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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신학논문은행에 대하여

1999/10/05 (01:08) from 203.252.22.54' of 203.252.22.54' Article Number :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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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름과 자유: 진정한 관계성을 향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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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름과 자유: 진정한 관계성을 향하여*

정 재 현**


I. 상황 진단과 문제 제기

   오늘의 시대를 흔히 탈근대성(post-modernity)의 시대라고 한다. 물론 이 표현은 현대를 서양이 주도해 온 문화적 흐름의 연속적 불연속으로 보는 관점에서 비롯된 것이기는 하지만, 우리 사회에서는 이제 그 표현마저도 '탈'해야 할 만큼 어느덧 진부한 기호가 되어버린 듯한 느낌을 떨치기 어렵다. 그것이 진부한 것은 '아직도 근대의 합리적 체계화를 내세우는 촌스러움'이 오히려 새삼스럽게 돋보일 만큼 재구성적 요청이 절실히 대두되고 있기 때문이며, 그것이 기호로 보이는 것은 누적되어 있어서 '탈'해야 할 근대성의 두께가 실상 얄팍할 뿐 아니라 그러한 진상에 대한 인식 조차 희미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오늘날 우리는 문화적 경험이 일천한 가운데 갑

작스레 밀려든 많은 '좋은 이름들'--예를 들면, 민주주의, 자유, 평등, 인권, 개성 등--을 앞세워 탈근대성이라는 다른 동네의 이야기를 우리의 해방 선언처럼 외쳐대며 값싼 통속적 개별성을 절대적 가치인양 추구하는 정신적 혼미를 겪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본다면 우리의 솔직한 모습은 차라리 '탈근대적 전근대성'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우리 사회의 이러한 문제에 대한 간략한 지적이 보여주듯이, 보편성과 개별성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는 서양 중세의 보편논쟁처럼 결코 형이상학적 문제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서양에서도 이 문제는 중요한 비중을 지니고 다루어져 왔음을 그들의 정신문화사에 대한 검토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는데, 특히 탈근대라는 표현과 연관하여 근세로부터 현대로의 이행은 이를 극적으로 보여주며 그 중의 탁월한 예를 전통형이상학과 현대실존철학의 관계에서 찾아볼 수 있다. 말하자면 서양 철학의 흐름에서 실존철학은 플라톤으로부터 헤겔에 이르기까지의 전통 형이상학을 본질철학이라 규정하고 그 본질이 수반하는 보편성과 필연성이 참됨의 기준이라는 전통의 족쇄로부터의 해방을 외치면서 본질철학이 표방하는 그토록 영원무구한 진리가 지금 여기에서 구체적으로 살아 숨쉴 뿐 아니라 결국 죽기도 하는, 개별적이고 고유한--그래서 어떠한 다른 인간으로도 대체될 수 없는--나에게는 차라리 궁극적인 진리일 수 없음을 절규했다. 물론 이러한 항거의 시대문화적 배경에는 전통가치의 붕괴 및 인류의 종말을 상징하는 듯한 세계 대전 등과 같은 어두운 삶의 질곡들이 놓여져 있었지만 이는 또한 참다운 의미에서의 주체성의 추구를 절실히 요구하는 계기라는 이면의 차원도 지니고 있는 것이었다.  
   더듬어 보면 고중세의 이천여년 동안 무색투명한 것인양 숨어 있었던 인간이 근세의 여명과 함께 백일하에 드러나면서 더 이상 인간이 배제된 사물인식이란 불가능하다는 것이 만방에 선포되었는데, 그 효시인 데카르트를 통해서 인간이 그를 둘러싼 사물들을 '대상'으로 간주하는 동격적 '주체'로서의 위치를 새삼스럽게 부여받는 데에서 출발하여 칸트에서는 대상에 대한 경험에 앞서는 주체의 주도권적 선험성이 확보되었고 급기야 헤겔에 이르러서는 인간의 신격화(deificatio hominis)라는 시비를 야기할 만큼 절대정신의 자기실현과정으로서의 세계사에서 인간이 차지하는 주체적 위치의 격상이 거침없이 진행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일련의 인간 주체의 격상과정에도 불구하고 막상 드높여졌던 것은 무엇이었는가? 그것은 바로 그 많은 인간들이 그토록 앙망해 왔었던, 그러나 영원히 도달할 수 없는, 더 나아가서 실현될 필요도 없는, 보편적 주체성의 인간이었던 것이다.  보편적 인간이 참일 수는 있겠지만 문제는 이 세계에 살고 있는 어떠한 인간도 그처럼 보편적이지 않고 또한 그럴 수도 없다는 데에 있었던 것이다.  보편적 인간은 영원하고 무한한 정신의 활동에 참여함으로써 보편적인데, 이러한 인간은 죽을 수도 없으며 따라서 살아 있지도 않은 것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고중세기에 '있음'을 추구함에 있어서 무색투명 속에 숨어 있던 인간이 근세초기에 '앎'의 불가피한 개입이 선포되면서 급격히 앎의 주체로서 전면에 나타났는데, 이 과정에서 '있음'의 참됨이 손상되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에만 집착한 나머지 '앎'의 색깔을 가능한 한 무색으로 유지하려는 일련의 형이상학적-인식론적 동기가 보편적 인간이라는 가상적 인간주체를 옹립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보편적 주체로서의 인간은 혹시 '있음'과 '앎'의 관계를 동일성에 이르기까지 미끈하게 엮어낼 수 있을지는 몰라도 살아 숨쉬는 뭇인간들에 대해서는 무의미한 것일 수 밖에 없었다. 여기에서 이러한 시대정신을 간파한 실존철학은 '있음-앎'의 고리가 참으로 의미를 지니려면 '삶'이라는 지평에서 드러나야 한다는 것을 역설하면서 전통적 보편성의 획일적 올가미로부터의 해방을 외쳤던 것이다.
   이제 실존철학은 인간의 본질은 인간 일반에 대한 선험적 이론에 호소함으로써가 아니라 구체적 인간 실존의 즉각적 체험과 직접적 해석을 통해서 드러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사르트르(Jean-Paul Sartre)는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고 선언했으며, 따라서 "개별적 주체성이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고 갈파했다. 그에 의하면 인간은 그 자체에 대해서 문제이기 때문에 진리 탐구는 인간의 개별적 주체성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르트르의 이와 같은 혁신적 인간 이해는 주-객 분리라는 재래적 이원론에 대한 근본적 재구성을 요하는 것이었는데, 그러한 목적을 위해서 그는 인간에 대한 실존철학적 접근에 있어서 현상학의 분석적이고 해석적인 방법을 채택했다. 이러한 탁월한 예가 보여주듯이 실존철학은 훗설(Edmund Husserl)에 의해서 창시된 현상학적 운동과 밀접한 관련을 지니면서 발전했다. 그런데 훗설에 의하면 현상학은 본질에 대한 주관적 과정이나 직관적 탐구에 대한 기술적 분석으로서 어떠한 편견이나 전제없이 의식의 자료를 기술함으로써 의식 안에 드리워진 현상을 직관적으로 체험할 수 있게 하는 것이 그 과제이다. 훗설의 현상학의 이와 같은 기본구조는 당연하게도 주객도식이라는 전통적인 문제를 다루는데 있어서 더욱 발전되고 정교화된 구성체계를 제공할 것을 목적했다.  
   이러한 구도와 목적의 견지에서 본다면 훗설과 사르트르는 그들의 현상학적 존재론의 근본적인 목적에 있어서 인간 체험의 주관적 과정과 논리의 객관적 타당성 사이의 화해에 본유적으로 관심한다는 기본적인 공통성을 지니고 있다고 하겠다.  그런데 이러한 공통관심은 다음과 같은 근본적인 질문을 제기한다: 도대체 그 양자는 왜 화해를 필요로 하는가? 그리고 그것이 만일 가능하다면 어떠한 방식의 화해인가?  이러한 근본적 질문에 대한 대답을 시도함에 있어서 훗설과 사르트르는 자아와 의식의 관계에 대한 대조적인 접근에 입각하여 서로 맞서는 관점을 제공한다.  이 문제에 대한 입문적인 고찰을 위해서 하르트만(Klaus Hartmann)의 비평을 잠깐 인용하는 것은 의미있는 일일 것이다:

