로 인정하는 앞의 세 가지 전제들을 모두 거부한다. 그리고 우리가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감각주의 원리도 거부한다. 그러면 화이트헤드가 주관주의 원리를 주장하면서 인정하는 것은 무엇인가? 이렇게 묻는 것이 화이트헤드가 스스로 수정된 주관주의 원리라고 부르는 것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겠다.
화이트헤드가 주관주의 원리를 주장하면서 인정하는 것은 '주체의 경험을 떠나서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주체의 경험을 떠난 객체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다. 실체 철학에서는 주체와 객체가 따로 있다고 주장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제1실체에 해당하는 것으로 한 개별자인 주체는 다른 개별자인 실체(객체) 속에 들어갈 수가 없다. 다만 다른 개별자와 관계하는 것은 보편자인 속성이지 개별자인 실체가 아니다. 그리고 실체는 개별자이기 때문에 항상 주어이지 술어가 될 수 없다.
아리스토텔레스부터 시작된 실체-속성과 주어-술어 이론은 철학사에 뿌리 깊이 박혀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제1실체인 개별자는 주어이지 술어가 되지 않는다. 그에게 있어 술어는 오직 그 주어인 개별자(제1실체)의 속성일 뿐이다. 이것은 그의 범주 도식(한 개의 실체와 그에 속한 아홉 개의 성질들)에서 볼 때 당연하다. 그러나 화이트헤드는 이 이론을 받아들인 주관주의 원리가 잘못되었다고 주장한다.
예를 들어, 지금 이 장소에서 사용하고 있는 이 볼펜과 이 종이는 개별자이기 때문에 아리스토텔레스의 제1실체임이 분명하다. 따라서 이것은 주어로만 사용할 수 있지 술어로는 쓸 수 없다. 즉 '이 볼펜은 이 종이다'고 하거나 '이 종이는 이 볼펜이다'고 할 수 없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있어서 술어로 쓸 수 있는 것은 개별자가 아니라 보편자이다. 그래서 '이 볼펜은 필기구이다' 혹은 '이 종이는 필기구이다'고 하면 참 명제가 된다. 왜냐하면 필기구는 제1실체인 개별자가 아니라, 볼펜이 가지고 있는 성질로서의 보편자이기 때문이다.
술어에 해당하는 속성으로서의 보편자는 두 가지로 크게 분류된다. 본질적 속성과 우연적 속성이 그것이다. 연필이나 종이에 있어서 필기구라는 개념은 본질적인 속성이다. 연필이나 종이에게 이 속성을 빼버리면, 연필이나 종이가 다른 사물이 된다. 색깔이나 크기 등은 우연적 속성이다. '이 연필은 길다'고 했을 때, 그 연필이 짧아져도 그 연필은 그 연필이다. 그리고 '이 종이는 희다'고 했을 때, 그 종이에 다른 색깔을 칠해도 그 종이는 그 종이이다.
고대 그리스에서 시작된 이 이론은 '저 돌은 회색이다'는 전형적인 진술을 만들어 내면서 일반화되어 존재론과 인식론에 함께 영향력을 발휘한다. 존재론적 관점에서 보면, 저 돌과 같은 실체가 중심이며, 이 실체는 회색과 같은 보편적인 성질(속성)로 특징지어 진다. 그래서 현실세계는 보편적 성질(속성)을 가진 제1실체들의 집합체가 된다. 인식론적 관점에서 보면, 지각이란 특정한 실체(저 돌)를 특징지우고 있는 보편적 성질(회색)을 포착하는 작용이 된다. 그래서 회색과 같은 보편자를 인식하는 주체는 감각이 된다.

그리스 철학은 그 일반화를 제시하기 위하여 언어의 일상적인 형식에 의존하였다. 이 철학은 저 돌은 회색이다 라는 전형적인 진술을 찾아냈다. 그리고 현실 세계는 여러 보편적인 성질로 특징지워지는 제 1실체들의 집합체로 간주될 수 있다는 일반화를 전개시켰다. ······ 이 일반적 관념은 음으로 양으로 늘 사고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인식론도 또한 필요했다. 이때에도 철학은 모든 인식이 지각에 기초를 두고 있다는 건전한 원리에서 출발하였다. 그래서 지각이 분석되었고, 그 결과 지각이란 하나의 보편적 성질이 하나의 특정한 실체를 특징지우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 행위임을 알게 되었다. 따라서 지각은 특정한 실체를 특징지우고 있는 보편적 성질을 포착하는 행위이다. 다음으로 지각자는 어떻게 지각하게 되는가를 물었고, 그 대답은 지각하는 자의 감각 기관에 의해서라는 것이었다. 따라서 지각된 실체를 특징지우고 있는 보편적 성질은, 지각자와 관련시켜 말한다면, 그 지각자 자신 이외의 특정한 실체들과 관계 맺고 있는 그 지각자의 사적인 감각이다.

'저 돌은 회색이다'와 같은 명제의 주어-술어 형식은 데카르트에 와서 형이상학적으로 더욱 강조되었다.

현실적 사물은 존재하기 위해 그것 이외의 아무 것도 필요로 하지 않으며, 그 성질들 ― 그 중의 어떤 것들은 본질적 성질이며 다른 것들은 우유적 양태이다 ― 을 통해서 사유되어야 하는 것으로 보았다.
여기에서 '현실적 사물'은 명제의 주어에 해당하는 실체이다. 그리고 '존재하기 위해 그것 이외의 아무 것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 할 때는, 한 실체가 존재하기 위해서 다른 실체가 필요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사유에 포착되는 것은 현실적 사물인 실체가 아니라 그 성질뿐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 때의 성질 중 본질적 성질은 위에서 언급한 필기구이고, 우유적 양태는 길다, 희다, 회색 등이다. 데카르트의 영향을 받은 흄은 경험의 주관적 향유의 기능을 명제의 주-술 형식을 낳은 실체-성질의 범주에 따라 이해하고 있었다. 그래서 주관에 포착되는 것은 회색과 같은 감각여건이며, 이 여건을 수용한 감각인상에서 그의 철학이 출발할 수밖에 없었다. 이에 따라 주관적 경험의 요소로서 발견될 수 없는 것은 어떠한 것도 철학적 도식 속에 받아들이지 말아야 한다는 흄의 학설에서, 주관적 요소로 발견되는 것은 감각인상과 이로부터 도출된 관념이다. 흄의 철학에서 출발점이 되는 "감각인상은 보편자에 대한 개별적 느낌이지 보편자를 예증하고 있는 다른 개별적 존재자에 대한 느낌은 아니다."

흄과는 대조적으로 유기체의 철학은 회색으로서의 이 돌을 문제의 경험에 있어서의 여건 속에 존속시킨다. 사실상 그것은 합생의 후기 단계에 있어서의 파생적 유형에 속하는 어떤 물리적 느낌의 대상적 여건이다.

흄은 보편자에 대한 개별적 느낌과 보편자를 예증하고 있는 다른 개별적 존재자에 대한 느낌을 동일시하고 있다. 물론 개별적 존재자의 느낌에는 힘과 활기가 있다고 말은 하지만, 무시하고 있다. 즉 '회색으로서의 돌'을 느끼는 감각 인상에는 힘과 활기가 있지만, 회색만을 느끼는 관념은 힘과 활기가 없다. 여기에 대해서 흄이 다음과 같이 말한 점을 화이트헤드는 인용하고 있다. "나의 눈앞에 나타나는 최초의 상황에서는 힘과 활기의 정도를 제외한다면 다른 모든 측면에서 인상과 관념이 서로 매우 유사하다."
그러나 유기체의 철학에서는 돌을 보면서 회색이라는 보편자를 느끼는 것이 아니라, 돌이라는 개별자를 먼저 느낀다고 한다. 그리고 회색이라는 보편자는 오히려 합생의 후기 단계에서의 파생적 유형, 즉 물리적 느낌에서 파생된 개념적 느낌으로 나타난다고 한다. 즉 최초의 경험인 돌에 대한 물리적 느낌이 있고, 이 물리적 느낌으로부터 회색이라는 개념이 파생되어 나오게 된다. 흄은 개별자인 돌에 대한 물리적 느낌을 거의 무시하고 있고, 회색이라는 보편자에 대한 개념적 느낌을 최초의 느낌으로 여기고 있다. 유기체의 철학에서는 흄이 최초의 경험으로 간주하는 '회색으로서의 돌'을 물리적 느낌에서 파생된 추상물에 불과하다고 본다.

회색으로서의 이 돌이라는 개념은 파생적인 추상물이다. 그것은 근본적인 경험적 느낌을 기술하는 데 있어서의 한 요소로서는 사실상 필요하지만, 형이상학적 출발점으로서는 그릇된 것이다. 이 파생적인 추상은 대상화라 불린다.

그런데 흄은 이 추상물을 자신의 지각에서 출발점으로 삼았기 때문에 회의론에 빠진 것이다. 여기에 비해 유기체의 철학은 생생한 여건을 순응적으로 느끼는 물리적 느낌을 출발점으로 삼는다. 그리고 이 느낌을 분석하면 생생한 여건을 전부 들어낼 수 있으며, 이러한 '생생한 여건 전부'를 우주전체라고 본다. 이 점에서 우주 전체는 주체의 경험에 대한 분석에서 드러나는 요소들로 이루어져 있다고 보는 주관주의적 원리를 수용하는 것이다. 결국 주관주의 원리는 주체의 경험에 대한 분석에서 우주 전체를 드러내는 원리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 해당하는 예로서 복제 양 '돌리'의 탄생과정을 살펴보겠다. 복제 양 '돌리'의 경우는 배자세포(胚子細胞)를 사용하지 않고, 체세포(體細胞)를 사용했다는 데 그 의의가 크다. 배자세포가 아닌 체세포로 복제가 가능하다는 말은, 배자세포 뿐만 아니라 체세포에도 배자세포처럼 온 몸의 전체 유전인자들이 들어 있으며 또한 이들을 깨울 수 있다는 말이다. 체세포와 배자세포는 모두 처음에 만들어질 때 한 개체를 만드는 전체 프로그램을 가지고 있다. 배자세포는 이 프로그램을 계속 간직해서 지속되지만, 체세포는 성장해 가면서 뼈, 내장, 뇌, 근육 등으로 세분되어 간다. 체세포는 계속 세분되어 가다가 마지막에 가서 어떤 것으로든(뼈 중에서도 턱뼈, 내장 중에서도 위벽, 뇌 중에서도 소뇌, 근육 중에서도 손바닥 근육 등) 선택된 다음에는 선택된 그 유전자만 연주하고 다른 명령을 담은 트랙은 침묵을 지킨다.
문제는 이 침묵을 어떻게 깨는가에 달려 있었다. 이 방법을 1995년에 로슬린 연구소 라이프 사이클 연구소의 캠펠이 제시함으로써 돌리의 탄생이 가능해졌다. 캠펠은 체세포를 정지(靜止) 또는 휴면(休眠)시키면 모든 유전자가 활동할 수 있는 잠재력을 갖게 된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그는 잠재력을 갖게 된 체세포에게 전기 충격을 주어 유전자를 활성화시켜 모든 트랙을 돌 수 있도록 했던 것이다.

[캠펠은] 6세된 양의 젖샘세포를 복제하기로 하고, 이 세포를 떼어내어 약간 성장시킨 뒤 곧 이어 영양분을 줄여 후면상태로 빠지게 하여 활동을 중지시켰다(일종의 선잠상태). 그 다음 미성숙 난자인 난모세포를 핵만 제거하고 세포질은 그대로 두었다. 이 난모세포를 정지세포 옆에 두고 전기충격을 주었다. 이 충격으로 난자가 새로운 핵과 그 속의 모든 DNA를 마치 자기 것처럼 받아들이고, 세포분열도 시작되었다. 한 주일 뒤 이 배자를 대리 어미의 자궁 속에 이식하였다. 150일 뒤 돌리는 암양으로 태어났다.
     
논자가 위의 예에서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6세된 양의 젖샘세포를 떼어내어 복제에 사용했는데, 이 세포에 어떻게 6세된 양의 유전자가 모두 기억되어 있는가 이다. 이 때 사용된 세포는 6년 전에 태어난 것이 아니다. 그 자리의 세포는 죽고 태어남이 거듭 되었을 것이다. 이것으로부터 두 가지의 기억 전달과정을 예상할 수 있다.
첫째, 세포에서 세포로 이어지는 유전 정보의 전달과정이 있다. 이것은 시간적으로 이어지는 정보전달이기도 하다. 6년 전에 태어날 때 젖샘세포의 자리에 있었던 세포가 유전인자를 가지고 있었는데, 이 유전인자는 그 부모의 배아 세포가 가지고 있었던 것과 같은 것이다. 그 유전인자는 부모로부터 유전된 것이며, 다만 젖샘으로서의 역할을 하는 유전자만 연주하고 다른 트랙은 침묵을 지키고 있었을 뿐이다. 그런데 6년 동안 세포가 수없이 바뀌었다. 그래도 6년 후에 부모로부터 이어받은 전(全) 유전자(한 개체를 만드는 전체 프로그램을 가진)를 깨워서 활동을 시켰다. 이것은 어떻게 해서 가능한가? 수없이 세포가 바뀌어도 유전자에 대한 기억이 계속해서 다음 세포로 이어지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다.
세포에서 세포로 유전 정보가 이어진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새롭게 만들어지는 세포가 이전의 세포(정보를 가지고 있던 세포)를 여건으로서 경험하고, 이 경험을 통해서 새로운 세포에게 이전 세포의 정보가 전달된다고 봐야할 것이다. 화이트헤드에 의하면, 이 때의 경험은 주체가 여건에 순응하기 때문에 빠짐없이 전달된다. 즉 최초의 경험인 물리적 느낌의 순응성(인과성)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정확히 말하면, 물리적 느낌(새로운 세포가 이전 세포의 몸을 느끼는 것)과 그 느낌에서 파생된 개념적 느낌(이전 세포가 가지고 있었던 유전 정보인 개념을 느끼는 것)을 함께 느껴서 그 유전 정보는 그대로 전달된다. 이 전달과정은 개체에서 개체로의 전달과정이다.
둘째, 몸 전체와 개체 세포 사이에 이루어지는 정보의 전달과정이 있다. 이것은 공간적으로 연결되는 정보전달이기도 하다. 젖샘 세포를 제공한 양의 몸 전체에는 수많은 세포가 있다. 그리고 이 세포들 각각은 그 양이 현재 순간 겪고 있는 경험들을 함께 공유하고 있다. 만약에 함께 그 경험을 공유해서 정보 전달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양 '돌리'가 6년 동안 살아 온 젖샘 세포 제공자처럼 빨리 늙어버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나의 세포에서 그 세포를 포함한 몸 전체를 똑같이 복제할 수 있다는 것은, 그 하나의 세포가 몸 전체의 경험을 물리적으로 느끼고 있으며, 그리고 물리적 느낌에서 파생된 개념적 느낌을 순응적으로 수용하고 있다는 증거가 된다. 그래서 머리카락 세포 하나에도 그 몸의 현재 순간의 모든 정보가 들어 있다. 즉 머리카락 세포 하나의 경험을 분석하면 몸 전체의 정보를 모두 알 수 있다. 같은 말을 다른 각도에서 말하면, 그 몸(거시 세계)의 모든 정보는 그 몸의 극히 작은 일부를 차지하는 머리카락 세포 하나(미시 세계)의 분석에서도 나오며, 이 분석에서 나오지 않는 정보는 없다. 이 말은 주체(머리카락 세포 하나)의 경험(세포를 둘러싼 환경인 양의 몸을 물리적으로 느끼고 거기서 파생된 정보를 개념적으로 느낌)을 떠나서는 아무 것도 없다(더 이상의 새로운 정보는 없다)는 주관주의 원리를 잘 나타내고 있다.
주체의 경험을 떠나서는 아무 것도 없다는 주관주의 원리에서 감각주의 원리를 제외하고, 또 실체-성질과 주어-술어의 형식을 제외했을 때 화이트헤드의 주관주의 원리가 그 모습을 드러낸다. 화이트헤드는 이 원리를 수정된 주관주의 원리라고 명명한다. 이 수정된 주관주의 원리는 유아론을 극복하여 객관주의적 원리와 균형을 유지하고 있다. 객관주의와의 균형을 이루었다는 것은, 최초경험의 여건이 개별자들인 생생한 여건이며, 이 여건을 있는 그대로 순응적으로 느끼는 물리적 느낌이기 때문이다.
주체 앞에 놓여진 여건을 주체가 임의로 바꾸어서 느낀다면 객관주의가 성립되지 않는다. 그러나 유기체의 철학은 그 여건에 순응하는 물리적 느낌이 있기 때문에 객관성을 확보하여 객관주의와의 균형을 이루게 된다. 그리고 이 균형은 여건인 대상이 주체라는 현실태의 생성을 위한 가능태가 되기 때문에 가능하다. 이 진술은 바로 상대성 원리이다. 따라서 수정된 주관주의 원리는 상대성 원리에 대한 다른 이름이라고 할 수 있다.

유기체의 철학이 채택하는 수정된 주관주의 원리는, 상대성 원리(설명의 범주 iv)에 대한 또 다른 언명일 따름이다. 이 원리가 진술하고 있는 것은, 있음being이란 그 본성에 있어 모든 생성을 위한 가능태라고 하는 것이다. 따라서 모든 사물은 현실적 생기를 특징지우는 것으로 볼 수 있다. ······ 이 원리는 진정한 사물res vera의 존재란 그 생성becoming에 의해 구성되는 것임을 말하고 있다. 하나의 현실적 존재자가 다른 현실적 존재자들에 의해 특징지어지는 통로는, 그 현실적 존재자가 주체로서 향유하는 현실적 세계에 대한 경험이다. 우주 전체는 주체의 경험에 대한 분석에서 드러나는 요소들로 이루어져 있다고 보는 것이 주관주의적 원리이다.

유기체의 철학에서 모든 사물은 여건인 가능태가 될 수 있으며, 이 가능태는 생성하는 현실태를 특징지운다고 말한다. 그런데 모든 사물이 여건인 가능태가 된다는 원리가 화이트헤드의 상대성 원리이다. 이 때 가능태가 현실태로 되는 통로는 주체의 여건인 현실세계를 경험하는 것이며, 이 경험을 통해서 여건인 현실세계를 분석할 수 있다는 것이 화이트헤드의 수정된 주관주의 원리이다.
마지막으로 왜 화이트헤드는 객관주의 원리를 택하지 않고 주관주의 원리를 택했는지에 대해서 언급하고자 한다. 화이트헤드는 주체의 경험과 관계하지 않은 객체를 인정하지 않는다. 물론 객체(대상 혹은 여건)와 관계하지 않는 주체도 인정하지 않는다. 이것은 지금까지 우리가 살펴보았던 것처럼 존재론적 원리, 상대성 원리, 주관주의 원리에 의한 것이다. 즉 화이트헤드에게 있어서 주체와 객체는 실체 철학처럼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이들은 관계하고 있으며, 관계하고 있는 과정이 진정한 사물이며 현실적 존재자이다.
화이트헤드의 전정한 사물인 현실적 존재자는 이렇게 주체가 자신을 생성하기 위해서 객체와 관계하고 있는 과정을 떠나서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현실적 존재자도 과정이 끝나서 만족에 이르면 현실태가 아니라 가능태이다. 이 가능태도 존재론적 원리에 따라 홀로 존재할 수는 없다. 반드시 현실태를 근거로 해서 존재해야 한다. 따라서 이 가능태는 다음의 현실적 존재자의 여건이 되어 그 현실적 존재자가 생성하는데 필요한 구성요소가 된다.
화이트헤드에게 있어서 주체는 생성 중인 현실적 존재자로서 현실태이다. 그러나 이 현실태도 생성이 완료되면 가능태로 바뀌어 객체가 된다. 여기에 비해 실체 철학에서는 그 주체가 존속된다. 이처럼 주체에 대한 시각이 실체 철학과 유기체 철학은 다르다. 그리고 실체 철학은 같은 맥락에서 주체가 존속되듯이 객체도 존속된다고 본다. 왜냐하면 객체도 객관적으로 보면 주체이기 때문이다.
화이트헤드에게 있어서 존속되는 객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이러한 객체가 존재하지 않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객체로서 존속되는 실체가 없기 때문이다. 둘째, 주체와 관련되지 않는 객체는 공허한 것이기 때문이다. 셋째, 그 객체가 현실태가 되기 위해서는 자기 주변에 있는 여건들을 수용해서 자신을 생성시켜 가야 되는데, 만약에 그렇게 한다면 그것은 객체가 아니라 주체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현실로 존재하지 않는데도 현실태로 규정하는 것을 화이트헤드는 '공허한 현실태'vacuous actuality라고 지적하면서 거부한다. 다시 말하면, "공허한 현실태는 주체적 경험을 결여한 현실태이다."
유기체의 철학에서는 주체의 경험을 떠난 객체가 없을 뿐만 아니라, 객체(대상)을 떠난 주체도 없다. 왜냐하면 유기체 철학에서는 한 개별자인 현실적 존재자가 다른 개별자인 현실적 존재자의 내적구조 속에 들어가기 때문이다. 이렇게 한 현실적 존재자가 다른 현실적 존재자의 내적구조 속에 들어갈 수 있기 때문에, 현실적 존재자는 개별자인 동시에 보편자이다. 그리고 어떤 하나의 현실적 존재자의 생성 과정에 어떤 다른 하나의 현실적 존재자만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그 과정에 모든 현실적 존재자가 참여한다.
모든 현실적 존재자가 어떤 한 주체의 생성과정에 참여하고, 그것들은 그 주체의 내적구조를 이루면서 그 주체를 형성시킨다. 이렇게 모든 현실적 존재자가 어떤 주체의 생성과정에도 참여하기 때문에, 생성 활동하는 그 주체는 모든 현실적 존재자가 포함된 자신의 주변 세계를 파악한다고 보는 것이 주관주의이다. 화이트헤드 유기체의 철학에서는 이러한 도식이 성립되기 때문에, 주체를 떠난 객체는 존재하지 않는다.
만약에 주체를 떠나서 객체가 존재한다면, 그 때의 주체는 이미 유기체로서의 주체가 아니다. 그리고 그 때의 객체도 유기체로서의 객체가 아니다. 그 때의 주체가 유기체로서의 주체가 아닌 것은 존재론적 원리에 위배되기 때문이다. 존재론적 원리에 위배되지 않으려면, 주체로서의 현실적 존재자는 주변의 객체를 수용해야 된다. 그리고 그 때의 객체가 유기체로서의 객체가 아닌 것은 상대성 원리에 위배되기 때문이다. 상대성 원리에 위배되지 않으려면, 모든 객체는 주체와의 상대적인 내적관계를 가져야 한다.










3. 과정의 원리와 상대성 원리


설명의 범주 27개 중 첫 번째는 현실세계가 과정이라는 말에서 시작된다. 그런데 과정은 현실적 존재자의 생성과정이기 때문에, 현실세계는 현실적 존재자의 생성과정이다. 그리고 현실적 존재자는 생성되는 사물이기 때문에, 만들어지는 사물이라는 의미에서 피조물이다. 또한 현실적 존재자는 현실적으로 생성되는 과정이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과정을 의미하는 현실적 생기occasion라고도 한다.

ⅰ) 현실세계는 과정이라는 것. 그리고 과정은 현실적 존재자의 생성이라는 것. 따라서 현실적 존재자는 피조물이며 현실적 생기라고도 불린다.

현실적으로 일어나는 과정인 현실적 생기를 현실적 존재자라고 한다는 것은, 현실적 존재자는 생성되고 있는 자신을 떠나서 달리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이 말은 존재의 설명에 있어 존속되는 실체가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것이다. 존재를 설명할 때, 존속되는 실체가 있고 존속되지 않는 속성이 있다는 방식을 거부하는 것이다. 존속되는 실체가 있다면 존재 중에서 현실적 생기를 제외한 부분이 있어야 한다.
화이트헤드는 생성되는 것 이외에 아무 것도 없으며, 그 생성되는 과정이야말로 그 존재자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그 자신 유기체의 철학에서 이것을 하나의 원리로 정립했다. 그리고 이 원리를 과정의 원리라고 불렀다. 이 과정의 원리에 따르면, 현실적 존재자가 어떤 것인가를 알기 위해서는 그것이 어떻게 생성되었는가를 살펴보면 된다. 그래서 화이트헤드는 설명의 범주 아홉 번째에서 이것을 명시하고 있다.

ⅸ)  현실적 존재자가 어떻게 생성되는가 라는 것이 그 현실적 존재자가 어떤 것인가를 결정한다. 따라서 현실적 존재자에 대한 두 가지 기술은 서로 독립해 있는 것이 아니다. 현실적 존재자의 있음being은 그 생성becoming에 의해 구성된다. 이것이 과정의 원리이다.

하나의 현실적 존재자가 다른 현실적 존재자와 어떻게 다른가? 그것은 그 현실적 존재자가 다른 현실적 존재자와 생성과정이 어떻게 다른가를 묻는 것이다. 그 현실적 존재자가 무엇인가, 혹은 그 현실적 존재자가 무엇으로 있는가being는 그 현실적 존재자가 어떻게 생성되었는가, 어떤 과정을 거쳐 생성되었는가becoming에 의해 구성된다. 이러한 과정의 원리를 줄이면, 있음being이 생성becoming에 의해 구성된다는 것이다. 이 때의 있음being은 '무엇으로 있음'에 대한 생략어이다. 더욱 상세히 분석하면 being은, '그것은 ∼이다'라는 문장에서 '∼이다'라는 동사의 명사형 '∼임'의 뜻도 강하게 나타낸다. 따라서 화이트헤드가 사용하는 being은 '있음'과 '∼임'의 뜻을 모두 함의하는 용어이다.
영어에서 be 동사는 완전자동사로 쓰일 때의 '있다'와 불완전자동사로 쓰일 때의 '이다'가 문장에 따라 구분된다. be 동사의 명사형인 being도 문장에 따라 '있음'과 '임'으로 구분해야 할 것이다.
being을 '있음'이 아니라 '∼임'의 뜻을 의미하는 시각으로 보았을 때 위의 인용문은 다음과 같은 뜻을 지니게 된다. 현실적 존재자의 무엇임을 결정하는 것은 그 현실적 존재자가 생성되는 과정에 달려있다는 것이 과정의 원리이다. 즉 과정의 원리는 생성되는 과정에 현실적 존재자의 '있음'만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무엇임'까지도 결정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위의 인용문 '현실적 존재자의 있음은 그 생성에 의해 구성된다'라는 문장은 '현실적 존재자의 무엇임은 그 생성에 의해 구성된다'라는 의미까지 포함한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 두 문장은 엄밀히 분석했을 때, 그 의미에 차이가 있다. 존재와 본질이라는 전통적인 분류법에 따라 구분했을 때, 첫 문장은 현실적 존재자가 존재하는 이유를 묻고 거기에 답하는 것이고, 둘째 문장은 현실적 존재자가 왜 그 본질을 갖게 되었는가를 묻고 거기에 답하는 것이다.
그 의미의 차이를 알기 위해서 위의 두 문장을 좀 더 자세히 검토해보면, 첫 번째 문장 즉 원래의 번역 문장은, 현실적 존재자의 있음은 그 현실적 존재자가 생성되었기 때문에 가능하다는 의미밖에 함의하지 않는다. 달리 말하면, 그 문장은 현실적 존재자가 생성되지 않았다면 그 현실적 존재자가 없다는 의미를 나타낸다. 두 번째 문장은, 하나의 현실적 존재자가 다른 현실적 존재자가 아니라 바로 그 현실적 존재자인 이유가 다르게 생성되지 않았으며 바로 그렇게 생성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나타낸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being은 있음(존재)의 측면과 임(본질)의 측면을 함께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 두 가지 의미를 포괄하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이 좋다. 그러나 우리말에 이 두 가지 의미를 포괄하는 한 단어는 없다. 굳이 표현한다면 '무엇으로 있음'이라고 풀어서 나타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번역할 때마다 풀어서 '무엇으로 있음'이라고 한다면 더욱 번거롭고 앞 뒤 문맥이 맞지 않아서 혼란스럽다. 그래서 할 수 없이 being을 번역할 때는 '있음'으로 하고, 이 '있음'이라는 용어는 '무엇으로 있음'이라는 의미를 가지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좋겠다.

