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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신학논문은행에 대하여

2003/11/21 (07:07) from 80.139.166.64' of 80.139.166.64' Article Number : 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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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데거의 시적 언어와 근대성
하이데거의 시적 언어와 근대성


1. “시”란 책임도 못 지는 말장난!
2. 과학의 언어와 생활세계의 언어
3. 시와 언어
4. 새로운 세계의 지평을 열음
5. 성스러움을[신들을] 명명함
6. 민족의 소리


1. “시”란 책임도 못 지는 말장난!

오늘날 우리에게 “시”란 무엇인가? 무엇을 위한, 누구를 위한 “시”란 말인가? 어찌하여 “시”가 있어야 한단 말인가? 시가 도대체 무엇을 위해 필요하단 말인가? 기술문명의 시대, 정보화 사회를 살고 있는 현대인에게 시는 무슨 의미가 있는가? 시를 즐겨 읽고 쓰면서 시와 더불어 살아가고 있는 수백만의 시 동호인들에게 위와 같은 물음들은 아마도 모욕적인, 일고의 가치도 없는, 무식의 소치에 의한 우문일 것이다. 그냥 시가 좋아서 시에 매달리고 시를 쓸 뿐이라고 도사(道士) 같은 대답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능력과 기능을 따지며 효율성을 최상의 가치로 평가하는 현대의 “실용주의자들”에게 시는 시간이 남아 돌아가는 여유 있는 사람들이 한가하게 자신들의 어줍잖은 느낌을 표현한답시고 끄적여 놓은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말장난의 산물”일 뿐이다. 혁명을 주장하며 개혁을 외치고 참여를 들먹이는 “행동주의자들”에게 시는 실천의 용기를 결하고 결단의 모험을 겁내는 심약한 사람들이 책임지는 것이 두려워 도피하는 “상상 속의 허구”일 뿐이다. 존재하는 사실만을 중시하며 사실 외에는 어떤 것도 믿지 않는 현대의 “과학주의자들”에게 시는 그 낱말에 지시하는 “의미”가 없거나 애매모호해 이해의 혼란만을 가중시켜 현실이해에 도움이 되기는커녕 사실을 호도하여 왜곡시키기나 하는 “내용 없는 헛소리”일 뿐이다. 반면, 시의 효용성을 인정하는 사람들이 없는 것도 아니다. 현실세계와 쾌락세계 사이의 심리적인 분열을 걱정하며 그 조화로운 병존을 배려하는 “심리치료사들”에게 시는 자신의 억압된 자아를 표현하여 심리적 균형과 자아정체성을 확인해 주는 데 도움이 되는 “훌륭한 도구”이다. 억압받지 않는 담론에 의한 합의를 강조하며 모든 것이 언어의 차원에서 궁구되고 결정되어야 함을 주장하는 “화용론자들”에게 시적 언어는 자기 표현적, 자기 연출적, 정서 순화적 기능을 가진, 현대인에게 없어서는 안 될 “귀중한 표현매체”이다.
시적 언어에 대한 이러한 이해 또는 오해에 대해 시에 종사하는 자칭 내지 타칭의 시인들은 책임이 없는가? 온 국민의 시인화를 추진하려는 범국민적 운동이나 되듯이 수백 가지의 온갖 잡지에 의해 매년, 매계절, 매월 시인의 직함을 받는 그 많은 사람들이 시에 대한 그러한 오해나 곡해에 일조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반성해봄 직하다. 이러한 상황이 시의 대중화 속에서 망각되어 가고 있는 시의 “본질”을 새삼 되새겨 보아야 할 필요성을 일깨우고 있는 이유이다.
우리는 다음에서 시의 본질에 대해서, 시적 언어의 고유함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한다. 현대에서 시, 시작, 시인에게 획기적인 차원을 마련해준 하이데거의 논의를 뒤좇아 가며 그가 펼쳐 보이고 있는 새로운 위상에 주목하기로 한다.
하이데거는 시인에 대해 시를 쓴 “시인의 시인”, 또는 “시인 중의 시인”인 횔덜린과의 대화를 통해 시의 본질, 시인의 사명을 구명하고 있다. 1799년 1월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에서 횔덜린은 시작(詩作)을 “모든 일 중에서 가장 순진무구한 일”이라고 부른다. 어떤 의미에서 시작은 “가장 순진무구한 일”인가? 시작은 “놀이”라는 조촐한 형태로 나타나기 때문에 그렇다. 그것은 아무 것에도 얽매임이 없이 자신의 그림의 세계를 만들어내고 그 상상된 영역 안에 사색하며 머물러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놀이는 어느 때건 이렇게 또는 저렇게 책임을 지우는 결단의 진지함을 벗어나 있다. 따라서 시작은 전적으로 해가 안 된다. 그리고 그것은 동시에 영향도 없다. 왜냐하면 시작은 그저 단순한 말함과 이야기함으로 남아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직접 현실에 개입하여 현실을 변화시키는 행동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시는 일종의 꿈이지 현실은 아니며, 말로 하는 놀이이지 행위의 진지함이 아니다. 시는 무해하며 무력하다. 순전한 말보다 덜 위험한 것이 또 어디 있단 말인가?
횔덜린의 이러한 생각들은 앞에서 우리가 제시한 시에 대한 오해나 곡해와 다를 것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그렇게 보일 뿐이며, 그렇게 보일 수밖에 없는 이유 또한 시의 본질 속에 놓여 있다. 시를 “모든 일 중에서 가장 순진무구한 일”이라고 간주함으로써 시의 본질이 다 파악된 것은 물론 아니다. 그러나 그로써 최소한 우리가 시의 본질을 어디서 찾아야 할 것인가에 대한 지침은 받은 셈이다. 시인은 시라는 작품을 “언어”의 영역에서 언어를 “재료”로 해서 창작한다.
언어란 무엇인가? 횔덜린과 하이데거의 언어에 대한 논의에로 바로 뛰어들기보다는 우선 먼저 언어에 대한 일반적인 설명을 살펴보는 것이 하이데거의 시적 언어에 대한 이해의 독특함을 알아보는 데에 도움이 될 것이다.