사르트르는 그의 초기 저작들을 통해서 현상학의 학문적 발전에 대해 많은 기여를 했다.  현상학에 대한 그의 승인은 긍정적으로 말한다면 대상 실재가 주체에게 즉각적으로 파악될 수 있도록 하려는 그의 희망에 근거하고 있고, 부정적으로 말하자면 대상이 전적으로 주체에게 주어진 것만으로 한정되지 않는다는 견해와 함께 그가 지니는 회의적인 유보의 태도에 기인하고 있다.  훗설의 지향성 이론은 그 근본적 성격으로 인해 이와는 다른 대안을 제시하고 있는데, 그것은 대상세계가 주체에게 매개되지 않은 채로 주어진다는 것이다. ......
"자아의 초월"이라는 제목의 논문을 통해서 사르트르는 자아를 주체적 존재자로 보는 견해에 대해 비판하면서 이는 단지 의식의 구성물일 뿐이라고 한데 반해서, 훗설은 그의 자아론에서 자아를 중심적 비중의 위치에 정초하였다. ...... 따라서 현상에 대한 독특한 이론을 수반하는 지향성 이론과 주체-객체론이라고도 표현할 수 있는 의식론으로 대별되는 현상학의 두 영역은 사르트르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으며 그 자신의 독창적인 방식으로 재구성되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체와 대상 사이의 화해에 대한 훗설과 사르트르의 이와 같이 대조적인 접근을 살펴 보고, 특히 자아와 의식의 관계에 대한 이들의 견해차이를 드러내고 더 나아가서 그들의 한계적 족쇄를 비판함으로써 참다운 의미에서의 개별적 주체성을 담지하는 관계성의 존재론을 발전시킬 수 있는 하나의 실마리를 모색하고자 한다.  물론 이러한 모색은 참됨의 보편적 동일성이라는 미명 아래 인간주체들 사이의 개별적 이질성이 난도질되어 왔었던 과거사의 비극을 청산하고, 그러한 이질적 개별성이야말로 동일적 보편성의 참됨을 상실하더라도 우리가 추구해야 할 자유의 터전이요, 더 나아가서 이질적 개별성은 바로 그러한 이질적 개별성을 필수적으로 요청하는 관계성 안에서 비로소 본래적으로 구현될 수 있다는 신념을 타당한 것으로 드러내고자 함을 목적으로 한다. 왜냐하면 '서로 다름'이 '함께 같음'의 가장자리로 내몰린다면 우리에게 자유란 한갖 공허한 수사에 지나지 않을 뿐이기 때문이다.    

II. 훗설에 있어서 자아와 의식

   훗설의 현상학 전반에 걸쳐 전개되는 집요한 주제는 주관성이 객관성에 대해 책임을 지니고 있다는 주장이라 할 것이다. 그러나 이 주장은 주체가 대상을 창조한다는 것이 아니라 대상이 주체와 관련되는 한에 있어서 대상이요 그 역도 성립하는 관계임을 뜻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그에게 있어서 주체의 의식이란 사건과 의미 사이의 상호관계 안에서 의미의 준거에 의해서 규정되며, 사건을 체험한다는 것은 곧 의미를 현실화시킨다는 것을 지시한다. 따라서 의식에 등장하는 모든 사건들은 의식행위-의식대상으로서의 의식대상(cogito-cogitatum qua cogitatum)의 관계라는 견지에서 다루어져야 한다. 어떠한 의식도 그 객관적 의미와의 연관성을 떠나서 설명될 수 없으나, 이 때의 객관적 의미란 경험하는 주체가 그러한 행위를 통해서 인식하게 되는 의미를 말한다.
   이제 데카르트의 코기토에 내포되어 있는 그러한 의미현상들의 총체에 대한 분석을 토대로 훗설은 "의식은 즉각적으로 지각될 수 있다"는 주장과 함께 의식이 분명히 존재하며 반성으로부터 독립적이라는 입장을 취했다. 그러한 의식은 어떠한 방식으로도 반성의 대상이 되기 이전에 의식 그 자체를 위해서 존재한다는 특수한 존재양태를 지니고 있다. 다시 말하면 의식은 그 자체에게 끊임없이 자체를 현전시키는 방식으로 존재한다. 그러나 훗설에게 있어서 의식의 이와같은 존재적 필연성은 코기토로부터 도출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코기토를 가능케 하는 바로 그것이다. 사실상 훗설이 데카르트의 코기토를 자아라는 실체적 존재의 인식으로부터 경험의 선험적 원천으로서의 주체성의 직관으로 새롭게 해석했을 때, 그는 이미 코기토가 바로 그 대상을 타당화시켜 주는 반성에 앞서서 그 의식대상을 의식행위 안에 포함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결국 훗설에게 있어서 의식은 절대적 존재의 영역으로서 그 자체를 현전시키는데, 이는 코기토의 확고부동성을 지시할 뿐만 아니라 의식의 존재성에 대한 긍정적인 확증으로서 확고부동한 코기토의 가능성을 정초한다는 것을 지시한다. 이로써 의식은 '주체'와 '객체'가 성립가능하고 파악가능한 것으로 드러내는 우선적인 터전이며, 여기서 '주체'와 '객체'는 이미 파생들일 뿐이라는 것이 분명해졌다.
   의식행위-의식대상으로서의 의식대상의 관계가 지시하는 바와 같이 의식의 근본 구조는 지향성이다. 다시 말하면, 의식은 그 자체로서 의식일 뿐 아니라 그 무엇에 대한, 즉 대상과 관계하는 의식인 것이다. 그러나 훗설에 있어서 지향성이란 의식 자체의 고유한 속성도 아니며, 주체가 대상과 접촉하기 위한 방편도 아니다. 더 나아가서 훗설은 의식과 세계를 연결시키는 교량의 견지에서 지향성을 묘사하려는 시도 조차 거부한다. 그에게 있어서 지향성이란 주체의 주체성을 구성해 주는 결정적인 요체이다. 지향성에 대한 이러한 개념을 바탕으로 훗설은 의식의 현시에서의 지향적 대상은 실제적 대상과 동일하며 따라서 이 양자를 구별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주장함으로써 지향적 대상이란 주체적 경험 안에서 지시된 바로 그 대상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님을 역설한다. 그러나 여기에서 간과할 수 없는 것은 바로 의식의 인격적 성질이다. 그의 <논리 연구> (Logische Untersuchungen)에서 훗설은 자아(Ego)가 지향적 의도라는 단순한 요소이기 보다는 상보적인 지향적 의도들의 총체를 지시한다는 점을 간파했다. 더 나아가서 그는 자아란 의식적 활동에 있어서 다른 어떠한 것으로도 치환되거나 축소될 수 없는 요소라고 못박았다:

