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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신학논문은행에 대하여

2003/11/16 (23:41) from 80.139.176.91' of 80.139.176.91' Article Number : 232
Delete Modify 김은주 Access : 3873 , Lines : 67
종교개혁을 위해 돌진한 고집 센 사나이, 마르틴 루터
종교개혁을 위해 돌진한 고집 센 사나이, 마르틴 루터


1517년. 많은 대중들이 교회로 모이는 만성절 전날(오늘날의 핼러윈 데이)이었던 10월 31일, 독일 비텐베르크의 성(城)교회 정문에 놀랄 만한 문서가 내걸렸다. “교황은 하나님께서 죄를 사하였다는 것을 선언하거나 확증하는 이외에 어떤 죄든지 사할 수 없다”, “연보궤에 돈이 ‘쟁그랑’ 떨어지는 소리가 나자마자 영혼이 연옥에서 벗어난다고 말하는 것은 사람의 교리를 설교하는 것이다”를 비롯해 당시 카톨릭 교회에서 자행하던 면죄부 판매의 부당함을 지적하고 교황권에 의문을 제기하는 95개 항목이 적혀 있었던 것이다.

교황의 권세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던 중세 유럽에서 이런 반론을 제기하는 것은 목숨을 내놓는 것이나 마찬가지로 위험한 행동이었다. 이 유명한 ‘95개조 반박문’을 작성하여 내건 사람은 마르틴 루터. 비텐베르크 대학의 교수이자 사제였던 그가 처음부터 교황에 맞서겠다거나 종교개혁을 일으키겠다는 큰 포부를 지녔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구원은 선행이 아닌 믿음으로 말미암는 것이며, 교황이 아닌 성서에 신앙의 바탕을 두어야 한다는 확신 때문에 그는 34세의 젊은 나이로 종교개혁의 불길을 당기게 된다.

종교개혁의 밑거름

루터에 앞서 카톨릭의 모순을 지적한 선각자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루터와 거의 동시대 인물인 에라스무스 같은 이는 저서 「우신예찬」에서 교황과 성직자들과 수도사들의 부패상과 미신, 우상숭배의 관습들에 대해 예리하게 지적했으나 그 자신이 로마 카톨릭 교회의 테두리를 벗어나고픈 생각이 전혀 없었던 온건한 사람이었다.

종교개혁의 서막을 올린 사람들은 영국의 위클리프와 보헤미아(체코)의 후스였다. 14세기 말, 영국 옥스퍼드 대학의 교수 존 위클리프는 성직 매매 등 카톨릭 교회의 부패와 잘못된 제도를 지적하며 성서 중심의 믿음을 강조했다. 당시 교황청은 로마와 아비뇽 두 곳으로 분열되어 위기를 겪던 터라 이렇다 할 대응을 하지 못했으므로 위클리프는 와석종신(臥席終身)할 수 있었지만 그의 가르침을 이어받은 후스는 달랐다. 얀 후스는 고향인 보헤미아에서 위클리프의 학설을 그대로 전파하다가 1415년 콘스탄츠 공의회에 소환되었다. 그의 안전을 보장한다는 황제의 안전통행장을 받은 채 후스는 공의회에 참석하였으나 카톨릭 교회 측은 이 공의회에서 그를 이미 사망한 위클리프와 함께 이단으로 규정했다. 자신의 사상을 끝내 철회하지 않은 후스는 화형당했고, 무덤 속 위클리프의 시체도 이때 파헤쳐져 저서와 함께 불태워졌다. 그후 1498년에는 피렌체에서 교회의 윤리적 쇄신을 부르짖었던 수도사 사보나롤라가 역시 이단으로 정죄되어 화형당했다.

루터의 종교개혁은 이전의 개혁자들과 달리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꾸준히 계속되었고, 파급 효과도 강했다. 무엇보다도, 루터 당시에는 종교개혁을 위한 모든 분위기가 무르익어 있었던 것이 성공의 요인이었다. 14세기의 교회 분열과 유럽 인구의 1/3을 앗아간 페스트로 인해 교황권과 카톨릭 교회에 대한 불신이 커진 데다가, 르네상스로 인해 학문적인 관심이 고조되자 인문주의자들은 성서와 일치하지 않는 카톨릭 교회의 작태에 대해 비판적인 태도를 보였다. 15세기 중반에 활판인쇄술이 발명된 후 이런 비판들은 인쇄술의 발달에 힘입어 당대 지식인 사회에 빠르게 전파되었다.