2. 과학의 언어와 생활세계의 언어

20세기를 대표하는 철학적 화두는 “언어”였다. 현대철학에서의 사유모형의 전환을 근세의 “인식론적 전환”에 빗대서 “언어론적 전환”이라고 부르기도 할 정도이다. 이러한 전환을 주도하고 있다고 믿고 있는 “언어분석철학”에서는 “모든 철학은 결국 언어비판일 뿐이다”(비트겐슈타인, “논리철학논고”)라고 주장하기에 이른다. 언어비판의 시각에서 언표되고 있는 명제(문장)들을 평가해볼 때 “참된 명제들의 총체는 전체 자연과학 (또는 자연과학의 총체)이다”. 이 기준에 의거할 때 자연과학에 속하지 않는 모든 명제는 다 그 진리성 또는 진실성을 박탈당하고 있는 셈이다.  따라서 철학의 명제들도 더 이상 참된 명제들로 받아들여질 수 없다. “철학적 사실들에 대해 씌어진 거의 모든 명제들과 물음들은 거짓이 아니고 단지 넌센스[헛소리]일 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런 종류의 물음에 대답할 수 없고 다만 그 명제들의 무의미함을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철학의 거의 모든 물음들과 명제들은 우리가 우리의 언어논리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데에서 생겨 나온다.” 이렇게 과학의 언어에서 언어의 본래적인 기능을 본 언어철학자들[논리실증주의자들]은 “의미비판기준”이라는 도끼를 들고 우리의 경험과 연관된 객관적 사실을 지시하지 못하는 모든 명제들은 거짓이나 넌센스[헛소리]라고 찍어 넘기며 언어의 세계를 평정해 나간다.
그 결과 과학의 언어에 속하지 않는 모든 “말놀이”는 거짓이나 헛소리를 지껄이는 “말장난” 정도로 의심을 받기 시작했다. 이런 말장난의 의혹을 받는 것은 형이상학의 명제를 포함한 철학의 언표들뿐 아니라 모든 윤리 도덕적인 언설들, 모든 예술적 문학적 시적 언설들 역시 그렇다. 이따위 문장들은 참이나 거짓을 따질 필요도 없는 무의미한 넌센스이거나 헛소리일 뿐이라는 것이다. 20세기는 이렇듯 과학이 보이게 또는 보이지 않게 무소불위(無所不爲)의 권력을 행사하며 우리의 일상의 언어생활까지를 통제하는 과학의 시대이기도 하다. 덩달아 만학의 왕이라던 철학까지도 자진해서 과학의 머슴을 자처하고 나선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과학의 시중을 들고 있는 그들의 말놀이는 어디에 속하는가 하는 자기반성의 목소리가 커지면서 이들은 자가당착에 빠지기 시작했다. 의미비판의 기준에 대해 이야기하며 세계의 구조와 언어의 구조의 상관성을 논의하는 그들의 명제들은 그들의 의미비판의 척도에 비추어 볼 때 과연 참인가 하는 물음이 제기되었다. 그들의 명제도 결국 자연과학의 명제가 아닌 바에야 또 하나의 헛소리일 뿐이라는 결론이 나오게 된 것이다.
과학에 의해 생활세계가 여지없이 식민화되어가는 경향을 꿰뚫어본 하버마스는, 전도된 세계를 바로 잡아 실추된 생활세계의 위상을 높이기 위해 새로운 언어이론인 “의사소통행위이론”을 제시하고 나온다. 하버마스에 의하면 생활세계에게 지침을 하달할 수 있는 권한이 과학에게는 없다. 오히려 생활세계는 과학의 언어놀이를 가능케하는 배경이며 근원이며 지평인 것이다. 생활세계는 과학을 길러내고 있는 태반이며 자궁인 것이다. 그것을 모르고 건방지게 자궁 속에 있는 태아가 자궁은 없다 에미는 없다고 외치고 있는 꼴이다. 이 뒤틀린 관계를 바로 잡기 위해서는 과학의 언어놀이라는 안경으로 모든 언어놀이를 평가하려고 대들어서는 안 되고 그보다 훨씬 포괄적인 지평에서 언어놀이를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하버마스에 의하면 “인간”하면 빼놓을 수 없는 본질적인 차원으로 사회, 노동, 언어가 있다. 이 세 차원을 따로 따로 떼어서 생각할 수가 없다. 따라서 인간의 언어놀이도 사회와 노동의 연관관계 속에서 고찰해야 한다. 그 세 차원의 뒤엉킴 속에 살아오면서 자신의 삶의 공간을 만들고 앎의 지평을 넓혀온 것이 인류발전의 역사이다. 인간은 혼자서는 인간이 아니다.(Ein Mensch ist kein Mensch.) 인간은 항상 언제나 그 세 차원이 펼쳐주고 있는 마당인 생활세계 안에 내던져진 존재이다. 