순수 자아는 원리적으로 필연적이며, 그 자아의 경험의 모든 실재적이고 가능한 변화 안에서도 절대적인 자기동일성을 유지하는 요소로서 어떠한 의미에서도 경험 자체의 실재적인 부분이나 단계로 치부될 수는 없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서 훗설은 '내재 안에서의 초월'이라는 개념의 특수성을 강조한다.
   
만일 이 자연적인 세계와 또한 이에 속한 경험적 주체성에 대한 현상학적인 판단중지 이후의 소여로서 순수 자아(각기 분리된 경험의 흐름에 대해서 근본적으로 다른 것으로서)가 남는다면, 동시에 매우 독특한 초월이 그 자체를 현시하게 되는데--이는 구성되지 않은 초월로서 내재 안에서의 초월인 것이다.
   위에 인용된 두 구절들을 연관지어 분석해 보면 자아는 어떠한 방식으로도 의식의 지향성을 예판하지 않는다는 점이 도출된다.  의식은 비록 그 중심에 자아가 도사리고 있기는 하지만 그 자체로서 지향성이기 때문에 결코 실체화되지 않는다.  한편으로 의식의 선험적 존재 양식을 존중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바로 그 지향적 의식의 영역 안에서만 우리는 비로소 주관적인 면과 객관적인 면, 즉 자아와 대상을 구별적으로 설정할 수 있는 것이다.  
   이제 비로소 설정되는 주체는 선험적이면서도 그것의 경험들과 분리될 수 없는데, 이는 그 행위로부터뿐 아니라 그러한 행위들의 대상적 상관체들로부터도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을 지시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상성의 항시적인 원천으로서의 주체적 동일성을 지니는 선험적 자아는 모든 형태의 행위들을 포괄하는 보편적 통일체로 규정되며, 따라서 그것의 이념적인 순수한 가능성에서 의식의 기반으로 정의된다. 경험적 자아가 개인의 가능성들의 현실화적 집결체를 의미한다면, 선험적 자아는 한 개체적 인격의 경험적 흐름 전체가 상상될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의 모체라 할 것이다. 즉, 선험적 자아는 지향적 의식의 원초적이고 최종적인 근거로서 보편적이다. 어쨌든 훗설이 선험적 자아가 의식을 통해서 자신 이외의 모든 것을 구성(Konstitution)한다고 상정했던 것은 매우 명백하다. 그런데 자아 자체는 어디에서 주어지는가?  만일 자아가 그 자체 이외의 다른 것에 의해 구성된 것이라면 우리는 구성에 관한 무한한 소급에 빠질 수 밖에 없다.  훗설은 자아가 그 자체를 구성하기는 하지만 이러한 독특한 자기구성은 자아가 그 자체 이외의 다른 것들과 관련해서 수행하는 구성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라고 주장함으로써 이 문제에 대해 해결을 시도했다.
   일반적으로 이해되는 바와 같이, 훗설의 철학적 작업에 있어서의 주요한 관심은 주관적 의식과 객관적 존재의 관계에서의 주요소인 이성과 경험의 종합적 통일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다. 이성의 주요한 기능으로서의 직관은 경험에 대한 합리화를 통해서 경험 그 자체와 동일시될 수 있다. 이제 경험이 이성적으로 설명될 수 있으려면 그러한 설명은 선험적 주체성의 영역 안에서 추구되어야 한다. 이러한 현상학적 주장을 통해서 훗설은 경험의 개념을 의식의 구성적 작용까지 포함하는 범위로 확장하였는 바 이러한 작용을 통해서 대상이 단순히 지향되는 데에 머무르지 않고 순수하게 의식에 주어지는 것으로 파악되었다. 즉, 대상은 의식의 구성적 지향성 안에서 그 자체와 항시적 동일성을 지니면서 구성되는 것으로 이해된다. 여기에서 우리가 눈여겨 보아야 할 주요한 점은 일종의 상호작용인데, 말하자면 대상성은 주관적인 구성의 지향적인 기능을 통해서만 이해될 수 있는 반면에 지향적인 기능은 대상을 향해 있는 것으로서만 파악될 수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훗설에 있어서 상호작용적 종합은 구성적인 창조행위가 아니라는 점이 간과되어서는 안된다. 이 개념은 의식에 속하는 우선적 형식인 체계적 통일성을 지칭힐 따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종합적 구성이란 임의의 의식 대상이 소박한 지향적 대상에 관련된다는 이해일 뿐이며, 형이상학적 영역에서 일어날 수도 있는 사건은 아닌 것이다.
   지금까지 논의된 바와 같이, 주체와 대상 사이의 대립의 근거인 구체적이고 일차적인 현상을 발견할 수 있는 곳은 바로 의식이라는 점이 훗설의 현상학적 탐구의 시발점이요 근간이다. 이와 같은 의식의 선험적 구조는 이성과 경험의 종합적 통일성을 구축할 수 있는 현상학적 초석이 된다. 훗설은 존재가 그 자체에만 의존하여 존재한다는 실체주의적 사고를 극복하고자 했을 뿐 아니라 주체라는 것이 우선적으로 먼저 존재하고 그런 후에 대상과 관계를 갖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입증하고자 했다. 이와 관련해서 훗설이 외부 세계가 전적으로 의식에 의해서 구성된다고 했을 때 그가 소박한 의미에서의 관념론적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음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오히려 그는 전통 형이상학에서 이분법적으로 설정되었던 주체와 대상을 설정가능하고 파악가능한 것으로 드러내는 더욱 근원적 현상으로서의 의식을 파고 들었던 것이다. 이러한 현상학의 근본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주체와 대상이라는 개념은 의식 및 이에 의해 파악되는 현상 안에 드리워진 추상적 파생물들일 뿐인 것이다.  그러므로 훗설에게 있어서 현상학이 지향성의 기본적 성격인 "내재적 지향성"에 의존한다면, 이는 곧 주체와 대상을 포괄하는 현상을 포착하는 의식의 담지자인 선험적 자아에 뿌리를 두어야 함을 의미하는 것이라 하겠다.


