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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신학논문은행에 대하여

1999/10/05 (01:06) from 203.252.22.54' of 203.252.22.54' Article Number :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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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와 제사
기독교와 제사
                                                                                                정 진 홍(서울대 종교학과)


1. 들어가는 말

경험으로 아시겠지만 기독교인이 제사를 지내야 하느냐, 지내지 말아야 하느냐, 어떻게 지내야 하느냐, 왜
지내면 안 되느냐는 등 문답은 매우 많습니다. 이에 대해선 기독교 신학 서클 안에서 상당한 논의가 있어 왔
기 때문에 이 주제에 대해 상술하지 않더라도 이미 신학적인 틀이 다 짜여진 것으로 생각합니다. 저는 기왕
종교학을 하고 있으니 그 입장에서 '기독교와 제사'라는 문제에 대해 직접 답을 드리기보다 이 문제를 어떻게
바라볼 수 있을까, 어떻게 접근할 수 있을까, 어떤 모습으로 드러나고 있을까 하는 것을 말씀드림으로 여러분
들이 제사 문제를 저런 눈으로 볼 수도 있구나,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받아들이는가 하는 것 등을 스스로 생
각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주제로 들어가기 전에 여러분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서너 가지 얘기를 하겠습니다.
때로 우린 아주 중요하다고 생각되던 문제를 고민하다 어느 단계에 도달하게 되면 사실 그것이 그렇게 중
요하지 않은데 중요하다고 매달렸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저는 어제 이곳에 강의하러 오기 위해 준비를 하면
서 옷차림이나 강의내용 등으로 고민을 했습니다. 그것은 제게 대단히 진지한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향린교
회를 왜 가야만 하는지에 대해 고민하다가 그에 대한 답을 내렸다면 그 순간 무엇을 말해야 하는가, 무엇을
입고 갈 것인가는 별 중요한 문제가 아닌 것이 됩니다. 즉, 내가 왜 거기에 가야 하는지가 해결되면 갑자기
지금까지 가장 중요하게 여겼던 문제가 지엽적이고 피상적인 문제로 스러져 버려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때로는 '제사와 기독교'라는 문제가 기술적인, 형식적인 많은 문제들을 갖고 씨름을 하
는데 위에서 말씀드린 대로 가장 궁극적인 문제가 해결되면 "제사를 지내면 어떻고 안 지내면 어때?" 하는 생
각을 하게 될 것 같습니다. 우리는 자주 지엽적이고 감각적인 말단의 문제를 가지고 씨름을 하면서 중요한 것
들을 잃어버리는 것은 아닐까요?
또 하나는 서울을 구석구석 상세하게 손바닥 놓고 보듯이 알고는 있지만 우리 삶의 영역을 전세계로 놓고
본다면 전체에서의 위치를 모를 수 있습니다. 반대로 서울을 자세히 잘 알지는 못하지만 세계에서 서울의 위
치와 존재를 알고 중요하게 여길 수도 있습니다. 이때 우리가 서울의 전부를 알려고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때론 후자가 더 요긴하며 중요한 것이라는 생각도 해 봅니다. 즉 우리가 사는 넓은 삶의 영역에서 도대체 서
울이 어디에 있는지 짚어볼 필요도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리고 또 제가 종교학을 한다니까 여러 종교를 두루 섭렵했다고 생각하는지 예수 안 믿던 친구들도 종교
에 관해 요즘 질문을 많이 합니다. 어느 종교가 제일 좋으냐고 묻는 그 친구들에게 전엔 농담삼아 "아프리카
종교가 제일 좋아" 하고 대답하곤 했는데, 요즘은 나 스스로 간절하게 묻는 물음이고 좀 정직하고 진지해지려
는 생각에서 "스스로 선택해서 믿는 종교가 제일 좋다."고 대답합니다. 이런 몇 가지를 생각하면서 제 말씀을
들으셨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2. 문제를 보는 시각

종교는 하나가 아니라 여럿입니다. 역사적으로 봐도 그렇습니다. 또한 왕조사처럼 흥망성쇠의 종교사가 서
술될 수 있는 것입니다. '라' 또는 '레'라고 하는 태양신을 섬기던 고대 이집트 종교는 3,000년을 지속했지만
결국 그 종교는 지금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폐허가 된 피라미드와 스핑크스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신도가 하나도 없으니 신도 없고. 그게 종교의 역사입니다. 그러니 기독교 역사가 겨우 2,000년인데 기독교
도 언제 없어질지 모르는 일입니다. 한국의 이슬람 교도가 7만인데 그 중 90%가 자생적인 신도입니다. 이렇
듯 종교는 없어지기도 하고 새로이 생기기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 많은 종교 중의 하나인 기독교는 유교에 바탕을 둔 우리의 전통 제례에 대하여 강하게 부정적인 태도를
지니고 있습니다. 까닭은 대체로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는데, 하나는 다른 종교의 의례이기 때문이라는 것이
고, 또 하나는 조상의 영에 대한 제사는 우상숭배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같은 기독교의 주장은 옳습니다.