설명의 범주 ⅸ)에 따르면, 현실적 존재자가 어떻게 생성되는가 하는 것은, 그 현실적 존재자가 무엇인가를 결정한다. 이 원리는 진정한 사물의 존재란 그 생성에 의해 구성되는 것임을 말하고 있다. 하나의 현실적 존재자가 다른 현실적 존재자들에 의해 특징지어지는 통로는 그 현실적 존재자가 주체로서 향유하는 현실적 세계에 대한 경험이다. 우주 전체는 주체의 경험에 대한 분석에서 드러나는 요소들로 이루어져 있다고 보는 것이 주관주의 원리이다. 과정은 경험의 생성이다.

위의 인용문에서 첫째 단락은 화이트헤드의 과정원리를 그대로 제시하고 있다. 이 단락은 지금까지 논의한대로 한다면, 존재와 본질을 함께 말하고 있다. 그런데 둘째 단락은 과정의 원리 중 존재의 측면을 부각하고 있다. 그래서 진정한 사물의 존재란 그 생성에 의해 구성된다는 점을 언급하고 있다. 즉 진정한 사물은 불변하는 어떤 존재가 아니라, 생성에 의해 만들어지는 존재인 것이다. 세 번째 단락은 그 현실적 존재자의 본질적 측면을 부각하고 있다. 그래서 하나의 현실적 존재자가 다른 현실적 존재자에 의해 특징지어지는 통로가 바로 그 현실적 존재자의 경험이라는 점이 강조되고 있다. 이것은 개별자의 특징이 왜 그렇게 구성되었는가를 밝히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의 우주 전체는 무엇으로 있음being을 말하고, 주체의 경험은 무엇이 되어감(생성)becoming을 말한다. 따라서 '우주 전체는 주체의 경험에 대한 분석에서 드러나는 요소로 이루어져 있다'는 말은 '있음은 생성에 의해 드러난다'는 말과 같다. 여기서 우주전체는 주체가 경험한 전체이다. 그리고 우주전체는 그 우주가 무엇이냐 라고 물었을 때, 그것은 무엇이다 혹은 그것은 무엇으로 있다고 말할 수 있는 바로 그것이다. 그런데 이 무엇으로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이미 완성된 상태이다. 완성되지 않고는 무엇으로 있다고 말할 수 없다. 완성되지 않으면 무엇이 되어가고 있다고 말해야 한다.
화이트헤드 유기체의 철학에 있어서 완성된 것은 주체가 만족에 이른 것이다. 만족에 이른 주체는 이미 주체가 아니라 대상이다. '무엇이 되어 가는'(생성되는) 현실적 존재자는 활동하는 주체인데 비해 '무엇으로 있는' 현실적 존재자는 활동을 멈춘 대상이다. 즉 활동하는 다른 주체에게 대상이 된 현실적 존재자이다. 이렇게 만족에 이르러 자신은 활동을 멈추고 다른 주체에게 대상화된 현실적 존재자가 있고, 아직 활동하는 현실적 존재자가 있다. 활동하는 현실적 존재자는 발생적 과정을 겪고 있고, 만족에 이른 현실적 존재자는 그 발생적 활동을 멈추고 활동하는 다른 주체의 대상이 된다. "만족과 발생적 과정간의 이러한 관계는 설명의 제8범주 및 제9범주에 표현되어 있다."

ⅷ) 현실적 존재자는 두 가지 기술(記述)을 필요로 한다. (a) 하나는 다른 현실적 존재자의 생성에 있어서의 대상화objectification의 가능성을 분석하는 기술이고, (b) 또 하나는 그 자체의 생성을 이루고 있는 과정을 분석하는 기술이다. 대상화라는 술어는 한 현실적 존재자의 가능태가 다른 현실적 존재자의 가능태 속에서 실현되는 특수한 방식을 가리킨다.
ⅸ) 현실적 존재자가 어떻게 생성되고 있는가 라는 것이 그 현실적 존재자가 어떤 것인가 라는 것을 결정한다는 것. 따라서 현실적 존재자에 대한 두 가지 기술은 서로 독립해 있는 것이 아니다. 현실적 존재자의 있음은 그 생성에 의해 구성된다. 이것은 과정의 원리이다.

현실적 존재자의 '있음'은 그 '생성'에 의해 구성된다고 할 때, '현실적 존재자의 있음'은 앞에서 말했듯이 '현실적 존재자가 무엇으로 있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현실적 존재자의 있음은 그 현실적 존재자가 어떤 것인가(무엇으로 있는가)에 대한 대답이다. 이 대답을 얻기 위해서 '다른 현실적 존재자의 생성에 있어서의 대상화의 가능성을 분석해 본다는 것'은 만족에 이른 현실적 존재자를 등위적으로 분석한다는 것이다. 여기에 비해서 '그 자체의 생성을 이루고 있는 과정을 분석해야 한다는 것'은 현실적 존재자의 발생과정을 파악으로 분석한다는 것이다.
현실적 존재자에 대한 위의 두 가지 분석은 모두 과정을 나타내고 있다. 앞의 대상화의 과정을 이행과정이라고 하고, 뒤의 생성과정을 합생과정이라고 한다. 이행과정은 주체로서의 생을 마치고 다음의 주체에게 대상화되는 과정이며, 합생과정은 주변의 대상들을 경험해서(수용해서, 파악하여) 자신을 형성시켜 가는(자신이 되어 가는, 자신이 생성되는) 과정이다. 이 두 과정은 분석 상 분리해서 기술할 수 있지만, 실제로는 떼어낼 수 없다. 어느 한 쪽이 없으면 다른 쪽도 있을 수 없다. 이행과정이 없다면 주체가 파악할 대상이 없다. 합생과정이 없다면 대상을 파악할 주체의 생성이 없다.
이행과정은 하나의 현실태가 자신을 초월한 외부 세계로 넘어가서 다른 현실태의 내부로 들어가는 과정이다. 그래서 이것을 거시적 과정이라고 한다. 이 거시적 과정은 성취된 현실태로부터 성취 중에 있는 현실태로의 이행이고, 현실적인 것the actual으로부터 단순히 실재적일 뿐인 것the merely real으로의 이행이다. 그리고 단순히 실재적일 뿐인 것은 작용인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한다. 여기에 비해 합생과정은 하나의 현실태 내부의 과정이다. 그래서 이것을 미시적 과정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 미시적 과정은 단순히 실재적일 뿐인 조건들을 결정적인 현실태로 전환conversion시키며, 실재적인 것으로부터 현실적인 것으로의 성장growth을 가능케 한다. 현실적인 것으로의 성장에는 목적인이 수반된다.
 
과정에는 두 종류, 즉 거시적 과정과 미시적 과정이 있다. 거시적 과정은 성취된 현실태로부터 성취 중에 있는 현실태로의 이행인 반면 미시적 과정은 단순히 실재적일 뿐인 조건들을 결정적인 현실태로 전환conversion시키는 것이다. 전자의 과정은 현실적인 것the actual으로부터 단순히 실재적일 뿐인 것the merely real으로의 이행을 가능케 하며, 후자의 과정은 실재적인 것으로부터 현실적인 것으로의 성장growth을 가능케 한다. 전자의 과정은 작용인을 수반하며 후자의 과정은 목적인을 수반한다.

여기서 실재적인 것은 현실성을 잃어버린 것이다. 즉 주체로서의 역할이 종결되어 주체적 직접성을 상실한 것이다. 이 실재적인 것은 이것을 파악해야 할 현실태의 수용적 측면에서 보면, 아직 수용되지는 않았지만 장차 수용될 미래이다. 그리고 이 실재적인 것은 파악해야 할 현실태보다 앞서 현실성을 잃어버렸다는 측면에서 보면 과거이다. 그리고 이 과거는 파악할 현실태의 앞에 놓여진 대상으로서 현실성을 잃어버린 현실태들의 결합체이다. 이들을 파악해서 자신을 형성시켜가는 직접성이 현재이다.

미래는 현실적인 것이 아니라 단순히 실재적인 것일 뿐이다. 반면 과거는 현실태들의 결합체이다. 현실태는 그 실재적인 발생적 국면real genetic phases에 의해서 구성된다. 현재란 실재reality가 현실적인 것이 되어 가는 목적론적 과정의 직접성이다. 거시적 과정은 실재적으로 목표 달성을 통할하는 조건들을 제공하고, 미시적 과정은 현실적으로 달성되는 목표를 제공한다.

거시적 과정은 이행과정으로 합생하는 현실태에게 그것이 합생할 대상으로서의 조건을 제공한다. 미시적 과정은 합생과정으로 그 대상을 파악해서 자신을 형성하는 목표를 제공한다. 이렇게 조건과 목표를 제공함으로써 생성과 소멸을 거듭하는 유기체가 있게 된다. 유기체는 정체되지 않는 과정이다. 유기체의 과정은 크게 두 가지로 구분된다. 첫째, 현실적 사물들의 공동체로서 과정이다. 이 과정은 우주의 팽창을 의미한다. 이 때의 우주는 대우주라고 할 수 있다.
둘째, 각 현실적 존재자의 생성과정이다. 이 때의 과정은 국면에서 국면으로 진행되는 과정이다. 그리고 각 국면마다 앞선 국면을 토대로 해서 진행된다. 그러면 최초 국면의 토대는 무엇인가? 이것은 대상화된 현실적 존재자이다. 그렇다면 결국 대상화된 현실적 존재자가 무엇인가에 따라서 문제의 현실적 존재자가 왜 지금처럼 되지 않으면 안되는가를 알 수 있게 된다. 그래서 이것을 과정의 원리라고 하는 것이다.
유기체라는 개념은 두 가지 측면에서 과정의 개념과 결합되어 있다. 현실적 사물들의 공동체는 유기체이다. 그러나 그것은 정적인 유기체가 아니다. 그것은 산출의 과정 가운데 있는 미완의 것이다. 따라서 현실적 것들과 관련한 우주의 팽창이 과정의 일차적인 의미가 된다. 그리고 그 팽창의 임의의 단계에 있는 우주가 유기체의 일차적인 의미인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유기체는 결합체이다.
그 다음으로, 각 현실적 존재자는 유기적 과정으로서 기술될 수 있을 뿐이다. 그것은 대우주에 있어서의 우주를 소우주에서 되풀이한다. 그것은 국면에서 국면으로 진행해 나아가는 과정이며, 이때의 각 국면은 그 후속 국면이, 문제되는 사물의 완결을 향해 나아가기 위한 실재적인 토대가 된다. 현실적 존재자는 그 여러 조건이 어째서 지금과 같은 것이 되고 있는가에 대한 이유를 자신의 구조 속에 가지고 있다. 이 이유는 문제의 현실적 존재를 위해 대상화된 다른 현실적 존재자들이다.

이행과정은 다음의 합생과정을 겪는 현실적 존재자의 구조를 만드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이행과정이 다음의 현실적 존재자의 구조를 만드는 근거이기 때문에 이행과정도 합생과정과 마찬가지로 생성과정이라고 해야할 것이다. 그러므로 결국 과정이란 생성의 과정이다.
그런데 생성의 과정에는 파악되는 대상과 파악하는 주체가 있어야 한다. 파악하는 주체는 만족에 이르면 대상이 되고, 그 대상은 다음 주체에게 파악되어 그 자신을 형성(생성)한다. 현실적 존재자의 있음은 그 생성에 의해 구성된다는 과정의 원리는, 대상이 된 있음은 그것이 생성되어 온 주체와 같다는 말이다. 이러한 과정의 원리가 성립되기 위해서는, 모든 존재자가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상대성 원리를 전제로 한다. 왜냐하면 현실적 존재자가 생성을 마치면 다음의 생성을 위한 대상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현실적 존재자가 만족에 이르면 주체로서의 역할이 끝나고 대상이 된다는 것은 상대성 원리를 표현한 것이다. 상대성 원리는 모든 것이 대상이 되어 계기하는 주체의 형성(생성)에 기여하는 재료가 된다는 원리이다. 이러한 재료가 있어야 그것을 주체가 수용해서 생성이 이루어진다. 그리고 생성이 끝난(만족한) 주체는 또 다음의 주체에게 대상이 된다. 이렇게 주체가 대상이 되는 것도 과정(이행과정)이고, 그 대상을 수용해서 자신을 형성하는 것도 과정(합생과정)이다. 이 과정을 떠나서 있음은 없다. 이것이 과정의 원리이다.
결국 과정의 원리는 현실세계의 모든 존재는 유기체로서 생성과 소멸의 과정을 겪고 있음을 나타내는 원리이다. 물론 이 때의 소멸은 단순히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다음 생성의 재료가 되어 불멸성을 지닌다. 이것을 대상적 불멸성이라고 한다. 이 대상적 불멸성은 주체적 직접성과 대비된다. 그리고 이 때의 대상적 불멸성은 있음의 성격을, 주체적 직접성은 생성의 성격을 지닌다. 더욱 축약해서 말하면, 대상은 있음을, 주체는 생성을 표현한다고 말해도 된다. 이 점에 대해서는 4부에서 보다 깊은 논의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과정의 원리는 현실적 존재자가 만족에 이르렀을 때(다른 현실적 존재자의 대상이 되었을 때) 어떤 상태인가에 대해서 알려고 하면, 이 현실적 존재자를 대상으로 파악해서 자신을 형성해 가는 그 주체가 어떻게 생성되는가의 과정을 보면 알 수 있다는 원리이다. 이 때의 생성되는 과정을 분석하는 것은 주체의 경험인 파악을 분석하는 것이다. 즉 파악을 분석하면 그 존재가 무엇인지를 알 수 있다. 그래서 화이트헤드는 이 파악에 대한 분석을 『과정과 실재』의 4부에서 면밀히 하고 있다.        이러한 파악의 분석은 현실적 존재자에 대한 생성의 분석이고, 이 생성의 분석을 통해서 현실적 존재자가 무엇으로 있는지(있음)를 알 수 있다. 그 사물이 무엇으로 있는지(있음)를 밝히는 것은 존재론의 핵심이다. 결국 화이트헤드 유기체의 철학에 있어서는 이 '있음'을 밝히기 위해서 '생성'을 분석해야 하고, 그리고 생성을 분석하기 위해서는 파악을 분석해야 한다. 과정의 원리는 이렇게 '파악'을 분석해야 '있음'을 알 수 있다는 사실을 밝히는 원리라고 할 수 있다. 이 논문에서는 파악의 세부사항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는다. 다만 왜 화이트헤드가 파악의 분석에 많은 지면을 할애했는가에 주목한다.   
화이트헤드는 생성과정인 파악prehension을 현실적 존재자와 마찬가지로 하나의 존재자entity로 여긴다. 이 때의 존재자entity는 있음being이 아니다. 화이트헤드가 과정의 원리로 있음being과 생성becoming을 연결짓고 있지만, 있음 그 자체가 생성인 것은 아니다. 있음은 주체의 활동이 정지된 것을 나타내고, 생성은 주체가 활동하는 것을 나타낸다. 주체의 활동이 중지된 것을 화이트헤드는 주체적 직접성을 잃고, 대상적 불멸성을 획득했다고 말한다. 이것은 주체로서의 역할이 끝나고 대상으로서의 역할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대상으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음being이 무엇인가를 알려면 그것이 주체로서의 역할을 하면서 자신을 어떻게 생성becoming시켰는가를 보아야 한다는 것이 과정의 원리이다. 그러므로 과정의 원리를 보다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화이트헤드의 존재론에 있어서 주체가 될 수 있는 용어와 대상이 될 수 있는 용어를 엄격하게 구분해야 한다. 그리고 이와 관련된 용어들에 대해서도 그 쓰임의 한계를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이것에 대해서는 4부 1장에서 existence(존재)와 관련된 단어들인 thing(사물)과 entity(존재자)와 더불어 함께 검토된다. 이 존재와 관련된 단어들의 의미를 검토할 때, 논자는 화이트헤드의 궁극자의 범주인 one(일자)와 many(다자)와 creativity(창조성)을 연관해서 논의할 것이다. 이렇게 논의함으로써 용어정리가 될 뿐만 아니라, 화이트헤드의 존재론을 보다 깊이 있게 이해할 수 있으리라고 본다.

Ⅳ. 범주 도식에서의 상대성 원리





1. 범주도식에서 사용되는 기본용어들의 대응관계


범주도식에 대한 설명 중 궁극자의 범주를 설명하는 『과정과 실재』의 2장 2절에는 궁극자의 범주와 존재와 관련된 용어들의 대응관계가 나타나 있다. 이 대응관계는 화이트헤드의 범주도식을 해석하는데 있어 중요한 시사를 던져주고 있다.

'창조성', '다자', '일자'는 동의어인 '사물', '있음', '존재자'의 의미와 관련된 궁극적인 개념이다.

위의 글은, 궁극자의 범주인 창조성, 다자, 일자가 동의어로 쓰이는 사물, 있음, 존재자의 의미와 관련되어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 글에서 논자가 주목한 것은, 「창조성, 다자, 일자」와 「사물, 있음, 존재자」들이 어떻게 관련되어 있는가 라는 것이다. 이것에 대해서 일반적으로「창조성, 다자, 일자」와 「사물, 있음, 존재자」들을 다음과 같이 관련된 것으로 보는 경우가 많다. 즉「사물, 있음, 존재자」들이 '동의어'이기 때문에,
창조성이 사물, 있음, 존재자와 관련되어 있고, ( 1 : 3 )
다자가 사물, 있음, 존재자와 관련되어 있으며, ( 1 : 3 )
일자가 사물, 있음, 존재자와 관련되어 있는 것 ( 1 : 3 ) 으로 즉 1 : 3의 관계로 보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논자는 여기서 1 : 1의 대응관계, 즉 창조성―사물, 다자―있음, 일자―존재자와의 대응관계가 성립됨에 주목했기 때문에 다음의 구절을 발견하게 되었다.

'일자'라는 용어는 하나의 '존재자'가 갖는 단일성을 나타낸다

'다자'라는 용어는 이접적인 다양성의 관념을 뜻한다. 이 관념은 '있음'이라는 개념에 있어 본질적인 요소이다. 이접적인 다양성 속에는 다수의 '있음'들이 있다

'창조성'은 이접적 방식의 우주인 '다자'를, 연접적 방식의 우주인 하나의 현실적 생기로 만드는 궁극적인 원리이다. '다자'가 복합적인 통일 속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사물'의 본성에 속한다

위의 첫 번째 인용문은 '일자'와 '존재자'를 관련시키고 있고, 두 번째 인용문은 '다자'와 '있음'을 관련시키고 있으며, 세 번째 인용문은 '창조성'과 '사물'을 관련시키고 있다.
화이트헤드는 일자라는 용어를 말하면서, '있음'이 갖는 단일성을 나타낸다고 할 수도 있으며, '사물'이 갖는 단일성을 나타낸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인데, 왜 하필 존재자가 갖는 단일성을 나타낸다고 했는가? 또 다자를 말하면서, 존재자의 본질적인 요소라고 할 수도 있으며, 사물의 본질적인 요소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인데, 왜 있음의 본질적인 요소라고 했는가? 창조성을 궁극원리로 하여 다자가 복합적인 통일(일자)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존재자의 본성에 속한다고 할 수 있으며, 있음의 본성에 속한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인데, 왜 사물의 본성에 속한다고 했는가? 그 이유는 사물, 있음, 존재자가 동의어로 쓰이지만, 창조성, 다자, 일자와 일대일 대응관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일자와 존재자의 관련성은, 일자와 존재자가 다수성을 가지지 않고 단일성을 갖는다는 공통성 때문에 대응관계가 성립된다. 그래서 일자 상태로 있는 무엇을 지칭하고자 할 때는 존재자라고 해야하고, 존재자라고 말할 때는 일자가 함축되어 있다. 그리고 존재자라는 말은 존재의 범주 중에서 다수성을 제외한 7개 존재범주를 지칭한다.
다자와 있음의 관련성은, 다자와 있음 양쪽 모두 합생하고 있는 주체일 수 없다는 공통성 때문에 대응관계가 성립된다. 즉 양쪽 모두 가능태이며, 직접성을 상실한 죽은 자에 해당한다. 따라서 현실적 존재자와 결합체가 합생하고 있는 주체로서의 성격을 띠고 있을 때는 다자와 있음에 해당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들이 가능태로 되었을 때는 다자와 있음으로 지칭할 수 있다.
창조성과 사물의 관련성은, 양쪽 모두가 다자를 일자로 만들어 간다는데 있다. 그리고 창조성은 삼중적인(작용인, 목적인, 초월) 임무를 갖고 있으며, 사물은 그것을 수행할 성격(대상, 주체, 자기 초월체)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대응관계가 성립된다. 그리고 존재의 범주와 관련지으면 현실적 존재자와 결합체만이 삼중적 성격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진정한 사물은 두 종류뿐이다. 그렇지만 넓은 의미로 사물을 말할 때는 존재자와 있음을 포함한 포괄적인 의미로도 쓰일 수 있다. 즉 존재의 범주 8개 모두를 지칭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화이트헤드가 사물이라고 말할 때는 창조성을 염두에 두고 하는 말이며, 있음이라고 말할 때는 다자를 염두에 두고 하는 말이며, 존재자라고 말할 때는 일자를 염두에 두고 하는 말이다. 그렇지만 「존재자, 있음, 사물」은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존재의 범주 8개 중에 상당수가 서로 중복해서 지칭할 수 있기 때문에 동의어이다.
그러나 논자가 주목한대로 「존재자, 있음, 사물」이 「일자, 다자, 창조성」과의 1 : 1 대응관계임이 밝혀짐에 따라 「존재자, 있음, 사물」의 차이점이 드러나게 되었다. 이러한 차이점의 부각을 통한 용어들의 정확한 의미는 화이트헤드의 형이상학적 구조를 이해하는데 기초가 되며, 특히 이것은 화이트헤드의 보편적 상대성 원리를 이해하는데는 필수적인 선행작업이 된다. 왜냐하면 화이트헤드의 보편적 상대성 원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있음' '존재자' 등의 의미를 정확히 알아야 되기 때문이다.
지금부터 일자와 존재자, 있음과 다자, 사물과 창조성이 대응관계를 갖고 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이 관련성을 알아보기 위해서 그 각각이 존재의 범주 중 어떤 것과 관련을 맺고 있는지를 고찰하고자 한다.






1-1. 일자와 존재자


일자와 존재자와의 관련성을 밝히기 위해서, 존재의 범주 8개 중에서 존재자라고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먼저 밝히고자 한다. 이것을 밝혀 가면 일자와 존재자와의 관련성이 뚜렷이 들어날 것이다.

'존재자'라는 말을 사용할 때는 언제나, 단서가 없는 한, 여섯 종류 가운데 어느 한 종류의 존재자(현실적 존재자, 파악, 결합체, 주체적 형식, 영원한 대상, 명제)를 말하고 있는 것이지, 다수성에 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님이 전제되어 있을 것이다.

존재자라고 말할 때는 다수성에 관해서 말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 전제되어 있다. 이 말은 존재자라는 용어가 단일성을 표현할 때 사용되어야 한다는 것이 전제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그런데 단일성은 궁극자 중에서 일자의 성질이다. 그러므로 존재자와 일자와의 관련성이 드러나게 된다. 이 점을 더욱 분명히 하기 위해서 6개 종류(단서를 단 경우에는 7개 종류)가 일자(단일성을 가진)인 존재자가 될 수 있다는 것에 대해서 언급하고자 한다. 단일성을 가진 것(일자)을 존재자라고 할 때, 7개의 존재자들(현실적 존재자, 파악, 결합체, 주체적 형식, 영원한 대상, 명제, 대비) 중에서 일자로서 쉽게 이해되는 것은 현실적 존재자와 결합체 정도밖에 없을 것이다. 나머지 5개는 일자로서의 존재자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이렇게 생각하는 데는 존재자에 대한 이해를 가로막는 두 가지 장벽이 있어서 그런 것이다.
그 장벽 중 하나는 일자로서의 존재자는 주체여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주체적 통일성의 범주가 지시하는 것처럼 주체는 통일성을 가지는 일자이다. 그런데 주체가 될 수 있는 것은 현실적 존재자와 결합체이다. 그러므로 현실적 존재자와 결합체는 일자로서의 존재자이다. 그러나 대상도 일자가 될 수 있다. 대상적 동일성의 범주가 이것을 나타낸다. 대상이지만 동일성을 가진다는 것은 단일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즉 "하나의 일관된 기능을 갖는다는 것이다". 대상도 일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받아들인다면, 순수 가능태로 대상이 되는 영원한 대상과 불순 가능태로 대상이 되는 명제가 대상으로서 일자라는 것은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의 장벽은 넘은 것이다.

'대상'이라는 말은 느낌의 구성요소가 될 가능태로서의 한 존재자a entity를 의미한다 ; 그리고 주체라는 말은 느낌의 과정에 의해서 구성되고 그 과정을 포함하는 존재자entity를 의미한다. 느끼는 자란 그 자신의 느낌들에서 출현한 통일체를 말하며, 느낌들은 그 통일체와 다양한 여건 사이를 매개하는 과정의 세밀한 부분들이다. 여건들은 느낌을 위한 가능태들이다 ; 즉 그들은 대상들이다.
둘째 장벽은 일자인 존재자를 정적이며 거시적으로만 보는 것이다. 즉 일자가 되어 가는 과정의 세부사항도 그대로 일자인 존재자라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여기서 느낌들은 그 통일체(주체로서의 일자)와 다양한 여건들(대상으로서 일자들) 사이를 매개하는 과정의 세밀한 부분들이다. 그리고 이 느낌들이 주체를 구성한다. 주체를 구성하고 있는 요소들(느낌들) 하나 하나는 일자이다. 이러한 느낌을 파악이라고 한다. 존재에서 파악들의 합생을 빼면 구체적인 것은 하나도 없다. 그래서 파악을 관계성의 구체적 사실이라고도 한다. 그러므로 파악도 일자인 존재자이다.

현실적 존재자에 대한 가장 구체적인 요소들로의 최초의 분석은, 그 현실적 존재자가 그것의 생성과정에서 생겨났던 여러 파악들의 합생임을 드러내 보여준다는 것이다. 그 다음의 모든 분석은 파악에 대한 분석이다.

그리고 미시적으로 보면 이 파악들의 구성요소들도 일자들이다. 파악을 분석하면, 파악하는 주체와 파악되는 대상과 파악하는 형식으로 나누어진다. 파악하는 주체와 대상이 일자인 존재자라는 것은 지금까지의 논의로 보아 알 수 있다. 문제는 주체적 형식이 어떻게 일자인 존재자가 되느냐 하는 것이다. 주체적 형식은 파악하는 주체가 파악하는 대상을 파악하는 형식이다. 주체적 형식이 없다면 파악하는 주체와 파악되는 대상을 관계시킬 수가 없다. 즉 주체적 형식은 파악하는 주체가 파악되는 대상을 느끼는 데 중심역할을 하는 것을 일반적인 용어로 표현하는 일자이다. 여기서 일반적인 용어라고 한 것은, 화이트헤드가 말하는 일자에 대한 기본적인 오해를 막기 위해서 사용한 것이다.
 