또한 “교황은 태양, 황제는 달”이라며 하늘 높은 줄 모르던 교황의 절대권은 13세기를 기점으로 쇠퇴하였고 교권이 약해진 틈으로 왕권이 강화되고 민중들에게 민족주의와 국가주의가 확산되었다. 이를테면 루터 당시 독일 민중 사이에서는 ‘왜 가난한 독일인들이 이탈리아 로마에 있는 교황을 위해 돈을 바쳐야 하는가?’ 하는 의문이 팽배해 있었다. 이런 제반 조건이 종교개혁을 위한 밑거름이 된다.

개혁 이전 카톨릭의 부패상과 면죄부 판매

16세기 당시에는 교황 이하 카톨릭 성직자들의 비리가 극에 달하고 있었다. 여러 많은 죄악에 더하여, 전임 교황 율리우스 2세가 중수하기 시작한 성 베드로 대성당 공사를 위해 교황 레오 10세는 면죄부 판매를 계획했다. 면죄부는 11세기 십자군 전쟁 때 교황 우르반 2세가 십자군에게 교회법에 따라 규정된 모든 죄를 사면한다고 약속한 데에서 시작되었는데, 루터 당시에는 민중의 헌금을 긁어모으는 수단이 되어 있었다.

카톨릭 교회에서는 고해성사에서 빠뜨린 죄나, 고해 때 사제가 고해자에게 신의 뜻에 미치지 못하는 방법을 제시하여 미처 다 소멸되지 못한 죄에 대해서는 연옥에 가서 나머지 고통을 받은 다음 낙원으로 옮겨진다고 가르쳤다. 당연히 민중에게 연옥은 지옥 다음으로 가기 싫은 장소였지만 어느 누구도 자기 죄가 남아 있지 않다고 확신하지 못했기 때문에 연옥에 대한 두려움이 강했다. 이런 믿음을 악용하여 면죄부 판매자들은 면죄부를 사는 즉시 구입한 당사자의 죄가 용서받는 것은 물론이고, 현재 세상을 떠나서 연옥에 있는 부모나 사랑하는 사람들의 영혼도 연옥을 벗어나 낙원으로 간다고 설파하고 다녔다.

면죄부 판매는 특히 독일에서 성행했다. 프랑스같이 강력한 왕권하에 민족국가를 이루고 있던 유럽 여러 나라와 달리, ‘신성로마제국’이라는 허울 좋은 황제국으로서 황제가 7명의 선제후(選帝侯)들에 의해 선출될 뿐 아니라 크고 작은 300개 가량의 제후국으로 나뉘어 권력이 분산되어 있던 독일은 뚜렷한 구심점이 없어 교황청의 좋은 착취대상이었다.

독일에서 면죄부 판매는 교황 - 금융 재벌 푸거가(家) - 마인츠 대주교로 이어지는 삼자의 합작품이었다. 성직을 매매하고 성직자들에게 부임 후 처음 1년간의 수입을 교황청에 귀속시키는 ‘첫수입세’를 징수하던 교황은 성 베드로 성당의 개축을 위해 더욱 막대한 자금이 필요해지자 면죄부 판매 방식을 도입했다. 마인츠의 대주교 알브레히트는 대주교직을 교황에게 사들이면서 아우크스부르크의 은행 가문인 푸거가에 자금을 빌려 첫수입세를 미리 지불했고, 교황과 합의하에 독일에서 면죄부를 판매할 독점권을 얻었다. 판매 수익의 절반은 교황에게, 나머지 절반은 자신에게 배분하며 자신이 얻은 수익은 고스란히 빚을 갚기 위해 푸거가로 들어갔다.

1517년, 면죄부 판매 촉진을 위해 대주교 알브레히트가 파견한 설교사는 도미니크회 수도사 테첼이었다. 그는 면죄부라는 가짜 만병통치약을 팔겠다고 다니는 약장수 같았다. “연보궤에 돈이 ‘쟁그랑’ 떨어지는 소리가 나자마자 영혼이 연옥에서 벗어난다”는 테첼의 설교가 비텐베르크 인근까지 이르자 이에 분개한 루터는 ‘95개조 반박문’을 내걸었다. 루터는 반박문 제92조에서 “그리스도의 백성을 향하여 평안도 없는데 ‘평안, 평안’을 외치는 예언자들은 다 물러가라”고 일갈했다.