생활세계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인간의 모든 행위는 따라서 언제나 사회적 행위이며 동시에 노동의 행위이며 이것들은 또한 항상 언어적 행위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생활세계 속에서의 인간의 이러한 독특한 행위를 특징짓기 위해 하버마스가 택한 용어는 “의사소통행위”이다. 이로써 하버마스가 강조하고자 하는 점은 인간의 말놀이가 순전한 말장난일 수는 없다는 점이다. 지금까지 생각 따로, 말 따로, 행동 따로 식으로 분석적으로 떼어내어 고찰해온 시각이 인간의 본래적인 차원을 간과하게 만든 원인인 셈이다. 인간의 말함이 이미 생각이며 행위라는 것이 언어에로의 전환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현대철학의 공통된 주장의 하나이다.
이러한 통합적인 언어의 기능을 감안하여 붙인 명칭인 “의사소통행위”의 역할을 살펴보자. 의사소통행위는 “상호이해”의 측면에서는 문화적 지식을 전승하고 새롭게 하는 데에 기여하며, “행위조정”의 측면에서는 사회통합과 사회적 유대감 수립에 기여하고, “사회화” 측면에서는 개인의 정체성 형성에 기여한다. 생활세계의 상징적 구조는 타당한 지식의 지속, 집단 유대감의 안정화, 책임감 있는 행위자의 사회화를 통해 재생산된다. 재생산 과정은 새로운 상황들을 현존하는 생활세계의 조건들과 연결시킨다. 재생산 과정이 이런 일을 하는 것은 사회적으로 통합된 사회적 공간과 계승된 세대의 역사적 시간의 차원에서뿐만 아니라 문화적 전통의 의미 혹은 내용의 의미론적 차원에서이다. 이러한 의사소통행위에 의해 형성되고 유지되고 변화해가는 생활세계는 “문화”, “사회”, “인성”이라는 세 가지 구조적인 계기를 포함하고 있다. 생활세계의 이러한 구조적 구성요소는 문화적 재생산, 사회통합, 사회화의 과정에 부합한다.
이러한 의사소통행위가 전개되고 있는 생활세계는 암묵적 가정들, 직관적 방법-인식, 모든 상호이해에 있어 배경으로 기능하는 사회적으로 수립된 실천들의 축적물을 지칭한다. 한 마디로 생활세계는 “의사소통의 지평-형성 맥락”이며, 제한과 원천으로서 기능한다. 생활세계는 맥락-형성 기능을 한다. “의사소통적으로 행위하는 주체들은 생활세계라는 지평에 의존하여 서로 이해 ― 언어적 이해와 합의를 포함하는 이해 ― 에 도달한다”. 지평이라는 이념은 생활세계가 행위상황을 한정짓고 생활세계 그 자체는 해석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것을 가리킨다. 생활세계는 다소 산만하게 흩어져 있는 배경신념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 배경신념들은 그것들이 주제화되지 않는 한,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러한 배경신념들은 우리가 자의적으로 문제시할 수 없는 암묵적이고 신성하게 구성된 지식의 형태를 취한다. 우리는 전체로서의 생활세계를 결코 주제화할 수 없다.
하버마스는 이렇듯 지평으로서의 생활세계 개념과 그 안에서의 인간의 삶 내지 존재 방식으로서의 의사소통행위를 구명한 뒤 근대의 철학 내지는 과학이 이성[또는 합리성]을 너무 좁게 파악했다고 비판한다. 하버마스는 의사소통적 합리성의 분화된 세 계기들 ― 이론적, 도덕적, 미학적 합리성 ― 을 표준화된 말행위 안으로 끌어들임으로써 의사소통적 합리성이 갖는 행위 합리성의 측면을 드러낸다. 행위 합리성의 측면은 1) 객관화하는 태도와 함께 진리에 대한 타당성 요구를 제시하는 “사실기술적 말행위”의 기초가 되는 인식적 합리성, 2) 규범순응적 태도를 지니면서 정당성에 대한 타당성 요구를 제기하는 “규범규제적 행위”의 토대인 도덕적 합리성, 3) 표현적 태도를 취하면서 진실성 혹은 진정성에 대한 타당성 요구를 제기하는 “연출적 행위”를 가능케 하는 표현적 합리성이 그것이다. 이처럼 의사소통적 합리성의 세 계기들은 각 계기에 대응하는 의사소통행위의 작동토대라는 점에서 행위 합리성으로 간주된다. 동시에 의사소통적 합리성은 담론적, 절차적 합리성의 형태를 함축한다. 의사소통적 실천에 참여한 사람들의 합리성은 그들이 그들의 표현에 대해 근거를 제공할 수 있는가에 의해 결정된다.
하버마스에 의하면 서양의 철학전통은 한 가지 타당성의 영역 ― 명제적 진리와 이론이성의 영역 ― 에 고정되어 왔다. 의사소통적 합리성 개념이 세 가지 타당성 영역 ― 명제적 진리, 규범적 정당성, 주관적 진실성 ― 간의 복잡한 상호작용을 지칭하는 한에서 그것은 서양의 로고스[이론 내지 인식]중심주의를 극복한다 할 수 있다.