화이트헤드가 궁극자라고 말하는 일자는 "복합적이고 특수한 관념인 정수 일integral number one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부정관사 'a나 an', 정관사 'the', 지시사 'this나 that', 그리고 관계사 'which, what, how'의 밑바닥에 한결같이 깔려 있는 일반적인 관념을 나타낸다. 그것은 하나의 존재자가 갖는 단일성을 나타낸다"

화이트헤드가 말하는 일자는 정수 일이 아니다. 정수 일이 여러 사물들에서 추출한 특수한 관념인데 반하여, 화이트헤드의 일자는 구체적인 한 사물의 분석과정에서 드러나는 것으로, 그 사물을 형성하기 위해서 참여하고 있는 존재자의 단일성을 나타내는 일반적인 관념이다. 따라서 화이트헤드의 일자는 일반적인 관념이기 때문에 궁극자의 범주에 들어가는 것이다.
화이트헤드 철학(과정 또는 유기체의 철학)에서 과정 그 자체가 일자로서의 존재자라는 것은 새삼스러운 것이 아니다. 그리고 형식이 일자로서의 존재자라고 하는 것도 당연하다. 그러므로 파악하는 과정에 형식으로 있는 주체적 형식이 일자로서의 존재자라고 주장한다고 해도 무리가 없다.
지금까지 언급한 여섯 종류(현실적 존재자, 결합체, 영원한 대상, 명제, 파악, 주체적 형식)는 제 제각기 일자인 존재자들이다. 그러나 이제 7개 중에서 언급되지 않고 남아 있는 것은 대비이다. 대비는 그들 중의 일부를 여러 방식으로 묶어서 하나로 만드는 종합양태이다. 그래서 패턴화된 존재자라고 하는 것이다. 패턴화됨으로서 하나의 일자가 된다. 만약에 패턴화되지 못했다면 다수성과 마찬가지로 일자가 되지 못하고 다자로 있을 것이다. 이 대비는 여섯 종류 이외의 새로운 존재자들을 무한히 만들 수 있는 데, 이렇게 만들어진 대비들도 일자로서의 성질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존재자라고 한다. 그래서 화이트헤드는 "최초의 여섯 종류에 속하는 존재자 및 유적 대비는 고유한 존재자들proper entities이라고 불리게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앞의 인용문에서, "'존재자'라는 말을 사용할 때는 언제나, 단서가 없는 한, 여섯 종류 가운데 어느 한 종류의 존재자를 말하고 있는 것이지, 다수성에 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님이 전제되어 있을 것이다"고 말한 것처럼, 특별한 언급이 없이 존재자라고 하면 여섯 종류를 말한다.
그러므로 존재의 범주 8개 중에서 다수성을 제외한 7개의 존재범주가 단일성을 가졌기 때문에, 즉 일자이기 때문에 존재자라고 부른다.

 
1-2. 다자와 있음


다자로서 있는 성질을 다수성이라고 할 때, 다수성은 존재자 하나 하나가 연접적 관계를 형성하지 못하고, 이접적 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접적 관계에 있으면서도 모여 있을 때 다수성이라고 한다.

이미 말한 여섯 종류의 존재자는 저마다 하나의 다수성이다.(즉 그러한 종류의 개별적 존재자가 아니고 존재자들의 집합적collective종류들이다). 다수성은 현실세계에 대해서 단지 이접적 관계를 가질 뿐이다. 하나의 현실적 존재자에 있어 완전한 최초의 여건을 구성하는 '우주'는 하나의 다수성이다. 다수성을 마치 다른 여섯 종류 중 어느 한 종류에 속하는, 단일성을 갖는 것인 양 취급한다면 이는 논리적 착오를 유발하게 된다. ······ 다수성과 관계되는 창발적 진화emergent evolution 같은 것은 없다. 따라서 다수성에 관한 언명은 모두 그 하나하나의 구성원에 관한 선언적 언명인 것이다.

다수성에는 창발적 진화가 없다. 창발적 진화라는 것은 새로운 무엇이 만들어지고 있는 것이다. 새로운 무엇을 만들어가는 것은 다자를 통합하고 있는 일자이다. 다수성은 통합하고 있는 일자가 아니다. 다수성은 통합되는 존재자(일자)들이 통합하는 일자에게 집합적collective으로 파악된 것이다. 집합적으로 파악되는 것들끼리는 이접적인 관계를 가진다. 이접적 관계는 논리적으로 선언적이다. 이렇게 선언적으로 서로 떨어져 있는 집합을 다수성이라고 한다. 다수성과 대비되는 관념은 단일성이다. 단일성을 가질려면 다수성을 지닌 다자들에게 통일성을 획득하도록 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다수성'이라는 관념 그 자체는 과정의 형식으로부터 추상해 낸 것으로 해석되었다. 이것에 의해 여러 여건들이 하나의 새로운 여건으로 나타나는 통일성을 획득한다.

다수성이라는 관념은 통일성을 획득해가는 과정의 형식으로부터 추상한 것이다. 추상해서 다수성을 지닌 다자들은 여건들이다. 그 여건들이 현실성을 가지고 통합하는 일자(현실적 존재자)에 의해 통일성을 획득하고 나면(만족에 이르면), 현실성을 잃어버린(대상적 불멸성을 지닌) 일자가 되어 새로운 하나의 여건이 된다. 이 여건은 현실성을 잃어버리기는 했지만 엄연히 일자이다. 그러므로 당연히 존재자이다. 그렇지만 이 일자는 다자 중의 일자이다. 다자 중의 일자라는 것은 새롭게 통합하는 일자에게 있어서 대상들(다자들) 중의 일자라는 것이다. 일자들 하나 하나를 지칭할 때 존재자라고 하며, 이들을 한꺼번에 지칭할 때 존재자들이라고 한다. 존재자들이라고 해서 모두 다수성인 것은 아니다. 이들이 다음과 같은 조건을 갖출 때, 다수성이 된다.

다수성은 다수의 존재자들로 성립되며, 그것의 통일은 그것을 구성하고 있는 모든 존재자들이 제각기, 최소한 다른 어떤 존재자도 만족시키지 못하는 하나의 조건을 만족시킨다는 사실에 의해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어떤 특정의 다수성에 대한 진술은 다음의 어느 하나를 언급하는 진술로 표현될 수 있다. 즉 1) 그 성원들 모두를 제각기 언급하는 진술로, 아니면 2) 그 성원들 중에서 불특정한 어떤 것을 제각기 언급하는 진술로, 아니면 3) 이들 진술 가운데 어느 하나를 부정하는 진술로 표현될 수 있다. 이러한 형식으로 표현될 수 없는 진술은 모두 다수성에 대한 진술이 아니다. 설사 그것이 어떤 다수성과 깊은 관련이 있는 존재자, 즉 어떤 다수성의 각 성원과 체계적으로 관련되어 있는 존재자에 관한 진술일지라도 그렇다.

다수의 존재자들은 이접적 방식으로 있어야 다수성이 된다. 이접적 방식은 이접 상태이다. 이들이 연접해서 하나의 통일체를 형성하기 위해서는 모두에게 통하는 하나의 조건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통일체를 형성하기에 앞서서 여건으로 있는 존재자들 모두를 제각기severally 언급하거나, 그들 중의 불특정한 일부를 제각기 언급할 때는 다수성이다. 여기에서 중요한 단어는 제각기라는 것이다. 그래서 위의 두 진술 중 어느 것이 부정되도 다수의 존재자들의 모두나 일부의 제각기를 언급한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이렇게 제각기 언급하지 않은 진술은 다수성이 아닌 것이다. 그리고 다수성은 주체가 통합할 수 있는 주체 앞에 모여 있어야 한다. 다수의 존재자들이 다수성의 특성을 가진 다자로 불리기 위해서는 이러한 조건, 즉 통합하는 주체 앞에 제각기 있다는 조건을 만족해야 한다. 이렇게 통합하는 주체 앞에 제각기 있는 것, 즉 다자로 있는 것(다수성의 특성을 가진 것)을 표현할 때, 있음being이라고 표현해야 한다. 달리 말하면, 있음being이라고 표현할 때는 다자로 있음being을 염두에 두고 하는 말이다.
화이트헤드 유기체의 철학에 있어서 다자가 일자로 되는 과정은 다수성 상태로 있는 다자로부터 시작해서, 대비를 통해 통일성을 가진 존재자(결합체, 명제, 또 다른 대비 등)를 거쳐, 마지막에는 전체의 통일을 이룩하여 하나의 단일성을 가진 일자가 된다. 물론 이 일자는 다음의 합생 주체에게 다수성 상태로 있는 다자 중의 일자가 되면서 새로운 생성 과정이 시작된다. 따라서 다자로 있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합생하는 과정에 주체의 대상으로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합생 과정의 대상으로 있는 것을 지칭할 때 있음being이라고 한다.

최초의 여건으로부터 대상적 여건으로의, 제거에 의한 이행이 있다. 최초의 여건은 다수성으로 되어 있거나, 아니면 단지 하나의 고유한 존재자로 되어 있는 데 불과하다. 이에 반해 대상적 여건은 결합체이거나 명제, 또는 어떤 범주적 유형의 고유한 존재자이다.
   
최초의 여건은 아직 대비를 통한 통일화 작업을 하지 않은 상태이기 때문에 다수성으로 있거나, 그 자체로 단일성을 지닌 고유한 존재자에 불과하다. 그러나 이들이 통합과정을 거치면서 결합체, 명제, 어떤 유형의 고유한 존재자가 된다. 이 때의 어떤 유형의 고유한 존재자란 결합체와 명제의 존재 양태가 아닌 어떤 대비를 말한다. 결합체, 명제, 이와 다른 대비가 대상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4부 3장 2절에서 상세히 고찰할 것이다.
그러나 다자로 있음이라고 해서, 정수integral number 2나 3 등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일자(존재자)가 정수 일이 아니듯이 다자(있음)도 정수 2나 3 등이 아니다. 다자로 있다는 것은 이접적인 방식으로 현실태에 선행해 있다는 것이다. 이접적 방식으로 있다는 것은 통합하고 있는 일자의 입각점에서 볼 때 여건들이다. 거기에 비해서 통합하고 있는 일자는 현실태이다. 따라서 현실태의 입장에서 관련성을 가진 여건들은 이접적 방식으로 있는 다수성이고, 이 다수성은 여건이 되기 위해서 현실태에 선행해 있다.

현실태의 박동 하나 하나에 제공되는 여건들은 그 박동과의 관련 속에 존재하는exist 것으로의 선행하는 우주 전체로 이루어지고 있다. 여건으로서의 이 우주는 그것에 속한 다수의 세부사실들로 파악된 것이다. 여기서의 다수성은 선행하는 박동들의 다수성이다.

현실태에 선행해 있다는 것은 대상으로서 실현되어 있다는 것이다. 파악의 세부사실로 설명하면, 실현되어 있다는 것은 파악하는 대상들이 파악하는 주체에게 파악하는 방식에 따라 파악되고 있다는 것이다. 여건들이 대상으로서 실현되어 있다는 것은 다자로서 일자 앞에 있다는 것이며, 이런 식으로 있는 것을 있음being이라고 한다.

생성에 있어 주체적 형식은 현실적 세계로부터 선택된 여건들을 만난다. 달리 말하면 그 여건들은 이미 있음 속에in being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있음 속에'in being라는 용어는 일단 '실현되어 있는'in realization이라는 용어와 동의어로 사용되고 있다.

있음being은 다자로서 있으며, 다자로 있다는 것은 여건들로서 있는 것을 말하며, 여건들은 단순히 의식적 차원의 인식을 위한 여건들이 아니라 일자의 생성을 위한 가능태들이다. 이 가능태들(다자) 때문에 일자의 생성이 가능하다. 생성하고 있는 일자는 가능태들(다자)로 구성되어 있다. 있음being의 본성은 생성을 위한 가능태이다. "있음being이란 그 본성에 있어 모든 생성becoming을 위한 가능태라고 하는 것이다". 즉 있음being을 현실태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화이트헤드는 "모든 있음being이란 생성becoming을 위한 가능적potencial인 것이라는 형이상학적 원리".라고 하면서 이것을 하나의 원리로 보고 있다. 특히 이것을 상대성 원리라고 명명하고 있다. "있음being의 본성에는 모든 생성becoming을 위한 가능성이 속해 있다는 것 이것이 '상대성 원리'이다".
 
현실적 존재자는 그 자신의 생성의 직접성을 관장하는 주체로서, 그리고 대상적 불멸성의 기능을 행사하는 원자적 피조물인 자기 초월체로서 제각기 이해해야 한다. 그것은 '있음'이 되었는 데(It has become a 'being'), 모든 '있음'being이 모든 생성'becoming을 위한 가능태라는 것은, 모든 '있음'의 본성에 속한다.

이 인용문은 현실적 존재자의 이중성을 설명하고 있다. 이중성 중의 하나는 생성의 직접성을 관장하는 주체로서의 성격이다. 다른 하나는, 직접성을 상실한 후에 대상적 불멸성으로 기능하는 자기 초월체로서의 성격이다. 여기서 논자가 주목하고 있는 것은, '그것은 있음being이 되었다'는 구절이다. 논자는 이 구절을 '현실적 존재자는 주체에서 자기 초월체로 되었다' 라고 해석한다. 이 해석에 무리가 없다면, 화이트헤드가 자기 초월체를 있음being으로 보고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자기 초월체가 있음being이라면 주체는 무엇인가? 인용글을 통해서 분명한 것은, 주체가 있음being이 아니라는 것이다. 주체가 있음being이라면, 현실적 존재자가 있음being으로 될become 수는 없는 것이다.
그 자신의 생성의 직접성을 관장하는 주체는 앞에서 주장한 것처럼, 바로 통합하고 있는 일자로서의 존재자인 것이다. 여기서는 '통합하고 있는 일자'라는 말 대신에 '그 자신의 생성의 직접성을 관장하는 주체'라는 다른 용어로 표현되었을 뿐이다. 줄여서 말하면, '그것은 있음being이 되었다'라는 구절은 '다자를 통합하는 일자에서 다자 중의 일자가 되었다.'는 것이다. 다자 중의 일자가 되었다는 것은 주체로서의 기능은 사라지고 대상으로서의 기능만 남았다는 것이다. 주체로서의 기능이 사라졌기 때문에, 있음being으로 되어버린 자기 초월체는 현실성을 지닐 수 없고 가능성으로만 있는 죽은 자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죽은 자(자기 초월체)가 그대로 사라지지 않고 다음의 일자(주체)를 생성하는데 결정적인 영향력을 발휘한다. 여기서의 영향력이란, 자기 초월체가 대상적 불멸성을 획득하여 다음의 주체를 형성시키는데 결정적인(실재적인) 재료가 된다는 것이다. 즉 자기 초월체는 생성의 직접성을 관장하는 다음의 주체가 자기 자신을 창조하는데 결정적인 재료로서의 기능을(그 주체의 실재적 구성요소가 되는 것) 한다. 이렇게 모든 있음being(죽은 자) 속에는 생성(산 자)을 위한 가능태로서의 기능이 본래부터 있는 것이다. 죽은 자라는 재료가 없으면 산 자가 생성될 수 없다. 즉 산 자의 창조에는 죽은 자가 재료가 된다. 죽은 자를 자기 것으로 만들어서(자기화 하여) 산 자가 생겨나고, 새롭게 생겨난 자도 죽어서 다음의 산 자에게 재료가 되면서 창조가 거듭되는 것을 창조적 전진이라고 한다.

모든 관계성은 그 기초를 현실태의 관계성에 기초를 두고 있다. 이러한 관계성은 산 자가 죽은 자를 자기화appropriation하는 것, 다시 말하면 대상적 불멸성과 전적으로 관계된다. 이 불멸성에 의하여, 자기 자신의 직접성을 잃어버린 존재자는 다른 생성의 살아있는 직접성에 있어서의 실재적 구성요소가 된다. 이는 세계의 창조적 전진이란, 굽힐 수 없는 엄연한 사실을 공동으로 구성하고 있는 사물들이 생성하고, 소멸하며, 또한 대상적으로 불멸하는 것을 말한다는 학설이다.

현실적 존재자가 자기 자신의 직접성을 관장하는 주체에서 대상적 불멸성을 가진 자기 초월체가 되었다는 것은, 산 자가 죽은 자로 되었다는 말이다. 그리고 이 자기 초월체가 대상적 불멸성에 의해 다른 생성의 살아 있는 직접성에 있어서의 실재적 구성요소가 된다는 것은, 죽은 자가 산 자를 형성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죽은 자(대상)가 산 자(주체)의 생성을 위한 실재적 구성요소로서 기능을 하기 때문에 상대성 원리이다. 그래서 (대상인)다자는 (주체인)일자를 전제하고 (주체인)일자는 (대상인)다자를 전제한다. 앞에서도 인용했지만,

현실적 존재자의 있음being은 그 생성becoming에 의해 구성된다. 이것이 '과정의 원리'이다,

현실적 존재자의 있음being이란 현실적 존재자가 생성을 끝내고 만족에 이른 상태이다. 그래서 자기 초월체라고 한다. 이 자기 초월체는 무엇으로 구성되어 있는가? 그것은 만족에 이르기까지 영향을 끼친 다자들로 구성되었다. 이러한 다자들을 연접하여 일자가 되는 것이 생성이므로, 현실적 존재자의 있음being 즉 자기 초월체는 자신의 생성에 의해 구성된 것이다. 그래서 그 자기 초월체가 무엇인지를 알려면 그 초월체가 어떻게 생성되었는가에 대한 과정을 분석해 보아야한다. 이런 면 때문에 화이트헤드는 "현실적 존재자가 어떻게 생성되는가가 현실적 존재자가 무엇인가를 구성한다"고 말한다.
있음being은 다자와 관련성이 있다. 그리고 다자는 대상과 관련이 있으며, 대상은 직접성을 상실했다는 면에서 죽은 것이다. 있음being이라고 표현할 때는, 대상을 직접 통일하고 있는 주체(산 자)에게는 해당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합생하고 있는 현실적 존재자와 결합체 그 자체를 있음being으로 표현해서는 안된다.





1-3. 창조성과 사물


현실적 존재자는 죽은 자의 측면과 산 자의 측면을 동시에 갖고 있다. 이 말은 대상적 측면과 주체적 측면을 동시에 갖고 있다고 바꾸어 말할 수 있으며, 또한 현실적 존재자는 다자 중의 일자인 측면과 다자를 자기화 하는 일자의 측면을 동시에 갖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이중성 때문에 현실적 존재자를 현실적 생기라고도 한다. 여기서 생기란, 다자가 일자로 되고, 그 일자가 또 다자 중의 일자가 되어 다음의 생성 중인 일자에게 대상이 되어 가는 사건을 말한다. 이러한 사건(과정)이 바로 사물의 본성이다.

다자가 복합적인 통일(일자) 속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사물의 본성에 속한다

사물이란 다자가 일자로 들어가는 것이다. 다자가 일자로 들어간다는 것은 다자를 재료로 하여 일자가 되는 것을 말하며 이렇게 다자가 일자로 되고 있음을 생성이라고 한다. 달리 말하면 이렇게 생성 중에 있는 것을 사물이라고 한다. 존재자들 중에서 사물의 이러한 본성을 그대로 지니고 있는 것이 현실적 존재자이다. 그래서 현실적 존재자를 진정한 사물이라고도 한다. 화이트헤드의 사물은 이런 것이기 때문에, 데카르트 식의 존재하기 위해서 자기 자신 이외의 아무 것도 필요하지 않는 그런 사물은 아니다. 화이트헤드에 있어서 사물은 그것이 존재하기 위해서 타자를 반드시 필요로 한다.

데카르트의 체계 내의 관념들(존재하기 위하여 자기 자신 이외의 아무 것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은 사물의 본질을 꿰뚫어 보기에는 너무나 추상적이다.

이 타자는 물론 생성 중에 있는 주체가 받아들일 대상으로 있는 다자임은 말할 것도 없다. 이러한 다자를 모아서 지금까지 없던 새로운 일자를 생성시키는 것을 합생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이 합생의 각 사례야 말로 바로 새로운 개체적 사물이다.

합생의 각 사례는 그 자체가 새로운 개체적 사물이다. '합생'과 '새로운 사물'은 별개의 것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새로운 사물을 분석할 경우, 우리는 단지 '합생'을 발견하게 될 뿐이다.

합생의 사례는 새로운 개체적 사물이며, 현실적 존재자 또는 현실적 생기이다. 그런데 이것은 현실적 존재자(현실적 생기), 합생의 사례, 개체적 사물, 그 무엇으로 불리든지 새로운 합생을 위한 여건이 된다. 여건이 된다는 것은 새로운 통일체(일자)에게 종속되어야 할 다자가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다자는, 다자가 복합적인 통일(일자) 속으로 들어간다는 사물의 본성상 그대로 멈추어 있을 수 없다. 그러면 왜 다자가 그대로 멈출 수 없이 새로운 통일체로 들어가야만 하는가? 그 이유는 그렇게 다자가 들어가지 않으면 새로운 일자가 만들어지지(창조되지) 않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새롭게 탄생하는 일자의 입각점에서 보면 그 다자들을 자기 것으로 만들지 않고는 자신이 만들어지지(창조되지) 않기 때문이다. 창조성은 어떤 사물이든지 반드시 영향을 받아야 되기 때문에 회피할 수 없는 근본적인 사실이다. 만약에 다자를 자기 것으로 만들어서 자신을 창조해 가지 않으면 그것은 사물이 아니다.

합생의 사례는 '현실적 존재자' ― 혹은 이에 상당하는 말로서 '현실적 생기 ― 라고 불린다. 현실적 생기인 사물들로 이루어진 하나의 완결된 집합 같은 것은 없다. 왜냐하면 피할 수 없는 근본적인 사실은 창조성이며, 이 창조성에 의해 구체적 통일성에 종속되지 않는 '다수의 사물들'이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모든 현실적 생기들의 집합은 사물의 본성상, 그 다수의 현실적 생기들로부터 구체적인 통일성을 이끌어내는 또 다른 합생의 입각점이다.

창조성이 가지고 있는 최상의 임무는 다자를 일자로 변형시키는 것이다. 다자를 일자로 변형시킨다는 것은 이접적인 다수성(다자)을 대비를 통해 합생적 통일(연접적 일자)로 변형시키는 것이다.

창조성은 대립 속에 다양성을 갖는 이접적인 다수성을, 대비 속에 다양성을 갖는 합생적 통일로 변형시키는 그 최상의 임무를 수행한다.

창조성이 가지는 최상의 임무는 다자(이접적 다수성)를 일자(합생적 통일)로 변형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사물의 본성은 다자가 일자(복합적인 통일)로 들어가는 것이다. 우선 이 두 문장의 비교를 통해 창조성과 사물이 깊이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창조성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앞의 문장은 『과정과 실재』의 뒷부분이다. 그래서 다자나 일자에 대한 많은 설명을 거친 다음이라서 전문용어를 많이 사용했다. 거기에 비해 사물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뒤의 문장은 그 책의 앞부분이다. 그래서 아직까지 전문용어를 사용하지 않고 일반적인 용어로 말하고 있을 뿐이다.
여기서 강조점은, 다자를 재료로 하여 일자를 창조하는 것이 창조성의 임무이며, 또한 이것이 사물의 본성이라는 점이다. 창조성을 주어로 해서 말하면, 창조성은 사물을 창조해 가는 것을 자신의 가장 중요한 임무로 하고 있다. 반대로 사물을 주어로 해서 말하면, 사물은 본성상 창조성의 임무(작업)에 따라 자신을 창조해 간다.
창조하기 위해서는 다자를 일자로 합생해야 한다. 그런데 합생하기 위해서는, 다자가 합생하는 주체 앞에 놓여 있다는 것이 전제되어야 한다. 합생하는 주체 앞에 실제로 놓여 있는 것은 그 주체를 둘러싸고 있는 완결된 현실세계이다. 주체는 이 세계를 자기가 창조하는데 쓸 수 있는 재료로 만드는 작업을 먼저 해야 한다. 자기를 창조하는데 쓸 수 있는 재료로 만든다는 것은 여건인 다자로 만든다는 것이다. 이것을 만드는 창조성을 이행이라고 한다. 이행은 완결된 현실세계가 합생하는 주체의 여건으로 변하는 것이다.

상대적으로 완결된 현실세계를 사물의 본성에 따라 새로운 합생을 위한 여건으로 만들어 가는 창조성은 '이행'이라고 불린다. 따라서 '현실세계'라는 말은 이행 때문에 언제나 상대적인 용어로서, 새로운 합생을 위한 여건인, 전제된 현실적 생기들로 이루어진 기반을 가리키고 있다.

흔히 창조라고 하면, 새로움만 생각하기 쉽다. 물론 창조성은 새로움의 원리이다. 그러나 새롭다는 의미와 함께 만든다는 의미가 강하다. 그래서 창조라는 말은 새롭게 만든다는 것이다. 창조의 의미로 새로움만 생각하면, 합생과 이행의 두 과정 중에서 합생과정에만 창조성이 나타난다. 더 엄격하게 말하면 합생의 세 국면 중에서도 두 번째 보완적 국면에서만 새로움이 나타난다. 그러면 합생과정의 다른 국면과 이행과정에서는 창조성이 임무를 수행하지 않는가? 임무를 수행하지 않는다고 하면, 위의 인용문 "새로운 합생을 위한 여건으로 만들어가는 창조성은 '이행'이라고 불린다"는 말은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이행은 창조성이 임무 수행을 하는데 있어서 아주 중요한 과정이다. 이행의 과정을 통해서 완결적 현실세계를 여건으로 만들어 놓지 않으면, 새로움을 창출하는 합생은 불가능하다. 이행은 합생을 위한 기반을 마련하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합생을 위한 준비작업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러한 이행과정을 통해서 합생을 위해 준비를 하는 것도 또한 창조성의 중요한 임무이다. 이 임무는 크게 두 가지 기능을 하게된다. 첫째로 이행은 합생하는 주체에게 사물이 되기 위해서 필요한 재료(여건)를 주는 것이다. 왜냐하면 무에서 유가 나올 수 없기 때문이다. 둘째는 합생하는 주체의 창조성을 제약한다. 이 제약이 없으면 무엇이 만들어질지 모른다. 그렇게 함으로써 사물의 동일성이 유지된다. 그러므로 창조성은 이행과 합생의 양 과정에 모두 참여하게 된다.
지금까지 말한 창조성의 임무를 한 현실적 존재자와 관련해서 좀더 자세히 분석해 보겠다.

하나의 현실적 존재자와 관련한, 현실세계의 현실적 존재자들의 '대상화'는 그 현실적 존재자를 생겨나게 하는 작용인이 되고 있다. '만족'을 향한 '주체적 목적'은 목적인 내지 유인을 이루며, 이에 의해 결정적인 합생이 있게 된다. 그리고 저 달성된 '만족'은 창조적 목적의 내용 가운데 한 요소로서 존속된다. 이런 방식으로 창조성의 초월이 있게 된다. 그리고 이 초월은 만족된 자기 초월체를 넘어서는 현실태의 합생에 있어 과정의 갱신을 위한 결정적인 대상화를 낳는다.