저돌적인 개혁자 루터

‘95개조 반박문’은 구텐베르크가 발명한 활판인쇄술에 힘입어 빠른 속도로 당대 지식인들 사이에 전파되었다. 루터의 행동에 대해 교황은 처음에 ‘술 취한 독일인의 주정’ 정도로 치부했으나 사태가 확산되자 강경 대응하기로 결정한다. 교황 레오 10세가 루터에게 내린 파문 교서는 일면 재미있다. 이 파문 교서는 루터를 비하하는 인신공격적인 문장으로 시작한다. “일어나소서, 오 주여! 당신의 소송사건을 심판하소서. 멧돼지 한 마리가 당신의 포도원에 침입하였나이다. … ” 파문 교서를 받은 루터는 보기 좋게 이를 불태워 버렸다.

저돌적이고 열정적인 개혁자 루터가 그들에게 멧돼지로 비쳐진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루터는 1483년 독일 작센의 아이슬레벤 지방에서 전직 농부였던 광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건장한 독일 농부 같은 풍모를 갖춘 그는 부모의 소망에 따라 에르푸트트 대학의 교양학부를 졸업하고 법률공부를 시작했으나 1505년, 폭풍우를 만나 갑작스런 죽음의 공포를 느꼈을 때 성 안나에게 수도사가 되겠다고 맹세한 일을 계기로 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에 들어간다. 수도원에서 그는 성실한 수도사로서 규율을 지켰으며 철야기도와 금식, 자기 몸을 채찍으로 내리치는 등의 고행을 거듭했지만 자신의 죄를 용서받는 방법을 찾을 수가 없어 괴로워했다고 전한다. 1507년, 루터는 사제가 되어 미사를 집전하기 시작했고 1508년 비텐베르크 대학에 입학하여 이듬해 성서학사 학위를 받았다.

꾸준히 신학을 공부하던 루터는 1511년, 수도원 일 때문에 로마를 방문한다. 순교자의 피가 뿌려졌던 거룩한 도시 로마에 왔다고 기뻐하던 그는 약 1개월간 머물면서 성직자들의 부도덕과 타락을 목격하고 성직 매매와 매춘이 횡행하는 이 도시에 크게 실망한다. 1512년에는 신학박사 학위를 받고 비텐베르크 대학의 신학부 교수가 되었으며, 대학에서 성서를 강의하면서 그는 구원이 카톨릭 교회에서 말하는 것처럼 헌금이나 면죄부를 사는 등의 선행에 있지 않고 믿음에 있다고 주장했다. 1514년 그는 본당 설교자가 되고 이듬해 다시 인근 11개 수도원을 통괄하는 지역관할 지도신부가 되었으며 대학 강의와 설교를 통해 자연스럽게 개혁 사상이 전파되기 시작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는 성서의 구절은 그가 가장 큰 깨달음을 얻은 부분이었다.

카톨릭의 압력과 작센공 프리드리히의 보호

95개조 반박문 사건 후 루터의 지지자들이 많이 생겨나자 1518년, 교황은 루터를 로마로 호출하라고 아우크스부르크의 카예탄 추기경 앞으로 소환장을 발부한다. 그러나 루터는 작센의 선제후 프리드리히의 보호로 로마에 가지 않아도 되었다. 신성로마제국의 새로운 황제 선출을 앞둔 시점이라 교황은 자신이 원하는 황제를 옹립하기 위해 일곱 선제후들의 환심을 사두려고 했으므로 프리드리히의 의견을 표면상 존중할 수밖에 없었다. 프리드리히는 정치·경제적인 이유로 자신의 영지 내에서 면죄부가 판매되는 것을 원치 않았고 그의 궁정신부는 루터의 열렬한 지지자였기 때문에 그는 이후로도 계속해서 루터를 후원하게 된다.