당연히 기독교는 그러한 주장을 해야 하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기독교와 여타 종교의 구분이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른바 '자기주장의 논리'가 가지는 한계입니다. 개체의 현존이 자기주
장의 논리에 근거하여 확보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자기주장의 논리는 현실적인 한계를 스스로 내장하
고 있습니다. 그것이 무수한 자기주장의 논리들 중의 하나라는 사실을 스스로 승인하지 못하는 한 그러합니다.
그런 반지성적 독선에 빠져서 한국의 기독교가 이 사회에서 얼마나 많은 과오를 범했습니까? 그런 설교, 신학적
논리 때문에 많은 사람들을 거꾸러지게 하고 걸려 넘어지게 하고, 신자들뿐 아니라 구원을 갈망하는 비신자들에
게도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준 적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적어도 종교문화, 종교사를 통해서 특정한 종교의 자기 주장의 논리가 모든 인류의 종교경험을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은 이미 확인된 상식입니다. 아직도 다른 종교가 현존하지 않는다거나  종교사적 기
술이 그릇되었다고 얘기하든지, 신학적으로 하면 구원사를 혼동하고 있다든지, 아니 쉽게 말해서 인식의 언
어와 고백의 언어를 혼동한다면 성숙한 기독교인 아니 성숙한 인간이 되기 어렵습니다.
이렇게 생각해 볼까요. 내게 사랑하는 여인이 있으면 난 객관적 이유 없이 그녀가 제일 예쁘다고 말하고 더
나아가 그 여인만이 여인이라고 말할 수도 있고, 그 여인이 요청한다면 무릎꿇고 서약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
데 다른 사람도 자기 사랑하는 여인에 대해 나와 똑같이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나는 그것을 참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가 말하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내 것만을 옳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고백의 언어이고 고백의 차원에서만 사실일 뿐이지 인식의 언어로 보면 그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즉 객관적
인식은 예쁘지도 않고 다른 여인들도 수없이 많이 있지만 내 고백의 언어는 자기 여인만이 예쁘고 그녀만이
여인이라고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종교가 하나가 아니고 여럿인 인류사와 인류의 문화 안에서 자기 주장만을 무조건 내세우는 것은
비록 그 주장이 자신에게 진실한 것이어서 '옳은 것'이라 할지라도 삶의 총체적인 상황에서 '적절한 것'은 아닙니
다. 옳지만 옳음 자체로 규범적인 타당성을 가지는 것은 아닙니다. 따라서 고백의 언어를 인식의 언어와 혼동하
는 것은 성숙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시를 비과학적 언어라고 얘기하는 사람, 산문의 논리만이 정당하다고 말하
는 사람은 아직 어린 사람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얼마나 많이 고백의 언어를 인식의 언어로 환원해
서 지적(知的) 부정직을 범하는지 모릅니다. 그 어떤 부정직도 하느님 앞에서 범죄입니다. 우리는 그 부정직에
대한 책임에서 자유롭지 않습니다. 이것은 심각한 문제입니다. 현실은 우리로 하여금 적합한 옳음을 선택하도록
하고 그것이 삶의 현실입니다.