한 현실적 존재자와 관련한 창조성의 임무는 삼중적이다. 첫째는 현실적 존재자의 대상화이다. 이 대상화는 그 현실적 존재자의 생성을 위한 작용인이 된다. 둘째는 만족을 향한 주체적 목적이다. 이 목적은 목적인이 되어 결정적인 합생을 이루게 된다. 셋째는 달성된 만족이 창조적 목적을 위해 초월적으로 존속된다. 이 초월은 다음의 합생을 위한 결정적인 대상화가 된다. 순수활동성인 창조성은 작용인으로서, 목적인으로서, 초월적인 것으로서의 삼중적인 임무를 갖는다. 창조성이 삼중적인 임무를 갖는 것과 마찬가지로 현실적 존재자도 삼중적인 성격을 갖는다. 이렇게 창조성이 가지고 있는 삼중적 임무에 따라 자신을 창조하는 사물을 사물 중에서도 진정한 사물이라고 한다.
따라서 현실적 존재자는 다음과 같은 삼중적인 성격을 갖는다. 즉 1) 그것은 과거에 의해 그것에 '주어진' 성격을 갖는다. 2) 그것은 합생의 과정에서 지향하는 바의 주체적 성격을 갖는다. 3) 그것은 초월적인 창조성을 규정하는, 특수한 만족의 실용적 가치인 자기 초월적 성격을 갖는다.

현실적 존재자는 여건으로서, 주체로서, 초월체로서의 삼중적 성격을 가진다. 이러한 성격은 창조성의 원초적 피조물인 신에게도 그대로 나타나게 된다. 삼중적 성격은 신에게 있어 원초적 본성, 결과적 본성, 초월적 본성으로서 나타난다. 신도 현실적 존재자이기 때문에 이것은 당연하다. 다만 신은 원초적 피조물이기 때문에 과거가 없다. 과거가 없다는 것은 신 보다 먼저 창조된 것이 없다는 것이다. 신보다 먼저 창조된 현실적 존재자가 없기 때문에, 신은 느낌에 있어 최초로 현실적 존재자(물리적 느낌)를 느낄 수 없다. 비시간성인 영원한 대상(개념적 느낌)을 느끼게 된다. 그래서 신은 물리적 느낌보다 개념적 느낌이 선행한다. 물론 신 이외의 현실적 존재자 즉 현실적 생기는 물리적 느낌이 앞선다.

'원초적인' 현실적 존재자 ― 이는 신이다 ― 의 경우에는 과거가 없다. 따라서 개념적 느낌의 이상적인 실현이 선행한다. 신이 다른 현실적 존재자와 다른 까닭은, 개념적 느낌의 파생적 성격에 관한 흄의 원칙이 신에게는 적용되지 않는다는 사실에 있다. 그러나 거기에도 여전히 동일한 삼중적인 성격이 있다.

창조성은 삼중적인 임무를 갖고 있으며, 진정한 사물은 그 임무를 수행할 수 있는 삼중적인 성격을 갖고 있다. 창조성은 사물에게 삼중적 임무를 수행케함으로써 창조를 해가는 순수활동성이다. 다시 말해서 진정한 사물이 여건도 되고 주체도 되며 초월체도 된다는 것(삼중적 성격을 가진다는 것)은 창조성의 임무에 따라 자기 자신을 창조해간다는 것이다.
존재의 범주 중에서 진정한 사물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삼중적 성격을 모두 갖춘 현실적 존재자와 결합체이다. 그렇지만 화이트헤드가 사물의 의미를 넓게 사용할 때는 존재자와 있음을 포함해서 사물이라고 사용할 때도 있다. 그러나 보통 사물이라고 말할 때는 진정한 사물을 말하고 있다.




2. 궁극자의 범주에서 상대성 원리


'모든 존재자가 다른 존재자에 내재한다'는 보편적 상대성 원리에 의하면, 궁극자의 범주는 일자와 다자와 창조성이 될 수 밖에 없다. 왜냐하면 첫째, 대상들(모든 존재자)이 주체(다른 존재자)에게 파악(내재)된다고 할 때, 구체적인 존재자들에 대한 언급 없이 그 대상들을 일반적으로 지칭하려면 다자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둘째, 대상들(모든 존재자)이 주체(다른 존재자)에게 파악(내재)된다고 할 때, 구체적인 존재자들에 대한 언급 없이 주체를 일반적으로 지칭하려면 일자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셋째, 대상들(모든 존재자)이 주체(다른 존재자)에게 파악(내재)된다고 할 때, 파악해서 새로움을 창출하는 궁극성을 창조성이라고 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즉 다자를 일자로 만들어 가는 그 무엇(힘이나 성질)을 가장 일반적으로 표현했을 때 창조성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궁극자의 범주는 이접적인 존재자들(다자)에서 연접적인 존재자(일자)로의 과정을 거쳐 창조(창조성)된 새로운 일자만큼 세계가 진전한다는 일반적인 원리를 나타낸다. 화이트헤드는 이러한 원리를 가장 궁극적인 원리라고 말한다.

궁극적인 형이상학적 원리는 이접적으로 주어진 존재자들과는 다른 또 하나의 새로운 존재자를 창조하는, 이접에서 연접으로의 진전이다. 이 새로운 존재자는 자신이 도달한 다자의 공재성인 동시에 또한 자신이 뒤에 남겨 놓은 이접적인 다자 속의 일자이기도 하다. 즉 그것은, 그 자신이 종합하는 많은 존재자들 가운데 이접적으로 있는 새로운 존재자인 것이다. 다자는 일자가 되며 그래서 다자는 하나만큼 증가된다. 존재자들은 그 본성상 연접적 통일로 나아가는 과정에 있는 이접적인 다자인 것이다.

결국 화이트헤드의 궁극적인 원리는 이접적인 다자와 그것을 수용해서 연접적인 일자로 창조 활동하는 유기체를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이것에 해당하는 궁극자의 범주가 다자, 일자, 창조성인 것이다. 그래서 지금부터 주체와 대상간의 상대성을 강조하는 상대성 원리에 입각하여 궁극자의 범주 개념, 대상으로서의 다자, 주체로서의 일자, 일자와 다자를 관계시키는 창조성의 절로 나누어 언급하고자 한다.





2.1 궁극자의 범주 개념


화이트헤드 궁극자의 범주는 창조성, 다자, 일자이다. "이 세 개의 개념은 보다 특수한 모든 범주의 전제가 되고 있다." 여기서 보다 특수한 모든 범주란 존재의 범주와 설명의 범주와 범주적 의무이다. "존재의 범주는 모든 존재자가 그 특수사례가 된다. 설명의 범주는 모든 설명이 그 특수사례가 된다. 범주적 의무는 모든 의무가 그 특수한 사례가 된다. 거기에 비해서 궁극자의 범주는 이 세 개의 보다 특수한 범주에서 전제되는 일반적인 원리를 표현하고 있다." 여기서 일반적인 원리라고 표현한 것은 궁극자라고 해서 어떤 창조주라는 위격으로서의 절대자를 연상하거나, 부동의 원동자와 같은 일자가 아니라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그러면 화이트헤드 철학에서는 왜 궁극자가 일자이지 않는가? 즉 궁극자에 다자와 창조성이 들어가는가? 일반적으로 창조주라고 부르는 신은, 화이트헤드의 형이상학 체계에 있어서 "창조성의 원생적인oboriginal 사례이며, 어떤 제약 아래 창조성의 활동을 하게 하는 원생적 조건이다." 또한 창조성은 이 원생적 사례이며, 원생적 조건인 신에 의해서 제약을 받기 때문에 임의대로 움직이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신은 창조성의 사례이며, 창조성은 그 사례를 통해서 제약을 받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제약을 받은 창조성은 우유적이다. 그러므로 신도 원초적이고 비시간적이지만 우유적이다. 그러나 그 근원적인 창조성은 우유적인 것이 아니지만, 우유적인 것을 떠나서는 현실성을 잃어버린다. 그리고 우유를 통해서만 그 특성이 규정될 수 있다.

무릇 철학 이론에는 우유성에 힘입어 현실적인 것이 되는, 어떤 궁극자가 존재한다. 그것은 오직 그 우유적인 것들의 구현을 통해서만 그 특성이 규정될 수 있는 것인데, 그러한 우유성으로부터 단절될 때 그것은 현실성을 잃게 된다. 유기체의 철학에서는 이런 궁극자를 가리켜 창조성이라고 부른다. 그리하여 신은 그것의 원초적인 비시간적 우유성이다.

스피노자의 철학이나 절대적 관념론자 등의 일원론자들은 궁극자에게 우유적인 것들을 초월하는 최종적인 어떤 탁월한 실재성을 부여해서 그를 절대자나 신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화이트헤드는 우유성을 초월한 실재성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 대신에 우유성과 관계하고 있는 실재성을 인정한다. 우유성과 관계하고 있는 실재성이란, 관계가 일어나고 있는 과정이 최종적인 실재 즉 궁극자라는 것이다. 그런데 서아시아나 유럽의 사상은 사실을 궁극자로 여기는데 비해서 인도나 중국의 사상은 과정을 궁극자로  여긴다. 이것 때문에 화이트헤드는 "유기체 철학은 서아시아나 유럽의 사상보다는 인도나 중국의 사상 기조에 더 가까운 것으로 생각된다"고 하였다. 유기체의 철학이 인도나 중국의 사상에 가깝지만, 유럽의 사상 중에서는 플라톤의 티마이오스와 가깝다.

유기체의 철학이 단지 플라톤을 되풀이 하고 있는 또 하나의 중요한 점이 있다. 『티마이오스』에서 현재의 우주시대의 기원은 우리의 혼돈된 관념에 따라 태고적의 무질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이것이 유기체의 철학에서 진화설이다. 플라톤의 개념은, 전적으로 초월적인 신이 무로부터 우유적인 우주를 창조한다고 보는 셈족의 이론에 사로잡혀 있는 비평가들을 곤혹스럽게 해 왔다. 뉴턴은 셈족의 이론을 고수하였다.
플라톤의 티마이오스 우주론에서는, 전적으로 초월적인 신이 무로부터 우주를 창조한다는 점을 거부하고 있다. 그 우주론에서 신은 이미 존재하고 있었던 무질서 상태의 우주에다 질서를 부여한다.

『티마이오스』에 있어서 세계의 창조는 우주시대를 확립하는 어떤 유형의 질서의 도래이다. 그것은 사태의 발단이 아니라, 일정한 유형의 사회적 질서의 도래인 것이다.

티마이오스에 있어서 세계의 창조는 사태의 발단이 아니다. 즉 세계의 시작이 아니다. 그것은 질서의 도래이다. 화이트헤드의 우주론도 마찬가지다. 무에서 유가 나올 수 없다. 유에서 유가 나온다. 앞의 유는 다자이고, 뒤의 유는 일자이다. 그러므로 다자에서 새로운 일자가 나온다. 이것이 창조성의 원리이다. 이 세계의 모든 사물은 창조성의 원리에 따라 다자에서 새로운 일자를 만들어 간다. 모든 사물은 이렇게 창조활동을 하기 때문에 유기체이다. 그리고 이러한 유기체가 자신을 창조해 가는 것을 떠나서 더 궁극적인 것은 없다.
따라서 화이트헤드의 궁극자의 원리는 다자를 합생해서 새로운 일자를 창조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새로운 일자는 곧 다자 중의 일자가 되어, 다음의 합생하고 있는 일자에게 여건이 된다. 합생하고 있는 일자는 이 여건을 포함한 다자를 합생해서 또 다른 일자가 된다. 그러므로 여기서의 다자는 합생하고 있는 일자의 대상들이다. 그런데 이 대상은 단순히 의식상의 대상이 아니다. 대상이 구체적으로 합생하는 일자인 주체 쪽으로 들어가서 주체를 형성한다. 그래서 다자인 대상은 합생하는 일자인 주체의 실재적 내적구조를 이루게 된다.
이 일자의 내적구조 속에는 다자가 들어가 있다. 달리 말해서 다자가 들어가지 않으면 일자가 형성될 수 없다. 이런 면에서 일자는 다자를 전제로 하고 있다. 즉 다자가 없이는 일자가 생성될 수 없다. 그리고 다자는 합생하는 일자 앞에 있기 때문에 다자로서 성립된다. 이런 면에서 다자는 일자를 전제하고 있다. 즉 일자 없이는 다자가 성립될 수 없다. 그래서 화이트헤드는, "다자라는 용어는 일자라는 용어를 전제하고, 일자라는 용어는 다자라는 용어를 전제한다"고 말한다. 그 예로 다음을 들 수 있다.   
신은 일자이고 세계는 다자라고 말하는 것은, 세계는 일자이고 신은 다자라고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참이다.

신은 일자이고 세계는 다자라고 할 때의 신은 합생하는 일자로서의 주체이고 세계는 합생되는 대상이다. 그리고 세계는 일자이고 신은 다자라고 할 때의 세계는 합생하는 주체이고 신은 합생되는 대상이다. 신과 세계는 모두 만족에 이르면 다자 중의 일자가 되어 다음의 합생하는 주체에게 대상이 된다. 그러므로 신의 입각점에서 보면, 신 자신은 합생하는 일자이고 세계는 합생되는 대상이 된다. 그러나 세계의 입각점에서 보면, 세계 자신은 합생하는 일자가 되고 신은 합생되는 다자가 된다.

한편에서는 일자가 다자가 되어가며, 다른 한편에서는 다자가 일자가 되어 간다.

이렇게 일자로서의 존재자와 다자로서의 존재자가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다. 일자로서의 생을 마치면 다자가 되고, 그 다자는 새로운 일자를 형성해 간다. 일자가 다자로 되는 과정은 이행이고, 다자가 일자로 되는 과정은 합생이다. 그리고 이 합생과 이행의 두 과정은 창조의 과정이다. 이 과정을 진행시키는 힘은 창조성이다. 그러므로 화이트헤드 철학에 있어서 가장 궁극적인 것은 이 창조성과 일자와 다자이다. 이 세 가지를 떠나서는 더 궁극적인 것은 없다.





2.2 주체로서 일자
 

화이트헤드에게 있어서 일자는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가? 앞에서도 언급했듯이(4부 1장 1절) 화이트헤드가 말하는 일자를 정수 일로 생각해서는 안된다. 정수 일은 여러 사물들에서 추출한 특수한 개념인데 반하여, 화이트헤드의 일자는 구체적인 한 사물의 분석과정에서 드러나는 것으로, 그 사물을 형성하기 위해서 참여하고 있는 것 중에서 단일성을 나타내는 존재자를 의미하는 일반적인 관념이다.
일반적인 관념으로서의 일자라는 말의 의미는, 모든 존재자를 각각 지칭할 때 일자가 된다는 것이다. 다르게 말하면 이 세계에 있는 어떤 존재자라도 그 각각을 지칭할 때 그 존재자의 명칭을 사용하지 않고 일반적으로 지칭할 때는 일자라고 한다는 것이다. 물론 그 각각에는 거기에 해당하는 명칭들이 있다. 존재에 대하여 그 각각에 해당하는 명칭을 붙일 수 있는 것 중 최상류에 해당하는 것이 존재의 범주들이다. 그러나 이 존재의 범주들이라도 그 각각을 지칭하면서 일반적으로 말할 때는 일자라고 한다.
그러면 일자에는 어떤 것이 속해 있는가? 크게 두 종류로 나눌 수 있다. 첫째, '다자가 일자 속에 들어간다'고 할 때의 일자이다. 이 일자는 합생하는 주체이며, 자신을 형성하기 위하여 스스로 활동하고 있는 직접성이다. 이러한 주체에 해당하는 존재자는 현실적 존재자와 결합체이다. 이들은 자기 앞에 놓여진 다자들을 여건으로서 받아들여서 자기 것으로 만들어 가고 있다. 이렇게 다자를 자기 것으로 만들어 가는 것을 자기화라고 한다. 그래서 이러한 일자를 달리 말하면, 자기화해 가는 일자 혹은 합생하는 일자라고 할 수 있다.
둘째, '다자 중의 일자'라고 할 때의 일자이다. 이 일자는 자기화 혹은 합생이 끝난 일자이다. 즉 주체적 직접성을 상실한 일자이다. 그래서 이 일자는 후속하는 일자(주체적 직접성을 가지고 있는, 합생하고 있는, 자기화하고 있는)에게 자기화 되기 위해서 대기하고 있는 다자 중의 일자가 된 것이다. 즉 대상이 된 것이다. 이러한 대상에 해당하는 존재자는, 자신의 생을 마치고 다음의 합생하는 주체에게 대상화된 현실적 존재자와 결합체가 있다. 그리고 영원한 대상, 명제, 파악, 주체적 형식이 있다. 마지막으로 지금까지 말한 존재자들 중의 전부나 일부가 결합되어 패턴화된 대비가 있다.
일자에 해당하는 존재자들 중에서 두 종류 모두에 속하는 것은 현실적 존재자와 결합체이다. 이 현실적 존재자와 결합체가 합생하고 있을 때는 주체가 되어 '다자가 일자 속에 들어간다'고 할 때의 일자가 되고, 이들이 합생을 마치고 만족에 이르면 대상이 되어 '다자 중의 일자'가 된다. 다자 중의 일자로 있다는 것은 이미 주체의 대상이 되었다는 말이며, 이것을 화이트헤드 유기체의 철학에서는 경험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 경험을 주체가 대상을 '자기화'한다고 말하며, 또한 이것을 '자기 향유'self-enjoyment라고도 한다.

유기체의 철학은 경험을, '다자 속의 일자로 있다는, 또는 다자의 구조에서 생기는 일자로서 있다는 자기 향유'를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한다. 그런데 데카르트는 경험을, '개체적 실체가 관념에 의해 규정되는 자기 자신을 향유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유기체의 철학이 다자인 대상을 자기 향유하여 일자인 자신을 형성해 가는 것에 비해서 데카르트의 철학은 관념에 의해 규정되는 자기 자신을 향유하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데카르트의 철학은 경험을 의식적인 것으로 한정하고 있다. 거기에 비해서 유기체의 철학은 경험을 정서적인 것까지 확대해서 해석하고 있다.

[나는] 주체-대상관계가 경험의 기본적 구조의 패턴이라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는 점에는] 동의하지만, 주체 대상이 인식자와 인식되는 것간의 관계와 동일시된다는 의미로는 동의하지 않는다. ······ 경험의 기본 토대는 정서적인 것emotional이다.

화이트헤드는 경험을 의식적인 것으로만 여기는 것이 아니라, 의식보다 더 근원적인 경험에 해당하는 물리적인 경험을 포함하고 있다. 물리적인 경험이란 물리적인 환경을 수용해서 자기 것으로 만들어 가는 것을 말한다. 이것 때문에 유기체의 창조가 성립된다. 예를 들면 나무가 물과 공기와 태양 빛을 받아들이고(경험하여) 이들을 모아서 하나의 영양분(합생해서 생긴 새로운 일자)을 만든다. 그리고 이 영양분이 나무의 줄기와 뿌리와 잎을 형성시키는 것이다. 즉 이러한 경험을 통해서 나무라는 일자 자신이 있게(생존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원리를 식물에게 뿐만 아니라 의식이 있다고는 생각하기 어려운 일반 사물에게까지 확대 적용한 것이 화이트헤드 유기체의 철학이다. 화이트헤드가 자신의 철학을 유기체의 철학이라고 이름 붙인 이유도 이러한 원리의 확장에 있다. 이 세상의 모든 사물은 자신이 형성되기 위해서는 자기를 둘러싸고 있는 환경(완결된 현실세계인 다자)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리고 그것들을 받아들여서 자신을 형성해 간다. 즉 새로운 일자를 만들어 간다. 이 원리는 모든 사물에 적용된다.
화이트헤드의 일자는 자신이 생존하기 위해서 반드시 다자를 자기 것으로 만들어 가거나(다자를 합생하는 일자), 일자에게 수용되는(다자 중의 일자) 어떤 구체적인 존재자에 대한 일반적인 관념이다. 다시 말해서 그것은, 합생하는 주체로서의 일자이거나 합생되는 대상들 중의 일자이다. 이 일자에 해당하는 것은 존재의 범주 중에서 다수성을 제외한 7개 종류가 된다. 즉 현실적 존재자, 결합체, 파악, 주체적 형식, 영원한 대상, 명제, 그리고 이들 6개 종류의 존재자를 결합하여 하나의 패턴을 이룬 대비이다.





2.3 대상으로서 다자


합생하는 일자 앞에서 합생하기 위해서 대기하고 있는 다자는 다수성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 다수성은 존재existence 범주 중 다수성을 제외한 존재자들entities로 형성되어 있다. 이 때의 존재자들은 위에서 언급한 '다자 중의 일자'이다. 즉 합생을 끝낸 현실적 존재자와 결합체, 영원한 대상과 명제, 파악과 주체적 형식, 패턴화된 대비들이 있다. 이 존재자들이 합생하는 주체 앞에 이접적 방식으로 모여서 통일체를 이룬 것을 다수성이라고 한다. 그렇지만 이들 하나 하나는 일자들이다. 다수성은 단일성을 지닌 존재자들이 합생과정 속으로 들어가기 위해서 통일체를 이루고 있는 것을 말한다.

다수성은 단지 그 하나 하나의 구성원을 통해서 과정 속으로 들어갈 뿐이다. 다수성에 대해서 할 수 있는 유일한 언명이 있다면, 그것은 그 하나 하나의 구성원이 현실적 세계의 과정에 어떻게 들어가느냐를 표현하는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과정 속에 들어가는 존재자는 모두 다수성에 속하게 되지만, 그렇지 않는 다른 존재자는 이에 속하지 않는다. 다수성은 이 목적을 위해서, 그리고 오직 이 목적을 위해서만 통일체로 취급된다.

다수성이 통일체로 취급될 때는 오직 과정 속에 개별적으로 들어가지만 집합적으로 있을 때이다. 그리고 여기서 개별적이지만 집합적으로 있다는 것은 합생하는 주체 앞에서 이접적 관계를 가지는 것을 말한다. 합생하는 주체 앞에서 이접적 관계로 다수성을 이루고 있는 것은 그 주체에 있어서 완전한 최초의 여건을 구성하는 우주이다.

하나의 현실적 존재자에 있어 완전한 최초의 여건을 구성하는 '우주'는 하나의 다수성이다. 다수성을 마치 다른 여섯 종류 중 어느 한 종류에 속하는, 단일성을 갖는 것인양 취급한다면 이는 논리적 착오를 유발하게 된다. 어느 때고 '존재자'라는 말을 사용할 때면, 단서가 없는한, 여섯 종류 가운데 어느 한 종류의 존재자를 말하고 있는 것이지, 다수성에 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님이 전제되어 있을 것이다.

합생하는 주체 앞에 있는 최초의 여건은 다수성이다. 여기에서 출발하여 이 다수성들이 부분적으로 패턴화되면서 대비로 통합해 간다. 그리고 계속해서 대비의 대비로 통합되다가 종국에 가서는 다수성 상태가 아니라, 하나의 단일성을 가진 존재자로 통합된다. 이것이 새로운 일자가 창조되는 과정이다. 즉 이 과정은 다수성으로 있는 여건을 대비를 통한 통합 단계를 거쳐 단일성을 가진 존재자로 만드는 과정이다.
다수성에 관한 언명이 선언적 언명이라는 것은 그 다수성에 속하는 존재자들은 이접적 관계를 가진다는 것이다. 존재의 범주 8개 중에서 대비와 다수성을 제외한 6개는 일반적으로 단일성을 지니기 때문에 존재자라고 말한다. 여기에 패턴화된 대비를 더하여 고유한 존재자라고 할 수 있으나, 다수성을 존재자라고는 할 수 없다. 왜냐하면 다수성을 지닌 것을 다자라고 하고, 단일성을 지닌 존재자를 일자라고 하는데, 일자와 다자가 서로 전제하고 있지만 일자를 그대로 다자라고 하거나, 다자를 그대로 일자라고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수성은 합생하는 주체가 될 수 없으며 여건일 뿐이다. 그 이유는 다수성이 창발적 진화를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점에 대해서는 앞에서(4부 1장 2절) 이미 언급했었다. 다수성은 다수의 존재자들로 이루어져 있다. 이 때의 다수의 존재자들은 존재의 범주 중에서 다수성을 제외한 나머지 7개 존재의 범주들이다. 이 7개 존재의 범주들 중 어떤 존재의 범주도 만족시키지 못하는 조건을 다수성은 만족시킨다. 그 조건은 주체 앞에 모여 있어야 한다는 것이며, 제각기 언급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수성에 대한 지금까지의 진술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다수성은 합생하는 주체가 될 수 없으며, 대상으로 있어야 한다. 둘째 다수성은 단일성인 존재자는 아니며, 존재자들의 집합이다. 셋째 단일성인 존재자들이 모여서 통일체를 형성해야 하며, 그 통일체 안에 있는 존재자들을 제각기 언급해야 한다. 그런데 다자는 이러한 다수성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자는 대상으로 기능하며, 주체 앞에서 통일체를 이루면서도 이접적으로 있는 것이다. 이 다자에 해당하는 것은 존재의 범주 8개 모두가 해당하지만, 현실적 존재자와 결합체가 합생하는 주체로서의 성격을 띠고 있을 때는 제외된다. 즉 현실적 존재자와 결합체는 대상적 불멸성을 지닌채 대상으로서 있을 때만 다자에 들어간다.
 


2.4 일자와 다자를 매개하는 창조성


창조성이 가지는 최상의 임무는 다자를 일자로 변형시키는 것이다. 창조성은 다자를 일자로 변형시키는 순수 활동성이다. 이 순수 활동성이라는 창조성의 임무가 없으면 다자가 일자 쪽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창조성은 대립 속에 다양성을 갖는 이접적인 다수성을, 대비 속에 다양성을 갖는 합생적 통일로 변형시키는 그 최상의 임무를 수행한다.

위의 인용글에서 대립 속에 다양성을 갖는 이접적인 다수성이란 다자를 의미한다. 그리고 대비 속에 다양성을 갖는 합생적 통일은 일자를 의미한다. 그래서 위의 글은 줄여서, '창조성은 다자를 일자로 변형시키는 임무를 수행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사물의 본성은 다자가 일자로 들어가는 것이다.

사물의 본성은 다자가 일자(복합적인 통일)로 들어가는 것이다.
 
다자가 일자 속으로 들어가도록 하는 순수 활동성은 창조성이다. 그리고 이 창조성의 임무에 따라 다자를 받아들여서 새로운 일자를 창조하는 것은 사물의 본성에 속한다.
사물의 본성에서 나오는 세 가지 주요 범주적 조건이 있다. 이 세 조건은 1) 주체적 통일성의 범주 2) 대상적 동일성의 범주 3) 대상적 다양성의 범주이다. 뒤에 우리는 다섯 가지 다른 범주적 조건을 분리시킬 것이다. 그러나 지금 말한 세 가지 조건은 궁극적인 형이상학적 일반성의 외관을 띠고 있다.