로마에 가는 대신 루터는 카예탄 추기경과 논쟁을 벌였으나 이때까지 이단으로 규정된 것은 아니었다. 1519년, 루터는 변설에 능한 요한 에크와 라이프치히에서 다시 설전을 벌였다. 에크는 교묘한 방법으로, 루터가 악명 높은 이단자 후스의 의견을 옹호한다고 몰아세웠다. 이 논쟁은 일면 루터의 패배로 보였으나 이 때 비로소 자신의 신념이 카톨릭 교회와 교황제도를 부정해야 성립된다는 사실을 알게 된 루터는 더욱 반(反)카톨릭의 기치를 높이 들었다. 그는 1520년, 카톨릭의 의례와 부정 부패를 비난하고 믿음으로 말미암은 구원을 강조하는 세 가지 논문을 발표한다. 그의 논문들은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새로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자리에 오른 카를 5세는 사태가 점차 악화되자 1521년 보름스 의회로 루터를 소환했다. 황제는 안전통행권을 보장했으나 이미 후스의 잘못된 선례가 있었기에 출석에 응하는 자체가 루터에게는 매우 위험한 일이었다. 그러나 과감히 보름스로 달려간 루터는 카톨릭교도인 황제의 면전에서 자기 주장을 철회하라는 요구를 거부했다. “내 양심은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 것이므로, 내 양심과 다른 행동을 하는 것이 올바르거나 유익하다고 증명되지 않는 한 결코 내 생각을 철회하지 않겠거니와 또 철회할 수도 없다. 하나님이여, 저를 도우소서. 아멘.”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자 카를 5세는 약은 수법을 썼다. 안전통행을 보장한 만큼, 루터에게 귀향을 위해 40일을 제공하지만 그 후에는 법적인 모든 보호를 박탈함으로써 누구나 루터를 잡아 당국에 인계하면 화형에 처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귀향길에 일행은 숲속에서 기마병들에게 습격당했고 루터는 납치되었다. 그 뒤로는 몇 달간 루터가 살해되었다는 흉흉한 소문만이 돌았다.

그러나 이는 루터의 안전을 염려한 선제후 프리드리히의 계책이었다. 그는 궁정신부에게 루터를 안전한 곳에 피신시키고 그 장소를 자신에게조차 알리지 말도록 지시했다. 한적한 바르트부르크에서 루터는 무사 게오르게라는 이름으로 9개월간 은신하면서 논문을 쓰는 한편 신약성서를 독일어로 번역했다. 이후 구약성서의 번역까지 루터는 평생 성서의 번역과 교정 작업에 매달렸다.

루터가 실종된 후 비텐베르크에서는 과격파들에 의한 급진적인 개혁이 일어나고 있었다. 이들은 루터보다 앞서 복잡한 미사 의식을 폐지했고 십자가상과 성상을 파괴했다. 이런 내용은 최종적으로는 루터의 개혁과 일맥상통하는 것이었으나 루터는 급격한 변화를 바라지 않았다. 1522년 3월, 급히 비텐베르크에 돌아온 루터는 과격파들을 축출하고 내부의 질서를 확립한 다음 점진적인 개혁에 힘썼다.

종교개혁의 확산

루터의 개혁은 1524∼1525년에 발생한 농민전쟁을 계기로 새로운 양상을 띤다. 과격파 성직자들이 이끌던 농민군은 농노제 폐지와 세금 경감을 영주에게 요구하며 무기를 들었다. 전쟁 초기에 농민들은 루터를 지지하고 있었다. 루터도 농민과 영주 사이에서 화해를 도모하려 애썼으나 농민군이 수도원과 영주의 성을 습격하고 약탈을 일삼자 분개하여 “살인하고 도둑질하는 농민 무리에 대항하여 그들을 목 졸라 죽이고 베어 죽이고, 쳐 죽이라”는 논조의 격문을 제후에게 보낸다. 그는 지상의 군주에게도 복종하는 것이 기독교인의 의무라고 생각했으며 농민들의 과격한 반란이 사탄의 소행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농민전쟁은 영주의 용병들에게 곧 진압되지만 이 일로 농민들의 상당수가 루터에게 등을 돌렸다.