3. 시와 언어

언어의 지평을 넓힌 하버마스의 의사소통행위이론에 따를 때 “시적 언어”는 어디에 속하는가? 그가 복원한 생활세계에서 시가 차지할 수 있는 자리는 어디인가? 아마도 주관적 세계이며 그 안에서 시는 인간 개인의 정체성 형성에 매우 중요한 자기표현적 또는 자기연출적 역할인 정서적 기능을 떠맡게 될 것이다. 이것으로 시의 본래적 역할이 다 소진된 것인가? 아니다. 하이데거의 시적 언어에 대한 풀이는 위에서 살펴본 통상적인 언어이론의 틀과 테두리를 훨씬 뛰어넘는 획기적인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독창성을 시와 언어의 관계를 고찰하면서 살펴보기로 한다.
횔덜린은 언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노래하고 있다.
“그래서 보물 중에서 가장 위험한 보물인 언어가 인간에게 주어졌다.······ 그로써 인간이 그가 무엇인지를 [스스로] 증언하기 위하여······”
인간은 누구인가? 그가 무엇[누구]인지를 스스로 증언해야 하는 그런 자다. 증언한다는 것은 우선 표명함을 뜻한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은 표명된 것을 위해 증언대에 섬을 의미한다. 인간은 자기 자신의 현존재[거기에 있음]를 증언하는 가운데에 바로 그가 그[무엇]인 그런 자이다. 여기서 이러한 증언은 인간존재에 추가로 붙는 부차적인 표현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인간존재의 현존재를 함께 구성하고 있다. 그런데 인간이 무엇을 증언해야 한단 말인가? 그가 땅에 속한다는 그의 귀속성을 증언해야 한다. 이 귀속성은 인간이 상속자이며 모든 사물에게서 배우는 자라는 거기에 성립한다. 그런데 이 사물들은 투쟁 가운데 놓여 있다. 사물들을 투쟁 속에서 서로 갈라 세우고 그로써 동시에 서로 결집시키는 그것을 횔덜린은 “친밀성”이라고 이름한다. 이러한 친밀성에로의 귀속은 세계의 창조와 출현을 통해서, 또 세계의 파괴와 몰락을 통해서 증언된다. 인간존재에 대한 증언과 그로써 인간존재의 수행은 결단의 자유에서부터 일어난다. 이 결단은 필연적인 것을 장악하고 자신을 최고의 요청에 결속시킨다. 존재자 전체에로의 귀속성에 대한 증인이 됨은 역사로서 일어난다. 그런데 역사가 가능하기 위하여 인간에게 언어가 주어졌다. 언어는 인간의 “보물”이다.
횔덜린의 말에 따르면 “모든 일 중에서 가장 순진무구한 일”의 영역인 언어가 또한 “보물 중에서 가장 위험한 보물”이다. 그렇다면 어떤 의미에서 언어가 “보물 중에서 가장 위험한 보물”인가? 언어는 모든 위험 중에서도 [최고의] 위험이다. 왜냐하면 언어가 가장 먼저 위험의 가능성을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위험 중의 위험은 존재자에 의한 존재의 위협이다. 그런데 이제 인간은 언어의 도움으로 비로소 처음으로 개방 가능한 것 가운데 내던져[내맡겨]지는데, 이 개방 가능한 것은 존재자로서는 인간을 그의 현존재에서 몰아세우며 자극하고 비존재자로서는 기만하고 환멸에 빠뜨린다. 언어가 비로소 존재의 위협과 혼미가 일어나는 자리를 마련해주며 그래서 “존재상실의 가능성”, 다시 말해 위험이다. 그런데 언어는 단지 위험 중의 위험일 뿐만 아니라 또한 그것은 자신 안에 자기 자신에 대해 계속되는 위험을 필연적으로 간직하고 있다. 언어는 존재자를 그 자체로서 작품 속에서 드러내 보이고 보존하라는 과제를 부여받았다. 언어에서는 가장 순수한 것과 가장 깊이 은닉된 것뿐만이 아니라, 혼란한 것과 저속한 것까지도 표현될 수 있다. 더 나아가 본질적인 낱말은 이해되고 그래서 모두에게 공동의 소유가 되기 위해서 심지어 자신을 저속하게 만들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므로 횔덜린은 다른 단편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너는 신성에 대해 말한다. 그러나 너희 모두는 맏아이들이 죽을자가 아니라는 것, 그들이 신들에 속한다는 것을 전부 잊어버리고 있다. 열매는 먼저 더욱 흔해 빠지고 더욱 일상적이 되어야만 죽을자들의 것이 된다.” 순수한 것과 저속한 것이 똑같은 방식으로 말해진 것이 된다. 그러므로 말로서의 말은 그것이 본질적인 말인지 아니면 속임수인지에 대해 아무런 직접적인 보증도 제공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반대로, “본질적인 말”은 그 단순함으로 인해 종종 비본질적인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다른 편으로 그 장식 때문에 본질적인 것의 모양을 하고 있는 것이 그저 흉내낸 말이나 뒤따라 한 말이다. 그래서 언어는 끊임없이 그 자신이 만들어낸 가상을 쓰고 나타나야 하기 때문에 자신의 가장 고유한 것인 진실된 말함을 위험하게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면 이렇게 가장 위험한 것이 어떤 의미에서 인간에게 “보물”이 된단 말인가? 언어는 인간의 소유물이다. 인간은 경험과 결의와 기분을 전달하기 위해 언어를 사용한다. 언어는 이해전달에 봉사한다. 그것은 그런 데에 유용한 도구이기에 일종의 “보물”이다. 그렇지만 언어의 본질은 “이해전달의 수단”이라는 데에 다 소진되는 것은 아니다. 이 규정으로써 우리는 언어의 본래적인 본질을 적중시키지 못하고 단지 그 본질의 귀결의 하나만을 건드릴 뿐이다. 언어는 인간이 많은 여러 도구들과 함께 소유하고 있는 그런 도구의 하나가 아니다. 오히려 언어가 도대체 처음으로 존재자의 열려있음 한가운데 설 수 있는 가능성을 보장해준다. 오직 언어가 있는 곳에만 세계가 있다. 다시 말해 결단과 작업, 활동과 책임, 그러나 또한 자의와 소란, 몰락과 혼란 등등의 끊임없이 변화하는 주위가 있다. 오직 세계가 전개되고 있는 곳에만 역사가 있다. 언어는 훨씬 더 근원적인 의미에서 보물이다. 언어가 무엇에 좋은 보물인가. 언어는 인간이 역사적인 인간으로서 존재할 수 있는 보증을 서며 그러기에 보물이다. 언어는 인간이 마음대로 다룰 수 있는 도구가 아니라, 오히려 인간존재의 최고의 가능성을 관장하는 그런 사건이다. 우리는 시의 작업[활동]영역과 그로써 또한 시 자체를 참되게 개념파악하기 위해서 먼저 언어의 이와 같은 본질을 확보하지 않으면 안 된다.