사물은 다자를 합생하여 새로운 일자를 만들어(자신을 창조) 가기 위해서, 세 가지 주요 범주적 조건이 필요하다. 그 중에 주체적 통일성의 범주는 주체가 다자를 통일시키려는 성질을 본래부터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대상적 동일성의 범주는 대상이 된 여건이 만족에 이를 때까지 일관된 기능을 갖는다는 것이다. 즉 일자로서의 기능을 지속한다는 것이다. 대상적 다양성의 범주는 대상들이 제각기 일자로서의 일관된 기능을 하기 때문에 다자로서의 성격을 유지한다는 것이다.
주체적 통일성의 범주는, 주체인 일자가 그 본성상 다자를 받아들여서 통일하도록 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대상적 동일성과 대상적 다양성의 범주는 다수성이 되기 위한 조건이다. 즉 다수성을 지닌 다자가 되기 위한 조건이다. 그러므로 이 조건들은 다자가 일자로 들어가서 새로운 일자를 창조하기 위한 조건이다. 달리 말하면 이 조건들은 창조성의 임무로 다자와 일자가 서로 관계 맺도록 하는 조건이다.
이러한 조건을 가진 다자와 일자의 관계는 대상과 주체와의 관계이다. 그리고 대상과 주체를 관계시키도록 하는 것은 창조성이다. 그리고 이 창조성의 임무에 따라 관계가 일어나고 있는 것을 사건이라고 한다. 이러한 사건에 해당하지 않는 사물들은 하나도 없다. 그래서 이집트에 있는 대피라밋이 하루동안 존속하고 있는 것도 하나의 사건이다.

우리는 임의의 하루동안 대피라밋이 존속하는 것을 하나의 사건으로 고려하는 데 익숙하지 않다. 그러나 대피라밋이 하루동안 [존속하고] 있다는 자연적인 사실은 ······ 인간의 [자동차] 사고와 동일한 성질의 한 사건이다.

현재 내 앞에 있는 컴퓨터도 하나의 사건이며, 컴퓨터의 키를 두드리고 있는 나도 하나의 사건이다. 물론 이것들은 거대한 사건이다. 미시적으로는 원자나 전자도 하나의 사건이다. 왜냐하면 그 모든 것이 자기를 둘러싸고 있는 환경인 다자를 받아들여서 새로운 일자(자신)를 형성해 가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건에 해당하지 않는 것은 사물이 아니다. 왜냐하면 "사물의 본성은 다자가 일자(복합적인 통일)로 들어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창조성의 임무에 따라 다자인 대상과 일자인 주체가 관계 맺고 있지 않으면 사물이 아니다. 이러한 사물이 진정한 존재자이다. 그리고 사물의 형성에 관여할 수도 없는 존재자는 존재자가 아니다. 즉 무이다. 사건을 떠나서 더 실재적인 것은 없다. 그런데 사건은 과정이다. 그래서 화이트헤드의 주저가 『과정과 실재』이다.
화이트헤드의 과정 중 합생과정은 다자가 들어가서 새로운 일자를 형성하는 과정이고, 이행은 새로운 일자가 자신의 생을 마치고 후속하는 일자에게 대상이 되는 과정이다. 이 각 과정에 창조성의 임무가 부여된다. 창조성의 임무는 다자와 일자를 관계시켜서 새로운 사물을 만드는 것이다. 그 첫 번째 임무는 이행의 임무이다. 이행은 합생하는 일자 앞에 놓여진 현실세계를 그 일자의 여건으로 만드는 작업이다.

상대적인 완결적 현실세계를 사물의 본성에 따라 새로운 합생을 위한 여건으로 만들어 가는 창조성은 '이행'이라고 불린다. 따라서 '현실세계'라는 말은 이행 때문에 언제나 상대적인 용어로서, 새로운 합생을 위한 여건인, 전제된 현실적 생기들로 이루어진 기반을 가리키고 있다.

이행이라는 창조성의 작업 때문에 현실세계는 언제나 상대적인 용어로서 여건이 된다. 창조성은 이행과정을 통해 사물로 하여금 동일성이 유지되면서 지금까지 있었던 어떠한 것과도 다른 것을 탄생시킨다. 창조성의 두 번째 임무는 합생의 초기(호응적) 국면에서 합생하는 주체에게 그 여건(완결적 현실세계를 여건으로 만들어 놓은)을 그대로 받아 들이도록 하는 임무를 수행한다. 마지막(만족) 국면에서 합생하는 주체에게 주체적 직접성을 상실하도록 하고 대상적 불멸성으로 남도록 해서 다음의 합생하는 주체의 여건이 될 수 있도록 하는 임무를 수행한다. 이런 식으로 창조성은 이행과 합생의 양 과정에 모두 참여하게 된다.
다자와 일자를 관계시켜서 새로운 일자를 생성시키는 것은 창조성의 임무이다. 그러면 창조성은 어떻게 이런 임무를 수행하는가?

'창조성'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질료' 및 근대의 '중성적 질료'를 달리 표현한 것이다. 그러나 이 술어에는 '형상'이라든지 외적관계와 같은 것에 대한 수동적인 수용성의 관념이 들어 있지 않다. 그것은 현실세계 ― 항상 신에 의해 질서화된 안정된 요소를 갖는다고는 하나, 결코 두 번 다시 동일한 것일 수 없는 세계 ― 의 대상적 불멸성에 의해 제약을 받는 순수활동의 관념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질료'가 그 자신의 성격을 갖지 않는 것과 전적으로 동일한 의미에서 창조성은 그 자신의 특성을 갖지 않는다. 그것은 현실태의 근저에 있는 최고의 일반성을 지닌 궁극적 관념이다. 특성이란 것이 모두 그것보다 특수하기 대문에, 그것은 어떤 특성으로도 특징지어질 수 없다. 창조성은 항상 여러 제약 속에서 발견되며, 제약을 받는 것으로 기술된다.

창조성은 새로움의 원리이다. 즉 다자를 받아들여서 새로운 일자를 만들어 내는 원리이다. 화이트헤드는 창조성을 질료에 해당시키고 있다. 이것은 질료가 형상과 달리 가능성의 의미를 지니기 있는데, 이와 마찬가지로 화이트헤드의 창조성도 가능성의 의미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즉 새로움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가능성이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의 순수질료 그 자체는 생성 변화의 근저에 놓여있는 것인데, 이 점도 화이트헤드가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화이트헤드의 창조성은 결국 생성변화의 근저에 놓여 있는 것으로 새로움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순수 가능성이다. 새로움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순수 가능성은 사물들에게 새로움을 만들도록 활동시키는 가능성이기 때문에 활동 가능성이라고 한다. 그래서 창조성을 순수활동성이라고 한다. 이 순수활동성 때문에 창조가 가능한 것이다. 창조성은 이러한 순수 활동성으로서 모든 있음을, 생성을 위한 가능태로 변형시켜 간다.

있음의 본성에는 모든 생성을 위한 가능성이 속해 있다는 것 이것이 '상대성 원리'이다.

여기서 말하는 '생성을 위한 가능성'이란 창조성이다. 즉 모든 있음을  생성하는 데 필요한 질료로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창조성은 모든 있음을 질료로서의 역할을 하도록 하는 순수활동성이다. 화이트헤드 유기체의 철학에서는 자기 자신이 존재하기 위해서 타자를 필요로 하지 않는 절대적인 실체 같은 인정하지 않으며, 자기 자신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타자(다자)를 질료로 받아들여야만 한다는 상대성 원리에 따른다. 즉 타자(다자)라는 질료가 없으면 일자라는 질료는 생성되지 않으며, 일자라는 질료는 또다시 타자(다자)라는 질료가 된다. 그러므로 모든 있음에는 질료인 다자가 될 가능성이 있으며, 이 가능성 때문에 질료인 일자가 된다. 그런데 이 다자는 형상을 기다리기만 하는 수동적인 다자가 아니다. 적극적으로 새로운 일자를 형성시켜 가는 다자이다. 물론 다자로 하여금 적극적으로 새로운 일자를 형성하도록 하는 활동성은 창조성이다.       그리고 창조성은 가장 궁극적인 것이며, 보편자들의 보편자이다. 그래서 화이트헤드가 창조성을 질료에 해당시키고 있는 것은, 창조성이 어떤 특성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 특성을 가지기 시작하면 보편자가 아니라 특수자이다. 그러나 창조성이라는 보편자는 현실세계의 대상적 불멸성에 의해 제약 속에서 발견되고, 제약을 받는 것으로 기술된다. 대상적 불멸성은 완결적 현실세계이다. 그리고 제약 속에서 발견되고 제약을 받는 것으로 기술된다는 것은, 창조성이 완결적 현실세계에 의해 한계지워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한계지워지기 때문에 발견되고 기술될 수 있다. 창조성이 완결적 현실세계(대상적 불멸성)에 의해 제약을 받기 때문에, 과거를 현재와 미래로 이어가는 계승의 가능성과 안정성이 확보된다. 이 가능성과 안정성이 질서의 기반이며, 또한 창조의 토대가 된다.
창조성이 관계시키고 있는 다자와 일자는 이행과 합생의 과정을 겪으면서 서로가 서로를 전제하게 된다. 그 대표적인 예로서 신과 세계를 들 수 있다.

모든 점에서 신과 세계는 그들의 과정과 관련하여 서로 역으로 움직인다. 신은 원초적으로 일자이다. 즉 신은 다수의 가능적 형상들의 관련성에 대한 원초적 통일이다. 과정에서 신은 결과적 다양성을 획득하고, 원초적 성격은 이러한 다양성을 그 자신의 통일성 속에 흡수한다. 세계는 원초적으로 다자, 즉 물리적 유한성을 지닌 다수의 현실적 생기들이다. 과정에서 세계는 결과적 통일성을 획득하는데, 이 통일성은 하나의 새로운 생기로서, 원초적 성격의 다양성 속으로 흡수된다. 따라서 신은, 세계가 다자이면서 일자인 것으로 간주되어야 하는 것과는 정반대의 의미에서, 일자이면서 다자인 것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신이 다수의 가능적 형상들의 관련성에 대한 원초적 통일이라는 것은 신이 영원한 대상에 대한 개념적인 무제약적 평가를 하는 일자라는 것이다. 이것이 신의 원초적 본성이다. 그러나 신은 한편으로 세계를 수용하면서 결과적 다양성을 획득한다. 이것이 신의 결과적 본성이다. 세계는 물리적 유한성을 지닌 다수의 현실적 생기(다자)이다. 그러나 세계도 결과적 통일성을 획득하여 새로운 일자가 된다. 신은 개념적인 일자에서 출발하고 세계는 물리적인 다자에서 출발한다는 방향의 차이는 있지만, 둘 다 일자이면서 다자이고, 다자이면서 일자라는 점은 공통적이다.
다자와 일자 그 자체는 활동적이지 않다. 움직이지 않는다. 창조성이라는 순수 활동성이 있음으로써 다자와 일자의 관계가 이루어진다. 즉 다자에서 일자로, 일자에서 다자로의 흐름이 이루어진다. 이렇게 다자와 일자를 관계시켜서 흐름을 일으키는 창조성을 순수 활동성이라고 한다. 그러면 왜 활동성이라고 하지 않고 순수 활동성이라고 했는가? 그것은 다자를 일자로 들어가도록 하는 역할만 하기 때문이다. 나머지의 역할은 신이라는 현실적 존재자가 하며, 그리고 나머지 부분은 주체인 현실적 존재자들이 스스로 하기 때문이다.

3. 존재의 범주에서 상대성 원리





3.1 존재의 범주에 있어서 분류


화이트헤드의 존재의 범주(Categories of Existence)는 8개이다. 화이트헤드는 『과정과 실재』에서 존재의 범주들을 나열한 후, 다음과 같은 말을 덧붙인다.

이 여덟 가지 존재의 범주들 가운데, 현실적 존재자들과 영원한 대상들은 어떤 극단적 궁극성을 띠고 나타난다. 다른 존재 유형들은 어떤 매개적 성격을 가진다. 여덟 번째 범주는 범주들의 무한 수열을 포함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대비에서 대비의 대비, 그리고 대비의 보다 높은 등급들로 무한히 나아가기 때문이다.

화이트헤드는 존재의 범주를 극단적 궁극성을 지닌 것(현실적 존재자들과 영원한 대상들)과 매개적 성격을 지닌 것(파악, 결합체, 주체적 형식, 명제, 다수성, 대비)으로 구분하고 있다. 존재의 범주들의 관계라는 측면에서 보면, 존재범주 중 궁극성을 지녔다는 것은 관계의 양극단에 있으며 매개적 성격을 지녔다는 것은 관계의 중간에 있다고 볼 수 있다. 관계의 양극단에 있는 현실적 존재자와 영원한 대상은 사물에 있어 양극을 형성한다. 즉 현실적 존재자는 물리적 극을 형성하고, 영원한 대상은 개념적 극을 형성한다. 달리 말하면 현실적 존재자는 물리적 느낌의 대상으로서 극단적 궁극성을 지니며, 영원한 대상은 개념적 느낌의 대상으로서 극단적 궁극성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 화이트헤드는 현실적 존재자를 느낄 때 물리적 느낌이라고 하고, 영원한 대상을 느낄 때 개념적 느낌이라고 한다. 이 물리적 느낌과 개념적 느낌은 한 사물의 양극을 이룬다.
관계의 중간에 있어서 매개적 성격을 지닌 존재자들은 두 가지 이상의 존재자들이 결합되어 있거나 양쪽을 매개하는 존재자이다. 그 중 파악은 주체인 현실적 존재자가 대상(다른 현실적 존재자나 영원한 대상)을 느끼는 것을 말한다. 결합체는 현실적 존재자들이 영원한 대상과 함께 하나의 패턴을 이룬 것(공재)이다. 주체적 형식은 파악하는 주체가 파악되는 대상을 파악하는 형식이다. 즉 파악하는 주체와 파악되는 대상을 형식으로 매개하는 것이다. 명제는 결합체가 주어, 영원한 대상이 술어로 된 결합이다. 다수성은 대상들이 이접 상태로 주체 앞에 집합하고 있는 것이다. 대비는 다양한 존재자들이 대비라는 양태로 결합되어 있는 것이다.
'대상들(모든 존재자)이 주체(다른 존재자)에게 파악(내재)된다'는 보편적 상대성 원리에 의하면, 존재의 범주도 위의 여덟 가지로 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화이트헤드 존재의 범주가 상대성 원리와 깊이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존재의 범주들은 상대성 원리에 따라 반드시 대상으로서의 기능을 할 수 있어야 하지만, 모두 주체일 필요는 없다. 그렇지만 존재의 범주 중에서 주체의 기능을 하는 범주가 하나는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대상들만으로는 내적관계가 성립되지 않으며, 상대성 원리가 적용되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에 대상들 사이에 내적관계가 성립되었다면, 그 때는 이미 둘 중의 하나는 주체이지 모두 대상인 것은 아니다. 그리고 주체와 대상들 사이의 내적관계가 성립되기 위해서는 주체와 대상이 어떤 형태로든 결합이 되어야 하는데, 이렇게 결합된 중간 단계도 존재의 범주이다. 따라서 화이트헤드 존재의 범주들은 주체가 될 수 있는 것과 대상이 될 수 있는 것과 매개가 될 수 있는 것으로 나눌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분류는 중복될 수 있다. 오히려 중복되기 때문에 유기체의 철학이고 과정철학이다.
화이트헤드 유기체 철학에서의 주체와 대상과 매개는 독특하다. 그 특성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유기체의 철학은 칸트 철학의 전도(顚倒)이다. 『순수이성비판』은 주관적 여건이 객관적 세계의 현상 속으로 이행해 들어가는 과정을 기술하고 있다. 유기체의 철학이 기술하려는 것은 대상적 여건이 어떻게 주체적 만족 속으로 이행해 들어가는가 하는 것, 그리고 대상적 여건에 있어서의 질서가 어떻게 주체적 만족에 있어서의 강도를 제공하는가 하는 것이다. 칸트에게 있어 세계는 주관으로부터 출현한다. 유기체의 철학에서는, 주체가 세계로부터 출현한다. - 주체라기보다는 자기 초월체가 출현한다. 그렇기 때문에 대상이란 말은 느낌의 구성 요소가 될 가능태로서의 존재를 의미하며, 주체란 말은 느낌의 과정에 의해서 구성되고 그 과정을 포함하는 존재를 의미한다. 느끼는 자feeler란 그 자신의 느낌들에서 출현한 통일체를 말하며, 느낌들은 그 통일체와 다양한 여건 사이를 매개하는 과정의 세밀한 부분들이다. 여건은 느낌을 위한 가능태로서의 존재이다. 다시 말하면 그것은 대상이다. 과정은 느낌의 미결정성을 하나의 주체적 경험의 통일성으로부터 제거해 가는 것을 말한다.

화이트헤드는 주체와 대상을 논의하는데 있어 유기체의 철학이 칸트철학과 다르다는 점을 먼저 지적하고 있다. 우선 그 순서가 반대이다. 칸트철학은 세계가 주관으로부터 출현한다. 거기에 비해서 화이트헤드 유기체의 철학은 주체가 세계로부터 출현한다. 세계에서 주체로의 방향을 화이트헤드는 물리학의 용어인 벡터로 표현하고 있다. 실제로 신을 제외한 화이트헤드의 주체는 최초로 세계라는 대상을 물리적으로 느낀다.
화이트헤드 유기체의 철학에서 대상은 느낌의 구성요소가 될 가능태를 말한다. 대상 중에 주체의 구성요소가 될 가능성이 없는 것은 하나도 없다는 것이 화이트헤드의 보편적 상대성 원리이다. 따라서 유기체의 철학에서 대상은 일단 주체를 초월했기 때문에 대상으로 불리지만, 또한 이어지는 주체에게 수용될 대상이다. 수용하는 주체는 현실태이지만 수용되는 대상은 가능태이다. 그러나 이 가능태인 대상은 주체에게 수용되어 현실태가 되고, 현실태인 주체는 대상을 수용해서 자신을 완성시키고 가능태인 대상이 된다.
화이트헤드 유기체의 철학에서 주체는 느낌의 과정에 의해서 구성되고 그 과정을 포함하는 존재이다. 유기체 철학은 존속되는 주체가 있어서 대상을 수용하는 것이 아니다. 앞에서 지적한 것처럼 칸트와 반대로 대상이 있고, 그 대상을 느끼는 느낌이라는 과정이 있으며 그 과정을 포함하는 자(느끼는 자)로서 주체가 형성된다. 이 때의 느끼는 자 즉 주체는 그 자신의 느낌들에서 출현한 통일체이다. "주체는 주어진 조건들로부터 그리고 이 조건들 속에서 만들어진다." 이 때의 조건들은 느낌들이다. 그리고 이 때의 느낌들은 통일체인 주체와 다양한 여건인 대상 사이를 매개하는 과정의 세밀한 부분이다. 즉 이 느낌들이 주체와 대상을 매개하는 역할을 하며, 이들이 바로 화이트헤드 존재의 범주 중에서 파악이다. 이 파악은 가장 실재적인 매개이다.
화이트헤드 유기체의 철학에 있어서 매개하는 과정의 역할은 중요하다. 그래서 화이트헤드는 이 과정에 나타나는 세부사항을 하나의 존재자로서 인정하여 존재의 범주에 넣고 있다. 이런 점에서 화이트헤드 유기체의 철학을 과정철학이라고도 한다. 매개하는 과정에 나타나는 세부사항을 존재의 범주에 넣어 존재자로 인정한다는 것은 과정을 겪지 않고 존속하는 실체를 철저히 부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때의 과정은 느낌의 미결정성을 하나의 주체적 경험의 통일성으로부터 제거해 가는 것을 말한다. 이 제거에 의해 느낌의 미결정성이 없어지고 모두 결정되면서 주체적 경험의 통일이 이루어지면 주체의 생성becoming이 완성된다. 이 때의 주체는 있음being이 된다. 이렇게 있는 주체를 자기 초월체superject라고 한다. 그래서 화이트헤드의 주체는 곧 자기 초월체이다. 같은 것이지만 다르게 표현하면 다음과 같다. 세계로부터 주체가 생성되는 과정은 매개인 느낌들의 통합과정이고, 통합이 끝나서 주체가 완성되면 그 주체는 즉시 소멸한다. 즉 주체적 직접성을 상실하고 대상적 불멸성만 남게 되는데, 이렇게 대상적 불멸성만 남은 주체를 자기 초월체라고 한다.





3.2 주체가 될 수 있는 존재의 범주


화이트헤드의 주체는 생성된 후에 곧 소멸한다. 이 주체는 존속되면서 변화를 겪는 것이 아니다. 같은 주체라도 생성 중일 때는 주체라 하고, 완성 후 소멸된 후에는 자기 초월체이다. 따라서 화이트헤드 유기체의 철학에서 주체와 자기 초월체가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같은 사물이다. 화이트헤드는 이러한 사물을 자기 초월적 주체subject-superject라고 부른다.

유기체의 철학에 형이상학적 학설에 있어 근본적인 점은 변화의 불변적 주체로서의 현실적 존재자라는 개념이 완전히 폐기된다는 데에 있다. 현실적 존재자는 경험하고 있는 주체이며 동시에 그 경험의 자기 초월체이기도 하다. 그것은 자기 초월적 주체이며, 이 두 측면의 기술(記述)은 어느 한 순간도 간과될 수 없다. 주체라는 술어는 현실적 존재자가 그 자신의 실재적 내적구조와 관련하여 고찰되는 경우에 주로 사용된다. 그러나 주체는 항상 자기 초월적 주체의 생략형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화이트헤드 존재의 범주에서 주체로서 역할을 하기 위해서는 다른 존재자(대상)들을 수용해서 자신의 내적구조를 형성할 수 있어야 한다. 이렇게 다른 존재자들을 자신의 내적구조로 수용해서 새로운 존재자를 만드는 것을 화이트헤드는 합생이라고 한다. 따라서 화이트헤드의 주체는 엄밀한 의미에서 '합생하는 주체'의 약자라고 보아야 한다. 그래서 화이트헤드도 주체라는 술어는 현실적 존재자가 그 자신의 내적구조와 관련해서 고찰되는 경우에 주로 사용함을 지적하고 있다.
그러나 이 주체도 합생을 마치고 만족에 이르면 더 이상 이러한 역할을 수행하지 않고 대상적 불멸성을 획득하여 다음의 합생하는 주체에게 대상이 된다. 이렇게 대상이 된 주체는 자기 초월체이다. 이 자기 초월체는 주체적 직접성을 상실했기 때문에 어떤 의미에서는 주체가 아니다.  화이트헤드는 주체와 자기 초월체의 두 가지 성격을 가진 사물을 자기 초월적 주체라고 하는데, 또한 이것을 줄여서 주체라 부르고 있다. 그래서 주체라고 했을 때는 이 두 가지 의미를 함께 갖고 있음을 분명히 해야 한다.
자기 초월적 주체는 실체가 아니기 때문에 화이트헤드는 "어떤 주체도 두 번 다시 경험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리고 "영속하는 것은 실체가 아니라 형상이다"고 말한다. 이 말은 영속하는 것은 주체가 아니라 대상이라는 말이다.

현실적 존재자는 주체적으로는 끊임없이 소멸되지만 대상적으로는 불멸한다. 현실태는 소멸될 때 주체적 직접성을 상실하는 반면 대상성을 획득한다. 그것은 그 불안정의 내적 원리인 목적인을 상실하지만 작용인을 획득한다. 이 작용인으로 말미암아 그것은 창조성을 특징짓는 의무의 근거가 된다.
       
현실적 존재자는 끊임없이 생성 소멸한다. 소멸될 때는 주체에서 대상으로 바뀐다. 그렇다고 "현실적 존재자가 '주체'이자 동시에 '대상'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 현실성이 완성되었을 때에 한해서 타자를 위해 대상화되는 것이다." 대상이 된 현실적 존재자는 주체로서의 기능인 목적인을 상실하지만, 다음의 합생하는 주체에게 대상으로서의 기능인 작용인을 획득한다. 작용인을 획득해 대상으로서 기능함으로써 다음의 합생하는 주체에게 의무를 지니게 한다. 목적인은 주체적 직접성이 지닌 원인이고, 작용인은 대상적 불멸성이 지닌 원인이다.
그러면 존재의 범주 8개(현실적 존재자, 결합체, 파악, 영원한 대상, 주체적 형식, 다수성, 대비) 중에서 주체로서의 역할을 담당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현실적 존재자들은 그들 상호간의 파악에 의해서 서로를 포섭한다. 그렇기 때문에 현실적 존재자들의 공재라는 실재적인 개별적 사실이 나타난다. 현실적 존재자와 파악이 실재적이고 개별적이며 개체적이라는 것과 동일한 의미에서 실재적이고 개별적이며 개체적인, 현실적 존재자들의 공재라는 이와 같은 개체적 사실은 모두 결합체라 불린다. 직접적인 현실적 경험에 있어 궁극적 사실은 현실적 존재자와 파악 그리고 결합체이다. 그 밖의 모든 것은 우리의 경험에 있어서 파생적인 추상물에 지나지 않는다.

현실적 존재자, 파악, 결합체가 직접적인 경험에 있어 궁극적 사실이고, 나머지는 파생적인 추상물이기 때문에 이 세 가지를 제외한 존재의 범주들은 주체가 될 수 없다. 그리고 이 세 가지 중에서 파악은 주체로서의 역할을 할 수가 없다. 이것에 대해서는 다음 절에서 논의할 것이다.
현실적 존재자와 결합체를 제외한 존재의 범주들은 왜 주체로서의 역할을 담당할 수 없는가? 주체로서의 역할을 담당하기 위해서는 대상인 가능태를 받아들일 수 있는 현실태 이어야 한다. 그런데 다른 범주들은 대부분 가능태(영원한 대상, 명제, 다수성, 대비)이거나 매개(파악, 주체적 형식)의 성격을 갖고 있다. 이것에 대해서는 이 장의 2절과 3절에서 상세히 다룰 것이다. 여기서는 현실태로서 주체가 될 수 있는 현실적 존재자와 결합체에 대해서 분석하고자 한다.
현실적 존재자를 세부적으로 분석해 보면, 현실적 존재자 그대로 주체가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현실적 존재자는 3중의 성격을 갖는다.

ⅰ) 그것은 과거에 의해 그것에 주어진 성격을 갖는다.
ⅱ) 그것은 합생의 과정에서 지향하는 바의 주체적 성격을 갖는          다.
ⅲ) 그것은 초월적인 창조성을 규정하는, 특수한 만족의 실용적          가치인 자기 초월적 성격을 갖는다.
위의 세 가지 중 2번의 성격을 지닌 현실적 존재자만 주체의 역할을 한다. 1번의 성격을 지닌 것은 과거의 현실적 존재자이다. 3번의 성격을 지닌 것은 만족에 이르러 자신을 초월해 가는 현실적 존재자이다. "만족은 실체나 주체라기보다는 오히려 자기 초월체이다." 물론 이 초월적인 현실적 존재자는 다음의 합생하는 과정 중의 현실적 존재자에게 주어진 성격을 지니기 때문에 과거의 현실적 존재자이다.
위의 내용을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도 있겠다. 주체적 성격을 지닌 현실적 존재자를 현재의 현실적 존재자라고 한다면, 이 현실적 존재자를 기준으로 보았을 때 1번의 현실적 존재자를 과거의 현실적 존재자라 하고, 3번의 현실적 존재자를 미래의 현실적 존재자라고 할 수 있다. 과거의 현실적 존재자는 현재의 현실적 존재자가 수용해야 할 대상이다. 그래서 가능태이다. 미래의 현실적 존재자는 아직 실현되지 않았으니까 그렇게 실현될 존재자이다. 그리고 미래에 가서 실현된다고 하더라도, 이 현실적 존재자는 완료된 상태를 말하기 때문에 현재의 현실적 존재자를 초월한 것이다. 현재의 현실적 존재자를 초월한 이 현실적 존재자는 다음의 합생하는 현실적 존재자에게 대상이 된다. 결국 1번과 3번의 현실적 존재자는 주체가 아니라 대상이며, 2번의 현실적 존재자만 주체가 된다.
따라서 현실적 존재자를 주체라고 말할 때는 2번의 성격을 지닌 현실적 존재자를 말하며, 1번과 3번의 성격을 지닌 현실적 존재자는 제외해야 한다. 왜냐하면 1번과 3번의 성격을 지닌 현실적 존재자는 공공성과 관련된 자기 초월체이며, 2번의 성격을 지닌 현실적 존재자는 사사성과 관련된 된 주체이기 때문이다.