III. 사르트르에 있어서 의식과 자아

   인식행위의 주체에 대한 존재론적 성찰을 위해서 사르트르도 역시 모든 인식과 판단의 뿌리로 간주되는 데카르트의 코기토로부터 출발했다. 그에 의하면 코기토는 "의식이 본질적으로 지니고 있는 즉각적인 포착에 근간한 절대적 진리이며, 그럼으로써 모든 다른 진리들의 근거가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출발점으로부터 그는 전반성적 코기토와 반성적 코기토를 구별하는 것이 중요함을 역설한다. 사르트르는 전반성적 코기토에 대한 존재론적 분석에 근거해서 존재의 두 영역을 구분하는데, 존재와 의식이라는 상관어귀와 동등한 것으로 간주될 수 있는 즉자적 존재(an-sich-sein)와 대자적 존재(fuer-sich-sein)가 바로 그것이다. 즉자존재는 그 자체와 전적으로 동일한 존재, 즉 자기동일성을 유지하는 존재인데 반해서 대자적 존재는 자기동일성이 결여되어 있어서 언제나 그것이 아닌 바의 것을 향하는 경향을 지닌다. 사르트르에 의하면 대자적 존재는 그것인 바의 것이 아니며 그것 아닌 바의 것이어서 바로 이러한 성격을 지닌 의식은 본질적으로 즉자적 존재를 무화시키는 성질을 지니고 있다. 대자 존재는 존재의 한 가운데에서 일어나는 일종의 파열인데, 한 마디로 말하면 그 자체와 즉자적 존재 사이에 무의 거리를 설정함으로써 자신의 존재 양태를 유지하는 이른 바 무라고 할 것이다.  
   무로까지 묘사되는 대자적 존재 또는 의식은 즉자적 존재로부터 항상 떨어져 있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 자체와도 거리를 두고 있다.  말하자면 의식은 그 외부에 있는 대상에 대해서만 부정적인 관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의식 그 자체에 대해서도 부정적인 관계에 있다.  의식의 바로 이러한 대상 부정성이 의식으로 하여금 대상을 인식하게 하며 또한 대상 인식을 통해서 의식 그 자체를 부정함으로써 의식 그 자체를 인식할 수 있게 된다.  말하자면 의식은 의식 그 자체를 의식해야만 의식이며, 만일 그렇지 않다면 "무의식적인 의식이 있다"는 주장이 가능하게 되는데 이는 불합리한 결합개념일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의식이 의식 그 자체를 의식해야 한다는 요건에서 의식에 대한 자기의식은 대상화나 "정립화(position)"일 수는 없으며 비정립적인 준거적 지시로 간주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만일 의식에 대한 자기의식이 정립적인 의식이라면 이는 곧 주체와 대상으로 분리되며, 이 분리는 무한소급을 불가피하게 야기시키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르트르는 "구체적 대상에 대한 모든 정립적인 의식은 의식 그 자체에 대해서는 비정립적인 의식"이라고 갈파하면서 의식 자체에 대한 비정립적인 의식을 "전반성적 코기토"라고 규정했다.
   위의 논의로부터 명백하게 드러나는 것은 사르트르에게 있어서 의식이란 우선 전반성적이라는 점이다.  즉, 의식은 먼저 대상을 인식하고 그러한 대상 인식 안에서 의식 자체를 경험하지만, 이 때 의식 자체를 대상으로서 경험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전반성적 의식은 실제로 그 자체에 대한 항시적 무화이기 때문에 결코 그 자체와의 자기동일성을 유지할 수 없으며, 만일 그러한 무화가 없다면 그것은 하나의 사물, 즉 즉자적 존재가 되어 버리고 만다. 여기에서 우리는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의식을 무와 동일시할 수 있는 가능성을 발견하게 되며, 의식은 그러한 가능성을 통해서 탈자적이게 된다. 말하자면 대자적 존재는 즉자적 존재에 대한 부정으로서 즉자적 존재 외부에 자신을 구성한다. 따라서 의식은 정태적이지 않으며 철저하게 시간적인데, 그 이유는 의식이 "시간성 안에 열정적으로 참여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의식은 그 탈자성과 시간성으로 인하여 실체적인 기초를 결여하고 있다.  대자적 존재가 결여하고 있는 것은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그것의 총체성을 구현하는 존재, 즉 즉자적 존재이다. 이런 이유로 사르트르는 의식이란 "비전체화된 전체성이요 연속적인 불연속성"이라고 설파했던 것이다. 이러한 의식은 그 비실체성과 투명성으로 인해서 불가피할 정도로 지향성을 지니는데, 그 이유는 위에서도 지적되었듯이 의식은 그 스스로 존재하기 위해 지향할 대상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지향성의 기초적 구조는 내적인 부정인데, 의식은 바로 이러한 부정을 통해서 그 자체 안에 잠재성을 정립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사르트르의 체계 안에서 의식의 지향성이란 대자적 존재가 즉자적 존재에 존재론적으로 의존하고 있음을 지시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사르트르에 의하면 지향성에 대한 분석을 통해서 드러나는 바 의식에 대하여 유일하게 가능한 존재는 "대상에 대해서 계시적 직관이어야 하는 명백한 의무를 지니며, 계시하는 직관은 계시되는 대상을 함축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의식은 그 무화의 행위를 통해서 세계를 드러내는 바로 그것이다.  윌프리드 데산(Wilfrid Desan)은 이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대자적 존재는 반성 이전에도 이미 즉자적 존재를 함축한다.  간단히 말해서, 인간의 의식이 존재하는 순간 세계도 함께 존재한며, 의식은 진정한 반성을 수행하지 않고서도 이를 알고 있다.  존재론적 무게의 전체는 즉자적 존재의 편에 실려 있으며, 따라 서 대자적 존재는 즉자적 존재의 공허 이외의 다름아니다.