이런 자리에서 제사문제를 보았으면 합니다. 중요한 것은 사물을 어떤 자리에서 보느냐 하는 것이죠. 가장
이상적인 것은 총체적인 조망을 할 수 있게 두루 볼 수 있어야 하고 그래야 우리는 정말 책임질 수 있는 인식
의 자리에 도달하며 그 자리에서 내가 규범적인 행위를 할 때 덕이 되고 사랑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사를 문제로 삼는 경우 제기되는 문제의 까닭으로 앞에서 지적된 '다른 종교의 의례이기 때문'에,
'우상숭배이기 때문'에 하는 것이 순전히 기독교의 자기주장에 근거한 논리일 뿐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우선 주목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것이 이 문제의 본질이기도 합니다. 제사라는 하나의 문화현상은 지극히
다양할 뿐만 아니라 이에 대한 이해와 해석도 수없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어찌 되었든 제사는 현존하는 문화
이며 '사실'인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이 세상에는 기독교만이 '종교'로 있지 않습니다. 기독교에 대하여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의견과 주장이 기독교의 주장과 상관없이 있다고 하는 사실을 우리는 현실로 승인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이러한 사실을 승인하지 않으려 합니다. 분명한 사실로 다른 종교의 현존이
확인되는데도 그것을 기독교적 해석으로 실재가 아니게 하려는 독특한 논리를 구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기독교가 제사를 문제라고 의식하고 있는 것에 못지 않게 그러한 문제를 제기하는 기독교의
'어떤 경향성, 또는 태도'도 당연히 문제로 상정할 필요가 있습니다. 갈등이 일어나는 상황을 한쪽에 의해서만
인식하고 풀어내려는 접근은 갈등을 증폭시키거나 또는 재생산하는 연쇄만을 이어 나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2. 서로 다른 유형의 종교들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 조망할 필요가 있습니다. 세계에는 기독교만 있는 것이 아니
라 수많은 종교들이 있다는 것이 사실이고, 유일하고 영원한 절대적인 종교가 있다는 선언은 고백의 발언이지
인식의 발언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문제 하나하나가 아니라 인식의 논리로 볼 때 역사적으로 현실
적으로 매우 많은 종교와 종교문화라는 현상 속에서 기독교는 어떤 자리에 있는 것인가, 모든 종교가 각자 자기
의 모습을 갖고 있다면 기독교는 어떤 모습일까? 전체 인류사 속에서 어떤 자리를 차지하고, 그래서 드러나는
기독교의 특성은 다른 것과 비교해서 무엇이 다른가 등을 고백의 논리에서만 끝내지 말고 현실을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종교는 인간의 구체적인 삶이므로 문화의 옷을 입고, 따라서 문화-역사적인 조건으로부터 자유롭지
않습니다. 모든 종교는 한결같지 않습니다. 같은 것이 있다면 어떤 종교든 삶의 주체를 변화하게 한다는 공통
점입니다. 즉 존재양태를 바꿔 주는 것이죠. 우리는 그것을 '구원론(soteriology)'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불교는 불교고 기독교는 기독교지 서로 같지 않습니다. 문화적 조건, 역사적 출현 계기 등이 다르니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종교라고 하는 것들이 전체 별자리로 생각하면 어디에 있을까요. 그 자리가 갖
고 있는 관계구조 속에서 이야기할 수 있어야 내 모습이 보입니다. 나를 알기 위해서는 남과 비교를 해야 하
고 나의 자리를 알아야 하고 자기 발견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왜 기독교의 자리는 어디
인가 묻지 않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므로 이같은 동질성과 다양성에 근거하여 우리는 다음과 같은 종교유형론을 제시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가 제사와 연결시켜서 얘기할 수 있는 것은 신과 인간을 연계하는 것을 축으로 선회하는 신-지향적
종교성, 초월적인 실재와 인간을 연계하는 것을 축으로 하는 우주-지향적 종교성, 인간과 인간을 연계하는 인
간-지향적 종교성 세 가지가 있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인류의 종교가 이렇게 칼로 베듯이 단절되어
나뉘는 것은 아닙니다. 이러한 유형은 다만 서술적인 편의를 위한 범주적 경계일 뿐입니다. 그렇지만 이렇게
묘사하지 않을 수 없을 만큼 각 종교는 분명한 지향의 차이를 보입니다. 따라서 각 종교는 서로 다른 '에토스
(풍토)'를 지니는 것입니다.