4. 새로운 세계의 지평을 열음

하이데거는 도대체 시를, 언어를 도구의 차원에서 보려는 인간중심적 시각을 타파하며 시의 본래적 차원을 구명하려고 노력한다. 하이데거가 시에 할애하는 획기적인 역할을 열거하면 첫째, 시는 인간을 일상세계의 굴레에서부터 해방시켜 새로운 세계에로 인도한다. 둘째, 그 새로운 세계는 종전의 삶의 문법, 언어의 규칙, 사유의 패러다임이 통용되지 않는 “새로운” 존재이해의 지평이 열린다는 의미에서 “새로운” 세계일 뿐 아니라, 또한 일상의 통속성에서부터 성스러움의 영역에로 불러들여 신들의 보호 아래 놓는다는 의미에서의 “새로운” 세계이다. 다시 말해 성스러움의 부름에 응답하여 신들을 명명하며 일상을 축제로 바꾸어 인간에게 그동안 망각되었던 본래적인 차원을 열어준다는 말이다. 셋째, 존재의 망각이 회복되고 떠나간 신들이 도래한 새로운 세계에서는 사물도 더 이상 인간의 표상 내지는 의욕의 대상, 지배 또는 생산의 대상이 아니라 사물이 그 본래적인 사물의 모습으로 나타나게 된다. 넷째, 이제 시인은 신들과 백성들 사이에 놓여 있는 반신(半神)으로서 신들의 눈짓을 백성들에게 전해주는 “민족의 소리”가 된다.
시는 일상세계의 언어놀이를 벗어나 있다. 일상세계에서 통용되는 “의미 기준[척도]”만을 갖고 시를 평가해서는 안 된다. 이론적 합리성, 도덕적 합리성, 미학적 합리성을 포괄한다는 의사소통적 합리성을 갖고서는 시의 본래적인 차원을 건드릴 수 없다. 시란 인간의 삶이 펼쳐지고 있는 생활세계의 지평을 확장시켜주어 새로운 세계의 가능성을 열어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술작품의 본질을 이루고 있는 시의 독특한 존재방식을 가다머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시] 작품은 그것이 고유하게 그 자리에 있음으로써 그 자체가 곧 일종의 존재사건이고, 모든 기존의 것과 통상적인 것들을 넘어뜨리는 하나의 충격, 즉 그런 식으로는 결코 그 자리에 존재하지 않았던 세계가 그 속에서 자기를 열어 놓는 그런 하나의 충격이다.” “하나의 세계가 솟아오르는 그런 예술작품 속에서 이전에는 인식하지 못했던 의미심장한 것이 경험 가능하게 될 뿐 아니라 그 예술작품 자체와 더불어 어떤 새로운 것이 존재하게 된다고 하는 사실 앞에서 어느 누구도 눈을 감아버리지는 못할 것이다. 그것은 단지 진리를 밝히 드러냄일 뿐 아니라 그것 자체가 곧 하나의 존재사건이다.” 하이데거는 예술작품 곧 시는 그 단적인 존재로써 “그것이 존재하고 오히려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는 충격”을 우리에게 안겨 준다고 말한다. 작품이 있다는 사실의 충격이 우리를 일상적인 것에서 끄집어 내어 섬뜩한 것과 맞닥뜨리게 하며 지금까지의 포근했던 일상성의 친근한 분위기를 무너뜨린다. 한마디로 우리는 예술작품 속에서 존재의 진리가 발생하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머무는 것은 그런데, 시인이 건립한다.” 하이데거의 해설을 좇아 횔덜린의 “회상”이라는 시의 마지막 구절을 음미해 보면 “본질적인 낱말”로써 존재자를 처음으로 그것의 존재에 있어 “열어 젖히는” 자들이 시인들이다. 이러한 “명명을 통해서 존재는 비로소 그것이 무엇인 바 그것이라 불리어진다.” 이렇게 볼 때 시작은 “존재를 낱말로써 건립함” 또는 “모든 사물의 존재와 본질을 수립하는 명명”이며, 이 명명은 존재자를 그 존재나 진리에로, 사물들을 그들의 본질에로 보내어 그렇게 “세계”와 “역사”를 존재하도록 만든다. 그런데 세계는 신들이 죽을자들을 자신들의 요청 아래에 세우고 시인이 이러한 요청에 대한 대답으로서 신들을 명명할 때에만 비로소 열린다. 그럴 때 시작은 “신들을 근원적으로 명명”하는 것이 된다. “신들의 눈짓에” 시인은 결속되어 있다. 그는 이러한 눈짓과 말함의 사이에 놓여 있다. 이 안에서 한 민족은 항상 이미 존재자 전체에 대한 자신의 귀속성을 기억하게 된다. 시인은 이러한 “중간에로” [사이에로] 내던져져 있으며 거기서 그는 이 눈짓을 붙잡아 그것을 그의 민족에게 이어서 전달해야 [눈짓해야] 한다. 이 말이 의미하는 것은 시인의 말함이 “눈짓”으로 시인에게 말건네 오는 “신들 자신에” 의해서 언어에로 이끌려 오고 있다는 점이다. 시인은 이 눈짓을 붙잡아 전달하는 것이며 그래서 그의 말함은 “민족의 소리”에 결속되어 있다.
시인은 신들을 명명하며 모든 사물들을 그것이 무엇인 바로 그것으로 명명한다. 이러한 명명은 전에 이미 알려져 있던 것에 이름을 갖추어 주는 것이 아니다. 시인은 본질적인 낱말을 말함으로써 이러한 명명을 통해 존재자를 비로소 그것이 무엇인 그것에로 불러내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것은 존재자로서 알려지게 되는 것이다. 시는 존재를 낱말을 써서 건립하는 것[낱말에 의한 존재의 건립]이다. 그러므로 머무는 것을 우리는 결코 덧없이 사라져 버리는 것에서부터 길어낼 수 없다. 단순한 것은 결코 혼란스러운 것에서부터 직접 포착해낼 수 없다. 척도는 척도 없는 것 안에 놓여 있지 않다. 근거를 우리는 결코 심연에서 찾지 못한다. 존재는 결코 존재자가 아니다. 그러나 사물의 존재와 본질이 계산될 수 없고 눈앞에 것에서부터 도출될 수 없기 때문에, 그것들은 자유롭게 창조되고 정립되고 선사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그와 같은 자유로운 선사가 곧 건립이다.
신들이 근원적으로 명명되고 사물들의 본질이 낱말에로 옴으로써 사물들이 빛을 발함에 따라 인간의 현존재가 하나의 확고한 연관 안으로 인도되고 하나의 근거 위에 세워진다. 시인의 말함은 단지 자유로운 선사의 의미에서만 건립이 아니라 또한 동시에 인간 현존재를 그의 근거 위에 확고하게 정초한다는 의미에서도 건립이다.