사물의 공공성과 관련시켜 고찰된 현실적 존재자는 자기 초월체이다. 즉 그것은 자신이 찾아낸 공공성에서 생기고, 그것이 전달하는 공공성에 자기 자신을 부가시킨다. 그것은 결정된 공공적 사실로부터 새로운 공공적 사실로의 추이의 요소이다. 공공적 사실은 본성상 등위적이다.
사물의 사사성과 관련시켜 고찰된 현실적 존재자는 주체이다. 즉 그것은 자기 향유의 발생의 요소이다. 그것은, 그 공공성을 통해 손에 들어오는 소재로부터의 합목적인 자기 창조로 구성되고 있다.

이 인용문에서 "자신이 찾아낸 공공성에서 생기고", "결정된 공공적 사실", "그 공공성을 통해 손에 들어오는 소재"는 1번의 성격을 지닌 현실적 존재자를 말한다. "그것이 전달하는 공공성에 자기 자신을 부가시킨다"와 "새로운 공공적 사실로의 추이의 요소이다"는 3번의 성격을 지닌 현실적 존재자를 말한다. 어쨌든 이들은 자기 초월체이다. 여기에 비해 "사물의 사사성과 관련시켜 고찰된 현실적 존재자"는 2번의 성격을 지닌 현실적 존재자이며 주체이다. 이 주체는 최초의 목적을 향해 자기 앞에 주어진 소재들을 향유해서 새로움을 발생시킨다.
이번에는 존재의 범주 중에서 결합체는 주체라 할 수 있는가. 그리고 결합체를 주체라 하더라도 결합체 모두를 주체라 할 수 있는가에 대해 알 아 보겠다. 주체는 현실태이거나 적어도 현실태가 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왜냐하면 현실태가 아니고는 외부 대상을 수용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결합체를 주체라 할 수 있는가의 물음은 결합체가 현실태인가 아닌가의 물음에서 시작해도 될 것이다.

많은 현실태로 된 결합체가 마치 하나의 현실태인 양 다루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분자나 바윗덩이나 인체와 같은 것들의 수명을 다룰 때에 흔히 하고 있는 일이다.

우리가 분자나 바윗덩이나 인체 등의 결합체를 하나의 현실태로 보는 것은 상식의 일이다. 그리고 이들이 실재적이고 개별적이라서 하나의 개체적 사실임도 틀림없다. 그러나 이들이 주체가 되기 위해서는 개체라는 것만으로는 안된다. 자신의 목적에 따라 외부 세계를 수용해서 새로운 결합체를 만들 수 있어야 한다. 이렇게 새로운 결합체를 만들어 갈 수 없다면 단순한 현실적 존재자의 상호파악인 공재에 불과하다.
실제로 화이트헤드가 결합체를 정의한 것을 보면 단순한 공재에 불과한 것처럼 보인다. 그 단적인 예로 결합체를 공적 사태라고 한다. 물론 공적인 사태는 사적인 사태에 대비된 말이다. 그런데 주체라면 사적이어야 하지 않는가? 그래서 사적인 사태를 '주체적' 형식이라고 한다. 이 때 사적 사태인 주체적 형식은 주체가 대상을 느끼는 '방식'이기 때문에 주체 자체는 아니다. 사적 사태인 주체적 형식이 주체가 아니기 때문에 공적 사태인 결합체를 주체라고 할 수는 없다.

결합체란, 현실적 존재자들 상호간의 파악에 의해서 구성되는, 혹은 ― 동일한 것을 역으로 표현한 것인데 ― 그것들이 상호간에 대상화됨으로써 구성되는 관계성의 통일 속에 있는 한 조의 현실적 존재자들이라는 것이다.

설명의 범주에서 설명되는 결합체를 보면, 이것만으로는 결합체가 주체라는 사실을 알 수가 없다. 관계성의 통일 속에 있는 한 조의 현실적 존재자라는 것은 현실적 존재자의 공재라는 사실을 말하는 것이지, 이 공재가 주체적 목적을 가진 주체라는 사실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상식적으로 보면 현실적 존재자의 결합체인 인간 등은 주체로 보이는데, 화이트헤드는 왜 결합체를 정의하면서 주체로서의 성격을 명시하지 않았는가? 이것은 결합체가 주체로서의 성격을 전혀 내포하지 않았거나, 만약에 주체로서의 성격을 내포하고 있다면 결합체 중 일부가 주체의 성격을 지닌 경우이다.
결합체가 주체로서의 성격을 전혀 내포하지 않았다면 우리가 상식적으로 보고 있는 현실태로서의 결합체는 착각에 지나지 않는다. 이렇게 되면 인간이라는 결합체에 주체성이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어, 우리 인간들이 외부세계를 인식하는 것을 설명하기가 어렵다. 인간들뿐만 아니라 동물이나 식물도 마찬가지다. 그들도 외부세계를 각자 자기의 목적에 따라 수용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 점 때문에 생물이라는 결합체를 주체로 인정한다고 하자. 그러면 무생물은 주체로 인정할 수 있는가 ? 이러한 의문은 계속해서 일어나게 된다. 이 문제를 다루기 위해서 화이트헤드가 현실태인 존재를 분류하는 방식에 따라가 보겠다.

이 강의에서는(제2부 제3장 참조) 일반인들이나 뉴턴이 마음속에 분명하게 떠올리지 못했던 하나의 구별이 도입되고 있다. 이 구별은, ⅰ) 현실적 존재자, ⅱ) 존속체enduring object, ⅲ) 입자적 사회, ⅳ) 비입자적 사회, ⅴ) 비사회적 결합체간의 구별이다. 비사회적 결합체는 혼돈의 관념에 해당되는 것이다.

화이트헤드는 일반인들이나 뉴턴까지도 염두에 두지 못한 존재의 구별을 도입하고 있다. 이 구별되는 존재는 존재의 범주 중에서 현실태들에 해당하는 존재자들인 현실적 존재자와 결합체이다. 이 중에서 현실적 존재자가 주체일 수 있다는 것에 대해서는 이미 언급했었다. 그러나 엄밀하게 말하면 현실적 존재자 중에서도 합생하는 현실적 존재자만 주체라는 사실을 우리는 살펴보았다.
화이트헤드는 시간적인 존속성을 지니고 있는 일상적인 물체 중에서 이상적인 단순한 사례로 존속체를 들고 있다. 이 "존속체 또는 존속하는 피조물이란, 그 사회적 질서가 인격적 질서라는 특수한 형태를 취하고 있는 그런 사회이다." 여기서 "인격적 질서란 결합체가 사회일 때, 그리고 그 성원들간의 발생적 관계성이 성원들을 순차적으로 질서화할 때 향유하게 되는 것이다." "존속체는 하나의 특성을 유지한다는 의미에서 인격persona이며, 하나의 특성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은 결합체 성원들간의 발생적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이 존속체는 하나의 특성인 한정 특성을 계승하는 외줄기의 계열을 형성한다. 이렇게 존속체가 외줄기의 계열을 형성하기 위해서는 한정특성을 받아들이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 이러한 수용능력을 가졌다면 그것은 주체일 수 있다. 그래서 화이트헤드는 그 예로서 중추적인 인격을 지배하는 '존속체'를 들고 있다. 인간도 뇌 속에 신체 전체를 통활하는 생기occasion가 있고 이 생기들의 계승에 의해 형성된 존속체가 있기 때문에 인격의 지배가 가능하다. 물론 이때의 인격지배는 병리적인 경우에 소멸할 수도 있다.

통할하는 생기로부터 통할하는 생기로의 계승에 의해 형성된 존속체가 있다. 통할하는 생기들의 이러한 경로는 틀림없이, 물리적인 물질적 원자와 분리되어 뇌수의 부분에서 부분으로 굽이쳐 흐리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중추적인 인격의 지배는 단지 부분적일 뿐이며, 병리적인 경우에 있어서는 소멸되는 경향마저 있는 것이다.

"존속체 가운데 어떤 종류의 것들은 물질적 신체를 형성하지만, 또 어떤 종류의 것들은 그렇지 않다." 화이트헤드의 존속체를 물질로만 보아서는 안된다. 화이트헤드는 통할하는 생기로부터 통활하는 생기로의 계승에 의해 형성된 존속체를 분명히 정신의 존속이라고 말한다. 어쨌든 인격의 지배를 가능하게 하는 '존속체'는 통할하는 생기로부터 통할하는 생기로 이행하는 한정특성을 수용하고 전달하는 것은 분명하다. 이렇게 어떤 특성을 수용하고 전달할 수 있는 것은 현실태이며 주체이다.

아마도 단순한 존속체는 우리들이 일상적으로 지각하거나 생각하는 어떠한 사물보다도 더 단순할 것이다. 이것은 가장 단순한 유형의 사회이다. 그리고 이 존재가 조금이라도 지속되기 위해서는, 그 환경이 주로 그와 유사하며 단순한 존속체로 구성되어 있어야 한다. 우리가 보통 고려하고 있는 것은, 많은 가닥의 존속체들이 발견될 수 있는 보다 넓은 사회, 즉 입자적 사회이다.

화이트헤드는 존속체보다 큰 결합체를 입자적 사회라고 한다. 입자적 사회는 사회적 질서를 누리며, 그 요소들인 존속체로 분석 가능한 결합체이다. 화이트헤드의 "사회란 사회적 질서를 갖는 결합체를 말한다." "사회라는 용어는 언제나, 그 자신들 사이에 질서화된 현실적 존재자들의 결합체를 의미한다." 결합체가 사회적 질서를 향유하는 경우는 몇 가지 조건을 갖추었을 때이다.
이러한 조건을 갖춘 결합체는 구조를 갖는 사회이다. 그리고 구조를 갖는 사회는 자신 속에 종속하는 사회를 가지고 구조적인 내적관계의 일정한 패턴을 가고 있으며, 또한 자신도 보다 큰 사회에 종속되어야 한다. 그런데 종속적인 사회 안에는 구조를 갖지 못하는 결합체도 있다. 이것들은 위의 조건들을 갖추지 못한 결합체이다. 화이트헤드는 그 예로서 세포 속의 공허한 공간과 기체를 들고 있다. 세포 속의 공허한 공간은 구조적인 내적관계를 갖지 않는다. "생명이란 공허한 공간의 특성이지, 어떤 입자적 사회에 의해 점유된 공간의 특성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기체 속의 각 분자는 구조를 갖지만, 그들이 모여 있는 기체는 구조적 내적관계를 갖는다고 볼 수 없다. 이들을 비입자적 사회라고 해야 한다.
입자적 사회의 예로는 전자, 분자, 세포와 이들로 이루어진 물체나 신체 등으로 우리의 우주시대에 나타나는 전자기적 사회를 들 수 있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고려하는 것은, 존속체의 많은 가닥들이 발견되는 보다 넓은 사회, 즉 입자적 사회이다." 그래서 화이트헤드는 실재하는 의자를 입자적 사회라고 말하기도 한다. 이러한 입자적 사회는 우리의 우주시대에 통용되는 강력한 질서의 사회이다. 그러나 우리의 우주시대에도 질서의 사회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그 질서가 통하지 않는 사회도 있다.
그 예로 기하학적 사회를 들 수 있다. 기하학적 사회는 "현재의 우주시대의 관점에서 볼 때, 모든 우주시대까지 통용될 수 있는 연장적 결합의 한정특성 속에 들어 있는 소수의 미약한 질서의 요소에 의해서 완화된 거대한 혼란상태로 보이게 된다." 이러한 기하학적 사회는 "논리적 분석과 직접 직관을 통해서 순수한 연장성을 갖는 사회로 식별된다." 이러한 기하학적 사회는 입자적 사회가 아니다.
주체와 관련해서 입자적 사회와 비입자적 사회를 구분할 수 있겠는가? 먼저 비입자적 사회인 결합체가 주체로서의 기능을 한다고 보기는 어렵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공허한 공간이라든지 기체 혹은 기하하적 사회 등은 대상을 수용해서 자신을 형성시켜 갈 수 없기 때문이다. 여기에 비해서 입자적 사회는 자립해 있으며 스스로 그 자신의 근거가 된다.

여기서 일컬어지는 사회의 핵심은 그것이 자립해 있다는 것, 다시 말하면 그것은 그 자신의 근거가 되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사회는 동일한 집합명이 적용되는 존재자들의 어떤 집합 이상의 것이다. 즉 그것은 단순한 수학적 개념의 질서 이상의 것을 포함하고 있다. 사회가 성립되기 위해서는 그 각 성원들이 동일한 사회 내의 다른 성원들로부터 파생되어 나왔다는 데에 근거하여, 하나의 집합명이 그 각 성원들에게 적용되어야만 한다. 그 사회의 성원들은 그것들이 그들의 공통특성을 근거로 하여 각기 그 사회의 다른 성원들에다, 그와 같은 유사성을 낳게 되는 여러 조건을 부과하기 때문에 유사한 것들이 된다.
 
입자적 사회는 그 사회 성원들이 유사성인 공통특성을 낳도록 동일성을 유지하고 있다. 이렇게 동일성을 유지하는 힘은 자립해 있으며 그 자신이 자신의 근거이기 때문에 가능하다. 그리고 이 힘은 현실적 존재자와 더불어 주체로서의 기능을 하게 한다. "주체란 주어진 조건들로부터 그리고 이 조건들 속에서 만들어진다." 입자적 사회는 유사성을 낳게 하는 조건들을 수용해서 자신을 만들어 간다.
결합체에 속하는 것 중에는 사회적 질서에 따르지 않는 비사회적 결합체도 있다. 이 결합체에 속하는 각 구성원은 그 결합체를 하나로 묶는 한정특성을 재생시키지 않는다. 이 구성원들은 사회적 결합체의 구성원과 달리 한정특성을 재생시키는 조건을 부여받지 못한다. 그래서 이들은 한정특성을 스스로 만들어낼 수 없는 결합체이다. 그런데 이렇게 결합체를 하나의 존재자로 만드는 한정특성을 재생할 수 없다면, 어떻게 이것을 결합체라 할 수 있는가? 즉 그 존재자를 결합체라고 하는 이유가 바로 한정특성에 있는데, 그 결합체에 속하는 구성원들이 한정특성을 재생시킬 수 없는데도 이 존재자를 결합체라고 하는가에 대한 의문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이 결합체는 대상으로서의 결합체이다. 다른 임의의 주체가 어떠한 한정특성을 부과하여 하나의 결합체로 인식하는 것이다. 이것을 주체로서의 결합체로 보아서는 안된다. 결합체를 하나의 존재자로 인식하게 하는 "화이트헤드의 한정특성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실체적 형상의 개념과 유사하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의 실체적 형상은 그 실체의 지속과 함께 그 실체 속에 내재해 있다. 여기에 비해 화이트헤드의 한정특성은 지속하는 실체 속에 내재해 있는 것이 아니다.
화이트헤드 유기체의 철학에서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실체와 같이 지속되는 현실태가 없다. 현실태는 생성 소멸을 거듭한다. 지속되는 것은 현실적 존재자의 경우 영원한 대상이고 결합체의 경우 한정특성이다. 물론 한정특성은 복합적인 영원한 대상이다. 그런데 이 한정특성의 지속과정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실체적 형상이 지속하는 실체 속에 내재해 있는 것과 달리, 결합체의 구성원들에 의해 재생되고 있다. 이 재생은 결합체의 성원 상호간의 발생적 관계에 힘입고 있다.

이 재생은 그 결합체의 성원 상호간의 발생적 관계에 힘입고 있다. 따라서 한정특성은 그 결합체의 도처에서 계승되고 있는데, 이는 그 각 성원이 자신의 합생에 앞서는 결합체의 다른 성원으로부터 그 한정특성을 이어받음으로써 이루어지고 있다.

한정특성의 계승을 통해 질서가 유지되는 사회적 결합체를 넘어서는 곳에 무질서가 있다. 무질서는 사회적 결합체 밖에 비사회적 결합체가 있다는 것을 표현한 것이다. 그러나 비사회적 결합체에도 한정특성은 있다. 다만 비사회적 결합체에는 그 한정특성을 그 결합체의 성원들이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 반대로 사회적 결합체 안에서는 그 사회의 한정특성이 중요성을 띄고 있는데, 이 한정특성을 그 결합체의 성원들이 중요하게 여기지 않으면 그 사회는 쇠퇴한다. 물론 이 때의 성원들은 그 사회적 결합체의 성원인 현실적 존재자이다.

여기서 말하는 무질서란, 그 사회의 한정특성이 지니고 있는 중요성이 그 사회의 범위 밖에서는 존재하지 않게 된다는 것을 표현하는 상대적인 용어이다. 이는 그 사회가 쇠퇴할 때 그것의 한정특성이 존재하지 않게 된다는 것이 아니라, 그런 특성이 문제의 현실적 존재자를 위해서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회적 결합체(사회)의 범위 밖에 존재하는 비사회적 결합체의 존재가 무의미한 것은 아니다. 이렇게 무질서한 비사회적 결합체가 존재함으로써 질서 있는 사회적 결합체의 탄생이 가능하다. 그리고 이렇게 탄생된 사회도 어느 정도 성장을 거친 후에는 비사회적 결합체로 된다.

한 사회의 무한한 존속을 보장해줄 수 있는 이상적 질서의 완전한 달성이란 있을 수 없다. 사회란, 무질서가 그 사회의 이상과 관련하여 정의되는 경우, 바로 그런 무질서로부터 생겨나는 것이다. 그 사회가 어느 정도 성장을 거쳤을 때, 그것의 보다 넓은 환경이었던 유리한 배경은 소멸되거나 그 사회의 존속에 더 이상 유리한 것으로 작용하지 않게 된다. 이렇게 될 때 그 사회는 그 성원들의 재생을 중지하게 되며, 궁극적으로는 일정한 쇠퇴의 단계를 거친 후 소멸하게 된다.

쇠퇴의 단계를 거친 후 소멸하게 된 비사회적 결합체도 한정특성을 가지기 때문에 결합체임에는 틀림없지만, 성원들을 재생산할 수는 없다. 성원들을 재생산 할 수 없다는 것은 하나의 통일된 주체로서의 기능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성원들이 결합체로서의 특성인 그 한정특성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기 때문이다. 달리 말하면 결합체가 성원들로 하여금 한정특성을 중요하게 여기도록 못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성원들로 하여금 자신의 존재 이유인 한정특성을 재생시키도록 하지 못하는데도 불구하고 이것을 하나의 결합체로 여기는 것은, 비록 이 결합체가 주체로서의 역할은 하지 못하지만 대상으로서의 기능을 하기 때문이다. 대상으로서 기능을 한다는 것은 다른 주체가 이 결합체를 파악할 때 그 한정특성을 통해서 하나의 통일체로 본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결합체가 주체로서의 역할을 담당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 알아보았다. 결합체도 주체로서의 역할을 담당할 수 있다. 그렇지만 결합체 중에서 주체로서의 역할을 담당할 수 있는 것은 존속체와 입자적 사회이다. 그리고 이들도 주체로서의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은 대상을 받아들여서 자신을 형성하는 과정에 있을 때뿐이다. 이들도 자신의 생을 마치고 다음의 주체에게 대상이 되었을 때는 당연히 주체가 아니다.
결합체 중에서도 비입자적 사회와 비사회적 결합체는 주체로서의 역할을 할 수 없다. 그러나 이들도 대상으로서의 기능을 할 수 있다. 대상으로서 기능한다는 것은 특별한 것이 아니다. 이것은 상대성 원리에 따라 화이트헤드의 모든 존재자는 대상으로서 기능한다. 만약에 대상으로 기능할 수 없다면 그것은 화이트헤드의 존재자가 아니다. 이것에 대해서는 다음절에서 다룰 것이다.





3.3 대상이 될 수 있는 존재의 범주


존재자 중에는 대상을 파악하는 또는 내재시키는 주체적 존재자가 있어야 한다. 지금까지 주체로서의 역할을 할 수 있는 존재자가 현실적 존재자와 결합체라는 것을 살펴보았다. 이번 절에서는 8개 존재의 범주들이 모두 그 주체의 대상이 될 수 있는지를 살펴보겠다. 화이트헤드의 상대성 원리에 따르면, 모든 존재자는 대상으로서 기능한다. 이렇게 모든 존재자가 대상으로서 기능하기 때문에 우주의 연대성을 구성할 수 있다는 것이 화이트헤드의 형이상학적 성격이다.

자기 자신을 초월하는 과정 속에 이처럼 개입하는 존재자는 모두 대상으로서 기능한다고 말한다. 설명의 제4범주에 따르면, 모든 종류의 존재자가 대상으로서 기능한다는 것은, 존재자의 보편적인 형이상학적 성격 가운데 하나이다. 우주의 연대성을 구성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형이상학적 성격이다.

화이트헤드는 모든 존재자가 대상으로서 기능하는 성격을 모든 존재자의 보편적인 형이상학적 특징으로 본다. 화이트헤드가 보편적인 형이상학의 성격이라고 할 때는 모든 우주시대에 항존하는 성격을 말한다. 그래서 화이트헤드가 지금 여기에서 언급하고 있는 이 상대성 원리는 모든 우주시대에 통하는 원리임을 암시하고 있다. 그래서 화이트헤드 형이상학의 범주도식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원리에 통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 원리를 좀 더 분명하게 하기 위해서 화이트헤드는 설명의 제4범주를 제시하고 있다.
이 설명의 제4범주에서 제시된 것처럼 화이트헤드의 모든 존재자는 하나의 현실태가 생성되는 합생에 있어 요소가 될 가능태이다. 이 가능태는 현실태를 생성시키기 위해 그 현실태 앞에 놓여진 대상들이다. 이것을 역으로 말하면, 이 대상은 "느낌의 구성요소가 될 가능태로서의 존재자이다." 그리고 이 대상은 가능태로서의 존재자이지만 내재성과 초월성을 함께 가지고 있다.

내재성과 초월성은 대상의 특징이다. 즉 대상은 실현된 결정자로서 내재적이요, 결정하는 능력으로서 초월적이다. 그리고 이 두 역할에 있어 그것은 자기 이외의 것과 관련을 맺고 있다.

내재성은 그 대상이 주체에게 단순히 개념적으로 인식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주체를 지금의 그 주체로 만드는 데 기여한다는 것이다. 이 때 그 대상은 그 주체 속에 내재해서 그 주체를 실현시키는 결정자로서의 역할을 한다. 그리고 초월성은 그 대상이 주체를 지금의 그 주체로 만드는 데 기여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이 때 그 주체는 자신을 초월해서 다음의 주체에게 대상으로서의 역할을 한다. 즉 대상으로서 그 주체 속에 내재해서 그 주체를 실현시킨다. 그러므로 이 두 대상은 모두 자기 이외의 주체와 관련을 맺고 있다. 내재성을 가진 대상은 실현된 주체와 관련을 맺고 있고, 초월성을 가진 대상은 다음의 주체와 관련을 맺고 있다.
지금까지 화이트헤드의 대상은 가능태로서의 존재자이며, 내재성과 초월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살펴보았다. 이렇게 가능태인 대상이 내재성과 초월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 대상을 단순히 초월성만 가지고 있는 객체로 보아서는 안된다. 화이트헤드의 대상이 이러한 이중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주체와 대상 사이의 상대성이 성립된다. 물론 주체와 대상 사이의 상대성이 성립되기 위해서는 대상의 이중성(내재성과 초월성)뿐만 아니라 주체의 이중성(사사성과 공공성)도 있어야 한다.
주체와 대상 사이에 상대성이 성립한다는 것은 주체는 계속해서 주체이고, 대상은 계속해서 대상이라는 것을 부인한다는 것이다. 주체는 주체로서 완성된(만족에 이름) 후에 곧 대상이 되고, 그 대상은 다음 주체의 생성에 재료가 되어 주체를 형성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화이트헤드 유기체의 철학은 주체가 다른 주체에 내재하지 않는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언명을 파기하고, 객체는 주체밖에 초월해 있기 때문에 주체에게는 다만 표상적 관념으로만 있다는 사실을 파기한다.
화이트헤드는 『관념의 모험』에서 대상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분명히 하고 있다. 대상은 주체가 경험과정의 요인으로서 수용된 선행 존재자이다. 이 말은 대상이 두 개의 조건을 갖는다는 것을 내포한다. 첫째 조건은 대상이 주체보다 선행해야한다는 것이고, 둘째 조건은 주체에게 주어져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대상은 주체에 앞서 있으면서 주체에게 경험된 것이어야 한다.

경험의 과정은, 그 과정에 선행하고 있는 존재자들을 그 과정 자신인 복합적 사실 속으로 수용함으로써 구성된다. 이러한 경험과정의 요인으로서 수용된 그와 같은 선행존재자들은, 그 경험적 생기의 대상이라고 불린다. 그러므로 '대상'이라는 용어는 본래 이처럼 그 외연이 표시된 존재자와 하나 또는 그 이상의 경험하는 생기와의 관계를 표시하는 말이다. 하나의 존재자가 경험의 과정에서 대상으로서 기능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두 개의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 즉 (1) 이 존재자는 선행적인 것이어야 한다는 것. (2) 이 존재자는 그 선행성의 덕택으로 경험되는 것이어야 하며, 그것은 반드시 주어져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이제부터 화이트헤드 존재의 범주가 모두 이러한 대상으로서의 역할을 하는지에 대해서 살펴보겠다. 화이트헤드는 존재의 범주 중 영원한 대상, 명제, 대상화된 현실적 존재자와 결합체의 네 가지를 대상으로서의 주된 유형이라고 말하고 있다. 따라서 이 존재의 범주들이 대상인 것에 대해서는 반론의 여지가 없다.
이렇게 반론의 여지가 없는 존재의 범주에 대해서 상세히 언급하지는 않겠다. 왜냐하면 이 논문의 주제가 상대성 원리를 통해 화이트헤드의 범주들이 왜 지금처럼 되지 않으면 안되는가를 밝히는 데 있기 때문이다. 상대성 원리에 따라 화이트헤드 존재의 범주들은 모두 현실태를 생성시키는데 기여할 수 있는 가능태로서의 대상이어야 한다. 같은 내용을 역으로 말하면, 현실태를 생성시키는데 기여할 수 있는 가능태로서의 대상들로  존재의 범주가 구성되어야 한다.
화이트헤드는 존재의 범주 8개중에서 위의 네 범주를 대상으로서의 주된 유형이라고 했다. 그러면 이들을 제외한 나머지 네 범주인 파악, 주체적 형식, 대비, 다수성은 주된 유형이 아니다. 그러나 이들도 대상으로서의 주된 유형은 아니지만 상대성 원리에 따라 현실태를 생성시키는데 기여할 수 있는 대상이어야 한다. 지금부터는 이들도 대상이 될 수 있는지를 검토하고자 한다.
먼저 파악이 대상으로서 기능하는지를 검토하겠다. 화이트헤드는 "하나의 주체에 있어서의 파악은 후속하는 주체에 대하여 대상화된다."고 말한다.