신-지향적 종교성에서는 신의 절대성 때문에 인간은 늘 신에게 예속되며, 신으로부터 비롯하지 않은 어떤
것도 없을 뿐만 아니라 그렇게 이해되는 어떤 것도 무의미합니다. 인간을 위하여 그 신의 죽음이 운위되는 경
우에서조차 그 신의 절대성은 그 사랑에 대한 인간의 감격으로 묘사되면서 계속 유지됩니다. 윤리적 규범은
그 신의 절대의지에 의하여 결정되는 것이어서 신의 뜻이면 어떤 것도 결과론적으로 선입니다. 당연히 양자
택일의 논리와 행위규범이 요청되고 배타와 독선은 불가피한 자기 지표입니다.
우주-지향적 종교성은 초월과 신비를 전제하지만 그것이 페르소나(persona, 인격체)로 묘사되지는 않습
니다. 그러므로 인간과 우주와는 '관계'라기보다 '현존'입니다. 인간의 문제는 인간이 스스로 자기를 주장하면
서 본래적인 '더불어 있음'을 우주와 누리지 못하는 데 있습니다. 따라서 초월이나 신비라는 것으로 개념화할
수 있는 총체라는 개념에서의 우주와 조화로운 현존을 누리는 것이 인간다움의 내용입니다. 조화로움이 규범
적인 가치라고 주장되는 이러한 에토스(풍토) 안에서는 '이것도 저것도'가 논리와 행위의 규범이 되면서 불투
명성과 모호성이 이러한 종교문화의 지표가 되는 것입니다.
인간-지향적 종교성에서는 신도 초월적인 실재도 우선하는 중요한 가치, 또는 궁극적 지표가 되지 않습니
다. 그러한 것들은 결과적으로 인간에 의하여 인간을 위해 마련된 문화 속의 실재이고, 그러한 실재의 효용은
유의미한 것이 됩니다. 그러므로 끊임없이 '지금 여기에서' 삶의 현실에 직접적인 영향을 줄 수 있는 힘의 실
재로 그러한 신이나 초월이 있고, 상황이 바뀌면 그 신이나 초월의 내용도 불가피하게 변합니다. 그러므로 신
이나 초월의 현실적 실용성은 실재들을 판단하고 선택하는 절대적인 척도가 됩니다. 그리고 실용성의 내용은
다시 직접적이고 즉각적인 '만족스러운 삶'인데 그것은 대체로 본능 충족적인 것입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
지 않는 목표 지향적 저돌성은 이러한 실재를 전제하는 동기에서 비롯합니다. 이러한 종교성은 각기 신-지향
적 종교성이나 우주-지향적 종교성과 연계하여 각기 다른 종교문화를 이룩합니다.

4. 기독교와 제사의 갈등을 초래하는 바탕

이같은 종교유형론에 근거한다면 지금 우리가 지니고 있는 제사문화와 기독교의 갈등은 근원적으로 유형의
차이, 곧 종교의 구조적 차이에서 비롯하는 것이기 때문에 사실상 '신학적으로' 극복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본래부터 기독교는 신지향적인 종교성을 가지고 있고, 지금 우리의 전통문화에 속한 그러한 제사문화
가 자리잡을 수 있는 공간이 없기 때문입니다. 제사문화는 본디 우주-지향적 종교성과 인간-지향적 종교성의
중첩 영역에 자리잡고 있는 것이어서 신-지향적 종교성과 인간-지향적 종교성의 중첩 영역에는 우리의 제사문
화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럴 수 없다는 사실은 제사가 어떤 것인가 하는 것을 살펴보면 곧 확인될 수 있으며
제사는 다음의 몇 가지 특성을 지닌 것으로 묘사할 수 있습니다.