5. 성스러움을[신들을] 명명함

“마치 축제일에 ...”라는 송가를 해설하는 곳에서 하이데거는 “시인은 자연에 대답을 할 때에 시인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여기서 시인들이 “응답하는 이들”이라고 명명되고 있다. 여기서 시적인 명명은 “부름을 받은 것 자체가 자신의 본질에서부터 시인에게 말해야 할 것으로 독촉하는 바로 그것을 말한다. 이렇게 독촉을 받고 횔덜린은 자연을 “성스러움”이라고 명명한다.” 시인이 본질적으로 응답하고 있는 바 바로 그것은 시원적인 근본낱말에서는 “자연”이며 이것은 성스러움이 다르게 사유된 차원이다. 하이데거는 “자연”이라는 근본낱말을 이렇게 설명한다:
““자연”은 밖으로 나타남과 솟아오름[싹틈]이며 스스로 열음이다. 이 스스로 열음은 피어오르면서 동시에 밖으로 나타남 속으로 되돌아가 그렇게 해서 그 자리에 있는 것에게 각기 그 현존을 주고 있는 바 그 속으로 자기를 감추어 [닫아] 버린다. “자연”은 근본낱말로 사유할 때 개방된 것 안으로 피어오름을 뜻하며, 그 안으로 도대체 어떤 것이 나타날 수 있는, 자신의 윤곽을 드러낼 수 있는, 자신의 ‘보임새’에서 스스로를 내보일 수 있는 그러한 밝힘의 밝게 비추임을 뜻한다.”
“자연”은 자라고 소멸해 가는 것 안에서 존재자의 존재로 있으며 존재의 스스로를 열음, 스스로를 밝게 비춤을 뜻한다. 다르게 말해 그것은 비은폐성[드러남]으로서의 존재의 진리이며 이것은 존재하고 있는 모든 것에게 머물러 있음의 안녕[무사, 운]을 선사하고 있다. 그래서 성스러움은 안녕 무사와 온전함을 보장해 주는 바 그것으로서 존재한다.
“시원적인 것으로 그것은 [성스러움은] 그 자체 상처 나지 않은 것 ‘온전한’ 것으로 남아 있다. 그러나 근원적으로 온전한 것은 자신의 무소부재[모든 곳에 현재하고 있음]를 통해 모든 현실적인 것에 그것의 체재의 안녕을 선사한다. 그러나 온전한 것과 안녕을 보장해 주는 것은 직접적인 것으로서 자신 안에 모든 충일과 모든 틀을 감추고 있기에 어떠한 개별자도 ― 그것이 신이건 인간이건 ― 가까이 접근할 수 없다... 성스러움은 모든 경험을 그것의 습관에서 빼어내어 그것의 서 있는 자리를 빼앗아 버린다. 따라서 성스러움은 이렇게 놀라게 만들기에 놀랄 만한 것 그 자체다.” 이러한 성스러움이 시인의 말이어야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운 좋은 천후 속에’ 서 있는 자는 그가 예감하며 경청하고 있는 바 그것 곧 자연을 명명해야 하기 때문이다. 자연이 깨어날 때 자연은 자신의 본질을 성스러움으로 드러낸다.”
시작은 성스러움이 “낱말을 선사하고” 그래서 그로써 “스스로가 낱말 속으로 올” 때에만 가능하다. 오직 그 경우에만 낱말이 성스러움의 “사건”이 된다. 이러한 사건은 성스러움이 자신의 도래에 있어 인간을 부르고 그래서 인간으로 하여금 마주 인사하며 부를 수 있도록 만듦으로써, “도래하는 것 자체에 의해 부름을 받아 이것을 오직 이것만을 성스러움으로 말하는 그러한 시원적인 부름에로” 능력을 부여할 때 일어난다. 이렇듯 성스러움은 “모든 시작을 넘어 시작을 하고 있다.” 시인은 성스러움을 그저 단지 “인사할” 수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것도 “그 자신이 인사를 받을 때에만” 그렇다. 그는 성스러움의 “사절”인 천사들을 만나 인사하는 자로서 “사용되고” 있으며 “가리키는 자”가 되기를 독촉 받고 있다. 그리로 시인이 “보내어지고” 있는 이 “가리킴”은 그가 “있어온 것을 도래하는 성스러움으로” 사유할 때, 이러한 의미로 회상할 때, 걸맞게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회상하면서 시인은 자신의 말함을 통해 신들이 “스스로를 느끼고 그래서 스스로를 이 지구상의 인간의 주거지에 나타내도록”하기 위해 성스러움을 표현한다.
“시인은 가리키는 자로서 인간과 신들의 “중간에” 서 있다. 그는 이 중간에서부터 이 둘 위에서 각기 상이하게 이 둘을 온전하게 하며 시인에게 자신을 말해야 할 시로써 주려고 생각하는 바로 그것을 사유한다. 그는 죽을자로서 사유하며 최고의 것을 시로 짓는다.”
시작이 회상으로서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근원적으로 거처함이, 즉 성스러움의 영역에서 시적인 것이 항상 새롭게 확정되고 확고하게 만들어지고 이러한 의미로 머물러 있는 것으로 건립되어야 한다. 이것은 시인이 항상 거듭 “샘물”에로, “원천의 가까이에로”, “근거”에로의 걸음을 디딜 때에만, 자신을 “가리키면서 머물러 있는 것”에게 열고 있으며 그에게 자신의 “낱말”로써 인사하는 온전함과 성스러움에로 갈 때에만 일어난다.
원천의 근거를 회상하는 것인 시작은 단순히 지나간 것을 되돌아보는 것이 아니다. 회상은 인사하면서 부름을 받은 것을 현재로 불러온다. 부름을 받은 것의 도래는 우리에게, 부르는 인간에게 하나의 미래를 열어주며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다시 돌아오는 원천을 우리에게로 다가오는 미래로서 마주할 수 있도록 해준다. 인간에게 낱말을 선사하는 방식으로 인사하는 것 ― 그래서 인간이 그 낱말을 갖고 그 자신의 현재에 도래하고 있는 원천을 인사할 수 있도록 ― 은 다른 것이 아닌 “성스러움”이다.