설명의 범주 27) 합생의 과정에는 계속되는 일련의 국면들이 있어서, 선행하는 국면에서의 파악들을 통합함으로써 새로운 파악이 생겨난다. 이 통합에 있어 느낌은 자신의 주체적 형식과 여건을 제공함으로써 새로운 통합적 파악의 형성에 이바지 한다. 그러나 부정적 파악은 단지 그 주체적 형식을 제공함으로써 이바지할 뿐이다. 이 과정은 모든 파악들이 하나의 결정적인 통합적 만족의 구성요소가 될 때까지 계속된다.

현실적 존재자는 합생하는 과정에 선행하는 파악들을 통합해서 새로운 파악들을 생성시킨다. 이 때 느낌인 긍정적 파악은 자신의 주체적 형식과 여건을 제공함으로써 새로운 파악의 형성에 이바지한다. 그러나 부정적 파악은 주체적 형식만 제공한다. 그리고 이 과정은 현실적 존재자가 만족에 이를 때까지, 즉 파악들이 만족에 이른 현실적 존재자의 구성요소가 될 때까지 계속된다.
파악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간에 통합과정에서 통합적 파악의 형성에 이바지하는 것은 틀림없다. 긍정적 파악이면 주체적 형식과 여건을, 부정적 파악이면 주체적 형식을 제공한다. 이렇게 자신을 제공한다는 것은 대상으로서 기능한다는 것이다. 파악이 대상으로서 기능하지 않으면 새로운 파악이 생겨나지 않는다. 이것으로 보아 파악이 대상으로서 기능한다는 점에 대해서는 논의의 여지가 없다.
그런데 위의 인용문을 검토하는 과정에 하나의 문제가 발견된다. 그것은 새롭게 탄생하는 파악이 주체로서의 성격을 갖고 있지 않는가에 대한 의문이다. 왜냐하면 그 새롭게 탄생하는 파악은 선행하는 국면의 파악들을 수용함으로서 일어날 수 있는데, 이렇게 외부의 대상을 수용해서 자신을 형성시켜 간다면 그것은 바로 합생하는 주체이기 때문이다. 파악은 실제로 주체로서의 역할을 할 수 있는 상당한 조건을 갖추고 있다.
현실태를 분석할 때 나타날 수 있는 유일한 구체적 사실은 파악이다.

현실적 존재자를 파악으로 분석하는 것은 현실적 존재자의 본성에 들어 있는 가장 구체적인 요소를 제시하는 분석의 방식이다.

현실태란 구체적 통일성으로 향해가는 합생의 과정에 있어서 주체적 통일성을 갖는 파악들의 총체를 말한다.

위의 인용문들을 보면, 파악이 현실태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그렇지 않음을 발견할 수 있다. 현실태는 파악들의 총체이지 파악이 아니다. 파악은 현실태를 분석할 때 나타나는 구체적 요소이며, 구체적 사실이다. 파악들의 총체인 현실적 존재자가 현실태이기 때문에 그의 구성요소인 파악도 현실태인 것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화이트헤드는 파악을 현실태라고 하지 않고 유사 현실태라고 말한다.

만족들은 또한 상대적 지위의 동일한 형태론적 체계를 지닌 유사 현실태로 다루어질 수 있는 파악들로 분할이 가능하다.

만족은 주체인 현실적 존재자가 자신 앞에 놓여진 대상들을 수용해서 자신을 완성시킨 것이다. 이렇게 완성된 주체는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자기 초월체로서의 현실적 존재자이다. 이러한 자기 초월체로서의 현실적 존재자도 당연히 파악들로 분할이 가능하다. 이 때의 분할은 합생하는 주체로서의 현실적 존재자에 대한 발생적 분할이 아니라, 등위적 분할이며 연장성의 형태론적 체계로 나타난다. 현실적 존재자가 어떤 상태로 있든지 파악으로 분할 가능하며 그 파악은 유사 현실태로 불린다.
 
파악은 그 자체가 현실적 존재자의 일반적 성격을 재현한다. 즉 그것은 외계와 관계하고 있으며, 그런 의미에서 벡터 성격을 갖는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거기에는 정서, 목적, 가치판단, 인과관계가 포함되어 있다. 사실상 현실적 존재자의 모든 특징들은 하나같이 파악에 있어서 재현되고 있다. 파악은 완전한 하나의 현실태가 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떤 불완전한 부분성 때문에 파악은 현실적 존재자의 종속적 요소에 불과한 것이 되고 있는가 라는 물음에 답하기 위해서는 완전한 현실태와의 연관이 고려되지 않으면 안된다.

파악은 현실적 존재자의 특징들(외계와 관계하고 있으며 정서, 목적, 가치판단, 인과관계가 포함 등)을 재현시키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어떤 불완전한 부분성 때문에 현실적 존재자의 종속적인 요소에 불과하다. 그러면 이 때의 불완전한 부분성은 무엇인가? 즉 어떤 부분성 때문에 현실적 존재자의 종속적 요소에 불과한 유사 현실태에 머물고 있는가? 그것은 파악이 원자적이지 않아 독립성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원자적이란 대상들을 통합해서 하나가 되는 것이다. 즉 대상인 다자를 통합해서 일자로 만드는 것이다.

파악은 원자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다른 파악들로 분할될 수 있고, 또 결합하여 다른 파악이 될 수도 있다. 또한 파악들은 서로 독립해 있는 것도 아니다.
원자성을 가진 존재자는 각각 독립해 있다. 그래서 주체성을 가지고 주체로서의 활동을 한다. 파악은 이 원자성이 없기 때문에 독립한 현실적 존재자의 구성요소일 수밖에 없다. 그러면 왜 파악에게는 원자성이 없는가? 파악이 현실적 존재자처럼 원자성을 갖고 독립할 수 있다면 그 파악의 구성요소를 또 설정해야 한다. 그러면 화이트헤드의 존재론은 무한퇴행에 빠지게 된다.
이번에는 주체적 형식이 대상일 수 있는지에 대해서 알아보겠다. 이것은 느낌의 순응설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느낌의 순응설은 느낌의 첫 단계에 일어나는 것으로, 이 단계에서는 선행하는 느낌의 주체적 형식에 순응해서 주체적 형식이 계승된다는 것이다.

직접적인 과거 생기의 주체적 형식과 새로운 생기의 성립에 있어서 그 원초적 파악의 주제적 형식 사이에는 연속성이 있다. 많은 기초적 파악의 종합과정 속에 변형이 개입한다. 그러나 직접적 과거의 주체적 형식은 현재의 그것과 연속해 있다. 나는 이러한 학설을 '느낌의 순응설'이라 부르고자 한다.

파악의 종합과정에는 변형이 개입하지만 원초적 파악의 주체적 형식 사이에는 연속성이 있으며, 이 연속성은, 직접적 과거의 주체적 형식이 대상(여건)으로서 현재하고 있으며, 이 여건에 순응해서 현재의 주체적 형식이 있다는 사실 때문에 가능하다. 그래서 느낌의 순응설을 연속성에 관한 학설이라고도 한다.

하나의 생기로부터 다른 생기로 순응적으로 계승되는 주체적 형식의 동일성에 의해 표현되는 연속성에 관한 학설을 동반하고 있다.

주체적 형식의 순응적 전달이 지배적 사실이 되고 있는 연속성에 관한 학설이다.

느낌의 순응설과 연속성에 관한 학설은 주체적 형식의 계승에 대한 학설이며, 이 학설은 직접적 과거의 주체적 형식과 현재 주체의 주체적 형식이 있다는 것을 말한다. 직접적 과거의 주체적 형식이 현재 주체의 대상이 되기 때문에 그것을 수용한 현재 주체의 주체적 형식이 순응할 수 있다. 또 이 순응을 통해 계승이 가능하다. 이것에 대해서 화이트헤드는 그 사례를 『관념의 모험』에서 들고 있다. 조금 길지만 인용해 본다.

어떤 기간에 어떤 사람에게 화나는 일이 생겼다고 가정해 보자. 4분의 1초 전에 그가 화났다는 것을 지금 어떻게 알 수 있는 것일까? 물론 그는 그것을 기억하고 있다. 우리는 그것을 모두 다 알고 있다. 그러나 내가 묻고 있는 것은 바로 이 기억이라는 기묘한 사실이며, 나는 눈에 띄게 생생한 사례를 선정했던 것이다. '기억'이라는 이 낱말 만으로는 아무 것도 설명해 주는 바가 없다. 새로운 생기의 직접성에 있어서 제1의 국면은 느낌들의 순응의 국면이다. 과거의 생기가 향유했던 느낌은 새로운 생기 속에서 느껴지는 여건으로서 현재하고 있으며, 주체적 형식은 그 여건의 느낌의 주체적 형식에 순응하고 있다. 그래서 만일 A가 과거의 생기이고, D가 화를 내고 있는 A로서 기술할 수 있는 주체적 형식으로 A에 의해 느껴지는 여건이라고 한다면, 이 느낌 ― 즉 A가 노여움이라는 주체적 형식을 가지고 D를 느끼는 것 ― 은 최초에는 새로운 생기 B에 의해 노여움이라는 동일한 주체적 형식을 가지고 느껴진다는 것이다. 이 노여움은 잇따라 일어나는 경험의 생기들을 통해서 연속되고 있다. 이러한 주체적 형식의 연속성이 B의 A에 대한 최초의 공감이다. 그것은 자연의 연속성에 있어서 주요 근거가 된다.

위의 인용문에서 D는 과거의 생기 A가 느낀 과거의 주체적 형식이다. 이것을 화이트헤드는 분명히 여건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이것이 또한 새로운 생기 B의 A에 대한 최초의 공감이라고 언급하고 있다. 따라서 주체적 형식이 대상이라는 사실에 대해서는 더 이상 논의할 필요가 없다. 그런데 지금까지 논의한 주체적 형식은 대상으로서의 주체적 형식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해야 한다. 대상으로서가 아닌 주체적 형식, 즉 새로운 생기 B가 D를 느끼는 방식인 새로운 주체적 형식은 새로움의 원천이 된다. 이것을 구별해야 한다.

느낌의 본질적인 새로움은 그 주체적 형식에 속하는 것이다. 최초의 여건, 그리고 대상적 여건인 결합체조차도, 다른 주체에 속한 다른 느낌에 제공된 적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주체적 형식은 직접적인 새로움이다. 그것은 그 주체가 그 대상적 여건을 느끼는 방식이다. 이 주체적 형식을 그 합생의 새로움으로부터 떼어놓는 것은 불가능하다. 주체적 형식은 그 직접적 현재의 직접성 속에 내장되어 있다. 개별 실체에 내재하는 성질이라는 개념의 근본적인 예는, 느낌에 내재하는 주체적 형식에 의해 주어진다.

여기서 직접적인 새로움인 주체적 형식은 느낌에 내재하는 주체적 형식으로서 이것은 여건에 속하는 주체적 형식과는 다르다.
대상은 수용된 것이어야 하며, 수용의 방식이거나 그 생기 속에서 산출된 것이어서는 안된다. 이러한 경험의 과정은 대상들을, 과정 그 자체인 복합적 생기의 동일성 속으로 수용함으로써 구성된다. 일반적으로 과정은 스스로를 창조한다. 그러나 과정은 그 자신의 본성에 있어서 그것이 요인으로서 수용하는 대상을 창조하지는 않는다.

새로운 생기에게 수용된 주체적 형식은 대상이다. 그러나 지금 그 대상을 수용하는 방식인 주체적 형식은 대상이 아니다. 그리고 그 대상을 수용해서 자신을 완성시켜 가는 주체도 물론 대상이 아니다. 위의 인용문에서 볼 수 있듯이 창조 과정에는 세 가지가 필요하다. 스스로를 창조해 가는 주체(이 주체는 그 생기 속에서 산출된다.), 그 주체 앞에 수용되기 위해 주어진 대상(주어져서 수용된다.), 그리고 그 주체가 그 대상을 수용하는 방식(수용의 방식)인 주체적 형식이 그것이다. 지금까지의 논의를 요약하면 주체적 형식이라는 존재자는 수용하는 방식이며, 또한 그 수용이 완성되면, 다음의 주체에게 수용되기 위해 주어진 대상이다.
이제는 화이트헤드 존재의 범주 중 대비가 대상이 되는지에 대해서 살펴보겠다. 이 점을 논의하기에 앞서 대비는 다른 존재자와 그 유형이 다르다는 점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지금까지 논의한 존재의 범주 중 현실적 존재자, 영원한 대상, 파악, 주체적 형식은 그대로 하나의 단일성을 가진 존재자이다. 그리고 결합체와 명제는 두 개 이상의 존재자들이 하나의 통일성을 획득해서 패턴화된 존재자이다. 이렇게 두 개 이상의 존재자들이 하나의 통일성을 획득해서 패턴화된 존재자의 유형을 대비라고 한다. 이런 대비를 통해 만들어지는 존재자는 결합체와 명제 이외에도 패턴화되는 방식에 따라 아주 다양하다. 그래서 화이트헤드 존재의 범주는 8개로 국한되지 않고 무수히 많게 된다.

설명의 범주 17) 어떤 느낌에 있어 여건이 되는 것은, 무엇이든지 느껴진 것으로서의 통일성을 갖는다는 것. 따라서 복합적인 여건의 많은 구성요소는 통일성을 갖는다. 이 통일성이 존재자들의 대비이다. 이는 어떤 점에서 존재 범주가 무수히 많다는 것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존재자들을 하나의 대비 속에 종합한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새로운 존재의 유형을 산출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명제는 어떤 의미에서 대비라고 할 수 있다. 인간 지성의 실제적인 목적을 위해서는 소수의 기본적인 유형의 존재를 고찰하고, 보다 파생적인 유형들을 대비라는 표제 밑에 총괄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명제는 결합체라는 존재자를 주어로 하고, 그것을 한정하는 영원한 대상을 술어로 묶어서 하나의 패턴이 된 대비이다. 그리고 결합체 자체도 물론 하나의 대비이다. 이것은 결합체의 구성요소인 현실적 존재자들로부터 공평하게 도출되는 영원한 대상을 묶어서 하나의 패턴이 된 대비이다. 그러나 화이트헤드는 명제나 결합체를 대비라는 용어로 사용하지는 않는다. 그 이유는 이 존재자들은 그 자체로 분명하고도 독특한 역할을 수행하며, 또 존재자들 중에서 양적으로도 비중이 크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이들이 대비인 것은 틀림없다. 다만 화이트헤드는 인간지성의 실제적인 목적을 위해 기본적인 유형의 존재자를 제시하고 나머지를 대비라는 존재자로 총괄하자는 편의성 때문에 구분한 것이다.
위의 인용문 중에서 '어떤 느낌에 있어 여건이 되는 것은, 무엇이든지 느껴진 것으로서의 통일성을 갖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여기서 여건들이 통일성을 갖는다는 것은 주체 앞에 있는 다수의 존재자들이 하나의 패턴으로 묶여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하나의 패턴으로 묶여진 존재자를 화이트헤드는 대비라고 부른다. '따라서 복합적인 여건의 많은 구성요소는 통일성을 갖는다. 이 통일성이 존재자들의 대비이다.'
결국 위의 말, '여건이 되는 것은 무엇이든지 통일성을 갖는다'는 것은 합생의 후기 국면으로 갈수록 기본적인 유형의 존재자인 여건들은 통일을 거쳐 파생적인 유형의 존재자인 대비로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논자가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기본적인 유형의 존재자(현실적 존재자, 영원한 대상, 파악, 주체적 형식)와 파생적인 유형의 존재자인 대비가 모두 여전히 여건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여건은 주체가 파악할 대상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대비는 주체가 여건들을 파악하는 과정에 만들어진 대상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화이트헤드는 왜 명제를 굳이 존재의 범주에 넣었는가? 그리고 대상 중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했는가? 이것을 알기 위해서는, 우선 화이트헤드의 명제가 참과 거짓을 구분 짓기 위한 판단의 재료로서의 언어적 표현을 넘어서고 있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언어적 표현을 명제의 충분한 언명으로 본다면 이는 전적으로 경솔한 처사이다. 언어적 표현과 완전한 명제의 차이는, 어째서 논리학자가 말하는 엄격한 선택지인 참 또는 거짓이 지식의 탐구를 위해서는 그토록 지극히 부적절한 것이 되는가 라는 물음에 답하는 근거가 된다. ······ 언어는 명확하게 한정된 명제를 진술한다고 전제하고 있다. 이는 사실과 전혀 다르다. 언어는, 모든 사건이 일정한 체계적인 유형의 환경을 전제로 하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전적으로 불확정적인 것이다.
어떠한 언어 진술도 명제의 충분한 표현이 아니라는 것을 명심하지 않는다면, 문화발전 과정에서 형이상학이 차지하는 위치는 이해하지 못하게 된다.

화이트헤드는 언어 진술의 한계를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다. 그는 언어가 명확하게 한정된 명제를 진술한다고 믿고, 이 한계 안에 들어오지 못하는 형이상학을 학문에서 추방하려는 논리 실증주의자들의 주장에 반대하고 있다.
화이트헤드는 언어를 통해 인식하는 사건이 일정한 체계적인 유형의 환경을 전제로 하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불확정적이라고 말한다. 언어는  실재를 추상화하고, 추상화한 것을 체계화한 환경 안에서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에, 언어가 실재를 그대로 나타낼 수 없다는 것이다. 실재를 표현하고자 하는 화이트헤드는 명제를 의식에 국한시키지 않고 보다 근원적인 마음의 느낌이라고 한다.

현실적 존재자에 있어서 명제가 실현되는 최초의 양태는 판단에 의한 것이 아니라 마음 속에 품음에 의한 것이다. 명제는 그것이 느낌 속으로 수용될 때 마음 속에 품어진다. 근원적으로 공포, 안도, 목적은 명제를 마음 속에 품은 것을 수반하는 느낌들이다.

여기서 명제는 마음 속에 품을 때의 대상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위의 인용문에서 보면, 마음 속에 품는 주체가 현실적 존재자이다. 이것은 명제를 대상으로서 마음에 품는 주체가 인간만이 아니라는 것을 말한다. 우선 위 인용문에서 나타나듯이 공포와 안정을 느끼는 것도 명제를 마음에 품는 것이다. 그러면 명제를 느끼는 것은 결합체 중에서 동물들뿐만 아니라 식물까지도 가능하다.
다음은 『상징작용』의 2장인 '인과적 유효성'에 대해 설명하는 구절이다.

노여움이나 공포와 같은 특정 종류의 감정은 감각 소여의 파악을 억제하기 쉽다. 그러나 그 감정들은 직접적 과거가 현재에 대해 가지는 관련성, 그리고 현재가 미래에 대해 가지는 관련성을 생생하게 파악하는 데 전적으로 의존한다. 다시 또 낯익은 감각 소여의 억제는, 우리의 운명에 대해 좋든 나쁘든 간에 영향을 미치는 막연한 현재에 대한 공포감을 일으킨다. 낮에 활동하는 습성을 가진 대부분의 생물은, 낯익은 시각적 감각 소여가 결여된 어둠 속에서는 보다더 신경질적이다.

공포와 안정감 등은 인과적 유효성의 지각에서 생긴다. 그래서 위의 인용문에서는 '현재가 미래에 대해 가지는 관련성을 생생하게 파악하는데  전적으로 의존한다'고 말한다. 이러한 인과적 유효성은 직접적 과거에 대한 현재 사실의 순응성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와 같은 순응성은 유기체가 하급일 경우 외견상의 행위에 있어서나 의식의 면에 있어서나 보다 뚜렷하다는 것이다. 꽃은 인간이 그런 것보다도 훨씬더 확실하게 빛을 따라 돌고, 돌은 꽃보다도 훨씬더 확실하게 외부 환경에 의해 정해진 조건에 순응한다. 개는 이를 인간과 꼭 같이 확실하게, 직접적 미래가 자기의 활동에 순응할 것을 예기한다.

여기서 꽃이 빛을 따라 돈다는 것은 빛을 느낀다는 것이고, 그 느낌에 대해서 어떤 반응을 한다는 것은, 그 느낌을 다른 것과는 구별되는 그 무엇으로 정했다는 것이다. 만약에 다른 것과 구별되는 그 무엇으로 정하지 않으면, 빛을 따라 돈다는 행위는 불가능하다.
그러면 여기서 그 무엇으로 정했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그 느낌 속에 한정형식이 들어갔다는 것이다. 그런데 화이트헤드에 있어서 한정형식은 영원한 대상이다. 그러므로 그 느낌 속에 영원한 대상이 진입한 것이다.
이것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꽃은, 빛에 대한 그 느낌을 주어로 하고, 한정형식인 영원한 대상을 술어로 해서 그것들을 하나로 묶은 대비를 느낀 것인데, 이 대비가 바로 명제이다. 그러므로 화이트헤드의 명제는 의식을 넘어서 훨씬더 확대해야 한다.
그리고 더욱 확대하면 모든 현실적 존재자가 이 명제를 품을 수 있다. 왜냐하면 모든 현실적 존재자가 주체적 목적을 가지고 그 쪽을 지향하기 때문이다. 목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바로 명제를 품고 있다는 것이다. 화이트헤드는 『이성의 기능』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우리가 세계를 선행상태에 의해 결정된 물리적 체계로서 개관한다면, 세계는 그 활동력과 그 다양성을 상실하면서 끊임없이 쇠퇴하는 유한한 체계의 광경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 그러나 자연에는 물리적인 쇠퇴의 양상과는 반대 방향인 어떤 상승추세가 있다.
화이트헤드는 물리세계에도 목적적 인과관계를 초래하는 욕구가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즉 모든 현실적 존재자는 목적없이 기계적으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 점을 강조하기 위해 화이트헤드는,  자연에도 쇠퇴뿐만 아니라 상승추세가 있다는 점을 들고 있다.
화이트헤드는 주체적 목적을 '느낌의 유혹'으로 기술하기도 하고, 또한 이것을 명제의 원초적 기능이라고도 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명제의 원초적 기능이 느낌을 위한 유혹과 관련된다는 것은 유기체의 철학에서 기본 학설이다".
유기체의 철학에서 모든 현실적 존재자는 주체적 목적을 가지고 있어야 하고 그 주체적 목적이 명제의 원초적 기능이기 때문에, 명제는 화이트헤드 존재의 범주에 들어갈 뿐만 아니라, 모든 현실적 존재자의 대상으로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다수성이 대상인지에 대해서 고찰해 보겠다. 다수성이 대상인지를 고찰하기 전에 먼저 다수성은 존재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상기해야 한다. 이 점에 대해서는 앞에서(4부 1장 2절) 충분히 논의했었다. 이 다수성을 다른 존재의 범주처럼 하나의 단일성을 가진 존재자로 인식해서는 안된다. 다수성은 존재자들이 주체 앞에서 이접적으로 모여있는 것이다. 그래서 다수성을 다양한 존재자들의 순수한 이접성이라고 한다.
이 점을 분명히 하기 위해 존재의 범주들을 통일성이라는 면에서 구분해보면 네 가지로 분류된다. 첫째는 처음부터 단일성을 지니고 있는 존재자들이다. 이들은 현실적 존재자, 영원한 대상, 파악, 주체적 형식이다. 둘째는 두 개 이상의 존재자들이 대비를 통해 통일성을 획득했으며, 기본적인 유형에 속하는 존재자들이다. 이들은 결합체, 명제이다. 셋째는 두 개 이상의 존재자들이 대비를 통해 통일성을 획득했으며, 기본적인 유형에 속하지 못한(파생적인 유형에 속하는) 존재자들이다. 이들은 대비들이다. 넷째는 오직 합생하는 주체 앞에 최초의 여건이 될 목적일 때만 통일성을 획득하지만 그 하나 하나의 구성원들이 이접적으로 모여 있는 다수성이다.
화이트헤드는 위의 네 가지 분류 중 첫째와 둘째를 합친 6개 존재의 범주(현실적 존재자, 영원한 대상, 파악, 주체적 형식, 결합체, 명제)를 기본적인 유형에 속하는 존재라고 한다. 그리고 그는 이 6개의 존재existence를 단서가 없는 한 존재자entity라고 말을 한다. 이 때 단서를 붙여서 존재자라고 할 수 있는 것은 파생적인 존재자라고 불리는 바로 그 대비임은 말할 것도 없다.
화이트헤드는 첫째, 둘째, 세째의 존재의 범주에 속하는 것으로 파생적인 존재자인 대비까지 포함한 7개의 존재자를 고유한 존재자proper entities라고 한다. 화이트헤드가 7개의 존재자들을 고유한 존재자라고 하는 것은, 이들이 존재자가 될 수 있는 성질인 하나의 일자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며, 그리고 존재의 범주 중에서 여기에 속하지 못한 다수성은 이러한 성질을 지니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다수성은 단지 그 하나 하나의 구성원을 통해서 과정 속으로 들어갈 뿐이다. 그 하나 하나의 구성원을 통해서 들어가는 방식으로 과정 속에 들어가는 존재자는 모두 다수성에 속한다. 그런데 다수성은 함께 과정 속에 들어간다는 목적을 위해서, 오직 이 목적을 위해서만 통일체로 취급된다. 즉 이 때는 개별적 존재자로 보지 않고 집합적 종류의 존재자들로 취급된다.
여기서 다수성이 집합적 종류의 존재자들이라는 것은 주체 앞에 여건으로서 모여 있을 때를 말한다. 그래서 하나의 현실적 존재자에 있어 완전한 최초의 여건을 구성하는 우주는 하나의 다수성이다. 합생하는 현실적 존재자라는 주체 앞에 완전한 최초의 여건을 구성하는 <우주>는 그 주체의 생성 과정에 참여하기 위한 목적으로 함께 있다는 것 때문에 통일체이다. 다수성이 이러한 목적 때문에 통일체라고 하더라도, 다수성에 관한 언명은 모두 하나 하나의 구성원에 관한 선언적 언명이다. 이 점을 분명히 하기 위하여 최초의 여건과 대상적 여건을 구분해 보겠다.

최초의 여건은 다수성으로 되어 있거나, 아니면 단지 하나의 고유한 존재자로 되어 있는 데 불과하다. 이에 반해 대상적 여건은 결합체이거나 명제, 또는 어떤 범주적 유형의 고유한 존재자이다. 여기에는 제거를 통해서 기능하게 되고 주체적 형식에 의해서 실행되는, 최초의 여건들로부터 대상적 여건으로서의 합생이 있다. 대상적 여건은 최초의 여건에 대한 전망이다.

최초의 여건은 아직 주체에 의한 대비가 실행되기 전이다. 즉 여건들이 제각각 떨어져 있다. 그래서 최초의 여건은 제각각 떨어져 있는 다수성이거나 아니면 하나의 고유한 존재자이다. 이 때 하나의 고유한 존재자란 대비를 거치지 않은 존재자이다. 위에서 언급한대로 한다면 첫째 분류인 현실적 존재자, 영원한 대상, 파악, 주체적 형식이다.
이에 반해 대상적 여건은 주체에 의한 대비가 실행된 존재자이다. 위에서 언급한대로 한다면 둘째와 셋째 분류인 결합체, 명제, 대비이다. 위 인용문에서는 이 대비를 어떤 범주적 유형의 고유한 존재자로 표현하고 있다. 이렇게 최초의 여건으로부터 대상적 여건으로의 합생이 이루어질 때 대상적 여건은 최초의 여건에 대한 전망으로서 역할을 한다.
어쨌든 이제 다수성이 최초의 여건이라는 것은 분명해졌다. 따라서 이렇게 다수성이 여건이라면, 이것은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것도 분명하다. 그러면 지금까지의 논의를 통해 화이트헤드 존재의 범주들이 모두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렇게 화이트헤드 존재의 범주들이 모두 대상이 되어 주체인 현실적 존재자와 결합체의 구성요소가 될 수 있다는 것이 상대성 원리이며, 이를 통해 존재의 범주들이 지금처럼 구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제 이 존재의 범주들이 주체와 대상으로 뿐만 아니라, 주체와 대상을 매개하는 역할을 담당하는지에 대해서 고찰해 보겠다. 이 고찰은 매개로서 역할을 하는 존재의 범주들은 어떤 것들이 있으며, 이들이 어떤 식으로 무엇과 무엇을 매개하는지에 대한 것이다. 이 고찰을 통해 자연히 그 매개과정을 살펴볼 수 있는데, 이 때 화이트헤드가 얼마나 매개과정을 중요하게 여기는지를 살펴봄으로써 그의 철학을 과정철학이라고 하는 이유도 알게 될 것이다.