첫째, 제사는 돌아간 조상과의 만남입니다. 전통적인 제사를 지내는 공동체에서는 산 사람만이 아닌 산 자와
죽은 자가 더불어 함께 사는 공동체라고 인식합니다. 죽은 이라고 해서 절대로 떠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주
지향적 종교성에선 죽은 자도 산 자와 함께 있습니다. 그러나 성서적인 근거에서는 그런 경우가 거의 없습니다.
삶과 죽음을 단절된 이원적 구조로 이해하는 문화에서는 불가능한 정서를 담고 있으며 쉽게 수용할 수 없는
것입니다. 삶과 죽음이 서로 부정적인 입장에서 다른 것으로 전제되는 한, 사자(死者)를 제사한다는 것, 곧 '사
자와의 만남'은 현실화할 수 없습니다. 사자에 대한 태도는 다만 추모일 뿐입니다. 그런데 그 추모조차 현실성을
지니지 못합니다. 삶 안에서 사자들이 지니고 있던 구체적인 모습들은 없어진 채 기억 안에 있는 그리움이나
애절함만이 불려지는 그러한 추모는 '정서'이지 '실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제사는 실재를, 곧 사자의
귀환이 현실화하는 경험을 지니는 것을 그 내용으로 합니다.
둘째, 제사는 근원적으로 산자와 죽은 자가 함께 공존하는 공동체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사자가 머무르
는 공간의 구획은 언제나 불투명하고 모호하며 바로 그 불투명성이 그 공동체의 특성입니다. 죽은 사람은 결코
돌아가 죽는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이것을 '살아 있는 망자' 또는 '살아 있는 사자(死者, the living-dead)'
라고 표현합니다. 그러면 언제 죽느냐. 죽은 자를 기억하고 있는 마지막 사람이 죽을 때 그때 죽는 것입니다.
그 동안은 살아 있습니다. "아! 기억 속에서 살아 있는 것이구나" 할 수도 있지만 그보다는 구체적인 공동체의
구석구석 생활 속에서 살아 있는 것입니다. 돌아간 분이 오시니 음식을 마련하고 그 동안의 일을 아뢰고 하는
일들을 즉, 사람으로 모시는 행태들을 여전히 자연스럽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이
제사이고, 이것이 우주지향적 종교성 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 지향적 종교성에서는 신의 절대적인 권위
에 의해서 이리 저리 재단되면서 바탕이 없습니다. 살아있는 사람들의 삶 속에 '살아 있는 사자'가 현존하는 공
동체에서만 제사는 현실성을 지니게 되는 것입니다.
셋째, 제사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관계의 단절'이란 불가능한 현실임을 전제하는 문화에서 드러나는 인간의
몸짓입니다. 제사는 죽음으로 인해 관계가 끊어지거나 단절되지 않아, 죽어도 이어진다는 것을 확증하는 것입
니다. 즉, 관계의 단절이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을 실증적으로 보여줍니다. 그러니까 족보가 그렇게 중요한 것입
니다. 그런데 기독교는 상대적으로 보면 죽으면 끊어져 절대적인 창조주의 품 속에 흡수되어 사라지고, 신을
매개로 하지 않고는 어떤 관계도 재현될 수 없습니다. 그러니 기독교 정서와 제사를 지내는 정서와는 근원적으
로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제사정서에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제사에 참여하면서 자기
가 누구인지 자기의 정체성(아이덴티티)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넷째, 제사는 이러한 이유 때문에 존재근거를 시현하고, 그렇게 드러난 존재근거 위에 자신의 존재를 뿌리내
리는 존재기반의 구체적인 확보이기도 합니다. 제사를 통하여 제사 참사자는 자기를 이야기할 수 있는 신화를
가지고 자기 존재의 비롯함에 대한 고백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의 비롯함에 대한 긍정적 승인은 동시
에 자기 삶의 전개가 도달할 종국에 대한 투명한 인식과도 궤를 같이합니다. 그러므로 제사는 그것이 가지는
과거지향성에도 불구하고 그 과거를 미래와 중첩하게 함으로써 현재를 영원한 것이게 합니다. 다시 말하면 지금
여기에서의 자기 존재의미를 증언할 수 있게 함으로써 실은 시간의 흐름을 넘어설 수 있게 해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사는 언제나 축복을 현실화하는 계기로 기려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신-지향적 종교성과 인간-지향적 종교성의 중첩 영역에는 이러한 종교(제사)가 전혀 들어올 수 없습
니다. 사자와의 만남이란 비현실적인 일이며, 삶의 공동체가 죽은 자와 더불어 살아가는 것일 수 없습니다. 그
러므로 그것은 언제나 현실적인 경험에 내재하는 것이 아니라 비현실적인 경험, 곧 신앙이라는 자기봉헌의 결단
에 의하여 드러나는 것입니다.