6. 민족의 소리

횔덜린은 이렇게 노래한다.

“공적은 많다. 그렇지만 인간은
시인으로서 이 땅위에 거주한다.”

인간이 일하며 활동하는 것은 그 자신의 노력에 의해 애써 획득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 이라고 횔덜린은 그에 대해 완강하게 대립해서 말한다 ― 그 모든 것은 이 땅위에서의 인간의 거주의 본질을 건드리지 못하며, 그 모든 것은 인간 현존재의 근거에 미치지 못한다. 인간 현존재는 그 근거에 있어 “시[인]적”이다. 이제 우리는 시를 신들과 사물들의 본질을 낱말을 써서 명명함이라 이해한다. “시인으로서 거주한다”는, 신들의 현재 안에 서 있으며 사물들의 본질 가까이에 관련되어 있음을 말한다. 현존재가 그 근거에 있어 “시[인]적”이라 함은, 동시에 현존재가 건립된 것(근거지어진 것)으로서 [그의] 공적이 아니라 오히려 선사받은 것임을 말한다.
시는 현존재를 따라 다니는 장식품도 아니고 일시적인 감흥도 아니며 열중이나 오락은 더 더욱 아니다. 시는 역사를 떠받치는 근거이며 따라서 한낱 문화현상도 아닐 뿐 아니라 “문화정신”의 한갓된 “표현”은 더 더욱 아니다.
우리 현존재가 그 근본에 있어 시[인]적이라 한 이 말은 결코 현존재가 본래 그저 일종의 해 없는[무해한] 유희에 불과하다는 것을 의미할 수 없다. 그렇지만 횔덜린 자신이 시는 “모든 일[작업] 중에서 가장 순진무구한 일”이라고 이름하고 있지 않는가? 그것은 지금 풀이된 시의 본질과 어떻게 일치한단 말인가? 이제 우리는 이 물음에 대답함으로써 시와 시인의 본질을 종합 정리해 보자.
제일 먼저 귀결되어 나온 것은 시의 작업영역이 언어라는 점이다. 따라서 시의 본질은 언어의 본질에서부터 개념파악되어야 한다. 그런데 그 다음 명확해진 것은, 시가 [낱말을 써서] 존재 및 모든 사물의 본질을 건립하며 명명함이라는 점이다. 즉 제멋대로의 말함이 아니라 그 말함으로써 비로소 우리가 일상언어 가운데서 이야기하고 협의하는 그 모든 것이 열린 장 안으로 나타나게 되는 그러한 말함이다. 따라서 시는 언어를 결코 하나의 눈앞에 있는 작업소재로서 취하지 않는다. 오히려 시가 비로소 언어를 가능케 한다. 시는 역사적 민족의 원초언어이다. 따라서 거꾸로 언어의 본질이 시의 본질에서부터 이해되어야 한다.
인간 현존재의 근거는 언어가 본래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대화이다. 그런데 원초언어는 존재의 건립으로서의 시이다. 그렇지만 언어는 “보물 중에서 가장 위험한 보물”이다. 따라서 시는 가장 위험한 작업이며 동시에 “모든 일 중에 가장 순진무구한 일”이다.
시인은 신의 번개불에 노출되어 있다. 이에 관해서는 우리가 시의 본질을 가장 순수하게 노래한 시로 인정하고 있는 다음의 시가 이렇게 말하고 있다.

“마치 축제일에, 이른 아침
농부가 들판을 보러 가듯이, ······”

이 시의 마지막 연은 이렇다.

“그러나 우리는 신의 뇌우 밑에서도
그대 시인들이여! 맨머리로 서서
신의 빛살을 제 손으로 붙들어
백성들[민족]에게 노래로 감싸서
천국의 증여를 건네줌이 마땅하리라.”
(횔덜린, 『궁핍한 시대의 노래』, 장영태 역주, 혜원출판사 1990, 289.)

그러나 그럼에도 시는 “모든 일 중에서 가장 순진무구한 일”이다. 마치 골짜기가 산에 속하듯이 시의 본질에는 이러한 해가 안 되는 겉모습이 속한다는 것을 횔덜린은 알았다. 시인이 일상의 습관적인 것에서부터 “밖으로 내던져져서” 이 습관적인 것에 대항하여 자신의 작업을 무해한 가상으로 보호하지 않았다면, 도대체 이토록 가장 위험한 작업을 행하고 보존하는 일이 어떻게 가능했을 것인가?
시는 유희[놀이]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는 그렇지 않다. 유희는 사람들을 함께 붙잡아두지만 이때 개개인은 모두 자기 자신을 망각한다. 이에 반해 시에서 인간은 자기 현존재의 근거에로 결집된다. 그는 그 안에서 고요에 이르게 된다. 물론 비활동성이나 무사고의 가짜 평온이 아니라 그 안에서 모든 힘들과 연관들이 약동하는 그러한 무한한 고요에 이르게 된다.
시는 그 안에서 우리가 집 같은 포근함을 느낀다고 믿는 그러한 손에 잡히는 현실과 비교할 때 비현실적이고 꿈과 같은 가상을 불러일으킨다. 그렇지만 그와는 반대로 시인이 말하고 그가 존재하기로 떠맡는 그것이 현실이다.
이렇듯 시의 본질은 그것의 겉모양의 고유한 가상으로 인해 동요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확고하게 서 있다. 시는 분명 그 자체 본질적으로 건립이다. 다시 말해 확고한 정초이다.
사실 모든 건립은 자유로운 선물이며 그래서 우리는 횔덜린이 “시인들은 제비처럼 자유롭다”고 말하는 것을 듣는다. 그러나 이 자유는 구속되지[제약받지] 않은 자의나 고집스러운 소망이 아니라 최고의 필연성이다.
시는 존재의 건립으로서 “이중으로” 구속[제약]되어 있다. 이 가장 내적인 법칙을 통찰함으로써 우리는 비로소 시의 본질을 완전히 파악하게 된다.
시작은 신들을 근원적으로 명명함이다. 그러나 신들 자신이 우리를 언어에로 데려올 때 비로소 시인의 언어에 그 명명력이 부여되는 것이다. 신들은 어떻게 이야기하는가?