3.4 주체와 대상의 매개가 될 수 있는 존재의 범주


지금까지 8개 존재 범주들 모두가 대상이 되어 주체 안에 내재할 수 있음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주체가 되는 현실적 존재자와 결합체가 있다는 것도 살펴보았다. 이렇게 주체 안에 내재할 수 있는 대상이 있고, 그 대상을 수용할 수 있는 주체가 있어서 그들 사이에 내적관계가 이루어짐을 알 수 있다.
그리고 Ⅱ부 2장과 3장에서 살펴보았듯이, 화이트헤드의 상대성 원리는 주체와 대상 사이의 내적관계이론이 바탕이 되어 있다. 그러므로 화이트헤드 존재의 범주들이 그의 상대성 원리에 어긋나지 않으며, 적어도 이 원리에 벗어나지 않는다는 사실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들 존재의 범주는 주체와 대상으로만 구분되는 것은 아니다. 주체와 대상을 매개하는 존재의 범주들도 있다. 이 매개하는 존재의  범주들도 화이트헤드 범주도식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주체와 대상 사이에서 매개의 역할을 담당하는 존재의 범주는 현실태도 있고, 가능태도 있다. 현실태로는 현실세계라는 결합체가 있고, 동시적 현실적 존재자와 신이라는 현실적 존재자가 있다. 그리고 가능태로는 영원한 대상이 있다. 우선 현실세계라는 결합체부터 살펴보겠다.

현실세계는 하나의 결합체이다. 그리고 하나의 현실적 존재자의 현실세계는 그 존재 너머에 있는 여러 현실세계에 있어 하나의 종속적인 결합체의 수준으로 가라앉는다.
하나의 현실적 존재자가 생성되는 현실세계는 하나의 결합체이다. 이 현실세계를 넘어 다른 현실적 존재자가 생성되는 현실세계도 있고, 이 두 세계를 포함하는 현실세계도 있을 것이다. 둘 다를 포함하는 현실세계에서 볼 때는 자신에게 포함된 현실세계는 종속적인 현실세계이다. 그런데 이 현실세계가 모두 결합체이기 때문에, 포함된 현실세계라는 결합체는 자신을 포함하는 현실세계라는 결합체의 종속적인 결합체가 된다. 이렇게 본다면 우리가 현실세계라고 할 때는 반드시 입각점이 필요하다. 입각점에 따라 다양한 현실세계가 있기 때문이다.

입각점이라는 개념은 연관된 세 가지 학설과 관계된다.······ 둘째는, 매체로서의 각 현실적 세계에 관한 학설이다. 이 학설에 따르면, 만약 S가 문제의 합생하는 주체이고, A와 B는 그 현실세계 내의 두 현실적 존재자라고 한다면, A가 B의 현실세계 속에 있든가, B가 A의 현실세계 속에 있든가, 아니면 A와 B가 동시적인 것이든가 해야 한다. 예컨대 만일 A가 B의 현실세계 속에 있다면, 직접적 주체 S에게는 (1) S에 있어서의 A의 직접적 대상화가 있고, 또 (2) B에 있어서의 A의, 그리고 S에 있어서의 B의 대상화의 연쇄에 따르는 간접적 대상화가 있게 된다. 이러한 연쇄 관계는 A와 S 사이에 많은 중간적 현실태를 포함시킴으로써 얼마든지 확장될 수 있다.

입각점이라는 개념과 관련된 학설 중에 매체로서의 각 현실적 세계에 관한 학설이 있다. S라는 합생 주체가 있고, 그 현실세계에 포함된 두 현실적 존재자 A와 B가 있다면, A가 B의 현실세계 속에 있던가, B가 A의 현실세계 속에 있던가, A와 B가 동시적인 것이다. 이 때 주체 S에게 A나 B가 직접 대상화되기도 하지만, 간접적으로 대상화되기도 한다. 즉 A가 B의 현실세계에 있는 경우, S에게 B가 대상화되면 B는 직접 대상화되지만 B의 현실세계 속에 있는 A는 S에게 간접적으로 대상화된다. 그리고 B가 A의 현실세계에 있는 경우, S에게 A가 대상화되면 A는 직접 대상화되지만 A의 현실세계 속에 있는 B는 S에게 간접적으로 대상화된다. 그런데 현실세계에는 A와 B 두 항만 있는 것은 아니다. 무수히 많은 현실적 존재자가 있다. 이렇게 되면 간접적으로 대상화되는 매개적(중간적) 현실 세계(현실태)는 얼마든지 있게 된다. 이 때 매개의 역할을 하는 현실세계는 결합체이며 매체이다. 즉 매체로서 존재의 범주이다.
지금까지 현실세계라는 결합체를 중심으로 살펴보았지만, 이것을 현실적 존재자 자체에 적용시켜도 같은 경우가 된다. 다음은 A, B, C, D라는 네 개의 현실적 존재자가 있고, 각각의 현실적 존재자를 입각점으로 했을 때, 무수히 중첩되는 현실세계가 있기 때문에 이들 서로 서로는 직접·간접적으로 느끼게 된다. 특히 간접적으로 매개를 통해서 느끼게 될 때, 매개의 역할을 하는 현실적 존재자 각각은 매체가 된다. 즉 매체로서  존재의 범주가 된다.

어떤 현실적 존재자 ― 이를 A라고 부르자 ― 가 다른 현실적 존재자들 ― 이들을 B, C, D라고 부르자 ― 을 느낀다고 하자. 이때에 B, C, D는 모두 A의 현실적 세계 속에 있다. 그러나 C와 D는 B의 현실적 세계 속에 있을 수도 있는데, 그럴 경우 그것들은 B에 의해 느껴진다. 또 D는 C의 현실 세계 속에 있을 수도 있으며, 그래서 C에 의해 느껴지고 있을 수 있다. 이 예는 단순화시킬 수도 있겠고, 또 어느 정도 복잡한 것으로 변화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A의 느낌에 있어 최초의 여건으로서의 B는, 또한 A가 B의 매개를 통해서 느낄 수 있는 C와 D를 A에게 제공한다. 또 A의 느낌에 있어 최초의 여건으로서의 C도, A가 C의 매개를 통해서 느낄 수 있는 D를 A에게 제공한다. 따라서 인위적으로 단순화시킨 이 예에서, A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의 판이한 원천을 통해서 느낌에 제공되는 D를 갖는다. 즉 1) 생경한 여건으로서 2) B의 매개를 통해서 3) C의 매개를 통해서가 그것이다. 여기서 이처럼 삼중으로 제시되고 있는 것은, B와 C의 매개에 관한 한 D에 대한 A의 느낌을 위한 최초의 여건이라는 기능을 수행하고 있는 D이다. 하지만 매체를 두 개의 중간물로 인위적으로 단순화시켜 놓은 것은 물론 현실의 사례와 거리가 멀다. D와 A 사이의 매체는, A의 현실 세계에는 있으나 D의 현실 세계에는 없는 온갖 현실적 존재자들로 구성되어 있다.

위의 예는 A가 D를 느끼는 경우에 B와 C라는 매체를 통해 느끼는 단순한 것에 불과하다. 그러나 현실 세계는 그 매체의 수가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다. 이번에는 시간적 사물과 영원한 사물을 매개하는 신에 대해서 알아보겠다. 만약에 신이 이러한 역할을 한다면 그도 매체임이 틀림없다.

시간적 사물들은 영원한 사물에 관여함으로써 생겨난다. 이 두 조는 시간적인 것의 현실태를 가능적인 것의 초시간성과 결합시키는 어떤 것에 의해 매개된다. 이 궁극적 존재자는 세계 속의 신적 요소이며, 이것으로 말미암아 추상적인 가능태의 건조하고도 무기력한 이접은 이상적인 실현으로의 효과적인 연접을 원초적으로 획득하게 된다.

여기서 시간적 사물은 현실적 생기들로서 시간적인 현실태를 말하고, 영원한 사물은 영원한 대상으로서 초시간적인 가능태를 말한다. 이 두 가지를 매개시키는 매체로서의 역할을 하는 존재자가 신이다. 이 신은 원초적으로 이접 상태인 영원한 대상들을 받아들여 무제한적으로 평가함으로써 이상적인 실현으로의 연접을 이루어낸다. 신이 이러한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은 그의 본성이 독특하기 때문이다.
그는 현실태이면서 비시간적이다. 현실태이기 때문에 주체로서 합생을 할 수 있다. 즉 이접적 다자를 연접적 일자로 만들어 낼 수 있다. 그런데도 비시간적이기 때문에 영원하다. 이 영원성 때문에 생성 소멸하는 현실적 존재자들에게 원초적 목적을 제공할 수 있다. 그리고 신의 현실성은 물리적 파악의 근거가 되고, 영원성은 개념적 파악의 근거가 된다. 신의 관념에 호소한다는 것이 물리적 파악과 개념적 파악을 매개시키기 위해서는 여전히 필요하다. 이렇게 신은 양극성을 지녔기 때문에 매개로서의 역할을 담당할 수 있다. 매개로서의 역할을 하는 신도 존재의 범주 중에서 현실적 존재자임에는 틀림없다.
다음에는 가능태로서 매개의 역할을 하는 영원한 대상에 대해서 살펴보겠다.

유기체의 철학은 개별적 존재들particular existents이 보편자들universals을 떠나서 파악된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 반대로 개별적 존재들이 보편자들의 매개에 의해 파악된다고 주장한다. 달리 말하면, 각 현실태는 그 자신의 한정성의 어떤 요소에 의해 파악된다. 이것이 현실적 존재자들의 대상화의 학설이다.

현실태로서의 개별적 존재가 이들을 파악하는 타자에게 대상화될 때는 가능태로서의 보편자인 영원한 대상을 통해서 파악된다. 이것은 영원한 대상이 한정의 형식인데, 이러한 형식 없이는 이 개별적 존재를 다른 개별적 존재와 구별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영원한 대상이 이렇게 매개로서의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은, 그 자신이 가지고 있는 한정성의 기능과 함께 또 다른 특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바로 내재성과 초월성이다. 영원한 대상은 순수 가능태로서의 초월성도 있지만, 현실태에 진입하는 내재성도 가지고 있다.
이렇게 영원한 대상이 진입한 현실태가 생성을 마치고 소멸되면서 다음의 지각 주체에게 파악될 때, 이 영원한 대상을 통하여 이어짐으로써 과거가 현재 속에 있게 된다. 즉 영원한 대상은 지각자로 하여금 과거의 사실을 현재로 계승하게 한다.

지각 주체의 경험은 현재 속에 반영된 과거의 교훈이다. 보다 중요한 동시적 생기occasion는 가까운 곳에 있는 생기들이다. 이들의 현실세계는 사실상 지각하는 주체의 현실세계와 동일하다. 이 지각자는 그 자신의 과거로부터 계승한 영원한 대상을 매개로 하여 동시적 생기의 결합체를 파악한다.

동시적 생기의 현실세계는 사실상 지각하는 주체의 현실세계와 동일하기 때문에 지각자는 영원한 대상을 매개로 동시적 생기의 결합체를 파악한다. 이를 통해서 영원한 대상이 계기적인 현실적 존재자를 매개할 뿐만 아니라, 동시적 생기의 결합체도 매개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영원한 대상은 모든 현실태의 과거와 현재를 매개하며, 매개를 통해 그 현실태를 다른 존재들로 여기지 않고 바로 그 존재로 여기도록 만드는데 기여를 한다. 화이트헤드는 개별적 존재들이 영원한 대상이라는 보편자들의 매개에 의해 파악된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영원한 대상은 매개하는 존재의 범주이다.
지금까지 현실적 존재자, 결합체, 영원한 대상이 매개적 성격을 가진 존재의 범주가 될 수 있음을 살펴보았다. 이들 이외에 나머지 존재의 범주들도 어떤 의미에서는 매개적 성격을 지니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앞에서도 살펴보았듯이, "현실적 존재자와 영원한 대상은 극도의 궁극성을 띠고서 두드러진 위치에 있다." 현실적 존재자는 물리적 극이라는 궁극성을, 영원한 대상은 정신적 극이라는 긍극성을 띠고 있다. "그 밖의 여러 유형의 존재(존재의 범주)들은 어떤 중간적인intermediate 성격을 지니고 있다."
이 때의 중간적 성격이란 궁극성을 지닌 두 존재의 범주들을 결합시키거나, 현실적 존재자가 만들어지는 과정에 있는 것이다. 두 존재의 범주들을 통합시켜 하나의 존재자가 된 것은 결합체, 명제, 대비이다. 그리고 현실적 존재자가 만들어지는 과정에 있는 것은 파악, 주체적 형식, 다수성이다. 결국 궁극성을 지닌 두 존재의 범주를 제외한 모든 존재의 범주들이 중간적 성격을 띠고 있다는 의미에서는 매개적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다.
결합체는 영원한 대상의 진입으로 한정특성을 띤 현실적 존재자들의 공재이다. 즉 영원한 대상과 현실적 존재자들이 함께 결합되어 있는 것이다. 명제는 현실적 존재자의 공재인 결합체를 주어, 영원한 대상을 술어로 패턴화해서 하나의 통일성을 획득한 것이다. 대비는 앞에서 언급했듯이 결합체와 명제를 비롯한 여러 존재의 범주들을 패턴화해서 하나의 존재의  범주로서 통일성을 획득한 것이다.
파악은 현실적 존재자가 만들어지는 과정에 있는 것으로 대상들을 주체와 관계시키는 관계성의 구체적 사실이다. 주체적 형식은 파악하는 주체와 파악되는 대상을 연결시키는 것으로 주체가 대상을 파악하는 방식이다. 다수성은 현실적 존재자가 만들어지는 최초의 과정에 나타나는 것으로 합생 주체 앞에 주어진 최초의 여건이다.
지금까지 화이트헤드 존재의 범주를 주체와 대상과 매개로 구분해 보았다. 이 중에서 주체가 될 수 있는 것은 현실적 존재자와 결합체뿐이다. 그렇지만 화이트헤드 존재의 범주 모두가 대상도 되고 매개도 된다. 이렇게 존재의 범주 중에 주체가 있고, 모든 존재의 범주가 대상과 매개가 되는 것은 화이트헤드 상대성 원리를 그의 범주도식에 적용한 것이다. 이렇게 화이트헤드의 범주도식이 그의 상대성 원리의 적용이기 때문에, 화이트헤드의 상대성 원리를 중심으로 그의 범주도식을 보면, 왜 지금처럼 범주도식이 되었는지를 알 수 있다.

Ⅴ. 맺는 말


화이트헤드의 상대성 원리는 '모든 존재자가 다른 존재자에게 파악된다'는 것이다. 이 때의 '모든 존재자'는 파악하는 주체 앞에서 파악되기 위해 있는 대상이다. 이 대상은 궁극자의 범주에서 다자로 나타나며, 존재의 범주에서는 8개 존재의 범주 모두를 가리킨다. 그리고 이 때의 '다른 존재자'는 모든 존재자를 파악하는 주체이다. 이 주체는 궁극자의 범주에서 합생하는 일자로 나타나며, 존재의 범주에서는 현실적 존재자와 결합체를 가리킨다. 마지막으로 이 때의 '파악된다'는 것은 대상이 주체의 내적구조를 형성한다는 것이다. 대상이 주체의 내적구조를 형성하기 때문에 대상과 주체는 내적관계를 갖게 된다.
그래서 지금까지 이 내적관계가 골격이 된 화이트헤드의 상대성 원리라는 관점에서 그의 범주도식을 고찰해 보았다. 그러나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많은 장벽을 넘어야 했다. 그 장벽은 절대성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것 때문에 이 논문은 절대성을 타파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었다.
Ⅱ부에서는 절대성에서 상대성에 이르는 흐름들을 고찰한 결과 공간방향의 절대성을 타파한 아리스토텔레스의 공간방향 상대성, 그리고 공간위치의 절대성을 타파한 뉴턴 등의 공간위치 상대성, 절대 시공간을 타파한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을 통해서 과거부터 지금까지의 상대성 이론을 밝혔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아인슈타인의 빛과 중력의 절대성을 인정하지 않는 화이트헤드의 보편적 상대성 원리를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과 비교 고찰하였다.
이렇게 각각의 절대성이 타파되어 나가면서 알게 되는 것은 그 때까지 인류가 절대적으로 옳다고 여긴 사고의 기준들이 상대적이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새로운 상대성 이론을 확립했다고 하더라도, 그 이론 속에는 절대적인 기준이 전제되어 있어서, 또다시 그 절대성을 타파해 가는 과정을 밟게 된다는 것이 드러났다. 화이트헤드의 보편적 상대성 원리는 이러한 많은 과정을 거쳐 이루어진 과학의 성과를 수용하여 모든 존재의 성립근거를 상대성으로 풀이하는 원리로 확대되었다.
Ⅲ부에서는 이렇게 확대된 보편적 상대성 원리를 보다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 또 화이트헤드의 체계 안에서 이 원리가 정합성을 지니고 있는지를 확인하기 위해서 다른 원리들과 비교 고찰하였다. 이 때 함께 고찰된 원리는 존재론적 원리, 주관주의 원리, 과정의 원리이다. 이 과정에서 그 원리들과 상대성 원리가 정합성을 지니고 있음을 확인하고, 여기서 화이트헤드 유기체의 철학이 기존 철학 중에서 수용한 면과 거부한 면을 밝히면서, 기존철학이 안고 있는 문제점에 대한 대안을 제시했다.
보편적 상대성 원리는 실체-속성 이론과 이에 따른 주어-술어 형식을 거부한다. 따라서 실체는 개별자고 속성은 보편자라는 학설도 거부된다. 실체를 인정하는 철학에서는 실체인 개별자는 다른 실체에 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화이트헤드 유기체의 철학은 보편적 상대성 원리 등 제 원리에 따라 개별자가 다른 개별자에 내재한다. 즉 개별자가 다른 개별자의 내적구조를 이룬다.
그리고 경험의 최초 국면을 감각에서 찾는 감각주의도 화이트헤드는 거부한다. 경험의 최초 국면을 감각에서 찾게 되면 흄이 지적한 것처럼 인과관계를 직접 지각할 수 없게 된다. 인과관계를 확인할 수 없으면 유아론을 극복하기 어렵다. 그래서 화이트헤드는 주체가 대상을 받아들일 때 감각이전의 물리적 느낌이 있고, 이 물리적 느낌은 대상에 순응한다고 함으로써 인과관계의 새로운 전망을 밝혔다.
Ⅳ부의 1장에서 먼저 화이트헤드의 범주도식에 나오는 용어들의 의미를 고찰했다. 이렇게 함으로써 존재와 관련된 용어들의 혼란에서 발생되는 문제를 많이 제거하였다. 그 용어들은 존재existence, 존재자entity, 사물thing, 있음being, 일자one, 다자many, 창조성creativity 등이다. 논자는 이런 용어들을 존재의 범주와 관련해서 그 공통점과 차이점을 분석했다. 이 작업을 통해 일자와 존재자, 다자와 있음, 창조성과 사물이 대응관계에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2장에서는 궁극자의 범주가 일자, 다자, 창조성이 될 수밖에 없음을 밝혔다. 화이트헤드의 보편적 상대성 원리에 따라 대상을 가장 일반적으로 표현했을 때 다자일 수밖에 없고, 그것이 하나로 통합된 상태를 가장 일반적으로 표현했을 때 일자일 수밖에 없으며, 그 다자를 일자로 만들어 가는 그 무엇(힘이나 성질)을 가장 일반적으로 표현했을 때 창조성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일자는 주체로서의 일자와 대상으로서의 다자 가운데 있는 일자로 구분해야 한다. 다자는 주체일 수 없으며 대상일 수밖에 없고, 창조성은 주체와 대상을 매개시키는 역할을 수행한다.
3장에서는 존재의 범주들 중 합생하는 주체로서의 일자가 될 수 있는 것은 현실적 존재자와 결합체뿐임을 밝혔다. 현실적 존재자는 자신의 생애에서 합생과정에 있을 때만 주체이고, 결합체는 존속체와 입자적 사회만 주체로서의 역할을 하는데, 물론 이들도 자신의 생애에 있어 합생하는 과정에 있을 때만 주체가 된다. 그리고 여기서 존재의 범주 모두 대상과  매개가 될 수 있음을 밝혔다.
이렇게 화이트헤드의 범주도식을 주체, 대상, 매개로 구분할 수 있음을 밝혀냄으로써 모든 존재자가 다른 존재자에게 파악된다는 상대성 원리의 타당성이 입증된다. 뿐만 아니라 이것은 상대성 원리를 중심으로 살펴보았을 때 그의 범주도식이 그렇게 구성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알게 해준다.
이 점에 있어서 본 논문은 화이트헤드의 범주도식의 구성에 대한 선행연구와는 다르다. 마르틴은 화이트헤드 자신이 말한 대로 그의 범주도식이 정합적이고 논리적인지를 확인하기 위해, 논리학적 관점에서 화이트헤드의 범주도식을 고찰하고 그것을 논리적인 구조로 재구성하여 범주들 사이에 정합성이 있다는 점과 범주도식의 명제들 사이에 모순이 없다는 논리성을 밝히는 데만 주력했다.
그리고 랭고는 공존관계성synonty이라는 관점에서 화이트헤드의 범주도식을 보고 범주도식 중 존재의 범주(존재자의 유형)를 공존관계성이라는 보편적 관계의 형성적 속성들로 새롭게 정의하고 있으나, 존재의 범주 8개 각각의 상호관계를 일목요연하게 풀어 밝히고 각 존재자들을 논리적 기호로 분명하게 정의하고 있을 뿐이다.
결국 두 사람 모두 화이트헤드의 범주도식이 왜 그렇게 구성되지 않으면 안되는지에 대한 해명은 부족하다. 그러나 논자는 이것에 대한 해명에 주력했다. 이 해명을 위해 마르틴이 논리학적 관점에서 랭고가 공존관계성이라는 관점에서 범주도식을 본 것과 달리, 상대성 원리라는 관점에서 범주도식을 고찰하여 범주도식의 구성이유를 분명히 밝혔다.
결국 화이트헤드 유기체의 철학은 '우주의 궁극적 실재가 유기체로서 생성 소멸을 거듭한다'는 것을 나타낸다. 생성한다는 것은 자신 앞에 놓여진 다양한 대상들(다자)을 주체로서 수용하여 자기 자신(일자)을 형성시키는 것(창조성)이다. 소멸한다는 것은 그 주체가 자신을 형성시킴과 동시에 주체로서의 기능을 상실하는 것이다. 거듭한다는 것은 주체로서의 기능을 상실한 자기 초월체는 타자가 생성하는 데 기여할 대상으로서 기능하고, 그 대상을 받아들인 주체는 또 소멸하면서 대상이 되는 과정이 계속되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유기체의 활동 과정을 가장 일반적으로 나타낸 것은 일자, 다자, 창조성으로 구성된 궁극자의 범주이다. 그리고 다른 범주들은 구체적으로 무엇이(존재의 범주), 어떻게(설명의 범주), 어떤 조건아래(범주적 의무) 놓여 있는가를 나타낸다. 물론 화이트헤드가 이러한 모습으로 범주도식을 그릴 수 있었던 것은 상대성 원리의 관점에서 보았기 때문이다.
상대성 원리라는 관점에서 보았을 때, 화이트헤드의 범주도식이 지금처럼 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더욱 확고히 해주는 화이트헤드의 범주적 의무 ― 이것 역시도 상대성 원리에 따라 주체와 관련된 범주(주체적 통일성의 범주, 주체적 조화의 범주, 주체적 강도의 범주, 자유와 결정성의 범주)와 대상과 관련된 범주(대상적 동일성의 범주, 대상적 다양성의 범주)와 매개와 관련된 범주(개념적 평가의 범주, 개념적 역전의 범주, 변환의 범주)로 구분할 수 있다. ― 와 설명의 범주 그리고 그의 유기체 철학을 삶의 구체적 상황에 적용했을 때 얻을 수 있는 유의미성에 대한 연구는 다음의 과제로 남겨둔다.
그리핀David Ray Griffin은 21세기를 화이트헤드의 시대가 된다고 예견하고, 키튼Henry C. S. Keeton은 화이트헤드 철학이 25세기가 되면 일반화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들이 전망하는 것처럼, 상대성 원리를 포함하고 있는 화이트헤드 유기체의 철학은 심신문제에 대한 새로운 접근, 인간관계의 새로운 정립에 따른 윤리문제의 해결, 인간과 자연과의 유기적 관련에 따른 환경문제의 해결 등 인류가 안고 있는 문제를 해결하는 방안을 제시할 것이다.
참 고 문 헌


         Ⅰ.  화이트헤드의 저서 및 번역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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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cience and the Modern World. A Free press                       paperback, Macmillan Publishing Co., New                         York, 1967., 오영환 역, 『과학과 근대세계』,                       서광사, 1991.
-----------------.  Symbolism : Its Meaning and Effect. New                         York : Putnam's Sons, 1959., 정연홍 역, 『상                       징작용 -그 의미와 효과-』, 서광사, 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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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he Organization of Thought. Greenwood                           Press, 1975.  
-----------------. The Principle of Natural Knowledge.                                Cambridge at the University Press, 1925.,                          전병기 역, 이문출판사, 1998.  
-----------------. The Principle of Relativity. Cambridge                               University Press, Cambridge, 1922., 전병기                         역 : 『상대성 원리』, 이문출판사, 1998.   



         Ⅱ.  국외 문헌


    1. 참고 서적 및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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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기타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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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Ⅲ. 국내 문헌   


    1. 참고 서적 및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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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기타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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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카모도 요시카즈. 『상대화의 시대』. 양기웅 옮김, 小花, 1998.
  사토 후미다까 ·마쓰다 다쿠야. 『상대론적 우주론』. 김명수 옮김, 전                       파과학사, 1994.
  소광섭. 『물리학과 대승기신론』. 서울대학교 출판부, 1999.
  아인슈타인. A. 『상대성 이론』(Relativity, The Special and the General                             Theory). 김종오 역, 미래사, 1996.
  이명숙. 『존재론의 상대성』. 서광사, 1994.
  팡리지·추 야오콴. 『뉴턴 법칙에서 아인슈타인의 상대론까지』(From                                Newton's Laws to Einstein's Theory of Relativity).                          이정호·하배연 옮김, 전파 과학사, 1998.
  후쿠시마 하지메. 『상대론의 ABC』. 손영수 옮김, 전파과학사, 1997.
  헤르만 본디. 『상대성 이론과 상식의 세계』. ―아인슈타인에 대한 새                          로운 접근― 박승재·조향숙 옮김, 전파과학사,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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