   따라서 의식은 즉자적 존재로부터 그 자체를 무화하는 행위를 통해서 세계와 결속된다.  사르트르는 의식과 세계의 이러한 관계의 두 축을 "초현상적"이라고 묘사했다.  이를 통해 그가 의미하는 바는 한편으로는 의식은 그 자체로서 그 자체에게 현시하는 행위, 특히 반성에 대해서 독립적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가 의식하는 대상은 그 자체로서 자율적이며 단순히 의식에 의해서 구성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역으로 대상 사물들이 이해되는 방식은 인간의 역동적인 의식의 지향화 작용에 대해서 결정적으로 상대적이라는 것이다.  사르트르가 "계시하는 직관은 계시되는 대상을 함축한다"고 했을 때, 그는 주관성이란 그 자체로서는 어떠한 객관적인 것도 구성할 수 없으며, 따라서 대상성은 독립적으로 존재하기 때문에 주관성에 이러한 방식으로 계시되려면 그렇게 되어야 마땅하다는 것을 의미하고자 했다.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의식에게 드러나는 세계란 즉자적 존재에게는 주어지지 않는 의미들의 복합적인 체계일 뿐인 것이다.
     이제 우리는 사르트르에 있어서 의식이 자아에 대해서 지니는 관계에 대해서 분석할 수 있는 단계에 이르렀다.  그에 의하면 의식은 그 자발성을 억제하고 족쇄지으려 하며, 이러한 시도를 통해서 반성을 일으킨다: "그 자체의 외부에서 그 자체를 상실했던 대자적 존재는 반성을 통해서 그 자신의 존재 안에 그 자체를 집어 넣으려 한다."  이미 지적했던 바와 같이, 반성의 분리성에 의해서 의식에게 이중성이 부여되는데, 반성되지 않은 의식이라는 일차적 단계와 반성하는 의식이라는 이차적 단계의 이중구조가 그것이다.  이러한 구분을 바탕으로 사르트르는 자아에 대한 다소 명백한 논의를 전개한다.  "자아의 초월"이라는 그의 초기 논문에서 사르트르는 자아는 대자적 존재의 영역에 속하지 않는다는 것을 입증하고자 했다.  그는 말하기를:

'나'라는 것은 구체적인 계기라든지 나의 실제적 의식의 소멸가능한 구조로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와는 반대로 그것은 그러한 의식을 넘어서서 그것의 항존성을 확증한다.   . . .   '나'의 존재형태는 의식의 그것보다는 영구불변적인 진리의 그것에 더욱 가깝다.

   여기에서 자아는 반성의 세계에서 최종적인 대상으로 등장한다. 자아는 반성을 통해서 상태, 행위, 경향 등과 같은 심리적인 대상들을 항구적으로 종합하는 초월적 대상으로 나타난다. 다시 말하면 의식이 반성을 통해서 의식 자체의 자발성을 와해시키려고 함에 따라 자아는 의식의 대상으로 등장하게 된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자면 이러한 자아는 유사대상이라고 불리워야 하는데, 그 이유는 바로 의식이 취하고 있는 바의 대상으로서의 자아가 의식과는 특별히 친밀한 관계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즉, 사르트르에게 있어서는 의식의 배후에 자아가 있지 않다.  왜냐하면 자아란 바로 의식에 의해 구성되거나 반성의 심화작용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자아는 의식 안에 초월적인 즉자로, 그리고 인간세계에서 하나의 실존체로 나타나지만 의식의 본성으로 나타나지는 않는다."  
   이제 사르트르는 왜 자아가 의식 안에나 배후에 있을 수 없는가에 관해서 논의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그에 의하면 자아가 의식 안에나 배후에 위치한다면 의식의 자유가 지니는 투명성을 파괴하게 되는데, 그 이유는 그렇게 되면 자아는 의식을 구성하거나 지배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사르트르의 이와 같은 자아이해는 비록 의식이 반성의 차원에서 인격화-개별화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자아의 존재 때문은 아니라는 점을 명백히 한다.  어떤 존재를 근본적으로 인격화-개별화하는 것은 사르트르에 의하면 단지 그러한 인격적 개별성의 신호일 뿐인 자아를 지니고 있는가의 여부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전반성적 의식이 그 자체에게 자체를 현전시킨다는 사실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르트르는 다음과 같이 갈파했다:
우리는 대자적 존재가 순수하고 단순한 "무인격적" 관조라고 결론지을 필요는 없다.  그러나 자아는 그것없이는 무인격적 단계에 머무를 수 밖에 없었으나 그것으로 인하여 그런 단계를 벗어나게 된, 인격화의 기능을 지닌 의식의 축은 더욱 아니다.  이와는 반대로 자아가 일정한 조건 아래에서 의식의 자기성의 초월적 현상으로 등장하도록 허용해 주는 것이 바로 그러한 근본적 자기성을 지닌 의식인 것이다.    

   지금까지의 논의에 근거해 보면 자아는 단지 반성의 차원에서만 정체규명가능한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전반성적 의식은 무인격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는가? 또한 의식의 반성되지 않은 차원에서는 자아가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는 것은 과연 타당한가? "자아의 초월"이라는 그의 논문에서의 설명에 의하면, 이러한 질문은 긍정적으로 답해질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선험적 의식은 무인격적 자발성이다.  그러한 의식은 그 앞에 어떠한 사물을 상정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매 순간에 그 존재를 결정적으로 구성한다.  따라서  우리의 매순간마다의 의식활동은 우리들에게 무로부터의 창조임을 드러내어 준다.  이 창조는 새로운 배열이 아니라 새로운 존재이다.

   비록 사르트르가 후기에 의식의 전반성적 영역에서도 자아의 등장이 확실하다고 인정하려고 했지만 그것은 자아의 환영, 즉 공허한 개념일 뿐이었던 것이다.  그에게 있어서 자아는 의식의 본래적 구조의 부분이 아니라 반성적 의식의 끊임없이 새로와지는 흐름으로부터 성장해 나오는 것임은 의심할 나위없이 분명하다.  이러한 구도 안에서 전반성적 의식은 데카르트의 코기토로 하여금 인간실존 전체를 포괄할 수 있도록 확장하는 수단으로 간주된다.  
   지금까지 논의된 바와 같이, 반성적 코기토와 전반성적 코기토의 통일체로서의 의식은 실체라는 개념에 대한 거부라는 의미에서 실존을 지칭한다고 하겠다.  의식은 그것이 전반성적 차원에서 인식하는 바의 대상이 아니라는 것을 인식하며, 따라서 반성적 의식의 산물로서 자아라고 불리우는 대상은 그것을 즉각적으로 인식하도록 되어 있는 의식과는 멀리 떨어져 있어야 한다. 더 나아가서 의식은 그것에 대해 외적인 어떠한 것에 의해서도 결정되어지는 것으로 간주될 수 없다. 의식은 "전적으로 공허이기 때문에 (왜냐하면 전 세계는 그 밖에 있기 때문에) 순수한 현전"이라 할 것이다. 이 시점에서 우리는 주-객 구도와 관련된 사르트르의 의식개념을 추적할 수 있을 것인데, 다음 절에서 이를 논의하고자 한다.