“······ 예로부터
신들의 언어는 눈짓이다.”

시인의 말함은 이 눈짓을 잡아서 그것을 다시금 그의 민족[백성]에게 눈짓으로 전해주는 것이다. 이와 같이 눈짓을 잡는 것은 일종의 “받아들임”이며 동시에 “새로운 줌”이다. 왜냐하면 시인은 “최초의 징후”에서도 이미 완성된 것을 통찰하고 이렇게 직관한 것을 대담하게 자신의 낱말에 담아서 아직-충족되지-않은 것을 미리 앞서 말한다. 그리하여

“······ 대담한 정신은 뇌우 앞에선 독수리처럼
자기 뒤에 도래할 신들을
앞질러 예언하며 날아오른다.”

존재의 건립은 신들의 눈짓에 구속되어 있다. 그리고 동시에 시인의 말은 단지 “민족의 소리”의 해석일 뿐이다. 그래서 횔덜린은 한 민족이 그 안에서 존재자 전체에 속한 자신의 귀속성을 기억하고 있는 그러한 전설들을 명명한다. 그러나 흔히 이 소리는 침묵하기도 하며 자신 안에 지쳐 쓰러져버리기도 한다. 또한 이 소리는 대체로 그 스스로 본래적인 것을 말할 수 없으므로 누군가 그것을 해석해줄 사람을 필요로 한다.
이렇듯 시의 본질은 신들의 눈짓과 민족의 소리라는 서로 갈라지면서도 서로를 갈구하는 두 법칙들 사이에 끼어 있다. 시인 자신도 저 둘 사이, 즉 신들과 민족 사이에 서 있다. 그는 밖으로 내던져진 자이며, 신들과 인간들 사이의 바로 그 “사이”에로 내던져진 자이다. 그러나 오로지 이러한 사이에서만, 그리고 비로소 거기에서 인간이란 누구이며 그가 어디에 그의 현존재를 정착시킬 것인가 하는 것이 결정된다. “인간은 시인으로서 이 땅위에 거주한다.”

시인으로서 이 땅위에 거주할 때 인간은 더 이상 자기중심적으로 제 욕망이나 채우자고 자신의 태반인 땅을 마구 파헤쳐 대지 않을 것이다. 또한 물을 더럽히고 공기를 오염시켜 지구의 피돌이와 숨돌이를 끊어버려 우주와 제 자신의 생명력을 질식사시키려 대들지도 않을 것이다. 신들을 쫓아버리고 철두철미 세속화된 일상 속에서 즉각적인 쾌락과 감각적인 찰나에 몰두해 살고 있는 현대인, 욕망의 불나비가 되어 존재하는 모든 것을 탐욕의 분비물로 더럽히고 금세 다른 새로운 희생제물을 찾아 떠나는 철저한 자기중심적인 최후의 인간, 이러한 인간들의 욕구에 맞추어 욕구를 조장하며 화려하게 치장되어 배달되는 가상적인 현실, “조장된 담론에 의한 합의”가 의사소통적 합리성으로 통하고 그렇게 합의된 내용이 진리로 공표되고 구속력을 갖는 생활세계! 시가 이러한 생활세계에서 단순히 거기에서 통용되는 언어놀이를 따르며 그 의미체계 안에서만 활동할 때 시는 자신의 본래적인 역할을 망각하고 있는 것이리라! 시는 이러한 혼란의 시대에, 고향상실[존재망각], 신(神) 부재의 시대에 새로운 세계를 열고 자연의 성스러움에 응답하여 신들의 도래를 예비하고 백성[민족]을 위한 새로운 거주처[고향]를 마련해야 하리라!
이땅에서 새 시대를 예비하며 인간중심의 환경관으로부터 생명중심의 세계관에로의 전환을 외치면서 새로운 세계를 열며 우주의 숨소리를 듣고 그것을 백성들에게 전하려고 노력하는 김지하는 하이데거가 말하고 있는 시인의 사명을 맞갖게 구현하고 있는 시인일 것이다. 그의 시 “빗소리”에서 들려오는 새 시대 새 삶의 [심층]문법에 귀기울이면서 우리의 논의를 끝내기로 한다.

“빗소리”

눈 감고
빗소리 듣네

하늘에서 내려와
땅을 돌아 다시 하늘로
비 솟는 소리
듣네

귀 열리어
삼라만상
숨쉬는 소리 듣네

추위를 끌고 오는
초겨울의 저 비
산성비에 시드는
먼 숲속 나무들 한숨소리

내 마음속 파초잎에
귀 열리어
모든 생명들
신음소리 듣네
신음소리들 모여
하늘로 비 솟는 소리
굿치는 소리 영산 소리 듣네

사람아
사람아
외쳐 부르는 소리
듣네.
(김지하, 『중심의 괴로움』, 솔 1994.)

*


『현대시』1999년 4월호, 19-38.



in http://www.saemo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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