제사문제가 어디서 비롯되느냐에 관해 이렇게 얘기하면 좀 쉽게 이해하실까요?
우리 나라 전통혼례가 갖고 있는 것은 기독교와는 다른 우주지향적 종교성입니다. 천지, 음양, 남녀의 조화
로움과 일치되어 마침내 사람답게 되고 축복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개신교 결혼식은 신의 절대적인 권위
에 의하고 그 권위에 의한 규범 속에서 규범을 따르게 하고 그렇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전
통혼례는 남녀가 만나 사는 것 자체가 축복이고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제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신 지향적인 종교성을 가진 데서 죽음은 엄격하게 삶과 분리되어 죽음 아니면 삶
입니다. 죽어 저쪽으로 가면 심판이 기다리고 있는 이것은 자연스럽지 않습니다. 죽음의 상징론에 관한 강의
를 들었는데 아메리카 인디언 어떤 부족은 죽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삶의 일부처럼 자연스럽게 생각해 왔
다고 합니다. 죽는 것은 생명이 있기 때문에 죽는 것이므로 죽음은 생명의 탄생과 같이 있는 것이고 따라서
죽음은 형태를 달리할 뿐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에 죽음에 대한 별다른 공포가 있을 수 없었습니다. 그
러나 기독교가 들어와서 죽고 나면 심판이 있다는 것을 얘기하고 나서부터 죽음이 두려워지기 시작했다는 것
입니다. 그것을 종교학자는 그들의 죽음관이 기독교에 의해서 타락했다는 것으로 표현했습니다.
제사는 기본적으로 죽은 자의 귀환의례이며 산 자와 죽은 자의 공동체에서 이루어지는 현상인 것입니다.
신(창조주 하느님이 아니고 돌아간 분)이 다시 오는 것입니다. 그것을 신 지향적인 종교문화 속에서 보면 불가능하지만 죽음과 삶이 단절되지 않은 문화, 뭔가 초자연적인 그래서 조화 자체가 삶 자체인 곳에서는 자연
스러운 것입니다. 따라서 삶의 공간과 단절된 설정을 하지 않습니다.