IV. 존재와 의식의 관계:
훗설과 사르트르의 대조적 관점 비판

   훗설의 경우 의식이 어떤 대상에 관한 의식이라면, 그리고 반성이 의식에 대한 의식이라면, 어떠한 반성에 앞서서 반드시 대상에 관한 의식이 선행되어야 한다. 따라서 현상학이 비록 반성과 함께 시작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관심하는 대상은 반성에 앞서 의식에 현전하며, 그러한 대상이 이해되려면 전반성적 의식이야말로 대상이 우선적으로 놓여지는 장으로 파악되어야 한다. 따라서 훗설에게 있어서 자아는 대상 세계 안에 위치하지 않는다.  그러나 여기에서 주시해야 할 점은 자아가 역시 현상학적 세계에도 있지 않으며, 오히려 자아는 그 자체 안에 현상학적 세계를 산출하고 구성한다는 점이다.
   그러나 사르트르에게 있어서는 상황이 전혀 다르다. 왜냐하면 그는 훗설이 자아 안에 세계를 정초하기 보다는 세계 안에 자아를 정초하면서 자아의 실체성을 실체의 범주로서가 아니라 의식세계의 실체적인 담지자로서 파악하고 있다고 보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사르트르는 훗설의 선험적 자아를 경험적 자아의 불필요한 복제로 규정하고 이를 거부한다.  사르트르는 선험적 자아를 설정하지 않고서도 의식을 묘사하고 설명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반면에, 훗설은 그 정반대의 입장을 취한다. 더 나아가서 사르트르는 훗설의 선험적 자아를 "호수 바닥에 있는 조약돌" 같은 것이라고 경멸적으로 비난했다. 선험적 자아에 대한 사르트르의 태도는 다음의 인용구에 명백히 드러난다:


'나는 생각한다'에서의 '나'가 명증적이거나 적절한 증거를 지니고 포착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은 너무도 명백하다.  그 증거는 명증적인 것이 아닌데, 그 이유는 '나'라고 말함으로써 우리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 이상의 것을 확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그 증거는 적절하지도 않은데, 그 이유는 '나'란 그 내용이 새삼스럽게 드러나야 하는 불투명한 실재이기 때문이다.        

   이 인용구가 보여주듯이 훗설의 선험적 자아에 대한 사르트르의 강력한 거부의 주요 동기는 의식에 대한 사르트르 자신의 과격한 실재론적 해석에서 찾을 수도 있다.  사르트르에게 있어서 자아는 근원적인 자발성을 결여하고 있기 때문에, 의식이 자아와 밀접하게 엉켜 있다면 기껏해야 제한된 자발성일 뿐이다.  그러나 그는 의식의 무제한적 자발성을 보존하고자 했으며, 이러한 이유로 의식을 자아로부터 격리시키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에게 있어서 의식은 선험적 자아로부터 분리되면서 무인격적 자발성이 된다. 이 문제에 대한 훗설의 논의는 자아와 의식의 필연적인 연합의 원리를 설정할 목적을 지니고 행해지는데, 사르트르에 의하면 그와 같은 필연적 연합의 기능은 단지 복수횡단적인 지향성들의 활동에 의해 성취될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자아의 초월"이라는 사르트르의 논문의 주제, 즉 "선험적 의식은 무인격적 자발성"이라는 주장은 훗설의 관점에서는 인위적인 것으로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평가가 사르트르의 의식에 관한 주장을 통채로 부당한 것으로 간주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의식의 배후에 선험적 자아(ego)가 없다고 하더라도 사르트르에게 있어서는 경험적 자기(self)라는 것이 있다.  즉, 의식은 전반성적 의식의 가능성들과 그 한계에 의해서 규정되어지는 유사통일성을 지니고 있으며, 따라서 이러한 유사통일성을 통해서 주체는 의식의 무관련적인 무화로부터 초래되는 철저한 허무주의를 피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서 "내재 안에서의 초월"이라는 훗설의 개념은 사르트르와의 차이를 결정적으로 드러내 주는 것이라 하겠다.  훗설은 자아가 의식의 지향성을 지배하거나 이와 상충되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 이 특수한 개념을 주장했다.  물론 종국적으로 종합적인 구성을 위해서 통합되어야 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주체적인 면과 대상적인 면 사이의 구별이 이루어지는 곳은 바로 지향적 의식의 영역 안에서이다.  이러한 현상학적 주장 안에는 종국적인 분석에서 우리가 주체와 대상 사이의 어떠한 실체적인 구별을 설정할 수 없다는 점이 함축되어 있다.  물질적인 대상이 주체에 속해 있는 방식과는 아주 다른 방식으로 주체성에 속해 있는 자아라는 개념은 이제 지향성이라는 개념과 전혀 대립되지 않는다.  그러나 훗설이 자아의 초월을 통해서 의미하는 바는 사르트르가 의식에 대해서 그러한 것과 동일한 정도로 교묘하면서도 모호하다.  
   지금까지 논의된 바와 같이 훗설과 사르트르에 대한 비교분석을 근거로 해서 우리는 다음과 같이 두 개의 다른 현상학적 관점을 추려낼 수 있는데, 하나는 반성에 상응하는 의식이 모든 행위에 전제되어 있다는 견해이고 다른 하나는 의식이 그 대상에 흡수된다는 입장이다. 비록 후자의 입장을 취하는 사르트르가 훗설에 있어서 지향적 대상의 존재론적 지위에 대해 비판을 제기했지만 엄밀하게 분석하자면 우리는 사르트르 안에서 이 두 관점들이 엉켜져 있음을 보게 된다.  실재적 영역과 지향적 영역에 대한 훗설의 구분으로부터 사르트르는 더 나아가서 대자적 의식과 즉자적 존재에 관한 구분으로 향해 갔다.  그럼으로써 의식은 존재하는 대상에 대해 대립적으로 서게 되었고, 존재와의 관계에서 다소 대상화되었다.  그러나 훗설에 있어서는 이와 대조적으로 의식이 그 대상을 준거적으로 지시하는 행위를 존재의 외적인 관계로 간주한다는 것은 부적절하고 무용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사르트르가 그의 존재론적 논의를 통해서 도달한 의식과 존재의 구별은 훗설에 있어서 의식의 실재적 영역과 지향적 영역 사이의 내적 구별과 정확히 상응하는 관계에 있다고 하겠다.  훗설에게 있어서 의식은 결국 존재인데 비해서 사르트르에게 있어서는 그 양자 사이의 존재론적 구별은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