1525년 루터는 2년 전 수녀원을 탈출한 수녀 카테리나와 결혼했다. 전부터 성직자들의 결혼을 장려했던 그로서는 조금 늦은 감이 있기도 한 결혼이었다. 이 무렵 루터의 절대적인 동반자였던 학자 멜란히톤이 루터의 사상을 체계화하는 한편, 새로운 교회 의식을 확정한다. 한편 찬송가의 중요성을 깨닫고 있었던 루터는 찬송가집을 만드는 데에도 열심이었고 직접 곡을 쓰기도 했다.

루터의 개혁사상이 독일 여러 지방으로 퍼져나가자 독일의 제후들은 카톨릭인 황제를 지지하는 파와 루터의 개혁을 지지하는 파로 나뉘었다. 외국과 전쟁을 치르느라 제후들의 도움이 필요했던 황제는 제후들의 원조를 받는 대신 종교개혁을 묵인한다고 선언했으나(1526), 전세가 유리해지자 이 선언을 취소해 버린다(1529). 이에 국회에서 신교파 제후 6명과 14개 자유도시 대표들은 다같이 항의했는데 여기에서 ‘항의자’라는 의미의 ‘프로테스탄트’가 신교도들을 뜻하는 말로 굳어진다. 1531년 루터파 제후들과 도시들은 슈말칼덴 동맹을 맺어 확고한 정치세력으로 부상했다. 이때부터 구교파와 신교파는 밀고 당기는 공방 끝에, 결국 황제가 1555년 아우크스부르크 화의를 맺고 루터파의 신앙을 승인하는 것으로 일단락된다. 그렇다고 개인에게 신앙의 자유가 주어진 것이 아니라, 제후 또는 도시 당국에 신앙의 자유가 주어졌으므로 민중들은 자신이 속한 지역의 신앙을 따라야 했다. 그뿐 아니라 이후로도 수세기 동안 30년 전쟁 등 카톨릭 세력과 줄기차게 투쟁하여 많은 희생이 치러진 후에야 신앙의 자유를 쟁취할 수 있었다.

루터는 63세가 되는 1546년, 고향인 아이슬레벤에서 병으로 사망했으나 루터교 신앙은 북부 독일과 덴마크, 스웨덴, 노르웨이 등 북유럽에서 뿌리를 내린다. 루터가 종교개혁에 힘쓰는 동안 남부 독일과 스위스에서는 울리히 츠빙글리가 종교개혁을 주도했고, 루터의 말년에 등장한 장 칼뱅은 몸담고 있던 파리 대학을 떠나 스위스 제네바로 가서 종교개혁을 이루었다. 그러나 루터를 비롯한 이들 종교개혁자들 사이에는 성서를 놓고 각자 이견이 있었기 때문에 신교는 여러 분파로 나뉘어져 각자의 길을 가게 된다. 오늘날 세계에는 약 6000만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루터교 신앙을 가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99년 10월 31일, 루터가 95개조 반박문을 내걸었던 종교개혁기념일 482주년을 맞이한 이날에 또 한번의 역사적인 사건이 있었다. 새로운 천년을 앞두고 과거의 잘못을 사죄하며 개신교와 화해를 모색하던 로마 카톨릭이 루터교 세계연맹과 손을 잡은 것이다. 이날 두 종교의 대표자들은 독일 아우크스부르크에서 공동선언문에 함께 서명했다. “인간의 어떤 덕목에 의해서가 아니라 구원은 주 예수의 은총에 의해서 구원받을 수 있다”, “선행하라는 권고는 신앙을 실천하라는 권고이다” 등 절충된 44개 조항으로 작성된 공동선언문에 서명한 후 양측 대표는 화해의 의미로 악수하고 포옹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이로써 기독교 통합의 초석이 놓인 것”이라며 환영의 뜻을 표했다.

오늘날 그의 복음주의 신앙이 카톨릭과 다시 손잡고, 그가 적그리스도로 간주했던 교황이 이를 환영한 사실을 알았다면 루터는 과연 기뻐했을까? 그가 오늘날 카톨릭 성직자들의 성추행 사건들, 유럽 교회의 공동화 현상, 개신교 성직자들의 교회 세습과 부정 부패 등을 알았다면 무엇이라 했을까? 정치·경제·사회 분야에서도 마찬가지겠지만 특히 종교 면에서 루터 같은 개혁 정신이 아쉬운 시점이다.

                                                    金 銀 珠 기자 / ejkim@magazinegv.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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