남녀가 같이 있다는 것만으로 축복인 것처럼 받아들이면 삶과 죽음이 같이 있는 것은 현실이고 그것이 삶의
모습이고, 죽은 자의 귀환이란 자연스러운 것이고 그렇다면 죽은 자의 제사가 아무 장애가 되지 않습니다. 그런
데 삶과 죽음은 단절된 것, 귀환한다고 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 시간의 역류를 인정하지 않는 것으로는 불가능
합니다. 이것은 종교성의 차이에서 생겨난 문제입니다. 아무리 기독교가 새로운 해석을 해서 수용한다 해도 죽
은자의 귀환의례를 없앤다면 제사로 수용한 것이 아니고 그것을 수용한다면 신 지향적 종교성을 훼손당할 각오
를 해야 합니다. 지금 이 자리 그대로 앉아서 그것을 수용하겠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제사를 수용했다고
하지 말고 그냥 우리 제사, 우리 장례는, 또 의례는 이렇다 하고 말하는 것이 훨씬 정직할 겁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는 신-지향적 종교성보다 우주-지향적 종교성에 더 익숙해 있다는 사실입니다. 죽음과의
단절보다 죽음과의 조화를 더 낯익어 하는 것이 우리의 의식의 심층입니다. 그러므로 사자를 만난다고 하는 것
이 이상스러울 것이 없고, 제사로 상징되는 긴 연속의 끝에서 자기의 존재를 확인하는 일이 결코 불가해한 사실
이 아닌 것입니다. 따라서 기독교가 제사의 문제를 참으로 진지하게 다루기를 원한다면 그것은 신-지향적 종교
성으로 묘사될 기독교가 어떻게 우주-지향적 종교성에 대하여 반응해야 하는가 하는 데서부터 물음을 묻기 시
작해야 합니다. 이렇게 보면 제사가 기독교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조상이 신이냐 아니냐 하는 그러한 문제가
아닙니다. 대단히 근원적으로 문화적 이질성이 깊이 그리고 넓게 그 갈등의 바탕이 되어있는 것입니다. 그러므
로 지엽적인 문제를 수용하거나 정화하거나 성화시킨다 해서 해결될 일이 아닙니다.

5. 문제를 푸는 길

그러면 이문제를 어떻게 풀어갈 것인가?
한국의 기독교가 신 지향적인 종교성을 여전히 유지하면서 제사를 수용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렇다면
기독교가 이러한 우주-지향적 종교성을 어떻게 읽고, 알고, 받아들이는가 하는 것이 관건입니다. 또 그렇기
때문에 제사의 문제는 우리 나라의 기독교, 지금 여기에서의 우리의 문제인 것만은 틀림없습니다. 그래서 서
양에는 없는 그러한 문제 때문에 우리의 기독교가 이렇게 시달리고 있다고 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넓게 멀
리 보면 이것은 우주-지향적 종교성을 끌어안지 못하고 있는 기독교 자체의 문제이고 기독교가 스스로 지니
고 있는 문화적 한계 때문에 불가피하게 직면하는 문제인 것입니다. 물론 우주-지향적 종교성이 신-지향적
종교성을 어떻게 이해하고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 하는 것도 상응하는 진지성을 가지고 논의해야 합니
다. 기독교를 어떻게 토착화시켜야 하느냐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전통적인 종교문화가 새로운 신-지향적 종
교성을 어떻게 읽고, 알고, 받아들이는가 하는 것도 아울러 추구하고 논의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불가피하게
그것은 상호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어찌됐든 상황이 이러하다면 제사문제는 근원적인 문제의 한 단면, 또는 작은 지엽적인 문제에 지나
지 않습니다. 생각해 봅시다. 제사에 대한 문제는 실은 죽음에 관한 문제입니다. 그러나 모든 죽음에 관한 물음
은 삶에 관한 문제이고, 삶에 관한 문제는 생명에 관한 문제로 그리고 마침내 존재에 대한 문제로 이어지게 됩니
다. 그렇다면 제사문제를 제사문제로만 논의하는 것은 존재자체에 대한 분명한 해답과 연계되지 않은 것일 때
아무런 보람도 초래할 수 없는 물음에 매달려 있는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지금 기독교는 자기 나름의 답변을 마련하여 그 물음들의 연쇄 끝에 신을 두어 모든 해답을 완결합니다. 그리
고 우리의 전통적인 경험은 그 물음들의 끝에 우주-지향적 종교성을 자리하게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같은 두 다른 종교문화의 유형을 익숙하게 경험해왔습니다. 종교사는 그러한 유형의 종교들이 지속하고 있는