V. 관계적 개체성과 자유의 가능성

   이제 우리는 본 고에서의 종국적 관심을 다시금 상기해야 할 때에 이르렀다.  즉, 우리는 근세에 부각되었던 인간의 주체성이 그 주도권적 선험성의 매력에 이끌려 보편성에로만 치달음으로써 개별적 이질성을 무차별적으로 난도질해왔던 억압적 비극의 역사에 대한 회고와 아울러 현대에서 시도된 항거들의 적절성을 검토함으로써 이질적 개별성이 그 엄연한 지위를 확보할 수 있는 가능성을 구축하고자 한다.  말하자면 우리의 관건은 훗설이나 사르트르에 대한 정확한(?) 이해 따위가 아니라 보편성-동일성-획일성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함께 같음'의 족쇄로부터 개별성-이질성-다양성으로 이어지는 '서로 다름'의/에로의 해방을 통한 진정한 자유를 추구하는 것이며, 이를 위하여 다름의 존재론적 동격성을 확보하는 일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과제가 왜 요구되었는가?  이것은 앞절들의 논의가 암시하듯이 주-객 관계[앎]와 구별되어야 할 자-타 관계[있음]가 동일한 것인양 혼동을 일으켜왔던 그간의 역사에서 그 시원적 이유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기에 우리의 관심은 이러한 질문으로 표현될 수 있다: "과연 주-객 관계를 넘어선 자-타 관계가 가능한가?  다시 말하면, 자아에 대하여 타자가 종속적 객체성을 넘어서 동격적 타자성을 유지할 수 있는가?"  이러한 문제야말로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아직 무르익지 못하고 있는 개인의 인격과 인권의 존중, 그리고 아직 익숙하지 못한 개별적 다양성에 대한 감내를 통한 참다운 인간 해방의 실현가능성을 위해 수행해야 할 과제라 아니할 수 없다.  이는 오늘날 탈근대적 해체주의의 흐름에 몰개성적으로 휩쓸리면서 또한 퍼져가는 통속적 개별성에 대한 무조건적 예찬의 분위기에 무반성적으로 편승하는 생활태도에 대한 진단과 처방의 의미도 지니고 있음으로 해서 그 현실적 의의를 찾을 수 있다.
   이런 목적에 비추어 앞절들의 논의를 바탕으로 위의 과제를 간략히 검토해 보자.  우선 훗설에 의하면 존재는 의식에 의해 구성되고, 따라서 선험적 자아에 의해서 구성된 현상에 대한 체험 안에서 주체와 대상의 실체적인 구별이란 없다.  그렇다면 이러한 선험적 자아에 있어서 타자는 어떠한 위치를 지니는가?  즉, 훗설에게서 선포된 선험적 자아에서의 존재와 의식의 동일성이라는 구도에서 뭇 인간들의 개별적 이질성은 어떠한 의미와 가치를 지니는가?  그런데 훗설에 의하면 자아가 세계를 구성한다는 것은 자아의 세계 안에 초월적으로 포함되어 있는 타자들의 구성까지 포괄한다.  타자들은 본래 가장 초월적인 체험 내용들인데, 왜냐하면 그의 고유한 생활세계에 있는 타자도 마찬가지로 하나의 순수자아, 즉 그에 있어서 타자에 속하고 있는 초월성들이 원초적으로 구성되어 있고, 그 속에서 나 자신 또한 그 타자의 타자로서 구성되어 있는 자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로 이러한 이유로 나의 세계 안에서 함께 구성된 타자는 현상학적 구성에 있어서 이중적으로 초월적이다.  따라서 나에게 고유한 것을 해명하는 것 이외에는 타자에게 달리 접근할 수 없다.  그러기에 육체를 소유한 어떤 것이 나에 대하여 하나의 다른 자아의 의미를 갖는다면 그것은 단지 나에게 고유한 것의 의미를 지향적 지시의 맥락 안에서 체계적으로 해석하는 근거 위에서만이다.  말하자면 선험적 자아에게 타자는 하나의 변형된 자아일 뿐이며 이는 반복가능한 무명성과 비개별성을 본성으로 한다.  말이 좋아 존재와 의식의 동일성이다.  결국 훗설에게 있어서는 그의 순수 자아론의 선험적 유아론을 상호주관성에 관한 이론을 통해서 극복하려고 시도했지만 타자의 동위근원성을 부정함으로써 그 시도의 한계를 여실히 드러내었다.  이를 우리는 자아론적 선험주의(egological transcendentalism)라고 부를 수 있는데, 자아를 우선적으로 정초하고 타자를 근본적으로 "또 다른 자아" 즉, 변형된 자아로 설정함으로써 상호주관적 관계가 이루어진다는 입장으로서 여기에서 자아가 만나는 것은 삼인칭의 타자이며 이 타자는 자아에 대해서 의존적이고 매개적일 수 밖에 없다.
   그렇다면 다른 한편 사르트르는 어떠한가?  사르트르는 그의 <실존주의>라는 저서에서 실존주의적 인본주의는 인간의 주체성의 구성적 요소로서의 초월성과 인간 실존의 근본 구조로서의 내재성의 본유적인 연관을 향하고 있음을 역설하였는 바 이는 인간이 그 자체로서 자기완결적 폐쇄성을 지니는 것이 아니라 인간적 우주 안에서 항상 개방적으로 현전하고 있음을 지시한다.  이러한 기본적 규정으로부터 더 나아가서 사르트르는 자기원인적 존재에 대한 존재론적 파악을 통해서 존재의 이상적 종합의 가능성을 정초하고자 한다.  그러나 인식주체와 별개로 인식대상의 존재론적 지위를 소박하게 고수하려는 거칠은 자연주의적 태도와는 구별되는 실재론의 견지에서 본다면 지향성에 대한 분석에서 표현된 바 의식과 존재에 대한 사르트르의 설명을 수용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  다시 말하면 의식에 대한 존재론적 분석에서 사용된 사르트르의 현상학적 방법은 전반성적 의식의 구조와 의미에 준거하여 이를 반성적으로 조명하려는 목적을 지니고 있었으며, 이는 더욱 즉각적으로 확보될 수 있는 현상들을 일상적으로 재현함으로써 근본적인 현상들을 직관하고 기술하려는 의도를 포함하고 있는 것이었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사르트르는 본질에 관한 현상주의와 실존에 관한 실재론의 결합이라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 가장 적절한 묘사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구성한 이상적 종합은 존재론적 분석을 넘어서며 그의 현상학적 존재론에 바탕한 이상적 구성은 오히려 인간 실존을 위한 진정한 분석에 결정적 한계로 작용한다.  말하자면 훗설에 비해서 현상학적 환원에 포착되지 않을 만큼 타자의 이질성과 즉각성을 명백하게 인정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타자는 나에게 세계를 매개해 주기 보다는 나를 나 자신에게 매개해 주며, 자아의 능동적인 구성적 내재화에 앞서 타자와의 만남의 수동성을 부각시킴으로써 훗설과의 확실한 차이를 보여 주지만 대자를 의식과 동일시한다든지 의식의 내부성을 강조한다든지, 또는 상호주관성이란 내적 부정이라고 해석하는 것 등은 역시 사르트르에게 있어서도 자아론적 선험주의가 지배적인 경향임을 보여주는 명백한 예증이라고 하겠다.
   결국 존재와 의식의 관계에 대한 훗설과 사르트르의 그러한 대조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공히 인간주체의 개별성, 즉 타자의 즉각적 이질성이 살아남을 수 있는 여지를 만족스럽게 찾아 주지 못했다.  훗설의 선험적 자아란 애시당초 노골적으로 자아에로의 환원방식을 취하는 것이어서 기대할 수 없는 것이라 하더라도 사르트르의 경우에는 "타인은 지옥"이라고 절규할 만큼 그 이질성에 대한 절감에도 불구하고, 즉 즉자적 존재에 대한 실재론적 설정에도 불구하고, 비실체화적 사유에 충실한 나머지 의식을 철저히 대자적으로 파악함으로써 내부적인 것으로 간주했기 때문에 자아론적 선험주의의 잔재를 온전히 극복하지 못했다.
   그렇다면 집요하게 도사리고 있는 인간의 원초적 본능과도 같은 자기중심주의를 극복할 수 있는 길은 없는가?  여기에서 우리는 상호동격적 대화주의(mutual dialogicalism)라는 한 대안을 모색하고자 한다.  이것은  "너"와의 만남으로부터 비로소 그리고 동시에 "나"가 설정되고 이러한 만남은 원초적 관계(relatio)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입장이며, 여기에서 자아가 만나는 것은 이인칭의 너로서  상호관계의 즉각성과 호혜성이 강조된다.  이 입장에 속하는 부버(Martin Buber)를 비롯한 사람들은 특히 자아론적 선험주의가 전제하고 있는 자아의 대상구성적 기능에 반기를 들면서 인지적 주-객 구분 또는 "나-그것"의 관계와 자아의 의도로부터 도출되지 않는 사이(zwischen) 영역에서 만나는 "나-너"의 상호인격적 만남은 구별되어야 함을 주장한다.   즉, 전자는 주관성의 영역을 근거로 지배와 종속의 관계로 연결되어 있다면 후자는 동위근원성과 참여의 온전한 상호성에 근간한 즉각적 결속이라는 것이다.   말하자면 주-객관계를 넘어서는 자-타 관계는 아-여 관계에서 그 실현가능성을 노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입장에서는 의식의 지향성이 정초하고 있는 주관성의 영역 저변에 흐르는 언어가 바로 "너"의 처소임을 밝힌다. 따라서 "나-그것"의 관계에서 과거가 지배적인 시제인 것과는 달리 "나-너"의 대화적 만남은 전적으로 현재에서 이루어진다.   만남의 언어적 매개에 근거해서 상호동격적 대화주의는 더 이상 "너"가 자아의 지향적 대상이 아닐 뿐 아니라 "나-너"의 만남이 주체의 인식구성적 행위의 영역이 아님을 분명히 하는 단계를 거쳐서 자아론적 선험주의로부터의 차별화를 이룬다.   
   그러나 자아론적 선험주의와 상호동격적 대화주의가 그렇게도 엄격하게 이분화되기만 한 것으로 간주하는 데에는 반론의 여지가 있을 수 있다.   오히려 양자 사이에 상호관통성이 있을 수 있으며, 특히 하이데거의 기초존재론과 부버의 관계존재론은 그러한 가능성을 시사해 준다.   왜냐하면 그 선험주의적 배경에도 불구하고 하이데거는 그의 기초존재론에서 훗설의 현상학에서의 주관성의 지향적 구성과 정초적 역할에 대해서 집요한 비판을 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언어적 대화로 드러나는 관계로부터 나와 너가 파생된다는 대화주의의 기본적 주장에도 불구하고 부버의 "나-너" 와 "나-그것"은 공히 자아에 정초한 "태도들"이라는 훗설적 비판을 면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 퇴니슨은 부버는 결국 '주관성의 영역'으로부터의 추상화를 통해서 '관계의 영역'을 포착했을 뿐이라고 비판한다.  더 나아가 과연 상호동격성, 즉 타자의 즉각적 이질성이라는 것이 어떠한 지평 위에서 변형되지 않고 전개될 수 있는가라는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고 할 때 이는 곧 인간의 자기부정의 가능성과 현실성에 직결되는 문제이어서 아무런 저항없이 대안으로 등장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이렇게 상호동격적 대화주의를 비판하는 것이 자아론적 선험주의를 부분적으로나마 받아들이는 것으로 이어지기 보다는 앞서 지적했듯이 양 구도 사이의 잠정적 화해를 시도하는 방향으로 전개될 수 있다.  즉, 관계의 시초의 근원성은 선험주의에, 그리고 완성되어야 할 목표의 근원성은 대화주의에 돌림으로써 나의 개인적인 자아가 출발점이며 만남으로부터 개진되는 자아가 도달할 목표점이라고 설정하는 것이다. 이러한 잠정적 구도를 거쳐 나의 중심성을 포기하고 주체지향적 세계관을 해체함으로써만 타자와의 진정한 만남을 통한 관계적 개체성 구현이 가능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타자는 분명히 나에 대해서 너라는 '장애'로 등장해야 되는데, 말하자면 모든 대상에 대한 관점의 근거로서의 나를 주체로 설정하려는 경향에 대해서 타자가 원리적으로 장애로 등장할 때 비로소 관계적 개체성을 통한 잉여지대의 본격적 개시가 이루어지며, 이 잉여지대야말로 바로 보편적 본질의 동일성이 지니는 획일성의 족쇄로부터의 해방이 선포되는 다름의 자리라 할 것이다.  한 마디로, 다름이 곧 자유의 지평이며 자유의 실현가능성의 터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터전 밑을 파고 드는 질문을 차마 덮어 둘 수 없어서 간단히 첨부하는 것으로 본 소고를 마감하고 후일의 과제로 넘기고자 한다:  "인간의 개별적 이질성은, 그래서 타자의 타자성은, 더 나아가서 자-타의 동격관계적 다름의 자유는 과연 자아의 해석 이전에 보장 또는 허용될 수 있는가?"

http://green.skhu.ac.kr/~c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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