나름의 속성들이 현대의 문화정황에 어떻게 대처하고 있는지 보여주면서 그러한 모습들이 가지고 있는 현실
적합성 여부조차 시사하고 있습니다. 이른바 신-지향적 종교문화가 봉착한 심각한 딜레마는 자신의 자기주장의
논리 안에 '자연의 이법(理法)'을 결여한 한계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이고, 우주-지향적 종교문화의 심각한 갈등
은 자신의 주장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존재의 인격성'을 결여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신-지향
적 종교문화의 에토스와 우주-지향적 종교문화의 에토스를 인간-지향적 종교문화의 에토스 안에 수렴하여 나아
가는 일을 현실적인 과제로 다룰 수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제사문제의 해결은 제사문제에 자체에 있지 않습니다. 제사문제는 기독교가 우주-지향적 종교문화의
에토스를 어떻게 읽고, 알고, 받아들이는가 하는 태도로 다듬는다면 별로 대수로울 것이 없는 사소한 일일 수밖
에 없는 그러한 문제일는지도 모릅니다. 아마 그럴 것입니다. 그러나 제사자체를 끝내 중요하고 궁극적인 문제
로 여겨 그 문제에 대한 해답만을 모색한다면 제사를 긍정하든 부정하든 결국 그러한 문제제기 및 문제해결의
태도는 전제적 태도에 종착하고 말 것인데, 그것은 실은 지극히 비종교적이고 반종교적인 태도입니다. 결과적
으로 '복음'일 수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기독교를 기독교답게 하는 가장 중요한 것은 '메타노이아(metanoia, 회개)'의 선포에 있습니다. 그것보다
더 중요한 기독교 복음의 출발이 없습니다. 제사문제를 보는 시각, 그 문제를 풀려는 출발점은 기독교 역사가
어떤 과오를 범했는가를 살피는 자리여야지, 그것을 간과한 채 '솔리 데오 글로리아(soli Deo gloria, 오직 하
느님께 영광)'만을 외친다고 되는 일이 아닙니다.
지금 기독교가 기독교이기를, 제사가 제사이기를 주장하는 자리에서 솔직하게 말하면 출구는 없습니다. 기
독교가 수용한 제사는 이미 제사가 아닐 것이고 또 기독교가 제사를 수용하면 기독교는 기독교가 아닐 테니
까요. 그러나 기독교가 제사를 빙자해 박해했다는 과오를 승인한다면, 이것만 회개한다면 거기에 출구가 있
지 않을까요? 그 과오를 승인하지 않고, 참회하지 않고, 그 과오를 회개하지 않는 한 새로운 가능성의 영역은
열리지 않습니다. 그 가능성이란 기독교가, 제사가 바뀌어야 하는 것입니다. 종교가 바뀌는 것은 두려워할 것
이 아닙니다. 변화는 생명의 현상인 보편적인 진리입니다. 생명이 있기 때문에 변하는 것이고 생명이 있는 것
은 바뀌어집니다. 바야흐로 단절되고 소원했던 여러 문화권은 점차 서로 소통하고 혼합되고 있습니다. 새로
운 종교성의 탄생은 불가피한 필연입니다. 우리는 어쩌면 그러한 고백을 처음 발언할 수 있는 축복받은 사람
들인지도 모릅니다. 이처럼 제사문제를 심각하게 논의한다고 하는 것이 그러한 가능성의 조짐이라고 여겨지
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떻게 바뀌어져야 하는가 여기서부터는 신학자들이 할 일입니다. 그리고 죽음의 슬픔을 위로하는
자리에서부터 출발해야 합니다. 단지 그것이 영혼이냐 아니냐 등에 집착하고 있다면 어쩌면 그것은 참 문제
가 아닐 것입니다. 다른 것은 잘 모르지만 제사에 관해 중요한 것은 종교성 자체가 다른 문화, 다른 역사의
맥락에서 출발한 진지한 인간의 몸짓을 짓밟아 버린 과오를 고백하는 데서부터 이 문제를 접근해야 할 것 같
습니다. 그렇게 출발한다면 갑자기 제사가 그리 큰 문제가 아닌 지경에 이를 수 있지 않을까요? 절을 해야 하
는지 말아야 하는지를 그 자리에서 따지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제사를 지내야 하
는 죽음의 자리에서 그 죽음을 슬퍼하는 사람을 위로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참 문제 아닌 것에 집착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http://www.religionstheology.org/Data/neighboreligions/neighboreligion1.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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